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해설


이신건 옮김


[1. 하늘에 계신] [2. 우리 아버지!] [3. 하나님의 일] [4. 사람의 일]


[5.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하나다]  [6.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7. 나라가 임하옵시며] [8.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9. 나중의 세 가지 기도] [10.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1. 일용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13.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4. 위대한 탕감]


[15.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16.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1. 하늘에 계신 ...


하늘! 이것은 창조된 세계의 한 부분, 위에 있는 부분, 접근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창조의 부분을 말한다. 즉 하늘에 계신 분은 하늘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 하늘 너머에 계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기도 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에게는 경계선이 없으시고, 하나님은 파악될 수 없고, 자유로우시고, 한계가 없으시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능가하신다고 우리가 말할 때, 이런 표현들은, 우리가 제한되고 파악될 수 있고 시간에 속한 것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을 하나님으로 이해해 보려고 할 때와 같이, 원래 하나의 이념(생각)과 추상적인 개념으로부터 이런 표현들을 끌어온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로부터 비로소 그 의미를 얻게 된다. 그분의 "초월성"(超越性), "하늘 너머에 계신 그분의 존재"는 바로 이것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칸트의 철학도, 혹은 플라톤의 철학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파악될 수 없는 것, 우리보다 더 높은 것의 경계선까지만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은 하늘 주위로 맴돈다. 오직 복음만이 하늘에 계신 분, 하늘 너머에 계신 분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 어떤 신령한 자도, 그 어떤 관념주의자(觀念主義者)나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도 우리를 하나님의 현실, 그분의 초월성으로 인도할 수 없다. 그분의 초월성은 영(靈)이나 불가시성(不可視性)과 다르다. 그분의 초월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전능한 자비의 깊음 안에서 입증되고, 드러나고, 실현된다.


그분은 하늘에, 그의 보좌에 계신다. 이것은 그분의 가장 높은 존재이다. 그분은 우리의 소원들, 우리의 크고 작은 염려들, 우리의 이상들과 원리들, 우리의 영리함과 어리석음과 대립해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인본주의와 "동물성"(우리 안의 인간적인 요소와 동물적인 요소)과 대립해 계신다. 그분은 때때로 우리와 대립하시되, 여하튼 항상 우리 위에서 우리를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는 심판자, 왕이시다. 그분은 항상 동일하신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동일하신 분은 아니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항상 매일 아침마다 새로우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매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그분이 영원하신 것은 오로지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값없는 은혜와 은혜로운 자유이시다. 그분은 모든 자가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친밀하신 인격이시다. 그분의 손 안에서 모든 자가 섬길 수 있고, 섬겨야 하며, 예전에도 섬겼고, 앞으로도 섬길 것이다.


보라. 우리는 몇 마디 말로써 그분에게 기도드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에게 기도드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충동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초대받았고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에게 기도드릴 자유를 갖고 있다. 이 자유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이 자유는 단순히 우리의 본성에 속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요, 말씀과 영의 자유이다.



2.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초대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시고 우리를 자신의 형제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주기도문의 "우리"는 아주 특별히 우리를 위해 아버지가 되어 주신 한 아버지를 전제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는 사람의 사귐, 하나님의 자녀들의 형제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삶을 포함한다. 예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나아가도록,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나님에게 기도하도록, 하나님과 함께, 그분과 하나가 되어 입술과 영혼으로 그분을 찬양하도록 초대하시고 허락하시고 명령하신다.


더 나아가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과 맺는 사귐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이 모임의 사귐 안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한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온전히 성도들의 사귐을 맺고 있지만, 우리는 또한 아마도 기도하지 않고 있을 그런 사람들과도 사귐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인류를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인류는 이 대도(代禱)의 대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온 인류와의 이러한 사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말하자면 기도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대리자(代理者)들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많은 사람들, 잃어버린 사람들과 연대관계를 맺으셨던 것과 꼭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 아버지는 그분의 말씀과 영을 통하여 우리를 낳으셨고 옛적에 우리를 창조하셨던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이다. 그분은 창조 안에서 그리고 창조와 더불어 우리의 삶의 원천이 되시는 분이요,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시는 분이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일시적이고도 영원한 온 존재에 대해 친히 책임을 지시는 분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우리에게도 주어질 유업(遺業)이다. 그리고 자녀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자유로이 나아가듯이, 우리도 그분에게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다.


