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에 대해 바르게 알자     

1. “주의 자녀“ 가 “주의 종“ 을 섬겨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여기에서 “종“이란 은유법입니다. 한국과 같은 민주 사회에서는 누구도 남의 종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타인의 “종“이 되는 것은 불법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그리스도인 중 일부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할 때에
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그의 명령대로 행하려는 사람
이라는 은유입니다.
한국 교회는 놀랍게도 이러한 은유를 제도화하고 목사직의 고유명사로 탈바꿈시키고 있음을 봅니다.

목사가 곧 주의 종이라는 인식을 일반화하고 신학의 일부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화의 오류는 고사하고 수사적
용법에서조차도 우스꽝스러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건전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부흥회에서였습니다. 그 유능한 부흥사는 며칠 동안 부흥회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평화와 축복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자녀이며 그리스도가 눈동자처럼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자녀는 모든 질병과 가난과 배고픔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흥회 마지막 날 설교
때였습니다. 그날 설교는 주의 종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주의 종. 즉 그 교회의 담임 목사야말로 그리스도가 친히 부르셨고 기름부어 세우셨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를 섬기듯이, 여러분은 담임 목사를 섬겨야 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월급에서부터 자동차,
주택, 양복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목사를 섬기는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 받는다고 말입니다.

“주의 자녀“ 들이 “주의 종“ 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도대체 가능한 말입니까?

상식적인 용법이라면, “주의 종“ 이 “주의 자녀“ 를 섬겨야 합니다.
그것도 마치 주인을 섬기듯이 그의 종은 그의 자녀를 섬겨야 합니다.

만일 자녀가 종의 잘못을 주인에게 일러바치면 그 종이 살아 남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 “종“이 “자녀“ 보다 우월한 위치
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어쨌든 은유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잘못 적용하여 목사를 제외한 목사의 가족들을 함께 “종“ 취급한
다면 이 또한 무식한 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지칭한 사람에게만 적용이 됩니다.


아마 오랜 신앙생활을 하신분들 치고 제가 이렇게 말할 때 혼란을 겪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자주 오랫동안 대다수의 한국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주의 종“ 인 자신들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주의 자녀“ 들인  교인들에게 “주의 종의 종“ 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셈입니다. 너무나 분명하게 상식과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이지만 너무나도 오랫동안 일치 단결하여 가르쳐왔기 때문에 교인들의 상당수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누가 “주의 종“ 일까요?

먼저 자신이 “주의 종“ 이 아니라 “주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간단히 생각해봅시다.

자신이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아버지가 돌봐주실 것이기 때문에 편안합니다. 즐겁습니다.

떼를 쓸 수도 있습니다. 아양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껏 누릴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아빠가 크게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음대로 할 자유도 있습니다. 설사 실수를 좀 했다 해도 곧 용서를 빌면 됩니다.
자녀에게 냉혹할 부모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이라면 어떨까요? 종의 처지는 다릅니다. 종이 아양을 떤다?  모르지요... 그 일을 위해 선택한 종이라면 몰라도. 마치
강아지를 부러워한 당나귀가 아양 떤답시고 주인 무릎 위에 오르는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진실로 자신이 “주의 종“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인이 가르친 바를 상기해야 합니다. 자신의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주인은 그의 종들에게 종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비유로 가르치신 바가 있습니다.


2. 누가복음 17장 연구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유태인의 배척이 시작될 즈음에 바로 이 종의 비유를 들어 누가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누가는 그의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예리한 필체로 이 비유의 기원과 위치와 의미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7장 5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그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걸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이 누가의 기록은 아마도 시공간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35절까지를 보면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형제의 용서 문제를 거론하고 예수께서 누가의 기록과는 다른 형태의 “종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사한 구조이지만 서로 다른 비유를 쓰고 있습니다.

용서라는 교훈을 두고 보았을 때 마태복음 쪽 사례가 더욱 선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은 그 목적에 있어서 마태의 것과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형제의 용서를 강조하기보다는 이러한 초인적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과 그 믿음의 기원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주의 종“이라는 믿음은 바로 그러한 초인적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너무도 중요한 근거입니다.

첫째, 종은 쉼 없이 일해야 합니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주인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자녀의 처지와는 다릅니다.

만일 자녀라면 게으름을 좀 피울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밤에는 종의 시중을 받으면서 낮의 피로를 푸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은 다릅니다.
종은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해야 합니다. 적지 않은 목사님들이 목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된지를 설교시간에 말하곤 합니다.

