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3대논문

?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



소개의 글


이 논문은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1483-1546)가 16세기 초기의 그리스도교계를 개혁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껴, 그 당시 독일의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낸 글로서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이다.


루터의 이 논문은 크게 두 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에서 루터는 1천년 가까이 서방세계의 사회, 경제, 법조, 종교 사상계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던 ‘로마의 세 가지 담’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논박한다. 첫째 담은 영적 문제에 관하여 교황이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 담은 성서 해석에 있어서 교황만이 유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 담은 공의회를 소집하는 권한은 교항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분야에 걸친 담이 로마 교황권을 중심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시대였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직업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신자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첫째와 둘째 담을 파괴했다.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면 교황의 말만 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어지게 된다. 셋째 담은 첫째와 둘째 담이 무너지면 자연히 무너지게 된다. 둘째 부분에서 루터는 공의회에서 논의되어야 할 여러 가지 문제점들과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실제적인 문제들을 27항목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취급했다. 루터는 표면에 나타난 도덕적인 타락 때문에 교황을 공격했다기 보다는, 그와 같은 타락에 이르도록 한 불신앙 즉 하나님의 근본 뜻에 어긋나는 그릇된 불신 행동을 한층 더 심각하게 여겨 공격했다.


루터가 그리스도교계의 개선에 관하여 독일 귀족에게 제안한 것들은 교회뿐만 아니라 독일 국민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였다. 조국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루터의 복음적인 조국애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논문만큼 독일 국민을 감격하게 한 것은 없었으며, 오늘날도 독일 국민문학의 제 일류급으로 취급받고 있다.



서문


신학박사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교계의 개선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이 글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주시고 수정해 주실 수 있도록 암스도르프의 니콜라우스에게 이 글을 보냅니다.


우리는 인간을 상대하고 있지 않고 지옥의 임금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과 같은 육적인 힘을 의지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이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지혜 있게 행하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겸손히 행하지 않으며, 힘을 쓰면 쓸수록 우리의 파멸이 더 커질 것이다. 교황들과 로마교도들은 이제까지 악마의 도움으로 제왕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할 수 있었으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과 술책대로 나간다면 그들은 다시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교도들의 세 가지 담



로마교도들은 퍽 교묘하게 자기들 주위에 세 가지 담을 쌓아 놓고 그 뒤에서 이제까지 자신들을 방어해 왔다.

그리고 이것은 전 그리스도교계를 통하여 번진 무서운 부패의 원인이 되어왔다.


첫째로, 로마교도들은 속권에 의하여 억압을 당하면 법령들을 만들어 속권은 그들에 대하여 아무 지배권도 없으며 오히려 영적인 권능이 속권 위에 있다고 말해왔다. 둘째로, 로마교도들은 성서에 의거하여 책망하려고 하면 그들은 교황 외에는 아무도 성서를 해석할 수 없다고 하여 이론을 제기한다. 셋째로, 로마교도들이 공의회에 의하여 위협을 받으면 교황 외에는 아무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는 거짓말로 답변하였다. 그들은 모든 비행과 악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이 세 가지 담의 안전한 요새 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 더욱이 공의회의 모든 결의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교황에게 줌으로써 공의회를 많이 열거나 하나도 열지 않거나 결국은 마찬가지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기만적이고 교활한 속임수에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것이라는 협박을 제왕들과 군주들에게 믿게 만들었다.



첫째 담: 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


크리스천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다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제사장 같은 나라이다”라고 말하고 또 계시록에 “당신은 당신의 피로써 저희를 제사장과 왕들이 되게 하셨나이다”(5:9-10)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주교가 성별할 때에 그것은 모두가 동등한 권능을 가진 모든 회중을 대신하여 그들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여 그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이 권능을 행사하도록 맡겨 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마치 다 같이 왕의 아들이고 동등한 상속자들인 열 형제가 그들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여 자기들 전체를 대신하여 유산을 관리하게 하는 것과 같다. 사제는 관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사제가 파면을 당하면 그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다. 평신도와 사제는 ‘신분’에 있어서는 동일하며 단지 직무와 일에 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는 각기 자기들의 일과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다 성별 받은 사제와 주교와 같다. 그들은 각기 자기의 일이나 직무에 의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마치 몸의 모든 지체들이 서로 섬기는 것과 같으며, 이렇게 하는 것은 공동체의 육적인 또는 영적인 복리를 위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하기 위해서이다.


사제나 주교나 교황과 같이 ‘영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일과 직무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의 집행을 맡고 있는 것 외에는 다른 크리스천들과 아무 차이가 없고 우위에 있지도 않는 것처럼, 세속적인 관헌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속권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것이므로 그 사람이 교황이건 주교들이건 사제들이건 승려들이건 수녀들이건 누구이건 간에 그 신분에 관계없이 전 그리스도교계를 통하여 아무 장애 없이 자유롭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곧 모든 영혼은(교황의 영혼도 역시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왜냐하면 그 권세들은 칼을 공연히 가지지 않으며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들을 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들을 칭찬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자들이기 때문이다”(롬13:1,4). 사도 베드로도 역시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므로 주를 위하여 인간의 모든 법령에 복종하라”(벧전2:13,15)고 한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나서 속권을 경멸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이러한 일은 바로 교회법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이건 주교이건 사제들이건 관계없이, 벌을 주어 마땅하거나 필요할 때에는 언제고 벌을 가하고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법에 기록되어 있는바 “비록 교황은 수많은 영혼들을 몰아서 악마에게 넘겨주리만큼 추악하다고 할지라도 그를 파면시킬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악마의 왕 자신이었음이 틀림없다.



둘째 담: 성서해석자인 교황과 교황 무오설


그들은 스스로 유일한 권위자라고 생각하며, 교황은 악인이거나 선인이거나 간에 신앙문제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거짓말로 우리에게 납득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크리스천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요6:45에서 말씀하신다. 따라서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도 사악한 사람들이거나, 진실한 크리스천이 아닐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한편 보통 사람도 참된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교황보다 성서를 자기편에 두고 있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면 교황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 그리스도교계를 누가 돕겠는가? 그러므로 성서 해석이나 그 해석의 확인이 홀로 교황에게만 속한다고 하는 것은 전혀 조작적인 이야기이며 그들은 여기에 대하여 한 글자도 증언하지 못한다. “하나의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신조의 조항이 옳다면 언제나 바른 것은 교황만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로마의 교황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 인간으로 격하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은 악마적이고 흉악한 과오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다 사제들이고 다 한 신앙과 한 복음과 한 성례를 가지고 있다면, 왜 신앙 문제에 관하여 바르고 그른 것을 시험하고 판단할 권능을 가져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대담하게 앞으로 나아가서 신앙에 근거한 우리의 성서 해석에 따라 교황들이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모든 것을 시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교황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해석이 아니라 더 좋은 해석에 따르도록 억지로라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의 나귀를 통하여 예언자(발람)에게 반대하는 말씀을 하셨다면, 왜 오늘날이라고 한 의인을 통하여 교황에게 반대하는 말씀을 하실 수 없겠는가?



셋째 담: 교황과 공의회


셋째 담은 처음 두 담이 무너질 때에 제풀에 넘어진다. 왜냐하면 교황이 성서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때에,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성서편에 서서 그를 책망하고 억제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공의회를 소집하거나 결의를 확인하는 것이 홀로 교황에게만 속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성서에는 아무 근거도 없다. 행15:6을 읽으면 사도회의를 소집한 것이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 사도들과 장로들이었다. 모든 공의회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니케아공의회까지도 로마의 주교에 의해서가 아니고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고 확인되었으며 콘스탄틴 황제 이후 다른 많은 황제들도 이와 같이 하였으나 이 공의회들은 모든 공의회 중에서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것이었다.


만일 어떤 도시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아무도 시장의 권한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그 화재가 시장의 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불을 끄지 않는다면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모든 시민이 다른 사람들을 깨우고 모으는 것이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교황청이건 다른 곳이건 간에 죄라고 하는 화재가 일어났을 때에 그리스도의 영적 도시에서는 얼마나 더 이와 같이 행하여야 하겠는가?


교회에는 계발을 위한 권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만일 교황이 자유로운 공의회 소집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그의 권위를 이용하고 따라서 교회의 계발에 장애물이 된다면 우리는 교황과 그의 권위를 고려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교의 권위는 그리스도를 거슬러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는 말을 우리는 견지하자.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행할 수 없고 진리를 위하여 행할 수 있다”(고후13:8)고 하는 바와 같다. 무엇이나 그리스도를 거슬러 행하는 것은 다 적그리스도와 악마의 권력이다.



공의회에서 논의되어야 할 악폐



교황의 속된 마음


우리는 깨어서 사람들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자.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스스로 자랑하는 그리스도교계의 통치자가 이런 면에서 어느 제왕이나 어느 황제도 그와 대등하거나 가까이 할 수 없으리만큼 세속적으로 뛰어난 생활을 한다는 것과 또 ‘가장 거룩하고,’ ‘가장 영적이라’는 칭호를 내세우는 자가 세상 자체보다도 더 세속적이라는 것은 두렵고도 놀라운 일이다. 가장 위대한 제왕들이라도 홑겹의 왕관밖에 쓰지 않는데 교황은 2중의 왕관을 쓴다. 사실 그의 직무는 그리스도교계를 위하여 날마다 울고 기도하는 일과 모든 겸손의 본을 세우는 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로마교도들은 교황을 하늘로 높여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만들었으며 또한 그들 중 더러는 악마로 하여금 자기들을 완전히 지배하게 하여 교황이 하늘의 천사들보다 위에 있고 또 그 천사들을 다스릴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실로 이러한 것은 바로 적그리스도 자신의 행위인 것이다.



