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1)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을 뒤돌아보면, 솔직히 받았던 것보다 받지 못했던 것들이 더 많았고, 찾았던 적보다 찾지 못했던 적이 더욱 빈번했으며, 열렸던 경우보다 열리지 않았던 경우들이 보다 많았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구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이로 보건대, 지금까지 우리가 받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하지도 않은 것을 어찌 받을 수 있고, 찾지도 않은 것을 어찌 찾을 수 있으며, 두드리지도 않은 문이 어찌 열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받지 못한 이유는
첫째 하나님 앞에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이며, 셋째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 구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찾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어떤 문들이) 열려지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두드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시점에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는 말씀을 들어 간구의 필요성을 일축하려 들지도 모르나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려야 할지라...”(겔36:37)는 말씀을 통해 이와 같이 주장은 그 설득력을 잃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정욕으로 구했기 때문이거나, 마음에 죄악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했거나(약4:3) 마음에 죄악을 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쉼 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되 혹 정욕으로

구하거나 죄악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부지런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쉼 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되,
혹 정욕으로 구하거나 죄악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부지런히 삼가야 할 것이다.

 

2. 기도는 ‘구하는 그 이상’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11:9~10)

 

보통 우리는 기도를 ‘구하는 것’에만 국한시켜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구했으면 다 되었다’는 식의 태도로 일관한 채 이 외의 일들은 좀처럼 하지 않으려 합니다. 구했으면 거기에 따른 행동이 반드시 따라 나와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기도를 ‘구하는 것’에만 국한시켜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구했으면 다 되었다’는 식의 태도로 일관한 채
이 외의 일들은 좀처럼 하지 않으려 한다.

 

 구했으면 거기에서 끝내지 말고, 구한 그것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합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특정한 문 앞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 찾았으면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그 문이 열릴 때까지. 이처럼 우리는 문을 두드리는 일까지 끝마쳤을 때  비로소 ‘기도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생활이란?
구했으면 거기에서 끝내지 말고, 구한 그것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또한 찾았으면 그 문이 열릴 때까지 부지런히 두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구하는 그 이상’입니다. 지금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내가 해야 할 일, 즉 구하는 것을 게을리 하고 있지 않습니까? 찾을 것을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찾는 일에 무심하지 않습니까? 열릴 것을 고대하면서도 정작 문 두드리는 일에 대해선 소홀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막연한 기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구하고, 찾으며, 두드려야 합니다.

 

* 기도생활이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을 쉬지 않는 것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뭐가 가장 필요할까요? 두드려야 할 문을 제대로 찾는 일일 것입니다. 아무 집이나 가서 두드릴 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드리기 위해선 먼저 (두드려야 할 대상, 즉 문을) ‘찾아야’ 합니다.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선행되어야 할까요?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기도가 계속 되는 동안, 두드려야 할 문을 보여주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입니다. ‘지금 그곳에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가서 내가 네게 보여준 그 문을 찾아 나서라. 부지런히 찾되 그 문에 이르도록 그리 해라, 그래서 그 문 앞에 이르렀다면 주저하지 말고 두드리기 시작하렴. 몇 번 두드려서 문이 안 열린다고 해서 쉽사리 돌이키지 말고, 그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려무나. 그러면 머지않아 그 문이 열릴게다. 자~ 그러니 어서 시작해보렴.’ 한 번 구했다고 해서 기도가 끝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시작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세요.

주님은 우리가 구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기도가 계속 되는 동안,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 그곳에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가서 내가 네게 보여준 그 문을 찾아 나서라. 부지런히 찾되 그 문에 이르도록 그리 해라, 그래서 그 문 앞에 이르렀다면 주저하지 말고 두드리기 시작하렴. 몇 번 두드려서 문이 안 열린다고 해서 쉽사리 돌이키지 말고, 그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려무나. 그러면 머지않아 그 문이 열릴게다. 자~ 그러니 어서 시작해보렴.’

 

 기도할 때 주님은 직접 문을 열어주시기보다 먼저 그 문에 이르는 방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갈밭을 통과해야 한다면 거기에 맞는 튼튼한 신발을, 길도 표지판도 없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해당 지역의 지도와 나침반을, 암벽을 올라가야 한다면 암벽등반에 필요한 도구들과 강인한 의지력을, 일정한 시험을 치러야 한다면 필요한 자료와 능력을, 먼 길을 가야 한다면 적절한 운송수단을, 얼마간의 돈을 필요로 한다면 그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각각 주실 것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은 직접 문을 열어주시기보다 먼저 그 문에 이르는 방법을 보여주신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두드려야 할 문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 일 하기를 시작합시다.

 

* 계속해서 두드려야 합니다(눅11:5~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11:8)

 

당시 생활이 부유하지 못한 유대인 가정에서는 대개 온 가족이 하나 밖에 없는 방에서 그것도 한 이부자리에서 잠을 잤습니다. 따라서 한 밤 중에 손님이

찾아왔을 경우 누군가가 문으로 가서 문빗장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부득불 자고 있는 가족 전체를 깨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밤 중에 손님을 맞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속 집주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벗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은 ‘그 간청함을 인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눅11:8).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더 말해주십니까? 기도하되 기도한 것을 얻기까지 두드리기를 쉬지 말라는 말입니다(‘계속해서 두드리는 수고와 인내’의 필요성).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되 쉽게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눅18:1~8 과부와 재판장 비유 참조/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고 찾는 이마다 찾게 될 것이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눅11:10).