보라! 그분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부를 권리도 없고, 그분의 자녀가 될 권리도 없으며,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권리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 되는 것은 그분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관계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현실로 나타난 이 아버지 신분과 자녀 신분 덕분이다. 우리에게 이 아버지 신분과 자녀 신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로 나타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자비로운 우리 아버지를 의미한다. 우리는 집을 떠난 아들이요, 늘 집을 떠나게 될 아들이다. 집을 떠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 밖에는 그 어떤 권리도 내세울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과 우리의 자녀 신분을 주시는 자요 그 보증인이다. 이 아버지 신분과 자녀 신분이 다른 신분들, 우리들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자녀들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신분들보다 비교할 나위 없이 더 높은 이유가 무엇인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이런 인간적인 관계들은 다른 관계들이 모방하고 흉내낼 수 있을 원형(原形)이 아니다. 원형, 참된 아버지 신분과 참된 자녀 신분은 하나님이 그분과 우리 사이에서 만드신 이러한 결합 안에 존재한다.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이러한 본래적인 자녀 신분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이 두 단어, 즉 아버지와 아들의 충만한 현실 안에 있게 되는 셈이다.



3.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일: 먼저 주기도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기도의 구조가 어떤 의미에서는 십계명의 구조와 일치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처음의 세 가지 기도와 나중의 세 가지 기도 사이에는 매우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처음의 세 가지 기도는 처음의 네 가지 계명과 일치하고, 나중의 세 가지 기도는 다섯째부터 마지막까지의 계명과 일치한다.


처음의 세 기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주기도는 바로 이것과 함께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그분의 이름,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이 성취되고 완성될 것을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한다. 비록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고 완전히 자족하신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홀로 존재하길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그분은 사람이 없이 행동하고 존재하고 살고 염려하고 일하고 싸우며 승리하길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길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이 또한 사람의 일이기를 원하신다.


참으로 무신론자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존재할까?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는 사람이 없는 하나님은 결코 계시지 않는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처음의 세 가지 기도에서 실천하도록 요청된 바, 그분의 일이 성취되는 것을 위해 기도할 것을 허락하시며,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일, 즉 교회와 세계에 대한 그분의 통치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신다.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된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의도와 활동에 함께 하도록 초청하신다. 그리고 이 초청이 처음에 나타나고 또 마지막 찬양에서 다시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하자.


다른 소원의 자유, 기쁨, 용기, 확신은 바로 처음의 이 세 가지 기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길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늘 이 일을 거부하는 자, 하나님의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자는 자신의 죄가 용서되기를 기도할 수도 없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와 다른 모든 이들의 의도와 일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의도와 일을 완전히 이해할 때라야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치 우리가 공중에서 똑바로 서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이 걷기 위해서는 땅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처음의 이 세 가지 기도의 땅을 걷는다. 수많은 기도가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하나님의 귀에 들리지도 않고 응답받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이 세 가지 기도와 함께 시작해야 하고, 다르게는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모든 것은 간단해진다.



4. 사람의 일  


사람의 일: 나중의 세 가지 기도는 직접 그리고 매우 실제적으로 우리와 관련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복리(福利), 우리의 안녕, 우리의 육신적, 정신적, 영적 구원을 다룬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일(우리 생활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자신의 일과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아주 단순하게 우리 자신을 위해 부르짖을 수 있고, 또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우리의 모든 생활이 대두된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분에게 맡기는 것은 단지 하나의 허락이 아니라, 하나의 분부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순례할 때, 대단히 많은 짐들을 지고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적인 짐, 물질적인 짐, 세상적인 짐, 영원한 짐, 그리스도교적인 짐, 교회의 짐과 신학적인 짐을 하나님에게 맡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분 안에서 탁월한 피조물인 사람은 비로소 진정 홀로 존재하고 행동할 수 없는 피조물이 된다. 사람은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먹거나 마실 수도 없으며,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다. 자신을 방어하거나 구원할 수도 없으며, 슬퍼하거나 기뻐할 수도 없으며, 희망하거나 절망할 수도 없으며,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은 그분의 덕분이다. 실로 진정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없다. 이런 관념을 갖는 사람들, 자신을 무신론자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고정관념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무 것도 바꾸어 놓지 못한다. 사람 자신은 하나님이 없지 않다. 사람은 소리지르고 엄마에게 울부짖는 못된 아기처럼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곁에 있다.


이것은 절대로 철학적인 사상이 아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없다"는 이 문장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떠나서 어떻게 확신있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했다면, 그 즉시 우리는 사람을, 그의 본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사람의 운명을 이해한 셈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없기 때문에(무신론은 하나의 우스운 발명품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안들과 필요들, 염려들과 고난들, 우리의 소원들, 모든 것들에 참여하신다. "우리에게 우리의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셈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우리의 일을 그분의 일과 하나가 되게 하라는 이 명령, 이 초청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단히 확증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라고 초청하시고 명령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고, 사람이 되셨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가 종사하는 모든 큰 일과 특별히 모든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지셨던 것이다.



5.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하나다.


