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성경 최초의 진술에는 네 가지 단어가 나온다.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가 그것이다.

각각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태초(太初)라면 과연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

범주의 오류


우선 확실히 해둘 것은 태초를 시간의 산술적 의미로 파악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수십억 년 전이라는 식은 아니다.

그러면 태초란 무한대의 시간보다 더 앞선 무한대의 시간 전이라는 가상도 가능해진다.

태초 전에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있었는지 등의 억지스런 질문 내지 반발이 꼬리를 물고 나오게 된다.

불신자들은 심지어 “하나님은 창조 전에 있었던 무한대의 시간 동안에 무엇을 했는가?”, 또 “하나님 그분은 누가 창조했는가?” 등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물어오곤 한다. 후자의 경우는 기독교변증학자 노만 가이슬러 등이 편저한 "Who made God?"(사랑플러스 2005 번역출간)이란 책에서 실제로 그 질문을 다루고 있다. 그 답을 발췌하여 인용해보자.

[우주는 단지 그곳에 영원히 존재할 뿐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무신론자들은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는 열역학 제1법칙을 들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관찰에 근거한 학문으로 '~할 수 있다' 혹은 ‘~ 할 수 없다' 식의 독단적인 주장을 하려면 실측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따라서 그 법칙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우주 속 실질 에너지의 양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에너지가 창조될 수 없다는 것은 실측적 증거가 아니라는 뜻임, 필자 주)

에너지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그런 가정 안에서는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지 묻는  자체도 무의미하다. 에너지가 영원하면

아무도 그것을 창조하지 않았다. 만약 우주가 항상 존재해 있었다면 아무도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이 무의미하다면 하나님 역시 항상 존재했을 것이기에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도 무의미할 뿐이다. "누가

창조되지 않은 이를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은 마치 "그 총각의 부인은 어디 있지?"라는 질문처럼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에 속한다.

아무도 하나님을 만들지 않았다. 그분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항상 계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다. 만든 이가 필요한 것은 이 세상처럼 그 시작이 있는 것들뿐이다. 시작이 없으신 하나님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실 필요도 없다.](p. 17-18)

총각이란 결혼하지 않는 남자다. 부인이 결코 있을 수 없고 있다면 이미 총각이 아니다. 서로가 의미하는 범주가 전혀 겹치지 않는

두 대상은 어떤 수로 연결 지어도 해답이 나올 수는 결코 없다. 아예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창조되지 않은 이"란 창조와 전혀

연관이 없는데 그런 하나님을 누가 창조했느냐고 묻는 것도 아예 말이 안 된다.

태초를 시간의 수치적 양으로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범주의 오류에 속한다. 시간이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태양과 달의 운행과

연계해야만 생겨나는 개념이다. 그런 천체들이 없다면 하루, 한 달, 일 년 등은 아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다.

바꿔 말해 시간 자체는 창조 이후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태초는 창조 이전이다. 태초에는 시간이 없었다는 뜻이다. 태초와 시간과는

서로 겹쳐지는 범주라고는 아예 없다. 태초 혹은 그 이전의 상황에 시간이란 개념을 적용시킨다는 것 자체가 아예 말이 안 된다.

태초 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을까, 태초는 수십조 년 이전일까 등등에 관심을 쏟는 것은 호사가들조차 궁리할 필요가 없는 정말

무의미한 짓이다. 만약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인들더러 답을 못하도록 궁지에 몰아넣어 자신들 주장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고도 헛된 궤변일 뿐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표현이 참으로 정미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잠시 착각 혼돈했거나, 이모저모로 따져서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가 자기 마음에 이른다."고 했다. 스스로 아예 그렇게 마음먹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에 변할 수 없는 어리석음으로 완전히 고착되어져버렸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 자체도 어리석게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말로 무신론자가 단순히 지식이 모자라거나 지능이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해도 스스로 하나님은 없다고 마음에 정해버린 것이다. 어떤 구실이나 궤변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을 무조건 부인하고 보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기 기분대로 마음껏 신나게 살겠다는 뜻이다.

자기를 지으시고 모든 좋은 것으로 베푸시는 창조주를 자신의 삶에서 제거해버리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아니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르니 더더욱 어리석지 않은가? 남들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믿기 전에는 똑 같이 너무나 완악하고도 어리석게 그랬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십자가 구원의 공로로 그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게 되었다. 이 얼마나 평생을 두고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지 않는가?

태초의 참 의미


태초(太初)란 영어성경의 번역대로 "시작"(In the beginning)을 의미한다.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선재(先在)해 있는 상태에서 공간이나 공간을 점유할 물질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텅 비워져있던 공간 안에 물질이 채워지자 시간이 작동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시공간을 동시에 창조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간은 피조물에게만 의미가 있다.

