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재성 교수

1. 기도, 배워서 바르게 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 자비에 매달려라”
칼빈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시대의 문제점을 시정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로마가톨릭 교회의 기도론에 대해 성경적인 이의를 주로 제기하였다. 칼빈은 자신의 비참함을 직접 하나님께 고하지 못하고 신부들을 통해서 혹은 죽은 성자들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로마교회의 교리에 대해서 반대한다. 즉 믿음에 대한 이해부터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기도의 근거를 다른 사람의 공로에 의존하려하는 인간주의적 사고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1559년 수정 증보된 <기독교강요> 3권 제20장 전체를 기도에 할애하고 있는 바, 기도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우리들의 믿음의 첫째 되는 실천”이라고 갈파하면서, 성도들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기에 필수불가결하다고 강조하였다.

칼빈은 칭의와 성도들의 자유를 논의한 다음에 기도를 거론하고 있다. 그는 특히 기도는 믿음과 뗄 수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성경에서 발견하고,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 믿음이 하나님의 순전한 선물이듯이, 기도도 역시 아무런 공로나 업적이 되지 못함을 강조하였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믿음이 복음으로부터 탄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그것(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심정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훈련되어진다.” 오직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의 영광만을 기리고 높여야 하고,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며, “개인의 모든 공로에 대한 생각을 떠나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매달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칼빈은 특히 회개의 기도에 있어서 로마 교회는 외적인 수양과 기도의 형식과 방법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기도가 철저히 내면적이요 심령의 내적 행동임을 무시하였다고 지적하였다.


한국 교회가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세계 교회에 모범을 보이고 있는 부분 중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기도이다. 한국 초대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기도생활에 전념하는 모습을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주었고, 기도의 용사들이 많았다. 기도생활에 목숨을 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들이 많다. 매우 자랑스럽게 지켜가야 할 소중한 신앙유산이다.


혹자는 ‘기도에 무슨 원리가 있고, 무슨 신학적인 공부가 필요한가’라고 반문하면서 바른 기도에 대해서 배우는 데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도 하고, 기도에 대해서 별다른 조심을 하지 않고 무관심하기까지 한다. 기도란, 그냥 무작정 시간만을 보내는 행동이 아닐진대, 바른 기도만을 본받고 배우도록 힘써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의 기도를 잘못 이해하여, 전통적인 소원성취로 생각하게 되고, 공허한 말의 나열이나, 중언부언에 그치고 말며,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 은혜의 수단으로서는 작용할 수 없게 된다. 그냥 열심히 맹목적으로 부르짖는 행동을 함으로써 저절로 바른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실천적이요, 체험적인 영역에만 속하는 것인가? 신학적으로 지식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워야할 부분은 없는가? 기도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정립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를 닮아서 매일 매일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 기도에 관한 자신의 무지와 습관적인 이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먼저 성경적인 기도의 원리를 살펴보고, 우리의 기도를 갱신하여야 한다.


교리사를 살펴볼 때, 기도를 가장 오염시킨 신학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중보기도론이다. 바른 기도의 원리를 찾기 위해서, 기독교 교회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기도는 구체적으로 교회 내에서 실시되는 공예배의 중요한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도를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으로만 알고 그칠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교회 전체의 예배와 건물의 구조, 심지어는 성직체제에까지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기도의 이해는 바른 교회의 건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2.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바르게 회복해야”
오늘날 개혁교회 안에서마저도 그리스도의 중보되심과 화해를 이루시는 그의 보혈의 능력을 제외한 채, 자신이 기도하면 잘 응답된다는 식의 특권주의, 기도하기만 하면 자동응답기처럼 그냥 해결이 된다는 기계주의가 만연해있다.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진다(요14:13-14, 요16:24). 그분만이 우리의 중보자요 대변인이다(요일2:1, 딤전 2:5, 히8:6, 9:15).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중보가 되지 않으시면, 그 어떤 성자나, 우리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과 중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특히 칼빈은 성자들의 이름을 중보자로 내세우는 기도론에 반대한다.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므로, 다른 사람들의 이름으로 아뢴다는 것은 무의미하다(요14:6). 로마가톨릭 교회의 기도론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이름을 높이는 데 실패하였다. 유일한 중보자의 칭호를 지닌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모욕이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의 자녀를 모으시는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다(골1:20, 엡1:10).


