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호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노명자

파리엔 샤넬… 명동엔 명자가 있었다
"최은희·윤복희·펄시스터즈·엄앵란… 내 손에서 다시 태어나"

신세대 스타 공효진(왼쪽)이 1958년 노라노 패션쇼를 위해 배우 문혜란이 입었던 드레스를 복원해 입고 보그와 촬영했다. /보그코리아 제공

누구는 그를 '패션계의 전설'이라 하고 누구는 그를 '대한민국 패션의 지존'이라 치켜세우지만, 노라노(본명 노명자·84)는 정작 코웃음을 쳤다. "기껏 옷 만들어 돈 받고 파는 일이 뭐 대단하다고. 패션이 예술? 웃기는 소리예요."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현역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비결을 묻자, 이번에도 무 자르듯 명쾌한 답이다. "해야 할 일 그냥 하면서 살았지요. 단순하게 살아야 해. 뭐든지 생각을 많이 하면 안 돼요."

깐깐하고도 거침없는 노장이지만, 지난 22일 서울 호림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라 비앙 로즈(장미빛 인생)'전(展·6월 2일까지)에서는 눈시울을 붉혔다. 1952년 서울 명동에 부티크 '노라노의 집'을 연 뒤 대한민국 1호 패션 디자이너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60년 인생과 대한민국 패션사를 되짚어보는 무게감 있는 전시. 먹고살기도 빠듯했던 시절, 디자이너의 옷을 알아보고 60년간 고객이 되어준 여인들을 초청해 큰절을 올렸다. 전시장에는 강희숙·정구호 등 후배 디자이너들이 헌정한 작품이 함께 전시됐다. 기아자동차 디자이너 20명은 노라노 의상의 무늬를 차용한 자동차 20대를 제작했다.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씨는 "불우한 시절을 이겨내고 패션세계를 개척한 샤넬처럼 황무지 대한민국에 패션사를 열어준 여인이 노라노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도 판탈롱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30년 전에 만들었다는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노라노가 인터뷰에 응했다. 구식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옷이었다.

“30년이나 된 헌옷”이라며 노라노 선생이 입고 나온 실크 블라우스는 최신 명품에 견줘도 손색이 없었다. 은근한 유머로 인 터뷰가 즐거웠다. “젊은이들이 날 좋아해요. 나이 든 척을 안 해서.(웃음)” /이덕훈 기자

패션이 예술? 웃기는 소리

―전시 제목이 '장미빛 인생'입니다.

"처음엔 거부감 들더라고요. 내가 무슨 장미꽃 인생인가 싶은 게. 하기야 뭐,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했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았으니 장미꽃 인생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웃음) 내용이야 뭐 어찌 됐든 축복이지요. 눈물로 시작해 웃음으로 끝나는 게 우리 인생이니까."

―영화배우 신성일씨가 선생님을 '대한민국 패션의 지존'이라고 했더군요.

"요즘 엄앵란씨 난처해지는 일을 자꾸 벌여서 너무 미운데, 그런 칭찬을 해주니 고맙긴 하데요. 두 사람 다 오래 알고 지낸 특별한 분들이에요."

―60년간 노라노 의상실을 운영하면서 한 해도 빠짐없이 패션쇼를 했습니다. 열정이 대단하다 못해 극성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죠? 근데 내가 건달이에요. 그냥 건달도 아니고 백수건달. 얼른 보면 내가 앰비셔스(ambitious)해 보이지만 전혀 아니거든. 야망과 도전은 달라요. 나는 챌린지(challenge), 도전하는 사람이지 야심은 없어요. 뭐든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하지만 1등이 돼야겠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하는 목적의식 같은 건 없다고요. 잘되면 좋고 안 돼도 오케이! 계산 머리도 도통 안 돌아가서 날 키워준 외할머니가 밤낮 '바보'라고 했어요.(웃음)"

―이번 60주년 전시를 위해 국내외에 있는 노라노 의상을 시대별로 수집했다고 들었습니다. 수십년 전 만든 옷을 다시 만나니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400벌 가까이 모아서 60벌을 골라 전시합니다. 50년대 옷도 몇 벌 되는데, 젊음이 좋다는 생각이 들데요. 디자인도 잘했고 아이디어도 패턴도 아주 좋더라고요. 서른 살 전후로 생산력이 가장 왕성했던 것 같아요. 그 시절은 시간에 쫓기지 않았어요.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공들여서 옷을 만들었지요. 인건비 무시하고 만들었던 시절이라 좋은 작품이 나온 것 같아요."

