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울의 저작들

 

신약에는 27권의 책들이 있다. 바울에 의하여 기록된 13권의 책은 신약의 1/4가량을 차지한다. 이 서신들은 야고보서를 제외한다면 최초로 기록된 신약의 저자들이다. 어떤 이들은 갈라디아서 저작 시기를 주후 48년으로 잡는다. 예수님의 말씀, 또는 행적들에 대한 바울의 기록은 우리가 소유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예를 들어 (고전 11:3-)가 그러하다.

 

바울이 동부 지중해를 횡단하며 자신이 설립하였던 많은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친히 방문하여 해결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울은 필요한 경우 직접 가서 활동하는 대신 편지들을 써 보냈다. 이들 편지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확고 부동한 희망, 인간을 향한 그의 강렬한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자신의 영적 자녀들을 섬기는 데 자신의 전 생명을 기꺼이 바치려는 변함없는 태도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초기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바울 서신들을 수집하여 보존하도록 인도하심과, 또 그 서신들이 오늘날에도 존속하게 된데 대하여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한다. 이 편지들의 내용은 계속해서 명상하게 하고 우리들의 삶 속에 능력과 빛을 가져다준다. 그것들은 기록된 순서대로 신약 성경에 배열되어 있지 않다. 교회들에 보낸 편지들(로마서에서 데살로니가서)이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들(디모데전서에서 빌레몬서)보다 앞서 나온다. 양쪽 편지들은 각각 그 길이에 따라 배열되었다.

 

 

2. 로마서-저술 동기와 목적

 

바울은 그가 자신의 미래 선교 사역에 관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렸던 시기에 로마서를 집필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생각은 지중해 주변의 교회들로 하여금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케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소망은 실제로 이루어졌으며, 바울과 각 교회의 대표들이 함께 그들이 모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기 위해 출발하였다(행 20:4). 그리고 헌금을 전달한 바울은 지중해 서편의 지역을 전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곳에서 활동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활동 기지가 필요했으며 바로 이 곳이 로마였던 것이다. 바울의 가슴속에는 항상 로마를 전도할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 여행을 떠나면서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고 말하였다. 마침내 그는 죄수가 되어 로마로 가게 되었다.

 

가장 타당한 것은 바울이 그의 3차 전도 여행 때에 로마서를 집필하려고 하였다는 견해이다. 그는 한번도 로마에 간 적이 없었지만 그는 그 곳에 있는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소식을 들었고 교인들 중에 일부를 알고 있었다(롬 16장). 그는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또한 그들에게 자기의 의도를 알렸다(15:29). 그는 수신자들의 지지를 얻고 그가 계획하고 있는 바, 서쪽 더 먼 지역으로까지의 선교를 통해 그들이 도와주기를 원하였다.

 

 

3. 핵심 되는 요점들

 

두 개의 핵심 되는 문제들이 로마서의 내용을 지배한다.

 

1)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는가 ?

2) 인간이 어떻게 그의 백성으로서의 책임 있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이 바울 사상의 중심을 차지한다. 이것은 그가 그와 같은 문화적 배경에서 양육 받아 왔기 때문이다. 옛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가운데서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 ?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참 이스라엘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율법에 대한 순종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 근거는 율법의 계율을 지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것은 일종의 공로 사상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이방인들은 누구나 다 모세의 율법을 따라야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유대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입장을 반대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민족적 편애도 하지 않으시며,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될 것이라고 하였다(롬 1:16). 할례를 포함한 어떤 외적인 행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데 아무 가치도 없다. 순종은 의식적 율법의 요구 사항들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오직 마음의 문제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정죄된 존재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나 그 법이 말하는 것을 행하지는 않는다. 이방인들은 자연법인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행하지 않는다. 이러한 법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해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변명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떠나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을 그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신다. 그는 은혜에 의하여 그렇게 하신다. 그의 은혜는 풍성하시며 영원하다. 그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셨다.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참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은 계속된다. 하지만 누가 “이스라엘‘에 속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근거로 한다.

