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4중 모습


부제: 믿음도 detail에 있다(36)

 

사도 바울은 방법의 관점에서 구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9-10)


그리고 방향 또는 목적의 관점에서 구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13-14)

 

먼저 성구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그러나 나중 성구는 기독론적 관점에서 구원을 각각 설명한다

달리 말해 전자는 신앙고백에 의한 신자 개인의 영적 변화로 그러나 후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한 소속의 변화로 구원을 각각 설명한다

그리고 구원은 개인적 측면은 물론 공동체적 측면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론 뭔가 부족하다. 

구원이란 주로 '무엇로부터' 구출, 해방, 구속으로 설명된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1:4


그러나 from이란 관점에서 본 구원론은 충분치 못하다.

우선 이 구원론은 금욕적, 도피적, 소극적, 피동적 성격의 신앙 삶을 조성한다. ​뭔가 보완되어야 한다. 

구원 이후 어디로 향해 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약해서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구원 이후 신자의 목적지가 죽어서 비로소 들어가는 천국 또는 천당이라고 가르친다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학은 신자를 이 세상의 나그네라고 가르친다. 

신앙이 좋은 신자일수록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을 좋아한다.  

신약 성경의 구원론으론 뭔가 흡족하지 못하다. 

 

사도 바울은 구약을 잘 아는 히브리인 사도였다.

구약과 완전히 분리된 개념의 구원을 그가 주장할 리 없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할 것이라고 이미 믿고 있었다(행1:6절). 

그럼 구약 성경이 주장하는 구원론은 무엇인가? 출애굽 사건은 구약의 구원론을 대표적으로 잘 설명한다.

출애굽 사건은 장소의 이전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신분과 소속의 변화를 초래시켰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목적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다.

애굽을 떠난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에게 그들의 후손이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창12:1-3절).

이스라엘은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애굽도 그리고 가나안도 모두 이 세상에 속한 동일한 지정학적 장소란 것이다

구약의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식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발생한 장소의 이전이란 방식으로 설명된다.

그럼 신약과 다른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을 잘 아는 히브리 인이었다.

초대교회 이후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교부들이 구원을 잘못 해석했다.

신약의 구원도 애굽 같은 세상을 벗어남과 아울러 가나안과도 같은 이 세상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목표한다.

사도 바울은 구속의 결과 신자들이 흑암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로로 이미 옮겨졌다고 설명한다(골1:13-14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서 소속된 장소를 달리함으로 신자의 신분도 달라진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 구약 성경은 동일한 구원을 설명한다

성경의 구원론 즉 구약이 설명하는 구원의 서정은 4 단계로 설명된다. 


첫째 단계의 구원은 애굽 같은 세상으로부터(from) 벗어난 상태를 뜻한다.

둘째 단계의 구원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through) 훈련 받는 과정을 뜻한다. 

셋째 단계의 구원은 가나안에 들어가(into, for)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다.

그리고 넷째 단계이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toward) 구원의 완성인 영화를 소망하는 신앙 삶을 뜻한다.

 

첫째 의미(from)의 구원은 애굽이라는 거대한 세상 세력(흑암의 권세)로부터 벗어난 결과이다. 

이 때문에 신자는 애굽의 모든 삶과 사고와 그 방식 그리고 그 가치관을 모두 버려야 한다.  

신자는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세상의 온갖 지식과 과학보다 즉 이성보다 믿음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자의 내적 모습이다. 이런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둘째 의미(through)의 구원은 이 세상을 광야로 이해하고 소극적으로 사는 삶의 과정을 뜻한다. 

광야에선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살 수 없다. 하나님이 매일 보내는 만나와 메추라기에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

이 때 율법이 정한 대로 일용한 양식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신자는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존하며 사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로써 신자는 절제, 자제, 겸손과 낮아짐과 자기부정을 배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가져야 할 인격, 자질과 성품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셋째 의미(into, for)의 구원은 가나안과도 같은 세상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회 삶을 사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구속과 구원의 목표이다

애굽 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완전한 법치가 실현되어야 한다. 

결과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완전히 다른 선진적 사회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신약 성도는 이런 목표를 늘 의식하며 사회 삶을 살아야 한다. 

이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님은 이방인들 가운데 영광을 받을 것이다(신4:5-6, 마5:13-16절).

이것은 바로 창조의 목표(창1:26-28절)이기도 하다.

 

넷째 의미(toward)의 구원은 가나안 같은 세상도 결국 하나님의 불 심판으로 멸망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소극적으로 사는 삶의 과정이다. 

재림과 심판은 이 세상의 형통과 번영, 출세와 성공에 집착하지 말라고 늘 신자들에게 충고한다. 

이런 불안감 덕분에 신자는 자제하고 절제함으로 이 세상 사람이 따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다. 

성숙한 신자에게 이중적 삶의 자세가 보이는 이유이다. 

적극적으로 세상 삶을 살면서도 소극적 자세를 또한 취한다(고전7:29-31).

이 역도 마찬 가지다. 이 점에서 신자는 이 세상의 나그네와 같다.

