메소포타미아의 자료가 구약성서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예 연구

 

 

이광희

 

 

 

 

족장 시대

구약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조상의 고향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위치한 우르였다(창 11:28, 15:7). 아브라함의 생활무대였던 우르(Ur)는 세계 최고 고대 문명 가운데 가운데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였다. 수메르 문명은 주전 4000년대부터 시작되어 주전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문명으로서,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최초로 문자를 사용하였고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법전인 『우르남무 법전』(주전 21세기)을 제정하였고, 또한 지구라트와 같은 장엄한 건축물을 세우는 등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였다. 그 문화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전들과 기타 다른 건물들 - 장식된 기둥. 전원 풍경을 묘사한 정교한 모자이크.
정교하게 제작된 구리 숫소 유물 발견.
우르의 왕실 무덤 - 이 지역에는 없는 석회석 벽돌로 건축되었으며, 특히 숩아드(Shub-ad)라고 확인된 여자의 무덤에서는 금으로 만든 잔이 출토되었다. 사체의 머리는 금과 은으로 장식되었으며, 준보석급 돌들로 꾸며져 있었다.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읽기, 쓰기, 산수, 지리 등을 학습하였으며, 아브라함 당시 일반 시민들의 주택은 현재 바그다드의 하류층 사람들의 집보다 더 좋게 지어졌다. 우르를 발굴했던 울리(Sir. Leonard Woolley) 경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그는 한 위대한 도시의 시민이었으며 고대의 고도로 조직된 문명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우르의 종말 - 주전 1.950년경 한창 번영 중이던 우르 제3대 왕조는 북쪽에서부터 내려온 아모리 족의 침략과 엘람족의 약탈로 종말을 맞게 되었다. 아브라함 일가의 하란 이주는 이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고대 문명 발상지의 중심에 살던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우르를 떠나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상업 도시였던 하란을 경유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다. 아브라함이 고대시대에 물질 문명의 면에서는 낙후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나안 땅으로 이주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창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게 되고, 이삭은 야곱을 낳게 됩니다. 야곱은 12 아들을 낳게 되며, 야곱의 12 아들은 곧 이스라엘 12 지파의 조상이 됩니다(야곱의 12 아들의 이름, 곧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벤야민).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의 12 아들까지의 시대를 이스라엘 역사에서 `족장 시대'라고 부릅니다. 족장 시대가 연대적으로 어느 때인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족장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는 연대에 관하여 구체적인 언급을 전혀 하고 있지 않기 떄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고대 근동 세계에 대한 역사적, 고고학적 연구 결과 족장 시대는 `중기 청동기 시대 제 2 기'(주전 약 2000-1550년)시대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가나안 땅에 정착했던 야곱의 가족들은 그곳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비옥한 땅을 찾아 이집트의 델타 지역(구약에서는 "고센 땅"이라고 부른다)으로 이주하였다. 구약성경에는 야곱 가족이 `고센 땅'으로 이주했던 때가 언제였는가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 때를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 시대'와 연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힉소스 시대'(주전 약 1700-1550년)는 아세아 지역으로부터 이집트로 침투해 들어간 `힉소스'(`이방의 통치자'라는 뜻임)들이 말과 병거를 사용하여 이집트의 14대 왕조를 무너뜨리고, 제국을 장악했던 시대였다. 애굽 역사에서 처음으로 말과 병거를 사용하였던 힉소스들은 델타 지역에 새로운 도시 `아바리스'를 건설하여 수도를 삼았다.
이방의 통치자 힉소스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시대에는 요셉과 같은 가나안 출신의 사람이 이집트 조정에서 고관직에 오르는 가능성이 있었고, 또 `요셉 이야기'(창 37-50장)의 무대가 `고센 땅'(델타 지역)이며, 또한 이 이야기 안에 구약에서는 처음으로 말이 끄는 "수레"가 등장한다는 것(창 41:43, 45:19) 등은 야곱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한 것이 힉소스 시대였다고 주장되는 근거들이 되기도 합니다. 약 150년간에 걸친 힉소스의 이집트 통치는 이집트 18대 왕조의 아모세 왕이 등장하여 힉소스 왕조를 고센 땅으로부터 추방함으로써 끝을 맺게 되었다(주전 약 1550년). 당시의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 따르면, 힉소스 왕조가 추방당할 때, 많은 힉소스들은 고센 지역에 그대로 남아 있어 노예의 신분("아피루")으로 전락하였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약 250년이 지난 후, 이집트의 19대 왕조에 속하는 세티 1세(주전 약 1305-1290년)가 등장하였다. 그는 아세아 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아세아 지역과 가까운 델타 지역에 군사 비축 도시로서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였다. 그는 이 도시들을 건설하는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수많은 `아피루'들이 도시 건설에 투입되었다. `아피루'란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제일 하층 사람들을 통칭했던 말로서 전쟁 포로, 노예, 건축사업에 동원된 강제 노동자들이 이에 속하였다.
