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전래와 분열의 역사

 

한국 천주교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자생적 신앙 공동체로 시작된 반면 한국 개신교는 천주교인들의 많은 박해와 순교 이후 강화도 조약의 체결에 따른 개항(1876년)과 더불어 얻은 신앙의 자유 속에서 외국 선교사들의 본격적인 입국과 더불어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 이전에도 일부 개신교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고 선교활동에 힘쓴 초기 한국 개신교인들이 없지 않았으나, 개항과 더불어 다양한 교육, 의료, 문화 사업과 더불어 시작된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한국 개신교 전래와 발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1. 한국 개신교의 초기 선교 역사

 

1) 중국을 통한 개신교의 전래

중국을 통해 한국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선교하려 했던 첫 번째 선교사는 독일 출신의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인 귀츨라프 목사(Karl A. F. Gutzlaff, 1803~1851)였다. 그는 마카오에서 선교를 하던 중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인 로드 암헤르스트(Lord Amherst) 호에 승선하여 1832년에 한국에 들어옴으로써 한국 땅을 처음 밟은 프로테스탄트 목사가 되었다.

 

그의 입국이 산업혁명 이후에 추진된 서구 제국의 동양진출과 그와 동시에 이루어진 프로테스탄트의 해외선교와 관련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통역 겸 의사로서 귀츨라프는 약 한달 간 충청도 서해안에 있는 고대도에 머물면서 조선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곳 주민들에게 한문 성서와 전도 문서, 의약품과 감자씨를 나누어주면서 호의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비록 순조에게 전달된 통상요구서가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는 통보에 따라 그의 선교활동도 짧게 끝났지만 그가 뿌린 신앙의 씨앗은 한국 개신교의 전래에 첫 출발로 기억되고 있다.

 

1863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주재 책임자로 다시 와서 만주 지역에서의 성서 반포와 복음 선교에 많은 공적을 남긴 윌리암슨(A. Williamson)은 1865년 죽음을 무릅쓰고 황해를 건너 온 두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만난 이후 같은 성서 공회 소속의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선교사의 한국 선교를 후원하게 되었다. 영국 웨일즈의 회중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서 중국 선교를 하던 중에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다량의 한문성서를 얻어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는데, 1865년 제1차 한국 방문 때 서해안에 도착하여 천주교인을 통해 한국어를 배우고 성서를 나누어주며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지만 서울로 향하던 중에 태풍을 만나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한국 선교의 열정을 안고 있던 그는 프랑스 함대의 원정 때 동승하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다리다가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한국으로 떠날 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 동승하게 되었다.

 

1866년 8월 중국을 떠나 한국을 향한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입구에 나타나 강 상류인 평양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조된 긴장으로 조선의 군대와 대치하였지만, 토마스 선교사는 항해의 목적에 대해 통상의 요청과 더불어 천주교와는 다른 야소성교(耶蘇聖敎)를 믿고 ‘야소교(예수교)’를 전파하려는 뜻을 사람들에게 밝혔다. 조선 관군과 셔먼 호가 무력 충돌을 벌이면서 토마스 선교사는 생포된 후 조선의 국법을 어기고 사교를 전하며 백성들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1866년 9월 3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대동강의 백사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한국에서 첫 번째로 순교한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2) 만주를 통한 개신교의 전래

중국을 통하여 한국 선교를 시도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만주에 진출했던 선교사들도 한국에 대해 선교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 시도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만주진출에서 시작된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는 1862년 중국 선교를 개시하였고, 1871년부터 윌리암슨의 지도로 산동 반도를 선교지로 삼아 노력을 집중하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J. Ross) 목사는 1872년 매부 매킨타이어(J. McIntyre) 목사와 함께 중국 선교사로 파견된 이후 토마스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75년 압록강 하류 국경지방으로 가서 중국 사람들과 장사하러 온 한국 사람들을 만나 한국 실정을 알게 되고, 특히 의주 출신의 청년인 이응찬을 만나 한국말을 배웠다. 이응찬은 로스 목사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다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어 루가 복음을 번역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고, 마침내 1876년 매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신자가 되었다.

 

로스 목사는 한국의 쇄국으로 인해 직접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머지 않아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을 믿으면서 성경 번역 사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였고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의주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하였고, 1877년부터 신약전서인「예수성교젼셔」가 간행되었다.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한국에 들어오기도 전에 외지에서 한국말 성서가 번역되어 출판된 것은 프로테스탄트 선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일로 꼽힌다.

 

1882년 3월 예수성교본이 간행되면서, 로스는 먼저 반포가 자유스러운 한인촌을 대상으로 반포사업을 하기로 작정하고, 식자공인 김청송을 ‘최초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로 파송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자 고조선과 고구려의 고도인 즙안을 중심으로 수많은 한글 복음서와 전도책자를 반포하였다. 그의 권서활동으로 한인촌에는 개종을 희망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고, 김청송은 이를 로스에게 보고하여 세례주기를 요청하였다. 1884년 김청송에게서 받은 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알게 된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진리를 좀 더 알고자 봉천의 로스를 찾아갔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요청에 자극된 로스는 그 해 1884년 11월 동료선교사 웹스터(J. Webster)와 함께 한인촌 방문에 나섰다. 그의 방문이 중국 지주의 박해로 인해 무산된 1885년에는 한국 교회 최초의 디아스포라(Diaspore)가 발생하기도 했다.

 

3) 일본을 통한 개신교의 전래

만주에서 성경 출판과 한국인 개종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일본에서도 1882년 임오군란 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비공식 수행원으로 따라간 이가 이수정(李樹廷)을 통하여 성서 번역을 통한 한국 선교가 준비되고 있었다. 이었다. 이수정은 일본의 프로테스탄트 신자 쯔다센(津田仙) 박사를 만나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교리를 배우다가, 1883년 야스카와(安川亨)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일본 주재 장로교 선교사 조지 녹스(G. W. Knox) 및 감리교 선교사 맥레이(R. S. McLay) 목사와 접촉하여 성서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는 성서 번역에 착수해서 1884년 한문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韓漢新約聖書)’를 요코하마 미국 성서공회를 통해서 발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영국계 미국인 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고 한국에 들어올 때 가져왔던 성서였다. 이수정은 계속해서 나머지 성서 번역에 착수했지만 끝내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이어「한역성경」(漢譯聖經)을 가지고「마르코 복음서」를 번역해 1885년 초에 간행했다. 갑신정변의 여파로 일본에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귀국했지만, 친일 혐의를 받고 1886년에 처형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죽기 전에 배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 온 미국 선교사들 중 한국 선교의 선구자는 장로교의 녹스(G. W. Knox)와 감리교의 매클레이(R. S. Maclay)였다. 녹스는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의 신앙성장과 성경 이해를 도와 성경 번역에 큰 힘이 되었고, 미국 선교본부에 이수정의 선교사 요청을 전달하면서 한국에서의 교육 사업과 의료 선교의 절대적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한국 선교의 물을 열었다. 한편 매클레이는 미감리회의 첫 중국 선교사로 1848년 임명되어 1872년까지 봉사하던 중 해안에 조난되어 온 한국 선원들을 본 뒤 한국 선교의 꿈을 가지기 시작했고, 1872년 본국 총회에서 일본과 한국 선교를 강조한 뒤 1873년 일본 초대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개척자적 정신과 한국 선교에의 열망이 이수정을 만나게 했고,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1884년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상의 초기 개신교 선교 역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역

선교사 및 한국인

소속

선교 활동

특징

중국

귀츨라프(K. Gützlaff)

네덜란드 선교회

1832

최초 서양 선교사

윌리암슨(A. Williamson)

런던 선교회

1863

성서의 출판 및 반포

토마스(R. J. Thomas)

런던 선교회

1866

외국인 첫 순교자

만주

존 로스(J. Ross)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1884

한국말 성서 번역

매킨타이어(J. McIntyre)

이응찬에게 첫 세례

일본

이수정(李樹廷)

 

1883

세례, 성경 번역

녹스(G. W. Knox)

장로교

1883

간접적 한국 선교

매클레이(R. S. Maclay)

감리교

1884

선교사로 한국 방문


 

 

2. 외국 선교사들을 통한 한국 개신교의 선교

 

1) 장로교

한국에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개신교회는 미국북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와 미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였다. 그 중에서 북장로회는 중국에 있던 알렌(H.N.Allen)을 의료 선교사로 임명하여 1884년 9월에 제물포로 입국하도록 했다. 알렌은 定住 선교사로는 최초의 인물이었다. 알렌과 함께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1885년 1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한국인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배운 후, 4월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제중원 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고 알렌을 도와 전도를 시작하였다.

 

미국 북장로교에 이어서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가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금 문제로 난색을 표했으나, 이미 선교에 착수한 북장로회 언더우드의 호소와 지원에 의해 성사되었다. 이들의 선교 활동은 11월 3일에 테이트(Tate), 레이놀즈(Reynolds), 전킨(Junkin) 등 선교사가 주축이 되어 호남지방에서 교육과 의료를 겸한 선교활동을 하여 큰 선교 성과를 거두었다.

 

1889년에는 호주 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in Australia)는 초기 데이비스(J. H. Davies) 목사와 그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Mary Davies)를 1889년 10월에 파견하였으나, 데이비스의 병사로 인하여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오스트레일리아장로교회 전체에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1891년10월 매케이, 멘지스, 포오셋, 페리 등을 파송함으로 부산, 마산 일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의 그리어슨(Grierson) 의사와 푸트(Foote) 목사, 맥리(Mcrae) 목사 등이 함경북도, 간도를 중심으로 선교, 의료, 교육을 동시에 펼쳐 나갔다.

미국 북장로교를 위시해서 미국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4개의 장로교 단체는 서로 잘 융합해 나가면서 장로교회를 조직하고 더욱 긴밀히 협조해 나갔다. 1901년에 4개의 장로교 단체가 연합하여 평양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각 지방에 교회를 건축하고 교회 부속시설로 초등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새 학문을 한글로 교육시켰으며, 나중에는 중등 교육기관까지 설립하게 되었다.

 

2) 감리교

미국 북감리교회의 한국 선교는 민영익이 조선 정부의 전권 대사로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민영익은 감리교회 목사인 가우쳐(Goucher) 박사를 만났으며 가우쳐 박사는 민영익을 통해서 한국의 실정을 듣고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미국 북감리교회는 1884년에 목사이며 의사인 윌리엄 스크랜턴(W. Scranton)과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 Scranton) 그리고 아펜젤러(H. G. Appenzeller)목사를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하였다.

 

아펜젤러 목사는 1885년 4월에 제물포에 상륙한 후 서울 정동에 자리를 잡고 그 해 8월에 자기의 거처에서 2명의 한국 청년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후에 배재학당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스크랜턴은 같은 해 9월에 자기 집에서 감리교 병원을 개설하고 극빈자들을 상대로 많은 환자를 치료하였다. 1886년 5월 스크랜턴 목사의 어머니는 1명의 여자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이화학당을 이루게 되었다.

 

1895년에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인 헨드릭스(E. A. Hendrix) 목사와 리이드(C. F. Reid) 목사가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였다. 남감리교의 진출은 갑신정변으로 인해 미국에 망명 중이었다가 남감리교에 입교한 윤치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남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은 1897년 고양에서 어른 24명과 어린이 3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윤치호가 기부한 집 한 채를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같은 해 6월에 리이드 목사의 집에서 공동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후에 ‘광희문 교회’가 되었다.

