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관점에서의 죄의 구분


1. 내적 죄와 외적 죄 (inner sin and actual sins)


웨슬리가 구분한 내적 죄와 행위의 죄와의 관계는 죄와 은총의 관계에 있어서 거듭남과 관련이 있다.

즉 거듭난 자는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하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십자가의 은총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난 자는 “모든 종류의 외적 죄, 즉 모든 악한 말과 행동을 이길 힘과 내적 죄를 이길 힘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거듭남의 은총은) 모든 불경건한 욕망과 기질로부터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 때문이다.” 칭의의 순간에 모든 말과 행위의 자범죄(actual sins)의 죄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거듭남의 순간 내적 죄악성(inner sin)이 파괴되기 시작함으로 이제는 더 이상 죄의 힘(power of sin)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다스리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자에게도 여전히 죄악성이 남아있어 그를 괴롭힌다.


그러나 내적 죄악성은 거듭난 신자를 지배하거나, 다스리거나, 조롱하지 못한다. 그리고 죄는 더 이상 그에게 능력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자는 죄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신자는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에게 복종하고 죄의 지배를 당한다.


웨슬리는 내적 죄악성(inner sin)이란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속죄의 보혈로 원죄(original sin)의 죄책이 없어진 상태로서의 죄의 뿌리(roots of sin), 생래적 죄(inbred sin), 내주하는 죄(indwelling sin), 육적인 본성(carnal mind)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그 본질을 인간 본성의 가장 심층부의, 인간 심령의 생래적인 손상(the inbred corruption of thy, of thy very inmost nature)으로 보았다.

또한 내적 죄악성으로 인해 인간은 본래부터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선의 결여, 전적인 타락, 영혼의 전적인 부패와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인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생래적 혹은 내적 죄악성(inbred or inward sin)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과 대조되는 기질로서 자만, 자기 고집, 이생에 대한 사랑, 악한 부끄러움, 만악의 근원인 탐심과 같은 어떤 죄악된 기질, 감정, 혹은 열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죄는 그 자체로는 결코 죄의 힘이나 죄책을 가지지 못한다.


내가 느끼는 분노에 한순간조차도 굴복 당하지 않는다면 죄책, 즉 그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유죄 선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그것은 힘을 가지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성령을 거스르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우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예들을 보았을 때, 죄책이나 죄의 힘을 가지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외적인 죄(actual sins)는 의지적인 자범죄를 말하는 것으로서 현실의 자발적인 율법의 위반, 즉 계시되고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의 위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한 일 3 : 9)는 믿음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한, 기도와 감사의 생각을 갖는 한, 단순히 죄를 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방식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칭의와 거듭남 후에 신자는 모든 죄로부터 깨끗해짐을 받는다. 즉 ‘하나님께로 난 자’는 외적인 죄의 지배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또한 내적 죄의 힘이 파괴되어지기 시작하여 그것으로부터 지배를 받지 않게 된다.

그러나 내적인 죄악성이 전적으로 파괴되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이 남아있는 내적 죄로 인해서 신자가 다시금 외적 자범죄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신자는 지속적인 싸움 즉 성령을 따라 걸어감으로써 “불완전한 순종을 통해 그들의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할” 필요가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 중에서도 남아 있는 내적 죄악성으로 인해 외적인 행위의 죄를 범한 사람들을 성서의 예를 통해 들고 있다. 즉 밧세바를 취한 다윗,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마가 요한을 선교 여행에 데리고 감으로서 바울과 크게 다툰 바나바, 이방인과의 식사 때에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을 피해 식사자리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예를 들고 있다. 웨슬리는 이러한 성서의 예증을 통해서 은혜에서 행위의 죄로 떨어지고 타락하는 다음과 같은 단계들을 말하고 있다.


(1)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속에는 사랑의 신적 씨앗, 승리하는 믿음이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그가 그 자신을 지키고, 죄를 짓지 않습니다.’

(2)유혹이 생깁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육체로부터, 혹은 악마로부터든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3)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죄가 가까이에 있다고 경고를 주며 더 자주 깨어서 기도하라고 명합니다.

(4)그는 어느 정도 유혹에 양보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그에게 즐거움이 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5)성령은 탄식합니다. 그의 신앙은 약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차가워집니다.

