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以信稱義)
이신칭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롬3:21-3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갈2:15-21)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신칭의에 대하여
권호덕 교수(천안대, 조직신학)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의롭다 하심에 대하여
1. 하나님은 효력있게 부르신 자들은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데 저희에게 의를 주입하시므로가 아니라 저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또한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저희를 받아 주심으로 말미암고 저희에게 된 무슨 일이나 저희가 한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요 다만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그 자체나 믿는 행위 혹은 다른 어떤 복음적인 순종을 저희에게 돌려 의로 삼으심이 다만 그리스도의 순종과 배상을 저희에게 돌리시고 저희로 주님을 영접하고 의지하며 또한 그의 의를 믿음을 의지하려 하게 하셨으니 이 믿음은 저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2. 이와같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와 그의 의를 의지하는 믿음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도구이나 그러나 믿음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속에 홀로 있지 않고 항상 구원의 다른 은혜와 함께 있어서 죽은 믿음이 아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 된다.
3.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와같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의 빚을 완전히 갚아 주시고 저희 대신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에 합당하고 실제적이요 충분한 배상을 치르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주신 바 되고 그의 순종과 배상이 저희 대신 받으신 바 되었으며 이 둘이 저희에게 있는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거저 주신 것이니 만큼 저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다만 값없이 주는 은혜로 온 것이요 이는 하나님의 정확한 공의와 풍요한 사랑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일에 있어서 영광을 받으시게 함이다.
4. 하나님은 영원 전에 택한 자를 의롭다 하시려고 예정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저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저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셨지만 그래도 성령께서 실제로 그리스도를 저희에게 적용하시기까지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
5. 하나님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죄를 계속 용서하신다. 그리하여 저희가 비록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에서 타락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저희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 진노 아래로 떨어져, 겸비하여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고 저희 믿음과 회개를 새롭게하기까지는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 빛을 저희에게 회복하지 못한다.
6. 구약시대에 믿는 자의 의롭다 하심은 이 모든 점에서 신약시대의 믿는 자의 의롭다 하심과 동일하다.
양자 삼으심에 대하여
1.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를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자기의 양자가 되게하는 은혜에 참여하게 하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저희는 하나님의 자녀의 수에 들어 그 자유와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양자의 영을 받아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불쌍히 여김을 받고 보호를 받고 쓸 것을 미리 아시고 채워주심을 받고 아버지가 하듯 하시는 징계를 받으나 결단코 버리움을 받지 않고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아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되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로써 받는다.
하이델베르그 신앙교육서:
제 60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집니까?
답: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믿음을 통해서 입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해 무겁게 범죄했다고 또 그 중에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고 고발하지만 또 내가 항상 모든 악을 향하여 기울이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아무런 공로없이 은혜로 완전한 보상, 그리스도의 義와 거룩성을 나에게 선사하시고 마치 내가 죄를 한번도 범하지 않았던 것 처럼, 또 항상 스스로 순종했던 것 처럼 즉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순종하신 것처럼 순종한 것으로 여기심을 통해서 입니다. 만일 내가 믿는 마음으로 그의 구원사역을 받아 들이면 하나님은 그와 같이 나를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들어가는 말
구원이란 ‘육의 상태’ 곧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 ‘성령에 따라’ 사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이 과도기에 대해 소명의 관점에서, 중생의 관점에서 그리고 회심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구원을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대로 이신칭의론은 성경 해석학의 열쇠이며 성경의 핵심 사상이다. 성경 전체는 ‘이신칭의’로 꿰뚫을 수 있다. 칼빈은 이신칭의론을 종교생활의 요점이라고 지적한 다음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했다(Inst III,11,1).
