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말년과 죽음 (The Last Days and Death of Luther)


 
C. E. Stowe / 황갑수 역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가 30년 동안 수행한 엄청난 사역은 그의 강철 같은 체질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죽기 일 년 이상 전부터 두통과 안구 염증, 시력 상실과 부종 등의 고통스런 질환에 더하여, 극도로 예민한 신경쇠약과 우울에 시달리고 있었다. 루터의 적들은 날마다 그가 죽기를 바랐고, 급기야 1545년 초에는 그가 죽었다고 세상에 알리는 거짓 부고(訃告)가 네이플즈에서 인쇄되어 나돌기도 하였다. 기가 막힌 사실은, 그 ‘부고’ 속에 루터의 사망과 관련하여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이 허무맹랑한 출판물 속에는 루터가 폭식과 과음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교황을 저주하였고, 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그는 성찬을 받자마자 죽었는데, 성찬용 떡이 위장에서 역류하여 입 밖으로 튀어나온 통에 보는 사람들이 모두 기겁을 했다는 억지 주장도 담겨 있었다. 나아가 그가 매장되었을 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무서운 폭풍이 불어서 사람들은 마침내 - 루터에 대한 - 심판의 날이 온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밤에 폭풍이 더 거세졌으므로 다음 날 아침에는 그의 무덤이 빈 채로 발견되었는데, 무덤으로부터 유황이 타는 듯한 역겨운 냄새 때문에 주변에 다가갔던 모든 사람들에게 질병이 발생하였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가톨릭 교회로 나오게 되었다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거짓 내용이 그 부고를 알리는 출판물 안에는 적혀 있었다.
 
  헤세(Hesse)의 영주가 이 출판물을 루터에게 보냈고, 이를 받아본 루터는 크게 즐거워하면서 이 거짓 부고의 확장판을 이태리어와 독일어로 출판하였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메모가 첨가되어 있었다.
 
이제 나 마틴 루터는 이 글로써 증언하는 바입니다. 나는 지난 3월 21일, 나의 죽음을 기리는 이 분노에 찬 출판물을 전해 받고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존하신 교황 폐하에게 돌려져야 마땅한 나에 대한 저주만 빼고서 말입니다.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인 교황과 교황주의자들이 나를 그렇게도 증오한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나의 오른쪽 무릎뼈와 왼쪽 발꿈치를 꿈틀거리게 할 만큼 나를 유쾌하게 만드는군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귀로부터 돌이키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게 할 그들의 죄를 위한 나의 기도가 응답되지 못한다면, 주께서 그들의 불법의 잔을 빠르게 채우도록 허락하실 것이며, 또 이런 글을 쓰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위로나 기쁨도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몇몇 상황들이 루터의 말년을 괴롭히고 있었다. (1) 루터와 멜랑히톤의 관계를 파괴시킬 만 했던 성찬에 관한 논쟁, (2) 일부 회중들이 교역자들의 사례에 대한 의무를 무시하는 것, (3) 일부 교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점, (4) 동료 개혁자들과 토론할 때 지나치게 완강하고 거칠게 대하는 그의 정서적 문제. 이 모든 것들이 루터에게 혼란과 괴로움을 더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나는 마귀와 파벌들과 싸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나의 글은 거칠고 사납습니다. 나의 사역은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가시덤불을 잘라내며, 늪과 수렁을 흙으로 메우고 평탄한 길을 내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진리를 말할 때 지나치게 격렬한 방식으로 말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는 1546년 1월 19일, 자신의 친구인 브레멘의 프롭스트 박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완전히 고갈되어서 머리가 멍한 상태로 이 글을 쓰고 있다오. 이제 한 쪽 눈은 보이지도 않는 이 늙은이가 거지반 죽게 된 지금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인데, 이건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써야 할 글과 설교, 강의와 사역이 너무 많아요. 나는 세상이 걱정스러운데, 세상은 오히려 이런 나를 걱정하고 있구려. 나의 마지막은 아마도 할일없이 여관을 떠나는 투숙객 같을 게야. 이제 내 유일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의 말년에 은혜를 베푸셔서 아무 미련 없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라네.”
 
