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당신은 온전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

당신이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당신이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안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서 이런 좋은 안내를 찾을 것인가?


나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사물의 지체 계획안에서(in the total scheme of things)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어떤 것인가? 나는 어떻게 선하고 훌륭한 삶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만이 당신이 그와의 친밀한 사귐을 통해서만 당신의 참다운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당신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 속에 살아 있지 않는 한 당신 자신과도 평화로운 관계랄 가질 수 없다. 당신은 진리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진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당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맺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와 신약성경 안에서 자기 자신을 개시하시고 있고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를 맺으신다. 당신이 당신의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지식과 안내를 찾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성경에서 그것을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찾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오래된 옛 책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 있는가


이렇게 오래된 옛 책들이 어떻게 당신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가
먼저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하라. 구약성경 시대의 남녀들은 당신과 같은 인간이다. 구약성경 시대의 사람들도 우리의 문제와 비슷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도 당신과 꼭같이 유혹과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본성은 같다.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만일 당신이 구약성경에 관한 교회의 신앙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성경 안에 등장하는 가장 주요한 인물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의 기록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그의 뜻을 어떻게 인간에게 계시하셨는가, 그가 어떻게 인간을 그에게로 나오도록 초청하셨는가. 당신은 구약성경 어디서나 인간의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같은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모든 삶의 중심에 계시면서 그의 목적을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 가운에 성취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성경와 신약성경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을 볼 수 잇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아직도 여전히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어떤 분이시며 오늘날 우리가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밝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의 구원의 하나님(hte God your salvation)으로 당신의 삶 속에 들어오신다. 하나님의 영이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예언자들에게 깨달음과 환상을 주셨던 하나님의 영이 당신 안에 거하면서 당신에게서 무지와 혼란을 제거시켜 주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그와의 사귐을 갖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계시다.”
바로 이런 것이 교회의 신앙이다. 교회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애썼던 사람들의 경험이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


2, 구약성경이 기록된 방법

본래 구약성경의 책들의 배열 순서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성경의 배열 순서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구약성경가 기록되는 데는 천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구약성경의 대부분의 책들의 저자의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책을 저술하는 데는 여러 단계의 절차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명심해야 한다.

먼저 예레미야는 결코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들음으로써 그 시대에 일어날 사건뿐만 아니라 그 사건과 관련하여 그의 민족이 결단해야 할 선택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할 굿 있게 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의 백성에게 그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계의 절차로써 예언자와 그 비서 바룩(Baruch)은 조용히 앉으셔 설교의 말씀(the words of sermon)과 예언자의 삶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 다음 세번째 단계의 절차로서는 예언자의 사후에 예언자에 간한 기록들을 한데 수집하여 편집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편집된 내용을 하나의 두루마리로 만들어졌다. 물론 이때의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기 위하여 세심한 주의력이 진지하게 기울여졌던 것은 아니다.

 

넷째 단계의 절차로써는 수세기 후에 예언자들의 글이 담겨 있는 두루마리를 다른 예언자들의 두루마리들과 한데 모아 이스라엘의 성경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솔로몬이 죽고 나라가 유다와 이스라엘 둘로 분열된 후에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승들을 한데 수집되어 좀더 분명한 형체를 갖게 되었다. 주전 850년 경에 유대에서 천지창조로부터 족장들 시대를 거쳐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기록되게 되었다.


주전 750년 경에 새롭고 매우 중요한 종류의 문서가 이스라엘 안에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전달한 그들이 메시지를 영구 보존될 수 있는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 인간의 경험의 옷을 걸치고 나타나게 하셨다. 이 말씀의 종들은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힘차게 전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이야기와 이스라엘의 인간적인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항상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3. 창세기

창세기는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서에서는 이 두 물음은 한데 결합되어 있으므로 결코 이 두 물음을 따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현존의 빛(the light of God is presence)에 비추어 볼 때에만 그는 자시 자신과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에 관한 진술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논쟁을 벌리고 있지 않다. 성서 어디에서나 하나님께 관한 진술이 참된 것이라고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성서는 깊은 침묵으로 답을 하고 있다. 당신은 당신이 성서를 읽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떻게 말씀하시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격 대 인격으로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성서의 기자들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말씀의 진위성을 입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할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서의 맨 처음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라는 것을 단언하고 있다. 세계는 하나님의 머리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자이시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의 창조자이시다. 처음서부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우리로부터 먼 곳에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당신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명백하게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다. 창세기는 11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12장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반항한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마련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선택하신다. 아브라함이 바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하나님과 인류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된다. 하나님은 전 인류 가운데서 한 가족을 선택하셨다. 이 한 가족이 점점 커져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세계 전체를 그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할 계획을 세우셨다.