예컨대 지구와 달의 하루는 길이가 다르다. 순전히 이론적 가정으로 달에 인간이 있다면 그들의 시계와 달력은 우리와 달라야 한다.

같은 개념의 시간이 아니다. 이처럼 시간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직 피조물, 그것도 각기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시간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시간 자체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이다. 또 시간 밖에 계시기에 그분에게는 영원토록 현재 뿐이다. 무역회사나 여행사에 가면 공통적으로 세계 각지의 시각을 알리는 시계를 여럿 걸어 놓았다. 시차가 다른 지역과 원활히 소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는 사무실에 - 순전히 가정으로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 과연 지구 시계, 달 시계, 전 우주에 있는 모든 별의 시계를 걸어 놓고 계시겠는가 말이다.

그분은 지구, 달, 태양, 모든 은하계와는 완전히 초월한 범주 안에 계신다. 그 모든 것들을 만드신 분이 그 안에 속해서 제한 받을 수는 결코 없다. 한 마디로 전 우주의 모든 시공간을 다스리는 온전한 주인일 뿐이다. 당연히 그분에게는 오직 현재만 있을, 사실은 인간이 인식하고 이해하는 시간의 개념으로 그분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지만, 뿐이다. 또 오직 현재만이 있기에 그분의 품성뿐

아니라 약속은 영원토록 신실하며 변함이 없으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하나님에게 하루가 천 년이 되고, 천 년이 하루가 된다는 것이 사람처럼 기분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인 길이가 그렇게 느껴진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기분과 상황에 따라 바뀐다면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자격은 상실된다. 천 년이나 하루나 시간이 그분을 절대 제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그분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분의 뜻과 의지뿐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마음먹으신 것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 약속이 이뤄지는 시점과 상황은 오직 피조물에게만 문제될 뿐인데 하나님은 그마저도 당신의 영광이 가장 잘 드러나며 피조물에게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는 시점에 시행하신다는 것이다. 첫 하루에 혹은 천년의 마지막 날에 시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신이 의도한

바가 시행되지 않는 법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4,27)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45:23, 46:11)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베드로 사도의 말씀에 적용하면 마지막 심판은 정녕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신자는 그 시기와 방식에 관심을

쏟을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뜻 앞에 절대적으로 겸비하여져야 한다. 그 뜻은 죄인들에 대한 진노를 누그러뜨리면서까지 모두가 회개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디 온다고 마음 놓고 있어도 되는가? 오히려 정반대다.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10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11,12절) 해야만 할 것이다.

구원은 사후에 내리는 판정이 아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자 그 주인이시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영원토록 현재이신 분이어야만 시간을 다스릴 수 있다. 물론 그분이 시공간 모두를 다스리지만

특별히 창1:1의 "태초"라는 표현을 통해 시간의 주권자임을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시공간 모두를 다스리는 하나님만이 인간의 사후(死後) 심판의 주관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 수명의 종결이 아니다. 존재 자체가 멸절되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공간)과 육체 수명 이후의 영생(시간) 또한 그분이 주관하시기에

죽음 이후의 영원한 운명을 그분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적 진술이 아니다. 사실은 아주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생전에 이 땅에서 행한 모든 것을 다 살펴 본 후(事後)에 점수를 매겨서 심판하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그 심판이 있기 전까지의 모든 일들은 인간이 제 멋대로 행한 셈이 된다. (구원 받은 신자가 죽은 후에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 정도에 따라 상급이 달라지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물론 인간 쪽에서 판단하면 당연히 그러하다. 자유의지를 갖고, 비록 죄로 타락되었어도, 자기 판단 하에 그 전부를 행한 것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만약 죽어서야 점수 매기는 판정관 같은 하나님이라면 그때까지의 시공간을 제 멋대로 재단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인간에게 완전히 맡겨 버린 셈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입장에서 판단하면 시공간의 절대적 주관자로서의 직무를 그만큼 포기 내지

태만한 꼴이다. 하나님에겐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땅에서부터 절대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따라 한 죄인에게, 그가 당신과 원수 사이에 있어도, 선물로

주어지는 기독교의 구원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전한 구원이다. 태초부터, 여기서 태초도 영원전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시작부터, 구원할 인간을 예정하시어 당신만의 계획과 뜻 가운데로 인도하는 구원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공간 모두를 절대적 권한으로 통치하는 당신의 당신다우심이 온전히 드러나는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보라.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엡1:4-6)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아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려는(갈1:16) 계획 하에 택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모든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동일한 죄인인 상태에선 인간의 우열(優劣)로 구원의 기준을 삼을 수는 결코 없다. 점수로 치면 모두가

0점이기에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절대적이며 선택적인 구원만이 그 해결책이다. 또 그런 구원이라야만 “거저 주시는바 은혜의 선물”

이 된다.