칼빈은 로마교회의 기도론의 문제점에 대해서, 두 곳에 나오는 성경 본문을 주의깊게 읽으라고 강조한다. 첫째는, 예레미야 51장 1절의 의도를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본문은 중보기도를 권장하기보다는 오히려 모세나 사무엘의 기도가 그 당대의 민족과 나라를 구해낼 수 없음을 보게 된다. 중보기도와 관련하여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성경 본문의 또 하나는 에스겔 14장 14절인데, 여기서 등장하는 노아, 다니엘, 욥 세 사람도 역시 도시를 구하는 기도자들은 되지 못하였다.


족장들이나, 성자들은 오늘의 우리 시대의 일에 간섭할 수도 없고, 돌보아줄 수도 없다. 따라서 무지한 성경해석법에서 의존해서 소위 성자들의 중보기도론이라는 교리가 나온 것이요, 칼빈은 이런 비성경적인 관습에 대해 침묵으로 동조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성경은 서로를 위해서 순수하게 중보기도를 하도록 권고한다. “따라서 이 한가지 이유(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약5:16)) 만으로도 이런 오류를 정죄하기에 충분하다…여기에 다른 어떤 허구적인 중재가 있을 수 없다.”


기도는 살아있는 신앙의 행위이며, 신앙이 있는 사람, 각자가 당연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불가피한 열매이자 의무이다. 믿음과 회개가 항상 떼어놓을 수 없이 붙어있다고 강조하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기도와 참된 믿음은 상호 분리할 수 없이 마음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기도가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망을 표출해 내는 믿음이다. 따라서 바른 기도는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오직 한 분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의 약속에 근거하여 간구하는 것이다(히4:14-16).


칼빈의 기도론은 오류로 점철된 교회의 회복과 깊은 관계가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특히 기도론을 바르게 교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회 내에서의 기도에 대한 시행에 있어서 예수님 이외에 어떤 개인이나, 어떤 성자나, 어떤 공로나, 공리적인 업적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회복하고자 함이었다.



3. 개인기도만큼 공중기도도 힘써야

“회중이 이해하기 쉽게”
칼빈의 기도론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개인기도 뿐만 아니라, 공중기도를 힘써야 하고, 이를 위해서 훈련받아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칼빈은 거룩한 집회에서 기도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개인기도도 역시 바르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교회란 예배드리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성전이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공적인 모임에 권위를 인정하실 뿐만 아니라, 항상 임재하실 것을 강조하시면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그들과 함께 하리라”(마18:19-20)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성도들은 교회로 모이는 공적인 모임을 중요시해야 하고, 그곳에 임재하신 주님과의 교제에 기쁨으로 참여하게 된다.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영으로 임재하시고, 한 마음으로 모아서 드려지는 모든 예배와 간구를 기쁘게 받으신다.


공중기도에 대한 로마교회의 오류란 바로 라틴어로 드리는 의미없는 기도였다. 기도를 드릴 때, 그 집회 회중이 쉽게 이해하는 그들의 말로 드려져야한다는 매우 평범한 진리를 로마교회는 곡해하고 있었다. 중세 시대 천년 동안, 그리고 최근까지도 로마교회의 기도문이 라틴어로 쓰여져 있고, 그냥 암송되고 있었다. 무지한 일반 성도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기도문을 형식적으로 외우는 것이 전부였다. 교회가 모든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정한 장소에서 정한 시간에 함께 드리는 공중예배와 공적인 기도는 그 회중의 언어로써 드려져야 한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기억하게 하실 때,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모국어로 기도하고 있었다(사56:7, 마21:13). 따라서 어떤 언어로 교회에서 기도해야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배에서 사용할 언어는 마땅히 회중의 언어라야 한다. 이는 믿음의 통일성을 청중들과 함께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프랑스어로 설교했다. 바로 옆에는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서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가 따로 회집되었다.


