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론  비교

 

차례

1.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

2. 반율법주의의 칭의론

3. 신율법주의의 칭의론

4.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

5. 영원으로부터의 칭의



1.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이란 네덜란드 신학자였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이름을 딴 칭의 개념입니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은 후일에 아르미니우스주의로 불렸고 그 사상적 후예들은 항론파(remonstrant)라고도 불렸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전통적 칼빈주의와 대비되는 가르침을 설파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빈주의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해 항변서 형식으로 다섯 가지 논제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바로 부분적 타락, 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가항력적 은총, 구원의 탈락 가능성입니다. 이런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 사상은 그 당시 유럽 전체 개혁교회의 신학 사상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그 반응으로 도르트회의가 소집되어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정죄와 비판을 받게 됩니다.


칭의의 행위적 조건인 믿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서 핵심은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믿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 선택의 능력에서 비롯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이 믿기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그 행위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칭의의 행위적 "조건"이 됩니다. 얼핏 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칭의는 오직 믿음(sola fide)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는 미묘하고도 중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칭의의 4중 원인 개념이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가 믿음의 역할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칭의의 4중 원인


세상의 모든 일에는 다 원인(cause)이 있습니다. 만약 밖에 비가 내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비는 스스로 내릴 수 없습니다.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비가 내린다"는 결과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도 복잡한 신학 개념을 다룰 때 기본적으로 원인을 네 종류로 분석하여 신학 개념을 설명하곤 했습니다. 사실 이런 4중 원인론을 사용하는 것의 원류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였습니다. 그는 현상의 원인을 질료인(質料因), 형상인(形相因), 목적인(目的因), 작용인(作俑因)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신학자들도 각종 신학 개념을 4중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신자의 구원을 설명할 때 유효적 원인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나 즐거움이고, 형상적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도구적 원인은 복음이며, 마지막으로 목적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런 원인을 칭의에 적용시켜 봅니다.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자인 앤서니 버지스는 그의 책 [참된 칭의 교리]에서 칭의를 다음과 같이 4중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칭의의 유효적 원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형상적 혹은 공로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와 그의 능동적/수동적 순종이고, 도구적 원인은 믿음이며, 목적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런 설명은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쳐진 칭의의 4중 원인입니다.


그러나 칭의의 4중 원인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생각은 사뭇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에 대한 것입니다. 개혁신학에서 믿음의 역할은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그 믿음 자체는 어떤 능력이나 힘, 공로가 없습니다. 믿음은 공로적 원인인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유익을 인지하고 믿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의 전적인 공로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칭의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혹은 "덕분에"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에 근거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믿음을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형상적 혹은 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칭의에서 "믿는 행위"는 칭의의 조건이 되며 자연스럽게 칭의의 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그 행위로 인해" 칭의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인간의 역할과 행동이 칭의의 방정식에서 사뭇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깊이 연구한 키스 스탱글린과 토머스 맥콜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다"라고 바르게 언급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믿음을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형상적/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한 것에 대해 그 당시에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역할과 공로는 작아지고 오히려 인간이 믿는 행위의 역할과 공로는 상대적으로 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은 칭의 때 믿음이 하는 바른 도구/수단적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되, 그들 속에 의를 부어 넣으심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심을 통해서이며, 그들 안에 이루어진 혹은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시킴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그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을 통해서인데, 그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에서 칭의 때 믿음이 하는 역할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릅니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믿음은 어떤 공로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 믿음이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지식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나 구원에서 인간의 공로적 역할을 강조하기 때문에 신인협력설(synergism)이란 단어로도 표현됩니다. 신인협력설은 신인협동설이라고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 선택 의지/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협력하여 구원을 이루어 나간다는 이론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신인협력설을 주장하기 위해 중간지식(scientia media)은 매우 유용한 개념입니다. 중간지식은 본래 예수회 신학자였던 페드로 데 폰세카와 루이스 데몰리나에 의해 발전된 개념입니다. 아르미니우스도 중간지식 개념을 차용하여 자신의 구원론을 전개합니다.


그렇다면 중간지식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지식은 크게 "자연적(혹은 필연적) 지식"과 "자유 지식"으로 나뉩니다. 자연적(혹은 필연적) 지식이란 하나님이 스스로의 본성에 의해 자신뿐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필연적으로 다 알고 계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에 반해 자유 지식이란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한 지식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실체화되는 지식입니다. 하지만 예수회 신학자들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지식 외에 또 다른 지식을 추가합니다. 이 지식은 의도적으로 자연적/필연적 지식과 자유 지식 사이에 위치하여 미래의 우연성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개념입니다.