추기경들


적그리스도는 지상의 모든 재보들을 틀림없이 취할 것이다. 그들은 주교구들과 수도원들 및 영지들의 제일 좋은 곳을 모조리 독차지해 버린다. 모두 일천 굴덴 내지 일만 굴덴의 금액을 모을 수 있으므로 추기경은 로마에서 부유한 제왕처럼 살 수 있게 된다. 나는 추기경의 수를 줄이든지 혹은 교황이 그 자신의 비용으로 그들을 부양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그들은 교회들을 폐허로 만들고 그리스도의 양들에게서 경건한 목자들을 빼앗아 가며 또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파면시킨다. 추기경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주교구와 교구들의 수입을 쟁탈해 갈 뿐이다.



교황청


지금 독일은 과거에 황제들에게 바치던 것보다는 로마 교황에게 더 많은 것을 바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불평하는 것은 저들이 저들 스스로 조작해 낸 교회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수입 세


첫 수입 세의 허용은 교황이 터키 사람들과 불신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워 그리스도교를 지키는 데 필요한 재물을 이 거액의 돈으로 축적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주어졌었다. 첫 수입 세는 마치 고정세처럼 되어 있다.



사라센 세


교황들은 터키 사람들과 싸우려고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사절들을 내 보내어 돈을 거두게 하며, 때로는 이 구실로 면죄부를 발급한다. 독일 국민들과 주교들과 제후들도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 수입 세가 너무나 수치스럽게 오용되고 원래의 합의한 목적이 지켜지지도 않기 때문에 (주교들과 제후들은) 그들의 토지와 백성들이 그처럼 부당하게 약탈당하고 파멸당하는 것을 묵인해서는 안된다. 로마교도들은 협약한 것을 지키지 않으므로 첫 수입 세를 받을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주교들과 제후들은 법률이 요구하는 대로 이러한 절도와 약탈 행위를 징벌하거나 방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교황의 달


지금 탐욕과 강도의 소굴로 되어 있는 로마 교황청은 모든 성록령이 하나씩 차례로 ‘교황의 달’에 의하여 그의 권한으로 들어올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충족할 줄 모르는 욕구로 모든 성록령의 재산을 가능한한 속히 얻으려고 서두르고 있다. 첫 수입세와 ‘교황의 달’ 이외에도 성록령들과 교구령들이 세 가지 방법으로 로마로 넘어 오게 하는 다음과 같은 계책을 고안해 냈다.


첫째로, 자유 교구령을 소유한 어떤 사람이 로마에서 사망 하거나 로마로 오는 도중에 사망하면 그의 교구령은 영원히 로마 교황청에 속한다. 둘째로, 교황이나 추기경들의 가족에 속한 어떤 사람이 성록령을 가지거나 물려받으며, 혹은 이미 성록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후에 교황이나 추기경의 ‘가족’에 들어갈 경우이다. 셋째로, 성록령으로 인하여 로마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이다. 정당하거나 부당하거나 간에 이러한 분쟁에 관련된 교구령은 역시 영구히 로마 교황청에 속하고 만다. 오, 고귀한 제후들과 영주들이여! 얼마동안이나 당신의 토지와 백성을 이러한 탐욕적인 이리들에게 내맡기려고 하는가!



팔리움 (Pallium)


주교는 거약의 돈으로 팔리움을 사고 무서운 서약으로 그 자신을 교황의 종으로 얽매이지 않고서는 하나의 비준도 받지 못한다는 허구를 고안해 냈다.



주교 보좌직


연로자나 병자나 또는 무능자가 차지하고 있는 수익 많은 성록지에 재직자의 요구나 동의 없이 보좌 주교를 보냄으로 권리 양도를 받아내고 로마의 수중에 들어오게 만든다.



위탁제도


교황은 위탁제도로, 부유하고 수익 많은 수도원이나 교회의 보관을 추기경이나 다른 부하에게 위탁한다. 교황은 그리스도교의 파괴자와 하나님 예배의 파괴자라고 불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짓은 교황의 부단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교황은 해마다 네 개 이상의 위탁제도를 만들어, 그 하나하나에서 6천 굴덴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



통합과 연합


교회법의 규정에 의하여 한 사람이 두 교구와 두 주교구 등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교황청의 탐욕자는 이러한 경우에 ‘연합’과 ‘통합’이라고 하는 ‘주해’를 달아 곧 많은 ‘인콤파티빌리아’(한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는 직무들)를

‘통합’함으로써 교회법을 빠져 나간다.



관리


관리 제도를 통해서 자기 주교구 외에 대수도원 관구나 요직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거기에 따르는 모든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복귀


로마의 탐욕자는 또 다시, 매도자 또는 양도자가 거기에 대한 귀속권을 보유한다는 유리한 조건으로 교구령을 팔고 대여하는 관습을 조작해 냈다.



가슴 속의 보류


교황은 ‘가슴 속의 보류’ 곧 ‘마음의 보류’와 ‘자기 충동’ 곧 ‘자기 권위에 의한 자의적인 의지’라고 하는 고상하고 비열한 계략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교황은 누구나 바보로 만들 수 있는 비열한 ‘주해’를 발견해냈다.



거래소 (Dataria)


마지막으로 교황은 이 모든 고상한 상행위를 위하여 로마 거래소를 세웠다. 말하자면 교황청내의 집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성록령과 교구령 장사를 하는 사람은 다 이리로 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여기서 자기들의 ‘주’를 사고 이러한 대악행을 실현할 수 있는 권한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정의를 돈으로 매수하거나 돈으로 억압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먼저 거액의 돈으로 그렇게 할 권리를 사지 않고는 아무도 감히 악한이 되지 못한다. 실로 이곳에서는 악마가 성자가 되고 마침내 신이 된다.



후거가 (The Fuggers)


한없는 탐욕자는 세 위대한 제왕들도 충분히 만족하게 여길 이 모든 재물로도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이 거래를 옮겨 아우그스부르그의 후거에게 팔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교구와 성록령을 대여하고 교환하고 매수하는 일과 또한 영적인 재산을 흥정하는 일이 이제는 제자리를 잡았으며, 영적이고 현세적인 재산이 하나의 상행위가 되었다. 이러한 사악한 통치가 공공연한 절도행위이고 사기이며 지옥문의 횡포일 뿐만 아니라 전그리스도교계를 영육간에 파멸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불행과 파괴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계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개선할 것에 대한 제안



첫 수입세의 폐지


모든 제후와 귀족과 도시는 그들의 예하 사람들이 로마에 첫 수입 세를 지불하는 것을 담대하게 금하고 이것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교황은 계약을 어기고, 첫 수입 세를 강탈하여 전 독일 국민에게 손실과 모욕을 끼쳤기 때문이다.



로마의 임명에 대한 금지


크리스천 귀족들은 앞으로 한 성록령도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하며 또 차후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거기서 임명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성록령들을 이 포악한 권력 아래에서 이끌어내고 보존하게 할 것을 규정하고 명령하고 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교회의 권리 회복


앞으로는 주교복과 일체 요직의 인준을 로마에서 받지 않게 하고 가장 거룩하고 유명한 니케아 공의회의 법령을 회복하게 하는 칙령이 공포되지 않으면 안된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주교는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두 주교나 혹은 대주교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만일 교황이 니케아 공의회와 다른 모든 공의회들의 법규들을 어긴다면 공의회를 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가 교황에게 이와 같이 공의회들의 규칙을 경멸하고 어길 수 있는 권한을 주었는가?



교황의 법정에서 세속적인 문제를 배제함


세속적인 문제는 로마에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하고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속권에 맡기도록 규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로마교도들 자신은 지키지 않으나 자기들의 교회법 가운데서는 규정하고 있는 바와 같다.



주교의 법정에서 세속적인 문제를 배제함


주교 법정의 재판관들에 의하여 자행되는 난폭한 착취가 모든 주교구에서 금지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만 신앙과 도덕 문제만을 다룰 수 있게 하고, 돈, 재산, 생명, 명예 등에 관한 문제들은 세속적인 재판관들에게 맡기도록 하여야 한다.



독일 교회의 조직


성록령과 교구령에 관련된 사건들은 주교와 대주교, 수석 주교들 앞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보류 제도의 폐지


보류제도가 더 이상 유효해서는 안되며 성록령도 더 이상 로마에 억류되어서는 안된다. 비록 그 재직자가 사망하거나 분쟁이 일어나거나 혹은 재직자가 추기경이나 교황의 ‘종’이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보류 사항의 폐기


‘보류사항’도 역시 폐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사람들에게서 많은 돈을 착취해내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광폭한 독재자들이 이런 것으로 많은 불쌍한 양심들을 유혹하고 혼란시켜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참을 수 없는 손상을 끼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교황 가족의 축소


로마 교황은 ‘직위들’을 없애고 로마에 있는 해충떼들은 감소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교황의 가족들은 교황 자신의 재정으로 부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주교의 서약


주교들은 불법으로 교황에게 서약하라고 강요를 당하고 있다. 엄격하고도 두려운 서약은 폐지되어야 한다.