출애굽기 1장의 기록을 보면, 야곱의 후손은 이집트에 정착해서 그 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으며, 12 아들의 후손, 곧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아피루'들과 함께 비돔과 라암셋 도시를 건축하는데 강제 노동자로 동원되었다. 이때가 바로 세티 1세 시대로 보는데,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강대한 이집트 제국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혹독하고 절망적인 강제 노동의 상황에서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였다.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한 모세가 출현하였고, 모세의 영도 밑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의 땅, 이집트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출애굽을 경험하였다. 출애굽의 연대는 일반적으로 주전 13세기 초, 즉 1290년경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출애굽 때 이집트의 바로(고대 이집트 왕을 지칭하는 명칭)는 세티 1세의 뒤를 이은 라암셋 2세(주전 1290-1224년)였다.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은 이스라엘을 신앙의 공동체로서 결속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출애굽은 야곱의 12 아들의 후손만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12장 38절의 기록을 보면 "중다한 잡족"들도 출애굽 사건에 동참하였다. 여기서 "중다한 잡족"이란 이스라엘과 함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아피루'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모세의 영도 밑에서 출애굽할 때 혈통적인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함께 고난을 나누던 `아피루'들도 대거 출애굽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이들 `아피루'들도 출애굽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 들어옴으로써 모두가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다. 출애굽은 `해방된 아피루'들이 신앙의 공동체 `이스라엘'로 결속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향해 가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었다. 그곳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일찍이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이집트의 고센 땅(델타 지역)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생겨난 `지중해 해안길'(Via Maris)이었다. 이 `지중해 해안길'은 주전 2000년 이전부터 사용된 통로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애굽과 팔레스틴 땅을 잇는 가장 중요한 육로로써 사용되고 있다(구약성경은 이 길을 "불레셋사람의 땅의 길"이라고 부른다. 출 13:17).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데 가장 빠른 길이 되는 `지중해 해안길'을 택하지 않고, 우회하여 시내 반도를 경유하는 가장 멀고, 가장 험한 길을 택하였다. 그 이유는 `지중해 해안길'은 이집트와 아세아를 잇는 중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그곳에는 이집트의 변경 수비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의 땅, 애굽을 벗어난 후 그들을 가로막았던 "바다"를 기적적으로 건너는 경험을 하였다. 구약이 기록된 히브리어로는 이 "바다"를 `얌수프'(Yam Suph, 즉 갈대 바다)라고 하였고, 히브리 구약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에는 "홍해"(eruthra thalassa)라고 번역하였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건넜던 "바다"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바다"까지 도달하는데 경유한 지역들, 즉 숙곳, 에담, 믹돌, 비하히롯 등의 지명이 아직까지 모두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미확인 지명들이기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바다"를 건너 추격하는 애굽 군대로부터 구출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내산 지역과 가데스 바네아에서 오랫동안 체류한 후, 요단 강 동편 지역(구약은 "모압 평지"라고 부른다)으로 갔다. 모압 평지에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