중간지식을 구원론에 적용해서 이해해 보겠습니다. 구원에 대한 전통적 시각에서,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를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자유 지식에 의해 영원 전부터 주권적으로 선택하십니다(엡 1:4, 9, 11; 롬 8:30; 딤후 1:9; 살전 5:9; 벧전 5:10). 하지만 중간지식 개념에서의 구원은 인간의 선택 행위를 포함합니다. 인간이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하는 "조건에 근거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행됩니다. 중간지식 개념에서는 인간이 선택할지 여부가 하나님의 지식 바깥 영역에 있는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입니다. 결국 중간지식을 차용한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에 기초한 "조건적 구원론"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간지식 개념은 구원의 방정식에서 인간이 구원에 대해 자유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인간 중심적 구원 지식론입니다.


개혁신학은 중간지식 개념을 반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자연적/필연적 지식이나 자유 지식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는 포괄적 지식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우연성에 근거한 그 어떤 형태의 중간지식 개념을 위한 자리도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었던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Francis Turretin, 1623-1687년)나 윌리엄 트위스(Willian Twisse, 1578-1646년)는 중간지식 개념이 하나님의 속성인 전지(全知, 모든 것을 다 앎)를 무너뜨리고,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이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인간의 역할 강조, 하나님 주권 약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우를 범했습니다. 믿는 행위를 칭의의 조건으로 여김으로써 인간의 믿는 행위에 칭의의 공로를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믿음을 칭의의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형상적/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한 결과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는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 잡기에 실패한 칭의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서 약화되었던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높이기 위한 신학적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 신학적 바람은 다음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반율법주의의 칭의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반율법주의의 칭의론


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은 기본적으로 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칭의에서 인간의 행위가 어떤 형태로든지 공로적 형식으로 참여하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반드시 배격해야 할 신학 사상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믿는 행위가 칭의의 방정식 안에서 공로적 원인으로 참여한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반율법주의는 안티노미아니즘(antinomianism) 혹은 율법폐기론으로도 불립니다. 여러 신학적 관점에서 이런 용어들을 해석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칭의론의 관점에서 이런 용어들을 해석하면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행동이란 그 어떤 형태의 "믿는 행동", "율법을 행함", "인간의 노력" 등을 포함합니다. 즉,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칭의는 인간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형태의 "무상(free)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반율법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바로 "무상 칭의"(free justification) 입니다. 반율법주의의 칭의론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반율법주의의 원류와 성격 들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반율법주의의 원류


반율법주의는 1630-1640년대의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학자들은 반율법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원류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고민의 결과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의견이 주류를 이룹니다.

첫째, 일부 학자들은 반율법주의의 사상적 원류를 초대 교회의 각종 신비주의나 중세의 미신적 사상들, 혹은 16-17세기의 각종 분파 사상들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둘째, 보즈먼(T.D. Bozeman) 같은 경우에는 반율법주의의 원류를 반청교도주의(anti-Puritanism)라고 봅니다. 즉 청교도주의가 성경에 근거한 매우 높은 수준의 삶과 행함을 요구했기 때문에, 청교도주의를 일종의 율법주의로 인식해서 그것을 경계한 사람들에 의해 반율법주의가 생겨났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셋째, 데이비드 코모(David Como)는 반율법주의를 극단적 칼빈주의(extreme Calvinism)로 이해합니다. 코모에 의하면 반율법주의는 칼빈주의와 많은 부분에서 신학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드높인 나머지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일정 부분 경시합니다. 이런 의견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반율법주의의 원류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극단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반율법주의의 성격


반율법주의는 비록 "~주의"라는 접미사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어떤 특정 형태의 교단이나 종교 그룹이 일치된 교리적 논제를 가지고 잘 짜인 조직과 구성 아래서 펼친 정밀한 신학적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7세기 영국의 반율법주의는 넓은 스팩트럼을 가진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코모는 반율법주의자들을 단순화하여 보는 것 대신에 "전가적"(imputative), "내재적"(inherent) 혹은 "완전주의적"(perfecttionistic)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누어 다양한 스팩트럼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칭의된 자는 이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설명할 때 전가적 반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적/문자적으로 아예 죄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 반면, 내재적 혹은 완전주의적 반율법주의자들은 칭의된 자에게서 실제적/문자적으로 더 이상 죄를 찾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반율법주의 안에도 신학 사상의 정도 차이가 존재했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 이튼의 칭의론