역사에 관한 한 창세기와 과학자들의 발견 사이에 갈등이 있을 필요가 없다. 창세기에서 세계 형성의 역사를 찾아볼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창세기는 역사가들이 제공하지도 않고 제공할 수도 없는 것을 제공해 주고 있다.즉 창세기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삶의 의미를 제공해 준다. 과학은 세계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해 주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 성서는 존재한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나 인격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는 어떤 분이신가를 성서는 우리에게 말해 준다. 성서는 인간이 세계 안에서 차지하는 바른 위치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성서는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자기 자신과 그의 이웃과 화목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보여 주고 있다.

4. 출애굽기

출애굽기는 수백년 후의 매우 다른 장면을 열어 보여준다.

애굽에서 한 가족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다른 나라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중의 얼마는 자기들의 특별한 운명을 성취해야 할 따로 구별된 백성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애굽정부는 이스라엘 백성을 소수 집단으로 단지 노동력을 제공할 가치밖에 없으나 애굽의 적국의 침략을 받을 때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적국의 침략에 동조할 만큼 위험스러운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현대인들이게 있어서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현대인들로부터 적당히 먼 거리에 있다고 오늘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현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 계획과 사고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 있는 인격(living person)으로서 자기들의 세계 안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늘날 인간들이 갖고 있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불신앙은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선하심과 그의 진리와 그의 사랑을 믿고 있으면서도 현재와 미래의 세계사를 형성할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자기들의 머리에서 추방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을 성취하시는데 현대의 불신앙인들을 사용할 수가 없다. 출애굽기 5장으로부터 15장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기까지에 있었던 사건들은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려는 모세와 맨 처음 시도는 단지 애굽 사람들의 압제를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애급사람들에게 일련의 무서운 재앙이 내리게 되었다. 모세는 바로에게 이 재앙들을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이라고 말하였다.

5. 레위기와 민수기

당신이 이 레위기서의 법과 규칙은 크리스찬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적용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그리고 당신이 이 레위기를 그 속에 있는 법과 규칙들이 적용되었던 시대와 시각으로 읽는다면 당신은 그것들의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레위기서의 요점은,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의 본성의 순결함이다. 그의 안에 있는 거룩함의 본성과 반대되는 것은 더러움과 악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면서 하나님께 가깝게 접근할 때에 우리의 삶은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깝게 접근할 때에 우리의 삶은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것은 하나님께 거룩한 것을 인정하시지 않으신다.옛날에 레위기의 법들 중의 많은 것들이 굉장히 중요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보이는 희생을 드리는 제사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히 완성될 수는 죄의 용서와 속죄를 받기 위한 노력 표현의 수단이었다. 여기서 당신은 신약성서와 구약성서 약간의 부분들과의 관계를 명백히 볼 수 잇는 좋은 위치에 있다.


