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세바 : 요부인가 지부(智婦)인가
김윤희·철학 박사(Ph.D),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 |
사무엘하 11:2∼5, 26∼27; 12:15, 24∼25; 열왕기상 1:15∼21; 2:13∼25 |
세상에 살다 보면 남녀관계만큼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도 드물다. 왜냐 하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거나 조정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윗의 아내들 중에는 독특하며 나름대로 다윗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인들이 많이 있다(예: 미갈, 아비가일 등). 그러나 밧세바 만큼 다윗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여인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삶 속에서 밧세바와의 관계만큼 이해하기 힘든 관계도 드물다. 이 여인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밧세바라는 여인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살펴보자. 밧세바와 다윗의 간음사건(삼하 11:2∼5, 26∼27)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자세한 것은 ‘우리아’를 참조하라). 사무엘하 11장 2절은 다윗이 왕궁(‘왕의 집’)에 있고 4절에는 밧세바가 자기 집(‘그녀의 집’)으로 돌아감으로 공간적인 시작과 끝을 알리고 있다. 이 두 절 사이에 다윗은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3, 4절) 밧세바의 신분을 알아보게 하고 그녀를 데려다가 동침하게 된다. 다윗의 군대장관(요압)과 그의 신복들과(그 속에는 우리아도 있었음) 온 이스라엘은 전쟁터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그 순간에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씨에스타(siesta)를 즐기고 잔인한 폭군처럼 원하는 여인을 골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밧세바에 대해 짧지만 몇 가지 정보가 나와 있다. 그것은 이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고 심히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모두 외적인 묘사들이며 이 여인의 내적인 면모와 생각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실컷 자고 일어나서 할 일 없는 군주에게 달밤에(목욕하는 여인이 보일 정도면 상당히 달 밝은 밤이 아니었겠는가!) 목욕하는,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처럼 자극적인 장면이 또 있겠는가! 이성도 영성(靈性)도 저버린 극적인 육적인 만남이 두 사람의 관계였다. 그녀의 신분이 나와있는데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로 되어 있다. 엘리암(참고: 삼하 23:34)과 우리아는 모두 다윗의 ‘30인’의 충성된 신하의 명단에 들어 있는 자들로서(삼하 23:24∼39) 다윗의 그들에 대한 배반은 그러기에 단순한 도덕적인 파기이상을 넘어선 ‘신의’와 ‘의리’를 저버린 더욱 불순한 것이었다. 저자는 밧세바의 입장과 그녀의 의견과 감정은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 사건의 진행 과정 이외에는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이 사건은 그녀의 임신으로(5절) 복잡하게 얽히게 되고 다윗은 살인을 계획하게 되며 본문은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28)고 기록하고 있다. 밧세바와의 만남으로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로 전락하고 밧세바는 그녀와 얽힌 사건 속에서 첫 죽음을 보게 된다. 남편 우리아의 죽음이다.
밧세바의 아이의 죽음과 또 다른 탄생(삼하 12:15, 24∼25) 밧세바가 등장하는 이 두 구절 사이의 대조는 확연하다. 솔로몬이 언급되면서 본문은 두 번씩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솔로몬의 이름뿐 아니라 선지자 나단으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짓는다. 그것은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은 후에 솔로몬이 다윗의 뒤를 이을 왕이 될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리고 나단도 후에 이 사건을 언급함으로 솔로몬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어쨌든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밧세바가 자신의 아이의 죽음을 보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에서도 본문은 밧세바의 심정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에게 일어난 두 번째의 장례식은 비록 본문에 그녀의 심정에 대한 언급이 없을지라도 다윗과 연계되어 이 여인도 톡톡히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아들이 장차 다윗의 대를 이을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솔로몬을 왕으로 등극시키는 밧세바의 역할(왕상 1:15∼21) 다윗도 세월이 지나자 별수 없이 나이를 먹게 되고 늙으매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자 방책으로 젊은 수넴여인 아비삭을 얻어 왕을 수종들게 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그의 기력이 완전히 쇠퇴했음을 보여 준다. 동시에 본문은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의 결정 문제가 너무 지연되고 있음을 또한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기회를 놓칠세라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를 높여서 자신이 왕이 되기를 도모한다. 