교황과 황제


교황은 제단에서 황제에게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우는 일 외에는 그에 대하여 어떤 권위도 가져서는 안된다. 앞으로는 황제로 하여금 교황의 발에 입맞추게 하거나 그의 발아래 앉게 하거나 교황이 말을 탈 때에 등자쇠를 잡게 하거나 말고삐를 강제로 붙잡게 하는 저 사악한 교만에 결코 굴해서는 안될 것이다. 설교와 사면과 같은 영적인 직무 이외에는 교황 자신을 속권보다 높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교황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 지상에 걸어 다니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속권 - 나폴리 왕국


교항은 스스로를 억제하여 손을 떼고, 또한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에 대하여 아무 칭호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 국가들


볼로그나, 이몰라, 비센짜, 라베나 그리고 안코나 국경과 로마그나 및 다른 이태리 지방에 있는 모든 영토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영토들은 교황이 강제로 빼앗아 아무 권리도 없이 소유하고 있다.



교황에 대한 경의


교황의 발에 입맞추는 일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교황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발에 입맞추려고 한다면 그러한 짓을 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마땅히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신으로 섬기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말하기를 ‘우리도 너희와 같은 사람들이다’(행14:11-16)라고 말한 것과 같다. 교황이 말을 타거나 또는 마차에 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들어보지도 못하리만큼 화려하게 우상처럼 사람들에게 운반된다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불손한 교만이다. 이러한 악마적인 교만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본보기와 일치하는가? 요컨대 로마에서는, 그리스도는 무가치하게 여김을 받고 교황이 중요하게 여김을 받는다.



로마 순례의 폐지


로마 순례는 폐지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호기심이나 경건한 충동에서 이러한 순례를 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 로마에 가는 사람은 악을 찾고, 두 번째는 그 악한을 발견하며, 세 번째는 그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는 말이 있었다. 지금은 그 세 번의 여행에서 얻을 것을 단번에 얻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 순례 가운데 좋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계명도 복종도 없으며, 오히려 죄와 하나님의 계명의 경멸에 대한 무수한 기회가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순례로 잘못된 공상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오해에 빠진다. 순진한 크리스천들에게서 이와 같이 잘못되고 유혹적인 신앙을 없애고 선행에 대한 참된 이해를 회복하기 위하여 모든 순례를 폐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와 도시들을 보려는 호기심에서 순례를 행하려고 하면 순례를 행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좋다.



탁발 수도단의 개혁


탁발 수도원의 건립을 더 이상 허가해서는 안된다. 탁발승들의 설교와 고해 사죄에서는 사제와 승려 사이의 증오와 시기 외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으며, 일반인에게는 큰 거리낌과 장애 외에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수도원의 수를 줄이도록 교황에게 명령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와 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보다 오히려 행위와 형식을 위하여 살도록 잘못 인도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수도원과 승단들이 자의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되어야 한다. 만약 거부하고 싶은 사람은 거부하라. 정절의 서약은 수도원들을 통하여 매우 보편화되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명령하지 않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의 결혼


사도 바울이 디도서 1장에서 분명히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 사도의 제도에 따라서 모든 도시는 한 사제나 주교를 두어야 한다. 이 사제에게 강제로 아내 없이 살게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한 아내를 가지도록 허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도시가 교중 가운데서 박학하고 경건한 한 시민을 택하여 그에게 목회의 직무를 맡기고 교회의 비용으로 그를 부양하며 또한 결혼을 하든지 안하든지 자유로운 선택권을 그에게 주는 것이 관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로부터 분명히 배울 수 있다. 교직자들에게는 유혹과 죄를 피하게 하기 위하여 결혼할 수 있는 자유를 교회 공의회에서 부여하여야 한다.


당신은 교황에게서 당신의 처자를 훔치라 이러한 모험을 감행할 만한 신앙이 있는 사람은 담대하게 나를 따르라. 여기에는 그만한 원인과 이유가 있다.


첫째로, 모든 사제는 아내 없이 지낼 수 없다. 그것은 육신이 연약함으로 인해서만이 아니고, 오히려 가정의 필요로 인해서이다.


둘째로, 교황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내장의 자연적인 운동이나 살찌는 것을 금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이러한 것을 명령할 권리도 없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 명령을 지킬 의무가 없다.


셋째로, 교황의 법령이 결혼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이 교황의 법령에 거슬러 시작되었다면, 교황의 법령은 끝이 났으며 이젠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남편과 아내를 때에 놓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이 교황의 법령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사제의 결혼에 거리낌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권리도 없이 하나님에게 거슬러 이러한 법령을 만든 로마 교황청의 잘못이다. 하나님과 성서 앞에서는 아무 거리낌도 없다.



수도원 가운데서 보류사항의 폐기


만일 죄가 공적으로 드러나거나 악명 높은 것이라면 고위 성직자만이 그 죄를 벌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비밀한 죄들에 대해서는 아무 권리가 없다. 만일 상사들이 당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숨은 죄를 고백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원하는 어떤 수도사나 수녀에게든 그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은 후에 돌아가서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고 또 해야 할 일을 행하기 바란다. 당신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기만 하라. 그 이상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 그리고 파문이나 ‘범칙 행위’나 저들이 위협하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괴롭게 여기지 말라. 이러한 것들은, 자진하여 고백하려고 하지 않는 공적으로 드러난 죄나 널리 알려진 죄의 경우에 있어서만 타당하다. 이러한 것들은 당신에게 전혀 아무 효과도 없다.



죽은 자의 미사 폐지


모든 기념일과 죽은 자의 미사와 ‘영혼’ 미사를 폐지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수효만이라도 줄이는 일이 역시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을 몹시 노하시게 하며 또한 그 목적이 돈벌이와 폭식과 폭음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역력히 알기 때문이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에서 행해지지 않는 행위는 어떤 것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하나님에게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대로 점점 더 오용되고 하나님과 화해시키기보다 오히려 더 노하시게 만드는 모든 것을 폐지하거나 혹은 적어도 감소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기도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참된 기도를 좋아하신다.



성사금지의 폐지


파문은 성서가 그 용도를 규정하고 있는 곳 외에는 아무 경우에도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곧 참 신앙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나 공공연한 죄 가운데서 사는 자들에 대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현세적인 재산을 위하여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좋을 대로 믿으며 살아간다. 특히 파문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중상하기 위하여 한다.



성자의 날 폐기


모든 축제일을 폐지하고 주일만 보존해야 한다. 성모의 축일과 성자들의 축일을 보존하고 싶으면 그 날을 주일로 옮기거나 아침 미사 때만 지키게 하고 미사 이후 온종일은 노동일로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곧 오늘날의 축제일은 음주, 도박, 태만 및 모든 형태의 죄에 의하여 남용됨으로 거룩한 날이 다른 날보다 하나님을 더 노엽게 해왔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에게 배치되고 또 인간의 영육간에 해로운 일이라면 어떤 공동체나 의회나 정부일지라도 교황이나 주교의 의사에 개의할 바 없이 이것을 폐기시키고 중단시킬 권리가 있다.



사면권의 확대


우리가 돈 올가미 교회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로마에서 사지 않으면 안되는 모든 것, 곧 로마에서 팔고 있는 면죄, 면죄증, 버터 식용허가증, 미사증, 기타 모든 콘페쇼날리아와 부정행위 등과 같은 모든 것을 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저들은 자기들의 교회법으로 우리를 붙잡고 우리에게서 권리를 훔쳐 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권리를 돈으로 다시 사지 않으면 안된다.



순례의 금지



모든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자기 교구내에 순례의 장소를 만들고 보존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뿐, 사람들을 올바로 믿고 살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순례가 잘 되지 않을 장소에서는 성자들을 모시기 시작한다. 이것은 성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군중을 이끌어 돈을 모으기 위해서이다. 순례를 하게하고, 교회당과 기도소들을 세우게 하고, 성자숭배를 보호하게 하며, 또한 다른 어리석은 일들을 행하게 한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참된 신앙이 신기하고 거짓된 미신에 떨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좋은 본보기가 될 저들의 거룩함이 명성과 돈을 벌어들이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특권의 금지


교황이 로마의 약탈소에서 파는 교회의 면장과 교서 등을 폐기하든지 무시하든지 또는 적어도 모든 교회의 공동재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어리석은 자의 행위를 폐지할 수 없다면 모든 경건한 크리스천은 눈을 똑바로 뜨고 위선적인 로마의 교서와 인장에 현혹되지 말며 자기 교회에 머물러 있어서 자기의 세례, 복음, 신앙, 그리스도 및 하나님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지 생활을 금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


크리스천 가운데서는 하나도 구걸을 해서는 안된다. 현재의 불합리한 관습에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노동의 덕택으로 나태하게 지내거나, 다른 사람의 노동의 덕택에 부유하게 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다.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살후3:10)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스리고 설교하는 사제들은 자기들의 영적인 노동으로 인하여 제외된다. 이것은 바울이 고전 9:14에서 말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모든 노동자는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눅10:7)고 말씀하시는 바와 같다.



무용한 미사 금지


많은 미사가 거의 무용할 뿐만 아니라 크게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다는 일도 역시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미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금지할 뿐만 아니라 폐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미사들은 세례와 참회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받는 사람들에게만 이롭고 받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성례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희생제와 선행으로만 여겨지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지금은 미사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하여 드려지고, 또 거기에 모든 소망을 두는 관습이 잠입해 왔다.



성위회와 면죄


성위회, 면죄, 면죄부, 버터 식용 허가증, 미사증, 특별허가 및 이러한 유의 다른 모든 것들은 파멸해야 한다. 교황 사절들은 부정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특권을 거액의 돈으로 팔고 있다. 그리고 저들은 교황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저들에게 이와 같이 말하게 하는 것은 악령이다. 로마 교황청보다 더 악한 것은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교황은 하나님의 계명을 유린하고 그 자신의 계율을 그보다 더 높인다. 만일 교황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어떠한 자가 될 수 있는지 누구든지 말을 하라!