 

지금 구하고 있습니까? 아직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세요.

지금 찾고 있습니까?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지금 두드리고 있습니까? 아직 문이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분명히 받을 것이고, 찾을 것이며,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3.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18:1)

누가복음 18장은 한 재판장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어떤 재판장입니까? 불의한 재판장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하는 그런 재판관 말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눅18:2)

 

헌데, 그 재판장에게 누가 찾아왔습니다. 그 도시의 한 과부입니다. 그녀는 자주 찾아와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눅18:3)

 그러나 그 재판장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처음에는 아예 무시하고 들어주지 않다가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4절 상)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4,5절)

 

만일 이대로 계속 두었다가는 과부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명예 역시 손상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번거롭게 하니’는 말은 헬라어 ‘휘포피아조’로써, ‘눈을 멍들게 만들다’, ‘명예를 손상시킨다’는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왜 이 같은 이야기를 꺼내셨습니까?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눅18:1,2)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까? 혹 한동안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없어 낙심한 채 아예 기도의 끈을 놓아버리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교회를 불평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아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장처럼 아예 무시하고 들어주지 않는 분이 결코 아니며, 또한 자꾸 귀찮게 한다고 해서 들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내버려두는 그런 분도 아니시라는 점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장처럼 처음부터 아예 무시하고 들어주지 않는 분이 아니며,
또 자꾸 귀찮게 한다고 해서 들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내버려두는 그런 분도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밤낮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에 대해 오래 참지 못하실 뿐만 아니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신원하여 주시기를 속히 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18:8) 곧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때를 따라 하나님의 때(최상의 기회)에 하나님의 방법(최상의 것)으로 그리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 오래 참지 않으실 뿐 아니라
신원하여 주시기를 속히 하시는 분이다.
곧 하나님의 때(최상의 기회)에 하나님의 방법(최상의 것)으로 그리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동안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 여전히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원망하면서 기도조차도 중단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전혀 이해하지도,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바라건대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그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4. 여러 가지 종류의 기도

 

(1) 방언 기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10)

 

성령의 다양한 은사 중에서 ‘방언’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사전적인 의미로는, 표준어와는 다른,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대체로 성도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방언기도: 성도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이 같은 방언은 초대교회 당시 예배의 한 요소로 포함되기도 했으나(고전14:26), 두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해야 하고, 반드시 통역이 뒤따라야 하는 등 다분히 제한적이었으며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고전14:27,28)  오늘날에는 그 특성상 개인기도의 깊이를 더해주는 등 개인적인 영의 교제 또는 기도의 차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14:2)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14:4)

방언기도의 목적: 기도의 깊은 데로 나아가기 위함.
주의, 물론 방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도의 깊은 데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도의 깊은 데로 나아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방언의 은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7~10)

 

* 방언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30)

 

방언에 대해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방언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만일 방언 기도를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구원 받은 사실까지 의심하면서 정죄하는 행태를 보여왔구요.

방언에 대해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방언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찌 말하고 있습니까?

모두가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지지 않았듯이, 모두가 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30)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말할 줄 알았던 사도 바울은(고전14:18) 이에 대해
모두가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지지 않았듯이,
모두가 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고전12:30).

 

 혹자는 바울이 방언을 잘 알지 못해서 이 같이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말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

누구나 다 방언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잘못된 통념을 버리고,
이제부터라도 방언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지 말고,
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각자가 받은 은사가 다를 수 있음을 깨닫고, 서로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며,
더불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방언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잘못된 통념을 버리고, 이제부터라도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정죄를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각자가 받은 은사가 다를 수 있음을 깨닫고, 서로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며, 더불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나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 한 마디 지혜로운 말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

 

혹자는 방언을 ‘천사의 말’(고전13:1)로 평가하면서 최고의 은사로 여기나, 오히려 바울은 사랑이 최고의 은사이며, 결국 이 같은 사랑이 없으면 (각종 방언을 말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며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네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2:31~13:1) 진실하고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

사랑이 최고의 은사이다.
이 같은 사랑이 없으면 각종 방언을 말할지라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곧 진실하고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났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방언을 말하는 자입니까?

모두가 다 방언 말하되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고전14:5) 특별히 통역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3) 어째서입니까? 통역 없는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전혀 무익할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내 자신조차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로 기도할 때가 있는데, 만일 통역하지 못한다면 (내 자신도 깨닫지 못하면서)

어찌 실생활에서 열매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고전14:14,15)

방언 기도의 그릇된 예는
타인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내 자신조차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로 기도하는 것이다.
→ 방언의 은사를 더 잘 활용하기를 원한다면, (방언) 통역의 은사까지도 구해야 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방언의 은사를 더 잘 활용하기를 원한다면, (방언) 통역의 은사까지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14:13)

그렇지 못하면 교회 앞에서 잠잠해야 하구요.

