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하트

​​

우리 중 상담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신과 그 환경을 살펴보며 그들의 길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하여 유용한 기본 원리들을 교육받아 왔다. 그러나 기술들을 배우기 전에도 우리 중 다수는 기독교적인 삶의 통찰력의 기초를 익혔으며. 또 심지어는 상당한 정도의 신학교육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여전히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치료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 이 두 가지 측면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과 상담할 때 이 양면이 모두 충분히 효과를 보게 하는 일이다.

 

흔히 우리가 받는 훈련은 최소한의 도움밖에 되지 않는다.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보통 상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한 상담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은 신학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으며 역시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목회 현장에서 그 둘을 연결시켜야 할 때가 되면 우리 스스로의 방법대로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개인 및 결혼. 그리고 가족을 상대로 한 임상치료사로 일하고 있으며. 다른 치료사를 감독할 뿐 아니라 대학원 수준의 신학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자주 신학적인 면과 임상치료적인 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이 글에서 내가 의도하는 바는 바로 우리에게 자신의 문제를 들고 오는 사람들의 상황 속에서 그 영적 차원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과 내가 치료에 있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음 9 가지 지침의 형태로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님

 

첫째로 하나님은 모든 경험 중에서 가장 깊은 차원이 되신다. 이 원칙은 하나님의 실재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원칙의 취지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를 말하려는 데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고. 세상의 행로를 인도하며. 결국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모든 실체의 근원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이 초월적 신비가 다양하게 상징화되어 있는데. 남성, 여성, 중성의 비유 등 인간 경험에서 비롯된 암시적인 비유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

 

성경의 어떤 책이나 본문에 초월의 상징적 제시가 어떻게 나타나든지 간에. 성경 전체를 통해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 토대한 하나의 확신이 흐르고 있다. 즉 이 모든 사물의 신비한 근원은 인격적이며 우리에게 자비로우시며 우리 각사람과 대화를 나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첫번째 원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실체가 현재하며 편안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그 실체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털어놓기 시작할 때. 이 원칙은 우리나 그들이 알건 모르건 간에 하나님께서 이미 현재하시며 그들의 삶 속에서 활동중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외계에 계셔서 우리가 불러들여야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비활동적이거나 행동하시도록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으신 분은 아니시다. 즉 그분의 임재는 기도나 종교의식. 성경읽기 같이 하나님을 접하는 특별한 종교적 활동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미 여기에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경험의 밑바닥에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과 의혹과 노력과 갈망의 가장 깊은 차원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도전들과 선물들 모두의 가장 깊은 영역이시다. 하나님을 찾아야 할 장소는 위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고 바로 우리 안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바로 그 배경이시며. 우리가 가는 곳마다에서 만나게 되는 분이시다.

 

개인의 삶

 

둘째로 하나님은 개인의 삶의 활동이 있는 곳에서 가장 현재적이시며 활동적이시다. 사람들이 보통 우리에게 가지고 오는 것은 위기상황들이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 어떤 일이 발생했다. 10 대의 자녀를 다루기가 너무 힘들다. 어떤 사람이 마약중독에 빠졌다. 우울과 고독이 삶을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한다 등.

 

이 원칙이 주장하는 바는 이같은 여러 위기상황들 속에서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삶 속에 가장 현재적이며 활동적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들이 제기된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의 소명은 무엇인가. 이러한 상황이 제시하는 도전과 기회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여기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여기 서있게 하셨는데. 그러면 무슨 치유와 성장이 있는가.

 

나는 내담자가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안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는 또한 내담자에게도 그 질문들을 던진다. 왜냐하면 나는 내담자들이 그들 관심사의 이 깊은 차원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발생한 문제에 대해 함께 토의함에 따라 아마 우리는 각각 이러한 질문들의 대답이 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대답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더 명확해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단 우리는 두사람 다 문제를 깊은 차원에서 생각하게 된다.

