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새처럼 살다 가야 한다


이연길 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객원교수) 


목회자는 공중의 나는 새(bird)와 같다.
새는 안정된 거처가 없다.

목사도 사택에서 사니까 교회가 지정해 주는 곳에서 살다가 나가라고 하면 길에 던져지게 된다.

자동차도 교회가 지정해 준 차를 타고 다녀야 한다.

자동차도 내 것이 아니다. 교회를 떠날 때는 그것도 놓고 나와야 한다.
새는 저장 창고가 없듯이 목회자도 사유 재산이 없다.
그야 말로 하루하루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면 흔적도 없이 목회지를 떠나야 하고,

하나님이 떠나라 부르시면 아무 흔적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새처럼 말이다.

새처럼(본문대로는 하늘의 새들-birds of heaven 임), 백합화처럼 사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삶의 철학이고, 주님이 사신 삶의 모습 그대로를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교회 공동체에게 준 것이 틀림없지만,

더 깊게 말한다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라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열심히 듣고 있는 제자들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셨을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생각하시면서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고 주신 말씀이다.

이렇게 보면 본분은 목회자들의 의식주에 대한 교훈이시다.

다른 제자들(교인들)은 자기 집들이 다 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필요한 만큼은 다 저축해 놓고 산다.

정말 새처럼, 들꽃처럼 사는 건 바로 목회자이다.

목회자는 말 그대로 목숨과 삶 전체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근심하지 않고 살도록 요구되는 사람들은 목회자밖에 없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한다.

특별히 입는 것은 서민들에게는 기본적인 삶의 요구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의복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 어떤 지위로 사느냐? 어떻게 자기를 만들어 가며 사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솔로몬의 영광도 백합화만도 못하다고 말하신 의도는 사회적 신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입는 것을 염려한다는 것은 자기들의 신분을 높이려고 염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요즈음 교회들이 대형화하고, 목회자들 사례비도 두둑하기 때문에 일차원적 욕구는 이젠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지위를 탐하고 명예를 탐하는 것이리라.

노회에 관심이 많고 총회의 열기가 뜨겁고, 총회장 선거에 불똥이 튀는 이유는 이를 대변해 준다. 

 이것이야 말로 솔로몬의 옷을 탐하는 것이 아닐까?

명예와 지위는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것이지 자기가 만들어 입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실 때, 그것은 존경의 표이지만, 자기가 만 들어 입을 때는 추한 꼴이 되고 만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이들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쓸 시간이 없다.

자기 집을 가꾸고, 돈을 벌고, 심지어는 자기 자녀를 돌볼 시간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만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에 맞추어 살며 

현재의 삶을 미래의 빛에 전적으로 비추어 형성하라는 뜻이다.

사역자들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염려하지 않는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undivided heart)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어떤 일에도 마음이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 염려치 말아야 할 이유는 내일은 하나님의 시간이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부르면 가야 하고, 떠나라면 떠나야 하는 게 주의 제자들이 아닌가?

주의 종이란 헬라어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둘로스'로 집사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 사실은 자원 봉사자들이다.

어찌 보면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자원 봉사자들이다.

그리고 '둘로스'는 노예를 말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노예다.

노예는 자기를 위한 자유가 없다.

주인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모른다.

모르는 일을 놓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저 한 날을 충성스럽게 살면 된다.

사실 오늘 말씀대로 산 목회자들도 교회에서 배척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마음으로는 모두가 존경한다고 믿는다.

현대 목회자는 잘 먹고, 잘 입고, 많이 쓸 것에 너무 관심이 많다.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큰 목회를 하려고 한다면 이거야말로 큰 문제이다.

그래서 교회 성장에만 치우친 것이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퇴색시켰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목사들은 외국에 와서 하루 저녁에 1천 불짜리 호텔에서 머문다고 한다.

자기 교회 일년 예산에 비하면 천 불은 ‘새 발의 피’일 것이다.

그러니 그것 좀 쓰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새(bird)로서의 삶은 아니다.

돌이켜 보면 30년이 넘도록 한 달 봉급을 받아서 그 달 그 달 산 세월이 30년,

360달을 살았지만 모자람 없고, 남은 것도 없다.
하나님은 새처럼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분이시다.

백합화처럼 우리를 입히시는 분이시다.

필자도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것 때문에 교회에서 사준 집이 있고, 은퇴연금이 있다.

큰 교회 목사들은 은퇴를 할 때 그래도 수억씩을 받는다.

그러나 이 땅에는 은퇴 후에도 새처럼 아무것도 없이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분들에게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위로는 이 말 한마디이다.


“당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하늘의 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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