반율법주의자 중 하나였던 존 이튼(John Eaton, 1619년경 사망)의 칭의론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튼의 칭의론에서 우리는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의 핵심 요소를 쉽게 발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튼의 칭의론은 그가 죽은 뒤인 1642년에 출판된 그의 책 [무상 칭의의 달콤함](The Honey-Combe Free Justification)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튼의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을 신학적 원인, 내용, 결과의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튼이 [무상 칭의의 달콤함]을 쓴 이유는 칭의의 방정식에서 모든 형태의 인간의 이성. 감정. 노력, 심지어는 믿음의 역할까지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튼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튼에게 칭의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튼은 칭의가 반드시 "무상 칭의"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튼이 무상 칭의론을 전개한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칭의를 위한 인간의 내적 준비가 필요함), 개혁신학의 가르침(믿음은 도구적 원인),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인간의 믿는 행위를 강조) 전체를 비판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반() 로마 가톨릭, 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을 펼치기 위해 이튼의 결혼식 예복 은유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때 우리는 거룩한 "결혼식 예복"을 입게 되고, 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의 죄는 "완전히" 깨끗하게 됩니다. 완전히 깨끗한 결혼식 예복을 입는 행위는 "하나님의 눈"에서, 완전히 "무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튼에게 믿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결혼식 예복을 입는 것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까요? 그렇습니다. 이튼에게 결혼식 예복을 입는 것(즉,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서 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믿음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믿음이 하는 역할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결혼식 예복을 입었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뿐 입니다.


특별히 이튼의 죄에 대한 이해는 개혁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튼은 하나님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에게서 더 이상 죄를 찾지 않으신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튼은 하나님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들의 죄를 깊은 바다 속에 다 던져 버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에게서 아무런 죄의 흔적이나 부산물을 찾지 않으신다고 강조합니다. 이와 반대로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자 토머스 베이크웰(Thomas Bakewell, 1618년경 출생)은 하나님이 칭의된 자의 죄를 회심 전.후에 다 보신다고 주장합니다. 이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칭의된 자의 죄는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죄 용서를 위해 매일 드리는 기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청교도 개혁신학자 버지스는 죄 용서를 위해 매일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새로운 죄를 지으므로" 반드시 "매일 그 새로운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튼의 이런 죄와 칭의 개념 이해는 신학적으로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인해 무상으로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는 완전히 의롭게 되어 더 이상 죄가 없다는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이나 책임 혹은 성화에 대한 요구를 약화시킵니다.

마치 "한번 칭의된 자는 막 살아도 된다"는 식의 도덕적 방종과 무책임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튼도 성화의 필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칭의된 이후의 삶 속에서 죄를 찾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성화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와 근본적으로 묘한 신학적 긴장을 이룹니다.


이튼의 무상 칭의에서 가장 약화되는 것은 믿음의 역할입니다. 사람이 믿음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써 결혼 예복을 입는 순간 완전히 외롭게 되기 때문에, 종교개혁적 칭의의 원리인 "오직 믿음을 통해"(sola fide) 의롭게 된다는 원리는 무시됩니다. 칭의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드높인 결과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경시되고 무시된 것이 바로 이튼의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강조, 인간의 역할 약화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킨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과 대적하기 위해, 반율법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반대로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칭의론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의 동기 자체는 칭찬받을 수 있겠지만, 반율법주의는 지나치게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경시되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와는 반대 방향으로 추가 기울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기울어진 추의 균형을 돌려놓기 위해 또 다른 신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음에 살펴볼 신율법주의의 칭의론입니다.



3. 신율법주의의 칭의론


신율법주의는 네오노미아니즘(neonomianism)으로도 불립니다. 개념적으로는 반율법주의(안티노미아니즘)와 반대입니다. 반율법주의가 칭의의 방정식에서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신학적 방향성을 가진다면, 신율법주의는 인간 행위의 필요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강조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법, 예수 그리스도


청교도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년)의 칭의론이 신율법주의로 평가되곤 합니다. 백스터에 의하면 죄인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중적(twoford) 의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 필요한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로운 법"(new law) 입니다. 두 번째로 필요한 의는 죄인의 믿음과 회개입니다. 죄인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새로운 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법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백스터의 가르침은 대니얼 윌리엄스(Daniel Williams, 1643~1716년)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발전합니다. 독립파였던 아이작 초운시(Isaac Chauncy, 1632~1712년)는 백스터의 칭의론을 반대하면서 윌리엄스와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초운시가 생각할 때 백스터의 칭의론은 또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였습니다. 왜냐하면 초운시는 만약 새로운 법을 순종하는 데 인간의 믿음. 순종. 회개가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본 것입니다.


