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생애


 최고의 법은 사랑

1. 최고의 법

이 법은 [왕]의 법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여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에서 예수님은 왕적인 권위로 말씀하신다(마5:43-44


이 법은 다른 모든 법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법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당당하게 나열된 굉장한 미덕들이나, 깊은 신앙, 긴 기도라 할지라도 만일 사랑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으면 하나님께 하등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마5:23-24


이 법을 순종하는 것이 삶을 가장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다."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자비롭지 못한 태도는 마치 [부머랭 2]과 같이 그 사람에게로 되돌아 온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또한 이 말씀은 타인에게 대한 무정한 마음이 결국은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생활 분위기에 해독을 끼치듯이 자비로운 마음은 그 생활 분위기를 윤택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결국 자신이 스스로 개척한 세계에서 살게되며 하나님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자는 오직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2. 사랑의 의미

예수님께서 권하시고 칭찬하신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는가? 그저 온순하고 도덕적 뼈대없이 살을 에는 듯한 역풍에 맞설 힘이 없는 선량하게만 보이는 성격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正과 邪에 대한 구별을 흐리게 하면서 까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마13:6)는 무서운 말씀을 서슴없이 하시고,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깨끗케 하셨던 (마21:19,요2:15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는 말씀은 그저 좋기만 한 유순한 성격이 뜻하듯이 우리의 비판 기능을 전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참조 요7:24시97:10

사랑의 필연성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주린 심령들을 만나셨다.[삭개오]의 지친 얼굴이나(눅 19:5) 사마리아 여인의 유창한 말에 (요4:10이하) 나타난, 그리고 목자없는 무리(마9:36

예수님에 따르면 교회나 국가나 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정한 원수는 언제나 [사랑의 결핍]이었다. 자아는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이기적인 태도는 그리 흉하지 않은 죄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바로 육적인 죄와 비교해서 그리 흉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의 사회나 오늘의 사회가 간과하기 죄중 하나이다. 육적인 죄나 마음의 죄를 불문하고 어떤 다른 죄보다도 이 죄에 대한 예수님의 눈은 [불꽃 같으시다](계1:14

사랑의 방법

진실이 없는 친절이 있을 수 있으며, 방법만 존재하는 사랑도 사랑으로 보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공격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불었다(마6:12


진정하는 사랑은 남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마6:34,고전13:4

예수님 자신의 태도가 결정적으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가르치신 사랑의 행위는 은밀히 행해졌다(마8:2326),

특별히 [동네 밖으로 그를 끌어내사]라는 말에 주의하라(눅5:14마10:21

5. 사랑의 어려움

예수님께서 명하신 [사랑의 법칙]자체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진심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을 삶에 적용하려고 했을 때 어려움은 일어났다. 언제나 어려움이 시작되는 곳은 여기에서 다 이것에 대해 분명히 알아보자. 우리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마22:40마18:1,막9:34,눅 22:24마20:2124요13:45


이러한 자주성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아주 명백하다. 예수님의 태도는 세상의 태도와 정반대의 것이다. 세상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때 여러분의 권리를 위해 일어나서 받은 해와 동등한 보상을 받아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자주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런 태도야말로 근본적인 자주성의 결핍을 뜻한다고 하신다. 이러한 태도는 여러분이 여러분을 해하는 것들을 초월할 만큼 충분히 자주적이 못된다는 것을 보여준다.여러분은 그것의 노예이지 그것의 주인이 아니다. 이것이 [산상보훈]의 가르침이다(마5:38-48벧전 2:23,막14:65


최초의 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오늘에 와서도 매우 결실한 또 하나의 다른 어려움은 그 법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서약하게 한대로 사랑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과연 사람들이 그런 모험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히 만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를 동의하고 동시에 그 명령을 실천하기 시작한다면 그 명령의 실현은 용이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명령 실천을 시작할 의시가 전혀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먼저 시작할 수 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사랑으로 대하며 그 다른 한 사람이 그에게 사랑으로 대하는 일이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사랑을 베풀고 그에 따를지도 모르는 모든 위험을 감수할 각오를 갖는다는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는 사랑을 받는 자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곧바로 뛰어드는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모험적인 사랑이었다. 우리가 아직 그의 원수였을 때에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5:10

또한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위험성을 결코 숨기려 하시지 않으셨다(눅21:12

