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Christology, 基督論), 예수 그리스도

 

1. 기독론의 개요


주후 325년 5~6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개최된 니케아 회의는 부활절에 관하여 동방은 유월절을 지키고 서방은 주일을 지키는 문제로 소집되었으며, 또한 아리우스(Arius)설로 인한 교회 분열을 염려한 내용이 주요 안건이었습니다. 이처럼 길고 긴 교리적 논쟁은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안디옥교회 감독 사모사타(Samosata)의 바울(주260~272)의 영향을 받아 이단적 요소가 강한 논리를 주장하였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바울은 "예수께서 모세와 다른 선지자보다 로고스가 강력하게 역사하여 메시아가 되었다" 고 보았으며 또한 "예수에게 있는 로고스가 강력하게 작용하여 다른 인간들보다 하나님과 특이한 관계를 맺은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후 하나님은 예수를 양자로 삼고 그에게 신성까지 부여하였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쳐 안디옥교회는 세번에 걸친 대회를 열어 논의 끝에 269년 바울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바울의 양자사상(養子思想)은 소멸하지 않고 아리우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전지전능한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끝도 시작도 없는 영원한 존재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의 시작이 있는 영원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 조차도 하나의 피조물로 보되, 단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피조물로 보았고, 그 증거로 예수는 인간의 육체를 가졌으나 인간의 영혼은 갖고 있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로고스가 인간의 영혼을 대신 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으며 또 로고스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가 삼일신의 현현을 강론할 때 장로인 아리우스가 이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후 320년 알렉산드리아 지방 대회에서 아리우스와 그를 지지하는 유세비우스를 비롯하여 니케아, 칼케톤, 에베소 감독과 애굽 감독을 파면하였습니다.

이 일로 아리우스 장로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파면당하였슴에도 불구하고 그 세력이 약화되지 앟고 오히려 점차로 확대되면서, 각 지역을 순회하며 반대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당시 유명한 니코메디아 감독의 유세비우스도 이에 동조하여 합력하게 되었을 정도로 세력은 급속히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결국 동방교회로 까지 확대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스페인 감독 호지우스로 하여금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이론을 좁히지 못한채 실패로 돌아가고, 교회의 분열과 국민정신의 분열이 가속화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로마제국 전체 감독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교회의 일치된 뜻을 모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세계 교회에서 교리적 결정을 한 후 국가의 힘으로 모든 교회가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치밀한 계획이 사전에 있었습니다. 첫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주후 325년 5월 20일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약 300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으나 대부분 동방교회에서 온 감독들로 구성되었고 로마교회는 대표만을 파견하였을 뿐이었습니다. 회의는 처음부터 아리우스파와 중립파와 정통파로 분열되었습니다.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를 비롯한 니케아, 칼케톤, 에베소 감독 등 아리우스파와 가이샤라의감독 유세비우스의 중립파, 그리고 극소수의 알렉산더, 골도바의 호시우스, 아타나시우스 등 정통파로 양보없는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회의의 진행중 알렉산더 감독이 소천하고, 그의 후계자로 아다나시우스(Athancius) 감독이 계승하면서 중론으로 기울던 회의의 분위기는 급반전되었습니다. 아다나시우스는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가 동질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도 영원한 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반박자료로서, 만일 아리우스파의 주장대로 아들이 피조물이라면 아들을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감화력있는 논리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결국 회의에 참석한 다수의 결의와 황제의 동의를 얻어 니케아 신조를 결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리우스파는 신조 서명에 거부하고 이단으로 정죄되고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다나시우스의 논리는 그 후 황제의 번의로 인하여 의외로 박해와 추방이 뒤따르는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후로 5회에 걸친 어이없는 추방후에야 아다나시우스의 정통적 입장이 전체 교회의 압도적 지지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을 따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던 신학자들 가운데 또 다른 논쟁을 일으켜 교회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약화시키거나 무시하는경향으로 흐르게 되어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라도 인간인 이상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다는 전제 아래, 인간이면서 범죄할 수 없는 인간 예수를 찾아내려 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라오디게아 감독 아폴리나리우스(Apllinarius)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전서5장 23절을 인용하여 먼저 삼분설을 주장하고 로고스가 예수의 영의 자리에 들어갔기 때문에 예수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죄의 좌소(座所)가 영이기 때문에 영의 자리에 로고스가 있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한 것으로 381년 콘스탄틴 대회에서 정죄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양성이 인정된 이후에는 이번에는 이 양성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또다시 소모적인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양성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이해하여 양성의 교통을 부인하고, 신성은 인성과 전혀 다른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Cyuil)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성은 서로 연합되어 교통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만약에 네스토리우스의 주장대로 라면, 그리스도는 인성만으로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인간의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고 반박하면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면도전이자 아주 위험한 논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논쟁으로 인하여 주후431년, 에베소에 모였던 제 3회 세계교회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과 그의 동조자들은 네스토리우스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기습적으로 회의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는 편법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러자 네스토리우스도 이에 맞서 회의를 소집하고 키릴을 정죄하는 법적 대응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파행적 회의속에서 황제가 키릴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네스토리우스는 수도원으로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세력들은 로마제국에서 핍박을 받게 되어 페르시아로 피신하였고, 후에 중국에 까지 선교활동을 하여 7세기 경엔 경교(景敎)란 이름으로 크게 활약하였습니다.