민수기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들의 긴 명단은 어떤 역사적 배경의 무대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어떤 실마리를 찾으려는 학자들에게는 필요한 부분이지만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별로 흥미도 되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의 선민으로 선택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그의 위대한 목적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수행케 하시는 전체 이야기의 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6. 신명기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날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를 섬길 것을 선택하지 않느냐는 사느냐 죽느냐의 사활의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당신에게 말해 준다. 당신은 당신 주위에서 많은 악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신앙으로 하나님께 응답하여 순종하면 당신이 당신의 삶의 참으로 아름답게 성취될 미래의 약속을 받게 된다. 신명기는 생사가 결려 있는 중요한 문제에 관한 물음에 대하여 답해 준다. 어느 개인이나 어느 민족이거나 자동적으로 만사 형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 예수께서 구약성서의 책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이용하신 것이 신명기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찬들은 맹목적으로 율법서에서 회개하고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7.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여호수아서는 성서의 어느 책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여호수아서의 첫 열두 장들은 사십년 전에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모세에 의하여 해방되어 나와서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이스라엘 부족들의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는 자기들에게 팔레스타인을 그들이 거할 장소로 줄 계획을 갖고 계시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갖고 적을 공격하여 산지에서 삶의 근거지를 확고하게 확보하기까지 신속하게 적을 무찔렀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그의 백성 종교 뿐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가나안 사람들의 수준으로 타락할 위험성을 미리 내다보았다.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그의 이웃과 같이 우상 숭배자들이 되었다. 이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가난했다. 그들은 자주 이웃 민족들에게 침략을 당했고 또 이웃 민족들의 노예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야빈 그리고 미디안 족속과 아멜렉 족속들의 침략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 침략자들이 이스라엘이 힘들여 얻은 산지를 영원히 빼앗지는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족들 사이에서 서로 싸운 일일 있었다.

 

예를 들면 길르앗과 에브라임 사이에 싸움이 있었다(12장). 그리고 몇 부족은 베냐민 부족을 대항해서 싸웠다(19장과 20장). 이 땅의 여러 지방에서 일어난 사사라고 불려졌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자유를 되찾아 주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완전히 멸망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다. 이 지도자들의 영웅적인 행동들을 옛 이스라엘에서 아주 흥미 있게 반복되어 전해져 왔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야말로 그의 백성을 하나로 결속시켜 그들의 적과 싸울 힘을 줄 수 있는 근원인 동시에 소망의 원천이었다. 이들은 자기들 혼자만이 싸우고 있는 거시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가운데 계시면서 이들에게 승리를 주셨다. 한민족의 젊은이들의 강한 이야기인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져 내려 온 것이었다. 주전 1100년으로 소급해 후대의 이야기도 주전 7세기 또는 6세기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인들 사이에 살면서 이방인의 예배와 삶의 관습을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유혹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인데 사사기서는 하나님을 굳건히 믿는 신앙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그를 섬길 것을 경고해 주는 역사의 해석이다. 사사기서의 편집자는 이 시대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이 옳은 대로 행동했다는 것을 두 번이나 지적하면서 각기 자기가 하고 싶을 대로 멋대로 하면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을 당신에게 상기시켜 죽 것이다.
룻기는 히브리 성서에서는 성문서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아름답고 이상적인 여인상의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 룻기의 저자는 그 당신의 이스라엘 백성의 다른 민족에 대한 편협하고 잔인한 편견을 극적으로 분쇄할 타격을 주었다. 이 룻기를 읽는 유대인은 모압 여인이었던 룻과 교제를 하면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새롭게 열린 마음과 생각을 갖고 이방인들을 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8. 사무엘상하와 열왕이상하


사무엘상하와 열왕이상하는 히브리 역사에 있어서 대략 500년 동안에 되어진 일들의 계속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것을 종교와 정치의 이야기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은 정치와 국제 문제를 포함한 그들의 삶의 전 영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예언자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분이셨던 사무엘과 그밖에 다른 예언자들은 민중을 노예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어느 계층의 사람들 예를 들면 왕들과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투쟁하면서 민중의 권리를 항상 옹호하고자 하였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왕들과 백성들이 그들 주의에 있는 다른 민족들과 같이 죄를 짓는 것을 보고 성죄하였다.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는 한 작은 나라의 이야기를 말해주고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전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물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이야기 중심에 계신다. 이런 까닭에 이스라엘과 같이 작은 나라의 역사가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하다. 당신이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에 당신은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비교해 가면서 우리 시대의 역사까지 포함된 모든 역사를 읽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릴 통치자를 세우는 일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는가는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오늘날도 현대 세계의 열 나라들의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일에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엘리야의 위대한 업적은 바알 숭배의 물결이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을 크게 위협하고 있던 때에 바알 종교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구약성서 전체는 한결같이 바알 숭배를 반대하고 있다. 바알을 예배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하나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죄가 안되는 행위가 아니다. 바알 숭배는 냉혹하고 사악하고 그리고 폭력적인 종교이다. 바알 종교는 통속적인 형식의 다신론적인 믿음의 표현이다. 예언자들은 바알 신 숭배를 배격하고 오직 창조주이시며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길 것을 가르쳤다. 바알 종교와 타협할 수 없는 이유는 바알 종교가 악한 종교이기 때문이고 바알 종교는 타 종교인들에 대한 관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역사서를 기록하는 작업은 이미 예루살렘에 멸망하기 전 주전 600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런 역사서를 쓰는 일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가 있었던 후에 시기보다는 성전 안에 있는 고대의 기록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왕실 공문서 보관 속에 있는 기록들을 참고할 수 있는 시기에 더 용이했을 것이다.