사람의 일(그의 물질적인 필요와 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 다음에 온다. 하지만 사람의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나중의 세 가지 기도가 없었다고 한다면, 처음의 기도도 없었을 것이다. 전자는 후자와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처음의 기도를 드린 후에 나중의 세 가지 기도를 드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올바로 기도드리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성격과 신경 그리고 모든 것을 다해 자신의 일과 존재에 몰두하고 있는 처지에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만 존재하진 않는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국 실제로는 자신의 일을 같이 하는 셈이다. 그래서 나중의 세 가지 기도를 생략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한 편으로는 교회, 신학, 형이상학의 영역을 갖고, 다른 한 편으로는 돈과 가족, 사업, 이웃과 관련된 영역을 갖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이 두 개의 서랍을 갖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오직 하나의 서랍만이 있을 따름이다. 두 개의 서랍의 착각만큼 위험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종종 목사관 안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두 개의 서랍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여러분들은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일은 서로 묶여 있다. 우리는 두 일을 위해 동시에 기도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과 함께 기도하자고 우리를 초대하시기 때문이며, 그분 안에서는 이 두 가지 일이 오직 하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서 두 단락 사이의 차이점 못지 않게 그 통일성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루터가 그의 소교리문답에서 이 파라독스(矛盾)를 매우 흥미롭고 인상 깊게 강조한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그 뜻대로 행동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분의 나라는 다가온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진다. 그분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우리가 빌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 우리는 우리가 그분에게 뭔가를 채 말하기도 전에 우리의 사정을 이미 아시는 분에게 기도한다. 참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잊지 말자. 루터도 그런 점에서 올바르게 말했다. 기도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우리는 그분의 기도에 참여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도를 받으셨고, 세계의 시작부터, 영원부터 영원까지 받으셨다. 모든 것이 이미 다 갖추어졌다. 이 점을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졌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릴 때, 이미 모든 것이 존재해 있다.



6.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창조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히 직접 하나님 자신과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대변한다.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닐 수 있다. 세계안에는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이름을 새긴 비문(碑文)과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비문은 불분명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광고판처럼 계시의 도움을 받아 해독(解讀)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겠다.


우리의 눈은 열려 있기에, 우리는 이 비문을 볼 수 있다.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다.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은 세계 안에 새겨져 있을 수 있다. 만물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만물은 창조주의 이름을 지닐 수 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보자. 이 이름은 보이는가? 이 이름은 드러나는가? 이 비문은 해독되는가? 우리의 눈과 귀는 열려 있는가? 이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는가?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도하는 자에게 이미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미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다(루터)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 전제야말로 기도의 토대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아들 안에서 당신은 스스로 말씀이 되셨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도록 육신 안으로, 세상 안으로 오셨다.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는 표징(標徵)은 빛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독하지 않다. 당신은 인간의 얼굴을 취하셨다. 당신이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살지 않는다. 당신의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 당신이 소집하셨고 앞으로도 모으실 사람들의 모임,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교회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는 당신의 음성을 들었다.


이 세상 안에서, 이 인류 안에서, 이 역사 안에서 하나의 확실한 사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 비밀의 열쇠는 우리의 손 안에 있다. 이 열쇠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미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당신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있음을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의 교회가 비겁과 소심, 교만과 허풍의 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매일 새로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말씀이 책상 위에 올리는 하나의 진리, 하나의 원리,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인격, 위대한 비밀과 위대한 소박함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한 가운데서, 우리의 삶과 윤리와 습관의 진지함과 명랑함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게 하소서! 매일 당신을 욕되게 하는 우리의 뻔뻔함과 몽매함과 불신앙이 다소간 저지되고 억제되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다시금 우리의 손 안에 놓여 있는 이 열쇠를 조금이라도 돌려서 아름다운 날에 문을 열게 하소서!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길이다.  



7.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성서에서 창조주의 의도와 일치하는 세계의 삶과 목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에 대한 마지막 승리이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 하나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존재한다. 하늘과 땅이 새로운 이유는 세계가 하나님의 평화로 진입했고, 이 평화가 세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승리하시는 주님, 창조주의 정의이다. 세계의 마지막과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가능성을 무한히 넘어서는 성취를 늘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해방, 그러한 승리, 그러한 화해와 갱신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우리의 능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성취된다. 이 나라의 도래는 오로지 우리의 기도 제목일 뿐이며, 오로지 그분의 활동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하나님에게 말한다면, 이것은 이렇게 기도하는 자가 이 나라, 이 삶, 이 정의, 이 새로움, 이 화해를 알고 있고, 이 모든 것이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는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곳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우리가 기다리는 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뒤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있고,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에 일어나기 시작한 하나님의 거대한 운동이 인간을 위하여 다시 개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미래는 분명히 과거의 흔적을 가지게 될 것이고, 우리의 과거는 분명히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며, 이미 오신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다.