 

미국 북감리교와 남감리교는 아무런 마찰없이 순조롭게 협동하면서 교육과 의료선교를 효율적으로 전개하여 마침내는 장로교단과 손을 잡고 한국 선교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남북 감리교회는 처음에는 서울과 인천, 원산, 평양, 개성 지구에만 선교를 주력하였으나, 후에는 한국 전역에 선교를 시도하여 각지에 수많은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3) 그 외의 교파들

영국성공회는 1885년 말에 중국 남부 복주에서 활약하던 영국성공회 선교회에서 중국인 두 명을 부산에 파송하였다. 1889년 11월 1일 영국해군 군종사제 출신인 코르프(C.J. Corfe,) 신부를 초대 한국 주교로 서품하여 영국성공회의 첫 번째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코르프 주교는 복음전도협회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몇 명의 회원들과 함께 1890년 9월 29일 인천 강화도에 상륙하여 한국 선교의 장을 열었다.

 

한국의 침례교회는 1889년 캐나다에서 온 독립 선교사 맬콤 펜윅(Malcom C. Fenwick)의 선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도 강력한 영적 경험을 토대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그는 후에 고국으로 돌아가 신학교육을 받은 후 원산을 중심으로 복음 전도와 전도자 양성에 힘썼다. 아울러 때를 같이하여 펜윅 선교사와 교분을 갖고 침례교회 신앙을 심어준 고든(AJ. Gordn) 목사가 시무하는 보스턴의 크라랜돈이 침례교회에 속해 있는 엘라싱 선교회의 폴링(E. C. Pouling) 선교사 부부 등의 선교로 공주와 칠산, 강경에 최초의 침례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펜윅은 1906년 ‘대한 기독교회’란 독자적인 교회 조직을 갖추고 선교에 착수하였다. 이 대한 기독교회는 1921년에는 일제가 대한이란 국호를 사용치 못하게 함에 따라, 그리고 국경을 넘어 동북아시아 선교의 비전을 담기 위해 ‘동아기독교회’로 교단 명칭을 바꾸어 만주·시베리아·간도 등에 많은 선교사와 순회 전도자를 파송하여 교회를 세움으로써 교세를 확장하였고, 해방 후 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1907년에는 동양선교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동양선교회는 1902년에 카우만(C. E. Cowman)과 킬보른(A. Kilbourne)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를 접한 한국인 김상준과 정빈은 1907년 귀국하여 서울 종로 염곡에서 집을 세내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붙이고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순수 복음전도에만 종사하다가 1921년에 이르러 ‘성결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정식 교파로서의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 밖에 구세군은 1908년 호가드(R. Hoggard)의 내한으로 전파되었고, 안식교회는 1904년에 각각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외국 선교사를 통한 개신교 선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연 도

활 동 내 용

주요 선교사

연 도

활 동 내 용

주요 선교사

1832

귀츨라프 내한

귀츨라프

(스코틀랜드

장로교)

1886

배제학당 설립

아펜젤러(북감리교)

1866

토마스 내한

토마스

(스코틀랜드

장로교)

국내 첫 세례

언더우드(북장로교)

1874

로스 내한

로스

(스코틀랜드

장로교)

 

1887

새문안 교회 설립

언더우드(북장로교)

1883

요한, 누가, 사도행전 출간

부인 전용 병원

설립

미스 하워드(감리교)

1884

알렌 입국

알렌(북장로교)

1889

호주 장로교 입국

데이비스 부부

1885

선교사들의 입국

스크렌톤

(북감리교)

언더우드

(북장로교)

아펜젤러

(북감리교)

1890

영국 성공회 입국

코프 감독외

목사 6명, 의사 2명

광혜원 설립

알렌(북장로교)

1896

미국 남감리교

리드 목사 파견

리드

1886

이화여학교 설립

 

스크렌톤

(북감리교)

 

1897

예수 병원 설립

잉골드

시 병원 설립

고양읍 교회 설립

리드(남감리교)

경신학교 설립

언더우드

(북장로교)

1917

연희전문학교 설립

언더우드(북장로교)


 

 

3. 초기 개신교 선교의 특징

 

선교사들은 여러 면에서 한국의 개화와 계몽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고종은 선교사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신뢰를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를 자유롭게 선교하도록 선뜻 허락할 용의는 없었다. 왜냐하면 개화의 움직임의 왕의 세력을 약화 시킬 것으로 보여 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선교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다는 정부의 공적인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선교 활동을 추진해야만 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내세우며 이를 강조한 것도 그러한 상황에서 정부를 안심시키려고 내세운 구호요 선교 정책이다. 그러므로 초기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선교 활동을 할 수 없었으므로 우선 학교와 의료 사업부터 시작하였다.

 

1) 교육 및 의료 사업

프로테스탄트의 초기 한국 선교 활동이 중심은 교육과 의료사업이었다. 1884년 매클레이에게 허락한 고종의 선교 윤허는 ‘학교와 병원’ 사업에 국한된 것이었다. 복음 전도와 교회 설립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선교 활동은 조선 정부의 태도와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적 분위기 때문에 아직도 본격적으로 결실을 보기 어려웠다. 1885년에 알렌에 의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병원인 광혜원이 설립되었으며, 1885년에 스크랜튼은 시병원(施病院)을 설립하였다. 1887년에 한국에 들어온 하워드는 여성 전용 병원을 시작하여 조선 봉건주의 사회 체제에서 소외 받던 여성들에게 의료 혜택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서울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도 선교사들에 의해 병원과 진료소들이 개설되어 복음 선교의 유용한 도구 역할을 하였다. 특히 지방의 병원이나 진료소를 찾는 이들은 거의가 돈 없고 소외된 민중 계층이었는데 이들에게 거의 무료로 진료해 줌으로 민중들이 교회를 접하고 좋은 인식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의료선교와 함께 학교를 통한 교육선교도 병행하였다. 1886년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배재학당이 시작되었다. 또한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같은 해 ‘언더우드 학당’이라 불리는 고아원 학교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스크랜튼 부인에 의해 이화 여학당이 시작되었고 1887년에 엘러즈에 의해 정동 여학당이 생겨나 근대 여성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그 밖에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도 선교회가, 혹은 지역 교인들과 합동으로 설립한 기독교 학교들이 계속 늘어났다.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초기 교과목에서 한문, 역사, 지리, 수학, 과학 등 일반 과목에 많은 비중을 두었고 예외 없이 성서과목을 포함시켜 기독교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2) 성경 번역과 문서 선교

프로테스탄트의 한국 유입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우리말 성경이 번역․발행되었고, 그 중 상당수가 국내에 유입되어 읽혀졌으며 그 결과 상당수의 구도자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사실 프로테스탄트 선교는 성경 번역과 발행 및 전파 사업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을 일찍이 우리말로 번역해 냄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파악하고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성경 중심의 선교 전통은 1885년 선교사의 입국으로 그리스도교 선교가 본격화 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성경뿐만 아니라 찬송가와 기타 그리스도교 교리 및 전도 문서들, 교회 계통의 각종 정기간행물들도 한글로 인쇄되어 나왔다. 찬송가 발행은 1892년 미감리회 선교사 존스(G. H. Jones)와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가 편집해 낸「찬미가」를 효시로 한다. 장로교에서는 1893년 언더우드 편집으로「찬양가」가 발행되었고, 1895년에 리(G. Lee)와 기포드(M. H. Gifford) 부인의 공편으로「찬셩시」가 나왔다.

 

3) 문서 운동과 한글 보급

1888년 초에 입국한 북감리교 선교사 올링어(Rev. F. Ohlinger)는 다음 해에 출판사를 설립하고 1891년부터 출판 사업을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1890년 6월에는 ‘한국 기독교 소책자회’를 조직하고 올링어를 회장으로 하여 번역, 출판, 반포를 위하여 힘썼다.

 

1887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사가 중심이 되어 ‘성서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아래 ‘성서번역위원회’를 두어 한국어 성서의 번역, 개정, 출판, 반포하는 일을 위하여 힘썼다. 1892년에 선교사 게일이 1893년에는 이눌서가 참가하면서 성서 번역 사업은 한층 활기를 띠었다.

 

1893년 제1차 장로회공의회에서는 모든 문서에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만 기록한다는 방침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한글 창제 이후 언문(諺文)이라며 멸시 당하던 한글을 선교사들이 직접 연구 개발에 나섰다.

 

4) 청년운동

청년 운동 조직으로는 장로교에 청년면려회, 감리교의 엡워스청년회가 있었으며 연합 청년 운동으로는 기독청년회(YMCA)와 여자기독청년회(YWCA)가 있었다.

 

기독청년회가 하는 사업은 실로 다양하였다. 종교 사업으로 일요강화, 성경 연구, 특별 전도와 강연, 사회 사업을 비롯하여, 교육 사업으로는 1906년부터 인쇄, 목공, 철공, 제화, 사진 기술 등 실제적인 직업 교육과 영어, 중국어, 독일어 등의 외국어 학과를 두고 노동야학과도 두어 근로 청장년들에게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복음 전도와 함께 사회 운동에 관여하는 기독청년회와는 대조적으로 교회에서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기여한 교회 중심의 기독교 청년 운동이 기독청년회의 조직과 거의 동시에 장로교회에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04년경 평북 선천읍교회에서는 선교사 윤산온이, 서울 승동교회에서는 선교사 관안련이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다른 교회에서도 청년전도회, 면련회, 혹은 공려회라는 명칭으로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미국 감리회에서는 일찍이 1897년 5월 정동 제1교회에서 엡워스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엡워스청년회는 1872년 미국 필라델피아 시에 있는 감리교회 목사 닐리(T. B. Neely)가 처음 조직한 것인데, 추기의 목적은 복음 전도 사업과 성경연구의 권장, 그리스도인의 절제와 사회개혁, 그리스도의 박애 사상 실현, 문화와 사회 활동 등 젊은이들에게 신앙심을 배양하고 그리스도의 사상을 이 사회에 실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실천하는 것이었다.

 

5) 신분 평등화 운동

1894년부터 1896년까지 갑오개혁이 있었다. 이 개혁의 중요한 내용은 사회 제도의 개혁이었다. 양반과 평민의 신분을 타파하고, 백정과 광대 등 천민신분을 폐지하고, 공사노비 제도를 없애며,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정부가 이러한 법령을 공포하기까지는 선교사 무어(Moore)의 승동교회의 전신인 공당골교회의 교인 박성춘의 끈질긴 호소가 있었다. 박성춘은 백정 축신으로 무어의 전도를 받아 공당골 교회 교인이 되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경향 각지에서 많은 백정 축신들이 교회로 나와 예수를 믿게 되었다.

 

무어 선교사는 백정에 대한 당시 한국 사회의 차별외식이 오랜 역사를 가진 뿌리 깊은 것임을 인식하였다. 백정은 거지보다 낮은 최하층 계급이고, 호적에 올릴 수 없는 무적자들이며, 갓과 망건을 쓰거나 도포를 입는 것도 금지 되었다. 일반 백성은 남녀노서를 막론하고 백정을 무시하여 말을 놓거나 반말을 사용하는데 반하여 백정들은 양민과 양반들에게 존대 말을 써야만 했으며, 백정의 신분은 자손들에게까지 세습되었다. 평등사상의 실현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한국 사회의 근대화 작업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4. 선교 활동 및 선교 정책

 

1) 선교 연합 활동

하나의 나라에 여러 교파 선교회가 진출하여 선교함으로 야기될 수도 있는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선교회 간에 지역 분할이 추진되었다. 1893년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남장로교는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맡게 되었다. 1898년에는 북장로교와 캐나다 장로교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캐나다 장로교는 북장로교로부터 함경도 지역을 양도받았다. 1909년에는 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호주 장로교가 부산 지역을 맡게 되었다.

