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고고학 1

 

기독교인의 최고의 성지는 예루살렘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무덤이 있고, 십자가에 달린 흔적이 있고, 승천하신 감란산이 있기에 기독교의 성지로 여긴다.

예루살렘은 기독교뿐 아니라, 이슬람교인의 성지이자, 유대인의 성지이다.

예루살렘이 이슬람과 관계가 있는가?


후대에 생긴 전승


경전, 코란엔 무하마드가 천리마를 타고 먼거리로 이동해서 승천했다는 기록이 있다.

먼거리, 먼곳이라는 아랍어가 악사라는 말이다.

엘이라는 말은 정관사이고, 악사는 먼곳이라는 말이다.

어딘지 모르지만 무하마드가 곳에서 승천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하마드의 탄생지 메카나, 메디나를 성지로 여기고, 성지순례를 떠났다.

정치적인 이유로 당시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아랍권의 통치자가 메카쪽에만 영향을 받으니까

예루살렘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 엘악사는 예루살렘이다라는 해석을 하기

시작한다.


691년에 솔로몬 성전 자리이자,

헤롯대왕이 증축한 자리에 성전이 파괴된 성전터에 무하마드의 승천을 기념하는 바위에 돔을 건축한다.

발자국을 남겼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존경하는 선지자의 승천할때 남긴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팔각형의 바위의 사원을 건설했다.

기념사원이 오늘날까지 남아있고, 예루살렘성을 내려다볼때 눈에 보이는 곳이 이슬람교의 바위돔 사원이다.

이슬람교 전승에서 메카 메디나와 함께 3 성지중 하나이다.


오늘날 아랍국가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가지 않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인은 가는 경우가 있다.

이슬람교는 목요일부터 거룩한 시간을 가진다.

저녁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중동지역에서 더운 지역에서 아침부터 하루가 시작되면 지친다.

저녁은 서늘해지고 기운을 차리고 일을 시작하기때문에 중동 지역의 하루의 시작은 오후 해질때이다.

금요일이 이슬람의 안식일이라서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저녁까지이다.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이다.


유대인의 최고의 성지는 통곡의 벽이다.

벽은 신약시대에 헤롯대왕이 소규모였던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규모로 증축할때 서쪽 축대를 쌓았던 일부분을 오늘날 성지로 삼았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메시야가 다시 오실때에 감람산으로 오신다고 한다.

후에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메시야가 오셔서 더블 아취로 , 골든 게이트가 막혀있는데,

황금의 문이 열리고 메시야가 통곡의 위에 선다고 한다.

자체를 신성시 여긴다.


통곡의 안쪽에는 솔로몬 성전자리, 헤롯성전 터가 있다.

하지만 서기 691 바위의 돔이 건설된 이후 안에 들어갈수 없었다.

이스라엘이 건국하고, 1967년에 6일전쟁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뿐아니라

성전산, 성전터까지는 차지하고 관광객들이 드어가지만, 성전안은 아랍인들의 것이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성전터로 가는 것을 금하고 있다.

율법을 지키는 자에 의하면 일반인은 지성소에 갈수 없다.

지성소는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갈수 있다.

어기고, 일반인이 지성소에 가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죽을수도 있다.

지금은 어디가 지성소 자리인지는 모른다.


옛날에 어디인지 모르지만, 지성소 자리를 범할 위험이 있다.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세속적 유대인들은 관광차원으로 들어가서 바위 돔안에도 들어간다.

바로 위에 비행기도 지나가지 않는다.


성전 위로 지나가지 않는다. 지상의 거룩한 것이 하늘에 까지 뻗쳐져 있기때문에 위를 지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늘날의 고등종교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의식적인 것이 많이 남아있다.

사이에는 자기 기도문을 적은 쪽지를 집어 넣었다.


미국의 600 유태인이 직접 예루살렘을 방문할수 없지만,

그러면 기도문을 적어서 통곡의 관리 사무소에 팩스로 보내면 거기에 집어 넣어준다.

미신적인 관습도 있다.


기도를 하고 나올때에 정통 유대인은 뒷걸음쳐서 나온다.

거룩한 벽에 자기 뒷모습을 비추지 않기 위함이다.

유대교가 형식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이다.

유대인들의 최고의 성지 통곡의 벽이 있으면 안은 아랍성지인 바위의 돔이 있다.

곳에서 300m 떨어진 곳에 예수님의 무덤교회가 있다.

골고다 지역이다.

 

예루살렘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금요일은 아랍사람들, 토요일은 유대인, 일요일은 기독교인의 안식일이 있다.

7일동안 삼대 유일신교의 3일이 안식일이 있다.

기독교인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때문이다.

예수님이 금요일날 십자가에 달리시고, 안식일 다음날 주일로 지킨다.

 

예루살렘의 고고학적 탐사는 영국에서 시작한다.