이제 만물 위에 드리운 이 보자기가 밥상 위에 드리운 보자기처럼 벗겨지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밥상은 이 보자기 아래 있다. 우리는 이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보려면, 이 보자기를 벗기기만 하면 된다.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덮고 있는 보자기가 벗겨져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변화된 만물의 현실을 볼 수 있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신비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개인 생활, 우리 가족, 교회 생활, 정치적 사건들, 이 모든 것들은 보자기이다. 현실은 그 뒤에 있다. 우리는 아직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지 못한다. 우리는 마치 거울을 보듯이 희미한 반사체를 본다. 우리가 현실을 볼 수 있으려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여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이 나라를 알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보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 나라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신앙 가운데서 유랑할 뿐, 아직까지는 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이미 성취된 이 새 시대, 이 승리의 첫 발자취만이라도 벌써 여기서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 만물을 포용하는 아침의 빛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우리 역사의 사건들을 우리에게 가까이 온 그 나라의 관점 아래서 볼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시대, 오늘과 내일을 위한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말할 수 없다. 큰 종말과 함께 오는 위대한 미래는 작은 종말과 함께 오는 미래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 다투는 많은 싸움들, 특히 근본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우리의 개인적, 심리적인 갈등들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이해할 만하다. 우리는 오로지 부활절이 세계를 위한 보편적인 사건이 될 날을 기대할 따름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의사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엔 모든 사람들이 건강할 테니까.  


8.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창조주와 주님으로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또 이와 동시에 그분의 피조물을 의롭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품으신 계획이 실현되는 영역이다. 이 피조물은, 그분과 비교하자면, 너무나 작고 미약하며 위협받는 존재이며, 너무나 실수하기 쉬운 존재다. 왜냐하면 그는 죄에 쫓기고, 길을 잃었으며,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피조물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며, 그분의 왕국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는 것이다.


그분의 뜻은이러한 계획이 실현되길 바라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태초와 마지막 사이에 지금 이 계획이 이루어지길 바라신다. 이것은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계획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이루는 자는 우리가 아니다. 계획과 실행은 그분에게 속한 것이요, 시간도 그분에게 속한 것이요, 지금 존재하는 것과 장차 존재할 것, 시간의 모든 내용은 그분에게 속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세 번씩 기도의 대상을 마주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피곤하지 않으시길, 참는 것을 그치지 않으시길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이 종말까지 계속 통치하시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실행하고 성취하는 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가운데서 기도드리는 자요, 따라서 그분의 뜻이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이다.


하늘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의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미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졌고, 이루어질 것이며, 시간 안에서 전개될 것이다. 하지만 그분 가까이에서 일어났고 또 일어나는 것의 신비 안에서 이 뜻은 이미 이루어졌다. 태초의 창조 안에서, 그분의 세계통치 안에서, 모든 사건들의 의미를 충실히 표현하는 그분의 계약의 역사 안에서 이 뜻은 이미 이루어졌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뜻을 알고 계신다. 이 뜻은 "당신의 우편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뜻을 믿을 수 있지만 볼 수는 없다. 이 뜻은 이미 이루어졌고, 하늘에서 중단 없이 이루어진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성취되었다.


실로 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생활 속에서, 우리의 세계 안에서 이 뜻이 성취되길, 우리의 눈에 명백히 보이길 우리는 기도한다. 땅에서 그분의 뜻이 성취되는 형태가 하늘에서 성취되는 형태와 같게 되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의 세계사와 교회사 안에 있는 밝음과 어둠, 거룩함과 어리석음, 지혜와 습관의 혼합은 우리의 생활을 너무나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혼돈이 완전히 밝히 드러나길 기도한다. 하늘에서는 이것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우리에게는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복음을 거역하는 일을, 늘 반복하여 복음을 위조하는 일을, 복음을 일종의 새로운 율법으로 만드는 일을 중단하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때, 우리의 불순종의 이런 끝없는 불완전함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길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소서! 그리고 우리가 처한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언젠가는 벗어나게 하소서!