 

감리교의 경우에도 이 같은 분할 협정이 추진되었는데 미국 남감리교는 북감리교와의 협정을 통해 원산 지역을 양도받았다. 개성 지역은 남감리교가 개척한 것이고 서울은 공동 점유가 가능한 대도시여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서울, 평양, 원산의 세 도시는 두 개 이상의 선교회가 공동 점유하여 선교한 곳이며, 나머지 지방은 대체로 중복을 피하여 분할하였다. 지방별로 대분하면 서울, 경기, 충청, 강원 등 중부지역은 남북 감리교회와 남북 장로교회가 중복을 피하며 분할 담당하였고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은 북장로교와 북감리교가,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경북 지역은 북장로교가, 경남 지역은 호주 장로교가, 호남 지방은 남장로교가 각각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선교회 간에 지역을 분할하여 선교를 담당함으로 불필요한 마찰이나 재정 낭비를 줄일 수 있었으나, 이 같은 분할 규정이 30년 이상 적용되면서 선교회 배경에 따라 교회의 특성이 형성되는 부정적 현상도 나타났다. 이는 해방 후 전개된 교회 분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장로교와 감리교 이외의 다른 교파들은 이러한 분할에서 소외되어 불리한 입장에서 선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장로교나 감리교가 선점한 지역에 파고들어 선교해야만 했고 결국 그 과정에서 마찰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2) 네비어스 선교 방법

한국 개신교는 네비어스(John Livingston Nevius:1829∼1893)가 제시한 선교방법을 기초로 초기부터 선교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선교지역 분할정책으로 처음부터 다양한 교파를 가지고 있던 한국 개신교는 각기 다른 선교부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선교방법론의 갈등을 극복하고 우리나라 실정에 알맞은 선교전략을 세우기 위해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네비어스를 초청하기로 했다. 미국 북장로회 소속인 네비어스는 1854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이후 30년 넘게 중국선교에 종사한 선교사였다. 1890년 6월 서울에 도착한 네비어스는 2주 동안 머물면서 선교사들과 모임을 가졌다. 여기서 그는 선교의 실천방법을 선교활동에 드는 비용을 누가 담당하느냐에 따라서 외국의 선교기금을 사용하는 방법과, 처음부터 자립의 원칙을 세우는 방법으로 나누면서 본토 교인들 스스로 완전하고 자립적인 토착교회를 세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하였다.

 

네비어스의 선교방법론을 우리나라의 토양에 적용시키려는 노력은 다방면으로 이루어졌다. H. G. 언더우드는 네비어스의 선교방법(The Nevius Method)을 아래와 같이 4개항으로 요약하였다:

① 각 개인이 자기 이웃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 스스로 생업을 꾸려나가면서 살도록 가르친다.

② 교회의 선교방법이나 조직을 본토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시킨다.

③ 교회 스스로가 가능한 한 인력과 재정을 공급하게 한다.

④ 본토인들 스스로 교회건물을 마련하게 하되 그 건물은 토착적인 것이어야 한다.

 

1891년에 결성된 북장로회 선교회는 네비어스의 선교방법론을 기초로 북장로회 선교회 규칙을 제정하였다. 1893년 1월에 모인 한국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는 네비어스의 선교방법론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선교정책을 채택하였다:

① 전도의 목표를 상류층보다 근로계급에 두도록 한다.

② 여성들은 후대의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부녀자 전도와 소녀들을 교육하는 것에 특별히 힘을 쓴다.

③ 군소재지에 초등학교를 세워 선교부 소관학교의 학생들을 훈련하여 장차 교사로 보내도록 한다.

④ 한국인 교역자도 결국 이러한 교육기관에서 배출한다.

⑤ 빠른 시일 내에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시켜야 한다.

⑥ 모든 문서사업에 순한글을 사용함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⑦ 진취적인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인 가운데 의존생활자를 될수록 줄이고, 자립하는 교회와 헌금하는 교인수를 증가시킨다.

⑧ 한국인 대중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은 한국인 자신이 해야 한다.

⑨ 지방에서 와 장기간 입원하였다가 퇴원한 환자는 그들의 집을 방문하여 계속 돌보아야 한다는 것

 

1895년 10월 5일에 열린 북장로회 선교회는 8개 조항을 선정하여 선교정책의 신조로 채택했는데, 제4항에서는 선교회는 본토인을 고용하여 종교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외국 선교자금 지출을 최소화시켜야 함을 믿는다고 규정, 제5항에서는 선교회는 본토인들이 처음부터 자급자족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데 본토인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네 책을 사고, 자기네 교회를 짓고, 자기네 전도인의 봉급을 지급하게 한다고 규정하였다. 네비어스의 선교방법론이 북장로회 선교회의 선교정책으로 정착되면서 장로교의 다른 선교회들도 대체로 수용하였으며, 이러한 한국의 장로교의 선교이념은 자력전도(Self-Propagation)·자급(Self-Support)ㆍ자주치리(Self-Government)의 3대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우리나라 교회의 신앙형태나 교회의 조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교회가 자립하는 교회 상을 추구하도록 하였다. 또한 상류층이 아닌 근로계급과 서민층에 선교의 목표를 두었던 것이나, 여성에 대한 전도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실은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천과정에서는 상당한 물의를 빚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관한 정책이다. 예를 들어 남장로회 선교사 레이놀즈는 한국인을 교역자로 훈련시킬 생각이 있더라도 상당 기간 동안 비밀로 할 것과 함께, 그들의 교육수준이 일반신자들의 수준을 넘지 않는 정도에서 결정해야 함을 주장했다. 또한 의식 있는 우리나라 신자들은 이 점에 관하여 많은 비판을 하였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에 대한 비판은 선교사들 자신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스콧은 네비어스 선교정책이 한국 개신교의 초기 선교단계에서 놀라운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한 원인의 하나임을 긍정하면서도 이 정책을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도 일어났음을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주치리의 지나친 강조로 교회 안에 계급조직이 생겨났고, 교회조직과 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가 별개의 공동체가 되어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또한 자급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교회재정은 교회조직을 위한 것만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뿐, 사회 복지적 의미가 간과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결국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우리나라 개신교의 초기 발전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구체적인 운영과정에서 사회적·민주적 관심을 살리지 못하였다는 데 한계가 있었다.

 

3) 천주교와의 관계

초기에 한국 개신교회와 천주교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이며 협력 관계였다.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은 한국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간단한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의 사정을 듣는 등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성서 번역에 있어서도 가톨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가톨릭 신부들이 저술한 한국어 사전들이 성서 번역에 참고 자료로 이용되었으며 국내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인 가톨릭 신자들을 어학 선생으로 삼아 한국말을 익히고 성서 번역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우호 관계는 프로테스탄트 선교 사업이 어느 정도 정착되면서 상호 견제와 대립의 관계로 변모하였으며 급기야는 양 교파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① 황성 신문사 난입 사건

1889년 4월 14일자 ‘황성신문’ 잡보 난에 한 부처가 천주교에 입교했다는 내용의 ‘불입천교’(佛入天敎)란 기사가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친 개신교 인사인 사장 남궁억에 의해 발간되고 있던 ‘황성신문’은 천주교를 비방하는 듯한 이 같은 기사가 나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택부 등 천주교 신자 수 십 명은 동월 23일 신문사로 쳐들어가 사장 남궁억을 종현 성당으로 납치 감금한 후 “부처란 누구를 지칭한 것인가, 그 출처를 대라”고 하며 만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신문사를 파괴하겠다는 등의 위협을 하였다. 결국 남궁억은 그 출처를 밝힌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천주교 측을 대표한 주교 뮈텔(Mutel)이 사과의 뜻을 표명함으로써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② 종현 성당 구타 사건

1894년 4월 당시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종현 성당의 신축현장에 구경 갔던 개신교인 5명과 천주교인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개신교 측의 아펜젤러는 곧 뮈텔 주교 앞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의 계명을 멸시하고 마귀의 종 되기를 즐겨하는 자인가”라는 격렬한 내용의 항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뮈텔은 놀라 이와 같은 과격한 내용의 편지가 정말 아펜젤러가 쓴 것인가를 확인한 결과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크게 격분하여, “그 악당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들이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무기를 소지한 침입자들이었다고 비난하였다.

 

③ 해서교안

1900년부터 2, 3년간 황해도 일대에서 천주교도와 일반인 및 개신교인 사이에서 일어났던 교안(敎案)으로 이 사건은 외세와 결부된 천주교회의 향촌사회 진출 과정에서 나타난 반제국주의 경향이 드러난 새로운 사회 계층 분화에 대한 대립의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천주교가 박해 과정에서 얻은 민중적 교회의 모습이 한불수교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 제국주의적 호교적 태도로 인해 벌어진 사회적 문제였다.

 

개항 이후 신앙의 선교 자유를 얻은 선교사들이 호교적 입장에서 당시의 향촌사회의 질서와는 무관하게 천주교인들을 보호하려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천주교인들은 향촌사회에서 양대인(洋大人) 선교사에 의지하여 치외법권(治外法權)적인 특권을 누리고자 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지방관의 횡포에 맞서 교인을 보호한다며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교민들은 양대인 선교사의 비호아래 관리 조세 수취를 적극 거부하였고, 지방관에 의한 사법권 행사에 저항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반토호층(鄕班土豪層) 위주의 향촌사회 질서도 무시하였다. 따라서 한말의 천주교회는 향촌사회에서 종교적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넘어서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 부상하면서 향촌민들과 깊은 사회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이 재령군 원내동에서 교회를 건축하려하자 교회를 공유하자며 건축을 방해하는 사건을 벌였고, 신환포에서는 천주교 성당을 지으면서 개신교들에게 부역과 건축기금을 강요하다가 거부하는 개신교인들을 폭행하였다. 천주교의 세력이 컸던 지역에서 개신교의 성장은 천주교인들에게 위기감을 부추겼던 것으로 보이며, 사건의 주모자들을 체포하는 자들이 천주교인이다 보니 사건자체가 호도되어 처리되었다. 당시 지방관리들은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천주교 신부들의 위세가 높았다. 이 과정에 천주교 신부들이 개입하자 사건이 확대되어 개신교 선교사들이 개입하고 미국과 프랑스공사 조선의 정부가 얽혀 결국 외교적으로 풀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자칫 신․구교간의 전면적 대립과 나아가 양측 선교국인 미국과 프랑스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조짐마저 보였던 바가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신․구교 간 관계는 소원하고 반목, 갈등하는 관계가 지속되었다. 동시에 주한 프랑스공사를 교체하는 외교적 결과와 더불어 천주교의 교세가 기울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관계가 갈등과 대립의 관계가 된 이유는 한국이라는 동일한 선교의 장을 놓고 경쟁을 벌인 데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대립 관계와 충돌은 일찍이 서구 사회에서 있었던 대립 관계를 재현한 감이 없지 않았으며 개항 이후 정치사회적 제반 모순이 내적으로 도출되고 있던 상황을 외면한 채 자파의 편중된 선교활동에 치중한 데서 비롯된 비생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일제 시대의 한국 개신교회

 

1) 일본 식민 정부의 교회 탄압

한국 개신교는 겨우 왕의 양해와 환심을 사게 되어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된 시점에서 이제 외국의 통치하에서 살아야 하는 비운을 당한 민족의 고난과 종교적인 핍박을 견디어야만 했다. 일본은 한국에서 시초부터 기독교를 적대시하였다. 일본은 1907년 교회가 반일 운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지도적인 인물들이 교회로 나와 국가의 독립과 국민 계몽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 사실이다. 1907년 안창호와 전덕기가 이러한 목적으로 조직한 신민회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황해도에도 1908년에 유사한 기관인 ‘해서교육총회’가 조직되었다. 대부분의 회원이 역시 기독교인이었다. 전덕기 목사가 담임하는 감리교의 상동교회는 민족해방 운동의 요람 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단체들을 모두 정치적 색체를 띤 종교 단체로 간주하였다.