9.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할 지도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셨다.

다윗과 솔로몬은 통일된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국력이 크게 신장되어 주위에 있는 여로 나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분열을 촉진시킬 힘이 점점 커져 마침내 두 나라로 분열되고 말았다. 수세기가 흐르게 되자 끊임없이 이 민족은 힘에 의하여 분열되고 말았다. 한편에서 예언자들은 하나님께 범함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적 지도자들은 물질적 번영의 삶을 살기를 욕망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앗수르 군대를 침략을 방아 먼저 멸망해버렸고 그 다음에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과 그 안에 있는 성전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난 속에서도 자기들의 신적 운명(divine destiny)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역대상하, 에스라 그리고 느헤미야서의 편집자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신앙을 격려하기를 원했다.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의 역사가들은 자기 들의 민족의 과거의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 그리고 그이 백성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항상 그의 백성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들의 역사서를 기록하였다.

 

이 역대상하와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를 기록한 후기의 사가들은 유다 민족은 하나님께서 그를 섬기도록 선택한 백성이라는 것과 그들이 온갖 재난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놀라운 방식으로 지켜 주었고 그리고 보존해 주셨다는 것을 확신시킬 목적으로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역대상하의 기자는 제사장이거나 또는 제사장들과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얼마 후에 당신이 예언자들에 관하여 연구할 때에 당신은 제사장들의 종교관(view of religion)과 예언자들의 종교관이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제사장들의 두드러진 한가지 종교적 특징은 외형적 형식을 매우 중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상하의 이야기 속에는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촉구하고 있는 분명한 내용이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그는 예배의 정신(the sporit of worship)을 그의 백성 중에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느헤미야는 그의 여행담과 그가 발견한 예루살렘 성의 상태와 그가 직면했던 방해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그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책의 부분에서 말하고 있다(느 1:1-7;5;12;,12:27-13;31)


우리는 느헤미야를 유능한 행정가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가 동족을 뜨겁게 사랑했던 진지한 신앙과 기도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성취한 업적은 행정의 분야 보다는 종교적 가르침의 영역에 있었다 그는 유다에 있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예루살렘 방어를 위한 성벽을 쌓음으로서 그의 동족의 공동체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참을 공헌하였다.


에스더서의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장소는 수사에 있는 페르시아 왕국이다 이 책의 첫 장면에서 왕은 그의 제국의 귀족들과 함께 축제를 벌이고 있으며 그의 궁전의 보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에스더의 후견인이였고 그녀의 사촌이였던 모르드개는 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였다. 그는 왕은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던 두 관리를 죄를 폭로함으로서 왕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11. 시편과 잠언


시편의 작시자와 그 연대 역시 다양하다. 시편도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쓰여졌다.

시편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 중 많은 것들은 작시자를 알 수 없는 것들이다.또한 여러 시대에 걸쳐 쓰여진 것들이었다. 구약성서의 시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편은 여러 다른 유형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일반적인 서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이 친히 알고 있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확실성과 적의와 복잡함과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 지혜 있는 현인들은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잠언’이라고 불려지는 짧은 글의 형식을 자주 교훈을 하였다.이스라엘인의 격언들도 본래 일반 민중의 삶에서 비롯된 지혜이다. 솔로몬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그가 잠언 전체의 저자로 이해도 될 수 없다. 솔로몬은 잠언 전체의 후원자로 여겨지게 되었고 개개의 잠언들이 지혜 있는 현인들이 지은 것임에 틀림없다. 저자들의 이름은 잊혀졌지만 그 잠언들의 내용 오랫동안 기억되어 전해져 왔다. 잠언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하나님은 참다운 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지혜는 인격적인 것이다. 지혜는 항상 당신의 지성과 습관과 목적과 행위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12. 전도서와 아가

성서는 인생에 대하여 독자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전도서의 저자라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전도서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잇게 될 것이다. 전도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그리고 다스리는 절대적 주권자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에 순종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전도서 저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잇는 것이 아니라 “해 아래에서” 행하여지는 인간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의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사물에 대하여 갖고 있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철저한 회의심을 갖고 있다.