보헤미아 사람들 문제


보헤미아 사람들 문제를 신중하고 공정하게 고찰하고 그들과 동맹을 체결함으로 양편에서 그 무서운 비방과 증오와 시기를 중지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가 왔다. 첫째로, 우리는 정직하게 사실을 고백하고, 자신을 변호하는 일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보헤미아 사람들에게는 요한 후스와 프라그의 제롬이 교황과 크리스천과 황제의 호송권과 서약에 반하여 콘스탄틴에서 화형을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로, 황제와 군왕들은 보헤미아 사람들에게 경건하고 현명한 주교와 학자들을 몇 사람 보내야 한다. 그러나 추기경이나 교황 사절이나 종교 재판관은 결코 보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문제에 관하여 전혀 무지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대학교


대학교도 역시 철저한 개혁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교황권이 제정하고 명령한 모든 것은 다만 죄와 과오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만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가장 훌륭한 책으로 여겨져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형이상학」, 「영혼론」, 「윤리학」 등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라고 충고하고 싶다. 나는 논리학과 수사학과 시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요약되어 보존되거나 사용되는 것을 보고 기뻐해 마지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웅변이나 설교에 대하여 젊은 사람들의 유용한 훈련 교재로 사용된다. 그러나 주석서들이나 주해서들은 폐기하여야 한다. 전 그리스도교계의 장래가 달려 있는 크리스천 청년과 국민의 정수가 교육을 받고 훈련받아야 할 장소가 바로 대학교이다. 그러므로 대학교의 철저한 개혁보다 더 가치 있는 일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개혁되지 않은 대학교보다 더 나쁘고 혹은 더 악마적인 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교회법


첫째로, 교회법은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완전히 말살시켜 버리고 특히 교령집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앞으로의 교회법 연구는 시간 낭비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많은 법령을 주고도 자신들은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 그리고 저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법령들을 지키게 하거나 혹은 돈으로 면제를 받도록 강요한다.



세속법


지방법과 지방 관습이 일반 제국법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며 또한 제국법은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한다.



신학


교황은 여러 가지 엄격한 말로 학교와 법정에서 그의 법령을 읽고 사용하라고 명령을 내리나, 복음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서 교사들이라는 칭호로 불린다면 우리는 그 이름대로 성서를 가르치도록 되어야 하며, 그 외의 다른 것을 가르치게 되어서는 안된다. 실로 교황과 주교들과 박사들 가운데 성령이 계신 징조나 표시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지금 성령이 그들 가운데 계신 것처럼 억지로 나타내려고 하고 있다.



신학 교재


신학 서적의 수효도 역시 감소시켜야 하며,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선정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을 유식하게 하는 것이 많은 책이나 다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를 익히게 하고 경건하게도 하는 것은, 아무리 그 분량이 작다고 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주 읽는 것이다.



학교


더욱이 고등학교나 초등학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보편적인 연구 주제는 성서여야 하며, 어린 소년들에게는 복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도시에는 소녀들이 매일 한 시간씩 독일어나 라틴어로 복음을 배울 수 있는 여학교도 있게 되기를 하나님께 바란다.



학생 수의 제한


대학교들이 성서 연구에 열중한다면, 오늘날처럼 숫자에 관심을 두고 모든 사람이 박사학위를 가지려고 하는 때에는 누구나 대학교에 보내서는 안된다. 대학교는, 주교와 사제가 되어 이단자와 악마와 온 세상에 대항하여 싸우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성서 전문가들만을 배출해야 한다.



교황과 신성 로마제국


우리는 제국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교황은 우리의 재산, 명예, 몸, 생명, 영혼 에게 및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교황들이 바란 것은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그렇게 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자신들을 황제들 위에 있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우리는 제국의 이름과 칭호와 문장을 가지고 있고, 교황은 그 제국의 보물과 권위와 법과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교황은 알맹이를 빼먹고 우리는 빈껍데기를 가지고 논다. 교황의 경우 이외에는 전 세계 역사 가운데서 왕을 성별하고 왕위에 오르게 한 자가 그 왕보다 위에 있는 일은 결코 없었다. 교황이 신적인 일에 있어서 황제의 상사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독일 황제를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황제가 되게 하며 또 그의 권위나 칼이 이런 로마교 위선자들의 맹목적인 주장에 의하여 억압받지 않도록 하라.



경제개혁과 사회개혁


의복의 사치


독일은 수많은 귀족들과 부호들로 하여금 빈곤하게 만드는 의복의 낭비와 사치를 금하는 일반적인 법령과 명령을 크게 필요로 한다.



조미료 거래


조미료 거래도 역시 통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돈이 독일 나라 밖으로 운반되는 또 다른 큰 배이다.



연부금 거래


독일의 가장 큰 불행은 확실히 연부금 거래다. 악마는 이런 관습을 조작해 놓았으며, 교황은 이것을 인준함으로 전세계를 손상시켰다.

한 도시에는, 연부금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백개의 교구령보다 공정한 자유보유 재산이나 세입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 개의 교구령이 있는 것이 더 낫다.



과도한 음식


음식의 남용은 너무나 만연되어 있으며 너무나 우세하게 되었다.



사회악


크리스천들이 다 정결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공공연하고 야비한 창가(娼家)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은 가련한 일이 아닌가?



독신 생활과 그 폐해


지금은 모든 사람이 사제직이나 수도원 생활에 끌리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 생계를 도모하는 일 이외의 다른 이유를 가진 사람이 백에 하나라도 있는가 의심스럽다. 당신이 결혼한 사람으로서 자활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이 되어 성직자가 되려고 한다면, 나는 당신이 성직자가 되지 말고 다른 원하는 것이 되라고 간청하고 싶다. 왜냐하면 현세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면, 성직자의 생활을 계속하는 데는 열의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세상에서 부양하시리라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회에서 당신을 부양하시리라는 것을 신뢰하겠는가?



마감말


나는 하나님의 진노보다는 세상의 진노를 택하련다. 저들은 내 생명을 빼앗는 일 이상은 하지 못한다. 하나님, 저희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을 주시고, 특히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불쌍한 교회를 위하여 행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만한 올바른 영적 용기를 주시옵소서. 아멘.


1520년 비텐베르그에서




? “교회의 바벨론 감금”


소개의 말


본 논문은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신학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하고 반박한 글이다. ‘바벨론 감금’이란 말은 성례전의 왜곡된 가르침을 통칭하는 말이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바벨론 포로가 되어 고난의 생활을 한 것처럼 그리스도 교회의 성례전이 중세기 로마 교회에 의하여 ‘포로’가 된 상황을 비유해서 붙인 표현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크라멘트’를 중요시하는 교회로서 일곱 가지 사크라멘트가 교회의 교의로서 공인된 바 있었다. 곧, 세례, 성찬, 참회, 안수례, 견신례, 결혼례 그리고 임종시의 도유식을 포함한 일곱 가지다. 그러나 루터는 성례전을 두 가지, 곧 세례와 성찬으로 보았다. 참회는 그 근본 뜻에 있어서 세례나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이 밖의 다른 예전들은 ‘성’례전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면 성례전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점이다. 따라서 논문의 거의 절반을 성찬과 세례를 취급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첫째 과오라고 볼 수 있는 ‘포로 상태’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들에게 성찬의 떡만 받게 하고 잔은 주지 않은 점이다. 둘째 과오는 화체설이며 셋째 과오는 성만찬을 희생으로 해석하는 점이다.


“교회의 바벨론 감금”에서 취급된 내용은 오늘날도 로마 카톨릭 사상과 프로테스탄티즘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뺄 수 없는 고전적인 문헌이다. 루터의 모든 학문적 작품 가운데서 이 글을 첫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으며 아울러 일반 기독교인들의 종교적인 관심을 명백하고 자상하게 설명한 것으로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서문


예수


나는 나로 하여금 열심히 묻고 또 연구하게 하는 매우 많고도 매우 유능한 학자들과 더불어 날마다 어쩔 수 없이 더욱 박식해진다. 실베스터의 덕택으로, 그리고 면죄증을 매우 열렬히 변호한 저 형제들의 도움으로 나는 면죄증이 로마의 아부자들의 협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우상을 교묘하게 떠받치는 겉치레꾼들(엑크와 엠저)의 지나친 간사함을 듣고 읽은 후에 나는 교황권이, 바벨론 왕국과 힘쎈 사냥꾼인 님로드의 힘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성찬에 있어서 엠저는 교회의 결정과 그리스도의 명령이 동일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명령과 그리스도의 명령이 아닌 것이 동일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솜씨로 평신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하여, 말하자면 교회의 결정에 의하여 한 가지 요소만(떡만)을 주어야 한다고 입증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나는 산 떡이다”(요6:51)라고 말씀하셨지, “나는 산 잔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이 구절 가운데서 평신도들을 위하여 한 가지 요소만으로 된 성례가 제정되어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6:55)와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요6:53)이라는 말씀이 한 가지 요소의 성찬을 받는 사람은 그것으로 살과 피를 다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나는 평신도들에게 두 가지 요소의 성만찬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다 사악한 자들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먼저 나는 일곱 성례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세 가지 곧 세례와 참회와 떡 만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 세 가지는 로마 교황청에 의하여 비참하게 유수되어 왔으며, 또한 교회는 모든 자유를 박탈당해 왔다.