6. 사랑의 범위

사랑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어느 정도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갈보리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베드로에게 그 형제를 일곱번이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을 때(마18:21-22마19:26,막9:23마5:2048

따라서 [사랑의 법]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마16:24마10:24

7. 사랑의 동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에 대하여는 그것을 행할 힘을 주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요구하신 것을 이루는 일에는 도움을 주셨다.그가 [사랑의 법]을 세우셨을 때 그는 그것과 함께 그에 필요한 동력을 제공하셨다. 복음서에는 세 가지 중요한 동기가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성과 사랑스러움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사랑을 일으키신다. 다른 사람의 초라한 외투나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투,이상한 버릇같은 것은 쉽게 눈에띄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욱 깊이 들어가서 모든 사람이 한왕의 아들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셨다. 그는 멸시받는 배교자 세리에 대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19:9눅7:37마18:10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죽으심으로 사랑을 창조하셨다.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께서 병든 자와 죄인들을 위해 그 힘을 아낌없이 쓰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갈보리의 수난이 닥쳤을 때 그들은 그가 죽으신 것이 순전히 그들을 사랑하신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아무리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라 할지라도 여러분이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바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여러분은 그래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국제평화를 위한 참 동기가 존재한다. 만일 그 자신은 평화를 믿지도 않고,다른 모든 나라들 이전에 그의 조국만을 생각하는 것을 애국심으로 알며 남의 권리를 짓밟게 되더라도 그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음의 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을 사랑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세대에 있어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업을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모여 도덕적으로 벌리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이 사업은 모든 기독교인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가지는 명백한 의무이며 그 동기와 추진력은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그의 영으로 충만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창조하셨다.일곱번의 일흔번 용서는 베드로와 같은 성격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가 발견한 사실은 그 자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는 이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스스로 동료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방법은 희망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날이 지나감에 따라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도록 하였을 때 형제에 대한 사랑이 저절로 일어났다.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말씀과 단 한자 틀리게 표현하기를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다]라고 했다. 

 

이것은 오늘에 있어서도 문제의 핵심이 되는 말이다. 어떤 저명한 독일인이 [괴테]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괴테) 나로 하여금 그의 힘을 사랑하도록 가르친다.]라고 했다. 당신이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다. 어찌 당신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못하시겠는가?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의 힘으로 사랑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8. 사랑의 힘

힘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 같이 보이는 사랑이 실재에 있어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최초로 증명해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사랑은 무정하고 비판적인, 그리고 남의 흠 찾기를 좋아하는 태도가 얻지 못하는 승리를 획득한다. 부끄럽고 상심한 죄인들에 대한 바리새적인 태도는 그 죄인에 대해 구원할 힘을 과거에도 전혀 갖지 못했으며 또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태도는 전혀 반대로 작용해서 다만 쓰라림과 낙심의 쇠사슬을 전보다 더욱 튼튼히 조이게 할 뿐이다.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막 16:7,요21:15고전1:25

9. 사랑의 보상

사랑은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이 요구하는 전부는 계속 더욱 더 사랑하게 해 달라는 것 뿐이다. 상을 받기 위해 기독교의 길을 택한다는 사상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전혀 동 떨어진 것이다.[이와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지니라](눅 17:10마18:23-24)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그러나 만일 [사랑없음]에 대한 보상이 있다고 한다면 사랑에 대한 풍성한 보상 역시 있다.[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눅 19:26마10:42마25:40마6:1214요14:23

우리는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이오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의 형제들이옵니다. 성령이여 비둘기 같이 우리 마음속에 강림하셔서 우리들로 하나같이 되게하소서 우리가 늘 당신만을 향하여 당신과 하나된 것 처럼. 그가 우리에게 형제와 친구가 되어 우리와 하나된 것처럼.

매일 성경

 누가복음 10:29-37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
 마태복음  5:38-48  원수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6:1-4    사랑은 자랑치 아니하며
 마태복음  7:1-5    비판적인 수도를 정죄하심
 마태복음 18:21-35  용서의 정신
 마태복음 25:34-40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봉사하라
 고린도전서 13:     사랑의 찬가
 

토론을 위한 문제

1."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은 이와같이 명령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2.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사랑의 동기들로써 어떤 것들을 창조하셨는가?

3."너희가 이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행했으므로" 이 말이 행위에 의한 구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답변하겠는가?

4. 사랑의 법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과연 기독교인들이 사랑의 법을 따라 살 수 있을까?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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