사실상, 以信稱義론은 개신교 교회가 지니고 있는 특징인 동시에 보물인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이 진리를 잘 알아야 하고 또 자주 입에 膾炙(회자=회와 구운 고기라는 뜻으로, 널리 칭찬(稱讚)을 받으며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런 이신칭의론이 잊어져 가고 있다. 아니 이 중요한 주제를 한번도 본격적으로 가르쳐지거나 거론해 보지도 않은 체 자취를 감추려 하는 것 같이 보인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성도들은 이 용어에 대해 매우 낯설어 한다. 그러면 왜 한국교회에서는 이 중요한 성경의 가르침이 잊어져 가고 있을까? 우선은 선교된 역사가 짧아 기독교 가르침을 깊이 있게 연구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 다음은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지 얼마 안 되어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됨과 더불어 신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놓친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일제시대가 됨과 동시에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에 휘말이면서 우선 가장 급한 것은 예수냐 아니면 일본 천황이냐 하는 싸움에서 예수만을 붙잡아야 하는 기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우선은 기독론적인 시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최봉석 목사의 구호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속에서 기독론적인 시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대답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발전에 큰 공헌이 있는 성결교단의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이 이신칭의론을 부분적으로 가르치기는 했으나 깊은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이신칭의론의 중요성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고 보여진다. 그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 청교도 작가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해설하고 작은 책자인 ‘박군의 심정’을 가지고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이신칭의에 대한 참된 가르침을 막는 다른 장애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한 반도에 들어와 먼저 필히 깨뜰어야 했을 자연인의 사고방식이 복음을 삼켰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 자연인의 사고방식이란 범신론적, 유물론적,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한 동안 한국교회에 팽배하던 ‘기복신앙’ 내지 ‘적극적 사고방식’ 풍조와 같은 다른 복음이 참된 복음의 핵심을 볼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사실 초창기 건전한 부흥운동이 한국교회를 많이 도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부흥운동은 인간 자신을 위한 기복신앙으로 버렸다. 헌금을 해도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해서 하기보다는 작은 돈으로 하나님께 투자하고 몇 만 배의 복을 받기 위해 헌금을 하는 풍조가 되어 버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구원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도록 만드는 이신칭의 사상이 먹혀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 개신교회가 이신칭의를 부분적으로 가르치되 매우 피상적으로 가르쳐 그 핵심을 놓치게 한 것도 이 가르침을 경시하게 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사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이신칭의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고만 말하고 넘어간다. 우리가 앞으로 배우겠지만 이신칭의를 통한 구원방법을 새로운 세계관 내지 사고방식의 혁명을 전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세에서 종교개혁으로 넘어올 때는 사실상 정신적인 영적인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근래에 와서는 교회의 양적 성장운동이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의 핵심을 빗겨나가도록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교회성장이 멈춘 상태에 있는 한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의 관심은 이 목적을 위해서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더러는 심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더러는 무속적인 방법을, 더러는 세상적인 경영방법을 사용한다. 이런 시도의 결과는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을까? 열려진 열매를 보아 한번 심도 있게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당시 교회가 결국 성경이 제시한 하나님의 구원방법을 버리고 이방 종교의 방법으로 공동체를 지배하던 것을 보고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의 핵심 내용인 이신칭의론을 발견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종교개혁운동과 더불어 이신칭의론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까지는 교리사 내지 신학사 차원에서 일정한 과정이 있었다. 처음에는 기독론 논쟁과 삼위일체 논쟁이 있었고 그 다음은 어거스틴과 더불어 인간론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중세 12세기에는 구속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다가 16세기에 비로소 이신칭의론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나 이런 절차를 거치는 것 같다. 한국교회도 이런 시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신칭의론은 그 이전에 있었던 신학적인 논쟁을 전제하거나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의 재정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신칭의론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A. 칭의에 대한 정의
칭의는 한 마디로 다 정의할 수 없다. 이는 칭의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원되고 율법과 성령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함께 언급되며 인간의 삶 전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어떻게 정의를 내렸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신칭의를 다룰 때 다음과 같은 질문과 연관하여 논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는가?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실 이와 같은 질문은 칭의론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은 종교개혁 운동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칭의를 하나님의 행위 곧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의 義를 전달한 그런 행위로 이해했다. 이 사건을 인식하고 그것을 근본적인 신학적 가르침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또 이런 인식으로부터 교회와 신학을 위한 지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칭의론이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그 형태를 이루며 또 부분적으로는 변화되었는지, 이런 질문이 개신교 신학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그 여러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되는 점은 칭의론이 신학적으로 근본적인 개념으로서 특별한 결과에 의해 탁월하게 부각된다는 점이다.
마르틴 루터는 1533년 8월 26일에 시 130:4 곧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은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의 총체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비치는 “태양인데 그 이유는 교회는 이 가르침이 서면 서게되고 그것이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진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루터는 1536년 12월에 자기의 신학적인 유언에서,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대한 교의를 고백하고 난 다음, 소위 ‘소요리 문답서’를 썼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역과 우리의 구원을 다루는 ‘첫째되고 중심되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 것은 믿어져야 하고 어떤 행위로도, 율법으로도 그리고 공로로도 얻어지거나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는 것은 자명하고 또 확실한 것이다. ......... 우리는 이 조항으로부터 물러설 수 없다.”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도 이와 매우 유사하게 낡은 신앙을 가진 신학자들과 황제에 대항하여 “아우구스타나의 고백서”(Confessio Augustana)를 옹호했다.