  그가 통제할 수 없었던 비텐베르크의 혼란들이 루터의 영혼을 괴롭히고 지치게 만들었다. 부모와 보호자의 동의가 없는 젊은이들의 비밀 결혼서약을 가톨릭 교회가 승인을 해주고, 비텐베르크의 판사들이 그런 서약에 대해 무효선언하기를 거절하는 등의 사태가 관계 당국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사회에 해악을 가져온다고 루터는 보았다. 그는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이웃집에 심부름을 보냈더니, 돌아올 때는 결혼한 사람이 되어있는,” 이런 위험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독려하며 기도하고 설교했으며, 치안판사들과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생각은 낡은 편견으로 치부되었고,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된 일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여성들 사이에서 가슴골이 깊이 패인 패션이 유행되고 있었던 바, 이에 루터는 “이런 옷을 입고 교회에 오는 여성들은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전에도 그러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듯이, 여성들의 패션의 힘을 대항하는 것보다 - 특별히 비이성적이고 막을 수도 없는 이런 패션이 유행인 경우는 - 차라리 세상 권력을 대항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루터는 자각하게 될 뿐이었다. 한 손만으로도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한 권력에 대항하여 패퇴시켰던 루터조차도 그들의 가슴을 가리도록 여성들을 설득시키거나 강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분위기들이 대학이나 신학교의 평판이나 유용성에 심각한 위험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하였다. 결국 루터는 자신의 항의와 지도가 무시당하는 것을 보면서 - 혐오감에 가득 찬 나머지 - 그 도시를 떠나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루터의 이런 결심이 알려지게 되자 온 도시가 난리가 났다. 시민들은 이러한 루터의 부재(不在)가 도시를 영원히 망가뜨릴 것이라 말하였고, 도시의 치안판사들도 학생들과 더불어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멜랑히톤과 그의 동료들도 나서서 루터에게 애원했으며, 여성들도 울면서 옷을 더 잘 입겠다고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색서니의 선제후(The Elector of Saxony)조차 간청하며 돌아오라고 권면하자, 루터는 이에 양보하여 대학과 교회 사역에 복귀하였다.
 
  트렌트 종교회의가 개최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을 구슬러 교황주의자들과 타협하도록 하기 위한 갖가지 시도가 자행되었다. 그러자 루터는 병세가 심해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역을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유럽 전역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매일 강의하고, 매주 대여섯번씩 설교를 하고, 거의 매달 책을 썼다. 또한 특별히 트렌트 회의와 관련하여서는 교황제에 대한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루터가 태어난 고향 마을인 ‘아이스레벤’에는 만스펠트 백작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광산에 대한 이권에 관심이 많던 주민들과의 사이에 하나의 오래된 다툼이 있어왔다. 날이 갈수록 갈등은 심해졌고 서로의 반목은 깊어갔다. 양자를 화해시키고자 며칠씩 머물면서 중재했던 루터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그들은 루터의 판단과 결정에 따르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만스펠트 백작은 루터에게 - 그의 건강이 허락한다면 - 그곳으로 와달라고 부탁하였다.
 
