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40여명의 저자들에 의해 약 1500년 동안 기록되었다. 

이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했다(딤후3:16, 벧후1:21절). 

성경은 한편 복수의 인간 저자에 의해 그러나 다른 한편 한 분 하나님에 의해 기록된다. 

성경 저자는 겉으론 인간이지만 속으론 하나님이다. 

성경이 다양성과 통일성을 함께 보여주는 이유이다.


인간 저자들은 동시대 살았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영적(靈的: Spirit) 존재인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무결하다. 

계시는 육적(肉的: flesh) 존재인 인간의 역사와 문화의 옷을 입는다. 

사람의 이해를 위해서도 계시는 세상 문화와 문학으로 완벽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계시 내용은 신적(神的)이지만 표현과 설명을 위한 틀과 방식은 인간적(人間的)이다. 

하늘 지혜와 세상 상식, 초자연과 자연,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또는 신학과 인문사회학 등등 이들 사이 이질적 만남이 성경 기록을 가능케 한다.

유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계시 내용은 믿음으로만 수납된다. 

불신앙은 세상 옷을 입은 하늘 지혜를 이해할 수 없다. 믿음 이후 세상 옷은 하늘 지혜를 잘 해석하도록 돕는다. 

자연계시가 특별계시의 해석을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된다. 다시 말해 믿음 이후 이성도 신자의 신앙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

조심할 점이 또 있다. 성경의 신학이란 내용은 이성이나 인문사회학의 도움으로 구체적으로 전달된다. 

특별히 신약 성경에서 하늘의 것은 땅의 것으로 자주 비유된다. 땅의 것은 설명 방법으로 이용된다. 

방법은 내용을 좌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세상 인문학이 성경의 신학 내용을 지배할 수 없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을 헬라 사상이 아닌 구약 성경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이다.
 
문장론으로 본다면 성경은 항상 서술문으로 출발한다. 서술문은 과거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기술한다. 

기술 내용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수납된다. 내용에 근거를 두고 명령문이 기록된다. 명령은 사랑으로만 실천된다. 

그리고 순종을 조건으로 축복을 약속하는 조건문이 뒤따른다. 약속은 소망을 굳게 하며 믿음과 사랑을 독려한다. 

성경은 이런 세 종류의 문장들로 구성된다.
 
서술문은 구속사와 관련된 역사(歷史)이다. 

성경의 서술문 특징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이야기식 내러티브(narrative)에 있다. 

캠브리지 영어 사전은 ‘내러티브’를 ‘일련의사건들에 대한 이야기 ​​또는 설명’ 그리고 ‘사건들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특별한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A story or a description of a series of events. A particular way of explaining or understanding events.”

성경의 70% 이상은 이런 내러티브 방식으로 기록된다. 

성경 서술문의 또 다른 특징은 육하원칙(六何原則: 5W1H) - who, what, where, when, why, how – 에 있다. 

세상의 문학 상식 - 내러티브와 육하원칙 - 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해석을 위해 중요한 원칙을 제공한다. 아래 도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성



영어

who

what

when

where

how

why

문법

주어

술어

수식어


문장론

역할 

본문

수식

의미

내용

적용 


해석학

내용

주체

행위



장소

방법

이유

의미

신분

직분

역사

문화

방식

동기

성격

가변

불변

작전

전술 목표들

전략 목적



신학

각론

조직신학

성경신학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창조 목적과 계획


방법

연역법

귀납법

전통적 성경해석 방법 중 하나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역사문법적 해석(historical-grammatical interpretation)이다. 

놀랍게도 육하원칙은 이 해석 방법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문장의 기본은 주어와 술어이다. 술어는 자동사와 타동사, 둘이다. 타동사인 경우 술어는 대상(what)을 동반한다. 

기본적으로 문장은 누구(who)와 무엇(what)으로 구성된다. 이들만으로 문장은 완전하다. 문장 내용은 핵심적이며 기본적이다. 

그리고 수식어 – 언제(when), 어디(where), 어떻게(how)와 왜(why) - 는 내용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특정 상황에 적용되는지를 잘 설명한다.  

1. 주어와 술어

문장론에서 주어(who)와 술어(what)는 개별적 개념과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들은 독자적으론 존재할 수 없다. 문법과 논리 면에서 이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성경에서도 개별성과 사회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개별성이 무시된 사회성 또는 사회성이 무시된 개별성은 존재 의미와 기능을 잃는다. 이런 식으로 성경은 기록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 속에 존재한다. 사회성이 없다면 하나님의 존재 의미도 퇴색한다. 하나님도 영원으로부터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창조기사(창1-2장)는 하나님의 창조가 사실상 시간의 창조였다고 증언한다. 비로소 창조주는 창조된 만물과 연결된다. 사회성을 위해 창조주도 제한된 시간 속에 한 동안 존재할 것이다. 

성경의 육하원칙에서 누구(who)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나 영(靈)인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사람에게 말하고 일한다. 다음 사람은 세상 상식으로 하나님을 전하며 일한다. 전면에 사람이 나선다. 그러나 후면에 하나님은 감춰진 주체(主體)이며 성경의 진정한 저자이다. 

