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구원사역을 전개함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은 구원의 복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는 그 순서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통상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라고 부르며, 종교 개혁의 산물로서 개혁신학의 유산인 것이다. 구원의 서정이라는 말은 독일어로 Heilsaneignung(구원의 획득), 화란어로 Heilswerg(구원의 수단), Orde des Heils(구원의 순서), 영어로 Way of Salvation(구원의 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구원의 서정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구원론에 대한 전체적인 신학의 틀이 바뀌어지기도 한다. 즉 그 출발점을 어디에서 잡는가에 따라서 대표적으로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우선은 하나님께로부터 출발점을 잡으면 구원의 전체적인 주도자가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지만 그것을 인간 쪽에다 두게 되면 인간 중심적인 구원론으로 주도자가 인간 쪽으로 향하게 되는 엄청난 차이를 나타나게 된다. 

 

이 차이점은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아니면 구원이 단지 자신의 신념에 머무를 수도 있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점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 신학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강조하므로 구원의 서정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가르치고 제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본 론

 

1. 개혁파의 구원의 서정

 

①소명(召命) ②중생(重生) ③회심(悔心) ④믿음(信仰) ⑤칭의(稱義) ⑥수양(收養) 

⑦성화(聖化) ⑧견인(堅忍) ⑨영화(榮化) 

 

개혁파 신학의 구원의 서정은 인간의 영적인 상태는 그의 지위, 즉 율법과의 관계에 의존하며, 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근거로 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괴적인 죄의 영향력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을 전제하며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전제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서정에서의 각 항목마다에 하나님의 역사(은혜)를 배제하지 않으며, 구속 사역의 적용에 있어서 “칭의”는 논리적으로 우선하며, 중생이 회심보다 선행한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도 구원을 성령께서 적용하시는 역사라는 것을 강조하며(29-30문) 성령이 인간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칭의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 행위만을 주장하며(33문), 회개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구원의 서정을 박형룡의 논거를 중심으로 각 부분별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소명

롬 8:30에서 구원 서정의 첫 머리에 소명(부르심)을 두었다. 소명은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으로 구별되며, 내적 소명은 유효적 소명으로 불리워지며 내적 소명은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를 영생으로 초대하시는 영원한 부르심이다.(딤전 6:12) 내적소명이 없이 외적 소명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2)중생

중생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비밀한 사역으로, 개인의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친다. 중생한 자란 성령세례를 받은 자를 가리키며, 중생과 성령의 세례는 따로 떼에서 생각할 수 없다. 중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첫째 요건이다.(요 3:3,5)

 

(3)회심

회심은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회심은 두 요소가 있는데, 회개와 신앙이다. 회심은 성령 하나님의 활동으로, 회개는 율법을 방편으로 역사하고, 복음을 수단으로 신앙을 일으킨다.(롬 10:17)

 

(4)신앙

신앙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곧 믿는 것이다. 이는 인격적인 신뢰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영적인 활동과 육적인 활동을 포함한다, 믿음은 자아발생적이 아니요 성령의 활동에 의한 결과이다.

 

(5)칭의

롬 3:30, 5:1, 갈 2:16등에서 믿음에 칭의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말씀한다. 칭의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일컫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다. 칭의로 말미암아 죄인은 그가 마땅히 져야 할 죄책이 제거된다. 칭의로 말미암아 양자되는 권세가 주어진다. 칭의는 성화와 구별되며, 칭의가 선포적인 데 반하여 성화는 점진적이며, 죄의 오염을 제거하고 일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6)수양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이다. 수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로 영생복락을 누릴 특권을 부여받는 것이다. 수양된 자는 성령의 권면과 지도를 합하여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7)성화

성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의 점진적 성취이다.(살전 5:23) A.A. Hodge는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인성에 키가 자라는데 까지 이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루이스 벌콥프는 “성화는 성령이 이로써 칭의된 죄인을 죄의 오염에서 구출하시며 그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할 만하게 하시는 은혜로운 성령의 공작이다”라고 말하였다. 성화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성령은 성도를 성화케 하시고, 성화의 목표는 온전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충족한 거룩을 이루기까지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 완전히 성화된 몸으로 천국에 이른다.