9. 나중의 세 가지 기도


이 세 가지 기도에서 이제 기도는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명령(命令)쪼가 - 명령의 형태가 - 된다. 앞에서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 이제는 다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의 대담성을 주목하라. 차라리 나는 이 기도가 저돌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일, 인간의 일에 관여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감히 졸라대는 인간이 여기에 있다. 그는 이처럼 명령쪼의 말을 서슴치 않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대답은 이러하다. 우리는 처음의 세 가지 기도에서 하나님의 일, 그분의 이름의 거룩함, 그분의 나라의 도래와 그분의 뜻의 실현에 관여하도록 허락받은, 아니 그렇게 하라고 명령까지 받은 유일한 존재이다. 이것이 대관절 우리의 관심사인가? 분명히 그렇다. 이것은 우리의 일이다. 우리는 이것에 관여하도록 허락받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同役者)로, 협력자(協力者)로 삼아 주셨다. 그분은 자신의 일을 우리의 일로 삼으셨다. 이제 다음에 오는 이 세 가지 기도문으로 하나님에게 올리는 기도는 처음의 세 가지 기도의 결과로서 자연스러워진다. 우리는 말한다. 우리 아버지, 당신께서 우리를 보시는 그대로, 우리의 모습 이대로, 아마도 당신께서 만나길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일에 이미 관여한 우리는(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진지하다고 여긴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되기를 갈망하는 소원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밖에 다른 임무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염려입니다. 우리를 스스로 돕는 것은 우리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관심은 오직 불충성, 무율법, 불순종일 따름입니다. 기도하도록 그리고 당신의 일을 위해 살도록 초청하시고 명령하신 당신에게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맡깁니다. 여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우리가 인간의 일로써 당신의 일에 관여하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로부터 이 세 가지 기도의 용감한 호소가 나온다. 이 기도는 이러한 운동을 나타낸다. 외적으로 내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섬기라는 그분의 명령 앞에 다가간다.


처음의 세 가지 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그분의 투쟁에 참여하길 바라신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세상을 이기신 그분의 승리, 이 기도에서 표현되는 탄식의 실현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기신 그분의 승리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셨고, 이제 우리가 그분의 승리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신다. "오, 당신의 이름이... 당신의 나라가... 당신의 뜻이..."라는 탄식기도를 감히 드리는 자유를 갖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승리에 참여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을 활용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어째서 내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고..."라는 기도가 대담하고 저돌적인 기도라고 말했는지를 설명하는 정당하고 좋은 이유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감히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 곁으로 다가간다. 우리는 이 기도가 놀라운 것임을 깨닫기를 원한다. 이 기도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과 자매들의 섬김의 의무로부터 생기는 위대한 자유 안에서만 드려질 수 있다.



10.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잘 알다시피, 루터는 그의 소교리문답에서 "일용할 양식"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음식, 음료, 의복, 신발, 집, 마당, 농장, 가축, 돈, 물건, 경건한 아내, 경건한 자녀, 경건한 친구, 경건하고 신실한 상전, 좋은 정부, 좋은(너무 덥거나 춥지 않은) 날씨, 건강, 결혼, 좋은 친구, 신실한 이웃. 이것들은 적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는 이 목록에서 16세기 독일의 소시민적 농가의 필수품과 생존조건들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목록을 우리 시대와 우리의 특별한 상황의 필요에 맞게 해석하고 보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분명히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이런 넓은 의미로 생각해도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원래의 단어가 갖는 완전한 순수성을 잊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강조하고 싶다. 성서의 언어에서 일용할 양식은 두 가지 해석을 갖는다.


1. "일용할 양식"은 살아가는 데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것, 가난한 사람에게조차도 없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양식, 거지와 부랑자에게 있어야 할 최소한의 생존수단이다. 이것은 "굶주림" 개념과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 이것은 굶주림과 죽음의 바닥의 경계선에서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시는 그분의 값없는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는 이 최소한의 양식을 우리가 내일에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는 이것 덕분에 살아간다. 하지만 내일은 어떨까? 아무도 모른다. 언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지 않을지, 언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함께 생명을 주시지 않을지, 전혀 보장이 없다.


2.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는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의 시간적 표징(標徵)이기도 하다. 이 단어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자연스럽고 물질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고상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자연적인 의미와 고상한 의미는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광야의 백성,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사지(死地)에 있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표징이다. 이런 해석의 근거 위에서 일용할 양식은 하나의 거룩한 것이다. 일용할 양식은 약속이다. 그리고 이것은 약속일 뿐만 아니라, 진지하게 그리고 항상 공급되는 이 양식의 신비한 임재(臨在)이기도 하다. 이 양식이 다 소비되더라도 다시 대체될 필요는 없다. 성서에서 매번의 식사는, 초라한 식사든지 성대한 식사든지 간에, 하나의 거룩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잔치 식사, 영원한 기쁨의 식사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육체적인 생명과 시간적인 생명은 거룩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11. 일용할 ...


