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권 전도 10대 전략!!


서재생 목사 / 서울대현교회,


1. 들어가는 말

 불교(佛敎)란 삼계(三界) 육도윤회(六道輪廻)전생의 밖으로 해탈(解脫)하는 종교이며, 한국인이라면 불교(佛敎)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으리 만큼 한국민족사에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는 브라만교에 대한 저항에서 발생한 인도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도에서 힌두교에 압도당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숫자적으로 힌두교가 불교보다 우위이지만 실제로 아시아를 지배하는 종교는 불교라 할 만큼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아시아의 문화와 종교는 불교문화권이라 할 만큼 아시아의 종교로 정착되었고 지금은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통계 숫자로는 불교가 기독교를 능가 할 만큼 문화적, 사회적 비중은 높습니다. 많은 서구인들이 한국의 사찰에서 한국 불교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도시의 종교이고, 불교는 산 속의 종교로 생각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불교는 산중불교에서 도시속의 불교로 변모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불교가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다른 지역에서 포교로 전파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불교(佛敎)권 선교(宣敎)전략 이해론

 필자는 대한불교 조계종 승려생활에서 개종한 목사입니다. 그런데 저와 같이 불교에서 승려생활 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목사님이 되어 집회를 인도하시며 불교를 조직적으로 비난하자 불자들이 교회에 거칠게 항의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개종한 목사로서 2000여 교회 집회를 인도하면서 경험한 결론으로는 승려들의 사생활이 절대로 불교의 교리나 사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목회자 사생활이 기독교 진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불교권 전도전략은 불교종단의 비리나 승려의 사생활이 불교인양 공격하는 입장에서 대립과 투쟁적인 선교전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도방법은 역효과만 가져왔다고 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우리의 주가 되심을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고백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불교를 박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종교 간의 혼돈과 갈등만을 초래하게 될 뿐입니다. 한국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다종교 사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1700년 전 고구려와 신라에 전래되어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이념을 지배하였습니다. 이후 고려를 이은 조선은 불교를 배타하고 유교를 정치 사회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조선 말기인 19세기 후반에 전래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면서 한국사회에서 유교가 종교로서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지배종교로서는 소멸되고, 현재는 불교와 기독교가 중요 종교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에는 불교가 전체 인구의 24.4%, 기독교가 21,4%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전도의 대상은 불교요, 불교의 포교 대상은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필자는 불교권의 소기의 전도의 결과를 이룩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불교권 전도 10대 선교전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신뢰성(信賴性)이 요구(要求)됩니다.

 불교는 종교(宗敎)인을 생각할 때 친절을 베푸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친절하고 자비(慈悲)를 베푸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야합니다. 특히 불교는 종교인들이 사치하거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 도(道)를 실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절제와 검소한 생활의 본(本)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많은 승려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신뢰성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개종(改宗)만하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식으로 전도합니다. 즉 의식주문제, 직장문제, 결혼문제 책임진다고 큰소리로 전도했지만 막상 개종(改宗)을 하면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래서 개종한 승려의 대부분이 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산사(山寺)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시라도 스님에게 전도하는 교회나 목회자는 현실을 책임지지 못할 것들은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책임지지 못하는 공수표(空手票)로 상처만 입고 돌아간 승려만 필자의 계산에 수십 명이나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인 전도에는 신뢰성이 요구됩니다.

 2) 친밀(親密)한 관계의 형성(形成)이 필요합니다.

 불교(佛敎)인들에 대한 전도의 시작은 전도하고자 하는 대상과 먼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基本)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불교(佛敎)에 대해 무조건적인 멸시(蔑視)와 저주의 시각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은 개개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국가적인 안목에서 볼 때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사상(思想)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과의 만남 자체를 거부해서는 그들을 선교(宣敎)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승려나 골수 불교신자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마귀(魔鬼)새끼 같이 저주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부모와의 갈등, 학교에서의 성경이나 불경 의무교육에 대한 갈등, 직장에서 특정종교 배제와 같은 종교적 갈등 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 간에 분쟁이 야기될 때가 많습니다. 불교인들에게 전도하고자 하는 열정은 이해하지만 불교권 전도방법적인 면에서는 비판적인 전도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도하면서 불쾌감을 주거나 자존심을 자극하는 언행은 피해야 합니다.
불자들이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은 기독교가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혀 폭력까지도 불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불교계에서 발행된 한 잡지에는 기독교가 불교에 가한 것으로 보이는 방화, 불상파괴, 불상훼손, 페인트로 십자가를 칠하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불자들의 눈에는 기독교는 철저한 배타주의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권 선교를 보다 효율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친밀한 관계 형성이 필요합니다.