 

 

가나안 정착

여호수아의 영도 밑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 『여호수아서』이다. 『여호수아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밑에서 3단계에 걸친 군사적인 승리를 통하여 전격적으로 가나안 땅 전체를 `정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제 1 단계는 모압 지역에서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단 강 계곡 지대에 있는 여리고를 정복하고, 북서쪽으로 진행하여 가까운 아이성을 정복하였다(여호수아 6-8장). 다음 제 2 단계는 가나안 땅 남쪽으로 진격하여 남부 지역의 다섯 도시 국가(예루살렘,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에글론)의 연합군과 싸워 승리하였다(여호수아 10장). 계속 여세를 몰아 남부 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의 남부 지역을 장악하였다. 다음 제 3 단계는 가나안 북부 지역의 정복이었다. 가나안 땅의 남부 지역을 정복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종단 북상하여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하솔 성을 점령하였다(여호수아 11장). 하솔 성은 가나안 땅의 북부 지역에서는 최대, 최강의 도시였다. 여호수아서의 기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솔 성을 점령함으로써 가나안 땅의 "온 땅을 다 취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여호수아 11:23). 이렇게 여호수아서의 기록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수아의 영도 밑에서 3단계에 걸친 단기간의 군사적 승리로써 온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복하였다고 하는 가나안의 도시이(예를 들면, 벧엘, 하솔, 라기스, 에글론, 드빌 등) 주전 13세기경에 불에 타서 파괴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는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기사를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의 기록은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이 책은 가나안 땅의 제일 중요한 중심 지역이 되는 중앙 지역의 `정복'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서 24장은 가나안 땅의 중앙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세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겜을 포함한 가나안 중앙 지역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점령한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여호수아서의 기록은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또한 가나안 `정복' 이후의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사사기를 보면, 아직도 가나안 정복이 다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사사기 1:1). 또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산지에서는 승리하였으나, 평지에서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우수한 무기인 철병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하지 못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사사기 1:9).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해 볼 때, 가나안 원주민과 비교하여 군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먼저 원주민들이 살지 않는 가나안 땅의 산악 지대에 거점을 확보하였고, 이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차츰 낮은 경작지대로 이주, 정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은 군사적인 정복과 함께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정착의 과정이 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협조를 받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도와준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여호수아 2장), 벧엘 성 안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를 가르쳐 준 벧엘 사람(사사기 1:22-26)들을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 중에서는 "해방된 아피루"들과 함께 가나안 기성 체제를 전복시켰던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 주전 1200년경에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완료되었고, 이로부터 `사사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주전 약 1200년) 왕정이 수립되기까지(주전 약 1020년)의 약 200년 동안의 기간을 `사사 시대'라고 부른다. 사사 시대는 여러 가지 점에서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징들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점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왕을 중심한 왕정 제도는 보편적인 정치 제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상의 왕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천상의 왕'으로서 그들을 통치하신다고 하는 `신정 공동체'를 고집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기드온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했을 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거부하였고(사사기 8:22-23), 아비멜렉에 의한 왕정의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사사기 9장).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은 왕정 제도를 수용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대에 이스라엘 12지파를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킨 것은 왕권과 같은 정치 권력이 아니었다. 