이 단어는 온갖 수수께끼와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매일,' '다가오는 날'을 뜻한다. 오늘 날 우리에게 매일의 양식을, 내일 필요할 양식을 주소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지만, 다음 순간에도 살고 있을까? 내일엔? 그 때까지 우리가 굶주리지 않고, 죽지 않을까? 이것은 우리를 우리의 불확실한 상황과 대면시키는 구체적인 질문이다. 예수님이 "너희가 내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마태복음 6장을 우리는 기억한다. 시간적으로 다른 내일을 위한 불안은 영원히 다른 내일을 위한 불안을 미리 결정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늘(정말 오늘!)의 양식으로써 그리고 이 땅의 양식의 형태 아래서 실로 저 종말적인 다른 내일에 영원히 공급받을 양식의 보증, 그 첫 열매를 받기를 원한다.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전이해(前理解)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당신은 우리에게 내일을 위한 양식을 주십니다. 정말 당신은 오늘 날 우리에게 양식을 주십니다. 당신은 우리의 신실하신 창조주입니다. 당신은 어떤 순간에도, 단 한 순간이라도 우리의 신실하신 창조주가 되는 것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창조와 모든 피조물의 영광과 부요함, 당신이 당신과 우리 사이에서 제정하길 원하시는 은혜의 계약에 감싸여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죽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생명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도 말해야 한다. 당신은 늘 이해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이 선물, 당신의 인내의 선물이요 우리의 소망의 선물인 이 양식을 주시니, 우리가 배부른 소시민이나 순간적인 미각(味覺)을 즐기는 자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이 선물을 낭비하지 말게 하시고, 파괴하지 말게 하소서! 각자가 싸움과 불평 없이 자신의 양식을 갖게 하소서! 만약 누가 지나치게 많은 양식을 갖고 있거든, 이 사실로 인하여 그가 당신의 은혜의 봉사자와 관리자로 임명되었음을 알게 하소서! 그리고 그가 당신을 섬기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하소서! 특히 굶주림과 죽음, 인간다운 삶의 불안에 의해 위협을 받는 사람들은 열린 눈과 귀를 가진, 그리고 이들을 돌볼 의무를 느끼는 형제들과 자매들을 만나게 하소서! 하지만 우리 사회의 불평들과 불의들은 그 얼마나 큰 창피입니까? 당신의 은혜와 부요함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아직도 배고파 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 얼마나 큰 어리석음과 무감각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우리가 양식을 받되,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표징과 약속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이 표징을 즐거워하고 당신에게 영광을 돌릴 때, 당신이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것들의 임재를 미리 즐거워하게 하시고, 당신이 영원히 베푸실 잔치에 우리가 이미 오늘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즐거워하게 하소서!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스스로 제시하는 일종의 전제조건인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이고도 결정적인 표지(標識), 척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받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러한 경험을 실제로 한 사람은 모두가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모두 죄지은 자, 빚진 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그렇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의 잘못이 아무리 크다고 생각될지라도, 그 잘못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지은 잘못보다는 늘 끝없이 가볍다. 만약 우리가 이 작은 일을 행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매우 큰 죄를 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를 바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 자신을 위해 품는 희망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마음, 감정, 판단을 갖게 한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무슨 공로도 아니고, 도덕적인 노력이나 일종의 미덕도 아니다. 상대방을 용서하기 위하여 그에게 영원한 미소를 보내는 사람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인간의 용서는 아름다운 일이요, 자연스럽기까지 한 필수품이다. 가엾은 피조물,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하나님의 용서의 빛 안에서 보자. 그리고 어려운 일에 빠진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자. 사태는 그다지 심각한 게 아니다. 우리에게 가해진 모욕(侮辱) 안에 푹 박혀 지내지 말자. 모욕을 너무 즐기지 말자.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대하면서 어느 정도 유머(Humor)를 지니자. 다른 사람들에게 이 작은 용서, 자유의 몸짓을 나누자! 이런 행위를 할 때, 곧바로 일종의 선량한 그리스도교 기사(騎士)의 도덕적 무장(武裝)을 볼 필요는 없다. 이것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강하게 할 수 있는 투구도 아니고 대검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당연히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이처럼 매우 작은 자유도 갖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다음과 같다. 그는 기도할 줄 모르며, 아무 것도 받을 줄 모른다. 우리는 "일어나 용서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순한 진실 앞에 서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용서는 신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라는 차원에서 이처럼 작은 일을 실현한다. 만약 내가 스스로 내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찌 내가 나를 위해서 그 무엇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 작은 일을 행해야 할 의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 일을 함으로써,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주 단순히 나의 희망과 기도가 적법한 것이라고 말하게 될 뿐이다.