1860년대에 시작

전염병이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예루살렘은 오스만 투르크시대에 슐레이만대제가 폐허가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을 했다.

꿈에 사자가 나타나서 거룩한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는 꾸지람때문에 성벽을 세웠다.

기초 부분은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 볼수 있는 에루살렘 성벽은 450 전의 것이다.

건기에는 날씨가 덥다. 물이 부족하다.

한번 수인성 전염병이 걸리면 삽시간에 번져간다.

 

역사적으로 전쟁대에 전염병이 최고로 무섭다.

전쟁때는 포위한다.

여호수아 명령. 모든 것을 불살라라.

헤렘명령- 깡끄리 멸망시키는 것이다.

이유는 전염병 우려때문이다.

바로 성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포위한다.

성안에 있는 사람은 식량과 물이 떨어지면 항복한다.


전염병이 도는 상태인데 옷을 빼앗거나 하면 무기를 챙긴다거나 하면

와중에 전염병이 옮으면 포위한 군대에도 병이 옮길수 있기때문에 전부 태워버리라는 것이다.

당시 영국의 대도시는 상수도와 하수도를 구분했다.


영국은 하수도를 템즈강으로 보내면서 비위생적인 물을 처리했다.

예루살렘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 공병대 장교를 파병했다.

하수도, 상수도 장비를 하려고 했다.

땅속에 묻혀있다.


찰스 워렌, 찰스 윌슨, 두명이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하수도를 조사하다가 본격적인 고고학 발견을 한다.

워렌은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고 1867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기혼샘과 히스기야 터널을 발견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수직 11m 발견한다.

예루살렘은 기혼샘만 있다.

기혼이라는말은 물이 뿜어져 나온다는 말이다.

잠잠했다가 뿜어져 나온다.


겨울철에는 1000입방, 여름철에는 200입망미터 정도 많은 물이다.

바위틈에서 샘이 나오는데 바위틈을 파서 물이 고이도록 해서 웅덩이처럼 만든 것이다.

문제는 자체는 바깥 골짜기에 있다.


비가올때 집집마다 굴을 파고 예루살렘은 자체는 바위지역이고, 지하에 굴을 파고 저수되도록 했다.

여름기간동안 하수도와 섞이면서 부패될 위험이 있다.

이스라엘이 정착한 지역은 중앙산악지대이고, 예루살렘은 해발 700m 도시다.

좋은 조건의 도시는 아니다.


기혼샘이라는 물이 있지만 농사지을 땅은 없다.

농사를 짓기위해서는 떨어진 야산 지역을 개간해야하고, 지역을 점령해야 한다.

동쪽은 기드론 골짜기, 서쪽은 치즈를 만드는 사람의 골짜기, 남쪽은 흰놈 골짜기 -3면이 골짜기이고 북쪽만 약간 높다.

천연적 요새이지,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도시는 아니다.


교통로도 바로 옆으로 지나가지 않는다.

상황에서 예루살렘 서기 천년 다윗왕에 의해 점령되고 수도로 선포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산다.

가장 높은 곳에 야웨를 섬기는 성전을 세웠고, 밑에 왕궁, 저택, 창고건물이 세워졌다.

성안에 살수 있는 신분있는 사람들의 집이 세워졌다.


많은 사람이 살수 없는 도시에 행정적인 도시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문제가 생겼다.

포위를 당했을때 밖으로 나갈수 없다.

성안에서 물을 길을수 있도록 지하 급수시설을 만들어야 했다.

 

서기 2세기에 하스몬 왕조가 예루살렘을 통치한 적이 있다.

신구약 중간기시기이다.

그리스, 초기로마시대이다.

그리스 군대에 대항헤 유대인이 반란에 성공한다.


그리스인이 통치하면서 종교적인 탄압을 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돼지고기를 제사지내고,

그런 것에 맛디아 집안이 게릴라전으로 무찌르고 예루살렘에 왕조를 세웠다.

왕족을 하스몬 왕조라고 한다.


시절 물을 공급하기 위해 남쪽에 위치한 물이 풍부한 솔로몬의 연못으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수로를 끌고 들어온다.

그러한 시스템도 그당시 조사했던 찰스 윌슨, 워렌이 발견한다.

오스만터어키 당시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나라의 방해로 설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조사때문에 지금까지 알게 되었다.

 

왕들의 무덤


피라미드는 왕들이 무덤이다.

틀렸지만, 그곳을 탐사했던 선교했던 요셉이 만든 창고라고 해설하기도 했었다.

고고학자에게 무덤은 보물창고이다.


사람들이 살던 주거지는 발굴하더라도 유물을 찾기까지 건물의 바닥지역가지 내려가야 한다.

주거층을 이야기 할때에 지붕재료, 기초 바닥 위에 축적된다고 하더라도 1-2m 드러내야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발견할수 있다.

