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생명은 관찰입니다! 

 


설교학에서는 성서신학의 주석과 설교를 위한 설교주석을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성서신학에서의 주석이란 언제나 ‘그때’와 ‘거기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여기서의 관심의 초점은 ‘그 당시 성서기자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공통의 관심사에 접근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고 극단적이기까지 합니다.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견지하는 진영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일점 일획의 가감과 훼손까지도 불용하면서 문자주의적으로 연구합니다마는, 진보적인 신학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소위 ‘역사비평적 방법’에 더 애착을 갖습니다.


역사비평적 방법의 기본적인 입장은 성서 역시 시공간 속에서 쓰여진 일종의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보수적인 진영에서 성서를 볼 때 가지는 기본적인 전제인 ‘영적 차원’은 이들에게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역동성이라든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든지(딤후 3:16) 하는 것들은 이들에게 매우 생경한 이야기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뒤집어 놓는 것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성경을 분석하고 분해하긴 하지만 그 결과 그들이 건져내는 수확물은 사람을 살리는 말씀의 운동력이 아닌 ‘회의’(懷疑) 와 논란뿐입니다.


더욱이 이런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고 ‘이성’을 최대의 무기로 사용하기 때문에 ‘신앙’을 토대로 성령의 영감에 의해 작성된 성서의 기본 입장과는 처음부터 주파수가 맞질 않습니다. 나아가 이런 부류의 주석가들은 일선 목회자들이 안고 있는 목회적 상황을 짊어진 채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성서와 씨름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철저히 가치 중립적이고 이성적, 학문적인 안경을 쓰고 성서와 씨름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노력 전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특히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서 역시 일종의 역사라는 시공간 가운데 쓰여진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성서에 포함되어있는 ‘인간적인 요소‘들을 밝혀내는 데 그들의 연구 방법이 더욱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쉴라이에르마허가 주장한 것처럼 설교학은 성서신학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설교본문에 대한 더 풍부하고 접근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해돈 로빈슨(Haddon Robinson)이 추천하는 것처럼 성경적 설교를 시도하려는 설교자는 먼저 주석가로서 성경기자가 뜻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개인적으로 변화시키기 원하셨는가를 알기 위해 애써야 하며, 설교자로서 과연 회중에게 무슨 말씀 전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설교적 관찰


이렇게 보면 설교자는 일차적으로 주석가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성서신학의 연구결과로서의 주석이 설교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설교는 단순한 낱말풀이도 아니고 용례해설도 아니며 그 당시의 역사정황에 대한 보고서도 아닙니다. 주석은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주석가의 견해를 바탕으로 깔되 그 단계에서 더 나아가는 자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에 나타난 역사나 고고학 자료를 사람들에게 강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운집한 회중이 성경 속에서 자기 자신들을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게 설교자입니다.


따라서 ‘학문적인’ 성서연구와 설교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고 설교자와 주석가 역시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비록 칼 바르트는 ‘주석이 곧 설교’라는 주장을 하였지만 그런 대가 역시 설교가 회중을 대상으로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회중을 모으는 설교에는 실패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설교자가 성서를 대하는 태도와 성서를 연구하는 자세는 주석가의 그것과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성서를 바라보는 설교자의 시각입니다. 설교자는 성서를 죽어 있는 석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로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이 시각으로부터 온전한 설교는 시작되고 가능해지는 겁니다. 기계적인 고정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의 상황과 처지를 따라 적절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 이런 전제에서 설교자는 출발해야 합니다.



관찰의 다양성


이런 기본 입장 위에서 주석을 통해 본문을 좀더 ‘풍성하게’ 읽은 설교자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본문에 대한 관찰’입니다. 이 관찰이란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데, 본문 안에서의 관찰과 본문 밖으로부터의 관찰 그리고 형식적 유비가 그것입니다.


