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福)의 개념


 우리 나라에 불교가 사상을 지배하고 유교가 들어와 600년동안 사상적 지배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1970-80년대 급성장을 통해서 왔지만 유교, 불교 이전에는 샤마니즘이 지배하고 샤마니즘의 사상이 강함으로 샤마니즘과 불교와의 혼합을 가져왔다. 순수한 불교가 사라졌고 유교가 들어옴으로 대중적으로 들어왔으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대중은 샤마니즘적 유교가 되었다. 현대는 물질주의, 실용주의, 군사문좌등이 기독교에 흘러들어왔다. 모세의 400년동안의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은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40일 금식의 그림자가 직접 나타나 하나님과의 사람의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40일 금식도 불교적인 색채가 있다. 우리 나라의 사상에서는 샤마니즘적인 색체가 가장 무섭게 작용한다.


1. 기독교 복의 변질


 우리 나라의 교회의 복은 사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크게 외도한 것이 지금의 ‘기복(祈福) 신앙(信仰)’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과거 기독교의 부흥 시기인 60년대에서 70년대,그리고80년대에 이르는 부흥회를 통해 오도 되었다. 보릿고개를 넘는 그리고 70년대의 박정희 정권으로 인하여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국민의 의식은 ?잘살아 보겠다?는 의식이 었다. 이에 보조를 맞추어 신앙의 불은 뜨겁게 일어났다. 없이 살고, 힘이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가 되었고 ?하나님의 복?은 우리들의 삶과 신앙에 큰 매개채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샤마니즘)과 결부되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빌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적인신앙으로 변질되어서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구한말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한 헐버트 선교사가 <대한제국멸망사>라는 책에서 한국인의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고, 고난을 당랄 때에는 영혼 숭배자, 즉 미신적이 된다. 따라서 어는 한국인의 종교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가 고난에 빠졌을 때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살펴보면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 신앙인들의 현주소가 아니겠는가?



2. 우리 말의 福과 祝福은 다르다.


 우리나라는 한자 문화에서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성경이 번역될 때 번역자들은 복福,과 축복祝福을 잘 구분하여 썼다. 복이란 단어를 우리나라 처럼 구별하여 쓰지 않는 영어나 다른 구분 없는 나라의 언어권의 단어는 상관이 없으나 우리나라의 단어는 다르다. 복(福)은 복복자이다. 그리고 축복(祝福)의 축(祝)자는 빌축자이다. 즉, 누구에게 복을 빌어서 복을 주는 대상이 복을 줄때 사용하는 것이다. 우라나라 개역성경은 한군데에서도 이렇한 것을 바꾸워 쓰지 않았다. 예를들어 민수기 6장 22절~27절에 나오는 아론의 축도에서 그 한 예를 잘 보여준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하여 이렇게 축복(祝福)하여 이르되 ....... 그들을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福)을 주리라. 



3. 인간은 누구나 복을 받는 존재이다(창 1:28 ; 2:3)

 하나님은 창조의 때부터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셨고 또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복을 받고 살아야 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福)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느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4.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1) 일반은총 -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은혜.

  (1) 누구에게나 주신다(마 5:45).

  (2) 어떤 사람에게도 주신다(전 5:19).

  (3) 기도만 열심히 하는 자를 하나님은 부하게 하시지 않는다(잠10:4 ; 28:20 잠 28:9)

 2) 특별은총 -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확신하고 체험한 사람들은 특별은총을 받은 시람들이다.



5. 성경은 의인도 고난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1) 하박국의 부르짖음(합 1:1)

 2) 예레미아의 부르짖음(렘 12:1) 3) 욥   4) 요셉 5) 다윗 6) 바울(고후 11:22~28) 7) 12제자 8) 예수님



6. 선진들의 복


1) 아브라함의 복

 (1)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갈 3:6~7 ; 창 15:6 특별은총).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진정한 믿음이 있는지 보고 인정하신 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창15:6)로 여기신 사건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이제 하나님께까지 인정받는 놀라운 복의 근원으로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받았다.


 2) 욥의 축복

 욥은 사단의 시험 뒤에 자녀들을 다시 얻고 재물을 다시 얻는 복을 누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되었으며 또한 자신의 신앙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됐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는 고백을 통해 듣는 신앙에서 이제는 눈으로 보는 신앙의 발전이 있게 되었다.



