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



기독교 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 이분법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래 성구를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절)

모세를 통해 제정된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와 진리의 반대 편으로 해석된다.


초대 교회 시절 사도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헬라권에서 출생하고 자란 교부들이 사도들의 뒤를 이었다. 사도 바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골2장) 교회는 이원론적인 헬라 철학에 장기간 노출되었다. 서서히 기독교 신학은 구약을 소홀히 그러나 신약을 중요하게 보았다. 물질 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이 신약의 구원주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지주의의 씨앗이다-편집자 주)


구약은 모형과 상징을 통해 앞으로 될 일들을 예언했다. 그러나 신약은 예언의 성취와 해석을 기록한다. 신,구약 사이 이런 차이 때문에 교회는 구약에 비해 신약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 당시 교회는 계시의 내용은 물론 계시의 점진적(漸進的)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구약의 율법은 신약의 복음과 대조되며 열등하게 취급되었다.


더구나 15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종교개혁은 이신칭의만을 높였다. 당시 교회에 만연한 이행득구를 정면으로 반대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문에 인간의 의지가 무시되었다. 인간의 의지적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이 이행득구의 수단으로 해석되며 무시되었기 때문이다.당연히 율법보다 복음이 더 강조되었다. 구약 시대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동일한 잘못된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과학의 분화로 인해 윤리가 기독교 신학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결과 기독교 신학은 종교학같은 신에 관한 전문적 학문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윤리가 없는 신학은 죽은 것과 같다.

지금까지 언급된 원인들 때문에 성경의 율법이 무시되며 자연스럽게 신자의 삶에서 순종이라는 행위도 약화되었다. 기독인의 신앙 삶의 질이 저하되었다. 사회의 등불같은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불신 사회로부터 오히려 비난과 비판 또는 불평과 불만을 듣게 되었다.


이의 근본적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또는 복음)과 율법 사이를 대립적 이분법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상기의 본문은 논리적 이분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대립적 이분법에 따르면 율법은 철저히 버려진다. 이것은 성경이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논리적 이분법에 따를 때 이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가 된다.

이 때 율법폐기론이나 율법주의 같은 잘못된 기독교 신학은 교회에서 자리할 수 없다. 둘 사이 관계는 성경 처음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기록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충돌이나 갈등을 보이지 않는다.


성경의 사례


1.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만물의 통치를 위임했다(창1:26-28절). 이 덕분에 아담은 하나님을 대신한 왕 또는 주인이 되었다. 이 신분은 하나님의 일방적 창조 행위에 의해 주어진 무조건적 은총이었다. 이 덕분에 아담은 만물의 통치자라는 직분자로서 살아야 했다.


그의 존재, 신분, 직분 그리고 직무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에서 나왔다. 결국 아담의 삶과 행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근거를 둔다.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사이 어떤 충돌이나 갈등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가 먼저이며 인간의 의지는 나중이다. 선악과 규례가 이를 증언한다.


아담을 만물의 통치자로 세운 후 하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절) 선악과 규례라는 하나님의 법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체결했다(호6:7절).


선악과 규례를 준수할 때 아담은 에덴 동산에 남아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 계속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규례를 지킴(율법 준수)은 곧 언약을 지키는 것이고 언약은 선악과 규례라는 조건으로 아담의 자발적 순종을 요구했다. 이 순종만이 그의 신분과 직분을 유지시켜 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은총(또는 사랑)과 율법 사이 관계가 잘 설명된다.


먼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은총을 받을 때 나중 아담은 기쁘게 하나님의 법을 준수할 수 있다. 먼저 받은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기에 언약을 지키는 일은 기쁨이다. 그리고 언약 준수는 그의 미래를 결정하기에 아담은 더더욱 적극적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창조기사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또는 율법) 사이 관계이다.


실제적으로(또는 역사적으로) 은혜와 율법 사이 관계는 동전의 양면같이 하나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이 둘은 분리될 수 있다. 논리적으로 은혜가 먼저이고 율법은 나중이다.문제는 기독교 신학이 논리적 구분을 역사적 구분으로 이해하며 이 둘을 대립시키는 잘못과 실수를 범했다는 것이다. 논리적 이해를 위해 분리시켰지만 그만 역사적으로 이해해 버렸다. 이런 논리적 실수와 잘못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다.


2. 신구약 성경에서 먼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고 그 다음 인간과 언약을 체결하고 언약의 조건인 하나님의 율법의 준수를 요구한다. 은혜의 무조건적인 수혜자인 인간은 당연히 언약(또는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아담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준 은혜를 모두 잃었다.


즉시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절) 이 때도 하나님은 메시아로 인한 구속과 구원을 일방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아담에게 약속했다. 이 약속을 '원복음'이라 부른다.