문장론에서 주어가 술어를 요구하듯 성경의 육하원칙에서도 하나님(who)도 술어에 속하는 대상(what)이 있어야 자신을 계시할 수 있다. 누구(who)가 존재(being)라면 무엇(what)은 행함(doing)이다. 존재와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들 사이 관계는 주체와 행위 또는 신분과 직분 사이 관계이다. 영적 신분인 하나님은 사역이라는 직분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 뜻을 계시한다.

문장이 되려면 주어는 술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술어는 주어를 전부 설명하지 못한다. 주어는 술어를 통해 자신의 일부를 드러낸다. 성경의 육하원칙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잘 계시한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의 사역은 하나님을 전부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은 성경과 기독교 신학의 한계이다. 신학적 논쟁은 하나님에 대해 알도록 돕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부 알도록 돕진 못한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그가 행한 사역보다 훨씬 크다. 기독교 신학이 성경 가르침 이상으로 전진한다면 사이비와 이단의 교리가 된다. 모세가 이를 경고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4:2절)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29:29절)

히브리어에서 ‘오묘한 일’은 ‘감춰진 일’을 뜻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다 드러내지 못한다. 하나님의 감춰진 일을 억지로 나타난 일로 만든다면 이단과 사이비가 된다. 하나님은 창조 행위를 통해 처음 자신을 계시했다. 감춰진 하나님(주어)이 창조 행위(술어)로 자신을 처음 드러냈다. 

하나님의 행위는 이미 세워진 목적과 계획에서 나온 결과이다. 그의 행함은 영원히 변치 않는 전략적 목적과 계획을 점진적으로 실현시킨다. 육하원칙의 주어(who)와 술어(what)는 조직신학의 신론(神論: Theology) 또는 기독론(基督論: Christology)에 각각 속한다. 구약은 신론으로 그러나 신약은 기독론으로 각각 출발한다.

성경이나 사건을 보다 더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가장 먼저 주어와 술어를 찾아내야 한다. 이들로 구성된 문장이 전해주는 내용은 문장의 논리와 방향을 알려준다. 마찬 가지로 기독교 신학은 신론 또는 기독론으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첫 사역을 기록한 창조기사(창1-2장)가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인 이유이다.

2. 수식어

문장의 수식어 - when, where, how와 why - 는 주어와 술어를 자세히 설명하도록 수식한다. 육하원칙에서 이들은 시기, 장소, 방법과 이유를 뜻한다. 의미로 본다면 이들은 역사, 문화, 전략과 동기를 뜻한다. 내용상 이들은 앞의 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뒤의 둘 전략과 동기로 나누어진다. 

문장론에선 언제(when)와 어디(where)는 술어(what)가 활동한 시기와 장소가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그러나 성경의 육하원칙에선 행함의 내용과 의미가 특정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라는 외적(外的: external) 요소에 의해 제한된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who)의 사역(what)은 시대별 역사(when)와 문화(where)에 의해 제한된다. 하나님의 의지와 뜻은 역사와 문화의 옷을 입고 계시된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사이 차이가 드러난다. 조직신학은 누구(who)와 무엇(what)에 그러나 성경신학은 언제(when)와 어디(where)에 각각 초점을 맞춘다. 전자는 신학 교리를 그러나 성경신학은 윤리 교훈을 각각 강조한다. 이들은 서로 보완한다. 절대로 서로 대립할 수 없다.

그러나 수식어의 나머지 방법(how)과 이유(why)는 주어(who)의 의지와 뜻에 내적(內的: internal) 제한을 가한다. 하나님은 시대별로 달리 일한다. 이 때 하나님은 시대별 사역이 그의 영원히 변치 않는 의지와 뜻이 가리키는 방향과 목표를 유지하도록 일한다.

이런 방향과 목표는 창조기사(창1-2장)을 통해 제일 처음 성경에 계시된다. 시작이라는 출발은 끝이라는 도착을 항상 지향한다. 이들 사이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창조 목적과 계획에 따라 계속 일한다. 성경 육하원칙의 방법(how)과 이유(why)는 다양한 시대별 전술 목표들이 항상 영원한 전략 목적을 지향하도록 돕는다. 

성경 육하원칙의 방법(how: method)과 이유(why: reason)는 해석을 위한 방식(way)과 동기(motif)가 된다. 결국 앞의 둘인 역사와 문화는 역사적 가변성(可變性)과 그러나 뒤의 둘인 방식과 동기는 영원한 불변성(不變性)과 각각 관계된다.

수식어의 역할 덕분에 성경의 다양한 본문들은 시대별 다양성과 영원한 통일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성경 계시는 반복과 발전, 동질성과 이질성 그리고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모두 함께 보여준다. 성경의 육하원칙은 칼빈의 역사문법적 해석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주제설교와 제목설교의 문제가 드러난다. 이들 설교는 주어와 술어에 무관심한 체 수식어에 관심을 둔다. 이 때 아름다운 수식어가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알지 못하게 방해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선택해서 전한다. 설교자는 이미 하나님의 대언자가 아니다. 성경의 기록방식인 육하원칙은 주제설교와 제목설교의 실수와 잘못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3. 주어, 술어와 수식어

 

육하원칙의 문법적 구성 요소는 주어, 술어와 수식어이다. 