 

 

4. 참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는 요건

 

아래의 “편지”는 로마서의 핵심을 이루는 장들에 나타난 바울 신학의 강조 점들을 요약한 것이다. 다음 편지를 읽어보자.

 

1) 서론: 인사 및 방문 목적(1:1-18)

“헬라의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의 아들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할 자신의 대사로 삼으셨습니다. 이 좋은 소식은 최근에 유래한 것이 아니고 오래 전에 계획되고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간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모든 민족들에게 전하여 그들로 예수님을 믿고 순종케 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도 여러분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관하여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나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하여 놓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며 내가 여러분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간구한 것을 아십니다. 나는 그의 말씀에 관한 나의 깨달음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영혼들을 추수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가게되면 나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그 진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모두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냅니다. 신앙을 통하여 이 의를 붙잡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며, 또 생명을 얻게 됩니다.

 

2)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1:19-3:20)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를 떠나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것도 불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만을 일으킵니다. 어떤 이들은 “도대체 이교도가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될 수 있다는 말인가 ?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지 않는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물마다 그의 서명을 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그것을 읽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면 어두움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을 위하여 ”여러 신“을 만들고 그들을 예배하고 섬깁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포기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십니다. 그 결과 그들의 비뚤어진 마음은 그들로 하여금 더러운 행동에 탐닉하게 합니다. 그 더러운 행위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그들이 이러한 행위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알면서도 즐거이 이러한 행위들을 행하며 또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1장).

 

어떤 이들은 ”나는 그러한 더러운 것들을 행하지 않는다“고 항의할 것입니다. 잠깐만 생각해 보십시오 ! 정말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그러한 행위들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눈감아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를 회개케 하시기 위한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공의로 갚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라고 해서 봐주시지 않으시며,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을 공평하게 심판해 주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율법을 가졌노라”고 자랑할 것입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소유하는 것과 율법을 듣고 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은 소유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도덕법들과 양심을 가지고 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죄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법들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유대인이라거나, 선민이라거나, 율법을 소유하거나 또는 무지한 이방인들을 가르칠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랑하십니까 ? 그렇다면 내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지키십니까 ? 여러분은 도적질하는 것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의 것을 훔친 적이 없습니까 ? 여러분은 음행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성적으로 순결합니까 ? 여러분은 이교의 우상 숭배는 정죄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성전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습니까 ? 여러분이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행위를 보고 유대인의 하나님도 별 볼일도 없다고 주장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자신이 언약 백성이라느니, 할례를 받았느니 하면서 자랑합니다. 도대체 여러분의 할례가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 할례 받지 않은 이교도들도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유대인들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순종이지 어떤 신체상의 표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2장).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유대인이 되고 그렇게 풍성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일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이냐 ?” 고 묻고 싶어할 것입니다. 유대인이 되는 유익은 많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리를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불 신실하다고 해도 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죄를 지을 때에 진노를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하나님께서 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일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당연한 처사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더 많이 드리기 위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은혜가 충성하신 분이기는 하지만, 또한 동시에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방인들과 동일한 입장으로 서게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두 동등하게 죄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구절들이 죄가 얼마나 철저하게 우리의 전 존재 즉, 우리의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눈을 감염시켰는가를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옳은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비추어 줍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우리의 입을 봉하라고 말해줍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앞에서는 모두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행”이 있지 않겠냐는 가정을 내세워 인간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의 율법을 연구할수록 그가 보시기에 자신이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3) “믿음으로 의롭게 됨”(3:21-)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게 되기 위하여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에게 드릴 우리의 자신의 의는 아무 것도 없지만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의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이에 관하여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의”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주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다른 어떤 사람보다 나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우리 모두가 범죄 하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분 앞에서의 새로운 지위를 주셨습니다. “주셨다”는 말에 유의하십시오 ! 그것은 모두 은혜입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 비록 하나님께서는 죄에 관하여 분명히 진노하시지만 그는 죄 값을 치러야 할 우리 인간을 위해 대속물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마땅히 겪어야 할 것 즉, 죽음과 심판, 그리고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심판자 앞에 서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버지 나를 인하여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나는 죄된 세계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겪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보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의를 보아주십시오.” 놀라운 사실은 심판자 자신도 이렇게 하기를 원하셔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되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들에게 “너희가 이 선물을 받기를 원하느냐 ? 아니면 거절할 것이냐 ? 고 묻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우리를 기뻐 받으셔서 용납해 주시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우리가 한아름의 선행을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앞에서 빈손으로 잠잠히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선물을 준비하시고 그것을 우리들이 제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전하려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우리들을 위해 이런 선물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분명 우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원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모든 인간의 자랑은 배제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의 선물은 우리를 그 앞에서 올바르게 해줍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동일한 원리가 적용이 됩니다(3장).