 3) 만남과 대화를 통한 복음(福音)의 증거(證據)가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전도할 때 만나는 기독교외 타종교인 1위는 불교인 일 것입니다. 이런 불교(佛敎)인들을 선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적인 만남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화는 생각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놓는 것은 대화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대화는 내 생각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도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전도 현장에서도 적용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기독교인과 불교인 사이에 서로 가슴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전도할 때 일방적으로 구원의 진리만 이야기하지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불교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년은 걸린다는 장기적 자세로 접근하여 먼저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고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도록 가까워진 후 서서히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를 않고, 서로 자기의 말만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하고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교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인으로 하여금 복음에 대해 마음의 문을 더욱 꼭꼭 걸어 잠그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만남도 갖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신자들로 하여금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못하고 기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불자를 전도 하고자 한다면 불자들을 만나야 하고, 만나면 대화가 필요하고, 대화에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 전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승려들이 미운 것이 아니라. 불교를 통해 영혼을 죽이는 사탄이 미운 것입니다. 불교 문화권에서의 전도자로서 준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필자가 불교인과 대화를 해보면 껍데기만 불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과거의 한국불교 신도였지만 지금은 학문의 불교로 포교하므로 불자들이 교리적으로 체계화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필자가 승려생활 할 때만 해도 기복 불교 이였으며  불교인인 된 이유는 자기 어머니가 석탄일 날 1년에 한번 사찰에 가거나, 불교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불자들은 적극적인 학문의 불교의 포교로 불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불자들과의 만남과 대화에는 교리적인 대화가 불가피 합니다.  

 4) 불교(佛敎)의 용어(用語)와 개념(槪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불교는 한국사회와 역사를 지배해 오다시피 한 종교입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우리민족 속에 민족복음화의 푸른 계절이 오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불교를 잘 이해하고 성경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불교인이기에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더욱 불교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불교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불교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상을 알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기독교신자가 “불교는 우상숭배의 종교다”와 같은 단순한 표현으로 불교를 비판하며 전도할 때, 혹은 불교의 교리를 불교에서 주장하는 의미로 말하지 않고, 왜곡하여 비판할 때, 이를 듣는 불교신자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반성보다는 “저들이 불교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저런 허튼 소리를 한다”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도하려는 기독교인을 향해 자기가 믿는 종교에 대해 옹호하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을 전하려는 기독교인의 말이 전도 대상자인 불교신자의 가슴에 전달되지 않을 것이고, 그 전도는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용어와 개념을 어느 정도라도 이해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불교인과 대화를 나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대화를 하면서 경전 이야기나, 교리적인 내용들 사이사이에 불교의 의례나 종교생활에 관련된, 기본적인 사항들을 적절히 삽입하게 되면 전도는 한결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불교의 용어와 개념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불교의 열반은 무(無)의 세계이며 불자들이 열반(해탈)의 구원에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기독교의 구원(하늘나라)세계는 불교와 같은 무(無)의 세계가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막스 뭘러는 불교는 절망과 보편적 운명의 종교로 정의하였습니다. 대단히 적절한 지적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불교와 같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종교임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불교의 용어와 개념을 잘 이해하고, 용어와 교리를 접촉점으로 함에 있어서 고도의 지혜와 지식이 요구됩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인은 불교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절대로 요구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불교권 전도전략에는 불교의 교리적인 전도와 설득력이 빈약합니다. 그것은 불교에 대한 교리가 부족한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상대를 설득하여 변화시키려면 교리적인 간격을 좁혀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은 불교의 사상, 역사, 문화에 대해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불교의 교훈(敎訓)법을 활용함이 필요합니다.