(6)성령은 더욱 날카롭게 그를 비난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길이니 너는 그 안에서 걸어라”

(7)그는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음성을 피하여 유혹의 즐거운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8)믿음과 사랑이 소멸될 때까지 악한 욕구가 그의 혼 속에 시작되고 퍼져갑니다.

(9)그는 이제 외적인 죄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권능이 그에게서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혹과 신자 안에 남아있는 내적인 죄악성으로 인해 신자의 믿음이 상실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의 상실은 신자들로 하여금 외적인 죄를 범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내적인 죄악성이 소멸되는 완전 경험이전에 내적 죄악성은 소멸되어지지 않기에 신자는 지속적인 회개와 믿음을 통해 성령과 함께 걸어가야만 한다.


2.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죄 (voluntary sin and involuntary sin)


웨슬리의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죄에 대한 구별은 죄에 대한 그의 실질적인 정의와 관련이 있다.

엄격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알려진 법에 대한 자발적인 위반 이외에 어떤 것도 죄는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사랑의 법에 대한 모든 자발적인 위반은 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엄밀히 말할 때 그 외의 것은 모두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문제를 더욱더 왜곡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칼빈주의자들의 방법입니다.

비록 아담적인 율법은 위반할지라도 사랑의 (법을) 위반하지 않는 수많은 방황하는 생각들과 게을러진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죄로) 혼동합니다. 

 

위의 인용을 통해 보면 웨슬리의 실질적인 죄에 대한 정의에는 두 가지의 흥미로운 점이 있다.

첫째로 웨슬리는 실질적인 죄를 법에 대한 자의적인 위반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죄의 발생이 의지의 수반과 죄에 대한 자의적인 동의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비록 하나님의 율법의 위반이라 할지라도 모든 무의식적인 실수와 잘못, 이해력의 둔감, 상상력의 약점, 기억력의 결여, 언어 표현의 미숙등은 의지적인 의도성이 없기 때문에 웨슬리의 관점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조차도 이 육체적 연약성과 고통, 병, 약함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영혼이 썩어질 몸에 거하기에 발생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위 무의지적인 죄는 인간의 연약성에 기인한다. 이것은 육체와 정신의 자연적 결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자신의 연약성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이 연약성 자체는 죄가 될 수가 없는 것이며 오로지 죄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영혼뿐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타락한 육체에서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잘못이나 모든 연약함은 결코 사랑과 대립된 동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기에 이런 실수나 과오는 성경에서 말하는 일반적 죄와 구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까닭에 웨슬리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의 절대적인 완전은 불가능하지만 상대적 완전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대적인 완전은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으로 가능해진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마 19:26)


‘그렇긴 하지만, 이것은 본성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죄악된 육신을 입고 있으면서도, 모든 죄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라는 모순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대론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주장하는 대부분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실수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이미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의하여도 우리는 여전히 많은 점에서 잘못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판단의 실수는 아주 빈번하게도 행위의 실수를 야기합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판단은 그 기질 안에 무엇인가를 야기하거나, 순전히 올바르지만은 않은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불필요한 두려움이나 잘못된 희망, 불합리한 사랑, 터무니없는 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위에서 설명한 완전과 결코 모순되어지는 것들은 아닙니다.

‘그렇소, 그것은 마지막 절과도 맞지 않고, 죄로부터의 구원과도 일치할 수 없는 것이오’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내 대답은 죄를 ‘(죄에 대한 성서적 정의라고 생각하는) 율법을 의지적으로 어기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에 따르면, 그것이 죄로부터의 구원과 완전히 잘 일치하리라는 것입니다. ‘아니오, 하나님이 율법을 어기는 것은 의지적이든, 무의지적이든 모두 죄입니다. 왜냐하면 성 요한도 “모든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어기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제가 부인합니다.


할 수 있으면 밝혀보라고 하십시오. ... ‘죄악된 육신’이라고요? 청컨대 이러한 표현이 얼마나 애매하고 모호한 것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말은 성서에 근거가 없습니다. ‘죄악된 몸’이란 말은 거기서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전혀 비성서적인 것처럼, 그 말은 명백히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육신도, 어떤 종류의 물건도 ‘죄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오로지 영혼만이 죄의 자리입니다.