 

신앙적인 사람들에게도 이 원칙을 상기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출석. 성경읽기. 개인기도 등을 하나님과 만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들. 특히 위기상황들 또한 하나님과 만나는 지점이라는 것을 간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들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며 우리 자신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까를 결정하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생성(shaping)해가고 있는 것이다. 위기상황들 속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의 결과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의 궁극적 목적과 직결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것에 관심을 갖고 계시며. 때문에 현재하시며 활동적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그분이 의도하고 있는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중 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생명

 

세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며 우리의 친구이시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것을 향유하게 하려는 것이다. 치유와 해방. 성장이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발견하며 그들이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성취와 행복에 이르고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활동도 그 목적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압제와 제한. 고통을 일으키는 모든 것과 싸우시며 우리에게 해방과 치유. 화해. 조화와 기쁨을 주려고 애쓰신다.

 

크리스챤들조차도 늘상 이것을 믿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력을 기울이신 것이 특정한 생명계획. 즉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하려는 것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세상에서 이룰 하나님의 뜻과 일로 보셨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사역의 초점이 맞춰졌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명을 가지며 그것을 최대한 소유할 수 있도록 치료하시고. 용서하시며. 가르치셨다. 그분이 대항해 싸웠던 것은 자신을 죽음에 처하게 한 압제적이고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체제들이었다. 그런데 그 체제들이 그분을 죽음에 처하게 한 것은 그분이 하시는 일로 인해 자기들이 손실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사셨던 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활동이 가장 명백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비극적 죽음에서 우리는 인간의 죄악이 낳은 그 비극까지도 하나님께서 참으실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악이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겐 자유가 주어져있기 때문에 종종 타락하여 멸망을 낳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우리 앞에 앉거나 서거나 누울 때. 이 원칙은 그것이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기 원하고 계신 생명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과 함께 말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다. 즉 그들을 괴롭히는 악의 편에 서시지 않으시고. 그 악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며 그들의 치료와 성장을 촉진시키는 편에서 일하심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선을 이루도록 그들을 돕기 위해 거기 계신다. 상담자나 영적 지도자 또는 임상의사로서 우리도 이와 똑같은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수고한다. 그것은 우리의 협력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다.

 

비극과 고통의 처리

 

네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비극이나 고통에 처하게 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비극과 고통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이 원칙은 앞의 원칙의 논리적 귀결로서 명백히 유추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삶의 다양한 고통을 다룸에 있어 이 원칙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성적 학대를 당하게 하거나 그것을 의도하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암이나 AIDS에 걸리게 한 것도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이혼을 하게 하거나 고독에 빠지게 하거나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기로 작정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처럼 우리에게 깊이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상황들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의 고통을 슬퍼하고 계신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셔서 우리가 당하는 악으로부터 모든 가능한 선을 낳게 하고 계신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실체의 근원에 자리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은 자신과는 순전히 구별되는 세상을 만드시는 것이었고. 그래서 세상을 자유롭게 창조하셨다. 이 자유는 존재의 사닥다리의 맨 아래 있는 가장 단순한 행위자에게도 미칠 정도로 주어졌으며. 특히 인간에게 광범위하게 주어졌다.

 

이러한 자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발생하게 하거나 발생을 막는 등 통제하실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 그래서 특히 인간은 그들이 하는 결정에 의해 멸망과 고통을 초래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엄격히 금하실 수 없으며 단지 창조된 대리자들을 통해 부추기고. 권유하며. 때로는 대항하게 하실 수 있을 뿐이다.

이 원칙의 중요성은 우리에게 악한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는 문제의 정의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항하시기보다는 우리 편에 서계신다.

바로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비극이 발생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슬픔과 갈등 속에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것들로부터 실현될 수 있는 모든 선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 것이다.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

 

다섯째로 고통에 대응하는 크리스챤의 바른 자세는 그것에 대항하고 극복하려는 태도이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희망을 갖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원칙은 신구약 성경 모두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억누르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끝없이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애쓰셨다. 그분은 심지어 그분 자신의 구속과 처형에도 일단은 저항하시고. 그 후에야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기의 사건을 하나님께 위탁하셨다.

