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창극 유산 한데 모아보라… 어디 오페라가 부럽겠나”

안숙선 명창

 

‘이젠 소리 듣는 사람도 좀 배워라.’ 판소리, 가야금 병창, 창작 판소리, 창극을 종횡무진하는 안숙선(63) 명창의 꾸짖음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다소 여윈 체격에다 무대 위에서의 강단 있는 모습과는 달리 목소리는 낮고 나긋나긋했지만 꾸짖음은 제법 단호했다. 그는 국악이 우리 유전자에 자연스레 담겨 있다고 믿는 쪽이다. 국악이 푸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사람이라면 언젠가는 국악이 몸에 스미게 되니 뭐 그리 안달할 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즈음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좀 심하다. 안 명창은 “우리 소리를 들으러 오는 관객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어쩌다 찾아오는 관객들도 듣는 훈련이 안 돼 있으니 판소리의 사설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그는 우리 전통음악
대중화를 위해 40대 때 ‘우리 소리를 통한 융화’를 꿈꿨다. 양악과 국악의 접목 같은 단편적인 방식이 아니라 아예 장르를 넘어서는 융화였다. 예컨대 현대시나 소설 또는 미술과 국악의 만남을 꿈꾸기도 했다. 그는 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한 대목을 판소리로 만들어 노래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한때 소리로 만들었던 서정주 시인의 시 ‘국화 옆에서’처럼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전통음악을 다시 천착하고 깊이 있는 소리를 만드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 다른 장르와 작업하면서 시야도 넓어지고 반성할 건 반성하면서 자기 음악의 길을 찾아가게 됐다”는 것.

한국의 소리를 이끄는 안 명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기능보유자로 여기저기 국악을 알리는 데 열심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이기도 한 그는 지난 4월27일부터 5월1일까지 남원에서 열린 춘향제 제전위원장도 맡았다. 안 명창은 창극에서 궁중무용, 민속 무용, 연희, 춤, 줄타기 등 유산을 모아서 보여주면 세계적 오페라 못지않은 음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수백억 원을 들여서 공연을 하는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을 예로 들기도 했다.

그는 공연 전에는 목소리를 아끼기 위해 사랑하는 손녀와의 대화도 자제한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그는 5월 말과 이달 15일 두 차례에 걸쳐 무려 4시간 넘게 인터뷰에 할애했다. 우리 국악을 알리겠다는 열성의 발로다. 조건을 달았다. 잘한 부분뿐만 아니라 잘못한 점도 다뤄달라는 것.

수리성으로 좌중을 압도하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무대에서와 달리,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대화를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조용함이 오히려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지난 7일에는 동네 노인들을 위한 공연을 그의 집 연습실에서 하기도 했다. “옆의 친구가 건네는 말 한마디가 의외로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단아하면서도 맑았다. 특히 그는 한류 바람과 관련, “이제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한류를 확산하는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안 명창은 우리 소리의 가치를 모르는 대중들이 답답한 듯했고, 그래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춘향제 제전위원장으로서 무대를 박차고 나가서 지리산 둘레길을 함께 걷는 이들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기발한 공연도 기획 했는데,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번에 안숙선과 함께 하는 둘레길 기행을 했어요. 비가 많이 왔는 데도 500명 이상이 왔어요. 마치 서편제 한 장면처럼 걸어가면서 소리도 하고 어느 한 곳에 가서 공연하려고 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아쉬웠어요.”

―춘향제를 다른 축제와 차별화해 특색 있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까요.

“프랑스 아비뇽, 영국 에든버러 등 세계 유수의 축제처럼 춘향제에 외국인들이 오면 매우 좋아할 텐데…. 남원은 참 좋은 곳이에요. 지리산 줄기마다 폭포가 있고 인근 구례에 가면 화엄사도 있고 볼거리가 많아요. 명창들이 수련했던 폭포를 찾아가 수련을 재현해볼 수도 있지요. 춘향이와 이 도령을 선발해 함께 섶다리를 걷거나 사또 행차 재현 때도 격식과 의복 등을 제대로 고증해서 행렬을 구성하면 문화재를 한눈에 보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제전에는 미꾸라지 잡는 행사도 있었는데, 그걸 판소리와 연계해 ‘미꾸라지 잡아서 춘향아씨 드리자’는 판소리 한 대목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요.”

―평소에 “해외에 나가면 판소리에 대한 반응이 놀랍다”고 하셨는데, 판소리를 통한 한류 전파도 가능할까요.