 

사도 바울은 첫째와 둘째 의미의 구원을 '믿음의 역사'로,

셋째 의미의 구원을 '사랑의 수고'로 그리고 넷째 의미의 구원을 '소망의 인내'로 요약하여 각각 설명한다(살전1:3).

진실한 믿음은 삶과 사고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이에 따라 산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이다.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는 이웃 사랑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수고이다. 

그리고 재림 후 완성될 구원을 소망하기에 범사에 인내하고 참으며 산다.

이것이 바로 소망의 인내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둘째와 셋째 단계의 구원을 소홀히 다루었다.

구원은 죽음을 통해  천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런 구원론으론 하나님의 창조 목적(1:26-28)인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울 수 없다.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영향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 생긴 불상사이다.

반면 앞의 금욕적 신앙 삶을 부정하고 쾌락적 신앙 삶을 추구하도록 가르치는 번영신학,

양적 성장론과 이와 유사한 신학은 4중의 구원론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결과 출생한 이단자이다.

 

​언약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설명된다.


첫째 의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 그리고 무조건적 은총의 결과인 칭의이다.  

여기 칭의는 구원의 서정에서 성화 이전 단계 - 소명, 중생, 믿음, 양자와 칭의 - 를 가리킨다.

이 5단계는 논리적 구분이지 신간적으로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칭의는 중생으로도 해석된다. 중생은 영적 출생은 반드시 성장을 전제한다.

둘째부터 넷째까지의 구원은 구원의 서정에서 성화와 견인의 은총까지 과정을 뜻한다.

출생이 성장을 전제하듯이 하나님의 일방적 은총으로 의롭게 된 신자는 하나님의 율법 또는 말씀대로 살려고 당연히 노력한다.

은총을 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즐겨 준수한다.

하나님 사랑과 계명 준수가 둘째부터 넷째까지의 구원을 가능케 한다.

법정적 관점에서 성화를 가리킨다.

결국 언약적 관점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총이면서 

동시에 구원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요구 때문에 조건적 은총이기도 하다.  

구원의 4중적 성격과 내용은 기독교 신학, 교회와 신자에게 4중적 세계관을 제공한다. 


첫째 이 세상은 애굽과 같아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할 죄악 세상이다.

둘째 이 세상은 성도에게 광야와 같아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을 미리 훈련해야 할 곳이다. 

       이곳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훈련을 열심히 받아야  한.

셋째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적극적을 살아야 할 곳이다

       교회가 아닌 신자가 인류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활동해야 한다.

그리고 넷째 이 세상은 언젠가 불심판으로 멸망 당할 대상이다.

신자는 이 세상에 올 인(all-in)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성경은 부정적/비관적 세계관(애굽과 멸망 대상)과

아울러 긍정적/낙관적 세계관(광야와 가나안)을 동시에 가르친다. 

이에 따라 신자의 신앙 삶도 적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소극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참으로 어렵다.

중첩된 신앙 삶은 신자에게 늘 하나님의 시험이 된다.  이로서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된다.  

삶의 정황에 따라 신자는 4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아니면 항상 4중적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이 세상에서 신앙 삶을 다중적으로 살아야 한다.

한편 성도는 옛것을 버리는 훈련(애굽)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 새 것을 습득하는 훈련도 열심히 받아야 한다(광야).

이 세상에 세상 방식이 아닌 하나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가나안).

 

그 동안 기독교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구원의 4가지 국면을 보지 못하고 일부에만 치우치는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보수주의자는 첫째와 넷째에 치우친 구원론을 반면 진보주의자는 셋째에 치우친 구원론을 각각 보여준다

번영과 성공을 바라는 기복적 신학은 첫째, 둘째, 셋째외 넷째 구원론을 잘못 이해한 체 세상을 가나안처럼 본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은 4가지 신앙 삶 사이 균형과 조화를 보여주는 세상 삶을 산다.


​신앙의 성숙 정도에 따라 치중해야 할 단계도 있다. 

신앙 초기 한 동안 신자는 첫째와 둘째에 치중해야 한다.

이 단계를 벗어났다면 가정, 직장과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숙한 시민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출세와 성공 후 이미 이 세상에서 번영과 형통을 우리는 성도라면 넷째 단계에 더욱 치중해야 한다. 

그리고 가난한 성도라면 둘째와 넷째 방식의 신앙 삶으로 세상의 곤고함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 삶은 다양한 국면을 보인다. 그러나  4가지 신앙 방식으로 줄일 수 있다. 

이들의 도움으로 신앙을 스스로 진단할 수도 있다. 


신약 성경의 구원론은 첫째와 넷째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헬라 철학에 익숙한 교부들이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구속과 구원의 결과 신자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신자는 이 세상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이 때문에 조직신학의 각론 -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과 종말론 - 은 그 중심을 신국론에 두어야 한다.

아니면 교화론과 종말론 사이 신국론을 새로이 넣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 즉 신국론을 배제한 신학은 방향과 목표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조기사를 통해 하나님이 처음으로 밝힌 신국론(창1:26-28절)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리고 구원론이란 타락 때문에 왜곡된 신국론을 회복시키기 위함임을 알지 못한 결과이다.

기독교 신학은 신국론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어야 한다. 교회론이나 종말론이 중심인 신학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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