이 약속을 받은 아담은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 에덴 밖의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원복음은 은혜이며 동시에 언약이며 율법 자체였다. 원복음도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일방적으로 약속하며 동시에 율법이라는 조건을 준수하라고 요구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또는 사랑)은 언약의 형식을 취하며 조건적이 된다.


3. 그러나 셋의 후손은 원복음이 가리키는 약속을 믿지 않고 언약인 율법의 준수를 포기하고 사람들의 딸들을 취해 연혼했다(창6:1-2절). 이 행위는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포기한다는 의미의 불순종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는 이미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 이 점에서 인간은 멸망 당할 짐승과 다르지 않다. 이를 피하도록 메시아에 의한 구속의 은총(창3:15절)을 거부하는 인류도 멸망하는 짐승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인류를 멸망 시키고 다시 출발하기로 작정했다(6:6-7, 13절).


홍수는 인류를 멸하는 심판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심판 이전 하나님은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노아를 택해(창6:8절) 그와 언약을 체결했다(12-21절). 이 은총을 받은 노아는 언약의 요구에 따라 120년 동안 방주를 산 위에 지었다(22절). 믿음으로 언약의 조건에 응했다. 그와 그의 가족만이 방주에 들어갔고 홍수에서 구원 얻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은총은 항상 하나님의 조건(언약 또는 율법)에 응하는 순종 행위를 은혜의 수혜자에게 요구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이 둘 사이 관계는 아브라함의 삶에서도 증명된다.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은 새로운 인류는 약 100년 지나자 시날 평지에 바벨 탑을 쌓았다(창11장).


4. 이로써 인류는 하나님 나라 대신 인간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목적을 거부하는 불순종 행위였다. 이런 인류를 통해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의 목적대로 자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울 수 없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내 그를 통해 자신의 백성을 세우고 가나안 땅에 별도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절)


아브람이 선택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이며 무조건적 은총의 결과였다. 그는 출생 전부터 이미 셈의 혈통에 속하는 하나님의 선택 은총을 입었다(창11:10-32절). 이 은총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언약의 조건에 따라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위험하며 힘든 여행을 해야 함을 요구했다. 언약의 조건에 응하자 하나님은 언약의 약속을 그에게 또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창12:5-9절).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드렸을 때 하나님은 마침내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5-18절)


아브라함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사이 어떤 갈등이나 충돌을 읽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 사이 긴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인간의 순종으로 지켜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뜻, 의지, 목적과 계획이 이 세상에 서서히 실현된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구조를 세워주는 골격이다.


5. 지금까지 개인적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 사이 관계를 살폈다.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도 둘 사이 관계는 여전히 변함없다. 야곱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애굽에서 번성했다(출1:7절). 이에 위협을 느낀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은 비로소 애굽이 아닌 가나안이 자신들의 고향임을 알았고 자신의 족장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기 시작했다(출2:23-25절).


이 때 하나님은 약속대로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해방시켰다(출5-12장).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으로 베푼 무조건적 은총의 결과였다. 이 후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율법을 주며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했다. 이 때 언약의 조건은 율법의 준수였다(출24장).


율법 준수의 중요성이 신명기에 기록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11:8-9절)


율법(또는 언약) 준수는 네 가지 목적을 띤다(히브리 원본이나 영역본 참조). 첫째 이스라엘을 강성케 한다. 둘째 이스라엘로 계속 전진하도록 돕는다. 셋째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상속하게 만든다. 그리고 넷째 그 땅에서 장수하도록 이스라엘을 도울 것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사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당연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준수해야만 언약의 모든 약속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네 가지 목적들은 논리적으로 긴밀히 서로 연결된다. 둘째 목적(가나안으로 들어감: 신앙 삶의 이어진 여정)을 위해 첫째 목적(영적 강함)이 필요하며 이로써 셋째(가나안 상속: 하나님 나라 건설)와 넷째 목적(가나안에서의 장수: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누림)도 달성된다. 첫째 목적인 영적 강함은 이리도 중요하다. 이 강함은 율법을 준수할 때만 비로소 얻어진다. 물론 율법 준수의 이유는 출애굽 사건과 광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이스라엘이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다(신11:1-7절).


이것이 모세가 보는 율법관이다. 이 율법관만이 이스라엘은 물론 기독인의 신앙 삶의 질을 상당하게 높여 준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으로 세상의 인간 법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은혜 후 언약 또는 율법이 주어지는가? 언약과 율법은 하나님의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은총을 계속 신자가 누리도록 돕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언약이나 율법도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전달하는 다른 형태 은혜이며 은혜의 방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에 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언약(또는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출20:6절). 율법은 결단코 하나님의 은혜와 대립하지 않는다. 이들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도 금물이다.