7. 예수님의 복(마 6:1-10)


 1) 예수님의 팔복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긍휼히 여기는는 복이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자는 복이 있다. :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당하리라?


 2) 예수님을 아는자(마 16:13~17)

 첫째,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안 자에게는 평안이 있다(요 10:27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셋째, 예수님을 아는 자의 복은 죄사함의 축복이다(롬 8:1)

 넷째, 예수님을 아는 자의 축복은 능력있는 삶을 사는 데 있다.

 3)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요 13:12~17 ; 눅 11:28 ; 신 28장 ; 계 1:3)

 4)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요 20:29).

 5) 주는 자가 복이 있다(행 20:35 ; 잠 11:24~25)

 6) 악한 길에 서지 않는 것이다.(시 1편)



8. 징계를 주시는 목적


 1) 히 12:10~11

 2) 주는 성실하시기 때문(변치 않으신다) 시 119:75

 3) 고난은 변장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시 34:19은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 했다.

 4) 시119:71

 5) 욥 23:10



-구약에서의 복의 개념-


성경은 모두 복에 대한 말이 402번이나 나온다. 그 중에서 복이란 말은 구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


1.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복


창세기 1:22절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고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동물에게도 복을 주었다. 복음 피조계인 모든 것에 하나님은 복을 주셨다. 28절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창조게에 있어서 복을 주시면서 창세기를 열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하나님은 또한 피조계의 생육과 번성을 위해 복을 주셨다(창1:22,28).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계는 비록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았으나(창3:17,18) 회복이 약속되었고(롬 8:18-23),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생육과 번성을 위한 하나님의 원레 의도는 깨어지지 않았다(창 9:1).


2. 족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복을 받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창세기 12:1-5절에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복이 될 것이다’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벌써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Von Rad는 ‘족장시대에는 이 복이 red line처럼 따라간다’고 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복이 24:1절에서는 범사(everything 물질의 복)에 복을 주셨다고 한다. 35절(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에는 ‘창성케’, ‘그 외에 더’(국역 빠짐), 자녀, 물질의 복을 주셨고 31절(라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복을 받은 자여 들으소서 어찌 밖에 섰나이까 내가 방과 약대의 처소를 예비하였나이다)은 당대에 물질적 복을 말하고 있다. 당대의 복의 중보자가 된다(아브라함 18:18 -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天下萬民)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 아브라함은 또한 소돔과 고모라의 중보자가 된다. 17:16절에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내인 사라가 열국(列國)의 어미가 되어서 결국은 그의 자녀에게서  ‘열왕(列王)’을 아브라함에게 준다는 복을 주신다.


이삭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창25장과 26장 12절의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고 .... 마침내 거부가 되니라”는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복을 끼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은 복의 주체와 수헤자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말씀하고 있다. 민수기 6장 22-27절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祝福)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福)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恩惠)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행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나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祝福)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福)을 주리라”


이 말씀에서 보듯이 사람이 사람에 복주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의 장자권 싸움은 고고학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고고학을 보면 아버지의 유언을 담은 돌판이 많이 발견된다. 나은 순서에 의해서 장자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자권이 간다. 돌판을 가지고 법정에 가면 바로 인정되는 것이다. 야곱은 이것처럼 장자권을 약삭빠르게 쟁취한 것이다. 야곱의 장자권을 태중에 미리 25: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먼저 나온 에서에게 장자권의 축복이 아니라 차자인 야곱에게 축복권이 돌아갈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는데 아버지 이삭은 그의 말연에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서에게로 가지 않게 그의 섭리속에서 역사하신다. 야곱이 머리굴리지 않아도 하나님이 장자권을 주는데 이삭은 그것을 몰랐다. 창세기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복을 주실 때 족장 개인에게 복을 주신다.


3. 언약에서의 하나님의 복


언약에서의 복은 신명기에서 주로 다룬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셨다. 복과 저주가 같이 나타나는 것이 신명기의 특징이다. 족장에게서는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나타나 복을 주셨다. 신명기서에서는 조건적으로 복을 주신다. 순종과 불순종의 조건이 부여된다.