에베소 회의 이후에도 기독론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다른 견해들은 끊임없이 나타났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수도원 원장인 유티게스(Eutyches)는 양성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양성의 구별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성육신때 그리스도의 양성은 하나의 신(神)인 단성(單性)으로 연합되었다는 단성연합론(單性聯合論)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키릴의 주장을 진보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쉽게 함정에 빠지도록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는 신의 속성인데 예수의 육신은 장소의 제한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육신을 가진 예수의 인성이 신성에 완전히 흡수 될수 없기 때문에 예수는 육체적으로 무소부재할 수 없다는 설득력있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유티케스의 주장처럼 에수께서 신성을 따라 무소부재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심각한 신앙적 위험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양성의 문제도 451년 칼케톤에서 열린 제 4차 세계대회에서 결론을 내야만 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 신(神), 인(人), 양성(兩性)은 혼동, 변화, 분리, 분열함이 없이 연합되어 있슴을 가결하였습니다.

칼케톤의 결정은 연합의 과정을 설명하지 않고 반론만 제기함으로서 그 이전의 결정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양산하였습니다. 그런즉, 팔레스타인과 애굽과 시리아 교회들은 키릴과 유티케스의 양측 입장을 계속 추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 5차 세계회의에서 칼케톤의 신조를 재확인 함과 동시에 안디옥파의 단성론인 제 3장은 정죄되었습니다.

단성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가지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두가지 의지가 있는가? 라는 문제로 만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적 의지가 있었다면,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하여 유혹에 넘어져 죄를 짓게 될것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의지, 곧 신적 의지만 존재하였을 것이란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습니다. 638년에 헤라클리어스(Heraclius)황제나 648년 콘스탄스(Constans)황제도 단성론 논쟁을 지양하려 했으나 지속적으로 양론이 대립되어 왔습니다. 68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이 문제는 심도있게 논의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칼케톤 결정이 재확인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양의론(兩意論)이 전격 채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지는 신적 의지에 종속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이 결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에 관한 오랜 교리적 논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류광수 다락방, 문선명의 원리강론,신천지 등 다양한 이단들이 나타나 그들만의 설득력있는 논리로 일반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66권을 중심으로 정통교회를 세워 나가는 올바른 교육이 지속적으로 유지됨으로서 이러한 이단들이 발디딜 수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우리와 기독교인이 신앙하는 예수(Jesus)는 고대 그리스어:Ίησους 이에수스의 라틴어 표기이며, 이에수스는 다시 여호수아(히브리어 : Jehoschua) 혹은 예슈아(히브리어 : Jeschua)를 코이네 그리스어로 옮긴 사두람입니다. Jehoschua의 어원은 접두어 Je- (히브리어 : JHVH/YHWH:Jahveh야훼, 하나님)와 히브리어 : Hoshea (구원, 구세라는 뜻을 가진 호산나)를 덧붙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를 호칭할때 흔히 "나사렛(Nazareth) 예수"라 부르는 분이 바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부모의 이름을 함께넣어 칭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요셉의 아들 예수"(누가복음2:21), "나사렛 요셉의 예수"(요한복음1:45) 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마가복음6:3, 마태복음13:55) 등으로 칭하는 것입니다.