다윗의 아들의 서열상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에 의해 죽고, 둘째 아들 길르압은 전혀 활동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성경 무대에서는 족보에 나오는 명단 외에는 아는 바가 없다. 셋째 아들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키다 죽임을 당했으며, 결국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순서상 왕권에 도전할 자격은 갖춘 셈이다(참고: 삼하 3:1∼5).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다윗과의 언약을 계시하여 전달한 인물이기도 하고(삼하 7장),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일에 대하여 정면으로 꾸짖은(삼하 12장)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런 나단이 아도니야의 일을 도모함을 보고 급히 행동을 개시하는데 제일 먼저 찾아가 일을 의논하고 솔로몬의 생명을 구원할 계교에 참여시키는 인물이 밧세바이다. 나단은 밧세바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고 다윗에게 고할 말을 지시한다(11∼14절). 그녀가 어떻게 다윗 앞에서 행하는가가 자신과 솔로몬과 다윗 왕국의 운명까지도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에 그녀의 역할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밧세바는 나단의 지시를 받고 다윗의 침실에 들어가 왕을 알현한다. 성경 본문은 왕이 늙었고 그 옆에는 수넴여자 아비삭이 시종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왕도 미약하지만 밧세바의 설 위치는 더욱 미약한 것임을 시사한다. 밧세바는 선지자 나단이 지시한 그 말을 거의 그대로 하다가(13절) 끝부분의 말을 바꾸면서 그녀 자신의 스피치(speech)로 들어가 버린다. 그녀의 스피치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7∼21절). 첫 번째, 밧세바는 다윗 왕이 왕국에서 진행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18절). 나단은 “아도니야가 무슨 연고로 왕이 되었나이까?”라고 왕에게 따져 물을 것을 지시했는데 밧세바는 오히려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도 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육체적으로 쇠하여 여인을 ‘알지 못함’(동침하지 못함)과 빗대어 이제는 그의 리더십도 쇠해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윗으로서는 그러한 지적이 충격일 수 밖에 없다. 또한 나단은 다윗이 밧세바에게 솔로몬의 왕위를 맹세한 일을 상기시켰는데 밧세바는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했음을 더함’으로 다윗 왕이 맹세를 지키지 않은 심각성의 정도를 강조하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다(17절). 그러니까 왕은 왕궁의 일을 알지도 못할 뿐더러 그 결과로 맹세까지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왕이 되어 버렸음을 은근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지지 세력들을 밝힌다(19절). 거기에는 약간의 과장과 함께 필요한 자극적인 정보만을 선택하여 보고하고 있다.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9절과 비교해 보면 약간의 과장을 한 것임) 왕의 모든 아들들이 초대되었으나 솔로몬은 초대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장관’ 요압을 언급함으로 왕과 친분이 두터운 자들이 왕께 보고도 안 하고 등을 돌렸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특히 요압이 군대장관이라는 점을 상기시킨 것은 요압이라는 인물이 얼마든지 잔인한 일을 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다윗에게는 경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솔로몬을 언급할 때는 ‘왕의 종 솔로몬’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주도 면밀함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솔로몬의 지지자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으므로 세력의 불균형도 보여 주고 있다. 셋째, 다윗에게 맹세를 지키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아도니야의 행동에 대한 분노를 동시에 자아내도록 한 후 밧세바는 다윗에게 ‘내 주 왕’이라는 단어를 두 번씩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누가 진정한 주도권이 있는 왕인지를 상기시킨다. 온 이스라엘이 다윗 왕을 주목하고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지를 반포하시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린다(20절). 이제 더 이상 다윗은 후계자의 지명을 미룰 수도 없고 왕으로서의 주도권을 행사해야만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밧세바는 최대한의 감정적인 호소로 왕의 심리를 자극한다. 왕이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왕이 죽은 후 “나와 내 아들 솔로몬은 죄인이 되리이다”는 말로 마친다. 자신을 먼저 언급한 것도 지혜가 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윗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사실 이제까지 어느 곳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밧세바의 면모가 그녀의 스피치를 통하여 잘 드러난 셈이다. 그녀는 단순히 목욕하다 왕의 눈에 들어 왕궁으로 들어간 생각 없는 여인이 아닌 대범하고 지략이 있고 언변이 뛰어난 여인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과 선지자 나단의 주도력이 합하여 솔로몬이 왕으로 지명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들의 뒤에는 사실 하나님의 다윗의 왕권에 대한 계획이 있었기에 또한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삼하 7장 참고).