 

전도서의 저자와 같은 사람은 인간은 출생과 죽음으로 제한되어 있는 유한한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만일 인생의 의미와 질서가 있다면 현세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내세에 그의 삶이 바르게 조정될 것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전도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첫째, 우리에게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 성취에 대하여 무조건 긍정할 것이 아니라 의문을 제기해 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지식의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거짓된 신념의 거품을 제거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두번째로, 아무리 우리가 보지에는 인생이 어둡고 모순 투성이 보일지라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우리 인생에는 의미와 질서가 있다는 것을 전도서 저자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 혼란되어 보이는 세계의 창조자이시다.

 

세번째로, 비록 우리가 우리의 일의 결과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힘을 다하여 해야 한다고 전도서 저자는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네번째로, 그는 우리에게 단순성을 권하고 있다. 인생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마음껏 누리면서 즐거워하라. 마지막으로 그는 그의 충고를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아가서는 봄철과 사랑에 관한 책이다. 왜 이 책을 성서안에 편입되었는가?
아가서의 주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남녀간의 사랑이다. 이 아가서의 주된 사상은 매우 명백하다. 그리고 이 아가서의 메시지의 오늘날 이십세기에도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사랑’의 개념에는 익숙해 있다. 그러나 아가서는 불멸하는 영원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아가서에 등장하는 남자는 하나님이고 여자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다. 또는 남자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저자는 인간의 영혼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아가서에 나오는 남자는 그리스도이고 여자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13. 예언자들

성서의 예언자들의 주된 임무는 장차 되어질 일들을 예고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대언자들(spokes men for God)이었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처한 특정한 상황을 하나님의 시각과 같은 시각에서 그 상황을 보고 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선언한 사람들이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충실하게 지켜 진실된 삶을 살 것을 계속적으로 촉구하였다.

14. 이사야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소명이 그에게 임하였다.이 때부터 이사야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되었다.
예언자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예언을 믿을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예언의 내용은 참된가, 하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였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설교가 이사야가 사용한 방법들 중의 한가지는 그가 선언할 멸망에 대하여 경고하는 내용을 요약한 이름을 그의 아들에게 붙였다. 이사야는 유다와 다른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하였다. 가장 크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들 주의 하나는 외국에 대한 정책이었다.


앗수르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어 모든 것을 잃은 듯이 보였을 때에 이사야는 새로운 방법으로 그의 신앙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그는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 성으로부터 물러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여기저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소수의 신실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가르켜 ‘남은 자들’이라고 한다.

 

이사야는 이 남은 자들이야말로 미래의 소망이라고 종종 말하였다. 이사야는 다른 예언자들과 같이 그는 메시아 왕(the Messianic King) 이 올 곳을 내다 보았다.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수립할 구원자를 의미하였다. 그는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지 않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지 않은 종교는 참으로 순수한 종교로 여기지 않았다(58장).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인간의 삶의 움직일 수 없는 중심으로 삼을 만큼 하나님을 믿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빛과 구원의 새날을 그의 백성에게 결코 주시지 않을 것이다(59장).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 하나님의 백성이 언젠가는 온 땅에 질서와 빛과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만 했다. 예언자의 임무는 만일 사람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자유와 기쁨과 새로운 생명이 바로 그들앞에 도래할 것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다(61장).

15. 예레미야와 애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를 예언자로 세워 주신 것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불같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레미아는 “나는 아이이므로 말할 줄을 모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는 요시아의 개혁은 다만 표면적인 효과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외면적으로는 율법을 따르고 있었으나 내면적으로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우상은 사라졌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새 우상이 되었다 예레미야는 성전에 가서 지도자들과 백성을 통렬할 말로 비판하였다. 그는 진심으로 그의 백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백성의 멸망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내적 갈등이 그를 일생 동안 괴롭혔다. 예레미야는 모세로부터 예수까지를 연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사슬에 있어서 주요한 고리이다.