 

고난은 선이 아니고 악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응은 그것을 제거하려고 애쓰는 본능적인 대응과 꼭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 원칙의 두번째 부분은 우리가 최선을 다한 그 상황 속에 여전히 고통이 남아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희망은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 중에 함께 하셔서 그것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 최선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에게 있어서의 위험은 이 원칙의 두번째 부분을 첫번째에 놓고 그 고통에서 선이 나올 수 있으므로 고통이 정말 선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시로 높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나쁜 것이 선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결코 상처입은 사람에게 “이것은 너에게 선이다” “이것은 네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고통을 보는 즉시 그것을 제하시고 곧바로 그것을 경감시키셨다

 

우리가 상담자와 임상의사.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서 인간의 고통을 다룸에 있어 우울은 분명히 악이며 가능한 한 극복되어야만 한다. 고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갈라놓는 관계들은 악이며. 바로잡아지거나 끝나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영적 기회와 초청의 많은 부분은 그것들의 수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데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을 때에만 개인성장을 위한 기회가 그 수용에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소원

 

여섯째로 우리가 가장 깊이 원하는 것을 결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발견한다. 이것은 여기 제시된 원칙들 중에서 가장 대담한 원칙이며. 즉각적인 의혹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른다.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처음 보기엔 전적으로 연관이 없으며 심지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원칙은 어떤 원함이든 다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장 깊이 원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고 있는 원함은 이성적이고 성숙하며. 감정과 사고 모두를 통한 산물이며.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갈망을 말한다.

 

따라서 갑작스런 충동이나 일시적인 변덕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에 대한 언어적 표현은 “ 하고 싶다” “때로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가 아니라 “나는 참으로 원한다”이다.

 

이 원칙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즉 “사람의 삶은 기본적으로 선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 삶의 기본적인 방향이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실수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그것을 후회한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발견하며 행하려고 하는 것은 참되고 선한 것이다.

 

이 원칙은 우리가 가장 깊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함에 있어 이러한 기본 방향과 전제를 가정하고. 우리가 가장 깊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사이에 수렴되는 점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신을 위해 원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융 (Carl Jung)은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는데. 그는 우리의 참된 자아를 깨닫고 발견하도록 우리 자신에게 면밀히 귀를 기울여야 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참된 자아 안에서 우리 개개인의 운명을 발견할 수 있으며. 만약 의미와 행복을 찾기 원한다면 그 운명대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모든 정보의 근원들. 특히 우리 자신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융은 우리의 원칙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의 생각은 그에 매우 근접해 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발견하려고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곳은 바로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인 것이다.

 

신앙적인 사람들은 종종 이에 대해 실수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그들 자신 밖에서 발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주님의 뜻을 내게 보여주소서”라고 기도하고는 주위에서 표적을 구하며.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중심을 향하도록 그들의 시선을 되돌려놓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며. 그들 자신의 가장 깊은 갈망을 지닌 내면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힘든 결혼생활을 계속해야 할 지 아니면 그만두어야 할 지 결정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가정하자.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 모든 측면들을 면밀히 살펴본 후에 가장 깊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물어본다. 어떤 때는 현재의 그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을 지속하기를 원할 것이다. 또 어떤 때는 그 모든 문제들 때문에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이번엔 어떤 사람이 그가 목회자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아닌가 알려고 애쓰고 있다고 가정하자. 만약 목회자가 될 소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그것을 발견할 것이며 목회자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향하게 하는 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원칙들과 가치. 그리고 이상만을 제시할 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이것들을 알고 있고 신봉하고 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이 직업을 택할 것인가.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이 재산을 팔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의 경우 나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깊이 기도하며 생각해보고 난 후 그들의 마음이 기우는 데 따르라고 권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결정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에 따라 살아갈 일반적인 지침을 주셨으며. 특별한 결정들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가 성의껏 하는 결정을 받아들이신다고 믿는다. 그러한 결정들을 하는 데 있어 최선의 지침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자신의 깊은 원함이다.