 

이제 첫째로 떡의 성례에 관하여


첫째로 요한복음 제6장은 성찬에 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므로 이 논쟁에서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성찬이 아직 제정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구절 자체와 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신 말씀에 대한 신앙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요6:53)고 말씀하실 때 이 구절이 성찬의 식사를 명하신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어린아이들과 모든 병자들과 성찬의 식사를 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제6장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의 만찬에 대한 복음서 이야기(마26장, 막14장, 눅22장)와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바울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제자들에게 완전한 성찬을 주셨다는 데에 일치한다. 마태복음(26:27)은 그리스도께서, 떡에 대하여 “너희가 다 이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잔에 대하여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셨다고 보도해 준다. 이와 같이 마가(14:23)도 “그들이 다 이것을 먹었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다 이것을 마셨다”고 말해준다. 주의 만찬에 있어서 두 가지 요소로 된 완전한 성찬 혹은 성만찬이 다만 사제들에게만 주어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동시에 평신도들에게도 주어지거나 한다.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방식으로가 아니고 명령하는 방식으로 “너희는 다 이것을 마시라”(마26:27)고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의 말씀과 본은 확고부동하다. 평신도들이 잔을 원할 때 그 잔을 그들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불경건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세례와 사죄가 전체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똑같이 떡의 성례도, 그들이 원한다면 모든 평신도들에게 전체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너희와 많은 사람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흘린 내 피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피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흘려지는 것을 매우 명료하게 본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장 2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다”라고 한다. 저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허락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신도들에게 두 가지 요소를 거부하는 것은 사악하고 전제적이며, 또한 이러한 것은 어떤 천사의 권한 중에도 없고, 더욱이 어떤 교황이나 공의회의 권한 중에도 없다고 나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이 성례의 첫 감금은 그 본질이나 완전성에 관한 것이다. 로마의 횡포는 우리에게서 이것을 강탈해 갔다. 한 가지 요소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죄를 짓는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이것을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 행하라”(고전11:25)고 말씀하실 때 어느 한 요소의 사용을 명령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것을 개개인의 선택에 맡기셨기 때문이다. 이 선택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요소를 주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죄인들이다. 잘못은 평신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사제들에게 있다. 평신도들은 한 가지 요소를 받지 않거나 두 가지 요소를 받지 않거나 잘못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어떤 가혹한 명령에 의하여 이런 형식에 매인 것처럼 두 가지 요소를 강제로 받아야 한다고 우겨대지 않는다. 평신도들에게 한 가지 요소를 금하는 것이 옳은 일인양 그 횡포를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세례와 고해 성사를 자유롭게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이 성례도 자유롭게 원하고 받을 수 있도록 맡겨지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동일한 횡포에 의하여 한 가지 요소를 받도록 강요를 당하고 있어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다.


이 성례의 둘째 감금은 양심에 관한한 덜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한 가지 관심사는 양심의 모든 거리낌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참 떡과 참 포도주가 제단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가 이단자로 불리는 것을 두렵게 여기지 않게 하고, 또 모든 사람이 구원에 위협을 받지 않고 어느 의견이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믿을 수 있다고 느끼게 하려고 한다. 첫째로 나는 이러한 나의 가르침이 위클리프적이고 후스적이고 이단적이고 또 교회의 규정에 배치된다고 부르짖을 사람들에 대하여 조금도 귀를 기울이거나 중요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빨갛게 달궈진 쇠에 있어서는 불과 쇠의 두 본질이 완전히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부분이 쇠이자 불이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몸이 왜 떡의 본질의 모든 부분에 포함될 수 없겠는가? 또 만일 그리스도의 몸을 떡과 동일시하지 않기 위하여 ‘화체’를 가정해야 한다면, 왜 그리스도의 몸을 외적인 형태와 동일시하지 않기 위하여 ‘외적인 형태의 변화’를 가정해서는 안되는가? 나로서는 어떻게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지 알 수 없기는 하나, 나는 내 이성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고 또 전적으로 그의 말씀에만 의존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떡 가운데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먹으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고전11:23-24)라고 하셨고,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10:16)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떡 가운데 있다”고 말하지 않고 “떡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보잘것없는 인간의 이론에 의하여 침해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다른 뜻으로 곡해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성례의 셋째 감금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사악한 오용이다. 이 결과로 오늘날 교회에는, 미사가 선행이고 희생제라는 의견이 확고한 신념이 되었다. 우리는 이 성례에 대한 참되고 자유로운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인간들의 열심과 신심에 의하여 그 본래의 단순한 제도에 첨가된 것을 제거하는 데 각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성례를 제정하신 말씀은 이러한 것들이다.


<그들이 식사를 할 때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받아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잔을 가지사 감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마시라, 이 잔은 너희와 많은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린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고 하셨다.>


사도도 역시 고린도 전서 11장(23-26절)에서 이 말씀을 전하며, 더 충분히 해석한다. 우리는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사악한 가르침에 의하여 이제까지 밀려다닌 것처럼 모든 가르침의 풍조와 더불어 밀려다니지 않으려면 이 말씀 위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누구나 이 말씀을 집어 치우고 미사에 관하여 생각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은 기괴하고 사악한 가르침들을 가르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단의 미사나 성례가 그리스도의 언약이라는 것을 첫째가는 무오의 명제로 삼자!


만일 우리가 언약이 무엇인가를 탐구한다면, 동시에 미사가 무엇이고, 미사의 바른 사용과 축복이 무엇이며, 미사의 그릇된 사용이 무엇인가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는 바와 같이 언약은 죽어가는 사람이 세우는 약속인데,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증거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내 피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하여” “많은 사람을 위하여”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사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해 주신 사죄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확증된 약속이라는 것을 당신은 알 것이다.


만일 미사가 하나의 약속이라면 미사에 접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어떤 행위나 능력이나 공적으로가 아니고 신앙만에 의해서일 것이다. 인간은 신앙을 통하는 길 외에는 하나님에게 나아가거나 하나님과 관계될 수 없다. 말하자면, 구원의 장본인은, 그 자신의 어떤 행위를 하는 인간이 아니고 그의 약속을 통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의 시작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리는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에서의 아무 노력도 없이 그저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타락 후에 아담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이후에 노아에게도 약속을 주셨고, 아브라함에게도 모든 나라가 그의 씨로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 결국,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완전한 약속인 신약의 약속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약속 가운데서 생명과 구원이, 명료한 말로 그저 약속되었으며 그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주어졌다. “내 피로 세운 새 언약”, 이것으로 우리에게 유산을 얻게 하기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사죄를 위한 은총이 약속된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미사를 가치 있게 지키는 데는 신앙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필요치 않음을 알 것이다.


오늘날 미사가 그리스도의 약속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 대신에, 미신적이고 불신적인 망상을 가지고 숭배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오용하고 그 약속에 대한 신앙을 도외시하거나 말살시키는 것은 우상숭배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는 모든 사제들과 승려들, 주교들과 상사들이 우상 숭배자임이 분명하다. 저들은 이와 같이 미사나 성례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무지와 오용과 조소로 인하여 가장 위험한 상황 속에 살고 있다. 가장 안전할 길은 하나님의 어떤 다른 약속을 들으러 가는 것과 똑같은 정신으로 미사를 받으러 가는 길일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많은 것을 행하거나 기여하려고 준비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서 당신에게 약속되거나 혹은 사제직을 통하여 약속으로서 선포되는 모든 것을 믿고 받으려고 준비하는 길일 것이다.


미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약이며, 떡과 포도주는 성례이다. 표징보다 말씀 가운데 더 능력이 있는 것과 같이, 성례보다 언약 가운데 더 큰 능력이 있다. 따라서 미사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약속의 말씀에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야 할 우리가 그를 위하여 어떤 선행을 행할 자로 나타날 때 얼마나 불신적인 무례가 되겠는가?


미사나 하나님의 약속은 기도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다만 믿음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약과 성례 자체를, 그와 동시에 드리는 기도와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사와 기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기도는 그가 원하는 대로 여러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으나, 미사는 그 믿는 사람에 의하여 그 믿는 정도로만 받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사는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며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 목적은 각자의 신앙을 강화하고 기르기 위한 것이다.


제거되어야 할 두 번째 방해물이 있는데, 미사가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희생 제물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신념이다. 아무도 의식의 매력에 속고 많은 호화로운 형식에 얽혀서 미사 자체의 단순성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언약을 분여하거나 약속을 받는 것이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과 전혀 다른 것과 똑같이, 미사를 희생 제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전혀 모순이 된다. 사제가 떡과 잔을 봉헌한 직후에 그 떡과 잔을 높이 드는 것은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높임은 감사함으로 받은 것을 들어서 하나님에게 되돌리는 히브리인 의식의 잔재이거나, 이러한 언약으로 우리를 신앙에 이르게 하려는 하나의 권고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부패하고 가장 위험한 시대에 미사의 제물을 드리는 사제는 조심해야 한다. 첫째로 그들은 짧은 기도문과 함께 미사의 대소 경전의 말을 성례와 관련시키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제물에 대해서 너무나 강하게 언급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제는 일반 미사를 집전할 때 미사에 의하여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성찬을 베푸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제가 소위 ‘봉헌 미사’를 드려달라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요청을 받으면, 미사의 대가를 받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며, 또는 어떤 봉헌 제물이든 드리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미사와 기도, 성례와 행위, 언약과 희생 제물은 혼동해서는 결코 안된다. 왜냐하면 전자는 사제의 집전을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의 신앙을 요구하며, 후자는 사제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 하나님의 들어주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내려오며, 후자는 올라간다. 그러므로 전자는 가치 있고 경건한 봉사자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는 않으나 후자는 실로 이러한 자를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시기”(요9:31) 때문이다.