새벽기도부터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이 다 쉬는 “주일“에 까지 고되게 일한다고 불평하곤 합니다.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불편하면 “종“ 이 되지 않으면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 중 아무도 목사에게 “주의
종“이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발 목사들은 생색내지 않아 주었으면 합니다.

더구나 일반 성도들이 일주일 내 직장에서 일하고 주일조차 교회에서 봉사하느라고 쉴 틈이 없는 데 반하여, 많은 목사들은 주일의
힘든 노동을 이유로 월요일에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힘들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놀라운 일은 한국 교회의 적지 않는 목사들이 주5일제를 반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대하는 명분이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하
라고 하셨는데 왜 5일만 일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말이 이틀 일 경우에 교인들이 산으로 들로 놀러가느라고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 때문
입니다.

참으로 한국 교회의 게토화를 보여주는 해괴망칙한 주장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전자는 성경의 정신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오류이며, 후자는 다른 방법으로 극복해야할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도 자신의 자녀들이 좀 더 나은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종의 태도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사례는 “연탄“ 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연탄을 자세히 살펴 본 적이 있습니까?

연탄은 자기 몸을 태워 남을 덥혀 줄 뿐 만 아니라 자기 몸을 부숴 길을 미끄럽지않게 합니다.

종의 목숨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이 목숨은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입니다. 물론 종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은 오직 주인이 쉬라고 할 때에만 쉴 수 있습니다. “수고했네, 이제 가서 쉬게“라는 주인의 말이 없으면 종은 묵묵히 주인이 명령
한 일을 해야 합니다.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면서 자신을 “주의 종“ 이라고 지칭하는 자에게는 복(福)이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주의 자녀“ 라고 지칭한다면 용납할 만 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명령해도 흔히 농땡이를 부리기 마련이며, 또 사실상 그 자
신도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종은 주인이 먹고 남은 걸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비유가 강조하는 바입니다.

종이 주인과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 물론 주인이 그렇게 명령하는 경우에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누가의 비유는 일상적으로 그렇
지 않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주인이 먹을 음식을 차려주고 그가 즐겁게 먹을 수 있도록 수종들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종은 주인이 먹고 남은 바를 정리해야
하는 데 대부분 자신이 그 남은 것을 먹어치우는 방법을 택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조선 조 때에 거의 종의 신분으로 봉사해야 했던 우리네 여성들이 처했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애처롭기도 합니다.
종이 자녀보다 더 좋은 차를 타야겠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자녀 보다 더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주의 종들은 가장 좋은 차를 타야 한다, 주의 종들은 가장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주의 종들을 언제나 가장 좋은 것으로 대
접해야 주인이 주인의 자녀들을 축복한다는 엉터리 복음이 한국 교회에 심한 악취를 풍기게 만드는 근원 중 하나입니다.

악취가 심하면 사람은 멀리하고 파리 떼가 들끓게 되는 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악취로 한국 교회를 구별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검소와 절제는 종들이 마땅히 갖춰야할 품성입니다.

주인이 부자라고 해서 종이 호화로운 옷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이 그랜저를 탄다고 해서 종도 그랜저를 타야한다고 주장하는 일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교회가 부유하다고 해서 목사가 월급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재정이 넉넉하다고 해서, 세속적으로 말해 목회에 성공했다고 해서, 많은 사례비를 요구하는 목사는 이미 주의 종이 아닙니다.

비유컨대,

그 목사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 중 하나로 간주한다면, 그래서 그 교회에서 일하는 여러 사역자 중 가르치는 일은 맡은 자로서만 간주한다면, 그 목사는 교회의 재정 규모에 맞추어 사례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을 “주의 종“ 이라고 불렀거나 부르고 싶다면 교회 재정 규모가 어떠하든 최소의 사례로 만족해야합니다.

가장 검소한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야하며 이러한 생활을 누리는 것만도 감사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종이 자녀와 같은 처지를 누리려 하는겁니까?

간혹 자신의 부인을 “목사 사모님“이라고 부르도록 강요하거나 스스로 실천하는 목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상식적으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부인에게 높임말을 쓰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남에게 자신의 부인을 지칭할 때 높임말을 쓰는 사람을 보면 무식한 덜 떨어진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만 유달리 목사들이 자신의 부인을 “사모‘ 라고 부르도록 교인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더구나 “주의 종“의 부인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종“의 부인을 주의 “자녀“들이 존경해야 한
다? 이 무슨 몰상식하고도 해괴한 어법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검소와 절제와 겸손의 삶에서 교회를 이끌 수 있는 참된 지도력이 나옵니다.