―전시할 작품 구하려고 파리까지 가셨다면서요?

"내가 한복을 응용해 만든 '아리랑 드레스'라는 게 있는데 그걸 갖고 계신 분이 있었지요. 재불 교포인데 친척분께 물려받았대요. 기증해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이번 8·15 행사 때 입어야 하고, 자기 다섯 살 딸에게도 물려줘야 하니 절대 안 된다고, 반드시 돌려달라고 하더군요.(웃음)"

엄앵란의 헵번 스타일

22일 '라 비앙 로즈'전 개막식에는 60년대를 풍미한 영화배우 엄앵란과 함께 노라노의 미니스커스를 입었던 윤복희, 원로 배우 최지희·정혜선 등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변정수·김고은·김나영 등 젊은 연예인들은 노라노의 60~70년대 의상을 입고 축하연에 나타나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실감케 했다.

엄앵란은 ‘의상은 노라노의 것만!’이란 문구를 영화 출연 계약서에 반드시 적었던 노라노 마니아다. 엄앵란의 패션 코드였던 오드리 헵번 스타일의 귀엽고 발랄한 원피스가 모두 노라노 작품이다. 엄앵란뿐만이 아니었다. 부산 피란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배우 최은희를 비롯해 김지미·조미령·도금봉 등 당대의 최고 스타들이 노라노 옷을 입었다.

―부산 광복동 시절부터 최은희 선생과 우정을 쌓아왔다던데요.

“카리스마 만점인 여성이죠. 최은희가 무대에 나오면 꽉 차잖아요? 그걸 김지미가 못 따라갔어요. 미모보다는 무게감. 최은희 대를 이을 사람 나오기 힘들 거예요. 영화 ‘춘희’에 최은희씨가 입고 나온 투피스는 정말 멋졌죠. 영화 ‘4월이 가면’에서 문희가 입은 코트도 좋았고. 오리지널을 구할 수 없어서 이번에 복원했어요.”

―영화에서 노라노 의상을 제일 먼저 입은 배우는 조미령씨라고 하던데요.

“지금 하와이에 살아요. 그러잖아도 이번 전시에 좀 와달라고 했더니 어지러워서 비행기를 못 탄대요. 나하고 동갑이지요.(웃음) 전화로 조미령이 내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디다. 그 당시엔 영화를 해도 개런티를 많이 못 받으니 의상을 준비하기 힘들었는데 내가 돈 걱정 하지 말고 의상 한번 멋지게 해보자고, 돈은 나중에 생기면 줘도 된다고 그랬대요. 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말이죠.(웃음)”

―김지미씨와는 어땠습니까?

“통이 큰 여장부지요. 친하긴 했지만 내게 옷을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 기억나는 건, 영화 ‘양귀비’를 찍을 때였죠. 제목이 같은 영화를 저쪽에서는 도금봉이 주연을 맡았는데, 김지미가 내게 최고가로 의상을 맡기면서 10만원을 웃돈으로 얹어줘요. 도금봉 의상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더군요. 여배우의 세계는 그렇더라고요.(웃음)”

―엄앵란씨가 노라노 옷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앵란씨 어머니가 내 옷을 좋아해서 딸을 데리고 명동 의상실에 자주 왔지요. 단종의 젊은 왕후로 데뷔해서 일약 스타가 된 뒤에는 의상을 내가 전적으로 다 했어요. 날씬하고 정말 예뻤지요.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이 인기를 끌면서 플레어스커트를 많이 만들어줬는데 그게 히트하데요.”

1 영화배우 엄앵란 2 탤런트 전향이 3 미스코리아 박현옥

 

앙드레 김은 엔터테이너

―그런데 신성일씨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릴 때는 노라노가 아닌 신인 디자이너 앙드레 김에게 웨딩드레스를 맡겼더군요.

“그때 내가 한국에 없었어요. 있었다 해도 그런 거 가지고 섭섭해할 사람 아니에요. 근본이 건달이라고 했잖아요.(웃음)”

―돌아가신 앙드레 김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분은 그분대로 잘난 사람이지요. 내 첫 패션쇼부터 와서 본 사람이라 각별하고요. 패션보다는 엔터테이너에 가까운 분이죠. 그 옷을 일반인이 입을 수가 있나요? 앙드레에게는 앙드레의 세계가 있고, 노라에게는 노라의 세계가 있으니 비교할 일은 아니지요. 안 계시니 많이 섭섭해요.”