두 번째로 웨슬리는 계시되어지고 성문화되어진 하나님의 율법의 관점에서 죄를 정의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문화되어진 율법이라기보다는 그 율법의 정신, 즉 하나님 형상의 완벽한 그림자로서의, “지고의 변하지 않는 이성”으로서의 도덕법이다. 즉 무의지적으로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것이 사랑의 법인 도덕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한번이라도 의도적으로 도덕법을 위반한 것은 죄를 지은 것이며 그 죄에 대한 죄책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망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사망은 죄에 대한 인간 자신의 의지적인 참여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연약성으로 기인한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필요없는가?라는 물음이 대두된다. 웨슬리는 이 물음에 “인간은 모든 상태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라는 아주 명쾌한 해답을 내린다. “소위 말하는 죄라 불러 마땅한 죄(즉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고의적 위반)뿐만이 아니라 죄라고 부르기 부적절한 죄(알던지 혹은 모르던지 간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무의지적인 위반) 모두 다 속죄의 보혈을 필요로 한다.” 완전을 경험한 자들도 여전히 자신들의 육체의 연약함으로 기인한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 즉 그들의 태만과 부족함 그리고 판단 및 행실의 잘못과 여러 가지 결함들 때문에 여전히 그리스도의 대속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도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perfect law)에서 보면 빗나간 것들이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이렇듯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을 나누고, 그 자신이 소위 무의지적인 죄를 실제적인 죄와는 구분하여 복잡하게 설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경향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완전법에 비추어보았을 때 부적절하지만 소위 죄인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을 죄로 여기지 않고 완전 경험 후에는 중보자 없이 무한하신 공의 앞에 자신들이 설 수 있다고 믿었던 조지 벨과 토마스 멕스필드같은 현실 세계에서의 완전 경험을 극단적으로 끌고나간 열광주의자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는 인간의 연약성에서부터 기인한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을 의지적인 죄와 동일시하여 인간은 죄악성의 깊이에 눌려 살수밖에 없기에 이 땅에서의 완전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모라비안과 칼빈주의자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3. 죄책과 죄의 힘, 죄의 현실성(guilt, power of sin and being of sin)


웨슬리는 “신자 안의 죄에 관하여(On Sin in Believers)”라는 설교에서 죄책, 죄의 힘, 죄의 현실성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복잡하게 죄에 관해서 설명한 것은 의인과 거듭남 후에 기독자가 의와 화평과 희락을 얻지 못했을 경우에는 이러한 확증이 그에게 올 때까지 조용히(stillness) 있어야 한다며 정숙주의적 경향에 빠졌던 모라비안들과 인간의 죄악성에의 절망과 하나님의 성도 견인의 예정으로 인한 율법폐기론적 경향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실제에 있어 어떤 교파들은 이것(인간 본성의 부패성)을 너무 지나치게 다루어 이 신자의 마음의 부패를 설명할 때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극복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신자가 이것에 얽매여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런 극단을 피하려는 나머지 많은 선량한 사람들, 특히 고(故) 진젠돌프 백작의 지도하에 있던 사람들은 또 하나의 극단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모든 참다운 신자들은 죄의 지배(dominion of sin)에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외적인 죄뿐만이 아니라 내적인 죄의 현실성(being of inward sin)에서까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죄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많은 영국 사람들은 약 20년 전에 그들로부터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본성의 부패성조차도 이미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라비안들은 신자, 거듭남, 의로움을 같은 말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신자가 모든 죄에서 자유함을 받기에 그 마음속에 아무 죄도 없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모라비안들에게는 성화의 과정이 무시되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칭의를 통해 자범죄의 죄책이 사함을 받고 죄의 힘이 파괴되기 시작하며 거듭남의 은총을 통해 손상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 시작됨을 명시했다. 그리고 신자는 내적 죄와 외적 죄를 이길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웨슬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의 견해를 따라 신자 안에 여전히 본성과 은총이, 육과 영이 다 있기에 영적인 싸움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신자에게 죄가 없으며 육에 속한 마음이 없고 타락할 경향이 없다는 주장이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말이며 율법폐기주의 경향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며 모라비안적 경향에 강하게 반박하였다. 신자는 영적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영적일 수도 있지만, 영적이며 동시에 부분적으로 육적일 수도 있기에 그는 죄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전적으로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즉 비록 죄가 그를 지배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모라비안이 죄책과 죄의 힘을 죄의 현실성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본 것에 반대해서 웨슬리는 죄책과 죄의 힘 그리고 죄의 현실성을 각각 별개의 것으로 구별했다.