요즈음에 한국 기독교 서점가는 지도력 이론 혹은 리더쉽 이론을다룬 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경영학 이론들이 이러한 이론들의 근저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종으로서의 리더쉽(the servant leadership)"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지만 빈번히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종이 되면 참으로 지도자가 됩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어릴 적 훈련을 맡은 낭인이 강조한 바처럼, 남처럼 먹고 남처럼 입고 남처럼 쉬면서 남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종은 보상을 바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명한 대로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도리어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라고 해야 할 것 아니냐? ”

종은 주인의 소유입니다. 실제로 은유 이전에 역사적으로 전쟁에서 져서 포로가 되었건, 돈으로 팔렸건, 종의 몸에서 태어났건,
종은 주인의 소유입니다.
주인은 그를 언제든지 폐기 처분할 수 있습니다.

종은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주인의 은총이며 주인의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삶의 보람입니다.

따라서 어느 주인도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는데 따로 칭찬할 필요가 없으며 종도 그것을 기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아담 스미스가 지적한 바처럼, 노예 노동은 제일 비효율적이어서 언제나 주인의 눈에 차지 않기 마련입니다.

은유로 돌아오자면, 종의 노동이 주인 눈에 흡족하게 여겨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종이 하는 일이 언제나 흡족하지 않지만 주인은 그가 종이기 때문에 용서하기 마련입니다. 종은 도리어 주인의 자비를 기다려야 합니다.

종이 주인에게 무엇을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비유컨대 우리가 자신을 자녀로 간주한다면 얼마든지 달라고 떼를 써도 좋습니다.

아빠에게 달라고 떼쓰는 자녀들은 도리어 귀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종으로 간주한다면 아무것도 주인에게 달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종은 자신이 가진 것을 족한 줄 알고 그것
으로 주인의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자신의 곤궁한 처지가 남의 탓이며 처음부터 출발이 불리했었다는 불평을 하는 자는 주의 종이 아닙니다.
예컨대 가난한 부모를 만났기 때문에 혹은 도와주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의 혹은 우리 교회의 처지가 이렇다고 불평하는 자
는 이미 주의 종이 아닙니다. 진정한 주의 종은 언제나 모든 부족함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그렇게 믿는 자입니다.

놀랍게도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종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종종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하는 머슴들을 보게 됩니다.

이 주인의 종들은 온갖 고난을 다 행해도 결국에는 헛되이 사라질 약간의 깨달음 정도 밖에 누리질 못합니다. 다행히도 우리 하나
님은 참으로 다정하고 자상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주인이십니다.

그는 일단 종의 역량에 따라 일을 맡길 줄 아시고,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한 종에게는 놀랄 만큼 풍성한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최후적으로는 그의 자녀와 종들에게 영원한 삶과 기쁨을 골고루 베풀어주십니다.

종이 주인의 뜻대로 행하기만 하면 어떤 경우에도 무엇이 모자라서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아낌없이 베푸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 분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진실로 “주의 종“이라는 은유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종은 쉼 없이 일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이 먹고 남은 걸 먹어야 합니다. 그러고서도 종은 보상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은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으로 보상해주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므로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진실로 더 철저하게 종이 될수록 더 높은 천국 보좌를 예비해놓고 계십니다. 이 비밀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3. 종으로 오신 예수

바울 사도는 그가 빌립보 교회에 쓴 옥중 서신에서 이 비밀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워 종이 되심에 관한 진술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진실로 이 말씀은 가장 확실하게 종이 되는 자가 가장 확실하게 주인이 된다는 비밀을 진술한 오묘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겸손한 자가 가장 존귀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많은 천국의 비밀들을 가장 아름답게 그리고 압축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령의 놀라운 권능을 힘입지 않고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주의 종“이 되려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바로 그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이 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이 신비한 교리를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할 수는 없으나 자신을 비우셨다는 점만큼은 인간의 여러 은유로도 넉넉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비록 주인의 자녀이지만 자녀 됨을 기꺼이 버리고 종이 되기를 원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주의
자녀이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을 비워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한국 교회가 그런 대로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는 이유는 바로 한국 교회 내에 이처럼 진실로 주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안락보다는 주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피폐해 가는 농촌의 들녘에서, 음습한 도시의 빈민
굴에서, 버림받은 장애자들 사이에서, 저임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주의 종들이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으로는 풍요하나 정신적으로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병들고 피곤한 사람들을 밤낮으로
방문하고 격려하는 일에 헌신하는 주의 종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글로, 때로는 TV화면에서, 때로는 인터넷상에서 주의 나라를 확장하기로 결심한 주의 종들도 있습니다.
목사만이 주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자신의 안위 보다 주님의 나라에 봉사하기를 앞세우는 모든 자 마다
다 주의 종이라는 부름이 합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종으로서 죽기까지 복종하려면 심각히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참된 주의 종들은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주님의 참된 종이 되려면 가정을 가지지 아니하는게 바람직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성적 유혹을 이길 수 있다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낫다는게 성경의 정신입니다.