신 11:26-28절에서 보듯이 언약에서는 ‘복과 저주’가 함께 나온다.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볼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쫓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그리고 나서 이 복과 저주의 말씀을 보증하기 위해서 모세는 29절-32절에서 증거물을 세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이 두 산은 요단강 저편 곧 해 지는 편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으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얻으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할지라 내가 오늘날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복과 저주”는 신28장에서 분명하게 나오는데 “네게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게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화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언약에서의 축복과 저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도는 저주가 목적이 아니라 축복이 목적이다. 그러서 복을 받으며 순종하며 살아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라는 것이다.

신명기 28절의 말씀을 정리하면 3절 복의 영역, 4절은 복의 내용, 6절은 매일매일의 삶 전체 복, 풍성한 축복.을 의미한다.


4. 지혜서에서의 하나님의 복


하나님은 찬양할 때 복을 사용해서 찬양, 시1편. 언약에서의 복과 같이 조건적이다. 언약에서는 나라 전체며 ‘너희’의 복수로 나타난다. 지혜서는 단수로 개인적 복에 대해 사용하였다. 복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교육적이기 때문이다. 교육적이다보니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도 이야기 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로 된 만큼 인간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는 것이다.  잠 3:33이 전형적예이다.“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조건적인 복을 보여주며 구체적 언급이되지 않는다. 그리고 복수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말한다. 구체적이지 않은 대표적인 말씀이 시편 1편이다.


5. 예언서에서의 하나님의 복


에언서에서는 복의 개체가 개인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나라 전체로 나타난다. 그리고 복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나타난다. 에스겔 34: 26,7절은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간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그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所産)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편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엣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물질적인 복, 23-24절은 먹이게(물질적) 23(내 종 다스림) → 25 화평의 언약 → 30 내 백성,하나님은 그들의 것, → 31,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 서로 소유관계. 사 65:23 하나님의 복된 자가 누구인가? 17 새 하늘과 새 땅, 20 장수, 23-25 풍유의 복 ⇒ 완벽한 조화된 평화의 복, ⇒복음 안에서 재해석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이방일들과 함께 받는다. 사 19:24-25은 “그날에 이스라엘이 (복음 먼저 이스라엘에게 나타남) 애굽과 앗수르(이방에게 가라), 사 43:4 ”나의 신을(성령)네 자손에게 내 복을 네 후손에게“ 복과 신을 동격으로 말한다.


6. 그 외의 복에 대한 언급들


결국은 복은 인간과 하나님의 Relationship이 되는 것이다. → 왕을 통하여 → 모든 민족에게 이루어진다.

삼하 6:11 →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복이 임한다.

시 132

시 133 복 - 영생

시 72:17, ‘열방들’ 그로(왕 결국 예수 그리스도) 인하여 복을 받는다.

시 45:4 ‘진리’-의=공의 왕을 의로 위하여 전망

시 21:3 생명-영원한 장수 영원히 산다.

      5: 왕권의 대리 통치(존귀와 위엄을 임함)

요5:39-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복은 재해석 되어야 한다. 신약에서는 구약에 비해 복이란 말이 매우 적게 나온다. 우리말 성경에서 신약을 볼 때 주의해야 할 때 복(ף??)이란 말이 헬라어로 ‘μακαριος’와 ‘υροϒεα’로 쓰여짐에 따라 쓰임이 달리 번역되었음을 주의 해야한다. 팔복에서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할 때 복은 ‘μακαριος’로서 행복을 의미한다.



바울 신학의 복 개념의 연구


1.갈3:6-14에서의 하나님의 복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에 있어서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아라’로 번역해야 옳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아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정한바(계산했다, 여겼다) 되었다”. 믿음과 의는 전혀다른 질이다. 믿음을 가지고 가면 의로 여겨준다는 법칙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로 여길 수 없는데 하나님의 절대은혜로 그런 법칙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7절 ‘그런즉’은 6절의 논리 해석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여기서 바울은 지금 누가 아브라함의 아들인가가 당시 주제이기 때문에 바울은 빗대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8절은 6절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라는 말이다. 이 구절은 창세기 12:3절의 말씀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복음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것을 말한다. 15:6=12:3은 같은 말이다. 결국 의가 복이다. 복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가 된다.


9절에 ‘그러므로’라는 말은 위의 말이 확장됨을 말하고 있다.