 

죽음과 부활

 

일곱째로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경험을 해석하는 열쇠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크리스챤들에게 위대한 계시의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의 어떤 면을 설명해주는 패러독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최후의 단어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죽음 가운데서 일하셔서 거기에서 생명을 일으키신다. 죽음은 통로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단지 역사상의 한 개인에게만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거듭거듭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보기가 된다. 언제나 많은 방법으로 우리는 죽으며 항상 새생명에로 일으킴을 받고 있으며 최소한 그렇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를 원함을 보았다. 그에 덧붙여 이 원칙이 말하는 것은 종종 생명은 죽음을 통해 온다는 것이다.

 

우리를 찾아오는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도 있다. 그들 역시 깊은 의미로는 죽은 것이다. 죽음―부활은 그들에게 희망의 본보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죽음으로부터 새생명을 주실 것이다.

 

어떤 부부는 결혼생활의 위기상황에서 찾아온다. 그들 각자는 그 곳에서 어떤 새로운 것이 태어날 정도로 죽어야 할 지도 모른다. 이같은 죽음을 맛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터이지만. 그들은 그로부터 생명이 비롯됨을 확신할 수 있다.

 

임상의사인 우리는 내담자의 필요에 따라 그 신비의 양면을 모두 강조해야 할지 모른다. 때로는 부활을 강조하여 이미 어떤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죽음으로부터 부활이 있을 것임을 확신시켜야 한다. 또 어떤 때는 죽음을 강조하여 어떤 것을 놓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구하는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종종 어떤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야 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죽음―부활은 인간 소망의 위대한 본보기이며 당황스런 경험을 해석하는 열쇠이다. 그것은 겨울과 봄. 밤과 낮. 폭풍과 평온. 유충과 나비 등 여러 자연 현상들에 구체화되어 있기도 하다.

 

심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은 종종 자기의 생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재생이나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때에 바로 이 영적 차원이 큰 힘이 될 수 있다. 죽음-부활은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 미래의 하나님이시며 죽음 심지어는 아주 최종적인 죽음같은 상황에서도 새생명을 가져다주심을 이야기해준다.

 

나는 때로 죽음과 새생명 사이의 암울한 시간을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성 토요일 (Holy Saturday) 의 비유를 사용한다. 성토요일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금요일과 새생명으로 부활하신 주일 사이의 혼란스런 날이다. 이러한 연례적인 종교적 축일 가운데 성토요일은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으며 무엇을 느끼고 해야 할지 당황스런 잿빛의 애매 모호하고 공허한 날이다.

 

비극적 죽음의 그 격렬한 고통은 누그러졌지만 그 상실의 자리에 전혀 새생명이 주어지지 않은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도 때로 성 토요일이 잠시 동안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생명을 낳는 변화의 기간이다.

 

인간 성장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죽음에 우리를 빠지게 한다. 그 죽음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막다른 골목이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하는 관계에 우리를 처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참 모습을 누군가에게 알게 하는 심각한 위험일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애착을 갖던 대상이 사라지고 그것 없이 위태로운 첫발을 내디뎌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만들려는 교묘한 노력들을 포기하고 그들에게 자발적인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실로 집을 떠나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이기주의로부터 전적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기본적인 관심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결정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우리에게 맛보게 한다. 죽음―부활 본보기는 그 경험의 영적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지 (support)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사랑

 

여덟째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사랑. 즉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기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 삶의 수단이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 행복을 이루고 성취감을 맛본다.