대추야자를 먹고 씨앗을 버렸다.


그러면 씨앗을 발견할수 있다.

토기도 바닥에 잔뜩 나온다.

일반적 주거지 발굴에서 보물을 찾기는 어렵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그러나, 왕들의 무덤을 발견하면 많은 것을 찾을수 있다.

그러나, 유다왕의 무덤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지로 갈때 다윗왕의 무덤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은 다윗의 무덤이 묻힌 것이 아니라,

서기 2-3세기에 로마의 건물이었지만 십자군이 점령한 거룩한 시온을 상징하는 기념 교회를 세웠고,

2층이 마가의 다락방이고, 밑이 다윗의 무덤이라고 했다.


유대인은 조상의 무덤에 기도했다.

관에다가 시신을 묻지 않는다.

되도록 빠른 시간내에 묻는다.

그날 죽은 경우 당일날 장례식을 치른다.


남자는 8일만에 할례를 하고,

남자 13, 여자 12세에 거대하게 잔치를 치르고, 결혼식도 크게 하지만, 장례식은 초라하게 한다.

장례식은 그날 하고 잔치도 없다. 음식을 나누는 것도 없다.


천으로 싸서 묘지에 묻는다.

묘지는 좁아서 앉은 상태에서 매장하기도 한다.

지하에 1m정도 파서 요즘은 직사각형 비석을 덮는다.

 

왕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다.

성지순례에서 보는 다윗의 무덤은 기념무덤이다.

관을 돌로 만들고 천으로 덮여 있다.

다윗이라는 히브리어가 있지만 기념비지 무덤은 아니다.

 

1851 프랑스의 사람이 왕들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발표한다.

왕이 시드기야의 왕비라며 발표했다


킹스 툼이라고 한다.

그곳은 바위를 깍아서 내려가면 무덤 입구는 좁다.

입구는 둥근 돌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방이 있다.

시신은 벤치에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공은 아디아베네의 여왕인 헬레나 여왕이다.

유대교로 개종하고, 왕족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신약시대의 무덤이다.

 

1910 프랑스 베이라는 고고학자가 다윗성에 장사되었다는 구절을 보고,

성벽쪽이 아닌 내려간 쪽에 실로암 가까운 곳이라 추측했다.

깨어진 동굴을 발굴한다.

누가보더라도 무덤 같아 보이지 않았다.

창고로 나중에는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신약시대 헤롯왕의 여리고에 있는 그의 여리고 별방에서 죽은 다음에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베들레헴 동쪽 헤로디움에 묻혔다고되어 있다.

헤로디움은 헤롯왕이 그당시 로마왕들의 무덤을 본따서 거대한 무덤구조물을 살아있을때 만들었다.


광야지대에 원통모양으로 직경이 30m 높이가 25m 올라가는 분화구같은 구조이다.

그곳에 묻혔다고 해서 찾았다.

지하에 여러개의 동굴이 있지만 헤롯왕의 시신을 밝혀지지 않았다.

 

1970년대 이미 발견된 무덤을 유다 왕들의 무덤이라고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 수도사들이 옛날 무덤 지역을 발견하고 스데반을 기념하는 수도원을 세웠다.

그곳은 유명한 성지를 연구하는 프랑스 연구소가 있다.


엣골 디블릭이라고 한다.

성서학 연구소이다.

신약시대의 것으로 알았는데,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때 구약시대의 왕들의 무덤이라고 해석했다.

안에 보면 솔로몬 궁전을 만들때처럼 내부에 송판을 대었다.

천장과 벽을 장식을 나무로 대면서 내려간다.


솔로몬의 레바논의 백향목을 만든 이유가 안쪽에 나무를 대었고, 위에 금분을 칠했다.

나무를 조각해서 여러 형상을 부조로 새겼다.

내부의 인테리어 장식으로 나무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엣골 디블릭 무덤에는 돌로써 바위굴을 깍았는데 나무로 송판을 것처럼 깍았다는 것이다.

시신을 안치하는 안치대가 있고, 밑에는 유골 보관소가 있다.

구약성서에 다윗성에 장사되고 열조에게 돌아갔다는 표현이 있다.


왕들의 무덤이 있고, 새로운 시신이 생길때는 기존의 뼈는 추려서 그곳에 다시 시신을 얹어놓았다.

사람을 위해서 따로 무덤을 만들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흙을 파서 묻을 공간이 없다.

거의 바위지역이다.

바위를 파고 들어가서 내부를 시신을 얹어놓는데 비싸다.

계속해서 뼈를 모아서 놔두고, 시신을 넣고 한다.


구약시대에는 부활사상이 희박했다.

신약시대에 부활사상이 들어오면서 뼈를 섞지 않았다.

