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지만, 실은 사랑보다는 믿음의 종교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이란 이러한 믿음이 외적으로 드러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종교에나 믿음이 있습니다.

불교도는 부처님을 믿고, 이슬람교도는 알라신을 믿습니다.

심지어 이단이나 무당들에게도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습니다.

이는 믿음이라고 해서 다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

제대로 된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믿음이란 어떤 것이고, 왜 우리에게 그러한 믿음이 필요한가,

그리고 믿음의 대상과 방법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 믿음이 왜 필요한가?

 

1)인간 능력의 한계

첫째로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가 전폭적으로 부모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은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먹는 것, 입는 것, 목욕하는 것, 기저귀 가는 것... 이 모든 것을 부모에게 아무런 부끄럼 없이 맡기고 있습니다. 자신이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러합니다. 인간이 뭐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내 능력으로 모든 사업이 잘 된다면 왜 오늘도 부도나는 회사들이 생기는가? 누구나 하고 싶은 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모든 가정의 자녀들이 왜 수능 390점 이상을 얻지 못하는가?

인간이 모든 병을 이길 수 있다면 어찌하여 입원실마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는가? 모두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무능력을 인식할 때, 자신이 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2)인간 생명의 한계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인간이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는 순간은 누구나 믿음을 필요로 하지만, 언제라도 자기에게 능력이 생겼다고 생각이 되면 다시금 믿음을 떠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를 의지하던 아이도 걸음마를 배우면서부터 엄마 품에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꾸 자기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사람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내 돈이 나를 지킬 수 있다. 내 건강이 나를 지킬 수 있다. 내 지식이 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능력의 한계가 믿음의 동기가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며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 생명의 한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죽음을 안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올바른 믿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죽는 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장례식장을 다니며, 여러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듣고, 또 죽음에 대해 말하지만, 오직 자신만은 죽음으로부터 예외인 줄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자주 상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내일 또는 내년에 무엇을 할 것이냐의 문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이나 내년이 있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야고보서 4:13 - 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①불교의 윤회사상

불교를 믿는 사람이 왜 올바른 믿음을 갖기 어려운가? 불교에는 유일회적인 죽음의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죽으면 또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윤회사상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환생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결국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영원히 사는 존재라고 믿는 것입니다.

 

②유교의 대를 잇는 제사

한편 유교를 믿는 사람들은 왜 신실한 믿음 생활을 하기 어려운가? 유교에는 아들을 통해 대를 이어 가는 한 자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망을 죽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가 끊어져서 자신에게 제사 밥을 먹여줄 아들이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죽음을 죽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죽음보다 대가 끊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③서양철학의 영혼불멸 사상

그리고 철학자들은 왜 믿음을 갖기 어려운가? 서양철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이데아에서 영원히 살던 영적 존재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육체라고 하는 감옥 안에 갇혀 지내지만, 마침내 죽음을 통해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되면 다시금 신적 본향인 이데아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육체는 흙이 될지라도, 인간의 본질인 영혼은 이데아에서 영원히 산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영원히 사는 존재라고 믿는 인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누구라도 참된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세계로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는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 뿐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때에 비로소 올바른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3)인간 의(義)의 한계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다른 종교도 죽음과 그 이후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동기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더 필요한 것이 인간의 의의 한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죄 앞에 무력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도 조세형씨의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그는 수십 년간의 수감생활 중에 회심을 하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풀려나왔습니다. 그는 출옥 후 매스컴을 수없이 많이 탔고, 수많은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가졌으며, 특히 재소자를 위해 훌륭한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욕망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여권을 위조하여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일본에 가서 좀도둑질과 빈집 털이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죄가 이토록 끈질긴 것입니다.

 

조세형씨가 못 배운 사람이라서 그럴까요? 그러면 누구보다 많이 배운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은 어떠합니까? 그는 정치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성 추문과 함께 보냈습니다. 어찌 그인들 점잖게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제아무리 온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죄를 이길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가 이들 두 사람의 의보다 결코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성인 사도바울조차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로마서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서 7:23 - 24)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의 한계를 철저히 깨달은 자만이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올바른 믿음을 갖기 어려운 까닭은 스스로 의로울 수 있다고 믿고, 죄를 안 짓고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무엇을 믿을 것인가?

 

1)성부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무엇인가? 두 말할 나위 없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일체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성부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제일 첫머리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를 포함한 모든 만물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주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창조의 비밀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복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온갖 난리를 피워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것을 그대로 사용한 복제이지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인간은 아직도 피 한 방울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수혈을 통해 다른 사람의 피를 재활용할 뿐입니다. 인간이 창조의 비밀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생명의 비밀도 알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생명의 주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의 주인도 아닙니다. 천지만물의 주인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의뢰해야 합니다.

 

2)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직결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 - 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성육신). 그분에 대한 신앙은 사도신경에 잘 나타나 있는데,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세상의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그분의 오심(초림)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다시 오심(재림)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성령님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님에 대한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곁을 떠나가셨지만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요, 주이시며, 생명의 공급자이십니다. 그 분은 천지 창조 때에 수면 위에 운행하셨고,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으며,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능력으로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며, 위로해 주시고, 변호해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롬 8:26 - 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3. 어떻게 믿을 것인가?

 

1)순종함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믿음이 왜 필요하며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첫째로 순종함으로 믿어야 합니다.

 

①말씀에 대한 순종

이 때의 순종이라는 말은 무엇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②상황에 대한 순종

또한 순종은 상황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지금 내게 벌어진 상황이 비록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일지라도, 그 분께서 내게 주신 상황임을 믿고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어진 상황을 이겨내는 사람이지 결코 도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순종을 통해 환난 속에서 인내를, 인내 속에서 연단을, 연단 속에서 소망을 내다봅니다.

 

로마서 5:2 - 4)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2)바라봄으로

둘째로 우리는 바라봄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에 있어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의 모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본받음’이야말로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영성훈련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해야 온전케 되는가? 돈을 많이 벌면 가능한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는가?, 박사학위를 받으면 되는가?, 건강해서 오래오래 살아야 가능한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대가들은 우리가 이런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의 삶이 온전케 됨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봅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고, 그에게까지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3)신실하게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셋째로 신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피스티스’, 곧 ‘신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신실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좋은데 신실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믿음은 좋은데, 매번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믿음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혹시 믿음은 좋은데 항상 미덥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미쁘신 분, 즉 가장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철야기도와 방언기도를 세게 하는 사람, 바쁜 일과 중에도 기도원을 수시로 다녀오는 사람이 정말 믿음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모든 일에 신실한 사람입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비록 이방 애굽과 바벨론의 정사를 맡은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신실하게 감당해냈습니다. 그들이 믿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실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마태복음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즉, 신실하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왜 그렇습니까? 신실한 사람은 절대로 헛된 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절대로 정욕을 위해서 쓸 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곧 신실이라면 믿음은 먼저 우리의 속을 신실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속이 신실해지면 그것은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여지게 됩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누가 신실한 사람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내가 신실한 사람이다’ 라고 외치지 않아도 사람들은 누가 신실한 사람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신실한 삶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을 밝히는 빛처럼, 맛을 내는 소금처럼 우리의 신실한 믿음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맺음말

 

이로써 우리는 왜 믿음이 필요한가?

그리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는 믿음의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에게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세상 속에서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허황된 바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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