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구약 성경에 나타난 복의 개념
-신약에 나타난 복의 개념-
글쓴이: 김민호 목사
신약에서 말하는 복관(福觀)은 구약의 복관과 그 일관성에서 어떤 흐트러짐도 없다.
굳이 신약과 구약의 차이라고 한다면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 또는 예표라는 정도이다.
구약에서는 민족적 이스라엘이 선민이지만, 신약에서는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는 교회가 바로 선민이다(롬9:6-8).
아브라함은 비록 육적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지만, 영적으로는 믿음의 조상(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의 조상)으로 선언된다.
이렇게 해서 구약과 신약은 오묘한 지속성과 단절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구약의 복관(福觀)이 신약의 복관(福觀)과 어떻게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구약의 족장 언약은 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특정한 사람과 민족을 선택하시고 복을 주신 것이라고 했다.
즉 특정한 대상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그가 복(복의 근원)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이란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앞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이러한 구약의 메시지는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이해되어진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풍요와 병고침, 성공과 행복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이런 것들은 오로지 복의 결과로만 여겨진다).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재산과 명예와 행복을 잃는 것이 복이라고 언급한다(마5:101-11).
그렇다. 신약의 복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이해 된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는 복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의 모임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이렇게 복을 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복 받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빛, 소금, 의의 병기, 진리의 기둥과 터로 살아가도록 요구된다.
바울 사도 자신도 로마서 1장 14절을 보면 자신의 구원(복/은혜)를 받은 것은
이방인과 헬라인의 구원(복)을 위해 빚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디도서 2장 14절의 말씀은 이런 사실은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
신약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구약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이 땅에 또 다시 노아의 대홍수나 바벨탑 사건이나, 소돔과 고모라
사건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타락하면 창세기의 3대 재앙은 그대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 재앙의 원인은 세상의 악함 때문이라기 보다는 복이 되어야 할 교회가 복의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전도는 단순히 지옥 백성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한 숫자놀음이 아니다.
전도는 교회가 세상에 복의 역할을 하는 실제적인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도를 통해서 불신자들이 복을 받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세상은 더 많은 복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복(하나님)을 받은 사람은 구약의 백성들처럼 성결과 거룩을 추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거룩과 성결만이 복으로 가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는 방식으로 이전과는 다른 삶, 즉 복의 근원된 삶의 여부(열매)로 묻는다(눅6:44).
그렇다면 이제 구약의 진멸 전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생각해보자.
구약의 진멸전쟁은 신약에서 거짓과 악한 영과 죄악과 육체의 소욕과의 싸우는 영적 전쟁을 바라보게 하는 그림자다.
이 구약의 그림자는 신약의 성도가 어떻게 세상에서 복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거짓과 싸우고, 죄악과 싸우고, 육체의 욕망과 싸움을 통해서만이 복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와 불법과 악한 영들과 싸우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고아원을 운영하고, 사회 사업을 많이 한다고 해도 참된 교회일 수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만이 세상에 유일하게 복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죄와 싸우는 공동체라는 점이다.
교회만이 죄와 싸울 수 있다.
교회만이 원수된 세상과 복의 근원된 하나님을 연결시켜 줄 수 있다.
교회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알고 지켜낼 수 있다.
신약의 교회는 이렇게 함으로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구약에 나타난 복의 이해-
글쓴이: 김민호 목사
[성경]구약에 나타난 복관(福觀)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인간 타락의 문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핵심적인 전제다.
왜 우리는 ‘복’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 타락의 문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인류로 하여금 복을 반드시 추구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태초의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창1:27).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과 하나의 유기적 연대를 이룬 관계를 말한다.
이 상태가 복으로 가득한 상태이다. 고로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상태로서의 인간에게 아쉬울 것은 전혀 없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낙원을 경작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에덴(기쁨)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타락 이전의 인류는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피조물들을 보존하고 돌보는 일을 했다.