 

4)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4장)

그러면 어떤 이들은 “그래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는 말인가 ?”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떠했는가 ? 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만한 행동을 하였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도 시편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은 그분에 의해 용서받는 일에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때는 할례를 받고 나서였습니까 ?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할례를 받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며, 후에 할례를 받음으로 할례를 받는 유대인들의 조상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할례 자를 물론하고 모두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될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실 때에 행위를 근거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구원이 행위를 근거로 했다면 그것은 “선물이나 은혜”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전혀 믿을 수 없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신뢰하였습니다. 사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의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는 우리 대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 마땅할 형벌이 그에게 부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큰 소리로 “yes"라고 선언하시는 뜻으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의 신뢰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4장).

 

5) 의롭게 된 결과/ 아담과 그리스도(5장)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창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기뻐하고 또 용납하시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하느라고 삶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무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선언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장미 빛 화원으로 변모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는 길에 무엇이 닥치든지 우리는 내적인 기쁨과 희망으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십니다. 우리가 부딪히는 모든 어려움들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만드시는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놀라운 일들을 선한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시지 않고, 그의 원수들인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셨다는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그의 것으로 만드셨다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어떠한 미래의 진노나 심판으로부터도 구원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는 물론 영원히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기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행하지 말라고 한 것을 아담이 행하였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죄는 그의 모든 후손을 감염시켰습니다. 그의 후손이 바로 인류입니다. 사실 시내 산 사건 이전에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고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는 정해진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행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정한 율법이 없을 때에는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는 의식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 인간의 삶에 스며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아담, 그의 죄와 죄책, 그리고 그의 죽음과 연대성 가운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아담의 종족”에 속해 있고, 우리 선조의 실상과 그가 자신에게 초래한 것을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둘째 아담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류를 위하여 지금까지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의 성취를 통하여 인간이 순종, 의, 사죄의 선언, 평화, 은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 믿음을 통하여 받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인간에게 비극만을 가져왔으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축복만을 가져왔습니다(5장).

 

6) 성화의 원리와 실천(6장)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하나님께 용서해 드릴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드리기 위하여 가능하면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이 좋지 않은가 ?”고 말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인간이 죄의 권세, 권위, 지배에 대하여 죽었다면 어떻게 계속해서 죄를 섬기기를 원할 수 있겠습니까 ? 내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세례가 이전의 여러분의 “삶의 주관자”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죄의 권세 안에 있는 것들을 계속 소유하려 하는 것입니까 ?

 

여러분의 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진 사실이 무엇인지 기억하십시오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 없으신 삶을 마치 여러분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여러분아 소유하도록 주셨습니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에 여러분들도 그 십자가 위에서 그의 죽음에 동참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와 함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죄에 대한 형벌의 무덤에서 살아나셨을 때에 여러분도 그와 더불어 부활하였습니다. 사실상 그와 함께 부활함으로 여러분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왜 옛 주인인 죄의 권세를 섬기고 있습니까 ?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주실 정도만큼은 선하게 되어야 한다는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이미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을 의롭다 하시고 또한 용납하여 주신데 대하여 그분에게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삶을 헌신해도 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 그가 여러분을 거룩하다고 하고 성도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그분 자신이 여러분에게 “거룩하다”고 선언하심과 같이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옛 주인은 죽음이라는 무서운 죄의 삯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새 주인은 아무 것도 요구치 않으시며 모든 것을 거저 주십니다(6장).