그리고 이런 구별이 웨슬리로 하여금 무리 없이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한다.(로마 8:1)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그들 안에 내주하신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죄책과 죄의 힘에서, 또는 한 마디로 해서 죄의 현실성에서 구원받는다’ 이 말들은 마치 그것들이 동일한 것인 양 겹쳐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죄책이라는 말과 죄의 권세라든가 죄의 현실성이라는 말은 각각 다릅니다. 우리 신자들이 죄책과 죄의 힘으로부터 구원받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신자들이) 죄의 현실성에서까지 건짐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죄책과 죄의 힘에 관해서 웨슬리는 후기로 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죄책으로부터 신자를 구원해 주는 것에는 지속적으로 동의하였지만 죄의 힘으로부터의 구원까지를 말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증언합니다. 만일 여전히 당신이 죄를 지속하고 있다면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별반 도움이 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당신을 당신의 죄 속에서 구원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는 당신에게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가 인간들을 죄책으로부터 구원하시지만 죄의 힘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며 아담의 죄로 인한 죄책은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속죄의 보혈로 사함을 받지만 자신의 자범죄에 대한 죄책은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해서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칭의와 거듭남 후의 신자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현실성으로 인해서 죄악성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신자의 가장 최선의 말과 행동에서조차도 여전히 죄악성이 있기 때문에 죄의 현실성에서 해방되지 못한 신자는 여전히 육적인 본성을 향하게 된다.

여기서 웨슬리가 말하는 죄의 현실성은 바로 죄의 뿌리, 내주하는 죄, 육적인 본성, 생래적인 죄, 악의 경향성, 본성의 타락성과 동일한 말이다. 따라서 웨슬리가 여러 곳에서 강조한 것처럼 신자는 죄의 지배로부터는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자신 안에 남아 있는 내적 죄악성으로 인해서 죄책과 죄의 힘이 없는 죄가 발생할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점은 죄책과 죄의 힘에 대한 웨슬리의 구별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간에 행위의 죄로서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고 죄의 현실성으로서의 구별은 경향성(disposition)으로서의 죄의 개념과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웨슬리는 죄를 상태와 행위로 구별해 이해하고 있다.


죄, 자유의지 그리고 은총(sin, free will and grace)


1. 죄와 자유의지(sin and free will)


웨슬리는 보편적인 악의 원인을 초월적인 존재의 자유의 오용으로 보았으며 인간 타락의 원인은 유혹에로의 최초의 인간

자유의 오용으로 보았다. 이렇듯 의지의 자유를 오용함으로서 인간은 전적인 본성의 타락과 부패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인간에게 절대적인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 남용으로 죄를 지어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전적인 타락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을 오염시킨 하나의 병이다. 따라서 루터와 칼빈처럼 웨슬리도 전적 타락후 인간 본래의 자연적인 자유의지는 결코 하나님을 향할 수 없다는데 동의를 한다. 즉, 은총을 받지 못한 자연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빛이 비추더라도 전혀 그것을 지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망이 없는 죄악 그 자체의 상태 속에 있는 것이고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곧 이어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한 보편적인 은총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가 회복됨을 말하고 있다.


저는 지금까지 자유의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저는 도덕적인 것으로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인간의 현재의 상태에서의 자연적 자유의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초자연적인 빛과 함께 하는 모든 사람에게 초자연적으로 회복되어진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주장할 뿐입니다.

콕스의 지적처럼 웨슬리는 타락한 인간조차도 현재 행위의 계약이 아닌 은혜의 계약 아래에 살고 있다고 본다.


모든 인간이 은혜의 계약 아래에 살고 있다는 것은 행위의 율법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우리 구원의 근거인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우리 모두를 위해 값없이 임하시고 우리 모두 안에 값없이 거하신다는 의미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이점은 웨슬리의 은총 이해에 있어서 선재적 은총의 개념과 연결되어진다.