“첫째 우리는 공로로 죄사함을 얻는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의 의사를 표명한다. 둘째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화해를 못하며 죄사함을 얻을 수 없음을 지키고, 가르치며 그리고 고백한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 중에 가장 탁월한 이 항목(칭의론)에 대해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논쟁을 벌려왔다. 이 항목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분명하고 바르게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칭의론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보물과 그리스도를 바로 인식하는데 유일한 길을 제시한다. 즉 칭의론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유일한 관문이다. 이 항목이 없이는 불쌍한 그 어떤 양심도 지속적이며 확실한 위로를 얻을 수 없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을 인식할 수 없다.”
위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또 이로 인해 상호관계가 폐쇄되어 버린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이 구원을 얻는데 그 어떤 인간적인 공로도 없이 믿음의 자유함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칭의에 대한 복음은 복음적 신학의 핵심이다. 루터와 멜란히톤 그리고 그외 다른 종교개혁자들은 상호 의견을 달리하는 점도 있으나 칭의론에 있어서는 모두 일치한다. 이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내용 곧 혁명을 일으키는 신학이념을 유포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성경의 촛점에,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성경적 증거의 소진점(消盡點)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루터는 소요리 문답서에서 ‘중심항목’(칭의론)을 설명할 때
롬 4:25; 요 1:29; 사 53:6; 롬 3:23-25을 언급하므로써 색다르게 표현했다.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뢰셔(Valentin Ernst L?scher)는 팽창일로에 있던 경건주의 운동에 대항하여 싸운 루터파 정통신학의 대표적인 옹호자인데 1712년에 그의 저서 “디모데 베리누스”(Timotheus Verinus)에서 칭의론을 “교회의 서고 넘어짐을 결정하는 항목”(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라고 불렀다. 교회는 우리 구원의 근거와 우리 믿음과 소망의 근거를 그 자체 속에 내포하고 점점 더 거룩하게 보존해야할 칭의론과 더불어 서고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變移는 있지만, 확실히 루터가 생각했던 내용과 일치한다.
스콜라 신학에서는 ‘믿음-조항’은(두드러진 의미에서 articulus; articulus fidei)은 절대적인 권위를 요구하는 그 무엇을 표현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조항은 계시된 지식을 내포하고 신적인 지식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믿음조항’은 신학적인 지식의 “토대이다”. 신학적인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믿음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결국 이 ‘믿음조항’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는 “조항(신앙고백서)”(Artikel)이라는 말은 공동적인 토론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믿음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며 이를 통해 교회의 일치를 확증하는 그 무엇이다. ‘믿음 조항’은 교회의 고백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이유는 교회가 그들의 고백서를 매번 새로이 그 경계선을 정하고 이 경계선 밖에서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곧 칭의함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 즉 은혜를 받고 또 은혜를 베푸는 죄인들의 공동체 이기를 그만두기 때문이다. 이 말은 “믿음 조항은 교회의 서고 넘어짐이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와 같은 문구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신칭의는 교회가 존재하는데 필요한 기준이 된다.
칼빈은 칭의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轉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Inst III,11,2)라고 했다. 그는 자기의 칭의론을 기독교강요 III, 11-13에서 장구하게 열거했다.
이제 우리는 칭의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상론할 필요가 있다.
1. 성경적인 용어와 증거
a. 구약성경
-?????: 구약성경에서 ‘의롭게 하다’라는 용어는 히츠디크(?????)이며 그 의미는 ‘어떤 사람의 상태가 율법의 요구와 일치한다고 법적으로 선언하다’(벌코프, 762)이다. 신 25:1의 이 단어는 70인경에서는 δικαιο?ν으로 번역되었고 바울도 이 단어를 사용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출 23:7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v;r; qyDix]a'Aal yKi groh}T'Ala' qyDix'w] yqin:w] qj;r]Ti rq,v,Arb'D]mi
신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fP;v]Mih'Ala, WvG]nIw] !yvin:a} @yBe byri hy
.[v;r;h;Ata, W[yvir]hiw] qyDiX'h'Ata, WqyDix]hiw] !Wfp;v]W
잠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h,ynEv]A!G" hw:hy] tb'[}/T qyDix' ['yvir]m'W [v;r; qyDix]m'
사 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WNM,mi Wrysiy: !yqiyDix' tq'd]xiw] dj'vo bq,[e [v;r; yqeyDix]m'
이 모든 구절들은 ‘의롭게 만들다’가 아니라 ‘의롭게 여기다’의 의미를 지닌다. 또 다음과 같은 표현들도 법정적이며 법적인 의미를 지닌다. 사실 ‘의롭게 만들다’라는 표현은 범신론적인 시각으로 해석한 것으로 오시안더나 로마 카톨릭 신학이 그렇게 해석한다.