미사는 슬퍼하고 번민하고 괴로워하고 혼란에 빠지고 미로에 떨어진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며 그들만이 성찬을 가치 있게 받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성례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죄의 용서를 가져오므로, 죄로 인하여 번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두려움 없이 가까이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확고부동한 신앙으로 이 언약에 매달리고, 또 언약의 말씀이 선포하는 것이 당신에게 거저 주어진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의 언약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들에 대한 유일한 구제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런 것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의 당신 자신의 어떤 행위나 노력으로도 결코 양심의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신앙만이 양심의 평화를 가져다주며, 불신은 오로지 양심의 고뇌만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세례의 성례


첫째로 세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곧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막16:16)고 하는 것이다. 이 약속은 행위, 서약, 수도단 및 인간이 만들어 낸 일체의 모든 화려함보다도 훨씬 위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구원이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약속의 진리가 일단 우리에게 선포되면 이것이 죽을 때까지 존속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서 일어나 회개할 때 우리는 과거에 멀어졌던 세례의 능력과 신앙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에게 행해진 약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된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언제나 참회할 때마다 무엇보다도 애굽에서 나온 일을 기억하였으며, 자기들을 이끌어 내주신 하나님을 회상하였다.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더 우리가 애굽에서 나온 길을 기억해야 하며, 또한 이 기억에 의하여 중생의 씻음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하겠는가?


세례를 받은 자는 그가 비록 원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믿기를 거부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죄를 범했어도 그는 구원을 잃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와 당신의 신앙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하여 행위의 외적인 화려함과 인간이 만든 규정의 궤계가 당신을 속이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당신은 무엇이고 아무 행위도 없이 성례의 신앙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행위는 신앙에 뒤따라 올 것이다. 세례는 어떤 방식으로 베풀어지든지 인간의 이름으로 베풀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베풀기만 하면 구원을 가져다준다. 세례의 능력은 이것을 베푸는 사람의 신앙이나 활용보다도 이것을 받는 사람의 신앙이나 활용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세례의 둘째 부분은 표징이나 성례로서 물 속에 잠기는 일이다. 지금 세례와 떡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동일한 하나님께서 아벨을 그의 희생 제물로 구원하셨고, 무지개로 노아를 구원하셨으며, 할례로 아브라함을 구원하셨고, 또 모든 사람들을 저들의 각각 다른 표징으로 구원하셨다. 표징에 관한한 옛 율법의 성례와 새 율법의 성례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표징의 모든 효력은 신앙 자체에 있으며 행위에 있지 않다. 성례는 행해질 때 성취되지 않고 믿을 때 성취된다. 그러므로 성례의 의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거나 또는 성례가 은총의 ‘실제적인 표징’이라고 하는 것은 참될 수 없다. 우리는 눈을 똑바로 뜨고 표징보다 말씀에 더 주의하고 행위나 표징의 활용보다 신앙에 더 주의할 줄 알아야 한다.


세례는 두 가지 곧 죽음과 부활, 말하자면 완전무결한 의인을 뜻한다. 목사가 아이를 물 속에 잠기게 할 때는 죽음을 뜻하며, 다시 나오게 할 때는 생명을 뜻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죄를 씻어버리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옳기는 하나 그 표현은 세례의 충분한 의의를 드러내기에는 너무나 온화하고 미약하다. 세례는 오히려 죽음과 부활의 한 표상이다. 이러므로 나는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물 속에 잠기게 하고 싶다. 세례 의식은 곧 마치지만 그것이 뜻하는 것은 우리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때까지 지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의 능력을 작고 변변찮은 차원으로 감소시켜 온 사람들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인간의 행위와 가르침 가운데서 이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 생애는 세례여야하며, 세례의 표징이나 성례의 성취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다만 세례 곧, 죽음과 부활에 넘겨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영광스러운 자유와 세례의 이해는 우리 시대에 포로로 감금당하였다. 우리는 그 허물을 로마 교황의 독재에 돌리지 않고 누구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자유와 양심을 위하여 부르짖는다. 그리고 사람의 것이든 천사의 것이든 아무 법도 크리스천들에게 자신의 동의 없이 정당하게 부과될 수 없다고 나는 자신 있게 부르짖는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법에서 자유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례의 영광과 크리스천의 자유의 축복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또 교황의 횡포로 인하여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기 때문에 나는 개인으로서 나 자신을 해방시키고 또 교황과 그의 모든 교도들을 다음과 같이 비난함으로 내 양심을 자유롭게 간수하려고 한다. 곧 저들이 모든 법과 법령을 폐기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자유를 다시 주며 가르치지 않는다면 저들은 이런 비참한 감금 아래서 죽는 모든 영혼에 대하여 죄가 있으며, 또한 교황청은 참으로 바벨론과 바로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의 가르침과 법으로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죄와 멸망을 더하게 하는 이 자가 아니라면, 누가 ‘죄 있는 사람’이며 ‘멸망의 자식’이겠는가? 교황의 횡포는 이 모든 것을 여러 세기 동안 행하였으며, 넘치도록 행하였다. 이 횡포는 신앙을 멸절시키고 성례를 흐리게 하였으며, 복음을 억압하였다.


유아는 다른 사람들 말하자면 세례를 받게 하려고 데리고 오는 사람들의 신앙의 도움을 받는다. 세례를 베푸는 믿는 교회의 기도 곧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도를 통하여 유아는 주입된 신앙으로 변화되고 깨끗해지며 새로워진다.


나는 한 가지 더 첨부하려고 한다. 그것은 모든 서약을 완전히 폐기하고 무효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결코 그 자신의 자유 선택에 의하여 서약하려고 하는 사람을 금하거나 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서약을 경멸하거나 정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서약하는 일을 공적인 생활양식으로 내세우고 정당화하는 데 대해서는 가장 강력하게 만류하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위급한 때에 서약할 수 있는 개인적인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공적인 생활양식으로서 서약을 권장하는 것은 교회와 단순한 영혼들에게 가장 해로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로 서약은 일종의 의식법이며 인간적인 법령이나 추정이므로 크리스천의 생활과는 정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성서 가운데는 이러한 서약 특히 평생의 정절이나 복종이나 빈곤에 대한 예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성서의 보증이 없는 것은 무엇이나 다 가장 위험한 것이며 결코 아무에게도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하물며 공적이고 공통된 생활양식으로 제정되어서는 더욱 안된다. 물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모험을 감행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허용할 수 있다. 어떤 일들은 성령에 의하여 몇몇 사람들 가운데서 행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본보기로 삼거나 모든 사람의 생활양식으로 사아서는 안된다. 따라서 나는 교회의 자유와 세례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서약과 수도단을 폐기시키거나 또는 적어도 그런 것들을 인정하고 찬양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이러한 생활태도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성서에 아무 증거나 근거가 없으며, 전혀 인간적인 교황들의 교서들에 의하여 과장된 것이기 때문이며, 외적인 가식과 일탈적인 성격에 의하여 위선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수도단에 들어가거나 사제직을 갖지 말라고 충고한다.



참회의 성례


이 성례의 최고의 폐해는 저들이 참회를 완전히 폐기해버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16장(19절)과 18장(18절)에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매면…” 이라고 말씀하시며, 또 요한복음 마지막 장(20:23)에서 “만일 너희가 어떤 사람의 죄를 용사하면 그 죄는 사함 받으며…”라고 말씀하신다. 참회자의 신앙은 이 말씀에 의하여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권세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신앙에 대해서만 말씀하신다. 그러나 저들은 사람들의 구원이 되는 신앙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다만 교황들의 포악한 권세에 대해서만 지껄인다. 참회의 약속은 가장 강압적인 독재로 화하여 단순한 속권 이상 가는 주권이 되곤 했다. 이러한 우리의 바벨론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신앙을 완전히 업신여겨 방자하게도 이 성례에 신앙이 필요함을 부인하기까지 한다. 저들은 참회를 세 가지 부분, 곧 회개와 고백과 보상으로 나눈다.


첫째로 저들은 회개(contrition)가 약속에 있어서 신앙을 앞서며 훨씬 위에 있다고 가르친다. 저들은 신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도 않는다. 저들은 행위에 매우 집착하고 있으며, 또한 회개와 겸손에 의하여 용서를 받은 많은 사람들에 관한 성구들에 매우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은 이러한 회개와 슬픈 마음을 일으키게 한 신앙에 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의 참회 가운데서 좋은 것은 무엇이나 다 자신의 세심한 죄 열거에 기인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와 우리의 신앙에 기인한다. 다른 모든 것들은 거기에 따르는 행위와 열매들이다. 그 행위와 열매들은 인간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신앙으로 이미 선하게 된 인간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참회가 횡포와 탐욕에 내맡겨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악함과 해로운 가르침에 완전히 넘겨진 것이다. 탐욕과 권세의 첫째가는 온상은 고백과 보상이다. 죄의 고백(confession)은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사적인 고백에 대해서는 비록 성서에 의거하여 입증할 수는 없으나 진심으로 찬성한다. 사적인 고백은 유용하며 필요하기까지 하므로 기쁘게 여긴다. 그런데 내가 싫어하는 것은 이러한 고백이 이제까지 교황들의 독재와 강요에 지배를 받아왔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숨겨진 죄까지도 자신들을 위하여 보류해두고 자기들이 지명한 고해 신부들에게 고백하라고 명령한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사람들의 모든 횡포를 참으라고 명하시고 이러한 강요자들에게 굴복하라고 가르치시는 바와 같이 이런 보류사항의 모욕을 끈기 있게 참을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저들에게 이와 같이 보류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부인하며, 또한 이점에 대해서는 저들이 한 자라도 증거를 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태복음 18장(15-19절)말씀을 볼 때, 자기의 숨은 죄들을 형제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갈구하는 자는 확실히 그리스도이신 진리 안에서 땅 위에서 그의 형제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든지 또는 견책을 받은 이후든지 간에 사사로이 어떤 형제 앞에서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여 자신의 태도를 고치면 그의 숨은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적인 죄까지라도 사면할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저들이 보상(satisfaction)을 얼마나 무가치하게 다루어 왔는가에 대해서는 면죄증에 관한 논쟁에서 충분히 증명하였다. 그들은 이 보상을 계속 되풀이하여 말하고 그 필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는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한층 더 나아가 참회자가 부과된 보상을 다하지 못한 죄들을 새로이 되풀이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그릇된 잘못은, 보상을 마치기 전에 죄인들을 사면하는 일로써 크게 권장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회개 보다는 영속하는 보상을 마치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은 죄를 고백할 때 회개도 함께 마치고 다해 버린 것으로 생각한다. 사면은, 초대교회에서 행한 것처럼, 오히려 보상을 마친 다음에 주어져야 한다. 그 결과 참회자들은 보상하는 일을 마친 다음에는 한층 더 부지런히 신앙과 새 생활을 위하여 열중하였던 것이다.