그리고 이 미묘한 차이로 인해서 웨슬리는 구원에 있어서 성서 중심적인 입장에서 종교개혁가들과도 아르미니우스와도 다른 성서적 구원의 길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우틀러가 지적한 것처럼 아르미니우스는 은총 이전에 자연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회복되었다고 보아서 세미 펠라기안적인 경향에 빠졌던 반면에 웨슬리에게 있어서 의지의 회복은 성령의 선재적인 활동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성령의 선행적인 활동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향해 갈 수 있게 하며 영감을 받을 수 있게 한다.


분명 웨슬리는 이점에 있어서 아르미니우스와도 세미 펠라기안과도 또한 종교 개혁가들과도 다른 경향에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회복되어진 인간 의지의 자유는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으로 회복되어진 이 의지의 자유가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의지의 능동적인 참여라기보다는 수동적인 참여이다.

왜냐하면 인간 구원에 있어서의 우선권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요한 5 : 17) 그러므로 너희도 일하라”는 말씀에는 아무 모순이 없으며, 오히려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면에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그러므로 너희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그러므로 너희도 일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그 빛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희미하게 빛나는 서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만간, 또한 다소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은총이 없어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은총을 사용하지 않기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인간의 죄에 대한 가능성을 육체에 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두었다. 그리고 의지의 자유에 대한 문제는 영혼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육체적 연약성에 기인한 수많은 악한 유혹들과 방황하는 생각들에 휩싸이기 쉽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지 유혹으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그리고 부주의하게 그것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확실히 그런 악한 유혹들과 방황하는 생각들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죄의 원인은 인간 자신에게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신 양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오용함으로서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은 그에게 은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은총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칭의와 거듭남 후의 신자에게는 여전히 내적 죄악성 즉 죄의 현실성이 남아있고 여러 유혹이 그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의지로 악과 죄로의 경향성을 선택하여 자범죄를 다시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웨슬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의 위대한 특권(The Great Privilege of Those Who Are Born of God)”

이라는 설교에서 타락의 가능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웨슬리는 여기서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 영혼 속에서 계속 행동하지 않으시며, 또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호흡하지 아니하고 그분께 우리의 사랑과 감사와 기도를 돌리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 영혼을 향하여 계속 호흡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웨슬리는 신자가 은혜로부터 죄인의 상태로 떨어지는 단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타락 과정의 뚜렷한 특징은 신자의 타락에 원인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의지의 오용에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의 자유가 자기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하는 결과를 만든다.


2. 죄와 은총(sin and grace)


웨슬리에게 있어서 죄의 본질은 불신앙이다. 즉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성의 타락이다. 그

리고, 이러한 타락의 결과는 육체적 죽음의 언도와, 영적인 죽음이다.

여기서 영적인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을 의미하는 죽음이다.

그리고 도덕적 형상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만의 노력으로는 하나님께 응답할 수 없게 되었다.

웨슬리는 원죄로 인한 결과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서 ‘전적인 타락’을 말하고 있다.

아담 이후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인간 자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희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어거스틴이나 종교개혁자들과 함께 ‘은총으로만’이라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 개혁가들과 웨슬리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은총의 개념이다.

웨슬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역사하느냐의 문제에서 머리털 두께 만한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전적타락이라는 말을 단지 자연적 인간에게만 사용한다.

즉 하나님의 은총의 단비를 만나지 못한 존재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가 전적 타락이다.

런데, 웨슬리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단비를 만나지 못한 자연적 인간(natural man)은 없다고 말한다.

인간들의 모든 영혼들이 본질적으로 죄 속에서 죽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어떤 누구도 정죄를 면케하지는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단지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

살아있는 인간은 ‘자연적 양심’이라고 불리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재적인 은총’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욱 적절합니다.


인간은 세상 속에서 자연적인 인간(natural man)으로 있을 수 없다.