본문 안에서의 관찰이란 단어, 상황, 인물, 시간, 공간 모든 것이 다 해당됩니다. 가령 한 예를 들어 봅시다. 창세기 3:1-2에는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참으로 하나님이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 이 본문은 유혹 혹은 시험 등의 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런 주제하에서 위의 1-2절a를 보시면 무엇을 관찰할 수 있습니까?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이것은 유혹자인 뱀과 유혹을 받는 하와 사이의 대화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주석적으로 해결하려면 아마도 죄의 문제 자유의지의 문제 등과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만, 설교는 그 이전에 본문을 세심히 관찰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앞에 커다란 뱀이 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어떤 분은 비명을 지르고 도망하겠지요. 좀 용감한 분이라면 돌을 들어서 뱀에게 던질 겁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전혀 그런 긴장감이 나타나 있질 않습니다. 하와가 뱀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거기 무슨 두려워하는 기미가 있던가요? 마치 마실 온 이웃 사람을 맞는 것과 같은 편안함이 거기 배여 있습니다. 반대로 뱀의 경우를 보지요. 뱀 역시 인간을 해치려 한다든지 피해 도망가려 한다든지 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한 유혹이라는 주제로 이런 관찰을 비춰보면 아마도 이런 결론에 도달할 겁니다: “유혹하는 자는 우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우리에게 접근한다” “유혹은 우리로 아무런 방어자세를 갖지 않게끔 우리에게 다가온다” “유혹하는 자는 우리를 죽이겠다고 파멸시키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오지 않는다” “유혹하는 자는 ‘내가 너를 파멸시킬거야, 각오해!’ 이런 긴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접근하지 않는다.”


이런 관찰은 주석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런 관찰이 바로 설교자의 몫입니다. 이런 관찰이 가능해지려면 우선 주석적 작업을 통해 본문을 풍성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 본문은 ...이다’라는 고정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가 이 본문을 읽을 때에 주께서 어떤 깨달음을 주실 것인가를 기대하는 가운데에서만 관찰의 예리함은 그 날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 밖에서의 관찰을 이야기해 봅시다. 이것은 아마도 신학을 전공한 설교자의 학문적 바탕을 유감 없이 나타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가령 창세기 12:10-20까지를 설교본문으로 잡았다고 합시다. 10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여기서는 그 땅과 애굽이라는 두 장소 개념이 대비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앞에 나온 그 땅은 가나안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가나안과 애굽이 대칭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우선 신학을 전공한 지식을 바탕으로 본다면 가나안은 약속의 상징입니다. 이에 반해 애굽은 세속적인 세상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그 땅에’ 기근이 왔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관찰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현장에도 어려움은 닥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설교자의 신학적인 식견이 절대적으로 좌우합니다.


또 하나 비근한 예를 마태복음 19:23-30로 이야기해 봅시다. 부자청년이 예수를 방문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을 갖고 예수를 찾았던 이 부자 청년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그리고 와서 내 뒤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따라서 27절의 베드로의 이야기,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는 앞의 부자청년의 기사와 연결되어 읽을 때에 그 뉘앙스가 제대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 안에서 본문 밖에서 그리고 전후문맥을 따라 관찰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관찰이라는 맥락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소위 ‘형식적 유비’(analogia forma)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내용 자체가 100% 일치하는 본문은 찾기가 불가능합니다. ‘의미’에 주목한다는 이야기는 말하자면 내용의 불일치를 의미의 확장을 통해 연결시킨다는 이야기거든요. 하지만 이것 못지 않게 중요한 한 시도가 있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 유사성’을 찾아내 오늘의 상황과 연계시키는 것입니다.


가령 요즘 한창 남북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데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주제를 설교자가 다루려 할 때 창세기 33:1-11에 기록된 야곱과 에서의 만남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서 이미 만남이 상정되어 있고, 그 내용을 파고들면 만남을 위한 구체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누가복음 15: 11-32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집나간 둘째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이미 만남이 상정되어 있고 아버지와 큰아들의 상반적인 태도는 오늘의 남북 문제를 대하는 견해의 다양과 형식적인 유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개 시사적인 문제를 설교할 때 성경적 근거보다는 설교자 개인의 견해에 입각한 경우가 많은데 형식적 유비를 통한 본문접맥의 시도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설교를 위한 주석’이란 바로 관찰을 주된 내용으로 삼습니다. 이런 관찰내용은 주석서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깊이 있는 묵상과 시간의 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대개 이런 부분에 와서 시간 없음을 핑계 대는 설교자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마는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핑계입니다. 말씀준비를 빼놓은 사역의 분주란 아무런 설득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회중이 당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예배에 참석하는가를 잊지 마십시오! 준비되지 못한 설교는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되지 못합니다. 관찰의 지름길은 철저한 묵상과 관찰력 그리고 시간의 투자입니다. 단어, 표현, 인물, 공간, 시간, 행간,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절대 그냥 넘기지 마십시오. 한 단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데까지 생각의 꼬리를 물고늘어지십시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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