타락 이전의 인류의 삶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을 양산하고 복의 원천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뱀(사탄)의 유혹을 받고 타락함으로써 인류에게 비극이 찾아왔다. 아니 인류에게만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 전체에 비극이 찾아온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기쁨의 동산, 에덴으로부터 추방되었고 온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도록 저주를 받고 말았던 것이다.
복을 양산하고 복의 원천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의 타락은 피조세계 전체를 저주로 가득하게 만든 것이다.
창세기는 이렇게 인류의 타락을 다룬 후에 심각한 몇 가지 사건을 소개한다.
우리는 창세기의 심각한 몇 가지 사건을 다루기 전에 타락한 공동체의 등장을 먼저 관찰해야 한다.
타락한 인류는 이제 더 이상 복의 원천으로 살아가는 일(경작)을 멈춘다.
타락한 인류는 스스로의 힘으로 복을 추구하고, 자기의 복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공동체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을 일명 가인 공동체라고 한다.
창세기 4장은 이 타락한 공동체(가인 공동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해 준다.
그들은 성을 쌓고는 공동체로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 없는 안전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보여준다.
또 짐승을 자기 울타리에 가두어서 피조물들을 재산 축적의 도구로 삼게 되었다.
이는 타락 이전의 인류가 모든 피조물들을 축적해야 할 재산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돌봐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그 밖에도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 없는 즐거움을 위해서 악기를 만들고, 연장과 무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가 스스로 복을 추구하려 했던 노력은 결코 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도리어 노아의 대 홍수사건과 바벨탑 사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사건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것이 인류 타락을 통해 나타난 3대 재앙이다. 이 3대 재앙은 복을 상실한 인류가 스스로 복을 추구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입증한다.
복의 원천(源泉)의 삶이 아닌 이기적인 복을 위해 몸부림치는 인류는 점점 잔인해지고, 불행해지며, 혼란스러워 질뿐이었다. 모든 것이 파괴될 뿐이었다.
창세기 6장 5절의 말씀은 이러한 인류의 상태를 한 구절로 잘 말해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것이 타락한 인류의 자화상이었다.
이러한 비극적 인류 심판 사건을 배경으로 하면서 하나님은 은밀하면서도 놀라운 계획을 시작하셨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의 ‘족장언약’의 출현이다. 창세기의 족장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한다.
이 족장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복’을 약속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이 족장에게 먼저 찾아오시고 복을 약속하셨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모습은 타 종교나 무속신앙과는 근본적인 구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약속은 선택과 은혜의 교리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가인 공동체가 스스로(인위적으로) 복을 추구하려 했던 모습과도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이 복의 약속은 신약의 ‘복음’의 그림자가 된다.
우리가 족장언약을 살펴보기 전에 무엇보다도 최초의 족장이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사건을 먼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주신 ‘복’을 이해하는데 열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1장 후반부에 최초로 등장한다.
창세기 11장이라고 한다면 노아의 대홍수 사건 후에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경건에 힘쓰기보다는
도리어 스스로의 힘으로 심판을 피하기 위해 바벨탑을 만들다가 언어의 혼돈을 맞이하게 됐던 사건 직후이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이런 배경을 등에 업고 있다.
이런 배경 속에 부름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독특한 선언을 듣게 된다.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는 것이다.
이 간단한 선언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택의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온 세상의 저주와 불행과 고통의 근원이 된 인류와는 대조적으로 온 세상의 ‘복(福)’ 또는 ‘복의 원천(源泉)’이 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타락 이전의 인류에게 요구하셨던 삶의 성격을 다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던 옛 아담의 삶을 다시 시작하라고 명령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이런 놀라운 언약은 이 후에 나타나게 될 복의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해 준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은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타인에게 ‘복의 원천(源泉)’이 되도록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저주로 말미암아 온 땅에 가사와 엉겅퀴로 가득한 세상이 그(그와 그의 후손들)를 통해서 다시 에덴처럼 회복되길 기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성격이다.