 불교는 유교와 더불어 한국사회와 역사를 지배해오다시피 한 종교입니다. 불교의 경전에서 석가모니(釋迦牟尼)는 그의 교훈을 많은 비유와 예화로 일관하여 이해를 돕지만 또한 듣는 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진리를 전파하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불교인에게 불경이야기, 고타마 싯달타 이야기를 하면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참 별일이라는 듯이 하다가 점차 진지하게 대화에 임합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자신의 신앙 현실과 불교 경전의 가르침 사이의 거리감을 토로하게 되고,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불교에 대한 석가모니 교훈법의 이해 폭을 넓히는 것은 기독교인이 불교인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길을 넓히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출석하는 교회 가까이에 사찰이 있으면 찾아가서 스님이나 불자들을 만나서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40년 동안 말씀하신 교훈의 말씀이 무엇인가와 예수님께서 3년간 공생애동안에 하신 말씀을 비교 전도할 때 많은 전도 결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 어느 날 석가모니에게 외아들이 죽게 되자 여인은 죽은 자식을 살려달라고 찾아 왔습니다. 석가모니는 여인에게 죽은 아이를 살리려면 마을에 내려가 조상대대로 삼대가 죽지 않은 가정이 있으면 겨자씨 하나만 얻어 오면 살려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겨자씨 하나만 얻어오면 죽은 자식을 살릴 수 있다는 소망 속에 마을에 내려가 온 마을 대문을 두드렸지만 조상 대대로 삼대가 죽지 않은 가정이 없어 겨자씨를 얻지 못하여 좌절 속에 돌아온 여인에게 누구나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찾아오니 죽은 자식 죽은 것을 꼭 참으라는 체관의 설법으로 위로한 교훈의 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9:18~26에 ‘회당장 야이로가 열두살 난 외동딸이 죽었사오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그 집에는 피리 부는 자들과 환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하시고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리들을 내어 보낸 후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셔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잠자는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와 같이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야이로의 딸이 소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는 세 번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야이로의 딸은 죽은 직후 살리셨고, 둘째로 청년 나인성 과부의 독자는 상여에 메고 가는 도중에 살리셨고(눅7:11) 셋째로 장년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만에 살리셨습니다(요11:25)
 인간은 인간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누누이 인간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란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때가 이미 늦어 일이 다 틀어지고 낭패됨을 이르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능력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석가모니를 찾아간 외자식을 잃은 과부도 살려 줄 것을 믿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살려주지 않고 죽음을 참으라는 체관으로 깨달음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은 결국 전능하신 주님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6) 자신의 구원(救援)관이 분명(分明)해야 합니다.

 불교(佛敎)의 사상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관이 분명치 않을 때, 불교사상에 현혹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불교에 심취하는 것은 불교교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삶의 고뇌에서 나온 인생을 사색하는 철학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인들에 대한 전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확신이며 이를 전하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숫자가 많다는 사실은 한국 기독교의 구원관에 대한 교육에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구조에 대한 한국갤럽조사에 의하면 종교개종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는 전체 종교인 중 17.2% 이였습니다. 개종한 응답의 현재 신앙 종교별 개종실태를 보면 불교신자를 100으로 보았을 때, 그중 13.1%가 개신교로부터 개종을 하였고, 2.2%가 천주교로부터 개종을 한 것으로 나타났고, 개신교신자의 경우는 9,6%가 불교로부터 개종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간의 개종 경험률에서 기독교인이 불교로 많이 개종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이 철저하지 못하면 불교인을 전도하다가 도리어 불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사상을 가볍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는 것을 개종한 목사로서 느낄 때가 많습니다.
또한 비 종교인들의 과거신앙 경험률의 조사에 의하면 “과거에 한번이라도 어떤 종교를 믿었던 적이 있습니까?”에서 전에 종교를 믿은 적이 있는 비 종교인 중 63.9%가 개신교를 믿은 적이 있고, 불교는 24.1%, 천주교는 16.4%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는 잃어버린 탕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불자들이 더 많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대한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조사통계에서 분명히 기독교인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통계가 높게 나온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기독교의 구원관이 철저하지 못하여 불자가 되는 것을 막는 것도 불교 선교전략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7) 사랑의 실천으로 전도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고 가르칩니다(요3:15, 롬5: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로운 자가 되었다”(롬3:23~24)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이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히9:22). 전도는 이 구원의 은총, 기쁨을 나 혼자서 많이 간직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일생동안 사랑으로 교훈하셨고, 또한 몸소 실천을 통하여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또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라는 이 말씀에는 기독교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교인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 한 실천 방법으로 교회 기관마다 여러 복지기관에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00%가 기독교와 관계된 복지관만 찾고 있습니다.
이제는 최소한이라도 불교(佛敎)인이 운영하는 복지시설인 양로원이나 고아원이나 장애시설에 예수 이름으로 후원하는 사랑의 실천을 나누면 큰 의미 있는 불교권 선교전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후원은 절대로 우상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며, 복지시설에 있는 분들의 의식주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6.25때 선교사들이 선교전략으로 구제품들을 예수 믿는 사람들만을 구분해서 주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굶주림 사람들을 구제하고, 병이 있을 때는 치료 해주는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마43:48),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셨으며(눅23:34) 이처럼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이었으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며, 가장 아름다운 신성의 본질이며, 요원 불멸의 진리인 것입니다.