백스터의 신율법주의적 칭의론은 존 페스코(John Fesko),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한스 부르스마(Hans Boersma) 같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습니다. 새로운 법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칭의의 조건으로 강조되면 율법주의적 칭의론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유려 때문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티머시 보거(Timothy Beougher) 같은 경우에는, 백스터가 강조하는 믿음과 회개의 행위가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백스터를 신율법주의로 간단히 규정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표하기도 합니다.


행함의 역할 강조


신율법주의의 칭의론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칭의에서 적어도 인간의 역할에 주목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둘은 동일하게 보면 안 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이 믿는 "행위"가 공로적 조건으로 사용되어 그 중요성이 꽤 크다고 본다면, 신율법주의의 칭의론은 새로운 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위가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율법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 역할의 중요도에서 정도의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신율법주의는 반율법주의의 칭의론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는 칭의론입니다.


신율법주의가 칭의의 방정식에서 새로운 형태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면, 다음에 살펴볼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역할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 강조와 인간의 책임 강조 사이의 시소게임이 의와 관련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4.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


지금까지 살펴본 아르미니우스주의, 반율법주의, 신율법주의의 칭의론이 펼쳐진 주 무대는 17세기 영국이었습니다. 이제 그 무대를 18세기 영국으로 옮겨 보겠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하이퍼 칼빈주의라는 신학 사상이 싹트게 됩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은 많은 부분에서 반율법주의의 칭의론과 신학적 맥을 같이합니다. 즉, 칭의 때 인간의 역할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칭의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배타적으로 높이다 보니 인간의 역할과 책임은 경시되는 것이 바로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이 갖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런 문제점은 반율법주의의 칭의론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본격적으로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을 살펴보기 전에, 하이퍼 칼빈주의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의 핵심 사상


커트 대니얼(Curt Danial), 데이비드 엥겔스마(David Engelsma) 같은 학자들은 하이퍼 칼빈주의를 구성하는 정수(精髓, essence)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이퍼 칼빈주의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를 거부하는데, 복음의 부르심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혹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거부하며, 또한 불신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때 "믿음"과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거부합니다. 특별히 믿음과 회개의 필요성을 묻는 "현대 질문"은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을 규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18세기의 어떤 영국 신학자에게 불신자가 복음을 듣고 받아 들이기 위해 믿음과 회개가 필요한지를 묻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이 질문에 부정적 대답을 하는 신학자라면 하이퍼 칼빈주의자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존 브라인의 칭의론


하이퍼 칼빈주의자였던 존 브라인(John Brine, 1703-1765년)의 칭의론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책 [영원 칭의 교리의 방어](A Defence of the Doctrine of Eternal Justification)에서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에 있는 핵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브래지(Robert Bragge, 대략 1665-1738년)는 자시느이 책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죄인의 칭의에 대한 선명한 성경적 설명](A Plain Scriptual Account of a Sinner's Justification before God)에서 브라인의 칭의론을 조목조목 비판합니다. 그러므로 브라인과 브래지의 칭의 논쟁을 살펴보면 무엇이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인지, 또한 그것에 어떤 신학적 문제점이 있는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브라인에게 칭의는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God's immanent act) 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고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 또한 영원과 맞닿아 있으므로, 내재적 행위 가운데 벌어지는 칭의는 유한한 시간의 틀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브라인에게 칭의의 완료는 시간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에 대해 브래지는 칭의는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먼저 브래지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하고,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라고 브라인을 비판합니다. 또한 브래지는 브라인의 칭의론이 전통적인 틀인 "영원에서의 작정, 시간 속에서의 실행"과 배치되는 개념이라고 비판합니다. 브래지는 하나님이 영원에서 하신 모든 작정 및 섭리들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브래지는 칭의도 역시, 하나님이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겠다고 영원부터 작정하셨으면,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믿음을 통해 시간 속에서 실현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브라인의 하이퍼 칼빈주의적 칭의론이 가진 신학적 문제점 중에 하나는 칭의를 하나님의 영원 속 내재적 행위에 위치시켜서 믿음의 역할을 심각하게 축소시켰다는 점입니다. 브라인은 믿음을 칭의의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나 하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믿음이 어떤 형태로든지 칭의의 "원인"이 된다면 결국 믿음이 칭의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므로 그런 사상은 반드시 배격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브라인은 칭의가 하나님의 영원 속 내재적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믿음의 행위는 칭의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브라인에게 믿음의 유일한 역할은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에서 이미 완료된 칭의를 "바라보는 것" 정도입니다.