아브라함에게 ‘복’이 되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은 창세기의 세 족장에게 공통된 언약을 주신다. 그 언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 된다.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복을 주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여기서 족장들이 받은 복은 두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목적으로서 선택은 특정한 대상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복의 내용과 기능으로서 복을 받은 사람은 이제 ‘복의 원천’으로 살도록 ‘새로운 기능’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복에 대한 약속은 결국 하나님의 선택의 의도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기위해 기능(Function)을 바꾸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민들이 받은 ‘복’이다.
이런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과 짝을 이룬다.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과 복을 주심에 대하여 “새로운 창조(new creature)”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단순히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나누는 행위 이전에 ‘새로운 경작자’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타락한 인류는 모든 피조물들을 파괴하고 서로를 죽이고 저주를 몰고 왔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필두로 하여 하나님께서 두 족장과 맺은 언약은 복과 에덴의 회복(하나님 나라 건설)을 몰고 오는 새로운 인류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세 심판사건, 즉 노아의 대홍수 사건과 바벨탑 사건,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염두에 둔 하나님의 행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족장 언약에서 복 받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수단이요, 기능의 변화다.
창세기의 족장들은 복의 대상이 되기 위해 선택받은 것이 아니다.
저주로 가득한 세상에 복의 ‘원천’, 또는 복을 양산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선택받고 복을 받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율법을 생각해 본다면 이해가 쉬워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율법은 언약 백성의 의무로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지키면 구원을 얻고, 거역하면 하나님의 심판(저주)을 받는다는 두 가지 원리로 이해된다.
그러나 근원적인 차원으로 볼 때 율법은 저주 받은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족장이 받은 언약의 계승자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신 것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출애굽 한 후에 받았다는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율법의 기능이 무엇이라는 것인가?
율법은 모든 족속에게 복(복의 원천)으로 살도록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복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원리라는 말이다.
계명대로 사는 것이 복의 원천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계명을 어기면 어디를 가든지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저주의 원천으로 살게 된다.
이 원리는 크게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분된다. 그래서 율법을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한다.
사랑의 이중 계명은 이 땅에서 복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성도의 대전제이다.
즉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대신 계명 對神 誡命)만이 이웃에게 참으로 복(대인 계명 對人 誡命)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양대 계명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對神 誡命)에 둘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복의 원천으로 인증(認證)되지 않은 사람이 이웃에게 복의 원천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방식대로 이웃에게 사랑을 하려는 행위는 결코 올바른 사랑(올바른 복)이 불가능하다.
이런 행위는 결국 이웃을 파괴하는 왜곡된 사랑으로 가게 될 뿐이다.
오늘날 나타나는 휴머니즘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휴머니즘은 어찌하든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음으로 심각한 인간성 파괴와 환경오염, 모든 질서의 붕괴로 나타난다.
그러면 이제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표면적으로 볼 때,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나안 땅이 복이 아니다.
‘하나님 자체’가 ‘복’이다.
인류 타락이 궁극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던 삶을 잃게 된 것이다.
거기서 인류의 저주와 죽음과 불행이 시작됐다.
에덴동산이 기쁨의 동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풍요로울지라도 관계가 깨지면 그 가정이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간혹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기업(유산)이라고 언급된 것으로 인해 이해의 어려움을 겪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기업(유산)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영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로 이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나안 땅은 기업이 되기도 한다.
가나안 땅보다는 하나님 자체가 ‘복’이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과 관계가 깨지면 참혹한 기근과 전쟁과 재앙이 가득한 곳이 된다.
급기야는 그 땅에서 토해지기까지 한다.
비록 가나안 땅에 있더라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면 그 땅은 복이 없다.
저주와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할 뿐이다.
왜 그런가? 가나안 땅 자체가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이기 때문이다.