 8) 불교는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나는 종교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전도 방법이 필요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자신의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왜 슬퍼하느냐 “인생(人生)이란 제법무아(諸法無我)요, 세상(世上)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그러므로 허무(無)하고 무상(無常)하다, 너희들도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나는 너희들과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니 나를 믿지 말고 너희 마음을 스승 삼아 수행에 정진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불교는 절대적인 무(無), 곧 일체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무란 공(空)으로 수냐타(Sunyata)를 한역한 것으로, 본래의 의미는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계의 현상 곧 인간 실존의 한계상황을 저버린 석가의 공(空)의 이론은 요컨대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석가는 인간에게, 인간을 부정하고 허무로 돌아가라는 것을 가르친 스승입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인간답게 참 인간의 모습을 실현하도록 그 스스로 모범을 보였고 그 길을 가르쳤습니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만사는 항구 불변하는 절대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공(空), 무(無)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를 무아로 세상을 무상으로 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고통이 수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을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무아입니다.
인간의 고(苦)는 그러한 무아의 실현을 위한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본유의 것이라고 믿어지는 자아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짐으로써 비로소 고(苦)의 정체는 밝혀지는 것이고, 마침내 무상한 모든 삶은 극복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지닌 고의 개념은 삶의 현상을 설명하는 비관적인 표현인 허무주의입니다. 불교의 지향점인 열반의 세계도 “불이 꺼진 상태”, 혹은 “연소의 소멸”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무생무사, 즉 생사가 없는 세계이므로 허무합니다. 열반을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한 곳입니다. 열반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와 대칭적인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가 허무하게도 절대적인 무(無), 곧 일체의 존재가 없는 공(空)의 세계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자신(自身)이 교주가 되거나 신의 위치에서 숭배 받기를 거부했고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깨달음의 세계란 “존재와 고통은 하나다. 존재가 없어지면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이었고, 이를 깨달음으로서 부처님이 되었습니다. 해탈세계인데 죽음(死)도 탄생(生)도 없는 무(無)의 세계 공(空)의 세계로써 경전에서는 생사환멸연기(生死還滅緣起)라고 합니다. 불교의 지양점인 해탈(열반)의 세계는 없어지는 세계로 허무로 끝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불교와 같이 공(空), 무(無)인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영생하는 종교입니다.

 9) 불교는 극락(極樂)세계로 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전도가 필요합니다.