신약시대는 유골을 한꺼번에 모아두지 않고, 석회암으로 깍아만든 유골함에 집어 넣었다.

십계명 2계명, 사람의 형상을 세울수 없기때문에 기하학적인 꽃같은 무늬를 깎았다.

 

유골상자가 수천개가 발굴되었는데, 주인공의 이름이 세겨져 있다.

이름이 세겨진 것이 1천개가 되고,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2개가 있다.

요셉이, 예수가 예수님인지는 모른다.


예수라는 여호수아라는 약어이다.

여호수아는 야웨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말이다.

아버지가 요셉이다.

그러한 석관이 발견된 적도 있다.

 

신약시대는 개개인의 뼈를 따로 담았다.

 

1970년대에 기존에 발견된 무덤을 유다 왕의 무덤이라 다시금 해석되었다.

차곡모아둔 뼈도 그자리에 있다.

무덤이 유다왕들의 무덤중 하나이지 않은가 본다..

부장품은 도굴당했지만 형태상으로 유다왕의 무덤인 것으로 본다.

 

예루살렘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중에 지하 급수시설이 있다.

적들이 포위할때 골짜기 샘들에 입구를 막는다.

그리고, 내부에 터널을 미리 뚫어 놓는다.


성안에서 물을 길을수 있도록 한다.

샘에서 성안에 수평터널을 파고, 수직으로 파서 위에서 우물같이 가져올수 있도록 한다.

유명한 터널이 히스기야 터널이다.


앗시리아가 701 처들어 온다.

히스기야는 성벽을 제건하고, 공사가 성밖에 있는 기혼샘 물을 실로암 못까지 끌어들이는 대공사를 했다.

히스기야 터널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적으로 현장이 발굴되었다.

터널공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공사의 현장의 관경을 터널에 비문으로 기록해 놨다.

여섯줄로 되어있고, 200 정도되어 있다.

 

굴착 공사(제목)


굴착공사는 다음과 같다.

인부들은 도끼를 서로 마주쳤다. 아직 3아마를 파야함에도 불구하고 동료를 부르는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왜냐면 암벽의 오른쪽과 왼쪽에 틈새가 있었기때문이다.

굴착 당일에 인부들은 맞은 동료쪽으로 파들어갔다.

도끼와 도끼가 서로 겹쳤다.

물이 수원지로부터 연못까지 1200아마를 흘러갔다.

바위의 높이는 인부들의 높이로 100 아마였다.

 

비문이 구약시대에 발굴된 문장중 가장 문장이다.

서기 701 기록이다.


산헤립왕이 쳐들어왔다는 성서의 기록이 있고, 고고학적으로 것을 알수 있다.

1200아마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로는 아마이다.

규빗은 라틴어이다.


1규빗은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까지, 40-50cm 알았다.

그런데 기록으로, BC 700년대에 예루살렘은 44cm임을 보여준다.

 

앗시리아에서 유다쪽으로 쳐들어온다

히스기야 왕이 자기를 통치하던 앗시리아 왕에 반란을 일으켰기대문에 쳐들어 온것이다.

반란이란것은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조공을 받치지 않은 것이다.


강대국은 무력으로 약소국을 점령한 다음에 조공을 약속받는다.

1년에 한번씩 귀금속, 식량, 노예, 가축, 이런 현물로 곡물로 받치라는 것이다.

해마다 정해진 기간에 사신들이 앗시리아로 간다.


정해진 기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반란이다.

세금을 못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쳐들어 온다.

굉장히 거리다.

말을 타고 오더라도 한달 정도 되는 거리이다.


벌서 자기가 기간내에 도착하지 않았기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공을 받치지 않기로 결정한 후에 히스기야가 체계적인 방어계획을 세웠던 것이고, 것이 지하 급수시설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s자로 위어져서 길이가 225m 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양쪽에서 팠다.

그런데 가운데서 만났다.

지금도 히스기야 텃널을 걸어갈수 있다.

직선이라 하더라도 양쪽에서 가운데 마주치는 것은 기적적인 것이다.


s 파느냐?

위가 다윗성인데 왕들의 무덤이 있어서 피하기 위해라는 속설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정밀한 검사 결과, 기혼샘에서 원래 물이 흘렀고, 바위틈새를 따라 파다보니 그렇게 되었고, 좌우에서 팠어도 만날수 있었다는 것이다.

 

3아마가 남았다. 1m남은 곳에서 상대방의 말이 들렸다.

틈새가 있었다는 것이 힌트이다.

서로 틈을 통해 이미 흘러가는 것이었다.

바위의 틈을 가지고 갔기때문에 만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당시 토목공학으로 대단한 것은 실로암의 고저 차이가 32cm밖에 되지 않는다.

길이가 552m이다.

기울기가 0.06도이다.

그런데 지금도 흘러간다.

어떻게 기울기를 맞췄는가?