본문은 크게 ‘아도니야와 밧세바의 대화’(2:14~18)와 ‘밧세바와 솔로몬의 대화’로 나누어진다. 각각의 장면들을 분석해 보자. (1)아도니야와 밧세바의 대화 (2:13∼18) 본문은 중심 인물들의 배경을 소개함으로 시작한다.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누군가의 아들이 누군가의 어머니에게 뵙기를 청하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묘하다. 어떠한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화의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 아도니야로서는 밧세바가 왕의 모친으로 왕에게 어떠한 영향권을 행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위 ‘청탁’이라는 흑심을 품고 만나는 것이다. 밧세바에게 아도니야는 여러 시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자신의 아들 솔로몬의 정적(政敵)으로 보일 수도 있고, 자신의 라이벌인 다윗의 또 다른 아내 학깃의 아들로 보일 수도 있고, 단순히 다윗의 아들이요 솔로몬의 배다른 형제이며 왕위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불쌍한 처지의 인물로 보일 수도 있다. 본문은 ‘아들’ ‘모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것이 적대적인 만남이 아닌 여인의 모성을 자극하려는 친근한 만남임을 이미 시사하고 있다. 본문은 다시 다음과 같은 구조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위의 구조를 보면 강조되는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중심 X 부분의 아도니야의 소원을 말하려는 부분에 있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이 부분에서 소원은 말하지 않고 뜸을 더 들임으로 긴장감과 소원의 내용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B’에 가서야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한다. 위에서 보면 ‘샬롬’이라는 단어와 ‘솔로몬’이라는 단어가 부각되면서 서로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과연 솔로몬(‘그의 평화’)이 ‘샬롬’(평화)을 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아도니야와 밧세바의 관계가 미묘한 것이기에 밧세바의 첫 질문은 단도직입적이면서도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그녀는 “화평 (샬롬)한 목적으로 왔느뇨”라고 제일 먼저 묻는다 (A). 거기에 대해 아도니야는 그렇다는 대답과 함께 할말이 있음을 알린다(B). 밧세바의 허락이 떨어지자(C) 드디어 본문의 중심인 아도니야의 스피치가 시작된다(X). 아도니야는 “당신도 아시는 바여니와”로 시작하여 밧세바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녀의 협조가 그의 계획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고 말한다. 이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도니야의 왕권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또한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의 왕권에 대한 집착이 아직도 살아 있고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모습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말 속에는 과장과 약간의 과대망상도 작용하고 있다. 물론 자식의 순위로 보았을 때에 압살롬이 죽은 후 자신이 그 다음 순서임에는 분명하지만(삼하 3:3~4) 언제 ‘온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얼굴을 향하였는가? 그가 마지못해 왕권을 포기한 인상을 풍기는 표현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라는 말 속에서다. ‘내 아우’와 ‘여호와’를 언급함으로 밧세바를 안심시키려는 전략이 숨어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자신의 요구가 사소한 것처럼 축소시킨 후에 밧세바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다. 여왕의 체면상 그래도 어미의 입장인데 어찌 아들의 ‘한 가지’ 소원을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밧세바가 “말하라”고 하자마자 아도니야는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저로 수넴여자 아비삭을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얼굴을 괄시치 아니하리이다”고 요청한다.
겉으로 보기에 왕권을 잃어버린 것과 아비삭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왕권’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여성명사이다. 그러므로 아도니야는 밧세바에게 왕권을 잃어버린 보상으로 비록 왕권보다 작은 것이지만 수넴여인이라도 달라는, 어린아이가 어미에게 투정하는 듯한 발상으로 모성심리를 철저히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면 그의 요청은 완전히 다른 색깔로 나타나며 이것은 뒤에 솔로몬에 의해 정체가 드러난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이러한 요청의 배경에 깔려 있는 정치적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도니야에게 “좋다 내가 너를 위하여 왕께 말하리라”고 답한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 보면 밧세바의 대답도 애매모호하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밧세바의 말은 ‘내가 [강조되어 있음] 너에 대하여 왕께 말하겠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긍정적으로 말하겠다는 것인지 부정적으로 말하겠다는 것인지가 정확 하지 않다. 순수해 보이는 ‘모친’과 ‘아들’의 대화가 ‘평화’인지 아닌지가 애매한 가운데에 첫 번째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난다. 이 부분은 “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라고 하며 밧세바가 아도니야에게 약속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시작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 하면 밧세바가 ‘아도니야에 대하여 말하려고’ 솔로몬을 찾아온다. 