 

(8)성도의 견인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상태에서 타락할 수 없고 떨어지지 아니하며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시는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이다.

 

(9)영화

구원 서정의 최후 단계로 영원한 영광, 무궁한 세계에 임하는 것이 곧 영화이다. 영화는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성령의 순간적인 역사로 영화한다. 성도의 몸의 부활에서 완전한 구속을 이루고 완전한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각 개인들이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 임하며, 부활 시에는 동시에 모든 성도가 경험하게 된다.

  

2. 루터의 견해

 

①소명 ②조명 ③회심 ④중생 ⑤신앙 ⑥신비적 연합 ⑦갱신 ⑧보전 

 

루터파는 선택,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세 가지 항목 중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신들의 논의를 출발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의 심령과 삶에서의 구속 사역의 주관적인 실현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편에서 행해지는 것보다는 인간 편에서 행해지는 것들을 더욱 강조하는 구원의 서정을 제시하고 있다. 

루터파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령의 사역”관계를 “구원의 서정”을 중심으로 정리하면서 창세전의 구속사역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노예의지”를 지닌 인간 편에서 본 신앙문제로부터 구원론을 시작한다. 루터는 소명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이것을 “뿔”처럼 잡으려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협동작용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구원의 순서에서 성령이신 교회를 통하여 조명, 회심을 수여받고, 중생 ·신앙, 칭의까지 교회의 세례와 성찬으로 수여받는다. 사람의 “믿음, 의지, 선행”으로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이 적용된다. 인간의 신앙의 태도에 따라 갱신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루터파의 구원론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는 장점이 있으나 로마 카톨릭처럼 말씀(복음)보다 외적 은혜의 방편인 세례, 성찬(공제설)에 의한 사람의 믿음이 칭의를 이루게 한다고 하므로 성경적이지 못하다. 이들은 사람의 신앙이 칭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룬다는 견해 때문에, 유효적 소명부터 확실성이 없다. 신인협동에 의한 칭의를 강조하고 회심을 신앙과 분리시키고 이 둘을 별개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루터파는 구원의 서정에서 수양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수양을 목회와 성도의 삶 속에 적용하지 않는 큰 문제점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성도의 견인을 기각하면서도 성도의 선행에 의한 구원의 확신은 인정한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이 없는 구원 교리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보존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저들의 신인협동 교리는 목회와 성도의 바른 삶 속에 적용할 수 없는 공로주의교리다. 사제가 베푸는 세례와 성찬, 미사, 성도의 선행, 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로마 카톨릭의 주장에 대하여 루터파는 오직성경,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루터파는 교회의 성례에 의한 성도의 중생을 주장한다. 이들의 교리는 인간론적이다.무엇보다도 루터파의 구원 교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인간의 노예의지와 가항적 은혜를 주장하므로 구원의 확실성이 없으며, 성경과 삼위일체 교리와 부합하지 못한다. 

  

3. 알미니안파의 견해

 

①소명 ②회개 ③신앙 ④칭의(의의전가) ⑤중생 ⑥성화 ⑦견인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구원의 서정은 외면적으로는 구원의 사역을 하나님께 귀속시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인간의 태도와 행위에 부수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그 기회의 이용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하기만 한다면 완전한 영적 복과 구원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충족한 은혜를 베푸신다고 본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칼빈주의적 순서와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회심의 기원이 누구에게 있는 가에 대한 사실로 간명하게 드러났으며,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제하는 대신 인간을 위치시키는 데서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인간론 중심적으로 치우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을 약화시키며 파괴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항상 사람을 구속하려 하시지만 사람이 자유의지로 구속의 섭리에 항거 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충족적 은혜’로 시작하여 원죄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선행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능력으로 소명, 회개 · 믿음을 의지로 칭의, 중생을 선행으로 성화, 견인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관계는 성령의 주권적 사역이 아니라 인간의 반응-태도, 전횡적 의지와 행위에 달린 것이다. 