이런 부라인의 믿음 이해에 대해 브래지는 신랄한 비판을 가합니다. 브래지는 오직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명백한 "성경적 진리"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믿음이 도구적 원인이 될 경우 칭의의 조건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브라인의 비판에 대해, 브래지는 성경 어디에도 믿음이 "공로적 원인"으로 묘사되지 않았다고 반박합니다. 오히려 브래지는 믿음을 "눈"(eyes)으로 묘사합니다. 우리 몸의 눈이 밝은 빛을 볼 수 있는 "도구"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가 밝은 빛이라면 우리는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 빛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브래지는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의 진리를 잃어버리면 칭의의 핵심을 놓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강조, 인간의 역할 약화


18세기 영국에서 생긴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은 마치 17세기 영국에서 있었던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의 재판(再版, reprint)인 듯 보입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이 최우선으로 가진 관심은 칭의의 방정식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그 무엇보다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칭의를 하나님의 영원 속 내재적 행위와 동일시했으며, 그 결과 각 개인의 믿음을 통해 실현되는 칭의의 시간적 성격이 무시되었습니다. 시소가 균형을 잃고 하나님의 주권이 너무 많이 강조된 필연적 결과로 인간의 책임이 심각하게 경시된 것입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에서 인간의 역할은 거의 전무합니다. 칭의가 하나님의 내부에서 끝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칭의론 중에 또 다른 형태로서 "영원 칭의" 개념이 있습니다. 다음 부분에서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5. 영원으로부터의 칭의


죄인의 의롭게 됨이 영원에서 다 이루어진다는 개념을 "영원 칭의"(eternal Justification) 혹은 "영원으로부터의 칭의"(Justification from eternity)라고 부릅니다.

영원 칭의는 사실 간단한 개념이 아닙니다. 영원 칭의의 개념 아래 신학적 다양성이 존재하고, 주장하는 정도에도 역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영원 칭의의 개념에 대한 일반적 오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 오해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반율법주의자들은 반드시 영원 칭의를 주장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대표적 반율법주의자로 구분되는 토비아스 크리스프(Tobias Crisp, 1600-1643년)는 자신의 글에서 영원 칭의를 구체적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이튼의 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칭의가 영원에서 완료되었다는 의미인 영원 칭의보다는, 오히려 "믿음 전"에 일어난다는 무상 칭의를 더 강조하며 주장합니다.


둘째, 타락 전 예정론(supralapsarianism)을 주장하면 기본적으로 영원 칭의의 교리를 옹호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타락 전 예정론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기로 작정하시기 전에 선택될 자와 유기될 자를 작정하신다는 주장입니다. 타락 후 예정론(infralapsarianism)은 하나님이 타락을 허용하기로 작정하신 후에 선택될 자와 유기될 자를 작정하신다는 주장입니다.(하지만 타락 전/후 예정론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순서가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의 작정에 대한 논리적 순서이지 시간적 순서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타락 전 예정론 구도에서는 타락 후 예정론에서보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영원성이 더 강조되므로 영원 칭의를 주장하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예를 들면, 타락 전 예정론을 주장한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1862-1949년)는 영원 칭의의 개념 자체를 비판합니다. 또한 테오도루스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년), 지롤라모 잔키우스(Girolamo Zanchius, 1516-1590년) 같이 타락 전 예정론을 옹호하는 신학자들도 영원 칭의 교리와는 상관없는 칭의론을 펼쳤습니다.


