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일까요?


이 질문은 신학에서의 여러 가지 질문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가치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공부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 그분"에 대한 공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공부는 어떻게 보면 우리들에게 가장 행복을 가져다주는 공부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하나님을 명상하는데 있다." 프레데릭 페버(Frederick Faber)도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었다. "단지 앉아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숨쉬는 것, 이보다 더 귀한 축복은 세상에 없네..."

그래서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하나님 그분"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러한 반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신앙인이란 이미 하나님을 발견한 자들인데 또 하나님을 찾고 추구한다는 말은 모순이 아닌가?" 그러나 토저가 말한대로 하나님을 발견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영혼의 사랑의 패러독스입니다. 이것은 너무 쉽게 만족하는 종교가들이 무시하는 것이지만, 불타는 마음을 가진 신앙인들의 행복한 경험은 이것을 무시할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시인 버나드 경도 그의 시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거룩한 경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맛보았습니다. 오! 당신! 살아 계신 음식이여!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당신으로 잔치하기를 갈망하나이다. 우리는 당신을 들이켰습니다. 유일한 생수의 근원이시여, 우리 영혼은 당신으로 채워지려고 갈증이 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추구가 지나쳐 주변의 일생 생활과 건전한 인간관계를 무시하고 항상 이러한 모습 하에 살아간다면 그것은 "신비주의자의 행태"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건전하고 바른 신앙심으로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하고 하나님을 더욱 추구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실체를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광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단의 방화범 스펄전 목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명상할 때면 우리의 정신을 대단히 확장시키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에 관한 주제는 너무나 광대해서 우리의 사고는 그 무한한 공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또한 그 주제는 너무 심오해서 우리의 오만함은 무한대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논쟁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룰 때 우리는 일종의 만족을 느끼며 "보라! 나는 현명하다"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이 놀라운 학문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으며 우리의 날카로운 눈은 그 높이에 미치지 못하기에 "나는 소용이 없어졌으며 이제 아는 것이 없다"라고 겸손하고 진지하게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주제는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는 반면 또한 우리의 마음을 확장시키는 일도 한다.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주제를 놓고 독실하게, 열심히, 끊이지 않게 연구하는 일에서만큼 우리 인간의 영혼을 성장시키고 지적인 능력을 확장시키는 것은 없다." 이 스펄전의 말을 요약해 본다면 하나님이란 광대한 주제 앞에서 인간은 낮아짐과 겸손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또한 동시에 높아짐과 성숙의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고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나마 윤곽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어느 정도 하나님에 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하는 거의 유일한 안내자요 교사입니다. 물론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타남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계시와 환상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타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자연과 개인적인 계시와 환상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거의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주의 구조에서 조물주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등불이 우리를 비춰주고 있지만 그것은 헛될 뿐이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에 대해 말씀하신 출애굽기 3장 13-14절 말씀입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물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스스로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 말은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족하시는 하나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 있는 하나님"은 어떤 인간 협력자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이 진리는 아마 많은 사람에게 어떠한 진리보다 받아들이기 힘든 진리인지도 모릅니다. 왜냐 하면 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세상을 통치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인간 협력자를 찾으시는 활기 있고 다정하고 연민을 품은 할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3장 22-24절은 하나님의 특권에 인간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조치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존하시고, 자족하시고, 영원히 계신 하나님의 영역에 침범할 수도 없고 침범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하나님과 관련한 구절들을 분석해서 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보편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절대적 속성, 상대적 속성, 도덕적 속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절대적 속성이란 내재적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이 속성은 피조물이나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서 생각될 수 있는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는 영원성, 광대성, 불변성, 완전성 등이 있습니다. 상대적 속성이란 활동적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이 속성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가지는 하나님의 성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는 편재성, 전능성, 전지성 등이 있습니다.

도덕적 속성이란 상대적 속성 중에 특별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가지는 성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는 거룩성, 사랑, 공의, 진실, 은혜 등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하나님의 속성들은 성경을 통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리들에게 친근하게 느껴지고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은 요한 일서4장 8절(7-12절)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하시기를 그치신다면 하나님이시기를 그치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 하면 성경은 구구절절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만 분명히 알고 있어도 신앙은 넉넉한 기초를 가진 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심령에 확실하고 바른 하나님 신관이 자리하기를 바랍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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