렘 3: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패역한 유다보다 오히려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hd;Why] hd;gEBomi laer;c]yI hb;vum] Hv;p]n" hq;D]xi yl'ae hw:hy] rm,aYOw"
겔 16:50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s .ytiyair; rv,a}K' @h,t]a, rysia;w: yn:p;l] hb;[e/t hn:yc,[}T'w" hn:yh,B]g]Tiw"
겔 16:51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치 아니하였느니라 네가 그들보다 가증한 일을 심히 행한 고로 너의 가증한 행위로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느니라
yBir]T'w" ha;f;j; al &yIt'aFoj' yxij}K' @/rm]vow]
&yIt'/ja} & te/ja}Ata, yqiD]x'T]w" hN:heme &yIt'/b[}/T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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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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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5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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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신약성경
-δικαιαω,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39번 나오며, “변호하다, 정당함을 입증하다, 혹은 옳은 것으로 인정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사용되었다. 우선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여기면, 그 다음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이 은혜를 받은 죄인은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된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헬라어 동사 곧 “-αω”형식의 동사는 “어떤 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다”의 의미를 지니지 않고 “...로 여기다” 또는 “어떤 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있다고 선언하다”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에릭슨 하권, 140). 말하자면 “δικαιαω,”는 법정적으로 의롭게 여긴다는 말이다.
“의롭다고 선언하다”의 반대어 즉 정죄하다는 단어는 ???의 히필형인 ?????이다. 이 두 단어는 법정에서 매우 분명하게 사용되는 것으로 롬 8:33-34에 나온다(정죄하다↔의롭다 선언하다). 여기 δικαιο?ν은 70인 경우처럼 “의롭다고 선언하다”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 있어서 δικαιο?ν은 항상 “의롭다고 선언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 12:37; 눅 7:29; 16:15; 18:14; 행 13:38).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칭의 사건에 사용된 이 표현은 재판의 의미 그 외의 의미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롬 3:20, 24, 26-28).
-칭의(稱義)와 관계하는 명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δικαιοσι?,는 단순히 ‘칭의’이고 δικαιοσυνη는 ‘의롭게 함’이다.
마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levgw< de; uJmi'n, o{ti pa'n rJh'ma ajrgo;n o}< eja;n lalhvswsin oiJ a[nqrwpoi, ajpodwvsousin peri; aujtou' lovgon ejn hJmevra/ krivsew".)
마 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ejk ga;r tw'n< lovgwn< sou dikaiwqhvsh/, kai; ejk tw'n< lovgwn< sou katadikasqhvsh/.)
눅 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Kai; pa'" oJ lao;" ajkouvsa" kai; oiJ telw'nai ejdikaivwsan to;n qeovn, baptisqevnte" to; bavptisma jIwavnnou:)
행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kai; ajpo; pavntwn w|n oujk< hjdunhvqhte ejn tw/' novmw/ Mwsevw" dikaiwqh'nai, ejn touvtw/ pa'" oJ pisteuvwn dikaiou'tai.)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mh;< gevnoito: ginevsqw< de; oJ qeo;" ajlhqhv", pa'"< de; a[nqrwpo" yeuvsth", kaqw;" gevgraptai, {Opw" a]n< dikaiwqh'/" ejn toi'"< lovgoi"< sou, kai; nikhvsh/" ejn tw'/ krivnesqaiv< se.)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diovti ejx e[rgwn novmou ouj dikaiwqhvsetai pa'sa sa;rx ejnwvpion aujtou': dia;< ga;r novmou ejpivgnwsi" aJmartiva".)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Nuni;< de; cwri;" novmou dikaiosuvnh qeou' pefanevrwtai, marturoumevnh uJpo; tou' novmou kai; tw'n profhtw'n:)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dikaiosuvnh de; qeou' dia; pivstew" jIhsou' cristou', eij" pavnta" kai; ejpi; pavnta" tou;" pisteuvonta": ouj< gavr< ejstin diastolhv:)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pavnte"< ga;r h{marton kai; uJsterou'ntai th'" dovxh" tou' qeou',)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dikaiouvmenoi dwrea;n th'/< aujtou'< cavriti, dia; th'" ajpolutrwvsew" th'" ejn cristw'/ jIhsou',)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o}n proevqeto oJ qeo;" iJlasthvrion dia; th'" pivstew" ejn tw'/< aujtou'< ai{mati, eij" e[ndeixin th'"< dikaiosuvnh"< aujtou', dia; th;n pavresin tw'n progegonovtwn aJmarthmavtwn)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ejn th'/ ajnoch'/ tou' qeou', pro;" e[ndeixin th'"< dikaiosuvnh"< aujtou' ejn tw'/ nu'n kairw'/, eij" to; ei\nai< aujto;n divkaion kai; dikaiou'nta to;n ejk pivstew" jIhsou'.)