―가수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도 노라노의 작품이라던데, 사실인가요?

“미국서 들어올 때 입은 그 스커트는 아녜요. 귀국해 서울서 첫 리사이틀 할 때 입은 미니드레스를 내가 만들었죠. 한국에도 패션 디자이너가 있구나, 하면서 주문하러 왔더군요. ‘웃는 얼굴 다정해도’ 부를 때 입은 A라인 미니드레스가 내 작품이에요. 순수하고 열정적인 윤복희와 명콤비를 이뤄 1960년대 쇼 비즈니스의 한 축을 담당했지요. 지방시가 헵번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처럼 나 역시 윤복희 이미지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해요.”

―펄 시스터즈의 판탈롱 패션도 만들었죠?

“윤복희 소개로 알게 됐어요. 처음엔 촌스럽다고 느꼈는데, 신중현의 ‘커피 한잔’과 ‘님아’를 부르는 걸 보고 감동했지요.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는 대조적으로 판탈롱(나팔바지)으로 무대 의상을 만들었어요. 방송에 출연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덕에 노라노의 이름도 알려졌지요.”

―윤정희씨는 안 했나요? 정윤희·장미희·유지인 트로이카는요?

“아이고, 그들만 해도 젊은 세대죠. 그리고 나는 무대 의상, 영화 의상에서 빨리 손을 뗐어요. 처음 의상실 열어 손님이 없으니 입에 풀칠하려고 배우들 의상을 만들기 시작한 거지, 난 일반 여성들이 입고 싶어하는 옷을 만들고 싶었다고요. 게다가 영화 제작자들이 날 무척 미워했답니다. 선금 받고 의상을 해주는 데다 배우들이 죄다 노라노 의상을 넣어야 출연한다고 우기니.(웃음) 그런데 요즘은 디자이너들이 배우들에게 무료로 의상 협찬을 해준다고 합디다. 자존심도 없지요.”

1 젊은 시절의 노라노 2 영화배우 남미리 3 가수 윤복희

 

‘인형의 집’을 뛰쳐나간 노라처럼

 

자서전 ‘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황금나침반)에 소개된 그녀의 인생은 열아홉 살까지만 순탄했다. 부친 노창성은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송국을 창립한 주역이고, 모친 이옥경은 경성방송 초대 아나운서다. 인천 세관장으로 영친왕 영어 교사까지 지낸 외할아버지가 무남독녀인 어머니에게 물려준 재산으로 노라노는 유복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러나 경기여고 졸업 후 장교와 결혼, 1년 만에 이혼하며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노명자’란 이름이 ‘노라노(Nora Noh)’가 된 것은 상징적이다. “(입센 희곡)‘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처럼 나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1947년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만 해도 이혼은 여성의 최대 수치여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낮에는 디자인 공부하고 밤에는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며 주경야독한 노라노는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를 졸업하고 돌아와 1952년 서울 명동에 의상실 ‘노라노의 집’을 연다.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패션쇼는 노라노의 것이었다. 1970년대에는 기성복에 도전한다. 1979년 한국산 실크로 제작한 노라노 기성복으로 뉴욕의 메이시 백화점 15개 쇼윈도를 점령한다.

―자서전을 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였다는 어머니가 정말 미인이시더군요.

“그래서 어머니를 알고 있는 분들은 딸들이 하나같이 못생겨서 놀라곤 했답니다.(웃음)”

―패션을 생업으로 삼은 것에 어머니 영향이 있었을까요?

“아마 우리 어머니가 양장을 거의 최초로 하신 분일 거예요. 수송국민학교 앞에 불란서 여자들이 하는 양장점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옷을 거기서 맞춰 입으셨지요. 어머니 몰래 옷 입어보고 구두 신어보는 게 저의 낙이었어요. 4학년인가 5학년 때부터는 내가 직접 미싱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어요. 어머니가 당신 치마를 뜯어서 딸들 블라우스를 만들었는데, 재봉틀로 대충 박아서 해주시니 맘에 안 들었죠. 그때는 여성 잡지 부록으로 옷 패턴이 들어 있어서 그걸 가지고 혼자 배웠어요. 어느 날은 프린트된 린넨(마)을 어렵게 구해 와서는 주름스커트를 만들었는데, 몇 번 신나게 입고 다니다가 물에 빨았더니 확 줄어들어요. 마는 한 번 세탁한 뒤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웃음)”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갈까 봐 서둘러 결혼했다가 1년도 안 돼 이혼합니다. 혹독한 시집살이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텐데요.