? “크리스천의 자유”


소개의 말


이 논문은 회유적인 정신으로 쓰여진 점에서 앞의 두 책자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것도 크리스천의 생활에 적용된 루터의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적극적이고 솔직한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 이 논문은 말팃쯔의 권고로 교회 내의 갈라진 틈을 메꾸려는 마지막 시도에 그 기원이 있다. 비록 이 논문이 중세기 말의 신비주의 정신을 나타내며 또한 많은 교황 지지자들에 의하여 좋게 평가되기는 했으나, 이것은 믿는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된다는 사실과 또한 사랑으로 그의 이웃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명시해 준다.



교황 레오 제 10세에게 보내는 공개장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있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아멘. 가장 탁월한 레오 각하여! 내가 결코 사적으로 귀하를 나쁘게 생각지 않았고, 나는 귀하에게 모든 좋은 것이 영원히 있기를 바라는 부류의 사람이며, 나는 어느 사람과도 그의 도덕에 관해서 싸우지 아니하고 다만 진리의 말씀에 관해서만 싸운다고 말할 때 나를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로마 교황청 곧 귀하의 직위를 참으로 경멸했습니다. 귀하나 다른 어느 사람이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어느 바벨론이나 소돔보다도 로마 교황청이 더 부패하였고, 완전히 타락하고 절망적이며, 널리 알려진 불경건이라는 특징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착한 크리스찬들이 귀하의 이름과 로마 교회의 가면 아래에서 조롱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격분했습니다. 나는 신앙의 생기가 내 안에 살아 있는 한 귀하의 직위에 항거했으며 또한 부단히 항거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어떤 불가능한 것을 위하여 싸운다든지, 나의 노력만으로 어떤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의 크리스찬 형제들에게 빚 진 것을 자인합니다. 내게는 로마의 재화로 그들이 많이 파멸되지 않게 되고 그 파멸의 비참상이 최소한으로 그치도록 그들에게 경고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황청은 한 때는 하늘의 문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닫을 수도 없는 지옥의 열린 입구가 되고 있습니다. 교황 레오 각하여! 귀하가 세계의 주이신 듯이 주장하며, 귀하의 권위를 수락하지 않고 귀하가 하늘과 지옥과 연옥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셨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크리스찬으로 생각지 못하게 하라는 밀고자들에게 속지 마옵소서. 이런 자들은 귀하의 영혼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귀하의 원수들입니다. 요컨대 귀하를 높이는 자들은 하나도 믿지 마시고, 도리어 귀하를 내려깎으려는 자들을 믿으옵소서. 모든 크리스찬의 생활을 간결한 형식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 책자를 귀하에게 선물로 드립니다.


1520년 9월 6일, 비텐베르그에서




신앙(혹은 자유)에 관한 문제 - 내적인 것


크리스찬의 본질 - 자유인과 봉사자


정신의 자유와 속박에 대한 두 명제. “크리스찬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크리스찬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말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사랑은 그 본질상 언제든지 섬기도록 되어 있으며 또한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다.



크리스찬의 두 가지 명제


사람은 영적이며 육체적인, 이중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 본성의 다양성 때문에 성서는 동일한 사람에 대하여 대립되는 점을 주장한다(고후4:16, 갈5:17).



크리스찬이 되게 하는 필수 요건


외적인 것이 크리스찬의 의와 자유를 만들어낸다든지 불의나 노예적인 신분을 만들어내는 데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외적인 행위와 자유


단 한 가지만이 크리스찬의 생활과 의와 자유를 위하여 필요하다. 그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인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말씀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영혼은 행동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영혼을 위하여 전혀 도움이 없음을, 정학하고 확고부동한 사실로 우리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유


영혼이 그의 생명과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의

롭게 되는 것도 신앙만으로 되며 어떤 공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 -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아 소멸과 구원


신앙은 공적(선행)과 관련하여 존재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신앙에 의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의 죄가 사함을 받고 또 한 타자 곧 그리스도만의 공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한 이런 것이 가능하다.



자유 달성의 요소 - 신앙


신앙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하는 것처럼 오직 내적인 사람 안에서만 지배할 수 있다. 동시에, 신앙만이 의롭게 하는 것이므로 내적인 사람은 전혀 어떤 외적인 공적이나 행위로 의롭게 되거나 자유롭게 되거나 혹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과, 또한 그 성격은 어떻든지 그러한 선행은 이 내적인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와 반면에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불경건과 불신만이 그를 죄 되게 하고 죄의 저주받을 종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선행에 대한 모든 신뢰를 버리고 더욱더 믿음만을 강화하며 또한 신앙을 통하여, 선행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 가운데서 자라는 것이 모든 크리스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공적을 요구하는 율법 가운데서의 의의 불가능성


공적 없이 믿음만이 의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며 구원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계명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보여주기는 하나 이것을 행할 힘은 주지 않는다.



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만일 네가 율법이 명령하는 대로 율법을 완수하고 탐내지 않기를 원한다면, 와서 그 안에서 은총, 의, 평화, 자유 및 모든 것이 너에게 약속된 그리스도를 믿으라. 만일 네가 믿으면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나 믿지 않는다면 너는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은 말해준다. 율법이 명령하는바 사실상 전혀 무용한 많은 선행을 완수하려고 노력함으로써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신앙으로는 빠르고 용이하게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총을 연결시키는 ‘신앙’


하나님의 약속들은 거룩하고 참되고 의롭고 자유롭고 또한 선이 가득 찬 평화로운 말씀이다. 그러므로 굳건한 신앙으로 이 말씀에 매어 달리는 영혼은 이 말씀과 밀접하게 결합되고 완전히 이 말씀에 동화되는데, 그 말씀의 능력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 가운데 충분히 잠겨지고 도취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 크리스찬의 자유는 우리를 게으름이나 사악함 가운데서 살게 하지 않으며, 인간의 의와 구원을 위하여 율법이나 공적이 필요치 않도록 만든다. 이것이 신앙의 첫째 능력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러러보는 ‘신앙’


우리는 진실성과 정직성과 완전한 선보다 더 큰 무엇을 사람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신뢰하지 않을 때 하는 것처럼, 그를 거짓되고 악하다고 생각하여 의심하는 것보다 더 큰 경멸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와 같이 영혼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할 때 그를 참되고 의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돌릴 수 있는 것으로 아무 것도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가장 고귀한 예배는 우리가 진실성과 정직성과 그리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돌리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에게 돌리는 바로 그것이다. 사도 바울도 롬4:3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가장 완전하게 영광을 돌렸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고 말하며, 또한 만일 우리가 믿는다면 동일한 이유로 우리의 신앙이 우리를 의로 여김 받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죄를 정복하는 신앙


그리스도는 은총과 생명과 구원이 충만하시다. 영혼은 죄와 죽음과 멸망으로 충만하다. 이제 신앙을 그들 사이에 끼워보자. 그러면 죄와 죽음과 멸망은 그리스도의 것이 될 것이고, 은총과 생명과 구원은 영혼의 것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리스도가 신랑이시라면 그는 그의 신부의 것을 그 자신이 맡으셔야 하고 그의 것을 그 여자에게 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부유하고 거룩하신 신랑 그리스도는 이제 가난하고 사악한 매음부와 결혼하시고 그 여자를 모든 악에서 사해 주시며 또한 그 여자를 자기의 모든 선한 것으로 치장해 주신다. 죄는 이제 그 여자를 멸망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죄는 그리스도에게 지워지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삼키운 바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의 남편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가진다.



첫째 계명의 성취로서의 신앙


여기서 당신은 많은 것이 신앙에 기인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될 것이다. 곧 신앙만이 율법을 완수할 수 있고 또한 선행 없이 의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너는 한 하나님을 섬길지니라”고 말하는 첫째 계명이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완수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만이 크리스찬의 의와 모든 계명의 완수인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계명을 완수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계명을 완수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제로서의 그리스도


그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대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내적으로 그의 성령의 산 교훈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기도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제사장의 두 가지 참된 직무를 이행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크리스찬의 자유와 권위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들이며 왕들이다. 이것은 벧전2:9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든 크리스찬은 신앙으로 모든 만물보다 더 높여졌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그는 빠짐없이 모든 만물의 주가 되었다.