롬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Pou' ou\n hJ kauvchsi"_ ejxekleivsqh. dia; poivou novmou_ tw'n e[rgwn_ oujciv, ajlla; dia; novmou pivstew".)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logizovmeqa ou\n pivstei dikaiou'sqai a[nqrwpon, cwri;" e[rgwn novmou.)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Dikaiwqevnte" ou\n ejk pivstew", eijrhvnhn e[comen pro;" to;n qeo;n dia; tou'< kurivou< hJmw'n jIhsou' cristou',)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pollw'/ ou\n ma'llon, dikaiwqevnte" nu'n ejn tw'/< ai{mati< aujtou', swqhsovmeqa di j aujtou' ajpo; th'" ojrgh'".)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ou}"< de; prowvrisen, touvtou" kai; ejkavlesen: kai; ou}" ejkavlesen, touvtou" kai; ejdikaivwsen: ou}" de; ejdikaivwsen, touvtou" kai; ejdovxasen.)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o{" ge tou'< ijdivou< uiJou' oujk< ejfeivsato, ajll j uJpe;r hJmw'n pavntwn parevdwken aujtovn, pw'" oujci; kai; su;n aujtw'/ ta;< pavnta hJmi'n carivsetai_)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tiv" ejgkalevsei kata; ejklektw'n qeou'_ qeo;" oJ dikaiw'n.)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tiv" oJ katakrivnw'n_ cristo;" oJ ajpoqanwvn, ma'llon< de; kai; ejgerqeiv", o}" kai; e[stin ejn dexia'/ tou' qeou', o}" kai; ejntugcavnei uJpe;r hJmw'n.)
고전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kai; tau'tav tine"< h\te: ajlla; ajpelouvsasqe, ajlla; hJgiavsqhte, ajll j ejdikaiwvqhte, ejn tw'/ ojnovmati tou' kurivou jIhsou', kai; ejn tw'/ pneuvmati tou'< qeou'< hJmw'n.)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eijdovte" o{ti ouj< dikaiou'tai a[nqrwpo" ejx e[rgwn novmou, eja;n< mh; dia; pivstew" jIhsou' cristou', kai; hJmei'" eij" cristo;n jIhsou'n ejpisteuvsamen, i{na dikaiwqw'men ejk pivstew" Cristou', kai; oujk ejx e[rgwn novmou: diovti ouj< dikaiwqhvsetai ejx e[rgwn novmou pa'sa savrx.)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 {Oti< de; ejn novmw/ oujdei;" dikaiou'tai para; tw'/ qew'/ dh'lon: o{ti oJ divkaio" ejk pivstew" zhvsetai:)-λογ?ζεσθαι:
그 다음 하나님께서 재판하는 행위의 다른 표현은 λογ?ζεσθαι ε?? δικαιοσ?νην이 있는데 창 15:6(LⅩⅩ)에서 처음 발견된다. λογ?ζεσθα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다. 그 의미는 “누구에게 무엇(그리스도의 義)을 돌리다, 무엇을 계산에 넣다, 전가(傳嫁)하다” 등이다. 이 경우 죄인이 실제로 이렇게 여김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는지 또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그것에는 상관없이 의롭다 선언한다는 것이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BHS]창 15:6 .hq;d;x] /L h;b,v]j]Y"w" hw:hyB' @mia>h,w]
[LXX]창 15:6 kai; ejpivsteusen Abram tw'/ qew'/ kai; ejlogivsqh aujtw'/ eij" dikaiosuvnhn
눅 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levgw< ga;r uJmi'n, o{ti e[ti tou'to to; gegrammevnon dei' telesqh'nai ejn ejmoiv, to; Kai; meta; ajnovmwn ejlogivsqh: kai;< ga;r ta; peri; ejmou' tevlo" e[cei.)