또한 우리 인간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긍정적 모습은 결코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전적타락에 대한 웨슬리의 확고한 믿음은 분명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그와 이 교리를 공유했던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가 동의하지 않았던 제한된 속죄론과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를 이 개념으로부터 끌어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동방전통의 신학자들과 로마 카톨릭은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기본적으로 남아서 이것으로 인해서 구원에 관한 주체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라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웨슬리는 양쪽편의 어떤 주장에도 동조할 수 없었다. 전자는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은총의 비공로적인 특성을 위험하게 했고, 후자는 원죄의 위험성을 과소평가 하게 한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인간의 자연적 특성은 분명 가능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기인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으로 인간에게 가능성이 회복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총을 통해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에 대한 죄책으로부터 자유해졌고 단지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담 이래로 인간의 타락하고 손상된 본성의 문제와 자신의 타락한 본성과 유혹으로부터 기인한 자범죄의 죄책뿐이었다. 그러나 자범죄의 죄책과 타락한 본성의 문제도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로 해결 가능해졌기에 인간 구원의 길에서 인간의 응답 가능성이 생겼다고 보는 웨슬리의 신학적 통찰력은 아주 놀라운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웨슬리는 현 상태의 인간 타락의 심각성을 주장하였고 인간 본성의 부패성이 어떻게 전가되느냐에 있어서

생물학적 유전설, 영혼 창조설을 거부하고 영혼 전이론적인 입장을 그의 말년에 피력한 것이다.


죄에 대한 입장 차이를 가지는 동방 신학과 서방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서방의 신학은 그들의 속죄에 대한 법정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죄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로 보았다. 반면에 동방의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을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한 우리의 손상되어진 본성을 치유하는 권능으로 보았다. 그러나, 종합주의자인 웨슬리는 은총을 용서와 동시에 권능의 의미로 파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은총이해는 시기별로 그 강조점을 다르게 가진다.


초기의 웨슬리는 은총을 기본적으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치유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덕 속에서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1738년의 개신교 전통의 법정적 의인화에 대한 깊은 감명과 경험은 은총의 개념을 무조건적인 용서의 개념으로 바뀌게 한다. 그러나 기독자의 삶에 대한 정숙주의와 열광주의의 오류는 웨슬리로 하여금 은총을 용서의 개념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되어짐으로서 책임적인 기독자의 삶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권능으로 규정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요구하지 않는, 공로 없이 얻은 긍휼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죄인인 나는 그리스도의 공로로써 이제 하나님과 화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차라리 “우리 속에서 활동하셔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게 하시는”(빌립보 2:13) 저 성령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전자의 의미에서, 그의 용서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에서 확증되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은총(후자의 의미에서, 그의 성령의 권능)이 그곳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에 의하여 실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행동을 바르게 정돈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저 사랑의 빛과 능력에서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하나님의 모양대로”(창세기 1:26) 영혼을 갱신하는 성결, 하나님의 영광에 부응하도록 우리의 모든 발언과 행위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진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은 내 안에 느끼게 해 주십니다.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웨슬리에게 분명한 강조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하나님의 모양대로’ 영혼의 갱신이다.


따라서, 두 가지 차원의 은총 이해(용서, 치유와 회복)에 있어서 용서에 대한 강조는 치유의 권능이라는 보다 큰 주제에 통합된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치유하는 도구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있어서 은총은 죄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것이다.


은총이 우리를 깨우시고 우리에게 가능성을 제공해 주신다. 웨슬리는 은총을 저항할 수 있고 협력 가능한 것으로 이해했다. 결국 하나님의 은총이 인격적이며 협력 가능한 자비로운 권능이라면 그것은 확실히 점진적인 특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웨슬리는 은총의 정도와 구원의 정도에 대해 말할 수 있었고 점진적인 성화를 강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은총에 의해서 아담 안에서 모든 것을 잃은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잃은 것 이상으로 회복될 수 있게 된다.


웨슬리의 은총 이해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할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은총의 사역에 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성으로 인해 인간 자체만으로는 결코 가능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며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의 참여 또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총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이 믿음을 가지기 이전에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그 모든 것들도 사실은 은총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믿음의 열매인 선행 또한 은총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신의 구원을 향한 인간의 노력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사역의 한 부분이 된다.

이러한 은총의 상실이 인간을 전혀 가망성 없는 존재로 만든다.


결론적으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죄에 대하여 집단적인 접근 방법과 동시에 개인적인 접근 방법을 택하고 있다. 즉 죄인의 상태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실존적인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은총은 동전의 양면처럼 웨슬리의 신학에 있어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웨슬리는 인간의 현실의 제반 문제, 특히 구원의 문제를 목회적이고 실천적 차원에서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심도 깊게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인간 현실의 이해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은총의 사역의 측면의 고찰이 핵심적인 사항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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