 

고종 황제를 강요하여 보호조약을 체결했던 이등박문이 한국에 총영사로 부임해 왔을 때,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은 저지를 비인도적인 처사를 그가 개선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선교를 위해 그에게 희망적인 것을 기대한 것이다. 이등박문은 선교사들에게 마치 호의라도 베풀 듯이 처신하였다. 그는 한구에서 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사업에 공헌이 컸다는 칭찬을 하였다.

 

그러나 선교의 기대는 무산되었다. 1910년 안중근에게 이등박문이 죽고 난 후 그의 후임으로 데라우찌가 왔는데 그는 총독이 되고 한국을 통치하는 절대권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는 국운이 기울어 민족이 비운을 당하자 서북 지방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젊은 세대의 교육과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평양에서는 안창호, 정주에서는 이승훈, 선천에서는 양전백이 학교를 설립하고 기독교적이며 애국적인 교육에 종사했다. 일본은 이러한 애국적인 거사를 막고 ‘성가신 일’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위에 말한 ‘해서교육총회’와 ‘신민회’가 이러한 제거 작업의 첫 대상이었다.

 

데라우찌는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종교지도자들 중에 600명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으로 그 가운데는 목사6명, 장로 15명, 집사 80명이 있었다. 유치된 사람들 가운데 125명은 암살 음모라는 죄목으로 고소되었다. 이들은 고문과 징역 끝에 105인은 증거불충분임에도 불구하고 5년 내지 10년의 징역을 언도 받았다.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교회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지도자들이 정치범이란 누명을 쓰고 박해를 받은 일 때문에도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계속 성장하던 교인 증가율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선교사들의 반응

일제강점기의 선교사들은 평양에서 1909년 회합을 열어 일본 정부에 대한 자세를 어떻게 취할 것인지 논의 하였다. 그 결과 권력에 대하여 중립을 지키는 자세를 취하자는데 합의 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이 처한 정치적인 처지에 동정하면서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러한 중립적인 태도에 불만스러워하면서 선교사들이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고 보았다.

 

이러한 중립적인 교회의 자세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교육칙령을 발표하여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본 정부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알렸다. 이 칙령으로 사립학교들을 교과목 편성에서부터 철저하게 간섭하였다.

 

3) 3․1독립 운동과 교회

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 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 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기독교 정신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켰다.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왔다. 그들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은 다음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찔러 죽였다. 이 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 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4) 신사참배와 한국 교회의 시련

한국 교회는 1930년대 중엽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일제의 신사참배강요로 말미암아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35년 11월 평안남도 도지사가 도내 교장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먼저 신사참배를 시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부터 신사참배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의 교장 윤산온(McCune)과 숭실여학교 교장 스누크(Mrs. V. L. Snook)여사가 이를 거부하자, 도지사는 그들에게 60일 간의 기한을 주어서 이 문제를 재고하도록 하였다. 신사참배를 하든지 아니면 교장 직을 사임하고 학교의 문을 닫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교사들과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일제 당국과 타협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특히 기독교인이 아닌 교사나 학생의 견지에서 볼 때 신사 참배 문제로 폐교한다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선교회는 오랫동안 논의 하였다. 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닌, 애국심을 나타내는 행위라고 떠드는 일본의 교활함에 있었다. 교회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장로교회는 반대를 감리교회는 일제의 해석을 받아들여 타협을 모색하였다. 일제는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버티는 장로교회를 꺽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일제 총독부는 모든 노회원들은 노회를 개회하기 전에 신사에 가서 참배부터 해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그해 2월부터 9월까지 전국 23개의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일제가 지시하는 대로 굴복하고 말았다.

 

 

6. 해방 이후의 한국 개신교

 

1) 정치에 대한 교회의 대응

해방과 더불어 한국 개신교 교회 내에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운동이 전개 되었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두 가지 사상적 흐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 교회가 세상에 존속하면서 언제나 안고 온 과제이기도 하다. 그 하나는 기독교인들의 정치 활동이고, 또 하나는 교회를 개혁하자는 회개 운동, 즉 교회 내의 영적 쇄신 운동이다.

 

기독교인의 정치 활동은 북한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남한의 교회는 미군정하에서 자유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광복을 위해 해외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주로 남한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이와는 반대로 소련군의 군정하에서 장차 공산당이 집권하는 세상이 되면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되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래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정당을 조직하였다.

목사 윤하영과 한경직은 1945년 9월에 평안북도에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얼마 후 그들은 비기독교인의 전적인 포섭을 위하여 정당의 명칭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였다. 1945년 11월 또 하나의 기독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이 결성되었다. 이 당은 조만식 장로와 이윤영 목사가 주도했는데 공산당의 탄압으로 사회민주당과 같이 몇 개월 못 되어 해체되었다.

 

1946년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를 계기로, 교회는 공산당과 충돌하였다. 공산 정권이 고의로 선거일을 주일로 정하여 교회의 예배를 방해하고 강제로 교회당을 선거 장소로 사용하려고 하자, 교회는 이에 따를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의 ‘오도연합노회’는 교회의 행정 원칙과 신앙생활 규범을 정하여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를 공산 정권에 통고하였다:

① 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② 정치와 종교는 이를 엄격히 구분한다.

③ 교회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권리이다. 예배당은 예배 이외에는 여하한 경우에도 사용을 금지한다.

④ 현직 교역자로서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자세에 공산 정권은 ‘기독교연맹’을 조직하여 ‘오도연합노회’에 대항케 하고는 기독교의 내분을 꾀하여 정치적인 괴뢰 기관으로 삼았다. 북한의 ‘오도연합노회’의 지도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활동을 종교적인 영역으로 국한했으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공산 정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와 반면에 남한의 개신교 교회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므로 정치에는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1960년 학생들의 의거로 자유당 정부가 붕괴될 때까지 여당과 정부에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으며 그밖에 정치적인 부패에 대해서도 무감각하였다.

 

 

7. 한국 개신교 교파들의 발전과 분열의 역사

 

1) 교파 분열의 원인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은 전부 해방 이후에 일어나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의 억압과 박해에 맞서 대항하면서 교파 간의 협력으로 인한 분열이 없었지만, 해방 이후에 일제 시대동안 박해를 받아왔던 교회를 정리하면서 일제에 협력 여부에 따라서 교회 분열의 문제가 하나둘씩 대두 되었다. 이와 더불어 교단 내의 신학적 노선의 차이와 교권 다툼도 교파 분열의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첫째로, 교파들의 분열은 일제에 협력하였던 자들과의 대립 속에서 발생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은 한국에 있는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에 신사참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일본은 좀 더 강경한 방법으로 신사참배 할 것을 강요하였다. 결국 1938년 장로교측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가결안을 따르지 않은 이들은 순교하거나 투옥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면서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들과의 갈등은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신사참배 외에도 복음서 이외의 성서를 거부했거나, 그리스도교를 일본의 신도(神道)와 결합시키려 했던 일제에 순응했던 이들에 대한 반감이 해방 이후 교회 분열의 빌미가 되었다. 이 점은 특히 장로교측에서 고려파 장로교의 분열과 감리교회에서도 나타났다.

 

둘째는 교회 안에서 신학적 노선의 차이로 인한 분열이다. 한국 개신교회는 신학적 배경과 유산으로 미국의 보수주의적 근본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근본주의 신학이 이식되었고, 독단주의적이며 배타주의적 정신, 절대적 권위주의적인 교회제도들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 사고양식이었다.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좀 더 자유스러운 신학을 하는 분위기가 한국 개신교회에 유입되었다. 즉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신학 노선을 따를 것인가에 대하여 대립은 또 다른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분열, 예수교장로회의 합동, 통합의 분열, 예수교장로회 합동의 진보, 보수 분열 그리고 성결교 분열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교권 싸움으로 인한 분열이다. 개신교회는 어느 한 사람이 모든 권력과 권위를 쥐고 있지 않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정기적으로 열리는 총회를 통해서 해결한다. 이 총회의 위원들은 모두 투표로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장로교의 경우 총회 밑에 노회라는 것이 있어 중대한 결정에 있어서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왔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신학적 노선 문제, 일제 협력자들 문제 등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어느 누가 교회를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대립이 있었다. 감리교회의 분열과 침례회의 분열은 여기에 해당된다.

 

2) 교파별 분열과 일치의 역사

 

가) 장로교

한국 장로교가 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과 교단의 규모면으로 봐도 한국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교단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교단 분열의 현상은 장로교의 어려움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초기 선교사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교회 설립이 본격화 되고 교세가 증가하자 모든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1893년에 ‘장로회선교공의회’를 조직하여 선교정책과 활동방향을 의논하게 되었다. 이것이 1901년에 한국인 장로들도 참여하여 190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로 재조직되고 1907년에는 소위 독노회로 발전 하였다. 독노회의 정식 명칭은 ‘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로서 1907년 9월 17일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조직 되었는데 당시 교세가 노회 정도의 규모였기 때문에 독립된 노회라는 의미에서 독노회(獨老會)라 불리우게 되었다. 당시 교세는 예배처 984개, 세례교인 17,890명, 원입교인 21,482명이고 선교사를 포함한 목사 47명, 장로 53명이였다. 제1회 창립노회에서는 서상륜의 동생인 서경조, 한석진,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 길선주, 양전백 등 7명에게 목사안수를 하여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한국 개신교는 초대 교회 선교사들의 열정과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과 국가 사회적 배경이 조화를 이루어 급속히 성장하였다. 독노회를 조직한지 5년만인 1912년에 총회의 조직이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1911년 제5회 노회에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노회 산하의 각 대리회를 노회로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1911년 10월 8일부터 1912년 2월 15일 사이에 전라, 경기 충청, 황해, 함경, 경상, 남평안, 북평안 등 7개 노회가 조직되었다. 7개 중 4개가 북한지역에 있으며 특히 평안도에 2개 노회가 조직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북한, 그중에도 평안도의 장로교 교세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1912년 9년 1일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전국 7개 노회 총대 목사 96명(선교사 44명, 한국인 목사 52명), 장로 125명, 합계 221명이 모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회장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선출 했다. 당시 교세는 교회 수 2천54개, 목사 128명, 장로 225명, 세례교인 53,008명, 교인총수 127,228명이었다. 그리고 중국 산동성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우리나라는 10년 국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장로교회도 탄압을 받았다. 장로교회는 1919년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하면서 장로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 운동이 있은 뒤에 한국민들이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1) 장로교의 첫 번째 분열은 해방 이후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옥되었던 한상동 목사를 선두로 하는 경남지역 인사들이 출옥한 후 신사참배를 한 인사들을 정죄하면서 시작되었다. 1938년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문을 닫았고 그 후 서울에서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45년 9월 18일 재건노회가 열리고 조선신학교를 교단의 직영 신학교로 지정한 이후 교단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곧 기성교회 인사들과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이들 가운데 한상동, 박윤선, 주남선, 손양원 목사들과 같은 출옥성도와의 마찰이 야기되었는데,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한 것이며, 지금 해방이 되었다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고 주장했다.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도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의 논쟁까지 빚어내어 말썽을 일으켰다.