  23일 아침에 루터는 두 아들, 마틴과 파울을 데리고 - 그의 아내는 당시 건강상의 문제로 집에 홀로 남은 가운데 - 아이스레벤으로 출발했는데, 이때 장남의 나이는 스무 살쯤 되었다. 여행은 심한 폭풍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강들이 둑에 넘쳐흘렀으며 다리가 떠내려가는 위험스런 상황 속에서 마침내 24일 오전 11시경, ‘할레’에 도착한 루터는 그날 저녁 성 마리아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얼음이 떠다니고 사나운 급류가 흐르는 쌀레 강변에서 삼일 동안 묶여있던 중, 28일에 이르러 그와 두 아들, 그리고 요나스 박사 일행은 작은 보트를 타고 목숨을 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강을 건너게 된다. 얼음과 급류와 싸우며 도강하는 가운데서도 루터는 요나스 박사에게 담담하고 유쾌한 분위기로 이렇게 말했다. “요나스 박사! 마귀가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이 강에서 몰살시키기에 딱 좋은, 이거 참 훌륭한 스포츠 경기가 아닌가요?” 그러나 그들은 기어코 안전하게 강을 건너 여행을 계속해갔다. 만스펠트 백작은 113마리의 말들을 끌고 와서 루터를 맞이했고, 일행을 아이스레벤으로 영접하였다. 아이스레벤 교회당 종탑이 보일 즈음, 루터는 마음속에 여러 회상들이 몰려옴을 강하게 느끼면서 잠시 혼절하기도 했는데, 깨어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기 있는 오래된 첨탑으로부터 마귀가 튀어나와 나를 공격한 것이 분명해요. 그렇지만 나는 죽기 전에 그놈에게 한 방 먹이고 갈 것입니다.” 루터는 여행으로 인한 피로와 불편함으로 매우 지쳐버렸지만, 단 하루만 쉬고서 부지런히 일을 해나갔다.
 
  루터의 아내는 그의 건강과 궂은 날씨를 의식하면서 평소와 다른 불안을 느낀 나머지 여인의 다정함을 담은 편지를 보내게 된다. 그는 이에 사랑스럽고 유쾌하며 익살스럽게 답장함으로써 그녀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애썼다. 죽기 며칠 전에 아내에게 쓴 그의 마지막 편지를 - 그렇게도 사랑스런 친밀한 소통의 견본으로서 -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경건하고 세심한 캐드린 루터, 줄츠돌프의 박사이자 나의 사랑스런 아내에게.
  지극히 경건한 박사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오. 당신이 우리를 그렇게 밤 잠 이루지 못하면서까지 염려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바이오. 당신이 우리를 염려해주는 그 시간에 우리가 머물던 호텔에 불이 났었다오. 방문 가까이 불길이 번져 하마터면 큰 일 날뻔 했구려. 그리고 어제는 당신의 세심한 돌봄이 없었다면, 내 머리로 돌이 떨어져서 덫에 걸린 생쥐 꼴이 될 뻔 했지 뭐요. . .

 거룩한 천사들이 나를 돌보라고 보내준 당신의 그 사랑스러운 보살핌에 나는 감사할 뿐이라오. 나는 당신이 계속 불안해하는 그것이 두렵답니다. 땅이 입을 벌려 나를 삼킬 것 같이 눌리게 되오.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시도록 기도하고 맡겨드리도록 하구려. “네 모든 염려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돌보시리라” 하지 않았소. 우리는 잘 지내고 있지만, 사역은 좀 성가신 부분이 남았어요. 아 참, 요나스 박사가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가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가 나만 혼자 다리를 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동참했다고 좋아들 하는구만. 이제 당신을 하나님께 부탁드리오. 우리는 여기 일을 잘 마치고 주께서 허락하시자마자 집으로 돌아갈거요. 아멘. 아멘. 아멘!
1546년 2월 10일. 당신의 마틴 루터
 