적지 않은 목사들이 가정과 헌신 사이에서 빈번히 고민하고 있음을 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주의 종으로 헌신하겠다는 서원은
본인의 것이지 가족 전체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족 전체의 이해와 동의 하에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동의 없이 아버지의 일방적인 결정 하에 놓이게 됩니다.  커다란 갈등의 소지를 안고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정을 지니고 목회의 길로 들어선 사람, 특히 목회의 길에 대해 가족의 동의를 얻지 않는 사람은 가급적 자신을 일컬어 “주의
종“이라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은 종이 되기를 자청할 수 있으나 가족까지 종으로 만들 권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종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목사가 가족에게 그들이 원치 않는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단 말입니까?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은유적으로 볼 때, 자신은 종이 되고 가족들은 자녀가 되면 그 때부터 교회는 구조적인 갈등을 겪게 됩니다. 한국 교회에서 발견되
는 많은 우스꽝스러운 사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습문제, 사례비문제, 교육문제, 목사부인문제, 목사자녀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목사가 “주의 종“ 일 뿐만 아니라 목사의 가족들에게도 목사와 동일한 행동의 윤리적 기준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사실 달
성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혼란은 목사 스스로가 초래한 것입니다.
목사의 권위를 강조할 때는 주의 종임을 강조하면서, 돈을 많이 달라고 할 때에는 목사도 사람이다 라고 주장하는 태도가 이러한
혼란을 대변합니다.

한국 교회의 잘못된 관행으로 인하여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목사는 스스로 사탄이 깔아놓은 올무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결혼하여 가정을 지닌 목사들은 가급적 자신을 “목회를 담당한 주의 자녀“라고 지칭하는 게 옳습니다.
교회를 구성한 여러 가정 중 하나이며 각 가정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복음적 분업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
해야 합니다.

목사는 신학의 전문가로서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도록 초빙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에게 가계를 제대로 꾸릴만한 소득을
제공하여야 합니다.

물론 사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계약도 가능합니다.
목사의 능력에 따른 인센티브의 부여도 가능합니다.
능력에 따라 대우가 다른게 당연합니다.

이러한 경우에 다들 평등한 주의 자녀들로서 타인에게 각별한 윤리적 수월성을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목사의 가족에게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4. 맺는 말

주의 종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낮추어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한국 사회와 구별되는 한국 교회의 우
스꽝스러운 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주의 종“ 을 목사의 고유명사 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목사만이 주의 종이 아닙니다. 아니 한국 교회에 있는 적지 않은 목사들이 주의 종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주의 자녀들을 호령하는
상전으로서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인이 돌아오실 때에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게 될 자들입니다.
진심으로 주의 종이 되려는 자는 주인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첫째, 쉼 없이 일해야 합니다.
일하고 싶은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는 자는 종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둘째, 주인이 먹고 남은 것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검소와 절제는 종이 마땅히 보여야할 덕목입니다.

셋째, 보상을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도리어 마땅히 해야할 바를 하였으나 여전히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음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종의 본질적인
품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사람이 주의 종인가를 보여주는 표징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종의 표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자신을 비워 종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공평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만물의 지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가장 낮아지는 자가 가장 높아진다

는 복음의 비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루터가 정리한 바와 같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은 자이지만 더할 수 없이 충성
스런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 자입니다.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여기는 자는 마땅히 이 예수 그리스도의 표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로 주의 종이 되는 자에게는
위로의 하나님께서 천국의 영생과 평안을 상급으로 주시는 동시에 아름다운 면류관을 더하실 것입니다.

 

(자료 출처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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