 

경남의 출옥성도 한상동과 주남선은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으로 교육하는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여 박윤선을 주 강사로 초빙하고, 고려신학교가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잇는 학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만주 봉천에 체류 중인 박형룡을 교장으로 청빙하였다. 이에 대해서 경남노회는 1946년 7월 9일 임시노회를 열어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신학교 설립 기성회는 경남노회의 후원에 힘입어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고신)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경남노회원 가운데 교회 재건운동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려신학교에 대하여 반대 운동을 펼쳤다. 1946년 12월 3일 경남노회는 이들의 영향으로 고려신학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상동 목사는 경남노회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노회를 탈퇴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1947년 3월 10일 경남노회는 재건운동 반대자들을 퇴출시키고, 교회재건원칙을 재확인하여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이후 고려신학교의 교장인 박형룡이 한상동 목사와의 신학교 운영 방침에서 견해가 맞지 않아 1948년 4월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8년 5월 제34회 총회에서 전남노회가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좋으냐는 질문에 전 조선교단의 통리였던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추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법적인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리하여 1948년 9월 21일 경남노회는 다시 고려신학교의 승인을 취소하였고, 1951년 5월 21일 장로교 총회는 고신파 대표를 총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고신파는 따로 노회를 조직하여 ‘경남법통노회’라고 하고, 1952년 9월 고신측 제1총회를 진주 성남교회에서 개최하고 독립 총노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전국에서 고신파를 지지하는 교회들이 나타나 1956년 6개 노회로 구성된 총회를 구성하였다. 그 결과 장로교 안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신앙 노선을 견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가 조직, 분립하여 오늘의 예장 고신파를 형성하여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게 되었다.

 

2) 두 번째 분열은 보수 성향의 북쪽 교회와 진보 성향인 남쪽 교회의 갈등으로 신학교와 신학사상의 대립, 교단 내 권력 다툼에 기인했다. 본래 한국 장로교는 미국의 복음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띤 선교사들의 배타주의적 선교 정책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초창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경향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유럽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학자들이 세계 신학의 흐름을 소개하면서부터 교단 내에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 보수주의 신학의 대표 학자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한 박형룡 목사였으며, 진보주의 신학은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한 김재준 목사가 주도했다.

 

당시 진보주의 신학자였던 김재준 목사는 1938년 장로교의 신사참배 결의 후 이에 반대하는 뜻으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무기한 휴교를 단행되고 이 후 새로운 신학교를 건립하자는 여론이 교회에 확산되자 1940년에 진보적인 신학 성향의 학자들과 함께 서울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현재의 한국신학대학교)를 개교한 바 있었다. 당시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보수 성향의 선교사들이 신학교에서 물러가고, 박형룡 목사도 국외로 도피했기 때문에 조선신학교는 자연 진보 성향의 학자들에 의해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남한에는 조선신학교만 있었기 때문에 장로회 총회는 이 신학교를 교단의 직영 신학교로 인정했다. 그러나 1947년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목사의 신학방법론을 문제 삼아 진정서를 제출하는 소위 ‘51인 조선신학생 진정사건’이 발생했다. 이 문제로 인하여 총회 신학 대책위원회는 새로이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박형룡 목사를 임시 교장으로 임명했다.

 

1951년 5월 24일 부산에서 열린 제36회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정했지만, 장로교회는 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1952년 제37회 총회가 김재준 교수를 제명 처분하고 조선신학교 직영을 취하하자, 1953년 6월 10일 김재준 목사와 그 지지자들은 총회를 탈퇴하고 ‘대한 기독교 장로회’를 세움으로써 장로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예장)와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로 갈라서게 되었다.

 

3) 세 번째 분열은 6.25 전쟁이 끝난 뒤 195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된 것인데, 이는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에큐메니칼 운동과 더불어서 창설된 세계교회협의회(WCC)와의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과 이에 반대하던 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교권 다툼에 기인하였다

예수교 장로회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진보적 성격의 지도자와 세계복음주의친교회(NAE)에 참여하는 보숙적 성격의지도자로 나뉘어져 있었다. NAE측에서는 WCC가 자유주의적이고 용공적인 성격을 띤다는 이유를 들어 거기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했다. 보수적 집단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ICCC의 회장 맥킨타이어 목사가 방한했을 때 고신파 지도자들과 NAE측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환영함으로써 두 파사이의 긴장이 높아졌다. 왜냐하면 WCC측 사람들은 ICCC와 맥킨타이어 목사를 극단적으로 독선적인 보수파로서 분란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는 인물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분열은 이후 대구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서울 남산에 자리 잡은 신학교는 정부로부터 땅을 불하받고 교사(校舍)를 짓기 위해 채용한 박호근이라는 인물의 사기행각에 대하여 박형룡 교장이 책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운동 지지자들(NCC: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전국교회협의회)과 박형룡 교장을 옹호하는 복음주의협회(NAE: National Association Evangelicals: 전국복음주의협의회) 회원들로 갈리게 되었다. 그 결과 결국 에큐메니칼 운동 지지자들은 연동교회에서, 복음주의협회 측은 승동교회에서 회의를 열어 각각 총회를 조직함으로써,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통합(연동파)과 합동(승동파)으로 갈라섰다. 그 후 통합측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울 광장동에 자리를 잡고 장로회신학대학교(장신대)를 세웠으며, 합동측은 남산에서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서울 사당동에 총회신학대학교(총신대)를 세웠다.

 

1975년에 이르러 합동측은 교단의 권력을 다툼으로 또 다시 분열하게 되었는데, 교단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리던 대전 중앙교회의 이영수 목사를 따르는 주류파와 이에 반대하는 정규오 목사 중심의 비주류파 사이에 싸움이 계기가 되었다. 이 싸움에서 밀린 비주류파가 서울 방배동에 합동신학교를 세움으로써 합동측 교단은 둘로 갈라지고 신학교도 둘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합동측 분열은 비주류 안에서 또다시 세포분열을 일으켜 무려 130개가 넘는 교단이 생겨났고, 300여 개가 넘는 무인가 신학교가 난립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장로교회는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1981년에 한국장로교협의회가 조직되었고, 1997년에는 이 모임이 한국의 대부분의 장로교회가 참여하는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연)’로 발전하여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향한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한장연은 81년 2월 통합, 합동, 고신, 기장, 대신 등 5개 교단을 회원으로 출범하여 97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협의회와 합동총회를 개최하고 출범하였다. 각 교파의 가입과 탈퇴가 반복되면서도 2003년 8월 현재 26개의 교단이 참여하는 한국 장로교 최대의 연합기구로 성장했다. 한장연의 합의를 거쳐 93년부터는 매년 5월 장로교 연합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매년 9월 둘째 주일을 장로교 주일로 지키는 등 일치를 위한 다각적인 모색을 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장로회신학회’를 창립하여 신학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89년에 한국 장로교는 ‘2000년대를 향한 교단발전 장기계획’을 채택하였고, 1992년에는 총회는 창립 8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1995년에는 오랫동안 요청되어 오던 여성 안수가 실시되었다. 같은 해에 개최된 제80회 총회에서 ‘21세기 교단발전을 위한 정책개발위원회’를 설치하여 21세 기에 우리교단의 지향해야 할 바를 모색하고 발전책을 강구하였다. 1996년에는 21세기를 향 한 선교·교육·봉사대회를 개최하여 우리총회의 선교역량을 결집하였다.

 

성경의 권위와 해석에 관한 진보와 보수의 대립, 교회와 사회·국가의 관계 설정에 따른 견해 차이, 교권다툼이나 지방색 등으로 분열을 거듭한 장로교는 현재 약 160여개에 이르는 군소교파를 자랑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으로 자리 잡은 상태다. 이렇듯 상상을 초월하는 교파 수는 한국 개신교 성장에 이바지한 측면도 있지만 비난의 목소리도 면하기는 어렵다. 한국 개신교 150여 교파 중 약 100개가 장로교라는 점을 감안할 때 장로교의 연합은 한국 개신교의 일치를 위한 시금석이 되리라는 점에서 한장연의 미래가 한국 개신교 일치 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 널리 알려져 있는 장로교 교회로는 새문안교회, 영락교회, 충현교회, 사랑의교회, 덕수교회, 남서울은혜교회 등이 있고 장로교 언론으로는 개혁신문, 교회공보, 기독교보, 기독교연합신문, 한국기독공보, 기독신문 등이 있다.

 

2) 감리교

1845년 노예제도 문제로 분리된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는 독자적인 한국 선교에 나서게 되었는데, 1884년 6월 맥클레이의 입국으로부터 시작된 감리교회는 ‘북감리교회’는 1885년 아펜젤러 목사와 스크랜튼 목사 그리고 스크랜튼 부인에 의해서, ‘남감리교회’는 1895년 리이드 목사에 의해서 각각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이미 ‘남․북 감리교’가 갈라져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나, 1930년대에 와서 ‘남․북 감리교회’가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감리교회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성장하였다. 병원을 세워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학교를 세워 근대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해 주었다. 1887년 10월 9일 정동에서 최초의 감리교회가 탄생한 후 북쪽으로는 평양, 동쪽으로는 원산, 서쪽으로는 제물포에 각각 선교기지를 마련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감리교회가 퍼져나가게 되었다. 교회는 가는 곳마다 매일학교를 세웠다. 매일학교를 통해 교회는 가장 기초적인 국민교육을 감당하는 한편, 유교경전 대신 성경을 가르쳐 선교의 지평을 확장시켜 나갔다. 또 서울에 복음전파를 위한 출판사를 세워 기독교서적과 국민계몽을 위한 많은 책을 출판함으로 한국의 출판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많은 인재들이 입교하여 교회를 통해 만민평등사상과 주권재민사상을 배움으로 이 나라 독립을 위한 꿈을 간직하며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입교를 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 1901년 한국교회사에서 최초로 김창식, 김기범 두 명의 한국인 목사가 탄생하였다.

 

1903년 원산의 하디 선교사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전국의 모든 교회에 영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켜 한국 교회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 교파의 구분 없이 전국 교회로 운동이 확산된 이 운동은 1907년 평양의 부흥운동으로 절정에 도달하였으며 자연히 교회연합운동으로 이어지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한편 감리교인들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열렬히 구국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는 상동학원을 개설해 청년들에게 나라사랑의 정신을 심어주는 한편 다른 동지들과  힘차게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3.1운동으로 계승되어 민족 지도자 33인 중에 감리교인 9인이 참여하였고, 그 밖에 많은 감리교인들이 각 지역의 운동을 주도하였다.