물은 항상 수평으로 맞춘다.


물이 흘러가는 기준으로 팠기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히스기야 터널은 3가지의 지하급수시설 하나이다.

제일 오래된 수로는 실로암 수로이다.

기혼샘에서 500여미터 흘러간다.


기혼샘에 물이 흘러가는 것을 실로암 수로라고 한다.

실로암이라는 말이 물이 흘려보낸다는 뜻이다.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 아랍 사람의 마을의 이름이 실로암이다.

 

세번째가 웨렌 수직 통로이다.


영국의 공병대 장교가 발견한 워렌 수직통로이다.

기혼샘이 물이 안쪽으로 들어오게 후에 우물처럼 수직으로 뚫어서 성안에서 물을 길을수있도록 만든 시스템이다.


지하 급수시설은 예루살렘 외에도 기브온, 하솔, 므깃도, 게셀, 이블람에도 있고, 6군대 고대도시에 아합왕 시대 서기 900년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파놓았다.

그만큼 외적의 침입에 시달렸던 이스라엘은 포위를 끝까지 견디기 위해 지하 급수시설을 만든 것이다.

 

 

예루살렘 고고학 2 

 

다윗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할때는 군사적인 목적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들어왔을때 종교적인 전통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세겜지역이었다.

세겜은 여호수아가 만든 에발산의 제단이 있었다.


그곳에 열두 지파가 모여 계약을 갱신했다.

6지파는 에발산에 세우고, 다른 6지파는 그리심산에 세워놓고 야웨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읽으면서 지키도록 권고한 곳이 세겜이다.

세겜이 원래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였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거쳐, 하란을 처쳐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세겜에 있는 모레 상수리라는 곳이다.

세겜땅에 모레라는 곳이 있고, 모레의 도토리 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지역이 팔레스틴의 것임에도 그곳에 정착촌을 돈을 주고 사서 엘렘 모레, 모레 상수리라는 이름을 지어 살고 있다.


유대인들은 새로운 도시의 이름을 건설할때 성서의 이름을 사용한다.

북쪽이 원래 종교적 중심지인데 다윗은 사울왕 시대때에 사울왕의 박해를 받았다.

골리앗울 죽인 공로로 사울을 총애를 받았지만, 사울이 죽이려 하자 도망나오게 됨으로 원수지간이 된다.

사울과 다윗이 마주친 곳이 엔게디이다.


다윗이 거하는 곳을 사울이 찾아간다.

사울이 자고 있을때 굴은 다윗이 숨어 있던 곳이어서 칼로 죽일수 있지만 옷자락만 살짝 베어갔다.

골짜기 건너편에 건너갔을때 다윗이 죽일수 있음에도 살려줬다고 이야기한다.


사울왕은 블레셋 군대와 북쪽의 이스르엘 평야에서 전사한다.

블레셋은 말이 이끄는 전차, 철기를 가진 군대고 이스라엘은 산악지대에서는 잘싸우지만 평지에서는 약하다.

왕이 산악지대로 도망쳐오다가 두가지 죽은 장면이 나온다.


자살했다는 이야기와 심복에게 죽이라고 장면이 나온다.

사울의 시신을 달아놓자, 예전에 도움을 받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가져온다.

다윗왕이 왕이 될수 있는 기회였지만, 헤브론에 머물렀다.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마하나임에서 왕이 되었다.

사사시대에 왕이 없을때 왕을 세워달라고 했다.

다른 나라는 강력한 군사가 있는 것을 보고 왕을 세워 달라고 했다.


두번째 왕이 다윗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이스보셋이 2년정도 왕이 되었다.

남쪽의 헤브론에는 7년에 다윗이 왕이었고, 건너편은 사울의 아들을 중심으로 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다윗은 세겜지역을 장악해야 하는데 자기는 남쪽 지역 사람이었기에 그와 가까운 이스라엘 민족이 아무도 점령하지 못한 여부스라는 예루살렘성을 점령한다.

절벽 자체가 높은데다가 성벽까지 있어서 도저히 점령할수 없는 곳이다.


다윗의 군대가 점령할려고 할때에 여부스족속들은 우리는 장애인이라도 물리칠수 있다는 속담이 있었다.

그때에 요압이라는 부하가 수구를 타고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정령했다고 적혀있다.

히브리어로는 찌노라고 한다.


기혼샘에서 성안쪽으로 흘러가는 지하터널 같은 곳이다.

기혼샘에서 수평터널이 있었고 11m 높이의 워렌이 발견한 터널이 요압이 올라간 수구가 아니겠는가 해석한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수도로 부각된다.


당연히 북쪽의 세겜의 사람들은 불만스러워 했다.

다윗이나, 솔로몬때는 막강한 왕권앞에 굴복했지만, 3대째에 가서 르호보암왕때에 남북으로 갈라진다.