오직 공통된 신앙, 곧 `여호와 신앙'(Yahwism)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로 결속되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유일신 신앙은 이스라엘의 공통된 신앙이었고, 이 공통의 여호와 신앙만이 이스라엘을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형성시키는 결속력이 되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공통된 신앙의 상징은 "법궤"였다. 법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나무상자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고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종교적인 상징이 법궤였다. 따라서 법궤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구심점이 되었고, 법궤가 있는 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는 중앙 성소가 되었다.
사사 시대에 또 하나의 특징은 이스라엘에 정규 군대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앙 집권적인 왕이 없었으므로 군대를 조직할 수 없었고, 위기의 상황에서는 민병들이 동원되어 공동의 적을 방어하였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사사'들이었다. 사사는 히브리어로 `쇼펫'(Shophet)으로서 `재판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들의 모습은 위기의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구원자"로서 특별한 능력(카리스마)의 소유자들이었다. 사사기에는 모두 12명의 사사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는 드보라와 같이 여자 사사도 있었다(사사기 4-5장). 정규 군대가 없던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당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외적의 침입이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은 모압, 암몬, 미디안, 가나안 원주민들의 끊임없는 공격을 당하였고, 그들에게 패배하여 지배를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가장 큰 위협적인 존재는 불레셋(Philistines)이었다. 불레셋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 생활을 시작했던 때와 거의 동시대(주전 약 1200년)에 지중해로부터 배를 타고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해서 지중해 해안 지역에 정착한 `해양족'들이었다. 불레셋은 지중해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왔을 때 이미 철기를 사용하였다. 철기를 사용하였던 불레셋은 그 당시까지 아직 청동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물질 문명의 면에서 한 단계 앞서 있었다. 이들은 철기의 사용을 독점하였고, 철을 사용하여 가나안 땅에서 창과 칼과 같은 철제 무기를 생산하였다(사무엘 상 13:19-23, 17:7).
이들 불레셋들은 주전 13세기 초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을 때 지중해 해안 지역의 다섯 도시를 중심으로 정착하였다(불레셋의 다섯 도시는 아스돗, 아스글론, 가사, 에클론, 가드였다). 불레셋 사람들이 정착했던 가나안 해안 지역을 "불레셋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으로 "필리스티아"(Philistia)라고 부릅니다. 불레셋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필리스티아를 벗어나 차츰 가나안 땅 내륙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그렇게 되자 가나안 땅에 이미 정착해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내륙으로 밀고 들어오는 불레셋인 사이에는 자연히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구약성경에서는 사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삼손 이야기로부터 불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의 알력과 충돌을 기록하고 있다(삿 13-16장).
무기면에서 우세한 상황에 있었던 불레셋과 이들의 내륙 진출을 저지하려는 이스라엘 사이에 무력 충돌은 사사 시대에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주전 1050년경 아벡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측은 불레셋에게 크게 참패했을 뿐만 아니라,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법궤까지도 그들에게 빼앗기고 마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왕정의 수립
아벡 전투에서 불레셋에게 법궤까지 빼앗기는 참패를 당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위기 의식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스라엘의 민병들은 불레셋의 우월한 군사력 앞에서 대단히 무력한 존재였고, 법궤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존재 자체에까지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정치적 위기의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왕정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중앙 집권적인 왕정을 수립하고, 정규 군대를 조직해서 효율적으로 불레셋을 방어하지 않으면 불레셋을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불레셋의 위협을 막아내는 방법으로서 이스라엘은 지상의 왕을 세우는 왕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위기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보다도 `유능한 군사적 지도자'로서의 왕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적 왕권을 갖는 왕이 아니라 제한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왕정을 원하였다. 따라서 강한 지파보다는 약한 지파 출신의 사람이 적합하였다. 벤야민 지파 출신의 사울은 몇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약소한 벤야민 지파의 무명의 가문 출신으로서 지파나 가문을 배경으로 왕권의 확장을 시도할 위험이 적은 인물이었다(사무엘 상 9:21). 또한 그는 유능한 군사적인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을 불레셋의 위기로부터 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사무엘 상 11장).