 

7) 성화와 율법(7장)

놀라운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율법은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 어떤 권세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으며,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가 주신 율법도 선한 것이다. 바울 그대는 율법이 악한 것이라고 보는가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이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악한 것입니다. 그들은 죄인들이고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자기 이외에는 탓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법은 단순히 죄인 된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는 것처럼 자신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람에게 있고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선한 하나님의 율법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마음에는 “법칙은 깨지기 마련이야 !”라고 말하려고 하는 사탄 적인 경향도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율법이 “그 일을 하지 말아라”고 말할 때에 사람들은 다만 그것이 금지되었다는 것 때문에 잘못을 범합니다. 역설적인 사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한 율법과 접촉할 때에 그들은 악한 일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역설적인 존재들입니까 ?

 

나 개인적으로도 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나는 율법을 들여다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번번히 그것을 행하지 못합니다. 내 안에 죄에 대한 깊은 의식이 있습니다(악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나는 옳은 것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럴 때마다 내가 죄를 짓는 것을 발견합니다. 나는 율법이 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내가 원하지 않는 반대의 일만을 행할 뿐입니다. 끔찍한 사실입니다.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이 도대체 있는 것입니까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바로 그 길을 제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7장).

 

8) 성화와 성령/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8장)

하나님의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게 해주실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게 할 힘을 공급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선행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서 역사 하셨습니다. 그는 죄 없이 우리와 같은 형태로 오셔서 죄가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결과들을 스스로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을 겪으셨고, 죄가 가져다주는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정복하셨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을 함께 나누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까지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비록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여전히 자아를 위하여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서 상황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우리 사이에 화평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그이 성령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십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새로운 지배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맡겨 두셨다면 우리는 율법에 비추어 볼 때에 우리 안에 밝히 드러나 있는 혼란, 갈등, 뒤얽혀 있는 죄 성들을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패역한 죄인들로 그와의 전쟁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새로워지고 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라면 또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진정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아버지께 속한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의 양자인 우리들 역시 장차 그것을 함께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 이 세상에는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고통은 영광에 이르는 도상에서의 순간적인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피조물들까지도 인간이 범죄 함으로 휩싸이게 된 부패와 오염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든지 간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끝날 때에 함께 풍성한 영적인 추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희망이 이 세상에서의 어떠한 고난도 극복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격려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는 우리의 탄식을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결국 그의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영광으로 이끄십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는 우리 안에 그의 아들의 형상을 재창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점진적으로 나누어 가짐으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 그는 이미 우리를 위한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 그는 언제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렇다면 우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 아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떠한 것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괴로움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중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승리자이며 정복자들인 것입니다.

 

그런즉 누가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 죽음도 그렇게 못합니다. 생명도 그렇게 못합니다. 어떠한 초자연적인 존재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의 것입니다(8장).

 

 

5.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한 백성을 소유하고 계신다(9-11장)

 

1-8장에서의 바울의 강론은 9-11장까지의 내용을 위한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 9-11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고한 불 신앙과 당시의 예수 배척을 다룬다. 이스라엘의 행위는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메시야 도래를 위해 특별히 이스라엘을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바울로 하여금 격한 슬픔에 잠기게 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만 된다면 자기가 구원을 받지 못해도 좋다고 생각한다(9:1-5).

 

이스라엘의 잘못은 구원이 상속 및 민족적 특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 사라(하갈과 이스마엘을 통하여)와 (야곱과 에서를 낳은)리브가는 하나님의 계획에 개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그가 선택하신 개인들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들어서 축복된 일에 사용하시고, 바로를 일으켜서 진노의 대상으로 사용하신다(9:6-18).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축복의 일에 또는 진노의 일에 임의로 사용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항의할 수 없다. 우주의 창조자요 주님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보다 큰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사람들을 임의로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다(9:19-24).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한 백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계신다. 한때는 “멀리” 있었던 자들이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응답하였다. 그러나 “가까이 있었던 자들”(옛 이스라엘)은 그를 거절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은 구원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이스라엘은 구약의 예언자의 예언을 성취시켰다(9:25-33).