결국 알미니안파의 구원교리는 가항력적인 은혜와 신인협동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공로행위는 성도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주지 못한다. 신앙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따로 독립시키고, 성도의 구원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서 인본주의적 신앙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알미니안파는 성도의 의지로 신앙의 은혜를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구원론은 논리적으로 성도의 삶에 성령의 단독사역에 의한 신앙과 완전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적용할 수 없다. 다만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의 사제나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 성찬에 의하여 중생과 칭의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복음적이다. 이와 같은 알미니안파의 입장은 현대 신학자들에게 자유주의의 길을 열어주어 펠라기우스적인 합리주의적 복귀로 이어지게 하였다. 알미니안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내적인 단독사역의 필요성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알미니안파의 자유의지와 신인협동교리에 형향을 받아 펠라기우스주의로 돌아간 쉴라이에르마허와 칼 바르트와 루돌프 볼트만은 “자아 충족적 원리”에 기초하여 성경은 신화라는 공통된 입장을 가지고 구원론을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은 불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인간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의 원죄를 부인한다.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이천년 전에 십자가 수난을 받은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는 오늘날의 나의 실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며, 오직 인간 예수만 존재한다. 

쉴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 안의 인격적 좌소가 아닌 몰아지경(엑스터시)의 종교 감정상태를 주장한다. 칼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부정한다. 성경은 합리주의적 작품이다. 그러므로 초절된 계시를 믿는다. 볼트만은 성경을 신화로 치부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알미니안파의 영향을 받은 신학이나 사상은 인간에서부터 시작됨으로 성령의 주권적 사역으로 주어지는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 적용되는 구원의 개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인간의 믿음에 의한 합리적· 도덕적· 감정적· 사변적인 그리스도와의 공감만이 존재할 뿐이다

  

4. 칼빈의 견해

 

①소명 ②신앙 ③중생 ④회심 ⑤성화 ⑥칭의 ⑦예정8부활 

 

칼빈은 중생을 회심 전에 두는 중요한 이유를 그의 로마서 8장 주석에서 부르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경건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 이는 그가 그들을 선택하여 그의 특별한 백성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그들이 보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는 우리가 선택받게 된 원인들을 하나님의 은밀하시고 선하신 뜻 외에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바울이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 즉 선택으로 말미암아 예정을 입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그의 강요에서 더욱 확고하게 밝히고 있다. 즉 믿음이 회개에 앞서는 것이지 회개로 인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의 근거는 복음에 있으며,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회개의 근원이 믿음에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회개를 하게 만들기까지에 어떤 시간적 간격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뜻은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진심으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데 있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의 순서에 있어서는 구원론의 후반부에 위치하는 ‘예정론’이 실제로는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우선적인 구속 사역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제 2스위스 신앙고백서」의 10장 “하나님의 예정과 믿는 성도들의 선택에 관하여”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리고 순 은혜로 사람의 그 무엇을 조건으로 삼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의지하시는 믿는 성도들을 예정 혹은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택하시는 것이지 우리를 직접 택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이제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사람들이 택함을 받은 사람인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5. 로마 카톨릭의 견해 

 

①충족의 은혜 ②협력 은헤 ③주입 은혜(성례) 

 