 

‘북감리교회’의 ‘한국연회’와 ‘남감리교회’의 ‘한국선교연회’는 1907년 경성에서 제4차 연합회의를 열고 성직자 양성을 위해서 ‘협성성경학원’을 세웠다. 1910년에는 학교 체제를 갖추고 ‘감리교 협성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11년에는 서대문구 냉천동 현 위치로 자리를 잡아 ‘감리교 신학대학교’으로 발전하였다. 남북 감리교회는 선교초기부터 협성신학교를 공동으로 운영하는 등 서로의 협력을 모색하여 오다가 1930년 남․북 감리교회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조선감리교회의 통합과 조직에 관한 성명서를 작성하고 결의안을 채택했다. 마침내 1930년 12월 2일 협성신학교에서 조선감리회 창립총회를 열어 기존의 두 조선연회를 폐지하고 새로운 ‘기독교조선감리회’ 탄생을 선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해방 후 감리교회는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했다. 감리교의 분열은 신학 방법론의 차이 또는 신앙 노선의 상위보다는 해방 이후 발생한 교회 정체나 교권의 쟁탈 문제로 인한 분열로 발생했는데, 이는 1945년 각 교단의 성직자들은 세문안교회에서 모임을 통해 일제가 강제로 만든 ‘조선교단’을 해체하고 각기 자기 교단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이들과 비록 일제가 강압적으로 만든 교단이지만 한국의 교파 통합을 위해서 그대로 유지하자는 이들로 갈라지면서 시작되었다. 이 모임에서 감리교회의 일부 목사들은 감리교회의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했다. 그 가운데 이규갑, 변홍규, 김광우 목사 등이 동대문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감리교회 재건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이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신학교 재건을 결의하여 감리교 신학교를 개교하고 교장에 변홍규 목사를 임명했다. 이들을 ‘재건파’라 부르는데 일제가 만든 친일 교단에 가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재건파는 일제 시대에 교권을 남용했던 교회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전국 각 교회에 감리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지만, 불과 70여 개 교회만이 가담했다.

 

한편, 재건파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목사들은 1946년 강태희 목사를 중심으로 수표교 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감리교회 부흥 및 수습을 논의하였다. 이들을 ‘부흥파’라 부르는데 대체로 일제에 협력했던 교단의 간부들이었다. 이 부흥파는 1946년 종로중앙교회에서 기독교 조선감리회를 특별총회를 열어 조선 감리회 감독으로 강태희 목사를 선임하고 정동제일교회에서 감독 취임식을 거행했다. 그러자 재건파는 1948년 동대문교회에서 총회를 열고 장석영 목사를 감독으로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했다. 이로써 감리교회는 완전히 둘로 갈라서게 되었고, 재건파와 부흥파는 상대방을 비방하며 서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 감리교회는 1949년 4월 1일, 재건파부흥파에서 선정한 각 7명씩의 전권위원이 모여 무조건적인 통합을 결의했다. 마침내 1949년 4월 29일 정동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조선감리회 통합연회와 총회에서 김유순 목사를 감독으로 임명함으로써, 수년간 갈등을 겪어왔던 감리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4.19가 1960년에 일어나면서 소장파 목사들에 의한 교회혁신을 부르짖게 되며 교단내의 갈등은 심화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1967년에는 감독선출에 135회의 투표 끝에 감독이 선출되는 등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 10월의 11회 총회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1차 투표에 감독을 선출함으로써 단합된 힘을 과시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인사들에 의해 감리교회는 분열을 초래 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교권 다툼으로 인한 교파의 분열 속에서도 1978년 5월에 ‘기독교대한감리회’로 통합되어 현재는 하나의 교단으로서 중앙집권적 제도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 감리교는 현재 3개의 교단 신학교가 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와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가 그것인데,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해도 감리교단의 교역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감리교 안에서는 목사를 목회자라기보다 ‘교역자’라는 호칭을 선호하는데, 이는 감리교가 한국선교 초기부터 역점을 두었던 교육사업에의 열정을 감지하게 한다. 감리교 계통학교는 전국에 65개가 있으며 교목을 두어 학원 선교에 힘을 쏟고 있다. 2006년 세계감리교협의회 주최국으로 선정된 한국 감리교는 2003년과 2004년 300만 총력전도운동을 벌이고 있다. 양적인 성장만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자기혁신 운동이라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재 5천 개의 교회, 150만 명에 이르는 신도를 지닌 하나의 교단으로 거듭해서 성장하고 있다.

 

3) 대한성공회의 토착화 노력과 사회 선교

대한성공회가 탄생한 것은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1889년 11월1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킨터베리대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음으로서 조선 교구의 첫 교구장이 된 때이다.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동역자를 모집하여 1890년 9월29일 인천항에 도착했고,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 전도하기 시작했다.

 

성공회는 한국개화기에 신교육을 보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신명학교를 설립하고, 인천, 여주, 진천 등지에 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수원과 안중에는 보육원을 개설하였다. 대한성공회는 선교초기부터 한국문화의 토양 깊이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썼다. 그래서 한국건축양식으로 지은 성당들이 지금도 강화읍, 진천, 청주, 온수리 등에 남아 있으며, 한편 선교사들의 한국학 연구는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토착화의 노력에는 “교회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세상에서 탈출해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공회는 제사에 대해서도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전향적인 입장을 취한다. 1997년 한국 전래의 제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예배서를 발간한 것. 조상에 대한 예절문화와 종교적 신앙을 엄격히 구분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는 것과 잔을 올리는 것은 하나의 예절로 받아들이고, 지방을 써 붙이거나 젓가락으로 그릇을 두드리는 행위는 조상신을 부른다는 의미가 있다 하여 금함으로써 기독교의 선교 초기부터 문제가 되었던 제사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1923년경부터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도 선교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4년에는 성직자 양성을 위한 성미가엘신학원(현 성공회대학교), 1925년에는 수도자를 위한 성가(聖架)수녀회가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26년에 정동에 지은 주교좌대성당은 동양에서 유일한 로마네스크양식의 건물이며, 특이한 건축양식과 함께 모자이크 대형 성화로 유명하다.

 

선교사들은 언어장벽과 신병, 또한 여러 가지 사고로 말미암아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선교활동이 미진한 채로 수 십년을 흘러가게 된다. 더구나 일제하 36년간은 성공회의 발전에 있어서 커다란 장애를 가져온 시기였다. 이것은 무엇보다 영국인 선교사들이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에 비교적 소홀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인이 처음으로 주교가 된 것은 해방된 지 20년이 흐른 후였다. 1965년 이천환 주교가 서품을 받고, 한국교구는 서울교구와 대전교구로 발전적 분할을 하였다. 다시 1974년에 대전교구는 대전교구와 부산교구로 분할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새로이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1973년에는 정박아교육기관인 성베드로학교를, 1982년에는 성직자 양성 교육기관인 성미가엘신학원이 4년제 대학과정인 천신신학교로 승격하였고 드디어 1992년 12월에 문교부로부터 4년제 정규대학으로 성공회대학교의 인가를 받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토착화를 한국민이 안고 있는 역사적인 고난의 짐을 떠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한 성공회는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환경과 인권문제에 앞장서고 있다.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대성당이 1987년 6월10일 6·10 항쟁의 진원지가 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보다 앞서 5대 교구장이었던 존 데일리(한국명 김요한) 주교는 1960년대에 영등포에 산업 선교센터를 설립하여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에 앞장을 서 한국 산업선교의 효시가 되었는가 하면, 70년대에는 정의실천사제단을 중심으로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 80년대에는 ‘나눔의 집’을 통한 나눔 운동으로 사회 선교에 주력해 왔다. 현재 서울, 대전, 부산 3개 교구, 150개 교회에 5만 여 교인을 갖고 있는 성공회가 교세에 비해 사회 선교에 많은 열정을 쏟고 있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전국에 100여교회, 약 5만명의 신자가 있으며, 3개 교구는 각각 제2대 한인 주교를 중심으로 교회발전과 사회복음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활발한 교회개척과 성전건축이 이루어졌으며 선교교육원을 통한 선교교육에도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극단을 피하고 중도의 길을 걷고 있는 성공회는 세계 각 지역에서 활발한 대화로 화해와 일치를 위한 중요한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재작년(2001년)에 미국의 복음주의 루터교와 성공회가 실제적으로 모든 것―성직, 교인, 성사 등―을 공유하기로 합의하여 한 교단이 되다시피 했다. 영국에서는 감리교와 성공회의 연합을 위한 노력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천주교와도 천주교성공회연합위원회에서 성직과 세례에 대한 합의 문서를 작성한 바 있다. 대한성공회도 일찍이 한국기독교협의회(KNCC)의 회원 교단으로 활동하면서 종교간, 교단간의 대화에 주도적으로 임하고 있다.

 

한편, 종교개혁을 경험한 개혁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영성운동의 요람인 수도회 활동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대한성공회는 현재 4개의 수녀회와 1개의 남자 수도원을 보유하고 있다.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맞아 영적으로 공허한 상태에 있는 현대인들에게 교회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고유의 영성을 어떻게 적용시켜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성공회로서는 이들이 소중한 자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4) 침례교

한국의 침례교회는 1889년 12월 8일 캐나다에서 온 독립 선교사 맬콤 펜윅(Malcom C. Fenwick)의 선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1년 원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펜윅 선교사가 엘라싱의 선교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북도를 인수받아 활동적인 순회 복음전도활동을 펼쳐 충청도와 전라도 북부, 경상도 북부 지역에 31개의 침례교회가 설립되었다.

 

한국을 위시하여 동북아의 선교에 뜻을 둔 펜윅은 보다 효과적인 선교사업을 위하여 1906년 10월6일 강경에 전사역자를 소집하여 대회를 열고 46개조로 된 교규를 만들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매년 소집되는 대회를 ‘대화회’라 하고, 충청도 강경교회에서 열린첫 대화회(1906년)에서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회’로 정했다. 국내의 효과적인 전도활동을 위해 교단 산하에 원산·강경·공주·영동 등 구역을 설정하고 지도자를 세워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아울러 그해 한태영 외 4인을 함경도와 간도로 파송, 전도하게 함으로써 선교지향적 교단의 출발을 보였다. 1921년에는 일제가 대한이란 국호를 사용치 못하게 함에 따라, 그리고 국경을 넘어 동북아시아 선교의 비전을 담기 위해 ‘동아기독교회’로 교단 명칭을 바꾸어 만주·시베리아·간도 등에 많은 선교사와 순회 전도자를 파송하여 교회를 세움으로써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 시기 교단은 이미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모두 복음 전도에 힘쓰다 해난사고로, 공산당에 의해, 또는 일제 밀정으로 오인되거나 몽고 토족의 습격으로, 또는 일제 박해에 의해 순교했다. 특히 1925년에는 총회가 일제하의 학교교육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리고, 일제의 황궁요배와 신사참배에 불응하여 갖은 박해와 고난을 받았다. 1941년 원산32인사건은 교단에서 발행한 성경을 불온문서로 취급한 일제에 의해 모든 재산이 압류되고 이종근(당시 총회장) 감목을 위시해 32명의 교역자가 옥고를 치르게 된 사건이다. 마침내 1944년 5월10일 일제는 교단 해체령을 내렸다. 당시 통계로 한반도와 만주, 간도지역에 26개 구역(현 지방회) 400여개의 침례교회가 있었다.

 

침례교의 첫 번째 분열은 1946년 9월 열린 제39회 대회회에서 교단 명칭을 최초의 명칭인 ‘대한기독교회’로 환원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로 인하여 시작되었는데,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별도의 교단을 구성하고 ‘대한기독교회’라는 이름으로 분리해나간 것이다. 이 대한기독교회의 분리는 비록 소수였으나 동아기독교회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해방과 더불어 교단은 재건에 나서 (남한 6개 구역 42개 교회) 마침 미국 남침례회 해외선교부와 선교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1949년 9월 강경에서 열린 제39회 총회에서 교단 명칭을 ‘동아기독교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로 교단 명칭을 정하고 1951년 침례병원을 설립했는가 하면 1953년 침례회 출판사를 설립 해 오늘의 교회진흥원으로 발전시켰고, 1954년 대전에 ‘침례회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두 번째 분열은 미국 남침례교의 지원을 받은 지도자들과 총회를 주도해온 이들과의 교권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1959년 4월 25일 대전 총회가 대흥동 침례교회에서 그리고 한 달 후인 5월 25일에는 포항 총회가 포항 침례교회에서 열림으로써 교단은 둘로 나뉘게 되었는데, 포항 총회는 총회를 주도해온 지도자들이 중심을 이룬 반면, 대전 총회는 미국 남침례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은 지도자들과 주류 세력에서 밀려난 소위 전입 목회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침례교회는 미국 남침례교 선교부의 선교 정책에 대한 한국 침례교회 목회자들의 불신, 기존의 목회자들과 타교단에서 넘어온 목회자들 사이의 갈등, 한국 침례교회의 주류 세력을 이루고 있던 안대벽 목사와 애버내티 선교사 사이의 반목 등이 불씨가 되어 분열을 초래한 것이다. 결국 1962년 포항측은 교단 명칭을 ‘한국기독교침례회’로, 대전측은 ‘기독교한국침례회’로 정했다.