  2월 14일, 루터는 두 명의 설교자를 임명했고, 그의 생애 마지막 성찬식에 참여하였다. 2월 16일 저녁에, 그는 짧은 인생의 덧없음에 대하여 매우 유쾌하게 이야기하였다. 여러 가지를 언급한 가운데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오늘 한 살 배기 아이가 죽는다면 아마도 그 아이와 함께 천 명이나 이천 명의 또래 아이들이 함께 영원 속으로 들어가겠지요. 그러나 예순 두 살 된 내가 죽을 때는 아마도 육십에서 백여 명도 안 되는 동갑내기들이 같은 날 죽게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천국에 들어갔을 때 친구들이 서로를 알아볼지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담이 잠에서 깨어나 옆에 있는 하와를 보았을 때, 그는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리고 바라보면서, “당신은 누구요? 도대체 당신은 어디서 온 거요?”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외쳤지요. 아담이 하와를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녀가 바로 그녀라는 것을 곧장 알아보았듯이, 우리 또한 부활하여 영원 속으로 들어갔을 때에 우리는 우리 옆에 서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2월 17일 아침, 루터의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음을 눈치챈 만스펠트 백작은 그날 하루 사역을 쉬고 숙소에 머물도록 그에게 간청하였다. 청을 받아들인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저녁을 먹었지만, 다음 날 오후에는 더 이상 침울하고 허전하기 짝이없는 “나 홀로 식사”를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려가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두 아들과 친구인 요나스 박사, 그리고 그의 비서인 암브로스가 함께 하는 식사 후에, 그는 생각에 잠겨 방안을 왔다 갔다 걸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으니 여기서 죽는 건 어떨까?” 그는 가슴 통증을 호소하면서 창문을 열어제치고 입술을 움직여 마치 읖조리듯이 낮은 음성으로 기도하였다. 그의 비서인 암브로스가 도와줄 양으로 가까이 다가가 루터의 뒤에 서 있다가 그는 이런 요지의 기도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주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그 은혜를 인하여 제가 알게 되었고 또한 전했던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하오니, 당신의 약속과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이제 종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저를 향한 그 크신 인자와 긍휼을 따라 응답하여 주옵소서. 이제 이 땅위에 비치기 시작한 복음의 빛이 눈 먼 교황으로 말미암은 끔찍한 배교와 영적 어두움이 가득찬 모든 곳에 비치게 해 주옵소서. 결코 멀리 있지 않은, 눈앞에 닥친 그 무서운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리해 주옵소서. 또한 조국 교회를 순전하게 보존하사 거룩한 말씀의 진리가 한결같이 고백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은혜로 이 나라를 지켜주셔서 세상으로 하여금 주께서 이 일을 하도록 종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오, 주 하나님이여. 아멘, 아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 야곱이 벧엘에서 그랬던 것처럼 - “두렵도다, 이곳이여”라고 느낄 뿐이었다(창 28:16). 저녁이 되자, 루터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가족들과 함께 맛있게 식사를 했다. 함께 둘러앉은 사람들이 시무룩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오히려 활기찬 대화를 이끌면서 농담을 던지고 큰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저녁식사 후, 그는 다시 가슴 통증을 호소하면서 따뜻한 천으로 가슴을 문질러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때 일행은 의사를 부르자고 권하였으나 루터는 거절하였다. 9시쯤 되자, 그는 두 아들과 요나스 박사, 그리고 암브로스와 함께 윗층으로 올라가 침실에 딸린 작은 거실 소파에 누워 한 시간 반 정도 잠을 청했다. 그는 깨어난 뒤 암브로스에게 침대를 데워달라고 하면서 소파에서 일어나 아무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잠옷을 갈아입고는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걱정스런 눈으로 침대에 둘러서 있던 두 아들과 일행에게 그만 가서 쉬라고 말했으나, 그들이 좀 더 머물겠다고 간청하자 루터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벽면으로 돌아누워 잠든 듯 하였으나, 그의 비서 암브로스의 말에 의하면 루터는 결코 눈을 감고 있지 않았으며 벽에 비치고 있는 흔들리는 촛불 그림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11시 반쯤 되었을 때, 루터는 벽난로에 불을 더 지피라고 하고선 침울한 목소리로 “오, 주 하나님이여”라고 부르짖었다. 침상 주위로 일행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요나스 박사에게 이같이 말하였다. “가슴이 너무 아파. 나는 곧 죽을 것 같아.” 그들은 다시 천으로 가슴을 문지르기 시작했으며, 이미 루터가 죽음에 임박했다는 슬픈 소식은 온 도시로 퍼져가고 있었다. 두 명의 의사가 그의 곁으로 달려왔고, 만스펠트 백작도 부인과 함께 암모니아수를 가지고 서둘러 왔다. 또 슈바르츠부르크의 존 헨리 백작과 그의 부인, 그리고 루터의 특별한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아우리파버 박사도 당도하였다.
 