10절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을 말하고 있다. 고난자체가 저주가 아니다. 신명기 28장의 저주를 우리가 다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저주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저주를 받지 않게 된 것이다.


12절은 율법을 지키려한 것이 저주가 되었고 다 지키지 못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법 자체는 선하나 내가 지킬 능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13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으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셨다.

14절은 성령의 약속을 하셨다. 성령을 받는 다는 말은 아브라함에게 속한 복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2. 롬15:29에서의 하나님의 복


로마서의 저작 동기는 1960~70년대에는 이신칭의(二身稱義)라고 보았다. 그런데 왜? 그런이야기를 했는가? 그것은 초대교회 시대인들은 복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바울 로마서를 섰는가에 대해서 최근 학자들은 공동체(행 18:2)에서 글라오디오가 모든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에서 쫏아냈다. 로마 그리스도인 중에는 로마인, 이방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유대 그리스도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글라오디오가 유대 기독교인들을 쫏나냄으로서 이방 그리스도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유대 그리스도인이 돌아오게 될 때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 그리스도인이 싸움을 하게 되었다. 바울에게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쓰게 되었다. 


29절은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로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그리스도의 충만 fullness’는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사람이 절대로 충만시킬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충만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음은 즉 복음 선포는 복음 선포를 통하여 부족함이 없게 만드는 복이다. 그리스도의 부족함 없는 상타로 만드는 것이 복음 선포이다.


롬1:11-15는 신령한 은사-일반은사(그리스도인을 견고케 하게 하려고)를 준다고 한다. 복음은 15절 또 전하는 것은 영적 성숙을 가져다 주고 또 서로싸우는 로마 그리스도인에게 견고케 하려고 하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주어 견고케 하려고 했다. 로마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알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들은 알기는 알되 행하지 못한 것이다.


롬1장과 15장은 서론과 결론이다. 롬16:25-26은 복음으로 견고케 되는 것이다. 롬15:14-15는 법안에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직 복음안에서의 능력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엡1:3-14에서의 하나님의 복


‘찬송하라’라는 말로 에베소서는 되어있다. 현대신학자들은(WBC주석자) 에베소서의 구조를 3 < 4 < 5,6 < 7,8 < 9,10 < 11,12 < 13,14절의 증강되는 구조라고 보고 있다. 신령한 복(영적인 복)은 하늘에 속하였다. 즉 따에 있는 복을 초월한다. 영적인 복(spiritual blessing)은 갈라디아서의 성취의 의미이다. 엡1:3절 spiritual blessing는 영적인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늘-구원적 복 < F.F Bruce는 에베소서 1장에서 예정을 연구할 부분이 아니라 믿어야 될 감사시중에서 나오기 때문에 예정을 운운하면 곤란하다고 했다. 인간의 존재는 역사 추론이 아니라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택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리드도 안에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전적 은혜이다.


왜? 우리를 사랑 안에서 그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주님의 목표) < 5,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Relationship이 되었다는 것이다.(구약과 연결되어) 그의(J,X)안에서 거져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 < 7,8절은 그의 피로 죄 속함을 받음(구속). 은혜로 (내가 예수님을 죽였지만 오히려 죄사해 주신 것은 은혜이고 바울이 말하는 복이다). 예수님께 속한 지혜=십자가→세상 사람들들은 미련하게 본다. 그러나 그것이 능력이고 지혜이다. 통일→화합→우리가 통일되기를 복을 통해 이루어지길 하나님은 소망하고 계신다. < 11,12절은 우리의 기업 → 내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 < 13,14절 성령 자체가 나에게 보증이 되신다. 성령이 오셔서 나를 인찍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의 안에 들어와 성령 자체가 나를 보증하신다. 보증한단 이야기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나(Already) 아직(Not yet)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갈라디아서는 Relationship의 성취를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는 Relationship성취를 확대해서 창조전부터 예정 → 미래까지 이어지고 하나님의 가족, 하나니므이 소유물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구속 풍요성이 자꾸 없어지니까 돈이나 물질이나 다른 무엇인가를 찾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구속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을 주시고 하나니믜 아들로서의 하나님과의 Relationship이 이루어진 것 이것이 가장 큰 복이다.