“집안의 부끄러움이었죠. 갈 데도 없어서 친정집 식모 방에서 3개월을 살았어요. 독립하려면 돈이 있어야겠다 싶어 미 군정 취직을 목적으로 그날부터 영어 공부 하고 타이프 치는 법을 배웠지요. 운 좋게 군정청 보건후생부 말단 여사무원으로 취직을 했고, 얼마 후 외환은행으로 옮겼다가 내 재능이 패션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예요. 관사에서 자주 열리는 파티를 준비하면서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기모노를 싼값에 사서 드레스를 만들어 입었더니 다들 놀라더군요. 이혼은 쓰라렸지만 후회하진 않아요. 가정을 못 지켰다고 지탄을 받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율 브리너도 사 간 노라노 실크

1 가수 펄 시스터즈 2 노라노의 80년대 줄무늬 원피스를 입고 전시 개막식에 참석한 모델 변정수. /뉴시스

―오히려 아버지께서 딸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니 너도 제2의 인생을 시작해보라고 하셨어요. 유학 마치고 돌아와 미군 쪽 요청으로 미니패션쇼를 하게 됐는데, 이튿날 모든 신문에 여자들이 웃통을 벗고 쇼를 했다고 비난하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그걸 읽고 낙담해 있으니 아버지가 찾아오셨어요. 이 정도 가지고 마음 상할 거면 그만두라고, 호평보다 혹평이 자신을 빨리 알리는 길이라고 하셨지요.”

―미국에서 살아도 됐을 텐데 왜 굳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까.

“그러잖아도 미국 친구들이 붙잡았어요. 한국은 곧 전쟁이 날 거고 빨갱이 세상이 될 테니 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미국이 불편했어요. 우리와는 하늘과 땅 차이로 사니 여기서 산다는 건 나를 기만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한국 돌아와보니 패션 공부한 게 후회는 되더라고요.(웃음) 차라리 의사 공부를 했으면 전쟁에서 다친 부상병을 살리기라도 하잖아요? 그래서 전쟁통에 육군병원에서 모르핀 구하러 다니는 자원봉사를 했어요. 영어를 할 수 있으니까 미군 부대에 가서 눈물로 구걸해 왔지요. 전쟁 후에는 식량이 없어 굶는 사람이 태반이니, 그때는 또 농업을 공부했으면 식량 증산하는 데 도움이나 되지, 패션이란 게 도통 쓸데가 없더라고요.(웃음)”

―미국 메이시 백화점의 쇼윈도를 노라노 옷으로 채웠다는 얘기가 흥미로웠습니다.

“미국에선 실크가 굉장히 비싸서 상류사회에서나 입었지요. 그 가격을 끌어내려서 일반인도 입을 수 있게 만든 게 노라노 옷이었어요. 유학 시절 공장에서 일하면서 파워미싱부터 프레싱(다림질)까지 옷 공정을 섭렵한 덕분에 내가 패턴은 아주 잘 만들었어요. 실크를 조금 사용하고도 맵시 있는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만들어내니 미국인들이 열광하더군요. 이탈리아 실크드레스가 500달러면 내 옷은 150달러였으니까요. 배우 율 브리너가 여자 친구한테 선물한다며 우리 매장에 와서 옷을 사 갔답니다.(웃음) 실크도 90% 한국산을 사용했어요. 한국 농촌을 돈벌이하게 하니 에너지가 솟았고, 나도 조국의 발전에 한 다리 담근 셈이니 뿌듯했지요.(웃음)”

―프린트 공장도 직접 운영했습니다.