로마 가톨릭은 구원을 “로마 카톨릭 교회”자체에서 시작한다. 교회가 성령이고 복음은 교리 지식으로 대신한다. 로마 카톨릭의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보다 선행된다. 어린 아이들은 영세에 의해 중생되지만, 성년이 되어서 비로소 복음에 접한 사람들은 마음을 조명하고 의지를 강화시키는 “충족 은혜”(gratia sufficiens)를 받게 된다. 인간은 충족 은혜에 저항할 수 있고 혹은 이에 동의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이 은혜에 동의하면 이 은혜는 “협력 은혜”(gratia co-operans)로 변환되며, 이로서 인간은 칭의를 예비하는 데 협력하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사제가 베푸는 성체성사로 이루어진다. 협력은혜는 조력은총이라고도 하며, 회심(고해성사), 소명, 초자연적 성화(영화·고행·만족)를 말한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은 구속 적용의 모든 순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핵심으로 사제가 베푸는 세례, 성찬미사 교리를 꼽는다.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필수불가결한 구원의 역사를 오직 사제가 베푸는 충족은혜(세례)와 주입은혜(성체미사)를 받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제는 하나님과 동등하며 사제는 또 다른 그리스도이다. 로마 가톨릭의 전승과 성경은 그 권위가 동등하여 성경을 언제라도 가감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에서 교황과 사제는 “하나님과 동등”하고 “또 다른 그리스도”이다. 성경을 가감하여 그들의 교리가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 그러므로 중생부터 사제의 세례와 성례의 효능으로 구원 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구원의 복음 설교를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중생을 위한 세례 전 충족은혜는 성경적이지 않다. 성화를 위한 선행은 구원의 공로 조건으로는 타당성이 전혀 없다. 그들이 복음보다 중요시 여기는 세례, 성찬은 중생과 원죄에 대한 사죄의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행하는 고해성사는 속죄의 근거로서 작용할 수 없다. 그들은 사제의 세례로 중생을, 성찬미사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연옥미사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개혁파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령의 단독사역에 의한 구원의 확신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이들의 교리는 반 성경적임은 물론이고 신론, 삼위일체 하나님, 인죄론, 예정론,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 등을 부정하고 있다.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악이다.

  

6. 펠라기우스의 견해 

 

①회개(죄인의 자력으로) ②순종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가르쳤다. 전통적인 기독교 교훈, 즉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를 짓는 강력한 경향성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가르침을 거부했다. 펠라기우스는 금욕적 실천으로 자신의 육체를 제어하면 선하고 옳은 일을 선택하여 실천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사람의 자유와 개인적 책임은 그가 언제든지 죄를 짓는 것처럼 죄를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고 한다. 단지 의식적인 의지의 행동만이 죄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중생은 단순히 도덕적 개선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전에 율법을 범하는 것을 선택한 사람은 지금도 그것에 순종하여 살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행위구원론자로서 그는 인간이 자기 죄를 스스로 끊을 수 있다고 했으며, 그러한 인간의 의식적인 결단과 의지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펠라기우스가 있던 당시에는 영지주의가 성행하여,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육체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행동에 대한 무책임이 난무하였다. 이와 같은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의 영향이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 때 펠라기우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행하는 것을 고민하던 중에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지나치게 되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도 행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 혹은 “스스로 죄로부터의 결단”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성경에서 제시하는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완전히 파괴하고 인간의 책임과 행동만을 강조하는 인본중심적인 신학적 사고로 모든 신앙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신학적 체계는 급기야 정통적인 교회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드는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결 론

 

이제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칼빈주의를 제외한 다른 사상에서는 그 공통성이 인간론을 중심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유일하게 칼빈주의만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칼빈주의적 구원 개념만이 가진 그 독특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칼빈주의적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개혁자들의 공통된 소리는 구원의 서정이 단독적으로 분리돼서 언급되어서는 안되며 전체적으로 함께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야 그 가치를 상실하지 않게 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칼빈 자신도 이 부분에 있어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소명, 칭의, 그리고 마침내는 영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들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주의적 독특성의 중요성을 바르게 세워야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해 주신 구원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될 때에만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가 바르고 겸손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자세하게 가르쳐서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온전히 찬양받으시게 하도록 가르쳐야 할 책임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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