예수에 따라 붙는 그리스도(Christus)는 고대 그리스어의 "기름을 부은" 이라는 크리스토스(고대그리스어:Χριστός)라는 말을 라틴어로 표기한 "기름을 부은".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maschiach 메시아" 에서 해석한 것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은 유대인의 종교적 예법에 따르면 드높은 사람, 다시 말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메시아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며, 제사장이시며 또한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2-1. 탄생과 유년시절


'기원후'의 의미로 사용하는 'A.D.(Anno Domini)'는 예수의 출생 이후의 시대를 의미하는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B.C.와 A.D.의 구분은 6세기경의 신학자 디오뉘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부활절의 날짜를 계산하면서 사용한 것이 후에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에 반영된 것이며, 이 때에 계산된 예수 탄생 연대의 기준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하여 쓰이게 된 것입니다.

예수(기원전 7~2년 - 기원후 26~36년)의 출생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현재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4대복음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예수의 출생일과 태어난 장소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으며, 대체로 역사상의 예수는 기원전 약 4년 경에 나사렛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태복음(2장 1 ~ 16절)에는 예수가 태어난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이 나타나고 헤롯왕이 2세 미만의 갓난 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로 피신하는 내용이, 누가복음(2장 1 ~ 2절)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하여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언급된 인구조사는 기원후 6년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당시 시리아 지방의 총독이 퀴리누스(Quirinus)였다고 누가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2:1~7) 퀴리누스는 서기 6년에서 서기 9년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며, 인구조사는 그의 부임 초기(서기 6년)에 이루어졌으므로 예수는 서기 6년에 출생한 것으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서 미가서(5,1)와 이사야서(7,14)의 기록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예수님과 그 가족은 헤롯1세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헤롯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정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 아버지는 아리마대 사람으로 요셉이었으며 그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동정녀 탄생을 한 어머니, 마리아에 관한 내역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누가복음(1:36)의 기록으로 보아 그의 가계가 세례요한을 낳은 엘리사벳과 친족 관계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요셉과 마리아의 육체적 관계에서 출생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동정녀 신분으로 가브리엘 천사로 부터 수태고지를 받았으며(누가복음1:26~38), 약혼자인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하게 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고백하게 됩니다. 신앙심이 두터운 요셉이었지만 이러한 마리아의 황당한 이야기에 심적인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꿈에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였으며, 가브리엘의 계시에 따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고 그와 동침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년기에 관한 기록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12세때 겪게된 한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을 지키려고 부모와 함께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예배를 마치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채 하룻길을 내려 갔다가, 방황하면서 예수를 찾게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를 찾은 지 사흘 후,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만났을 때, 예수는 유대교의 랍비들과 함께 율법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곳에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지혜와 논리에 감탄하며 기인으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요셉과 마리아가 그들과의 대화에는 무관심한채 "왜 여기에 있느냐" 고 책망하였을때, 예수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슴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2:41~51) 누가복음 2장 52절에는 에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함으로서 그의 유년기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적용적 삶을 살았던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는 그의 동생들과 함께 요셉의 직업을 이어 목수 일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인생에서 취해지는 여러가지 상황과 삶을 무시한 채 산 것이 아니라, 그의 직업과 생활을 온전히 실천하며 그 가운데 지혜롭고 완전한 진리의 삶을 행위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에서의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자신이 고난받는 메시아로서 살아갈 것임을 예언하는 설교를 하였을때, 고향사람들이 지혜에는 감탄했지만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며 예수가 보통사람의 직업을 가진 사람임을 지적하였다는 누가복음의 기록은 그의 서정과 삶에 대한 고정관념을 볼 수 있는 대목인 것입니다.

2-2. 세례와 40일 금식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전환점은 나사렛을 떠나 출가한 이 후, 세례요한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세례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세례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를 위하여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세례를 받는 것은 중요한 과정과 절차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왔고,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누가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3:22)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이후 40일 금식기도를 위하여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 곳에서 사탄마귀를 만나게 되었고 세가지 중요한 시험과 유혹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시험은  금식하는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만들어 굶주림을 해결하라는 의식주에 관한 유혹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명기8:3)는 구약성경을 인요한 말씀으로 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의식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한 것인가? 하는 신앙생활의 기본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험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질문과 유혹을 단번에 해결하심으로 완전한 분으로서의 삶과 목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두번째 시험은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사탄이 이 시험을 테스트하면서 예수님께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시편91:11,12)는 말씀으로 유혹함으로서 넘어지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기6:16)는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일시에 제압하였습니다.