다윗왕은 다윗성을 축성하고, 군사적 왕으로 자기 나라 영토를 확장시켰다.


다윗왕도 성전을 만들수 있었다.

여부스를 정령했을때 아리우나라는 사람이 다윗에게 땅을 선물한다.

예루살렘 꼭대기 타작마당이 있다.


황소도 있고, 수레도 있고,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데로 제사를 드리시오.

그러자, 다윗이 제사를 드린다.

타작마당이라는 곳은 평평한 땅이면서 바위지역이다.


그곳이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지역사람들이 제의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다윗은 하나님이 성전 짓는 것을 거부하신다고 했다.

준비는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솔로몬대에 건설된다.


솔로몬 성전의 설계도는 왕상 6장에 자세히 나와있다.

폭이 10m , 길이 30m 직사각형 건물이다.

입구에 건물을 받치기 위한 기둥이 아니라. 장식용으로 세운 야긴과 보아스라는 기둥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본당이 있고, 안쪽에 지성소가 있다.

성소의 안쪽은 레바논의 송판으로 대고, 금박을 입혔다.

안에는 항상 등잔을 켜야 하는데, 등잔의 빛으로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와 그룹이 있었다.

그룹문제가 율법과 결부되어 논쟁거리가 된다.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살아있는 형상, 식물을 제외한 사람과 동물을 새기거나 그리지 말라고 했다.


움직이는 것들을 조각으로 만들거나 그림, 부조로 만들지 말라.

십계명의 2계명 때문에 이스라엘이 약하다.

기악은 발달했다. 시편의 찬양을 위해서 많이 발달했다.


성악은 기독교 음악이어서 유대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이방종교였기에 교회음악을 그들로부터 배우면서 공부할수는 없었다.

성가대 지휘자는 하잔이라고 부른다.


성악으로 창을 하듯이 율법의 내용, 기도를 선창하고 참석자들은 따라하는 유대교 회당의 음악의 전부이다.

비교적 음악계통은 기악이 발달했다.


시편의 전통때문에 음악이 발달했고, 2계명때문에 미술은 발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꽃, 석류 모양으로 장식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지성소에는 그룹이 있다.


날개가 10m 두마리의 그룹이 있다.

그룹은 케루비라는 것인데 스핑크스 종류이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인간이 생각할수 있는 가장 완벽한 동물이다.


머리 - 인간이 이대함

몸통의 앞부분- 사자.

몸의 뒷부분 - 황소

날개- 독수리의 날개


스핑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이다.

원래 이름은 살아있는 형상이라는 이집트어였다.

수수께끼를 오이디푸스에게 질문을 내는 이야기가 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인간이 생각해낼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생명체이다.

메소포타미아에는 라마소라는 형상이 있는데 황소인간이다.

머리는 인간이고 밑에는 황소이다.


모든 신전에 입구에 있다.

1840년에 이라크의 니느웨 지역을 발굴할때에 라마소를 많이 발견했다.

솔로몬 성전의 그룹 자체도 스핑크스의 형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괴물이 솔로몬이 두었는가?

의견이 분분하다.

중세의 유대인 학자는 십계명에 새기지 말라는 것은 신적인 것을 숭배하는 거슬 새기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숭배하지 않았던 대상이라면 예술적으로 장식해도 괜찮다.

비잔틴 시대에는 바닥이 모자이크로 되어 있기에 오늘날에도 모자이크가 발견되면 거의 비잔틴시대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신약시대부터 발달했다.


색갈있는 자연색 돌을 이용했다.

초창기 헤롯 왕국의 색깔은 흰색, 빨간색, 검은색이고, 비잔틴 시대에는 형형색색으로 만들었다.

유대인의 회당바닥에 외부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서양의 12개의 별이 있는 장식이라든지, 성경의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2계명을 그렸을까?


그것이 바로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야기하는 우상숭배에 대한 말을 보면 나무를 잘라서 일부를 불로 떼어 따뜻하다 하다가,

같은 나무로 신상을 만들어 나에게 축복을 해주구나. 어리석다.


자기가 신적으로 섬기기 위해 조각했다면 우상이지만, 장식용으로 했다면 관계없다고 해석하게 되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때에 페니키아 히람의 도움을 받았다.

열왕기서의 내용을 보면 솔로몬과 페니키아 사이에 구상무역이 있었다.


솔로몬은 석재와 백향목을 제공받았다.

댓가로 밀과 보리, 올리브 기름같은 식량을 주고, 나무를 벌목하기 위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와중에 솔로몬이 히람왕이 원하는 빚을 갑지 못해서 갈릴리 성읍 20개를 히람에 주었다.


성이 안차서 지역의 이름을 불만스럽다는 가불이라고 불렀다.

솔로몬이 성전을 7년동안 짓고, 궁전은 13 동안 지었다.