13.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의 죄'라고 번역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우리의 잘못, 우리의 빚,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한 것, 우리가 하나님에게 빚진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분에게 빚진 자이다. 만약 우리가 빚을 갚을 수 없다면, 우리는 빚진 자로 존재하는 셈이다. 만약 우리가 그 누구에게 치러야 할 빚을 갚지 않았다면, 우리는 빚진 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한 그 사람, 우리를 불신케 만든 그 사람을 우리는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빚진 자이다. 많든 적든지 간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빚진 것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아주 간단하게 우리의 전 인격, 그분의 자비에 의해 유지되고 양육되는 피조물로서의 우리 자신이다. 그분의 자녀인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의해 부름을 받았으며,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인 우리는 하나님에게 빚진 것을 그르친다. 우리의 존재와 행위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고, 우리는 그분을 인정할 줄 모른다. 칼빈은 말한다. 우리가 빚을 갚지 않는 사람들마냥 하나님을 모욕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교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루터는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허영심을 버리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매사의 형편이 이러하다는 것을을 인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변화를 이룰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상황을 뒤죽박죽 더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날로 심해진다. 그리고 인간은 늙어갈수록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더 많이 내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황은 날로 나빠진다. 우리는 완전히 주기도문의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다음과 물음에 부닥치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열심 가운데서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의 욕망들을 확장한다면, 우리가 누구길래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권리를 주장하는가?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순수하고 이상적인 경우에 그것은 마치 빚진 자가 우리에게 아무런 불의를 행치 않았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그의 잘못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그가 받아야 할 가혹한 처벌을 그에게 가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 반대로 그와 더불어 백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을 뜻한다. 우리를 용서하소서! 이 기도는 우리의 입장에서 모든 종류의 권리를 배제한다. 이 기도는, 우리의 주장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것, 가장 작은 권리마저 배제한다. 인간을 욕한다고 용서가 되는 것도 아니며, 모욕하는 인간 자신도 용서받는 게 아니다. 인간은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죄를 사면받을 권리가 없다. 죄지은 자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신분으로 만드는 권리는 오로지 우리가 죄지은 그분에게만 있다. 이것은 오로지 믿는 자(信者)나 통치자, 우리가 기만했던 임금의 권리일 뿐이다. 우리는 그분을 잘못 섬겼으며, 늘 잘못 섬긴다. 이런 권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일 따름이다.



14. 위대한 탕감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죽기까지 우리를 따라 다니는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이 죄는 실로 우리가 매일마다 그리고 순간마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행하는 죄입니다. 어떤 잘못은 우리가 좋게만 보려고 하고, 또 다른 잘못은 우리가 볼 순 없지만 언젠가는 기록된 책이 열리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당신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볼 것입니다. 당신은 이 모든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이미 당신은 잘못과 죄가 없는 새로운 한 인간(새로운 '우리'와 새로운 '나')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드시는 한 인간, 당신의 눈에 의로운 한 인간, 순수하고 흠도 티도 없는 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당신은 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내려진 선고(宣告)의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 주위로, 당신 아들의 십자가 주위로 모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아들이 우리를 해방하기 위하여 우리 대신에 감수하였던 이 선고, 죽음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가 죄 때문에 절망하거나 불안과 불쾌 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더 이상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는 장차 우리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뒤돌아보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당신은 다시는 좌절하지 말라고, 과거에 매여 사는 느낌을 갖지 말라고, 오늘과 내일의 모습(존재와 행동)에 매여 사는 느낌을 갖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시선을 당신에게 두지 않고 우리의 죄에 두는 이러한 태도와 방식은 사라졌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이러한 과거로부터 단절시키셨습니다. 당신은 우리로 하여금 앞을 바라보고 살도록 허락하셨고, 또 그렇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앞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오늘이나 과거의 모습(존재와 행동)을 경솔히 여긴다고 되는 일도 아니지만, 미래의 모습(존재와 행동)을 신뢰한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하며, 우리가 지금이나 앞으로도 심판받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당신에게 맡겨야 하며, 당신이 행하신 일, 당신이 우리를 위해 감수하신 죽음에 맡겨야 합니다. 이미 성취된 일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성취는 당신이 이미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미래입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길만을 걸어가야 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용서하심으로써,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다섯 번째 기도에서 우리의 파산(破産)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가 이를 행치 않으려고 한다면,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일은 그르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의 일은 성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용서하시는 당신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15.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이 기도는 큰 시험에 관한 말이다.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악, 아니 수많은 악들이다.


죽음으로는 이끌지 않는 작은 시험, 죄가 있다. 이런 시험은 하나님이 매일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으로서 우리의 나이에 따라 다양하다고 난 말하고 싶다. 젊은 사람들에게, 덜 젊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 그러한 시험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이런 시험을 보내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험이다. 심지어 야고서보는 시험이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1:12) 내적으로 외적으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악, 무겁거나 전혀 원치 않는 악도 있다. 그렇지만 가까이 살펴 면, 그런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바울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위험이나 근심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구하소서"라고 외친다면, 이것은 착각이다.