성전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날 성전 꼭대기에서 아무 생각없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 우리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듯한 말씀으로 우리를 폄하시키고 종속시키며 세상을 교회로 끌어들이게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세상을 교회로 끌고 들어왔고 진노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후 첫 방문지인 교회로 들어가 성전을 정화하였습니다.

세번째 시험은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신명기 6:13)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이것까지 거절하고 승리함으로서 완전하신 하나님과 인간으로서의 삶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사탄은 왜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만국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일까요? 그것은 세상이 이미 자신의 절대적 영향력아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미 사탄마귀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마귀의 손에 들어간 세상에서 우리는 직업과 가족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즉, 영원한 원수같은 살벌한 적대국가에서 직업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너무나 방관적이고 방탕한 것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2-3.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예수님의 설교와 교훈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 사역 가운데 첫번재로 행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복음2:11). 당시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예수와 제자들이 참석한 그 현장에서 포도주가 다 소진되어버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당황한 나머지 이 사실을 예수님에게 알렸고, 예수는 하인들에게 여섯 개의 항아리에 물을 붓게 하였습니다. 하인들이 시키는 대로 모든 물을 가져오자, 예수는 잔치를 맡은 이에게 그대로 갖다 주게 했는데,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예수를 믿고 따르게 되는 기적의 첫번째 순서였습니다 (요한복음 2:1~11)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가지는 회개와 복음전파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땅끝까지 내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분이 하시고자 하셨던 모든 것을 쏟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교훈가운데에서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제외할 수는 없었습니다. 산상수훈은 갈릴리호수 북쪽 지역 가버나훔인근 야산에서 말씀하신 황금과 같은 메세지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특별한 축복의 선물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과 이방인들을 바라보며 애통해하며, 로마의 박해와 유대인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품어 온유를 잃지 아니하며, 의에 굶주리고 갈급한 심령이 되며,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긍휼히 여기며,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온전하게 청결히 하고, 어디에서나 어떤 위치에 있든지 화평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위하여 억울한 누명과 박해를 감내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지는 축복의 열매는 천국이 그들의 나라가 될 것이며, 항상 위로와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될것이고, 땅을 기업으로 받되 영원한 땅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며, 풍요로움은 세상이 가져올 수 없는 것들로 채워 질 것이며, 남을 긍휼히 여기고 보살펴온 것보다 더 많은 긍휼을 받되 하나님으로 부터 받을 것이며, 아무도 볼 수 없고 본 적도 없는 하나님을 대면할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양자됨의 축복을 받을 것이니 결국 천국은 이러한 사람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5:3~12)

예수님의 말씀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있어서 항상 파격적이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지는 메세지의 능력은 때때로 그들이 처한 상황과 맞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로마의 속박과 구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쳐있고, 그래서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강력하고 능력있는 하나님으로서 일거에 로마제국을 쓸어버리는 심판자와 축복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은 은혜롭고 위로가 되지만 이러한 상황에 일치하는 메시아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마져 꺾어 버리는 좌절과 절망을 안겨다 주는 이단적인 존재로 여겨 졌던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5:17~20)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을 위한 말씀인 듯 하다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모욕하는 듯한 메세지는 항상 그들을 자극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관습과 습관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본질과 심성을 잃어버린 외식하는 신앙으로 변절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기독교인에게 이 말씀은 무엇을 던져주고 있을까요. 오늘날의 교회는 내용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형식마져 버리고 세상의 모양만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위기의 현재에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5:13~16)

어려움과 고난속에서 아무런 힘과 능력을 가지지 못한 그들에게 "빛과 소금" 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어려움과 고난과 역경과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환경에 선한 영향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것은 가능한 것일까요? 그들 또한 빛이 필요한 사람이고 소금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빛과 소금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 같은 행위를 명령어로 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메세지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와 그것을 갈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빛과 소금을 품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안에 거할 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주고 싶은 진정성인 것입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태복음5:27~32)