 

 

엘 아마르나 서신들(El Amarna Letters)

약 300개의 토판을 담고 있는 엘 아마르나 서신들은 한 이집트 농부 여인에 의해 1887년에 발견되었다. 그녀는 그 토판들을 1달러에 팔아버렸다. 결국 540개의 토판들이 발굴되어 그 가운데 현재까지 378개의 토판들이 출간되었다. 엘 아마르나(아케나톤)는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텝 4세(아케나톤)가 카이로에서 약 150마일 남쪽에 건설했던 수도였다. 그 서신들은 파라오 아문홋페 3세(Amunhotpe III; 1402-1363 B.C.)와 아케나톤(1363-1347 B.C.)에게 보내진 외교문서로서 팔레스틴 도시국가에 임명되었던 총독(governors)에 의해 작성된 것들이다(Matthew, 77).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서신들은 크게 두 종류로 구별된다. 44개정도의 첫 번째 부류의 서신들은 이집트와 고대 근동의 강대국 사이에 오간 서신들이다. 아마르나 서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두 번째 부류는 가나안과 북부 시리아에 있는 봉건제국들이 이집트와 외교서신을 교류한 것들이다. 아마르나 서신의 대부분은 가나안과 이집트 서기관들에 의해 아카디아어의 방언으로. 그러나 그 서신들은 가나안의 어휘들과 표현들을 많이 담고 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엘 아마르나 편지들은 쐐기문자(설형문자)로 기록된 유일한 비문이다. 따라서 이집트의 파라오와 가나안의 봉건제후들은 서로 자국의 언어가 아닌 외국어로 외교문서를 교환했다는 말이 된다. 아카드어는 기원전 14세기에 국제어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는 아카드어를 이용해 서로 교통할 수 있었었다(Na'aman, 174-175). 이집트와 서신을 교환했던 근동의 강대국에는 바벨론, 앗시리아, 미타니, 아르자와(Arzawa), 알라쉬아(Alashia), 그리고 힛타이트의 하티제국이 포함된다. 이집트는 이들에게 양질의 금을 제공하였고 다른 나라들은 그에 버금가는 선물을 제공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의 교역은 육로나 해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모든 왕들은 자국을 방문하는 상인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다음은 한 바벨론 왕이 자기 신하가 한나톤(Hannathon)에서 물건을 강탈당하고 살해당하지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편지를 보낸 내용이다(EA 8:25-33). 가나안은 당신의 영토이며 그 땅의 왕들은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의 땅에서 물건을 강탈당했습니다. 그들을 조사해서 그들이 취한 물건값을 되돌려주시기 바랍니다. 내 종들을 살해한 그들을 징벌하시고 그들의 피로 복수하여 주십시오. 만약 당신께서 이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또다시 그러한 일을 자행할 것이며, 다시 나의 낙타나 심지어는 당신의 전령들을 죽임으로써 우리의 관계를 해칠 것입니다(Na'aman, 175).
    이집트와 가나안의 봉건제후 사이에 오간 외교서신들은 제후들이 보낸 겸손한 어투의 편지와 파라오의 명령조로 된 근엄한 편지가 서로 대조적인 점이 특징이다. 이집트는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1490-1436)가 가나안을 점령한 후에 그곳을 이집트의 속주로 건설하였다. 아마르나 서신들은 당시 이집트의 가나안 지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는 가나안을 여섯 도시로 연결하여 요새화 하였다. 그 가운데 네 도시는 해안가를 따라 있었는데 남쪽의 가자(Gaza)와 욥바(Joppa), 북쪽의 울라사(Uallasa)와 수무르(Sumur)이다. 다른 두 도시로는 이들과 교차로를 이루는 북부 팔레스틴의 벳산(Beth-Shean)과 레바논의 베카계곡(Beqa Valley) 남부에 위치한 쿠미디(Kumidi)가 있다. 이집트 군사는 대략 50-300명 정도의 단위로 요새화 된 도시와 그 밖의 요충지(예를 들면 예루살렘, 므깃도, 비블로스 등)에 배치되었다(Na'aman, 176-177).
마르나 서신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아피루(Apiru/Hapiru)에 대한 언급이다. 기원전 16세기에 가나안의 도시문화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 시기는 성벽들이 무너지고 어떤 지역은 사막화되는 시기로서, 도시문화가 유목과 약탈문화로 대치되면서 안전이 위협받는 시기였다. 고대근동의 문헌에 의하면 아마르나 서신에서 자주 거론되는 아피루들은 새로운 형태의 삶을 추구했던 떠돌이 집단으로 기술된다. 아마르나 서신에 의하면 그들은 가나안의 여러 도시에 흩어져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 "아피루"들은 대개 "이집트의 권위에 도전하는 무리"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아피루가 히브리인이라는 가정을 입증시켜줄 수 있는 언어학적 혹은 민족학적인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들은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배경을 이루는 팔레스틴에서의 격동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가나안의 여러 도시가 분할되어 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는 아마르나 서신의 증언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내용과 유사하다. 그러나 동시에 성서와는 달리 아마르나 서신에는 가나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모두 가나안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에, 성서는 그곳에서 활동했던 여러 민족 집단을 소개하고 있다. 이점에서 볼 때 아마르나 서신의 내용과 성서의 내용이 반드시 일치하고 있지는 않으며, 아피루들이 히브리인이라는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Na'aman, 179). 하지만 히브리인 역시 기원전 14세기에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용병으로 때로는 약탈세력으로 가나안을 위협했던 무리임을 감안할 때 양자사이의 관계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고대근동