“최고의 동양박물관으로 유명한 파리의 기메 박물관에서 제가 춘향가를 30분 정도 했는데 관장이 엄청 울었다는 거예요. 나중에 나올 때 눈이 빨개졌다고 하더군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께서도 말씀하셨는데, 워커힐에서 열린 판소리 공연에서 일본 사람들이 계속 울었다고 해요.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운다’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게 영국에서 아시아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영국인들이 판소리가 극적이라고 하더군요. 어떤 때는 조용하고 서정적이다가도 어떤 때는 긴박하게 몰아가는 요소 등을 판소리가 다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건 다 알아듣겠는데 다만 한국인 관객들이 슬픈 대목에서 막 웃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한국적인 해학이죠. 이몽룡이 찾아왔을 때 월매가 좋아하다가 거지꼴을 보고 ‘잘 됐구나. 우리 춘향이는 죽었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이 막 웃어요. 외국인들은 이런 부분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젊은 여자, 나이든 여자, 나쁜 사람 등을 소리로 구분할 수 있겠다고 해요. 소리에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는 크고 작은 색이 있다는 거죠. 파리에는 판소리 마니아도 적지 않다더군요.”

―서양 문화와 다른 국악 한류가 부챗살처럼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판소리는 삶의 소리잖아요. 유럽이나 미국이나 사람 살아가는 것이 다 똑같은 거니까 어디에서나 공감대가 형성이 돼요. 춘향전을 하면서 농사 짓는 장면이 나오고, 줄타기 공연을 할 수도 있죠. 이몽룡이 어사가 돼서 부모를 찾아가 어떻게 하는지 등의 예법도 창극에서 다 나와요. 이런 것들을 무대에서 다 보여주면 소리 속에 한국인의 삶의 원형, 방언 등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감탄해마지 않겠죠. 한국의 정신이 담긴 제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아, 저게 한국이로구나’ 생각할 때 뿌듯함을 느낍니다. 미국에서 3일간 춘향가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어떤 분은 공연이 끝나고 티타임에 제가 워낙 조그마하니까 ‘큰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생음악으로 소리를 듣고 싶을 정도로 좋다’(웃음)고 하더라구요.”

―아홉 살에 전통음악을 시작하셨는데, 젊었을 때는 연습벌레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하더군요.

“자고 일어나 소리를 안하면 오늘 할 일을 안 한 것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소리를 안 하면 좀이 쑤시고 그럴 정도로 소리 공부를 많이 했죠. 1980년대 국립창극단 시절에는 개인 연습실이 없었죠. 복도든 어디든 사람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연습을 했어요. 다 퇴근하고 난 뒤 지하 보일러실에서 연습을 했는데, 판소리가 멀리서 들으면 귀신이 흐느끼는 소리 같잖아요. 머리도 앞으로 내려오고. 수위 아저씨가 깜짝 놀라서 누구냐고 묻기도 했죠. 소리에 미치다시피 했는데, 그렇지만 혼자서는 참 하기 힘든 것 같아요. 김동준, 김득수 선생님 등 소리 좋아하시는 고수님들이 많았는데 잘한다고 해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더 하라고 하시기도 했죠. 그 덕분에 소리 공부 좀 했죠.”

―소리하는 꿈을 꾸신 적은 없나요.

“왜요, 많죠. 무대에 서려면 늘 긴장해서 그런지 다급한 꿈을 많이 꿔요. 꿈에서 공연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창극대본을 하나도 외우지 못해 ‘안돼, 안돼’ 그러다 끝날 때도 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극장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고장이 나서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꿀 때도 있었죠. 춘향이는 머리를 빨리 예쁘게 빗고 나가야 하는데 머리가 풀어져서 자다가 ‘내 머리, 내 머리’ 외치기도 하죠. 중요한 공연을 앞두면 밤에 몇 번이고 깨죠. 밤에 아∼하고 소리를 내보기도 하고.”

인터뷰 도중 안 명창에게서 춘향가의 눈대목인 ‘쑥대머리’를 배웠다. 평소에 이 대목을 자꾸 가요처럼 부르게 된다고 하자 안 명창은 “평상시에 말하듯이 하다 점점 고조시켜 보라. 편하게 말하듯 하다 극적인 부분에서 올리면 된다”고 끈기 있게 설명해줬다. 그는 “평소 말할 때 책을 읽는 투로 안 한다”고 했다. “한 문장 소리하는 시간을 긴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 대목씩 한 장단씩 하면 금방 할 수 있다”며 “판소리 한 대목을 하면 어느 모임에 가도 인기가 짱일 것”이라고 말했다. 차분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진행되는 안명창 특유의 교수법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이 먹어가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고, 계속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하는 분도 계신데, 안 명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갈수록 대중 앞에서 소리하기가 부담스럽고 겁이 납니다. 나이 먹은 만큼 소리 듣는 분들이 더 공감을 해야될 텐데, 또 ‘나이 먹었는데 소리가 저 정도야’ 이럴까봐 걱정이 돼요. 젊었을 때의 서슬 퍼런 힘을 다 낼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온몸을 이용해 잡아당기고 밀고 하는데 차 같으면 뒤로 밀린다고 할까 무뎌지고, 그런 것들을 전광석화처럼 빨리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부분이에요.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다만 젊어서는 가사를 외우고 장단 안 틀리면 닥치는대로 나가면 됐지요. 하지만 지금은 사설이 갖는 의미가 다시 느껴져요. 그래서 이제는 더 깊이 있고 멋있는 소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북하고, 또 관객하고 휘어잡고 놀아야 판이 어우러지지 어렸을 때처럼 곱게 소리만 내서는 안 되잖아요. 갈수록 숙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공연 도중 실수를 하신 적은 없나요.