공중기도에서 또 다른 문제점은 소위 다른 언어라는 방언의 문제다.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어떠한가? 다시 말하지만, 성경에서 나오는 공중기도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고, 그 언어는 그 나라 사람들의 말이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라틴어나, 헬라어나, 프랑스어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공중기도는 모든 참석한 회중의 영적인 증진을 위해서 유익해야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곳에서 무슨 영적인 은혜를 입을 수 있겠는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충고는 사랑과 이웃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들의 방언을 조심하게 하는 바,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했다. 칼빈은 영의 기도, 즉 방언기도 대신에, 마음의 기도(마음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질서있게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를 강조한다. 방언기도는 적절히 자제해야 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고전14:40)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4. 청중 의식하는 공중기도 삼가야

“기도는 자랑의 수단 아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공중 기도는 누가 인도해야하는가? 로마교회의 전통에서는 오직 성직자만이 공중기도를 인도할 수 있었다. 로마교회는 두 개의 교회로 나누었으니, 하나는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요, 다른 하나는 ‘듣는 교회’(ecclesia audiance)이다. 가르치는 교회는 오류가 없는 교회로서 성직자들로 구성되고, 듣는 교회는 항상 듣고 배워야할 일반 평신도들의 교회라는 것이다. 로마가톨릭의 이중교회론의 오류는 오직 성직자들로 구성된 교회만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감독들의 회’를 교회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그리스정교회도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부분이다. 17세기 후기 개혁교회들에서도 오직 목회자들만이 공중기도를 인도하는 예배방식이 도입되었는데, 이것은 다소 칼빈의 견해와도 다르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은 성직자와 평신도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로마교회와 그리스정교회의 교회론에 반대하였다. 따라서, 루터를 비롯한 많은 개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만인제사장론’(벧전 2:5-9)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 및 서리 집사가 공중예배의 기도를 담당하고 있다. 구미의 개혁교회들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목사만이 공예배시에 목회기도를 담당한다. 공중기도 시에 일반 성도들이 대표로 참여하느냐의 문제는 그리 중대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교회의 방식에도 일체감과 참여도를 높인다는 측면에서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공중기도에 대해서 배우지 않고 한다면 이것은 매우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공중 기도에서 가장 조심할 부분은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어떤 것을 자랑하는 행동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다”는 위선에 대해서 주의해야만 한다(마6:5-7, 눅18:11).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자기 자신의 어떤 점을 드러내어서 인정과 칭찬을 돌리게 하려는 공중기도는 헛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기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의 개혁교회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문제점이다.


또한 로마 교회의 공중기도는 대부분 미사 시간에 많은 회중 앞에서 간단한 구절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암송하는 것이었는데, 이 기도가 과연 하나님께 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슴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단지 입술로 따라서만 하는 기도가 과연 하나님 앞에 참된 기도라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지적해야 할 문제점이다. 자기 자랑이나, 듣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기도는 인본주의적인 기도라고 한다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그 인격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진실하지 못한 점에서는 똑같이 허공을 울리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기도는 언제나 마음속에서 나와야하고, 인격의 중심에서 토로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롬8:27). 우리가 문을 닫고 방안에서 혼자 기도를 드려도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속의 은밀한 것을 들으신다.

공개 죄 고백, 중보기도….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여에서 빚어진 적지 않은 혼란이 한국 교회에 있다.

기도 역시 바르게 배워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김재성 교수에게서 칼빈의 기도론을 듣는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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