요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oujde; dialogivzesqe o{ti sumfevrei hJmi'n i{na ei|" a[nqrwpo" ajpoqavnh/ uJpe;r tou' laou', kai; mh; o{lon to; e[qno" ajpovlhtai.)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logizovmeqa ou\n pivstei dikaiou'sqai a[nqrwpon, cwri;" e[rgwn novmou.)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tiv< ga;r hJ grafh; levgei_ jEpivsteusen< de; jAbraa;m tw'/ qew'/, kai; ejlogivsqh aujtw'/ eij" dikaiosuvnhn.)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Tw'/< de; ejrgazomevnw/ oJ misqo;" ouj< logivzetai kata; cavrin, ajlla; kata; to; ojfeivlhma:)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tw'/< de; mh;< ejrgazomevnw/, pisteuvonti< de; ejpi; to;n dikaiou'nta to;n ajsebh', logivzetai hJ< pivsti"< aujtou' eij" dikaiosuvnhn.)
λογ?ζεσθαι와 같은 표현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움켜잡는 믿음이 인간을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의롭게 만들다 또는 의를 주입시키다”(iustitiam in fundere)의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범신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카톨릭의 칭의 개념이 더 마음에 들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義, 실제로 우리 죄인의 몸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실존이 실제로 하나님 눈앞에 의로워진다는 것.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의롭지 않는 죄인을 의롭다 선언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제점은 그들이 실제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기보다는 지금 실제로 의롭게 된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데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죄인을 λογιζεσθαι라고 할 때 여기에는 순전히 ‘신분으로 여기다, 무엇을 무엇으로 간주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즉 본질적으로 “의롭게 만들다”가 아니다. 만일 “의롭게 만들다”로 이해하는 경우 믿음은 우리 인간편의 행위로써 죄인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드는데 일조(一助)를 하게 된다. 또 어떤 이들은 믿음을 “새롭고 더 나은 생명의 원칙”으로서 이해하고 이 원칙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전치사 표현: ?ν?πιον과 παρ?라는 전치사로도 판단 또는 심판의 성격을 말할 때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롬 3:20; 갈 3:11), 칭의 사건이 하나님 앞에서(?ν?πιον) 일어난다고 할 때 심판의 내용이 ?ν?πιον과 παρ?를 통해 표현된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diovti ejx e[rgwn novmou ouj dikaiwqhvsetai pa'sa sa;rx ejnwvpion aujtou': dia;< ga;r novmou ejpivgnwsi" aJmartiva".)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 {Oti< de; ejn novmw/ oujdei;" dikaiou'tai para; tw'/ qew'/ dh'lon: o{ti oJ divkaio" ejk pivstew" zhvsetai:)
-καθ?στασθαι: 바울은 롬 5:19에서 καθ?στασθαι에 대해 말할 때 그와 같은 의미로 말했다: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로 (앉혀진다)정해진다). 바울은 골 1:22에서 “하나님 앞에 앉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뜻이다.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w{sper< ga;r dia; th'" parakoh'" tou' eJno;" ajnqrwvpou aJmartwloi; katestavqhsan oiJ polloiv, ou{tw" kai; dia; th'" uJpakoh'" tou' eJno;" divkaioi katastaqhvsontai oiJ polloiv.)
골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ejn tw'/ swvmati th'"< sarko;"< aujtou' dia; tou' qanavtou, parasth'sai uJma'" aJgivou" kai; ajmwvmou" kai; ajnegklhvtou" katenwvpion aujtou':)
‘의롭게 하다’라는 위의 표현들은 분명히 ‘의롭게 만든다’가 아니라, 법정적으로 그렇게 여기고 판단을 내리는 의미를 나타낸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의롭게 하다’를 ‘정죄하다’와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반대말이다.
칭의는 라틴어로는 justus + facere의 합성어인 justificare이며 독일어 Rechtfertigung 그리고 화란어 rechtvaardigking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을 ‘의롭게 만들다’이나 의미는 ‘의롭게 하다’이며 법적인 선언에 의한 객관적 관계, 의의 신분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경우, 그 의미는 다른 사람의 의를 그 사람에게 轉嫁함으로써, 즉 그가 내적으로는 의롭지 못하지만 그를 의롭다고 간주함으로써 행해질 수 있는 그런 칭의인 것이다(벌코프, 763).
2. 稱義의 본질과 성격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온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율법의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다고 죄인에 대해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위이다”(벌코프, 765). 즉 “칭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분성에 근거하여 신자들이 그들에게 관련된 율법의 모든 요구들을 성취하였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적인 행동이다”(에릭슨 하권, 13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칭의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이 죄인에게 언도를 내려 그의 신분이나 상태를 바꾸어 주는 법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재판 때 죄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면 그 죄인의 내면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분의 상태가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때 우리 속에 내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칭의 방법인 주입식(infusa)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에게 전가하는 방법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심을 간파한 것이다.