성전은 10, 30 m이니까 우리 평수로 100평정도 되고, 자기 궁전은 크게 지었다.


유일신 개념 - 신은 한분이시다.

그것은 도저히 삼천년전에 솔로몬 시대 사람들이 생각할수 없는 아이디어다.

이집트 학자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에 100년전 이집트의 종교개혁을 했던 파라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파라오는 태양신만이 유일한 신이다.

다른 신은 부수고 기존의 신전을 부수고, 제사장들을 해산시켰다.

그런데 왕의 종교개혁은 정치적, 종교적 이유였지, 고등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왕의 통치가 10년지나서 다신교적인 체제로 돌아간다.

유태인 프로이드는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논문에서 모세가 이집트 왕궁에서 이집트 왕자로 교육을 받으면서 100년전에 일어났던 왕에게 심취했다.

왕이 죽어서 실망을 금치 못했고, 그래서 자기가 다스리던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유일신교를 새로운 땅에서 확립하기 위해서 출애굽했다고 했다.

(학문적인 근거는 없다)


한분이신 야웨를 섬기는 성전으로 만들었다.

고고학자들이 성전을 발굴할수 없다.

지금 이슬람교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이 3대성지이다.

무하마드가 승천할때 자국이 남았다는 바위 돔을 보호하기 위해 성전을 지었다.

1300년동안 그자리에 있다.


팔레스타인 사이에 전쟁같은 국면은 2000 9 초막절때 당시 야당당수 아리엘 샤론이 통곡의 벽까지 안가고 성전산안까지 방문했다.

유명한 보수주의자이다.

성전산에 갈때 수백명의 경찰이 동원되었다.


그때 아랍청년들이 돌을 던지고, 그때 총격이 벌어지면서 지금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예루살렘 자체도 나라가 수도로 여기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할수 없다.


아랍사람들이 발굴을 허용하지 않는다.

헤롯이 건설한 성전터를 위한 축대부분은 발굴했다.

가장 중요한 안쪽은 들어갈수 없다.


관광차원에서 볼수는 있지만 발굴은 할수 없다

골동품에서 상아로 만든 석류가 발굴되었다.

엄지손가락만한 것이다.


석류는 중요한 장식용 과일이다.

8 8절에 유명한 곡식이 있는데 그중 하나다.

이석류가 그냥 단순한 석류라면 연대는 알수 없는데, 야훼 성전의 제사장들의 것이다라는 고대 히브리어 글짜가 새겨져있었다.


기원전 7-8세기 글이었다.

글씨체를 통해서 연대를 추적했다.

획같은 것들이 달라진다


돌에다 새겨지기 때문에 그당시에 쓰는 표준적인 글씨로 새겨지기때문에 연대를 알수 있다.

그런데 유물이 없어졌다.

유럽의 골동품 상점에 경매시장에서 50만불에 팔렸다.


이스라엘의 국립박물관에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바로 석류다.

솔로몬 성전에 속했다는 것이다.

제의용 지팡이가 있는데 상아로 만든 40-50cm 막대기가 있고, 막대기의 끝에 석류가 꽃혀있다.


막대기를 꽃을수 있도록 끝이 패여있다.

글씨때문에 솔로몬 성전의 제사장들이 가진 제의도구라는 것을 알았다.

유일한 솔로몬 성전의 유물이다.


4cm 밖에 안되지만 박물관의 가장 중심에 있다.

앞으로도 발굴하면 성전의 터를 발굴할수 있다


헤롯이 증축을 하고, 아랍사람들이 무하마드를 기념하는 사원을 세웠지만,

기초부분을 깡그리 청소한다음에 새로운 건물을 지은 것이 아니다.

파면은 구약시대의 터를 발굴할수 있다.

 

지성소/


지성소에 법궤는 어떻게 되었을까?

레이더스 - 잃어버린 법궤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한번 보는 것도 좋다

유대인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다.


영화를 만들때에 유대인 성서학자들에게 고증을 원했고,

열왕기서에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 시삭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의 성전의 보물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싯딤나무로 금으로 칠한 빛나는 나무 상자라면 보물로 여겨서 이집트가 전립품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이집트 당시 수도였던 고센땅 타니스라는 곳에 법궤가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에는 이곳을 발굴하러 간다는 내용이다.


나중에는 미국 CIA 있다고 끝을 맺는다.

1982년에 케냐에서 영화를 그레이엄 헨콕이라는 신의 지문이라는 책을 서서

유명한 사람이 에디오피아에 10 가까이 취재를 사람으로서 법궤를 찾아나서려고 한다.


왜냐하면 에디오피아에 있을때에 악숨이라는 도시에 성모마리아 교회안에 법궤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때문이다.

여기에는 법궤 수호자가 있어서 지키고 있다.