불교인들에게 전도하다보면 “당신들은 당신들이 믿는 천국(天國)이 있다면 우리는 극락왕생(極樂往生)이 있다.”고 하면서 “지금은 서로 달리 믿고 있지만 결국 갈 곳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는 곧 그들은 천국(天國)과 극락(極樂)을 동일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극락(極樂)과 천국(天國)은 같은 것이 아니냐?”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두 종교의 중요한 내세관인데도, 극락(極樂)과 천국(天國)을 유사한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불교의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천국(天國)세계와 같이 영원한 곳이 아니라. 윤회(輪廻)세계의 한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極樂)은 최종의 단계가 아닙니다. 극락(極樂)은 최종단계를 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 합니다
 극락(極樂)세계는 불교의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불교(佛敎)이전 브라만 종교의 내세관(來世觀)으로 사후(死後)세계로 희락(喜樂)이 충만한 천계의 세계인 극락(極樂)입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설법(說法)을 통해서 윤회의 세계는 고통의 세계다. 천인계인 극락도 영원한 극락(極樂)이 아니라 또 죽음이 있는 곳이므로 고통의 세계로 보았습니다. 그는 ‘존재(윤회세계)와 고통은 하나다.’라고 하면서 고통(苦痛)에서 해방을 받으려면 존재의 세계인 윤회의 세계, 그 자체로부터 탈출하는 ‘해탈(解脫)사상’을 창시했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윤회(輪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이상(理想)입니다.
이성철 종정스님은 한국의 불자들이 매우 존경하는 스님이었습니다. 그는 1982년 4월 8일 초파일 범어에서 “극락(極樂)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잠잘 때 꿈속에서 잠꼬대하는 소리와 같습니다.”고 말씀했습니다. 불교는 극락에 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노인들이 죽어서 극락이나 가려고 염불을 하는 종교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한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부처 앞에 절을 하거나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한 적은 없습니다.” (성철스님 말씀) 이것이 진정한 불교입니다.
또한 그는 죽으면서 열반(涅槃)송에서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阿比)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성철스님의 열반(涅槃)송은 과연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철 스님에게 그가 장차 들어갈 지옥을 보여 주신 것 같습니다. 기독교 천국은 죽은 후 영혼이 들어가 안식하는 곳이요 주 재림 후 몸이 부활 변화되어 영생하는 곳입니다.

 10) 불교(佛敎)는 무신론(無神論)의 종교(宗敎)라는 이해 속에서 전도 가 필요합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BC 560년경 기존 종교의 신을 부정하고 계급제도를 부정하고 인간의 생, 노, 병, 사의 삶 문제의 해결은 절대자 신(神)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계급층에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궁극적 가치와 종교적 진리(실체)가 저 멀리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바로 인간의 삶과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가르칩니다.
열반경에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미혹에 사로잡힌 중생들이 나라고 믿고 집착하는 것은 사실은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오온으로서, 오온(五蘊)은 가아(假我)이고, 비아(非我) 혹은 무아(無我)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가장 가까운 곳, 자기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기독교처럼 절대자를 숭배하고 찬양하고 기도드리는 종교라기보다는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수행하는 종교입니다. 석가모니가 자기의 마음의 분석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존재(存在)와 고통(苦痛)은 하나다”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神)중심적 사고에서 인간과 자아의 문제로 전환한 이래 인간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석가모니는 롬비니 동산에서 태어난 직후 사방을 7보씩 걸으면서 외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선언으로써 하늘과 땅 사이에 자신 이외의 어떤 절대자도 부정하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신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생한 불교가 산신, 신중신, 칠성신, 시왕신, 조왕신, 부적 등 무속잡신을 포섭하여 선장 없는 배와 같이 방황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불교 신앙의 목적은 일체 중생이 다같이 성불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잡신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교는 종교보다도 인간의 의식세계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 탐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인식을 깨달음에서 찾고자 하는 사고이지, 영적 세계나 내세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를 종교로 보지 않고 철학으로 정의하는 종교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3. 나오는 말

 최근 한국 불교는 불교 대중화(大衆化)에 힘쓰기 위해 사찰들이 최첨단 음향 시스템을 갖추고 초현대식 절을 지어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학문(교리)불교로 전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불교(佛敎)권에 복음을 들고 맞서서 불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적인 전쟁과 같습니다. 불교(佛敎)권 선교(宣敎)사명을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 한국 교회는 불교와의 관계에서 독선적이고 배타주의적인 태도를 취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와 기독교 비교론적인 성경연구가 부족한 데 있습니다.
필자는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주제별 비교론으로 예수님과 부처, 천국과 극락, 부활과 윤회, 사랑과 자비, 성경과 불경, 교회와 절(사찰), 유신론과 무신론, 영생과 열반, 목사와 승려, 창조론과 연기론, 이렇게 나누어 무엇이 다른가를 논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교를 연구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처음부터 보면 그들의 사상과 교리를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한 다음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불교의 장단점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 기독교가 불교 선교전략을 위한 불교에 대한 교리의 이해 속에서 “효과적인 전도 방법”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불교에 대한 교리의 상식적 수준의 지식은 있어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본 기고 글은 “불교권 선교 전도론” 90분 강의 안입니다. 긴 글 읽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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