“평생 음악을 했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있죠. 얼마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심청가를 하다 ‘그때 심청은’ 해야 하는데 ‘그때여 춘향이가’라고 한 거예요. ‘아이구 제가 심청이라고 해야 할 때 춘향이로 했네요’ 하자 관객들이 웃는 거예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잖아요, 봐주세요’라고 했죠.(웃음)”

 ―관객들은 깊이 있는 부분에 대해 모르겠지만 국창으로서 혼자만의 예술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옛 판소리 귀명창들은 사설을 다 꿰고 있어요. 이 대목을 저번에는 저렇게 했는데, 오늘을 어떻게 기가 막히게 넘어갈까에 집중해서 듣지요. 마치 축구팬들이 골을 기다리듯이 기다리죠. 여기에서 신기가 나와서 자기도 모르게 우주를 뒤집어 놓을 듯한 창을 할 때가 있어요. 저번에는 이런 소리가 안 나왔는데 기가 막히게 넘어갔을 때 관객들은 악 소리도 못지르죠. 온몸에 소름만 돋는다고 해요.”

―판소리가 세대를 넘어가지 못하고 단절돼 가는 느낌인데, 안타깝지 않습니까.

“새로운 문화와 접하게 되니까 일시적으로 새로운 음악과 만나고 그러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판소리가 없어질 뻔한 적도 있었는데 젊은이들이 뿌리 찾기를 했어요. 서편제 영화가 나온 뒤 판소리를 모르는 사람도 몇 번씩 봤다고 하지요. 사람이 마치 고향에 돌아와서 김치맛을 그리워하듯이 결국 우리 것을 찾게 된다고 봐요. 교육이 중요해요. 어렸을 적부터 우리 소리도 듣고, 우리 악기도 연주해봐야 합니다. 유치원 때부터 단소, 가야금, 소고, 장구 등을 배우게 했으면 좋겠어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우리 악기가 중요한데 그런 걸 배우지 않다보면 나중에는 음악으로 취급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하시지만 창작 작업에도 공을 많이 들이고 계신 듯합니다.

“문학 하시는 분들이 제게 시를 창으로 많이 만들어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하는 소리 작업이 워낙 덩어리가 크니까 거기까지 손이 안 가는데 시와의 만남은 앞으로 계속 해봐야 겠다고 생각해요. 어제 양평에서 제 음악세계를 이야기하고 음악을 들려주는 강의를 했어요. 양평에 사시는 한 분의 시를 즉석에서 불렀어요. ‘노을’이라는 시를 잠깐 읽어보니 이미 노년기인 따님 눈에 보였던 어머님의 삶이 들어 있었어요. ‘붉은 눈시울로 굽어보는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 ‘천만 번 삭이셨다’는 대목이 가슴에 와 닿더군요. 또 시에 ‘명주필 열두 폭에 치잣물 먹여서 너울너울 비단길 빈몸으로 떠나가셨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나름 생각하다 소리를 했는데 시인이 막 우셨어요. 우리 삶 속에서 나온 말들이 소리짜기가 아주 좋아요. 얼마 전 세종대왕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말이 이렇게 훌륭하기 때문에 우리 소리가 잘 짜여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에 ‘논개’라는 창작 판소리도 시도하셨는데, 완성시킬 계획은 없으신지요.

“제가 만족할 수준에서 판단하면 20∼30%도 제대로 짜지 못했는데, 가사도 다시 고치고 언젠가는 잘 다듬어서 발표를 해야 할 텐데… 요즘 말로 ‘한국적인 영자와 철수’라고 해도 좋고 이 시대를 살면서 한국 사람으로 행복한 사연, 슬픈 이야기도 짜보고 싶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 오래전인데 못하고 있네요.”

안 명창은 종착역을 그리워하지 않고 소리의 길을 가면서 쉽지 않은 역정을 걸어왔다.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하는 것, 이런 원칙 때문에 초심을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소띠는 일이 많다고 하더니, 내 팔자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제가 기운이 있어서 다 소화해내면 좋은 일 아닙니까.”

 

인터뷰 = 예진수 문화부장 jiny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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