 

지질학적구조

남북으로 뻗어있는 지괴산맥과 지구대는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시작하여 아라비아와 에집트 전역을 지난다.

 

강우량

신석기시대와 역사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강우량이 부족함; 북부지역은 유럽에서 불어오는 선풍형 폭풍우의 영향을 받아 우기가 겨울이 되며, 남단지역은 열대지방의 몬순성 장마권 외곽에 위치하여 여름이 우기가 됨; 우기의 집중호우는 심한 토양의 유실을 초래했기 때문에, 유수와 토양을 보존하기 위해 홍수를 조절하는 관개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비옥한 초생달지역

북부의 산맥으로부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페르샤만으로 흘러들어가기 전에 합쳐지며, 하도를 따라 비옥한 충적토를 퇴적시키고 하구(河口)에 대규모 습지를 조성하여 농작물재배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한다; 이 충적토를 보존하기 위해, (1)운하와제방시설의 축조를위한 기술이발달했으며, (2)장기간에걸친 수많은인력을 효과적으로이용하는 집약농업을발전시켰다. 문명의 발상지가 됨.

 

나일강의 선물

매년 7월과 10월 사이에 홍수가 범람하여, 풍부한 양의 진흙과 미사를 남겨 비옥한 토지를 형성함;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은 불규칙적으로 범람한 반면, 나일강은수위가 규칙적이고 예측가능했기 때문에, 나일강변 중심으로 집약농업을 위한 고밀도의 인구집중 지역을 형성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이 그 지역에 정교한 사회조직을 낳게 했으며, 문명의 발상지가 된 근원이 됨.

 

국가의 형성

주전 3000년경 이후 국가형태의 인간 사회조직은 북부및 동부 메소포타미아의 산지와 고원지대로 확산되었고, 시리아, 팔레스틴 및 남아라비아에까지 미쳤으며, 에집트 남쪽의 나일강 상류유역을 따라 퍼져 나갔다; 이스라엘을 형성했던 종족들은 단지 가나안의 국가들에 대항했던 것만이 아니라, 국가형태의 사회조직 자체를 거부하고, 보다 느슨한 부족체제를 선택했다(비교. 사사시대).

 

경제활동

비옥한 초생달지역은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이 반달형 지역내에서, 민중들은 농업을 주로하는 여러가지 경제활동에 종사함; 나귀와 노새, 황소등이 농경에 이용되었고, 말은 주전 1750년 이후에 소개되었으며, 낙타는 주전 1200년 이후에 널리 이용되어 나중에는 낙타까지 목축하게됨; 유목민들은 정착민과 정규적인 상호유대관계를 맺었으며, 간단한 물물교환이 있었으나 대개는 자가공급에 의존했다.