간음을 실제로 행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은 행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을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쁜 행위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은 습관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나아가 음욕을 품은채로 여자를 바라보면 그것이 실제로 간음한 것과 동일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모든 생리현상이 중단되어 버린지 오랜 시간이 지난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라가 마음속으로는 웃었지만 겉으로는 웃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사라가 웃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성은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때로는 마음속에 있는 생각까지도 감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감시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중심에 세상과 죄와 욕망이 자리잡아서는 결코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죄를 가진 온전한 육신보다 죄가 없는 장애인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가진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강한 메세지는 우리의 심령에 지금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5:43~48) (마태복음5장1절~48절)

함께 지내는 이웃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아내와 자녀를 사랑할 수 있고, 결혼할 이성을 사랑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철천지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입니다. 로마로 부터 온갖 핍박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고 그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상대를 사랑할 수 없다면 그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은 그 어떤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는 말씀을 예수님은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을 향한 소망의 메세지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천국의 복음은 세상의 생각과 언어와 행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차원높은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위한 적절한 비유들은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은혜였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품삯에 관한 비유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은 세상의 포도원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포도원은 근무시간과 그 효율성에 따라 그 댓가가 달라지는 반면에 하나님의 포도원은 근무시간과 수확량에 관계없이 포도원을 운영하는 주인의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포도원을 운영하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 진실성에서 기인하는 것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은 일하는 사람의 능력과 지식보다는 그 마음을 더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능력과 학력, 그리고 그 사람의 배경이 모든 것을 좌우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 사람의 진실된 마음이 좌우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에 대한 기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 광야에서 말씀을 증거하실때에 많은 사람들이 미쳐 식사를 준비하지 못한 가운데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을 때 였습니다. 수많은 장정들과 아이들이 말씀의 은혜속에서 배고픔을 알았을때에는 그들에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였습니다(요한복음6:1~14)

그 때에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작은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가져온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작은 아이가 한끼를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도시락이었습니다. 그것을 축사하신 예수님의 광주리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름을 알수 없는 미소년의 작은 도시락 하나가 수많은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만한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남자만 오천명이었던 그 현장에는 적어도 만오천명의 사람이 있었으니 그러한 기적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않될 것입니다. 이 기적은 누군가의 작은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기적은 어른이 아닌 나이 어린 소년으로 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모두 드렸을때 그것이 가지는 능력은 무한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소유로만 있을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로 가져갔을때에 그리고 아낌없이 드려진 손길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의지해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에 의지해 나온 자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한끼 식사를 해결하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들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제 1로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일상이 있고 해야 할 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여겼고 그 말씀을 1순위로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음식과 같은 기적이 있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말씀속에 모든 것들이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기적이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졌던 것입니다.

4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의 회복될 수 없는 질병을 치유한 기적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현증의 내용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질병을 치유한 사건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있는 단순한 기적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치유와 회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치유한 회복의 섭리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더 나아가 나사로와 같이 이미 장사를 지낸자들까지 살려내는 기적의 무한성을 나타내었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고 무덤안에 있었습니다. 그런 나사로를 예수님은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나사로는 붕대를 감은 상태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요한복음11:1~43) 예수님의 기적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과연 기적이란 존재하는 것일까요? 기적은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는 유한성의 한계를 극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복음7:12~16)