1년에 한번씩 팀카트라는 그리스도의 현현절에 법궤가 행진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레이엄 헨콕이 법궤 내용을 넌픽션으로 책을 썼는데 상징과 봉인이라는 책이다.

책이 유럽에서 사랑을 받았다.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역사적인 추리를 묘사했다.


마지막 부분에 자기도 악숨의 법궤를 보지 못했다.

팀카트 축제에 참석해서 법궤가 행진하는데 천으로 둘러쌓여있었다

흰천으로 둘러쌌느냐고 묻자 여기에 강한 빛이 나와서 빛을 보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천으로 쌓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교회안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진을 하는 동안에도 법궤 수호자는 계속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디오피아 기독교 전승에서 나오는 법궤는 유명한 시바여왕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솔로몬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고 역사책에 나온다.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 남쪽 예멘 지역을 말한다.


그곳은 향품, 향류를 사용하는 향의 출산지이고, 국제무역을 하기 좋은 곳이다.

국제무역을 위해 방문했다.


이디오피아 역사에는 이둘사이에 태어난 아들 메넬렉이 이디오피아의 초대 왕이라는 것이다.

이디오피아 황제가 한국에 온적이 있는데 225번째 황제라는 것이다.


1970년대에 군사 구테타가 일어나면서 황제 제도가 사라졌다.

첫번째 아들이 솔로몬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집트 시삭이 쳐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메넬렉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법궤와 보물을 가지고 이디오피아로 갔다는 것이 이디오피아 기독교 전승이다.

정확히는 법궤에 대해 모른다.


르호보암 5 이후에 법궤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전에는 사무엘 이야기에서 나왔다.

법궤는 이집트적인 종교적인 제의유물이다.


오늘날 카이로의 2층에 가면 법궤를 볼수있다.

투탄카문에서 나온 법궤이다.

나무상자이고, 이동하기 쉽게 가마로 채가 있고, 상자 위에는 그룹대신에 아누비스라는 이집트의 신의 형상이 있다.


아누비스는 야생 들개의 현현이다.

투탄카문의 왕의 내장을 보관하는 항아리 자체는 네겹으로 둘러싼 나무상자로 되어 있다. 금분으로 칠해져있다.

나무로 만든 상자이고, 이동할수 있고 ,금박을 입혔다면 이집트적인 제의도구이다.


법궤를 만지는 사람이 죽고, 요단강을 건너고 도중에 끊어지는 것으로 신비스럽게 우리에게 여겨지지만, 이집트의 종교적인 전통의 제의이다.

또한 금송아지도 이집트의 암소여신 하토르와 황소 아피스 라는 소를 섬기는 이집트 종교가 이집트에 많았다.

아론이 만든 송아지도 이집트 적인 형상이었다.

 

예루살렘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님의 무덤이다.

오늘날 골고다에 가면 성안에 간다.

오스만 터어키가 만든 성벽이다.


성안에는 아랍 사람의 상점이 호객행위를 한다

그곳에 가야바법정,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길을 갔다는 비아돌로사 슬픔의 , 십자가의 길이 있다

그길을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메고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과연 2천년의 오리지널 장소인가?

성묘교회에 가봐야 카톨릭, 그리스정교회, 이디오피아 기독교, 여러 교단이 자기 위치를 선정해놓고, 향불을 피우면서 조각이 있고, 성화가 있다.

골고다 언덕은 찾아볼수 없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아침에 예수님을 정원지기를 착각할 만한 정원이 있었던 한적한 곳을 찾아볼수 없다.

성공회측에서 19세기에 골고다에 대한 다른 견해를 내었는데 헤골처럼 생긴 지역에 보니까 무덤이 있었고, 그곳을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이야기했다.

오늘날 정원무덤이라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무덤은 구약시대의 것이다.

무덤양식자체가 구약시대 것이다.

오늘날 예루살렘 성안에 골고다가 그리스도의 무덤인가?

거의 99프로 확률이 높다.


요세푸스 학자가 기록한 것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어머니 헬레나가 326 예루살렘에 왔을때 원래 골고다 자리에

로마황제가 비너스 여신을 위한 신전을 세웠고, 헬레나가 그곳을 헐고 발굴을 하자,

그리스도의 나무 십자가를 발굴했고, 위에 기념교회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회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성묘교회자체는 십자군이 세운 것이지만, 군데군데에 비잔틴 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기념교회가 세워지다 보니까 예수님이 묻히신 벤치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은 돌로 파네고 원형의 광장으로 만들었다.


위에다 오늘날 대리석 기념 성소를 놓은 것이어서 여러 가능성으로 볼때 그곳이 골고다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 모습을 지금은 발견할수 없을 뿐이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무덤은 교회 역사에서 이야기하는 장소인 동시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의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성벽 안에 있지만, 신약시대에는 성벽밖에 있다는 것이 고고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옮겨옴)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