절대적 선택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전적 독단에 의한, 혹은 단순히 무작위적인 선택은 아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의 신비이긴 하지만 그분의 그분다우심이 완벽하게 반영된 완전한 선택이다. 그분에게는 어떤 악하고 추한 것도 함께 공존할 수 없다.

각 개별적 선택의 근거나 기준을 인간이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는 없지만 성경에는 아주 핵심적인 힌트는 나와 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주신 그 절대적 사랑 안에서 선택하신 것이다.

인간의 자격이나 조건에 전혀 선한 것이 없고 오히려 당신과 원수 된 상태의 죄인을 선택할 수 있는 근거란 그런 절대적 사랑 말고는

따로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태초에 종말도 작정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만이 시공간의 완전한 주인이기에 인간의 생애를 잠시라도 제 멋대로 방치해두지 않는다는 면에서도 예정에

의한 구원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놓아두다가 죽은 후에서야 생전의 공과를 점수

매겨 주는 구원이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일생이 어찌 되든 아예 모른 채 한 것 밖에 더 되는가? 말하자면 인간세상의 온갖 모순과

질곡으로 판단컨대 인간의 생사화복에 진정한 관심과 사랑이 없었거나,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행한 신경질적인 하나님 밖에 되 되는가 말이다.

정말로 바른 하나님이라면 당신의 백성을 이 땅에서부터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게 해야 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바울처럼 이방인의 사도 같은 직분을 수행하게끔 해야 한다. 또 그러려면 생전에 구원이 미리 이뤄져야만 하고 또 구원

받은 자도 그 사실과 자신에 대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이미 예정에 의한 죄인의 구원책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비 되어 있었기에 최초 인간의 타락 가능성을 무릅쓰고 자유의지와 선악과 금령을 주셨던 것이다. 거기에 더 보태어 당신께서 앞으로 만드실 피조물들이, 특별히 인간이 완전 타락한 채로 일생(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전부)을 마치게 만들 양이면 구태여 힘들여 창조하셨을 리는 만무하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구속을 사전에 다 예정해놓았기에 창조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인류 전체를 향한 보편적인 계획이나, 각자 한 사람의 경우에나 공(共)히 해당된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인류 전체의 죄를 대속

하여 죽음으로써 구원의 길은 열렸으니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결단과 의지에 달렸다는 주장은 여전히 잘못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미 설명한대로 인간 일생의 어느 부분을 방치하는 하나님이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골고다 죽음 이후로는 인간의 구원 사역에서 그분은 손을 완전히 혹은 일부는 놓고 계신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각 개별 죄인을 향한 예수님을 통한 절대적 구속 또한 창조 시에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엡1:4)는 바울의 진술 그대로다.

그렇다면 고려해볼 사항이 하나 더 생긴 것 아닌가? 말하자면 과연 태초에 십자가 구원만 확정되어져 있었을까?

마지막 심판은 그 작정에서 제외되었을까? 워낙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셔서 인간이 하는 짓거리를 다 보시고 난 후에 판단하려 하셨을까?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이 천 년 만 년이라도 더 기다려 주실까?

시간이 하나님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개념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어느 듯 다시 잊고 있다. 태초에 골고다가 예정되어 있었다면

새 하늘과 새 땅도 당연히 그 청사진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창조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도 확정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요한 사도에게 이미 이천 년 전에 그 일부라도 보여줄 수 있었지 않는가?

인간에게 정작 문제 되는 것은 예수님이 영광 중에 심판하러 도적 같이 다시 오시는 일뿐이다. 그 시기와 방식에 관심을 둘 필요도

전혀 없다. 하나님은 그 시기와 방식마저 이미 정해 놓으셨다. 도적이 언제 어떻게 오겠다고 미리 가르쳐 주는 법은 없으니 관심을 두어도 부질없는 짓이다. 신자가 진짜로 기억할 것은 그분의 뜻이 이뤄지지 않은 채 사라지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뿐이다.

바꿔 말해 인간이 과연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할 지도 그분의 뜻 안에선 이미 다 작정되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뜻을 창세기 1:1 이후의 진술로 계시해 주셨다. 그럼 성경대로 믿지 않는 인간의 최후는 심판을 모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창조의 뜻과  계획에 전혀 해당되지 않아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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