솔로몬이 자신의 모친에게 여왕으로서의 최대의 예우를 해 주는 모습 속에서 밧세바와 솔로몬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밧세바의 대화의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도니야의 요청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므로 서로 비교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말을 거의 똑같이 인용한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아도니야가 ‘한 가지 소원’이라고 한 것을 밧세바는 더욱 축소시켜 ‘한 가지 작은 일’로 말함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자라고 주장할 때도 아도니야는 능동형태를 사용하여 좀더 적극적인 데에 반하여 밧세바는 수동형을 사용하여(한글 본문에는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 있지 않다) 좀더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고 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밧세바는 애정을 가지고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아도니야의 요청은 정치적으로 왕권에 도전한 것이나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밧세바가 그러한 정치적인 함축성에 대해 전혀 무지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아도니야의 요청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것을 솔로몬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해 주어 결국 솔로몬으로 하여금 아도니야를 정당하게 제거할 수 있는 근거와 빌미를 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차가울 정도의 기계적인 말의 전달 속에서 나타난다고도 볼 수 있다. 오히려 어리석은 아도니야가 헛된 희망을 가지고 돌아가도록 만들 정도로 그녀의 연기력이 완벽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밧세바라는 여인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아들 솔로몬 못지않은 지략을 지닌 상당히 무서운 여인으로 나타난다. 어떠한 면이 그녀의 진정한 색깔인지 흥미롭게도 성경의 저자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정치적 의도를 금방 파악하여 난색을 하고 맹세하며 아도니야를 제거해 버린다(22∼25절). 왕의 후궁을 차지한다는 것은 왕권을 노리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참고: 삼하 3:7∼8; 12:8; 16:21∼22)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순진하리만큼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요청을 하는, 아직도 왕위에 연연해하는, 왕권에 있어서는 순위가 자신보다 우위인 그를 그냥 놓아둘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도니야는 밧세바와 연결되어 죽어간 또 다른 인물이 된다. 간음으로 시작하여 남편도 잃고 자식도 잃고 다윗도 죽은 가운데서 생존한 여인,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 놓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지대한 공을 세운 밧세바란 여인은 과연 어떠한 여인이었을까? 순수하게 환경과 권력에 의해 기구한 운명 속에서 솔로몬을 통하여 여호와의 위로를 받은 여인일까 아니면 생존과 경쟁 속에서 치밀한 계산하에 살아남은 차가운 여인일까? 각자 결론을 내려보라.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다윗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많은 정치적인 행태들을 보게 된다. 어처구니없이 한 여인에 의한 다윗의 무너짐, 죽음, 왕권 다툼, 정적 제거, 생존을 둘러싼 계교들, 여인을 차지하려는 음모와 욕구 등 인간의 추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 하나 자격이 없는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다윗에게 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고 계셨다는 점이다. 본문은 ‘다윗과의 언약’(삼하 7장)이라는 문맥 하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의 약속이 흐르고 있다. 결국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불륜과 살인으로 맺어진 밧세바와 다윗의 인연 속에서 태어난 솔로몬의 자손들을 통하여 인류의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마1:6). 그리고 그분은 본문 속의 등장인물 등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성정을 가진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둘째, 하나님의 일에 대한 헌신적인 참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열왕기상 1장에서 나단 선지자는 다윗왕이 솔로몬이 후계자가 될 것을 맹세했다는 것을 근거로 행동을 취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나단과 밧세바의 간교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무엘하 12장 25절에 따르면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결론 속에서 보면 나단은 하나님의 일이 아도니야로 인하여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에 선지자로서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사건을 수습하는 데에 헌신을 다했다. 이 일에 있어서는 밧세바도 마찬가지다. 아도니야와 같은 어리석고 교만한 인간이 왕이 된다면 그것은 모두의 불행일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질 것이지만 거기에 인간의 최선은 항상 기대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사회 속에서 그저 ‘순전하게’ 구경꾼으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헌신과 담대함과 지략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셋째, 우리의 행동거지를 주의해야 한다. 밧세바의 ‘목욕 사건’에 대해 의견들이 분분하다. 의도적인 유혹이었는지 단순한 프라이버시의 침해를 당한 희생양인지가 성경의 본문 속에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성경 저자는 ‘노코멘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이 해석을 내려 주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추론하는 것은 별로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이 이처럼 악할 때는 상대방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빌미를 허용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남의 눈을 자극하는 옷을 입고 다니거나, 여성의 유혹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장소에 간다거나, 음란물을 몰래 본다거나, 남는 시간을 다윗처럼 게으르게 보내는 사소한 행동들 속에 우리의 죄성과 사탄은 항상 우리를 공격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고 늘 ‘넘어질까 주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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