그러나 구약의 은총에 한계가 발견된다.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은총과 율법은 앞으로 메시아에 의해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고 완성될 것을 예언하고 계시하는 역할과 기능을 한다. 이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구약 시대 하나님은 지상적 요소를 이용했다.


6.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의 것으로 또는 모형이나 상징으로 완전하게 설명될 수도 그리고 계시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 완전한 은혜와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요한복음은 구약과 절대로 대립하지 않는다. 모양은 다르지만 내용이나 겨냥하는 목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신구약은 하나님의 시대적 경륜의 차이를 보여줄 뿐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더욱 풍성하게 설명된다.

그리고 율법의 핵심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 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율법을 지킴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이런 순종은 이스라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준다. 이 덕분에 가나안 상속은 물론 그곳에서 장수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로써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되며 이스라엘을 통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는 모든 면에서 이방 나라와 완전히 구별될 것이다(신4:5-6절).


결국 율법(또는 언약)은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아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신자는 예수님이 준 새 계명을 지켜야 한다. 구속의 은총을 받은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지킴으로 불신자들과 다름을 증명해야 한다. 예수님이 말한 포도나무의 비유가 이를 잘 설명한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1-8절)


결론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은총만 강조하는 율법폐기론도 그리고 율법만 강조하는 율법주의도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이로써 성경은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중 어느 하나만 강조하지도 않는다. 아울러 복음과 율법 사이 관계도 대립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 은혜와 복음이 먼저이고 인간의 의지, 언약과 율법은 나중이다. 이들 사이 선후 관계는 선을 위해 후가 무시되어도 안 된다고 말한다. 다만 논리적으로 선과 후를 구분할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에게나 그리고 인간에게나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짝이기 때문이다.


이제 율법은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지도 않는 율법폐기론(또는구원파의 구원론)이나 율법주의를 기독교 신학과 교회가 양산하는 꼴이 된다. 그리고 신자의 순종 행위를 소홀히 다루는 이신칭의론도 조심스럽게 주장해야 한다. 믿음은 순종 행위로 그 진위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절: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 참조)


사람은 믿은 대로 행한다. 문제는 무엇을 또는 누구를 믿는가 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후 신자가 믿음(순종 행위)대로 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절)


구원 이전 믿음은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나는 결정적 사건으로 예수님을 구세주(Savior)로 영접하여 구원 얻음으로 새사람으로 출생케 한다면 구원 이후 믿음은 일생 동안 계속 반복해야 하는 일상적 행동으로 구세주 예수님을 인격과 삶의 주(Lord)로 신뢰하며 살도록 돕는다. 의인이란 후자의 믿음으로 계속 사는 신자를 가리킨다. 믿음은 결코 행함과 분리될 수 없다.

구약의 언약이나 율법은 믿음에 따른 행함을 돕는 기능과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행위 덕분에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은총(구원)이 베풀어진다. 이 은총을 받은 인류는 하나님의 언약(또는 율법)을 준수함으로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을 만유의 주로 모시며 신앙 삶을 계속 아니 평생 살아야 한다.

어떻게 율법의 이런 기능과 역할을 무시할 수 있는가? 다른 방법으로 설명된다. 창조와 구속의 은총 덕분에 인류는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존재로 출생한다. 출생은 성장을 전제한다. 출생한 아이는 음식을 먹고 열심히 움직임으로 마음과 몸이 강해지며 성장한다. 신앙 세계도 마찬 가지다. 하나님이 원하는 바대로 행하며 살 때 하나님은 신자는 건강하게 자라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 아래의 두 성구가 이를 잘 증명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절)


여기 자녀와 아들 사이 의미상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 만큼 아주 크다. 자녀는 상속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아이라면 아들은 계속 성장하여 마침내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은 상속자를 가리킨다. 믿음은 자녀라는 신분의 획득을 돕는다면 율법의 핵심인 사랑은 상속자로 자라도록 돕는다.


신구약 성경은 공히 율법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화시켜주는 은혜의 방편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구약 시대 유다이즘이 율법을 이행득구의 방법으로 오해했다. 그리고 헬라 철학, 종교개혁과 윤리와 분리된 기독교 신학이 율법 해석을 왜곡시켰다. 이의 불행한 결과는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은 믿음만 강조함으로 아이의 출생 신고만 해 놓은 후 아이의 성장을 방기한다. 지금까지 이런 잘못과 실수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학의 개혁이다. 언약 또는 율법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한 하나님의 방편으로 해석될 때 율법도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 또는 신국(神國: Kingdom of God)이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이유이다. 신국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학은 재정립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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