 

도로망

도로망은 비옥한 초생달지대 전역에 방사선식으로 발달했고, 북으로는 아나톨리아까지, 동으로는 이란을 경유하여 인도와 중국에까지, 남으로는 아라비아에까지 도로선이 연결되었다. 해상무역은 인도양을 따라 동아프리카와 인도사이에 이루어졌고, 지중해를 따라서는 그리스, 이탈리아 및 북아프리카간에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사회계층의 분화가 이루어졌으며, 중앙집권적 국가가 출현하게됨.

메소포타미아  문명 : 점성술 발달, 태음력, 60진법, 쐐기 문자, 채색 토기
메소포타미아는 근동의 두 큰강인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사이, 그리고 강을 따라 있는 보다 넓은 지역이 포함된다. 하부 메소포타미아는 아카드(Akkad)와 수메르(Sumer)두 부분으로 나누어 부르는고 있는데, 아랫부분인 수메르는 B.C 4000년에 이르기 수세기 까지만 해도 습지 였기 때문에 거주에 부적합한곳이었다.
메소포타미아 기후는 무덥고 습하고, 겨울비가 없기 때문에 관개시설 없이는 가장 원시적인 농경만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은 종종 봄에 홍수가 지는데, 비가 많이 오거나 북쪽의 녹은 눈이 흘러 내려와 홍수를 이룬다. 이러한 지역적 영향으로 관개시설은 거대한 사업으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만이 계획, 유지해야 했는데, 이것은 조그마한 도시국가 왕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이 지역을 지배했음을 알수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B.C 5000년경: 신석기 시대를 벗어나 채도문화가 발달
B.C4000년경: 수메르인들이 정착하여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게 되는데 이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발생시킴
B.C 3000년경: UR,Lagash.Umma,Nippur,Kish같은 도시들이 발생B.C 2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북쪽지역에 살던 아카드인(셈족)들이 주변국가를 정복하여 통일왕국을 세움 이로서 수메르인들은 셈족의 지배를 받음
B.C 21000년경: 수메르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셈족으로 몰아내고 Dung가 왕이 되어 다스림
B.C 1900년경: Gutr족의 침입을 받아 혼란상태가 됨
B.C 1800년경: Amor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움-바빌로니아 왕국(Babylonia) 이 시대에 함무라비왕이 바빌론市에 수도를 정하고, 성문법을 제정하여 국가 발전에 기틀을 세웠으나, 古바빌로니아는 B.C 1600년경 카시트(Kassite)에 의해 멸망됨
B.C 1300년경: 앗시리아(Assyria)인들이 세계전역을 통일하여 세계 대제국을 세움 이들은 철저한 정복정치를 통해 각 지역의 상황을 감시하여 반란의 기미가 있으면 잔악하게 진압하여 속국들을 통치하였다.
B.C 625년경: 칼데아(Chaldea)인들이 앗시리아인을 멸망시키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계승하며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움
B.C 550년경: 페르시아(Perisan)인이 침입하여 바빌로니아왕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왕국을 세움 . 소아시아,이집트까지 정복하고 강력한 통치국가를 유지하였다.
B.C 330년경: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하고 헬레니즘 세계를 건설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민족이 침략하고 지배하는 동안 여러왕조의 교체를 통해 복합적인 문화가 형성되었고, 경제,과학,법 등 시대별로 각기 독특한 체계를 이룩하였다.
신관 (다신관; 왕은 신의 대리자)은 구약의 유일신사상과유사하며, 디비내이션(신점)이 발달같은 것들은 예언자들의 예언과 유사하다. 그리고 창조이야기(에누마 엘리쉬), 홍수 이야기(길가메쉬)등은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사역과 노아의 방주사건과 유사한 점들이 많다. 그 내용들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왜곡되어 전설로 남게 된 것 같다.