B. 칭의의 요소
루이스 벌코프는 칭의가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소극적 요소, 적극적 요소(766ff.)
1. 소극적 요소
벌코프에 의하면, 칭의의 소극적인 요소란 구세주의 수동적인 순종에 기초한 죄용서이다. 물론 이 죄용서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하며 모든 죄책(빚)과 모든 형벌이 제거함을 받는 것을 포함한다. 이런 칭의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한다(롬 5:21; 8:1, 32-34; 히 10:14; 시 103:12; 사 44:22).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개역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하지만 개혁파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칭의시 죄책을 제거하시지만 죄의 유죄성은 제거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칭의와 더불어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은 탕감받지만 아직 죄성은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이 죄성은 聖化때 해결되어 나가는 것이다. 단지 이 순간부터 자신의 죄를 의식하며, 죄를 고백하고, 사죄의 위로를 확신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충동을 받는다(767).
이 과정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의 학정을 벗어난 상태와 같은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바로의 폭정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것이다.
2. 적극적 요소
만일 국가가 죄수를 무죄로 선고하고 해방만 시키고 일터를 주지 않는다면, 다시 범죄하게 될 것이다. 칭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죄용서만 하실 뿐 아니라, 죄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이 누릴 기업을 주신다고 했다. 즉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칭의함을 받으면 적극적인 차원에서 기업을 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養子와 영생에 대한 권한이다.
슥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Wrysih; rmoale wyn:p;l] !ydim][oh;Ala, rm,aYOw" @['Y"w"
yTir]b'[>h, haer] wyl;ae rm,aYOw" wyl;[;me !yaiXoh' !ydig:B]h'
.t/xl;j}m' *t]ao vBel]h'w] *n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ajnoi'xai ojfqalmou;" aujtw'n, tou'< ejpistrevyai ajpo; skovtou" eij" fw'" kai; th'" ejxousiva" tou' Satana' ejpi; to;n qeovn, tou'< labei'n aujtou;" a[fesin aJmartiw'n kai; klh'ron ejn toi'" hJgiasmevnoi" pivstei th'/ eij" ejmev.)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Dikaiwqevnte" ou\n ejk pivstew", eijrhvnhn e[comen pro;" to;n qeo;n dia; tou'< kurivou< hJmw'n jIhsou' cristou',)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di j ou| kai; th;n prosagwgh;n ejschvkamen th'/ pivstei eij" th;n cavrin tauvthn ejn h|/ eJsthvkamen: kai; kaucwvmeqa ejp j ejlpivdi th'" dovxh" tou' qeou'.)
우리는 이 내용을 1) 입양과 2) 영생의 권리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을 받고 광야길을 떠날 때 가나안 복지라는 기업에 대한 약속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놀라운 권세를 지니게 된다(요 1:12; 롬 8:15-16; 갈 3:26-27; 4:5-6). 영생의 권리는 전자 속에 포함되어 있다(롬 8:17; 갈 3:14; 4:6; 롬 8:23).
C. 칭의가 일어나는 영역
1. 객관적 칭의
이것은 능동적인 칭의로도 불리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죄인을 재판하시고 언도를 내리시는 칭의이다. 이것은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이 하나님이 단독적으로 처리하신다. “이 선언은 하나님께서 공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죄인을 사면하는 선언이 아니라, 죄인의 경우를 참작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가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이다”
2. 주관적 칭의
이것은 수동적인 칭의로도 불리어진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칭의가 인간 자신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객관적인 칭의가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이 내게 적용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칭의가 우리 자신에게 이루어졌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론을 다룰 때 타락한 죄인들은 원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실존적인 불안과 공포 그리고 두려움을 지님과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여 영적으로 방황함을 언급했다. 그런데 칭의와 더불어 이런 불안과 공포 그리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참된 평안이 마음속에 임하는 것이다. 또 이전에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는데 이제는 밝히 그 길을 알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D. 칭의의 시기
벌코프는 칭의가 일어난 사건을 세 가지로 언급한다.