  잠시 원기를 회복한 루터는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두어 번 왔다갔다 한 뒤에 거실로 나와 다시 소파에 앉았다. 때는 이미 새벽 1시 경이었고, 루터는 앉은 채로 “아버지여, 당신의 손에 나의 영혼을 의탁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저를 구속하셨나이다. 오 진리의 하나님이시여!”라고 라틴어로 기도하였다. 깊은 근심에 쌓인 만스펠트 백작부인이 자신이 가지고 온 약을 좀 드시라 루터에게 권하였으나, 그는 아내가 준 꾸러미를 아들에게 가져오게 하고선 통에 든 알약 한 두 개를 입에 넣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 그 통을 아들에게 건내주면서 “네 어머니의 친절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다시 “하나님이여, 저는 지금 죽을 듯이 고통스럽습니다”라고 나지막히 외치자, 코엘리우스가 그에게 이같이 말했다. “존경하는 목사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부르짖으세요.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아닙니까? 당신은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큰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니, 곧 쾌차하실 겁니다.” 그러자 루터가 말했다. “아니오, 나는 차디 찬 죽음의 냄새를 느끼고 있다오. 호흡은 가쁘고 나의 통증은 더 심해지고 있소.” 그리고 나서 그는 독일어로 기도하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영원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 당신께선 저에게 당신의 사랑스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셨으며, 저는 그분을 고백하였고 만인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나는 - 불경한 자들이 매도하고 박해하는 - 그분을 나의 유일한 구원자요 구속주로서 사랑하고 높여드리며, 내 영혼을 주께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라틴어로 “당신의 손 안에 내 영혼을 올려드립니다”라고 세 번 반복한 다음, 다시 독일어로 덧붙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고백하였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에, 그는 다시 독일어로 기도하였다. “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 육체는 부서져 나의 영혼을 떠나가고 제가 이생을 하직한다 할지라도, 저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것을 확신하오며 종을 당신의 손으로부터 빼앗아갈 자 없나이다.” 그리고 나서 밝은 분위기의 라틴어로 이런 기도를 추가하였다.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요, 우리 주님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루터는 빠르게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고, 만스펠트 백작부인은 다시금 약간의 과일주스를 대접하면서 그가 마음의 안정을 취하도록 도왔다. 그리고 잠시 후, 요나스 박사가 그에게 “사랑하는 목사님,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계십니까?”라고 낮게 속삭이자, 그의 어두운 표정이 다시 밝아지고 그의 맑고도 푸른 눈이 다시금 지성으로 반짝거리면서, 또렷하고 상기된 목소리로 루터는 대답하였다. “오, 그렇습니다!”(O yes!) 그리고 나서 그는 양손을 가슴 위로 포개어 올려놓고 얼굴은 약간 옆으로 돌리면서 잠자는 어린아이처럼 부드럽게 호흡하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화요일 새벽 2시 반경 만 62년 3개월 10일을 일기로 하여 위암 또는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그 자신이 예상한대로 태어난 고향은 또한 그의 사망지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가득차 있던 루터의 죽음은 평안하긴 하였으나, 많은 그리스도인의 그것처럼 그리 편안치는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

 (1) 그의 개인적 소망은 결코 즐거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때때로 자신에 대하여 의심스러워하기조차 했는데, 그것은 그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하는 그 어떤 것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아마도 그는 일생동안 극심한 신체적 통증에 시달렸다. 그가 비록 자주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극도의 고통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육중한 신체를 가진 그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무너져내릴 때, - 마치 무시무시한 고문과도 같은 - 극도의 통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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