 

* 방언기도, 금하지도 남용하지도 말자!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

 

기도의 깊은 데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

“...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 오히려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며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5절 상)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14:2)

방언은
자칫 방언하는 자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고, (방언하지) 못하는 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함으로써
교회의 분쟁을 조장하거나 예배의 혼란을 야기 시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의 남발로 믿지 않는 자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남용(濫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방언은 자칫 방언하는 자들로 하여금 교만(驕慢)하게 하고, (방언하지) 못하는 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함으로써 교회의 분쟁을 조장하거나 예배의 혼란을 야기(惹起)시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의 남발로 믿지 않는 자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또는 은사를 받지 못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23절)

방언은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금하거나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으로써,
잘 쓰면 여러모로 유익하나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방언 역시 금하거나 남용하지 말아야 될 것을 깨닫고 있습니까?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으로써(고전12:7), 잘 쓰면 여러모로 유익하나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독(毒)이 될 수 있음도 알고

있는냐 말입니다.

 

 

(2) 도고기도: 타인을 위한 기도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

 

타인(이웃)을 위한 기도를 흔히 ‘중보기도’(Mediator's prayer)라는 용어로 불러 왔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중보기도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기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

중보기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기도.

 

따라서 중보기도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4)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므로,
‘중보기도’란 용어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보기도’라는 말 대신에 어떤 단어로 바꿔서 쓸 수 있을까요? ‘도고’(intercession)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

여기서 ‘도고’(헬, 엔튜크시스)란 타인을 위한 기도 내지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자유롭고도 친밀한 기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타인을 위한 기도를 일컬을 때
‘중보기도’라는 말 대신에 ‘도고’(또는 도고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자!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이웃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중보기도’라는 말이 성경적 또는 신학적으로 오해를 줄

소지가 있으므로, 가급적 이 말 대신에 ‘도고기도’라는 용어로 바꿔서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아브라함의 도고!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18:32)

 

 창18:22~33은 성경 전반에 걸쳐 가장 간절하고 사랑이 넘치는 도고기도입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 기도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즉 처음에는 의인 50명을, 다음에는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마침내는 10명까지 제의했고, 하나님도 이에 동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여호와의 은혜에만 매달리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하여 호소한 후에 그 자비와 긍휼에 의지하여 다시 간청했다.

 

구체적으로 더 살펴보자면, 아브라함은 무조건 여호와의 은혜에만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먼저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하여 호소한 다음에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3~25)

그 자비와 긍휼하심에 더욱 의지하여 다시 간청하였던 것입니다(창18:26~32).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춘 채 겸손함으로 나아갔다.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정확히 파악한 진솔한 신앙고백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춘 채 겸손함으로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정확히 파악한 진솔한 신앙고백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18:27) 

아브라함은 친척 롯만을 위한 편협한 기도가 아닌
오히려 성중의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이고 이타적인 기도를 드렸다.

 

끝으로, 친척 롯만을 위한 편협한 기도가 아닌, 오히려 성중의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이고 이타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창18:24,28)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되, 무조건 여호와의 은혜에만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먼저 그분의 공의에 호소한 다음에, 또다시 그 자비와 긍휼에 간청하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춘 채 겸손함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내 가족 내 친지만을 위해 편협하게 구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이고 이타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처럼)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되, 무조건 여호와의 은혜에만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먼저 그분의 공의에 의지하여 호소한 다음에, 또 다시 그 자비와 긍휼하심에 의지하여 간청하고 있습니까?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춘 채 겸손함으로 나아가되, 내 가족 내 친지만을 위해 편협하게 구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이고 이타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 도고의 효력과 한계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5,16)

 

성경은 계속해서 도고의 효력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역시 의인의 간구가 가져올 구체적인 변화와 능력을 증언하고 있구요(‘역사하는’은 헬라어 ‘에네르게오’로써, 의인의 청원이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올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16절 하)

효력 있는 도고기도의 조건:
믿음의 기도를 드리되,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가운데서 드리는 기도이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순복하는 기도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의인의 간구는 무엇입니까?

(선행 절에 소개된) 믿음의 기도로써, 이는 곧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로서 드리는 기도이자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순복하는 기도를 가리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15절)

도고기도의 한계:
누군가를 위해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직접 구하지 않는다면, 그 효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한편, 성경은 이와 동시에 도고기도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누군가를 위해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와 구하지 않는다면, 그 효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마치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위해 슬퍼하고 기도했으나, 끝내 사울이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듯 말입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삼상15:35)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삼상16:1)

지금 우리는 어떤가?
도고기도의 효력에 대해 깨닫고 있는 것은 물론 그 한계 역시 깨닫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경이 증언하고 있는 도고 기도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한 도고 기도의 효력 역시 깨닫고 있습니까? 곧 병든 자를 일으키며 낙심한 자를 북돋게 하는 바로 그런 능력 말입니다. 또한 어떻습니까? 도고기도의 한계 역시 깨닫고 있습니까? 즉 누군가를 위해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와 구하지 않는 이상, 그 효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