-  복과 고난의 의미


 성도들에게 찾아오는 고난으로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고는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성도들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안락함을 좋아하고 자신의 삶에 있어서 고난이 오는 것을 두려워 한다. 이럴때는 더욱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저주가 아닌가 한다. 그러면 바른 성경관에서의 복과 고난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주제를 알면 바른 신앙의 도움이 된다. 고난은 우리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복의 근원이었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도 고난은 찾아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라고 하신다. 이러한 시험은 아브라함의 삶에 있어서 위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도 자기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되는 말씀이 들려오는 것은 인간인 이상 아품의 말씀인 것이다. 야곱의 경우에도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키며 ...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고 약속을 해 주셨다.


그러나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이나 삼촌의 속임수로 고생하며 살아야 했다(창31). 그는 나중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얍복 강변에서 하나님의 복을 다시 받았으면서도(창 32:29) 그의 딸 디니가 세겜 땅에서 강간을 당하였다(창 34:1,2). 욥도 마찬가지고 그는 동방의 의인이고 하나님이 인정한 자임에도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자녀의 죽음과 재산의 사라짐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욥1장). 그리고 다니엘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으나 간신들에 의해서 사자굴에 던져져야 하는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단6장). 그리고 엘이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 위해서 아합에게로 가서 기근에 대해서 선포하였으나 그는 그릿 시냇가로 피하고 결국은 사르밧 과부에게로 까지 피하게 되었다(왕상 17장). 말씀을 선포하다가 예레미야는 진흙에 던져지기도하고 뺨을 맞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7:11,12)고 말씀하셨다. 결국 예수님께서도 신앙인들에게 고난은 찾아온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고난은 구약의성도들에게만 있던 것은 아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고난은 찾아온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 죄를 위해서 대속하셔야 할 분으로 생각하면 고난의 이미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으로 오신분으로 아픔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채찍에 맞으셔야 했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가시관을 쓰셔서 머리에 찔려오는 아픔을 경험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아픔을 겪고, 죽음의 아픔을 겪으셔야만 했다(마27장, 막15장,눅23장,19장). 그리고 다음에는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한 성경구절들이다.


"그가 내 이름을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6)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벧전4:1)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3)

고난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방법이다. 성겨은 단순히 범사가 잘되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에 찾아오는 이러한 고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고난은 왜? 오는가를 보아야 한다.



- 환난 속에서의 복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로하시고 도와주시고 후대해 주신다(시13:6). 그러나 무사태평한 데서 우리들을 돕고 위로하고 선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시편에서도 "고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다"(시4:1)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하나님이 환난 자체를 반드시 없애 준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우리들이 환나과 상관이 없는, 환난 밖의 어떤 복들만 누린다면 환난 중에서 나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환난이나 고난 자체가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고난을 자청해서 받을 필요는 없다. 성경은 그릇된 행실로 빚어지는 고난은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 4:15)

성경은 이러한 복과 고난의 밀착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심지어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라고까지 말한다(벧전 4: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고난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당신의 위로와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정하신 하나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체험케 하는 복을 주시는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  고난의 복


고난은 복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성경에서 말하는 귀중한 진리일 것이다. 원초적으로 인간은 고난을 싫어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고난을 통해서 복이 임함을 말하고 있다. 고난의 긍정적인 복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고난은 예수님의 생애에 비추어 볼 때 성도에게 복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고난은 예수님이 먼저 가시고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한 것이므로(벧전 2:21) 주님의 고난에 동참라는 특권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성경의 이상스런 역설(逆說)은 우리가 웃을 때보다도 어려움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은 주님의 십자가를 경험하게 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사실을 깊이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성도로서 받는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이므로 복된 것이다(벧전 2:23). 고난은 우리의 성품을 연마하게 된다. 역사에 있어서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성경의 신앙의 선배들로 모두 고난을 통해서 아름다운 성품을 만들어간 위대함을 볼 수 있다.


셋째, 성도들은 인간의 이기심과 죄에 대하여 도전하기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요 15:19).

또한 자신의 죄를 위해서도 "피 흘리기까지"(히12:4) 싸워야 하는 고통스러운 투쟁이 있다. 이 같은 고난은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믿의 표시이다.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틈이라"(마5:11,12)

"오직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넷째,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성행의결과로 받게 될 때에 복이 된다.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시38:20)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벧전 4:19)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6)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4:1)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 4: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 4:1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12)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 고난의 복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1:7-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 12:6)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11)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