모든 문장, 단락, 장과 책은 이들로 분해된다. 성경의 육하원칙에서 주어는 하나님의 신분을, 술어는 하나님의 사역을 그리고 수식어는 시대별 적용을 각각 의미한다. 성경에서 세상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하나님의 논리가 육하원칙이라는 문법에 그대로 녹아 있다. 

육하원칙은 역사문법적 성경 해석 방법을 잘 설명해 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절) 

첫째 성구는 구약 시대 하나님의 창조 사실과 사건에 대한 서술문이다. 

둘째 성구는 신약 시대 이에 대한 사도 요한의 해설이다. 성경은 사건 자체와 그 의미의 해설을 함께 기록한다. 성경은 스스로 자신을 해설한다. 

이런 해설은 해석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런 해설이 없다면 성경 해석 결과는 세상 지혜와 상식이 된다.

성경의 육하원칙에 따르면 누구(who)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무엇(what)은 천지 창조이다. 언제(when)는 창세 전이다. 장소(where)는 영원 자체이다. 어떻게(how)는 말씀(로고스)이란 방식으로 그리고 이유(why)는 위의 본문에서 밝혀지지 않았지만 창조 목적과 계획의 근거인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둔 동기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천지 창조주였다. ‘로고스’로서 그는 아버지와 태초부터 교제했다. 이들 사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동의와 합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아들은 만물을 창조했다. 창조기사(창1-2장)에서 밝혀진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계획은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내용을 잘 계시한다.

창조 후 시대별로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와 뜻은 모두 창조 목적과 계획에서 나온다. 목적 달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대단히 치밀한 논리 체계이다. 목적 달성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는 계획을 항상 지배한다. 당연히 이 체계에는 목적 달성을 겨냥한 시간 계획도 포함된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논리(論理)는 시간 개념 즉 역사로 설명된다.

창조기사(창1-2장)는 시간의 창조와 함께 공간과 공간을 점하는 만물이 함께 창조되었다고 기록한다(창1:1절). 시간의 시작과 출발은 시간의 끝과 도착을 또한 전제한다. 끝과 도착은 창조 목적과 계획의 완성을 뜻한다. 이들 사이 과정도 하나님의 시간 계획표에 따른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이를 잘 증언한다. 성육신은 ‘때의 참’에 따른 획기적 사건이었다(갈4:2-5절).

창조 세계관은 종말 세계관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who)은 역사(when)와 문화(where)를 달리하며 자신의 일(what)을 한다. 이 때 창조 목적과 계획의 종말론적 완성을 겨냥하도록 돕는 방식(how)과 동기(why)로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와 뜻을 조절한다. 이 덕분에 성경 서술문들은 다양성은 물론 통일성을 함께 보여준다.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칙이 발견된다. 다양성에 초점을 맞추면 성경신학은 역사 해설과 시사평론으로 끝날 수 있다. 반면 통일성에만 초점을 둔다면 조직신학은 교훈 적용을 무시하는 원리주의가 될 수 있다. 성경의 육하원칙은 방법(how)과 왜(why)의 인도와 지도를 받아 종말을 고려한 해석을 하라고 권한다. 이것이 올바른 역사문법적 성경 해석이다. 다음 성구가 이를 잘 설명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들)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절)

보이는 것(단수)은 시대별로 성경에 기록된 개별적 사실과 독립적 사건이다. 나타난 것들(복수)은 사실과 사건을 다양하게 해석하게 만드는 현상들을 뜻한다. 성경의 육하원칙에서 누구(who), 무엇(what), 언제(when)와 어디(where)는 사건과 사실 그리고 현상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how)와 왜(why)는 천지 창조를 가능케 한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된다.

헬라어에서 레마와 로고스 사이 의미상 차이는 있다. 그러나 레마는 로고스 덕분에 존재 의미를 갖는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동일한 목적을 공유한다. 결국 레마와 로고스 사이 차이는 없다. ‘레마’와 ‘로고스’는 히브리어의 ‘다-바르’의 헬라역이다. 다-바르는 ‘말’과 ‘일’, 모두를 뜻한다. 진실한 성도는 현상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레마)으로 만사(萬事)를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말씀으로 하나님은 창조했다. 

이 말씀에 따라 하나님은 계속 일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로고스’로서 성육신 이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1:1-3절)를 가리킨다. 

그리고 창조 후 그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한다(히1:3절). 

여기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격화 된 존재이다. 

말씀은 단순히 소리나 말을 뜻하지 않는다. 

말씀은 아버지의 영원한 작정 그리고 창조 목적과 계획과 관계된 진리 체계를 뜻한다. 

성경의 육하원칙도 사실이나 사건을 현상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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