 

다른 사람을 잘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것을 믿으며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젖는 것 만큼 어렵다고 하겠다. 더구나 우리들 중 다수는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게 느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평생 지속될 끝없는 성장 계획이다. 그 계획은 우리의 인간화에 있어 핵심적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핵심적인 영적 문제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치료상의 문제는 결국 사랑 쪽으로 기울어진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은 아주 낮은 자존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삶이 무의미하고 공허하다고 느낀다.

 

종종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삶은 공허하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만족은 상당 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매우 관대한 사람들도 있다. 흔히 여자들이 그러한데. 그들은 항상 자신을 맨 마지막에 두며.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데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아무도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필요로 하고 삶에서 얻기 원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격려를 받을 필요가 있다. 임상 치료의 궁극적 과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완전하고도 균형있는 기준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거기에 그들의 성취와 행복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 과업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통상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잘 사랑하는 법을 알아내려고 머리를 짜내야만 한다. 결혼생활의 갈등의 대부분은 단지 이 한명의 신비스런 사람을 잘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 달려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그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줌으로써 언제나 가장 잘 표현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에게 참으로 최선의 것이 무엇인가를 고려할 때. 안된다고 말함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음을 알게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작별을 고해야 할 때도 있다.

 

이는 특별히 그 결정에 우리 자신에 대한 적절한 사랑까지도 포함시키려 노력할 때 더욱 그러하다. 사랑은 임상치료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이며.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문제이다.

 

치료자

 

아홉째로 치료자는 내담자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의 현현이다.

 

앞의 원칙들은 내담자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이번 원칙은 그 안에 치료자를 포함시켜 그 치료자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현 또는 구체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치료자는 그대로 놔두면 추상적이고 모호한 어떤 것을 구체화하여 현실적이고 명료하게 만든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만 종종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구체화시킴으로 현실화해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측면들이 있다.

 

첫째. 우리가 상담하는 어떤 사람에게든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긍정적인 자세로 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을 살펴보고.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편한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아마도 그곳은 그들의 모든 것이 받아들여졌다고 그들이 처음으로 느끼는 장소가 될 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들에 대해 수용적이고 사려깊은 사람이 됨으로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의 현현과 표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분의 상징이며 나타나보이는 표현인 것이다.

 

둘째. 치료의 환경은 단순히 사람들을 위한 장소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길을 찾는 장소이다. 그들이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고려하고 선택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도전 모두를 구체화시켜 나타내보여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선함과 은사를 확증시켜줄 때와 그들이 바른 선택을 하고 있음을 확신시켜줄 때 위로를 베풀어야 한다. 우리의 격려는 권능이 있다. 그것은 해방. 치료. 그리고 성장의 방향으로 자아를 빚어 가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또한 어떤 도전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것 역시 사랑에 또한 하나님께 뿌리박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정말 내담자에게 유익한 것을 원해야 하며. 행동의 예상 경로와 예상 결과를 지적하여 때로는 그들이 하기 꺼리는 것들도 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전하는 균형이룬 활동들에서 우리는 그들을 위한 하나님 그분의 사랑을 최대한 구체화하고 표현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모든 실체의 가장 깊은 차원이신―은 또한 상담과 임상치료. 영적 지도에 있어 우리의 임재와 활동의 가장 깊은 차원이며 근원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상징 또는 화신(化身)을 의미한다.

 

위의 내용들은 영적 차원이 우리의 삶.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돕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현실적이 될 수 있는가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이 고찰이 목회자들인 우리가 치료와 신학 사이의 영역을 더욱 능란하게 오갈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우리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영역 모두의 특성을 우리에게서 원하며 필요로 한다. 다행히도 훌륭한 치료와 훌륭한 신학은 인간의 치유. 해방. 성장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지니고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기독교 이야기 > 영성.치유.회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가지 성격 유형  (0) 2021.08.19
화병의 증상 및 자가진단  (0) 2021.02.11
열등감을 극복하는 5가지 실천법  (0) 2020.02.06
12가지 기질   (0) 2020.01.26
성령과 기질  (0) 2019.11.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