하지만 의심할 나위도 없이 작은 시험 안에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큰 시험, 종말론적인 시험, 즉 악들의 사역(使役)이 있다. 도덕적이고 육체적인 시험들은 실로 이런 활동과 맞아떨어질 수 있다. 이것은 멸망케 하는 악의 행동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분명하게 의식할 수도 있고 버틸 수도 있는 일상적인 위험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저항하시는 무(無)의 끝없는 위험, 단지 부차적인 의미의 파괴만이 아니라 완전한 추락, 궁극적인 멸망을 피조물에게 가져다주는 위험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시험이다. 여기에는 선한 것,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여기에는 희망이 전혀 없다. 극단적이고도 측량할 수 없는 이런 악은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절대악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형태, 즉 죄와 죽음의 형태 안에서 창조를 공격한다. 이것은 성경이 마귀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의 불의하고 불가해한,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권세 안에서 나타난다. 피조물은 이 위험 앞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보다 더 뛰어나시지만, 피조물은 그렇지 못하다. 마귀가 한번 등장하면, 그는 끝없는 파괴를 가져다준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방패가 없다면, 우리는 그에게 대항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 하나님이 통치하시지 않는 곳에서는 다른 자가 지배한다. 다른 선택은 전혀 없다.


내가 마귀를 설교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쉽게 지나쳐 버리는 하나의 현실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더 뛰어난, 피할 수 없는 원수가 존재한다. 나는 마귀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에 대해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귀로부터 벗어나려고 즉각 서둘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에게 기도한다: 우리를 구하소서. 싸움에서 구해 달라거나(우리는 싸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고통에서 구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우리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 이 원수와의 만남에서 구해 달라는 말이다. 이 원수는 우리의 모든 힘보다 더 강하고, 우리의 지혜(우리가 신학할 때 동원하는 지혜까지 보태서?)보다더 간교하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감정으로 가득하다(왜냐하면 마귀도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놈은 우리의 모든 그리스도교적 경건, 오래되거나 새로운 경건 혹은 신학적인 경건보다 더 경건하다(왜냐하면악마도 실로 경건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철저히, 그리고 끝까지 무감각하게 만들 악의 가능성에서 우리를 보호하소서!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극단적인 시험이다.  



16.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는 악의 힘을 확인하며 느낀다. 솔직히 말하자면, 악은 단지 가짜 세력, 거짓 세력일 따름이다. 악은 전혀 비현실적인 세력이 아니다. 악이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활동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러므로 악이 비현실적이라고 경시하는 일은 전혀 유익하지 않다. 악의 위험성은 그 악이 은밀하고도 간사한 세력이라는 사실에 있다. 하지만 악은 너무나 현실적으로 지배한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악은 우리를 압도한다. 우리는 악에 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악의 저주 아래 있다. 우리는 악을 불평하고, 악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헬라어의 의미는 단지 우리를 이 저주에서 구원하소서만이 아니라 이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이다! 구약성서의 시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외침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벗어나게 해 주소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여섯 번째의 기도에서 이 외침을 다시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원수를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악한 의지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피조물의 원수에게도 저항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원수의 엄청난 사악함을 폭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도문은 이 심오한 내용(De Profundis)으로 끝맺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정 우리를 이런 시험에 빠뜨리시지 않는다. 아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그리 하시지 않는다. 당신의 아들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당신이 어찌 그리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두 얼굴을 지니시지 않는다. 큰 시험을 대하시는 당신의 태도는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 악에 대항하시는 당신의 저항은 분명하고 확고하다. 창조의 첫날부터, "빛이 있어라!"고 당신이 말씀하신 이후로 바로 그렇다. 우리의 아버지, 당신은 악과 상종하시지 않으며, 악과 전혀 타협하시지 않는다. 당신은 결코 악을 참으시지 않는다. 무의 위협은 결코 당신으로부터 나오는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결코 악을 좌시하거나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해방자 하나님이 아니신가? 오직 한 분만이 결정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데, 바로 당신이 그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위대한 해방자이심을 안다. 당신은 악, 보좌 찬탈자에게 친히 맞서셨다. 악은 당신의 창조와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그의 통치는 폐기되어야 한다. 당신은 마귀의 이 통치를 깨뜨리기 위해 앞장을 서셨다. 당신은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로부터 떨어지게 하셨다. 우리는 사탄이 떨어진 것을 보았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의 부활 가운데서 어둠을 물리치셨다. 당신은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 당신의 승리를 알려 주셨다. 당신은 악마의 저주로부터 이미 우리를 구하셨다.


만약 주기도문의 이 마지막 기원이 없었더라면, 만약 우리의 기도보다 앞선 응답이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싸움에 무력하고 이미 심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악의 권세 아래 떨어졌을 것이다. 당신은 우리를 멸망시키려던 자를 멸망시키셨다.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 사랑은 우리를 끝내 구원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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