이 사건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바로 죽음을 깨뜨린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넘을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 너머로 이미 가버린 사람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시간을 되돌려 놓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적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선을 넘어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을 다시 이땅으로 회복시킨 상상과 예측을 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특별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6:9`13) 주기도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도의 모범이었습니다. 꼭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진실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고 하나님앞에서 진실되게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허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가운데 있을 동안에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주님께 시선을 고정할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누군가가 지금도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외식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 또한 그 누군가가 바리새인 처럼 자랑하는 기도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앞에서 바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는 것은 거짓과 꾸밈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면 죄를 그대로 고백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변명하고 변호하고 무엇인가 끊임없이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싫어하고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실된 사실을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는 적어도 하나님 앞이라면 솔직해 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의식주와 관계된 세상의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인은 근심과 염려를 해서는 않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6:19~34). 세상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거나 욕심을 드러낸다면 그것을 써보기도 전에 그 사람의 목숨이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목숨의 소유가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의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건강하다고 장수하는 것도 아니고 몸이 아프다고 모든 사람이 단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나고 죽음이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욕망과 탐욕을 드러낸다면 그것이 가져오는 종국은 지옥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는 의식주에 관한 염려를 하는 사람을 향하여 책망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쩌면 생활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책망하고 꾸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걱정근심하는 사람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염려한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것이 부질없는 일이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직면한 염려와 근심의 문제를 해결할 모든 원칙과 해답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아니라 모든 우리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2-4. 예수님과 십자가의 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완전한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중요한 사명과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이 그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자체가 너무나 짧은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생애 마지막 일주일은 아주 긴박한 순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첫번째 하신 일은 교회의 정화였습니다. 교회안에서 성도들의 편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들어와 있는 상인들을 몰아내셨습니다. 교회들이 용납한 것을 예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성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겸손과 낮아짐으로 섬김을 다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예수님에게 무엇이라 말할 인간이 이땅 어디에 있을 것이며, 존귀와 영광만 받아도 부족한 분이신데도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제자가 자신을 팔아 넘기는 사건 앞에서도 오히려 제자를 위로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팔아넘길 가룟유다를 제자로 삼아 함께 하였습니다. 그에게 함께한 제자들의 면면도 하나같이 지식과 학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문벌과 학력과 지식으로 사람을 채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부라는 가장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베드로를 비롯하여 어쩌면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동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와 다른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발자취요 흔적입니다. 세상이라는 만만치 않은 이땅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용기가 있을까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부터 항상 위험인물로 낙인되었으며, 로마정부에 있어서도 문제아로 낙인 직혀 버린 사람, 그 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 왔던 메시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잣대와 지혜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는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전혀 다른 행색과 모양으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두려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이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원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길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으로 화답하였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가상칠언은 우리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예수님의 핵심진리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한복음19:26~2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27:46)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19:28)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23:46)

예수님의 첫번째 사람은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지하여 저지른 것이라고 오히려 용서하고 화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와같이 원수와 화해하며 용서를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가상칠언의 첫번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사람은 우편에 함께 메달린 강도였습니다. 성 금요일 예수님은 혼자 십자가에 메달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편에 강도가 함께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였습니다. 그는 함께 처형당할 처지에 있는 예수를 정신병자로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누가복음23:39)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편에 있는 또 다른 강도는 생각을 달리하였습니다.그가 좌편의 강도와 같이 중죄인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1:18)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영원한 지옥형벌에 처할 위기의 직전에서 구원을 얻은 백성은 다름아닌 우리가 혐오하는 강도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앞에서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하신다는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상에서 하신 두번째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번째 사람은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 어머니를 염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이 땅에서 가장 먼저 몸에 품고 있었고 또한 처음 본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는 이처럼 가장 근접한거리에 있었던 이 땅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네번째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가장 극적으로 힘드신 순간이며 마지막 고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성을가진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힘들어 하셨던 십자가의 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섯번째 사람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느끼신 갈증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세상으로 향하는 갈증을 느끼겠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마지막 한방울의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심으로 인한 갈증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절정의 단계, 그것이 예수님의 갈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여섯번째 사람은 예수님 자신과 또한 그것을 함께 이루어 나갈 공동체였습니다 모든것을 이루신 예수님의 승리는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순종과 사랑과 구속사를 완성하신 예수님의 사역은 이렇게 마지막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완성은 일회적인면서 동시에 영속적인 것이었습니다. 되풀이되는 인간의 역사와는 다른 완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공동체의 완성과도 직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예수님이 계신,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공동체, 즉 교회는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의 고백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완성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곱번째는 천국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십니다. 우리를 만나러 오신 예수님은 우리가 결코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된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세상 그 어떤 영광과 존귀보다도 귀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악한 인간의 모습이며 죄악의 본질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상은 십자가로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완성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고 희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종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 무덤은 있지만 빈무덤이 되었고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이었습니다. 스스로도 죽음을 이기신 분이었습니다. 죽음은 예수님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완성이 미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삶은 어느것 하나 불완전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며 영원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멸되어가는 기독교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희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소망의 부활이 되어 오늘 우리들에게도 완전한 소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제자들과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로마정부나 유대인들은 악성루머라고 치부하며 끝까지 신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도 직접 만져보기전에는 신앙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인정과 확인절차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기독교는 다시 회복되었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소멸되어 흔적조차 없어질 것 같은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로 끊임없이 번져가는 활화산과 같은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아무런 권력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그 분의 지혜와 말씀과 능력은 21세기 전세계 가장 많은 성도를 가지게 되었으며 단 한권의 책을 저술한 적이없는 그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서적들은 1억권을 넘어서며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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