 

그 후 침례교회는 10여 년 동안 통합을 이루지 못하다가 양쪽 진영의 실무진들이 대전 침례교 신학과 졸업생으로 편성이 되고, 두 파로 갈리는 교단 분열은 옳지 못하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통합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68년 3월 26일 소장파 목사들이 주축이 되어 실행위원회를 열고 총무진을 통하여 통합 원칙을 발표함으로써 교단이 하나 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1968년 4월 16일 서울 침례교회에서 제58회 통합 총회를 열어 교단 명칭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정했다. 1976년 11월 4일 ‘한국침례회연맹’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였다.

 

침례교는 1970년대에는 한미전도대회를 통해 교회가 양적으로 부흥했으며 새신자 훈련 총서를 비롯한 교육과 훈련교재를 통해 성경교육으로 교회의 질적 부흥을 이뤄냈다. 아울러 부흥회를 통해 교단 내외적으로 부흥하는 교단이 되었다. 또한 1981년에 수도권 침례교회 목회자 양성을 목적으로 수도신학교가 설립되었고, 1990년 은퇴교역자의 연금 지급과 사고·질병으로 사역할 수 없는 목회자와 미망인, 그 자녀들을 돕기 위해 교역자복지회가 설립되었다.

 

침례교는 교회제도를 회중정치로 바꾸고, 교회 직분도 대폭 변경했다. ‘안사’를 ‘목사’로, ‘감로’를 ‘장로’로, ‘통장’은 ‘권사’로, ‘총장’과 ‘반장’은 ‘집사’로 바꾸었는데, 1951년에는 다른 직분은 없애고 목사와 집사만을 두게 되었다. 한편 침례교회 여성들을 기도·교육·선교훈련 프로그램과 증거·섬김의 프로그램에 연합하도록 1954년 전국여전도연합회가 구성되었고 1982년에는 전국남전도연합회가 구성되었다. 현재 기독교한국침례회 산하에서는 11개 기관이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96개 지방회, 2,340여 교회, 4,350여명의 목회자, 68만의 침례교인이 소속되어 있다. 침례교 신학교로는 대전에 있는 침례신학대학교 와 수도침례신학교가 있다.

 

5) 성결교

성결교는 순수하게 한국인의 선교 활동으로 조직되었다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교회사에 의하면 한국 성결교는 1907년에 도쿄 성서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김상문·정빈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성결교는 선교단체에서 출발하여 한국인에 의한 포교를 통해 조직되었기 때문에 ‘국내 자생 교단’이라고도 한다. 성결교는 그 명칭이 주는 의미처럼 개인의 성결과 성화사상을 중시한다.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특히 탄압을 받게 된 것은 재림의 교리 때문이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우리 주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심판하러 오신다”는 재림의 교리로 인해 교단이 해산되고 교단 월간지 <활천>이 폐간되는 수난을 겪었다. 200여 명의 교역자와 100여 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교회 건물은 군수공장으로 빼앗기는가 하면 교회기물은 판매 처분 당했다.

 

한국성결교회는 해방이후 한국교회협의회(N.C.C)에 가입하였으며, 1955년 10회 총회 때 복음주의협회(N.A.E) 에도 가입을 결의하여 양 기관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양측주장의 이념논쟁과 상대방의 공격의 양상으로 심각성이 드러나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양 기관의 탈퇴문제를 가지고 15회 총회에서 격론을 벌이다가 1년 유보안이 43대 40으로 통과된 후 16회 총회에서 재론하다가 부결되자, 탈퇴를 주장하던 복음주의협회(N.A.E)인사들이 회의에서 퇴장하였으며 1961년 서울 무교동에 있는 여관에서 한보순 목사를 중심으로 ‘복음진리수호동지’ 를 조직하게 되고, 같은 해 5월 ‘서울 보수 지방회’ 그리고 같은 달 30일에는 ‘보수 총회’로 따로 조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전개되자 총회에서는 분열되면서까지 연합기관에 가입하고 있을 필요성이 없음을 인식하고 임시총회를 열어 두 기관의 탈퇴를 가결하였으나, 보수측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1961년 부산에서 국제교회연합회(I.C.C.C)에 가입 결의를 하였다. 그리고 1962년 4월에 자체적으로 총회를 열고 교단명칭을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로 하고 다른 측인 진보측에서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라고 칭하였다. 이 분열은 외부단체와의 연계성에서 비롯되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보수파의 편협하고 과격한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로써 성결교회가 이 땅에서 시작된지 55년만에 두개의 성결교회가 나타나는 현상이 벌어졌다.

 

성결교회가 분열된 후, 기성측의 노력과 온건파 인사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1965년에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65년 7월에 이명직 목사가 전국성결교회 신도들에게 합동을 권유하는 메세지를 보냄으로서 합동운동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각기 총회를 열고 합동하기로 가결한 후, 바로 그날(1965년 7월 23일) 합동총회를 열어 역사적인 합동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예성측의 일부 강경인사들은 끝까지 고집을 부려 잔류케 되었다. 그 후 73년 6월에 또다시 많은 교회가 예성을 탈퇴하고(190교회중 112교회) 기성과 합동하였다.

 

2001년부터 두 교단은 교단장 및 임원들과의 교류를 잇달아 가지면서 ‘한국 성결교회 연합회’(한성연)를 구성하고 일치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기성과 예성은 2001년 4월에는 연합회 창립총회를 개최한 후, 2002년 5월에는 ‘선교의 기쁨 선교의 도전’이라는 주제로 성결교회 세계 선교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는 ‘기성-예성교류협력위원회’가 ‘한국성결교회연합회’로 발전되고, 강단을 교류하는 등 그간 축적된 양교파의 협력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었다.

 

성결교회는 기성과 예성을 합하여, 3,000여 개가 넘는 교회와 80만 명에 이르는 신자 수를 가진 교단으로 한국에서 장로교회, 감리교회와 더불어 개신교 3대 교단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2007년 선교 100주년을 앞두고 ‘100만 성결인 운동’을 전개하면서 교단의 연합과 재도약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6) 순복음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1958년 3월 15일 신학교를 졸업한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전도사가 그해 5월 18일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했던 최자실 전도사의 집 거실에서 가정예배의 형태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서 시작되었다.

 

창립예배를 드리던 날 최자실 전도사는 이른 아침부터 사과상자에 보자기를 씌워 강대상을 만들고 온동네를 다니며 예배를 알렸으나, 결국 창립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조용기 전도사, 최자실 전도사, 그의 세 자녀들과 밭일을 하다가 비를 피하려고 온 할머니가 고작이었다. 교회가 시작되고 1개월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7년 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의 말을 듣게 되었다. 무성이 엄마라는 이 여인은 7년 전 아이를 출산한 이후 중풍병을 앓게 되었는데, 한 번도 자기 발로 일어선 일이 없었다. 두 전도사가 무성이 엄마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중풍병은 나을지어다.” 조용기 전도사는 목청껏 호령했다. 그리고 몇 시간을 기도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성이 엄마가 벽을 잡고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걷기 시작했다. 무성이 엄마는 중풍병에서 완전히 고침을 받았고 건강한 몸으로 교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50여명의 신자들이 모이고 이듬해 봄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집 앞 마당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후 천막교회는 부흥하여 점점 더 많은 성도들이 모이게 되자 가난한 성도들이 드린 헌금을 모아 더 큰 천막을 구입하여 천막을 넓혀 가는 일을 계속하였다.

 

조용기 전도사가 탈장으로 인해 대수술을 받고 군에서 전역한 후, 교회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군에서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1년 9월 1일, 서대문 로타리 서커스단이 자주 머물던 터에서 천막 대부흥성회가 열렸다. 이 부흥성회의 설교자는 샘 토트 목사였고 조 전도사가 통역을 맡았다.

 

조용기 전도사는 1962년 4월 26일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5월 13일 순복음부흥회관의 명칭이 순복음중앙교회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 무렵 교회 성도가 5백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3년 후인 1964년 서대문 개척교회는 3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같은 해 조용기목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초청으로 가게 된다. 서대문 교회는 나날이 폭발적으로 부흥을 거듭하였다. 성도수가 만 명을 초과함에 따라 서대문 교회는 더 이상 성도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교회는 새 성전 건축을 위한 부지를 찾기 시작하였다.

 

1973년 8월 19일 현재의 여의도에 있는 성전에서 최초의 예배가 드려졌다. 그리고 1973년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5만명의 한국성도와 5천명의 외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 본 성전과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9월23일에는 만 팔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롭게 지어진 여의도성전의 헌당예배를 봉헌하였다. 이로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순복음 미주지구 연합회가 1976년 3월 설립됨으로써, 조용기 목사는 실제적으로 전 세계에 걸쳐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4월 순복음 유럽지구 연합회가, 8월에는 순복음 일본지구 연합회가 결성되게 되었다. 1977년 9월 순복음중앙교회는 미국 LA에 순복음신학교를 세웠다. 77년 7월에는 서독 베를린에, 78년 2월에는 뉴욕시에, 78년 4월에는 일본 고베에, 80년 4월에는 시카고에 각각 순복음 신학교를 세워 교역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1980년 8월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 한국분교를 설립하였다.

 

조용기 목사가 1964년 9월 처음으로 세계 선교활동에 나선 이후, 전 세계에 걸쳐 해외선교 활동을 계속해서 진행하였다. 문서 선교의 역할과 민족 복음화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1988년 12월 10일 국민일보가 설립되었다. 세계 개신교 역사상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이며 1천 2백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매스컴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국민일보는 창간 후부터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을 돕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사랑 실천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소년소녀돕기 운동, 아프리카난민 돕기, 사랑의 헌혈운동, 범국민 친절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7) 구세군

자선냄비로 한국에 잘 알려진 구세군은 1908년 허가두 정령이 가두 전도를 시작하면서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 출발부터 복음과 빵을 동시에 강조하며 그 지역 특성에 맞는 사회사업을 병행해왔다. 현재 구세군 사회사업 전문 시설로는 유아복지시설(유아교육 및 근로여성들을 위한 탁아교육) 아동복지시설(고아·기아를 위한 보육사업, 청소년 교육시설), 기술학교(주·야간 고등학교 기술교육, 청소년 기능 및 직업교육), 부녀복지시설(여성·주부 직업훈련 및 요보호 여성―가출·윤락·미혼모―보호 시설), 노인복지시설(요양원·양로원·승리관), 상담시설(가출아동, 기아·미아 및 청소년 선도, 부녀자 상담, 노숙자 급식), 지역사회복지시설(아동·청소년·부녀·노인복지 등 총체적 사업 실시) 등이 있다.