 

 

마리 문서(Mari Texts) : 메소포타미아의 예언현상 연구에 공헌

우르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남쪽이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아모리 족은 마리(Mari: 現 Tell Hariri)에 수도를 정하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지배하였다. 마리 문서들은 이 시기의 왕궁 문서 보관소 유적에서 발굴된 것이다(주전 18세기경).
이 문서가 구약성서를 위해 중요한 것은 족장들의 이름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라반 그리고 요셉과 같은 이름들이 주전 2.000년경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누지 문서(Nuzi Texts) : 족장들의 생활과 유사한 생활관습 반영 

호리족(Horites)의 성읍인 누지에서 발굴된 문서로서 족장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주전 15세기경).
남자는 자기 부인이 아기를 낳지 못할 때에 그 여종과 결혼할 수 있으며, 그 여종이 자기가 받은 영광으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건방진 행동을 할 때에는 그 여주인으로 하여금 형벌을 가할 수 있었다(cf. 창세기 16:1-6). 어느 부부에게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들였으나 훗날 그 부부에게 친자식이 생겼을 경우 재산 상속권은 친자식에게 넘어가게 된다. 가정 수호신(드라빔)의 소유는 순수한 종교적  이유의 차원을 넘어 장자의 상속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cf. 창세기 31:19, 30-35). 누지 문서에서 나타나는 결혼의 목적은 주로 출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남자 상속인이 없는 사람은 사위(데릴사위)를 양자로 택하여 자신의 상속자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위가 낳은 자식들은 외조부 생존시에는 그의 자식으로 지내야 했다(cf. 창세기 31:28,43). 심지어 노예를 양자로 들여 자신의 재산을 상속하는 경우도 있었다(cf. 창세기 15:2-4). 딸을 시집보낼 때에는 혼수의 하나로서 여종을 한 명씩 딸려보내야 했다(cf. 창세기 29:24, 29). 아내의 지위는 법적으로 보장되었으며, 첩은 집안에서 조금 열등한 신분에 속하였다. 그렇지만 누지의 법률은 첩의 자식이 가족 안에 남도록 명령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를 추방한다는 것은 엄중하게 규제되었다(cf. 창세기 21:10-11). 누지 사회에서는 족장의 임종이 임박하였을 때에 축복을 해주는 습관이 있었다. 이런 축복 선언은 죽어가는 사람의 최후의 뜻과 유언을 나타내는데 이는 돌이킬 수도 없으며 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cf. 창세기 48:8-49).

 

 

족장 시대와 모세 시대의 철기사용(창세기 4:22; 신명기 3:11 등)

이러한 사실은 비평적 학자들 사이에서 모세오경의 후기 발생설을 입증하는 자료로서 인용  되었는데, 이들은 철기의 광범위한 사용이 주전 12세기 이전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은 이러한 주장을 뒤집는 자료를 제시해 주었다.
1) 이집트 제4왕조(주전 26-25세기경), 제6왕조(주전 23세기경), 제11왕조(주전 21-18세기경), 제18왕조(주전 1552-1306년경) 등의 무덤에서 철기류 발견.
2) 메소포타미아의 Tell Chagar Bazar, Tell Asmar, Mari 등지에서 주전 2.000년대에 제작된 철기류 발견.
3) 시리아의 라스 샴라(Ras Shamrah)에서 주전 1.500년경에 제작된 강철 도끼 발견.
성서고고학의 발달로 구약성서의 역사성에 대한 도움을 받고 있는데, 첫째로 구약성서는 고대 근동지방의 사람들에 의해 고대 언어로 기록되었고 고대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기에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에 대한 지식은 구약성서를 좀더 완전히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로 성서고고학을 통하여 구약성서는 그 고대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며, 가상의 세계가 아닌 실제 역사에 근거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