“메이시 백화점의 첫 번째 컬렉션이 히트하고 두 번째 컬렉션은 더 성공하니까 카피들이 생겨나데요. 홍콩에서 ‘노라노 디자인’이라면서 값싸게 가짜를 파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 프린트 공장을 시작했죠. 프랑스에 가서 미술 서적을 잔뜩 사 와서는 시대감각에 맞는 프린트를 우리 공장에서 직접 찍어냈어요. 그걸 엔지니어 프린트라고 하죠. 그거 시작할 때 여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다들 말렸지만 내가 그랬어요. 프린트 공장을 첩처럼 생각하고 하겠다, 손해가 나도 감수하겠다. 세컨드라는 게 원래 생산성은 없잖아요.(웃음) 그래서 미국 수출 15년을 버텨낸 거예요.”

―집에서 속옷 바람으로 다니는 주부들을 위해 점퍼스커트를 만들어 히트했죠?

“60년대 얘기예요. 집을 구하러 다니는데 가는 집마다 여자들이 고쟁이만 입고 앉아 있어요. 돈 안 들이고 멋진 옷을 입힐 수 없을까 싶어 제일 싼 나일론에 빨간 장미꽃이 그려진 원단을 사서 소매 없는 펑퍼짐한 원피스를 만들었죠. 막 빨아 입을 수도 있고. 남편들이 감사 전화를 얼마나 많이 걸어왔나 몰라요. 우리 마누라가 예뻐졌다고.(웃음)”

패션이 없는 시대


 

―노라노 옷의 생명력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참 오래 입었다며 고마워하는 고객 많아요. 3대에 걸쳐 입는 집도 있더군요. 미국 기자가 내 패션쇼를 보고 ‘노라노 옷의 매력은 잘 절제된 엘레강스(well controlled elegance)’라고 하더군요. 멋이 절제돼야지요. 튀면 이미 멋이 아니에요.”

―그래서 노라노 옷은 요즘 입어도 올드(old)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 봅니다. 요즘 젊은이들 입고 다니는 옷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의 실종’이라고도 하는.

“시원하고 좋지요 뭐. 유행이 그러면 그렇게 입는 거예요.(웃음) 사실 지금은 패션이 없는 시대예요. 지난 100년 동안 급속도로 변화해왔으니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지요. 무슨 라인, 무슨 라인 하는 것에 대중이 식상해요. 디자이너들에게 좌지우지되는 게 싫은 거지. 안티패션 시대라 이럴 땐 꼭 이렇게 입어야 한다는 법이 없어요. 패션사로 보면 이것도 거쳐야 할 한 흐름이라고 봐요. 나쁘지 않아요.”

―‘놀고먹는다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더군요. 하루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 지겹지 않습니까.

“재주가 열심을 못 따라가요. 왜 정열을 가지고 했느냐면, 패션을 두고 밤낮 사치품이라고 꼬나보니까 내 마음에 상처가 됐어요. 그래서 열심히 했지요. 60년을 쉬지 않고 일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샤넬도 88세까지 작업을 했다지만, 그녀는 은퇴했다가 70대에 복귀한 거니까 일한 시간만으로는 내가 샤넬을 앞지른 셈이에요.(웃음) 개인적으로는 발렌시아가를 제일 좋아해요. 튜닉이니, 판탈롱이니 하는 패션 트렌드가 다 그 사람 머리에서 나왔어요. 진정한 명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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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인터뷰. /이덕훈 기자 김윤덕 기자 si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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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을 즐겨 입습니까.

“아니요. 나는 내 옷만 입어요. 살 필요가 없죠. 내가 그보다 더 잘 만들 수 있는데.”

―디자이너의 자존심일까요?

“한번 사 입어볼까 하는 생각에 아르마니에 가서 코트를 입어봤는데 패턴이 나쁜지 몸이 불편하더군요. 패턴은 역시 샤넬이 좋았는데, 거기도 요즘 이상한 옷들을 만들더군요. 요즘은 파리를 이 잡듯이 돌아다녀 봐도 ‘아, 정말 잘 만들었다’ 하는 옷이 없어요. 대중 취향으로만 가죠.”

―옷을 잘 입는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많이 보고 많이 입어보는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럭셔리의 반대말이 빈곤이 아니라 천박함이에요. 비싼 명품을 입는다고 멋쟁이가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죠. 그리고 옷이 날개라는데 직장 여성에겐 옷이 무기예요. 옷 잘 입어서 출세한 여자를 내가 많이 알아요.(웃음) 참, 박완서씨의 유일한 사치가 노라노 옷을 입는 거였어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까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으면 돼요. 일종의 욕심이죠. 사람들이 불행한 게 그 욕심 때문이에요. 반(半)건달처럼 사세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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