 

육신과 영혼을 돌보는 전인목회를 목표로, 1주일 동안 열린 교회로서 예배·교육·친교·봉사·전도·구제 사역을 실행하고 있는 영문은 전국에 234개 소가 있고 각 영문의 병설 기관이 222개 있다. 현재 12만 명 정도의 군우(성도)가 구세군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개신교단에 비해 적은 숫자다.

교세에 비해 활발한 사회사업으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구세군의 또 하나 큰 특징은 남녀 평등한 성직 임명을 들 수 있다. 여성을 동등한 사역자로 삼는 구세군은 1878년 9월 전체 사관 91명 중 41명이 여자 사관이었다고 할 만큼 구세군에는 여성 교역자가 많다. 한국 구세군은 2008년 선교 백주년을 앞두고 전교인을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만들기 위해 힘쓰는 한편 부지를 마련하여 선교회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는 1891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었는데, 도시 빈민들과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여 슬픈 성탄을 맞이하게 된 천여 명의 사람들을 먹여야 했던 구세군 사관 조셉 맥피 정위가 고안해 낸 것으로서. 그 옛날 영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누군가 사용했던 방법을 원용했는데 주방에서 사용하던 큰 쇠솥을 거리에 내걸고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외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웃돕기에 참여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 100여 개 국에서 매년 12월3일부터 12월24일까지 모금하여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온정을 나누고 있다. 한국에서는 1928년 12월 15일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박준섭 사관이 서울의 도심에 자선냄비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8. 한국 개신교의 교파 분열의 문제점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전래 된지는 불과 120년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한국에서 개신교는 짧은 역사를 지닌 종파이다. 해방직후 총 개신교 숫자는 60만명 정도에 불과하였고, 1960년대 초에 겨우 100만명 정도의 신도숫자를 가졌다. 1960-80년대 한국사회의 급격한 사회변동 기간 곧 도시화 공업화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교세가 1,00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통계숫자의 부정확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가 통계적 숫자로서 폭발적 증가를 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핵분열에 이르는 급성장은 내실의 부실성을 초래하게 되었고, 우후죽순처럼 외형적으로만 확장해가는 개신교의 선교 전도 집단들과 다양한 교파중심 및 개교회 지도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파의 분열은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치에 적지 않은 장애가 되었다.

 

1) 교회 분열과 개교회주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사에 유례없는 극심한 교회 분열이다. 어떤 이들은 교회 분열이 교단간의 교세 확장을 위한 경쟁을 유발하여 급속한 교회 성장을 이룩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교회 분열이 미친 부정적인 결과가 그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의 분열이 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주의 장로교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신앙의 보수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교회 지도자들의 독선적인 사고 때문이기도 하고, 성경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신령주의의 교회사관 때문이었다.

 

또한 한국 교회에 만연한 심각한 문제점은 교회들이 개교회주의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교회주의 경향은 교회 분열로 인한 교회 정치의 불신과 교단간의 경쟁적인 교세 확장에서 초래되었다. 개교회주의 교회는 설립에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기업의 생리를 닮게 마련이었다. 결국 생존을 위하여 교회는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했다. 이렇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교회들은 대형화되어 갔고, 독자적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직제도의 형태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교회 형태인 개교회의 형태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아무런 상회의 제재를 받지 않고 그 자체가 최종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그 교회의 목사는 작은 교황이 될 수 있다. 얼마든지 독재할 수 있고, 부패할 수 있으며,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교회들이 많으면 교계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만다. 노회는 지역교회에 분쟁이 있어도 조정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2) 교회의 치리제도

장로교회는 목사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감독 정치 제도와 회중교회 정체제도 중간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중세적인 교권주의나 회중교회적인 개교회주의로 기울어질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다. 특히 한국 교회의 경우에는 교인들이 샤먼이 신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무속 종교에 익숙하기 때문에 목사를 제사장으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러한 종교적인 배경에서 온 교인들을 목회하는 목사는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지향하거나 교권주의로 빠지기가 쉽다.

 

교회는 교권주의로 인하여 부패했다면 마땅히 쇄신돼야 하고 개혁되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이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직분에 대한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이해마저 흐리게 만드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3) 은사운동과 기복 신앙

1970년대부터 국가의 경제 성장과 함께 대교회를 지향하는 많은 교회들이 재정의 풍요를 누리면서부터 각종 헌금을 강조한다. 초대교회가 힘써 온 과업이 선교와 구제였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선교만을 자상 과업으로 생각하고 거기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바람에 교회의 확장을 위한 일은 모두 정당하게 여겨 왔다. 더 많은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 교회당을 크게 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구제에는 인색한 교회로 자라온 것이다. 예배에서 헌금을 바친 사람을 광고하거나 그를 위하여 복을 빌며 기도하는 일은 한국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기이한 광경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복을 갈구하는 대중의 기복적인 종교심을 만족시켜 준다는 목회적인 배려에서 생긴 관행인데, 이것은 물질을 바치는 데 따라 복을 내리는 저급한 샤먼의 신 이해에 머물게 한다.

 

또한 은사 운동에 있어서도 영원한 생명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말씀보다는 방언과 치유 등 감각적인 경험과 현세적인 안녕과 복에 더 관심을 갖게 한다. 이러한 은사 운동은 초자연적인 세계와 기적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유발하거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복 신앙을 부추긴다. 기복 신앙은 종교적인 신앙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기복 신앙을 참 신앙으로 승화되도록 순화시키기는커녕 이를 방치하거나 오히려 조장하는 경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좇으며, 그것이 곧 종교적인 신앙 체험의 전부이거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윤리적인 성화의 삶을 힘쓰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가치 있는 신앙생활임을 알지 못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삶을 힘쓰지 않으면 구속의 은혜를 망각하게 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고 기복적인 신앙, 곧 복 주시는 하나님을 찾는 신앙에 머물게 마련인 것이다.

 

 

9.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

 

한국 개신교 신학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경재는 이와 같은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개신교를 탄생시킨 근본 원동력인 ‘성경주의’가 변질하여 문자적으로 절대진리를 수록하고 있는 계시책으로서 성경을 절대화되어, ‘성경무오설’을 신봉하는 개신교도가 많기 때문이며, 둘째, 한국 개신교의 종교 갈등 원인은 초기선교사들과 그들에게서 전수받은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에 집착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기독교해석의 편협성에 있다고 본다. 셋째, 경쟁적 포교정책, 선교정책이 경쟁심을 유발하고 종교간의 갈등의 원인제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한국 개신교는 1970-80년대  급성장하던 교세가 급격히 둔화되면서 총체적 위기의식과 더불어 조정국면에 들어갔는데, 크게 ‘보수적 개신교’입장, ‘중도적 개신교’ 입장, ‘진보적 개신교’입장의  대응 태도가 뚜렷이 구별되는 경향을 나타내 보인 시기였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진보와 보수를 놓고 살펴볼 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진보적인 개신교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한기총)는 보수적인 개신교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적인 개신교로는 감리교와 성공회,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예수회장로회(통합) 등 일부 진보적 장로교회 등이 있다. 이들은 가톨릭을 비롯한 타교파, 타종파 신앙에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사회 현실 참여에도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런 교회는 개신교의 일치운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적이다. 반면 이성보다는 하느님의 계식에 절대적 권위를 두는 보수적인 개신교로는 한국의 대다수 장로교회와 오순절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등이 있다. 이들은 타교파, 타종파 신앙에 대해 폐쇄적인 자세를 취하며 정교 분리 입장에서 교회의 사회참여를 비판한다. 한국의 개신교 교세로 보면 보수적인 개신교가 한국 전체 개신교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진보와 보수의 중간적 입장에서 중도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는 교파도 있다.

 

보수적인 개신교는 1970-80년대 한국 개신교의 급성장을 이룬 주도세력이라고 자처하면서 199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 성장추세의 둔화요인이 자체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성찰에는 둔감하고, 급변화하는 사회 상황이나 시대적 종말현상이라고 치부한다. 한국 개신교 교인숫자의 약 70%를 차지하는  보수적인 개신교 집단은 배타적 종파주의, 공격적  선교정책, 부흥회적 대중 전도집회, 기복신앙적 영성, 그리고 임박한  종말신앙으로 무장하고 있다. ‘보수적 개신교’는 20-21세기가 인류문화가 과학기술적 정보화 사회, 문화종교적 다원사회, 정치경제적 지구화 사회로 전환되어 간다는 엄연한 사실에 눈을 감으려한다.

 

진보적인 개신교는 한국교회협의회(KNCC) 가입 교단 중 특히 진보적 입장의 교회들로 구성되는데, 1970-80년대   한국 개신교의 사회참여운동,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통일운동을 주도하면서 정치신학으로서 ‘한국민중신학’과 문화신학으로서 ‘한국 토착화신학 및 종교신학’을 형성해간 한국 개신교 집단을 일컫는다. 교세적으로는 한국 개신교인 약 30% 로 추산되는 진보적인 개신교 집단은, 그 통계숫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창조적 변혁세력으로서 ‘누룩’의 역할을 해왔다. 진보적인 개신교의 자기진단 입장에 의하면,  1990년대 한국 개신교 교세의 둔화는 도리혀 비정상적 ‘거품’이 가라앉는 단계로 보면서, 개신교 교세의 둔화및 감소 현상을  개신교의 자기정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철저한 비판적 성찰을 강조한다. 특히 자본주의적 무한성장 경제논리에 편승한 교회 성장론에 대한 비판, 사회역사의식의 부재와 사회윤리의식의 둔감성에 대한 비판, 개교회중심적인 종교집단의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 배타주의적 선교신학에 대한 비판이 강하다.

 

중도적인 개신교는 한국 교회협의회(KNCC)에 가입교단에 소속한 교회및 기존 보수적 성향을 띄던 교회지도자들 중에,  극우적 ‘보수’와  극좌적 ‘진보’를 동시에 경계하면서 개신교를 좀더 온건한 중도 노선을 취하여 발전시키려는 개신교 집단을 말한다. 개신교 교세 중에서 30% 정도를 차지하는 중도적인 개신교 지도그룹은 최근 ‘한국 교회미래를 준비하는 모임’(대표 이동원 목사)을 결성하고 한국 갤럽에 의뢰하여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개신교회인의 교회활동과 신앙의식 조사’를 사회과학적 조사방법을 통해 점검하고 오늘의 위기도전(Challenge)에 대하여 보다 진지하게 창조적 응전(Response)을 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한국 갤럽에 의뢰하여 연구 조사한 ‘개신교의 교회활동과 신앙의식  조사’ 결과분석에 의하면, 개신교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198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성장율도 1.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개신교인중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수는 57%에 불과하며, 개신교회를 다니다가도 그만두는 종교 이탈율도 한국 종교 중 가장 높은 67%로 나타났다. 일반 사회인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조사에서 개신교 천주교 불교에 대한 선호도는 각각 22%, 40%, 37%로 나타나서, 개신교 지도자의 자질과 개신교에 대한  종교적 신뢰도가 가장 낮게 나타났다. 전철 속이나 역 광장 등에서 전도를 받을 때 일반인들의 84%가 부정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응답했다. 한국 사회인이 개신교에 대한 인상은 지역사회 및 사회봉사에 별고 관심이 없고 종파적 개교회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비판적 평가로 나타났다. 

 

위에서 나타난 갤럽조사에 근거하여 ‘한국교회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모임’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양적교회성장에 치중해온 한국교회가 총체적 위기에 직면했다는데 견해를 같이하고, 개신교회의 자기정화노력, 교회의 사회봉사적 기능강화, 건전한 지속적 교회성장을 위한 선교신학과 영성 강조 등을 제안하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