 

예레미야는 옛 진리를 반복해서 언급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에 의하여 이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이 종교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이 종교는 이스라엘 민족의 힘과 통일의 근원이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이 신앙을 잃어버린다면 생존할 수가 없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개인적이고 영적인 새로운 차원으로 높여 놓았다. 예레미야 자신의 기도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삶은 항상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되었다. 그의 경건한 글은 그의 후대의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본이 되었다.

16. 에스겔

에스겔은 마른 뼈들의 골짜기의 환상을 보았다.

그가 본 이 환상은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의기소침하여 절망 가운데 있는 그의 백서의 정신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는 성전 벽에서 흘러나온 샘물이 광야로 흘러들어가 그 광야를 풍요롭게 만드는 환상을 보았다. 이 환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그의 메마른 백성의 삶 속에 흘러들어가 그의 백성의 메마른 삶을 풍요로운 삶으로 변화시켜 줄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에스겔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 언어를 바르게 해석할 수만 있다면 그 상징적 언어의 배후에 있는 매우 풍요로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겔은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 성서는 다른 곳에서는 이런 내용을 하나님을 왕 중의 왕(the Kingof King)으로 부르고 있다 결국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의 귀로 들을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께 관한 지식(knowledg of God)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에스겔 제사장직과 예언자의 직을 잘 조화있게 수행한 희귀한 본보기이다. 에스겔은 일생 동안 제사장들의 조직과 기능을 면밀하게 주시하였다고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일들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였다. 에스겔은 개혁기에 성장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영적으로 계몽된 제사장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이다. 에스겔이 예언하기 오래 전에 그의 사상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었다.

 

그의 배경과 교육은 그에게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 주었다.

다른 것들은 예언자 예레미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러나 에스겔이 예레미야의 원리를 알고 있었고 그리고 자기 보다 나이 많은 예레미야의 입장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확실하다.에스겔도 비슷하게 인기없는 메시지를 전하였고 그리고 그는 그의 어리석고 고집센 청중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예레미야와 마찬가지고 그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먼 위안과 힘을 받을 수 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모든 위험과 해로운 일로부터 구원해 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믿고 있던 성전의 은밀한 방에서 칠십명의 지도자들이 “기어다니는 것들과 가증스러운 짐승”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거기다가 분향하는 것을 보았다. 예스겔을 성소 안에서 이런 가증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께서 성전 때문에 예루살렘을 그대로 놔두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전이 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될 것이고 성전은 불타버릴 것이며 백성은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라는 것이 메시지의 중심적 내용이었다. 에스겔은 포로 생활을 하는 그의 동족에게 위안과 소망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그는 선민 가운데는 거룩한 남은 자들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의로운신가 예루살렘 성 안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파멸이 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었다.


비록 그가 이들의 죄에 대하여 심판하실지라도 그는 그의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 이들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다. 만일 이들의 자기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이들 앞에는 생명으로에의 길이 여전히 열려 있었다.

17. 다니엘

다니엘과 그의 젊은 세 친구들은 신앙의 영웅들이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는 이들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은 이들의 취한 모험들을 기술하고 있는 훙미진진한 일련의 이야기들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

 

다니엘서는 주전 3세기 이후에 유대인들 사이에 나타났던 한 문학 유형의 많은 본보기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문학 형식을 묵시문학이라고 부른다. 묵시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포칼립스’는 ‘베일을 벗긴다’를 의미한다.

 

이러한 종류의 묵시문학서는 하나님께 그를 대항하는 세력을 쳐부시고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나타내 주는 미래의 일들을 계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들의 저자는 종교적 박해의 희생자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다.

 

그와 그의 예언의 메시지를 듣고 있었던 사람들은 주전 2세기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목격하였다. 옛 왕국들은 사라지고 새 왕국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이들은 보았으나 이스라엘이 회복될 날을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18. 호세아와 요엘

에언자 호세아는 자기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그리고 꾸준한 것인가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그가 배워 알게 된 것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쳤다.

 

호세아는 자기 처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과 고멜 사이에 관계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그의 선민으로 선택하여 사랑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따르고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우상을 숭배했다..

