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1901년 5월 14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목사가 나왔다.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에서 ‘집사 목사’(오늘의 준회원 목사에 해당) 안수를 받은 김창식과 김기범이 그 주인공들이다.

둘 중에도 먼저 안수를 받은 김창식(金昌植, 1857-1929)은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의 바울’이란 칭호를 받았던 한국 개신교 개척시대 전설적인 전도인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정작 그의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할 때 ‘Kim Changsiki’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그대로 음역하면 “김창식이”가 된다. 유독 영문 이름 뒤에 ‘i’(이)가 따라 붙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선교사 집에 위장 취업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창식은 철들면서 농촌 생활에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알고 열다섯 되던 해, 갈 곳을 모른 채 무작정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다.”(창 12:1) 집안 식구 몰래 가출한 것이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의 집 머슴살이로 출발해서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15년 동안 전국 8도 아니 가본데 없을 정도로 떠돌아다니다가, 당시 총각 나이로는 ‘환갑’에 해당하는 스무 아홉에 박씨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하고 서울 남대문 안에 비로소 정착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서울 장안에 떠돌던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지하실에 가두어 놓고 하나씩 잡아먹는다더라.”
“예쁜 애들은 밤에 끼고 자고, 싫증나면 자기 나라에 노예로 팔아넘긴다더라.”

1888년 여름 일이다. 3년 전 서울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데려다 가르치면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를 시기한 수구파에서 선교를 방해하려는 목적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흥분한 시민들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지도 않고 선교사들이 하는 학교와 병원에 난입하여 때려 부셨다. 그 바람에 학교와 병원은 문을 닫았고 1년전에 시작된 종교 집회도 중단하였다. 선교가 중단될 절대 위기였다. 이를 ‘영아소동’(baby riot)이라 한다.

결혼하여 서울 남대문 안에 살고 있던 김창식도 그 소문을 듣고 흥분했다.

그는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했다.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를 ‘잡는’ 현장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선교사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마침 한국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올링거(F. Ohlinger) 선교사가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김창식은 ‘행랑아범’으로 불리는 하인으로 출발했다. 그런 일은 이미 몸에 익숙한 것이기도 했지만 선교사의 만행 현장을 잡기 위해 ‘위장 취업’ 해서 들어간 직장이기에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성실하게 일을 해야 했다.

평양이 ‘조선의 예루살렘’이 되기까지

올링거는 성실하게 일하는 그를 ‘요리사’로 승진(?)시켰다.

이젠 주인 집 식구들의 내실까지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더욱 예리한 눈길로 선교사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그런데 그가 기대했던(?) 만행은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선교사 가족들은 그를 정중하고 예절바르게 대해 주었다. 올링거 선교사는 물론이고 그의 친구 선교사들은 나랏님(고종)과 자주 만난다는데, 하인에 불과한 그에게 보내는 눈길과 손길이 따뜻하기만 했다. 하인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조선 양반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는 종종 자신과 같은 밑바닥 사람에게 ‘인간 대접’을 해주는 선교사들에게 감동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종을 결심하고 올링거에게 세례를 받았다. 위장 취업해 들어간 지 2년만이었다.

세례 받은 후 그는 전도 일에 나섰다. 1893년 의료 선교사 홀(W.J. Hall)과 짝이 되어 평양에 내려가 선교를 개척하였다. 보수적인 평양에서 선교사가 전면에 나설 수 없기에 그가 앞에 나서서 서문밖에 선교사 사택과 병원, 학교, 교회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일로 그는 평양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평안 관찰사로 내려 와 있던 민병석은 선교사와 기독교를 아주 싫어했던 수구파 인사로서 평양에 기독교 선교가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1894년 여름, 기독교도 체포령을 내렸다. 그 때 김창식을 비롯해 평양의 감리교와 장로교인 10여 명이 투옥되었다. 민병석은 이들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매질을 가하는 한편, 뒤로는 사람을 선교사에게 보내 석방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이것이 유명한 ‘평양 기독교도 박해사건’이다. 평양판 ‘영아 소동’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이 터지자 홀은 서울에 있는 미국 공사관에 사실을 알리고, 공사관에서 조선 정부 외부에 항의하고, 외부에서 내부에 석방을 요구하고, 내부에서 관찰사에게 석방을 명령함으로 사건은 1주일 만에 해결되었다. 배교를 거부한 김창식은 심한 매를 맞고 ‘거지반 시체가 되어’(행 14:20) 실려 나왔다. 며칠 후 관찰사는 선교사를 찾아가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얼마 후 좌천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평양 주민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양 관찰사의 위세도 선교사와 기독교인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는 ‘치외법권적’ 힘의 종교였다.

이 사건 직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평양은 청국군과 일본군의 주전장(主戰場)이었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면서 짐을 교회에 맡기고 떠났다. 십자기가 달린 교회는 양쪽 군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성역’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기간 내내 김창식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피난 갔다 돌아와 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평양 주민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또 있다. 전쟁 후엔 전염병이 돌기 마련이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평양에도 전염병이 창궐했다. 홀과 김창식은 몸을 돌보지 않고 현장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홀이 그 병에 걸렸다.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그해 겨울 별세하였다. 평양 사람들은 감동했다. 이런 헌신과 희생이 선교의 거름이 되어 훗날 평양이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낮은 자리, 밑바닥 목회

이후 김창식은 계속 전도하면서 신학회에 들어가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은 후 1901년 한국 최초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24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아다니며 125곳 교회를 개척하였고 48군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선교사들은 그런 그에게 ‘조선의 바울’이란 명칭을 붙여 주었다.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장기 목회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감리교 특유의 ‘순행’(巡行) 목회자였다. 열다섯에 집을 떠난 후 유랑 생활을 하면서 얻은 길 지식이 목회에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또한 어려서부터 몸에 익숙한 ‘밑바닥’ 생활 경험은 고행과 같은 농촌 목회에 큰 힘이 되었다. 머슴 출신으로 한국 최초 목사가 되는 신분의 수직 상승을 경험하였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낮은 자’의 겸손과 순종을 잊지 않았다.

그가 처음 선교사 집에 소개받아 왔을 때, 주변 사람들이 그를 부르면서 “어이, 창식이, 창식이!” 하는 소리를 듣고 선교사들은 그의 이름이 ‘김창식이’인 것으로 착각하고 영문으로 표기할 때, ‘i’(이)자 하나를 더 넣었던 것이다. 김창식은 굳이 그것을 빼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낮은 자리’가 자신의 떠날 수 없는, 떠나서는 안 될 은혜의 자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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