 

실상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하여 열성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심은 거짓된 원리. 즉 율법에 대한 순종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도구로서의 율법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으셨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갖는 교제는 도덕적 업적이나 민족적 기원에 관계없이 믿음에 의하여 성립된다(10:14-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구원 계획을 알리셨다. 그러나 그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10:14-21).

 

하지만 모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바울 자신의 경우가 이에 대한 증거가 된다. 소수의 남은 자가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스라엘의 현재의 거절은 이스라엘이 영원한 완고한 상태에 있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역설은 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부의 결과 이방인들이 돌아오게 되었다는 점이다(11:1-12). 만일 이스라엘의 불 신앙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였다면 이스라엘이 신앙으로 돌아올 때에는 더 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11:13-15). 사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한 존재이다. 이러한 사실은 족장들로부터 현재의 남은 자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맺은 “첫 열매”들을 통해서 볼 때에 명백하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이스라엘의 불 신앙을 교훈 삼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원래의 “뿌리”로부터 성장하였다(이방인들은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접목될 때 더 잘 성장할 소지가 많다(11:16-24).

 

복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부는 일시적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계속 눈 먼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이방인들이 신앙에 이르게 된 후에 돌아올 것이다. 역설은 이방인들이 자비를 받을 수 있기 위하여,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자신도 다시 자비를 얻을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식으로 역사 하시는가 ? 그의 뜻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 우리 인간들은 다만 찬양과 경배함으로 그 앞에 고개 숙이고 그분의 처분에 맡겨야만 한다(11:25-36).

 

 

6.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

 

새로운 공동체의 성원들은 자신들의 몸(동물이 아니라)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새로운 예배 장소를 구성한다. 그들은 자기들 주변의 세상 적인 방법의 표준들을 따르려는 모든 유혹들을 피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공개적으로 입증해야 한다(12:1-2). 그 성원들은 단일한 몸의 지체들로 서로 서로 상관 관계를 맺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단 하나의 목적 즉,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만을 가져야 한다(12:3-21).

 

새로운 공동체의 성원들은 “몸”안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몸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와 자신들과의 관계를 나타내야 한다. 예를 들어 정치적 권위를 향한 그들의 입장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들은 세금을 징수하고 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한다. 정부는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존재한다(13:1-7). 그들은 사회 혁명가들이 되어서는 안되고 순순히 복종하는 삶을 살고, 음식 문제나 인간의 기호에 관계된 기타 사항들에 있어서 다른 기독교인들을 향해 이해심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14:1-15:21).

마지막 단원(15:22-16:27)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친구들에게 문안하고 미래의 희망과 계획들을 요약해 기록한다.

 

 

7. 요약 및 결론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이 끝나갈 무렵 고린도에 있으면서 로마서를 집필하였다. 그는 멀리 스페인에까지 이르는 전도 여행 중에 있게 될 로마 교회 방문을 위해 로마 교회를 준비시키기를 원하였다. 바울은 편지의 본론에서 복음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래의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한다.

 

1) 모든 백성은 불의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하여 구원의 의를 가능케 하셨다.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그것을 붙잡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로 제공된다.

3) 이 구원의 의는 세례를 통해 주어진다. 그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 해서 구원을 추구하려는 무익한 행위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의를 선 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본래의

     모습 즉 이미 영생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4)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의로우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다.

5)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성물을 받는 사람들은 공동체 안이든 밖이든 서로가 순종하여 섬기 는 사랑이 삶을 실천해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기독교 이야기 > 성경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언 한눈에 보기  (0) 2020.11.06
구약성경의 12가지 주제  (0) 2020.10.24
성서에 나오는 아홉 민족  (0) 2020.09.10
4복음서 비교 (저자 약력)  (0) 2020.09.10
30분만에 읽는 요약된 성경  (0) 2020.09.0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