고로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결국 물질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아니다.
영적인 것이다. 가나안 땅은 단지 하나님 자체를 ‘복’으로 삼는 자에게만 복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의 땅, 저주의 땅, 전쟁과 고통이 가득한 참혹한 땅이 되고 만다.
이제 구약의 지혜서를 보자. 구약의 대표적인 지혜서는 잠언이다.
잠언에서 하나님은 ‘지혜’로 묘사된다. 잠언은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 복이요, 생명나무라고 표현했다(잠3:13; 3:18 4:7).
이것은 하나님을 소유함으로 주어지는 결과와 일치한다.
물론 성경에서 재물과 건강과 성공과 전쟁의 승리, 그리고 행복을 복이라고 말하는 부분도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은 하나님을 소유한 것으로 파생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하나님을 떠난 물리적인 풍요와 안락함은 저주요, 하나님의 유기로 간주된다(잠30:7-9).
그러면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선민이 어떻게 세상에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임마누엘 עמנואל’이라 한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선민이 타락과 저주와 재앙으로 가득한 세상에 ‘복’이 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도래)를 이루는 방식이다.
하나님이 바로 원래(Original) ‘복’이시므로 하나님이 임재하셔야 복이 되고, 복의 근원으로 살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임마누엘)’는 말은 다른 말로 ‘복’과 함께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복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복 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가인 공동체가 잘 보여준다.
임마누엘 없는 복에 대한 추구는 결국 3대 재앙을 양산할 뿐 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주의 명령(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가 복된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류가 타락한 후엔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데 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해도 주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에 빠질 때가 다반사다.
죄에 빠지면 임마누엘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임마누엘을 지속하시기 위해 ‘성막’을 건조하도록 하셨다(후에 솔로몬 시대에 성막은 성전이 된다).
성막, 또는 성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 가운데 계속적으로 함께 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다.
고로 성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제사를 통해서 죄를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의 함께 하심(임마누엘)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선민들은 복 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 살 수 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가 복을 받도록 하시는(임마누엘) 방식이면서, 동시에 복의 근원된 삶이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이런 차원에서 성전과 성전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예수’라는 이름은 저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은 신약의 성도들이 더 이상 ‘제사’라는 제도 없이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이 부분은 신약에 나타난 복의 이해에서 더 다루게 된다).
그러나 성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도 자주 복으로 살아가지 못했다.
그 원인은 최초의 인류가 타락하게 된 원리와 같다. 즉 죄와 위선된 성전 제사 때문이었다.
그들이 복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더 이상 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현상은 종종 가나안 땅에서 전쟁의 패배와 극심한 궁핍,
그리고 평화(샬롬)의 붕괴로 나타났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복이 아니라 재앙의 대상이 되고, 이웃 나라의 침략과 노략거리가 되었다.
그 원인은 분명했다. 그들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이상 복으로 살아가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타락한 인류처럼 이기적인 복만을 위해서 살게 됨으로써 그들에겐 더 이상 복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복의 역할도 기대할 수 없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졌다고 지적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복의 근원이길 포기하고 가인 공동체처럼
자기의 이기적인 복만을 추구하는데 열심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복을 이 정도 언급하게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흔히 나오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가나안 전쟁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은 분명히 만민들에게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창세기의 세 족장들의 언약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끔찍한 전쟁을 수행하라고 명령하셨다.
그것도 그냥 전쟁이 아니다. ‘헤렘 전쟁’을 명령하셨다. ‘헤렘 전쟁’이 무엇인가? 진멸전쟁이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하찮아 보이는 짐승들까지도 남김없이 다 죽이는 전쟁이다.
씨를 말리는 전쟁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런 끔찍하고 잔인한 전쟁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일삼도록 하셨는가.
이것이 어찌하여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신약에 나타난 복의 개념을 살펴보게 될 때 비로소 쉽게 풀릴 것이다.
(받은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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