셋째, 배타적 형태의 극단적 영원 칭의 교리는 교회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배타성을 띤 극단적 영원 칭의의 개념은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영원에서 완전히 완료"되어서, 그 완료성이 시간 속 어떤 것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년)의 칭의론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카이퍼의 칭의론은 영원 칭의라고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물론 카이퍼의 칭의론에는 영원 칭의의 개념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카이퍼의 칭의론이 배타성을 가진 형태의 극단적 영원 칭의라고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왜냐하면 카이퍼는 칭의를 설명할 때 총 다섯 개의 층(layer)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즉 (1)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칭의 작정, (2) 그리스도의 부활, (3) 믿음을 심음, (4) 실제 믿음의 역사, (5) 종말론적 칭의 구분합니다. 이런 칭의의 다중 층위에서 죄인의 의롭게 됨은 영원부터 시작해서 실제 믿음을 거쳐 종말로 나아가기 때문에, 카이퍼의 칭으론은 배타적 영원 칭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카이퍼가 모든 층위에서 영원으로부터의 칭의 작정 및 그것의 결정성과 확실성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원 칭의의 개념이 강조되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칭의의 층위에서 믿음의 역할을 말하고 있으므로, 그의 칭의론이 배타적 형태의 극단적 영원 칭의는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모든 반율법주의자들 혹은 타락 전 예정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영원 칭의를 필연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영원 칭의는 단순하고 간단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다차원의 칭의 요소들 가운데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의 주권 강조


하인리히 헤페(Heinrich Heppe, 1820-1879년)가 가장 강조한 것처럼, "죄인을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 작정"과 "칭의 자체"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합니다. 영원 칭의의 개념이 가진 문제점은 바로 이 두 개념을 같은 것으로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즉 칭의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 작정은 "영원성"을 갖고 있지만, 칭의 자체는 "시간성"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영원성과 시간성의 섞임 없이 각각의 성격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원 칭의의 개념에서는 칭의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 작정이 곧 칭의 자체가 됩니다. 칭의가 시간과 상관없이 영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브라인의 칭의 개념과 유사합니다. 왜 브라인의 책 제목이 [영원 칭의 교리의 방어]인지 그 이유가 명백해지는 순간입니다.


영원 칭의의 개념에 대한 옹호는 인간의 역할/책임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앞에서 살펴본 반율법주의 및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과 그 사상적 맥을 같이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칭의도 역시 하나님이 전적으로 다 하시길 원한 것입니다. 그 의도 자체는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의도를 관찰시키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들은 칭의의 방정식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기 위해 인간의 역할이 경시되는 방식으로 칭의 담론을 써 내려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불균형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시간 속에서의 믿음의 역할이 영원 칭의의 개념에서는 향방을 잃게 됩니다.


6. 적용


과거의 교회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균형 잃은 칭의론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교훈과 도전을 안겨 줍니다.


첫째,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다는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엡 2:8-9).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신율법주의 칭의론은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에 주목한 결과 이 진리를 굳건히 고수하지 못한 우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죄인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의롭다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더욱 묵상할수록 감격 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3). 그러나 진노의 자녀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덧입혀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그의 의를 통해(엡 2:4-7)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b). 이는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는 구원의 감격이 됩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 일을 하셨습니다.


둘째, 비록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지만,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믿음"의 역할과 관계됩니다. 칭의 때 믿음의 역할은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이 가르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기 위해서는 영접하는 행위, 곧 그 이름을 "믿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믿는 행위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의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 이런 믿음이 도구적 원인이라는 것을 거부하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반율법주의, 하이퍼 칼빈주의, 배타적 형태의 영원 칭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성경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가르칩니다(합 2:4; 롬 1:17; 갈 3:11; 히 10:38).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0:6). 죄인은 오직 믿음을 통해(sola fide) 의롭게 됩니다.


7. 결론


우리는 교회 역사의 장구한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거대한 신학적 담론이 칭의론이라는 교리적 틀 안에서 시소게임을 하듯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각자의 위용을 뽐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반율법주의, 신율법주의, 하이퍼 칼빈주의, 영원 칭의의 교리 등에서 이 시소의 균형을 유지하기란 결코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처럼, 하나님의 주권이 자나치게 높아진 상태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간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이에 대한 다른 반작용으로 다시 하나님의 주권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불균형한 모습들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불균형은 비단 지금까지 집중해서 살펴보았던 17~19세기의 일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현대의 균형 잃은 칭의론들을 본격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8. 생각해 볼 문제


1. 내 신앙생활에서 율법주의적 요소가 있는 습관이 있나요?

    예를 들어, 나는 헌금을 많이 했고 새벽예배에 꾸준히 참석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2. 내 신앙생활이 너무 "값싼 은혜"에 도취되어 있지 않나요?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 구원은 상실되지 않으므로 비도덕적으로 막 살아도 될까요?

3. 어떻게 하면 내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나의 역할/책임이 균형 있게 드러날 수 있을까요?


- 박재은/'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에서 발췌(18-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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