 

예언자 호세아는 그의 불행한 삶의 경험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경험의 거울에 비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호세아의 예언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의 결혼 생활의 의미와 그의 백성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보여주시자 그는 그가 배운 것을 그의 백성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호세아의 자녀들의 이름으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첫째 자녀의 이름 이스르엘은 전쟁을 암시하였다. 둘째 자녀의 이름은 로암미인데 그 뜻은 ‘내 백성이 아니다’이었다.


예언자 요엘에게 있어서는 이 재앙은 장차 임할 여호와의 크고 무서운 날의 전조이었다. 여호와의 날은 보통 날과 같지 않고 인간의 세계를 엄습해 올 영원한 사건의 날로 어느 시각에라도 인간에게 침입해 올 수 있다 한발이나 태풍이나 기근이나 온역이나 지진이나 홍수가 전쟁의 재난은 최후에 있을 대환란의 전조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재난들은 각각 장차 임할 무서운 큰 재난에 대비하여 회개할 것을 사람들에게 촉구하는 것이었다.

 

예언자 요엘은 모든 사람에게 꼭같이 신판이 임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요엘의 예언은 장차 임할 무서운 일에 대한 경고 이상의 것이었다. 요엘의 예언을 소망의 메시지였다. 그의 사명은 그의 백성들에게 만일 저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하였다. 오순절날 초대 교회의 크리스찬들에게까지 이 예언의 말씀은 오늘날까지 많은 경건한 신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19. 아모스와 오바댜

아모스는 그의 예언이 기록으로 보존된 예언자들 주의 맨 처음 사람이다.

그의 예언 전체는 주전 750년 경 하루 이틀 사이에 전해졌다. 고대 이스라엘 축제들에 대한 아모스가 벧엘을 지키는 절기를 축하하기 위하여 큰 무리가 성소에 모여들었던 장면을 능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심판의 말씀이 성전 뜰에 메아리쳤다. 사람들은 술취함에서 정신이 번쩍 들어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큰 재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저들에게 미리 충분한 경고를 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근과 한발과 마지막에는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을 보내 주시며 저들에게 경고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예언자 아모스는 두 번이나 하나님께 그의 백성을 위한 중재의 기도를 올렸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의 백성에게 내리려던 큰 재난을 두 번이나 철회하였다. 아모스는 예언을 중단하지 않고 여러 협박을 받으면서도 성소 자체의 완전하 파괴와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파멸을 말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은 전해졌소 무리들 가운데 몇몇 가난한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오다뱌에게 있어 하나님은 유다의 원수를 갚아 주시는 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의 보다 넓은 의미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의미를 보다 넓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이스라엘의 임무였다.

20. 요나와 미가

요나는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그도 또한 대부분의 동족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아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대의를 이룰 수 없는 행동이였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의미를 요나에게 가르치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어주신 박넝쿨의 이야기는 그에게 소중한 이야기가 되었다.


모레넷 사람 미가는 호세아와 이사야의 동시대 사람이었다.

미가는 참다운 예언자는 부패한 것들을 알고 있다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질적 이득에 조금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정직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참다운 경고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부정과 악이 있는 곳에서 그것들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1. 나훔, 하박국, 스바냐

나훔은 그의 생생한 시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을 그의 백성에게 선언한다.

나훔의 예언을 한 시대의 끝을 알려주고 있다.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겸손하게 낮추어 회개의 교훈을 배우도록 사용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러나 마침내 앗수르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권력을 탐하고 잔인함과 무책임성은 나타내자 앗수르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을 아시야는 예언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국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예언자 하박국은 자기 위에서 세상이 불공평을 보았다. 하박국은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스바냐는 왕족이 일반적으로 받았던 교육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여러 계층들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였다.

22. 학개, 스가랴, 말라기

예언자 학개는 주전 520년에 모든 유대인들이 한데 모여 그들의 하나님을 예배할 중앙 성소가 곧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마음 약해진 일꾼들을 격려하고 축복을 약속함으로서 그가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스가랴의 환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단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용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 밖에서 행하여지는 일상 생활의 내용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의 백성의 끊임없는 불평의 소리는 다시 이 땅에 들렸다. 그들을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켰으나 축복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들은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그들을 불평을 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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