사제로서의 크리스찬의 존엄성


우리는 왕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히 제사장들이기도 하다. 이것은 왕이 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거룩한 일들을 서로 가르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직무이며 이 직무는 불신자에게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크리스찬의 만인 제사장직


‘사제,’ ‘승려,’ ‘영적인 것’ 및 ‘성직자’란 말들이 그릇된 용법에 따라 현재 성직자들이라 불리고 있는 소수 사람들에게 잘못 적용되고 있다. 성서는 현재 교황, 주교 및 군주라고 당당하게 불리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에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믿음과 크리스찬의 자유를 가르쳐야 할 사람들에게 ‘섬기는 자들,’ ‘종들,’ ‘청지기들’이란 명칭을 붙이기는 하나, 이런 칭호들을 특별히 구별하지는 않는다. 비록 우리가 다 같이 제사장들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우리가 다 공적으로 봉사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다.



신앙의 성립을 위한 그리스도 인식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될 뿐만 아니라 당신과 나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며 또한 그에게 대해서 말해진 것과 그의 이름으로 표시된 것이 우리 가운데서 효과가 있게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설교되어져야 한다. 신앙이 우리 안에서 생기고 보존되는 것은, 왜 그리스도가 오셨고 무엇을 그가 가져오시고 주셨으며 또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을 설교함으로 되어진다.

인간은 (그의 구원을 위하여) 율법도 선행도 필요로 하지 않는데, 만일 그것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고 믿는다면 그는 오히려 그것에 의하여 손상을 받을 것이다.

행동(혹은 본성)에 관한 문제 - 외적인 것



선행의 필요성


“만일 신앙이 모든 것을 행하고 단독으로 의에 이르기에 충분하다면 왜 선행이 명령되어 있는가? 우리는 몸을 편히 가져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신앙으로 만족하라”고 묻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답하려고 한다. 이는 우리가 마지막 부활의 날까지는 전적으로 내적이고 완전히 영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에 참으로 더 큰 부분인 성령의 충만함까지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정과 방종의 극복


신앙에 의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내적인 사람은 그 안에서 매우 많은 유익이 그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 때문에 기쁘기도 하며 행복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강제적이 아닌 사랑으로써, 이득을 생각지 않고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의 한 직무인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하는 동안에, 과연, 그 자신의 육 가운데서 세상을 섬기려고 하고 그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고 하는 반대된 의지에 부딪히게 된다. 신앙의 정신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즐겁게 열심히 몸을 제어하고 저지하려고 한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라고 말하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극기와 절제


신앙으로 영혼이 깨끗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영혼은 모든 것 특히 그 자신의 몸이 정화되어 모든 것이 그와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미하는 데 동참하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그의 몸에 필요한 것이 그를 강제하고 또한 그의 몸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많은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에 사람은 게으를 수 없다.



의롭게 된 크리스찬의 행동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고 죄 없이 바르게 지음을 받았다. 동산을 경작하고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고 바르게 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게으르지 않게 하려고 주님은 그에게 행할 임무 곧 동산을 경작하고 보호하는 임무를 주신 것이다. 이 임무는 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만 행해진 참으로 가장 자유로운 일이었으며, 의, 곧 아담이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또한 우리들 모두의 생래의 권리가 될 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믿는 자의 선행은 이와 같은 것이다. 신앙에 의하여 성별된 크리스찬이 선을 행하는 것이지 그 선행이 그를 더 거룩하게 하거나 혹은 더 크리스찬이 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신앙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믿는 사람이 먼저 믿는 자와 크리스찬이 되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행위는 전혀 무가치하게 될 것이며 참으로 사악하고 저주받을 죄가 될 뿐이다.



선인이 선행에 앞서야 함


“선행이 선한 사람을 만들지 못하나,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한다. 그리고 악한 행위가 악한 사람을 만들지는 못하나, 악한 사람은 악한 일을 행한다.” 나무가 좋고 나쁨에 따라 그것들이 맺는 열매도 좋고 나쁘게 되는 것과 같이, 사람도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선하거나 악해야 하며, 또한 그의 행위가 그를 선하거나 악하게 만들지 못하고 그 자신이 그의 행위를 선하거나 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행위가 사람을 신자로 만들지 못하는 것과 같이 역시 선행은 그를 의롭게 만들지도 못한다. 그러나 신앙이 사람을 믿는 자와 의로운 자로 만드는 것과 같이, 신앙은 선행을 행하기도 한다.



신앙이 선인을 만듬


선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공적을 행함으로서가 아니고 그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신앙으로 시작하게 하라.

그것은 신앙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며 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는 선행의 졸렬성


참회, 고백 및 보속에 대해서 설교하고 쓰는 것이 좋기는 하나, 만일 우리가 그것으로 그치고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는 데까지 나가지 아니한다면 우리의 교훈은 확실히 거짓되고 흉악한 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되고 그들의 죄를 알게 됨으로 뉘우쳐 회개하고 한층 더 선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는 율법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상하게 하고 동이지는 않으며, 치기만 하고 낫게 하지는 않으며, 죽이기만 하고 살게 하지는 않으며, 지옥에 끌어넣기만 하고 다시 끌어내지는 않으며, 천하게만 하고 높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이 가르쳐지고 생겨지는 은총의 말씀과 사유의 말씀을 역시 설교해야 한다. 이러한 은총의 말씀이 없이는 율법과 통회와 참회와 및 다른 모든 것의 행위가 무용하게 행해지고 가르쳐지는 것이다.



이웃을 위한 사랑과 봉사로서의 선행


사도 바울이 크리스찬의 생활에 대한 규칙을 서술한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선행을 바쳐야 한다.



귀감으로서의 그리스도


크리스찬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될 것이다. “비록 나는 무가치하고 저주받을 사람이나, 나의 하나님은 내편으로부터의 아무 공적 없이 순수하고 값없이 주시는 자비로 의와 구원의 모든 부를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주셨으므로 이제부터 나는 이것이 참되다는 것을 믿는 신앙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로이 기쁘게 내 마음을 다하고 열렬한 뜻을 다하여 더할나위없이 귀한 그의 부로 나를 뒤덮으신 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그가 받으실만 하다고 인정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나에게 주신 것과 같이 나는 자신을 하나의 그리스도(크리스찬)로 나의 이웃에게 줄 것이다. 나는 이웃을 위하여 필요하고 유익하고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선한 것을 내가 풍부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자유로운 사랑에 근거한 선행


사도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으나 이것은 할례가 디모데의 의를 위하여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고 신앙에 있어서 약하고 신앙의 자유를 아직도 파악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을 거스르거나 경멸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와 반면에 유대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경멸하고 할례가 의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주장할 때 바울은 그들에게 항거하였고 디도가 할례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타인의 약한 마음을 거스르거나 경멸하지 않으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신앙의 자유가, 완고하고 행위로 의로워진 사람들에 의하여 침해받거나 무시 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바울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의 자유로 전향하게 하기 위하여 약한 사람은 잠시 관용하고 완고한 사람은 늘 저항함으로 중간 길을 택하였다.


크리스찬들은 통치하는 당국자에게 복종하고 모든 선을 행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나, 이미 신앙으로 의롭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으로 의롭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자유 가운데서 그렇게 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당국자 자신을 섬기며 자유로이 사랑에서 그들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크리스찬은 한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나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사람들이 명령하는 대로 이것저것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의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교황이나 주교나 공동체나 행정관이나 혹은 나의 이웃에 대하여 적절한 경의를 표하며 그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을 위하여서는 이 모든 것의 어떤 것도 필요로 하시지 않았으나 나를 위하여 훨씬 더 많이 행하시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또한 율법의 지배 밑에 계시지 아니했으나 나를 위하여 율법아래 서게 되신 것과 같이, 나도 모든 것을 행하고 고난을 받을 것이다.”



기독교적인 선행 -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행동


당신이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신앙이 선행으로 가꾸어지든지 혹은 고난으로 가꾸어지든지, 이것이 자라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하나님에게 받은 좋은 것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되어 만인의 공유물이 되므로 모든 사람은 그의 이웃‘처럼 되어’ 마치 그 자신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있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좋은 것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왔으며, 지금도 흘러 들어오고 있다. 그는 우리처럼 ‘되시었고’ 또한 그가 마치 우리이신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행하셨다. 좋은 것이 우리로부터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흘러가며, 이것이 내 자신이 담당한 내 이웃의 죄를 덮고 중재하게 하며, 또한 마치 이웃의 죄가 내 자신의 죄인 것처럼 그 가운데서 일하고 섬길 수 있도록 내 믿음과 의를 하나님 앞에 바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사랑이며, 크리스찬 생활의 진실한 규범이다. 참되고 진실한 신앙이 있을 때 사랑은 참되고 진실하게 된다.



마감말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스도시여! 우리로 이 자유를 이해하고 보존하게 하옵소서. 아멘.


발문

신앙의 자유에 대한 말을 받아들일 때 이것을 육체에 대한 하나의 기회로 돌리고, 이제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 허용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고, 선행에 대한 잘못된 견해, 곧 의인이 선행으로 얻어진다는 어리석은 가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크리스찬은 중간 길을 택하고,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항해야 한다. 한 부류는 자유에 대한 진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이 없기 때문에 의식을 의인의 방편으로 자랑하고 규정하며 고집하는 완고한 의식주의자들이다. 다른 한 부류는 신앙의 자유를 파악하지 못한 관계로 신앙이 약하고 고지식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크리스찬은 거리끼게 하지 말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들이 더 충분히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약함에 대하여 양보해야 한다.


의식은, 모형과 설계도가 건축가와 장인에게서 차지하는 것과 동일한 위치를 크리스찬의 생활에서 차지하게 되어야 한다. 그것은 영구적인 구조로서는 아니나, 그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세울 수 없고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준비된 것이다. 구조가 완성되면 모형과 설계는 버림을 받는다.


영원히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여, 우리가 땅위에서 그의 길을 알고 만민 중에서 그의 구원을 알도록 마침내 그들과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의 얼굴을 비추옵소서. 아멘.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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