1. 영원전의 칭의
이것은 사실상 예정론과 연관해서 설명해야 가능할 것이다. 율법폐기론자들은 “죄인의 칭의가 영원 전에 혹은 그리스도의 부활시에 일어난다”고 주장한다(769). 벌코프는 이들은 죄인의 칭의를 영원한 선택의 작정 혹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을 때의 그리스도의 객관적 칭의와 혼동한다고 비판한다(ibid.) 나아가 벌코프는 “이들은 영원에서의 하나님의 목적과 시간 안에서의 수행, 혹은 구속의 복을 획득하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이를 적용하는 성령의 사역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769f.).
이들은 영원 전의 선택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 얻은 객관적 칭의를 현재 나의 칭의와 혼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벌코프에 의하면, “이들은 영원에서의 하나님의 목적과 시간 안에서의 수행, 혹은 구속의 복을 획득하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이를 적용하는 성령의 사역을 적절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769f.)
벌코프는 지적하기를 “이 입장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믿기 전에 이미 칭의되었으며, 신앙은 단순히 이러한 사실의 선언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더우기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은 그를 개인적으로 죄인을 만들었다. 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의롭게 만든다. 따라서 하나님은 신자들 속에서는 전혀 죄를 보지 못한다”(770)라고 한다(ST 517f.).
벌코프의 이런 묘사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칭의론의 모든 요소를 동원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주장은 지금 우리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믿음의 관계를 제거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매달리기 때문에,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붙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자기의 구원은 지정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운명론적으로 빠져서 윤리 이원론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즉 나는 이미 구원을 확보했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주장은 결국 사변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바른 칭의론은 만세 전에 있었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실현되었고 그것이 성령을 통해 마침내 내게 적용되었기 때문에 지금 받은 이 은혜를 감사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영원전의 칭의 교리의 근거와 그것에 대한 반론들에 대해서는 벌코프의 설명을 참조할 것(조직신학 하권 770-771)
2. 그리스도의 부활시의 칭의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며 모든 율법을 다 이루고 속죄 언약을 다 성취한 다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또는 옳다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tou' oJrisqevnto" uiJou' qeou' ejn dunavmei, kata; pneu'ma aJgiwsuvnh", ejx ajnastavsew" nekrw'n, jIhsou' cristou' tou'< kurivou< hJmw'n,).
그러나 이것은 죄용서와 더불어 죄책이 제거된다는 개인의 칭의와는 다른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를 위한 것이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o}" paredovqh dia; ta;< paraptwvmata< hJmw'n, kai; hjgevrqh dia; th;n dikaivwsin< hJmw'n.)
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에 우리 자리에서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전가받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지적한다.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wJ" o{ti qeo;" h\n ejn cristw'/ kovsmon katallavsswn eJautw'/, mh; logizovmeno" aujtoi'" ta; paraptwvmata< aujtw'n, kai; qevmeno" ejn hJmi'n to;n lovgon th'" katallagh'".)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to;n< ga;r mh;< gnovnta aJmartivan uJpe;r hJmw'n aJmartivan ejpoivhsen, i{na hJmei'" ginwvmeqa dikaiosuvnh qeou' ejn aujtw'/.)
3. 믿음에 의한 칭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義에 근거하여 성령의 적용으로 지금 우리에 이루어지는 칭의를 말한다.
1) 믿음과 칭의의 관계
성경에는 칭의와 연관하여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① dia; th'" pivstew" ② ejk pivstew" ③ pivstei
① dia; th'" pivstew"
이 경우 “믿음을 통하여”라고 번역되며 믿음은 칭의함을 얻는데 도구적인 의미를 지닌다.
② ejk pivstew"
이 경우 “신앙으로부터”라고 번역되며, 신앙은 우리의 개인적인 칭의에 우선하며, 칭의는 신앙에서 발원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③ pivstei 여기도 도구적인 의미가 강조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믿음 또는 신앙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轉嫁된 그리스도의 義가 우리의 칭의의 근거가 되며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획득하는데 수용적이기 때문에, 신앙은 우리의 공로로 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비유로 표현한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773).
그러면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이 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는가? 야고보에 의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 반면에(약 2:14-26) 바울은 행위를 전적으로 배제시키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두 사람의 대적들을 고려하면 문제가 풀릴 것이다.
야고보는 행위나 율법을 무시하는 율법 폐기론자들에 대항하여 믿음은 행위를 동반함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에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인간의 공로가 칭의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함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 서신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야고보와 바울의 말을 다음과 같은 도식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야고보는 우리가 구원을 얻은 다음 곧 성령의 인도를 받는 “주 안의 상태”에서 믿는 자들이 성령으로 인한 행함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고(B),
바울의 경우 죄와 사망의 법이 지배하는 “육의 상태”에서 구원을 얻어 “주 안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과도기 상태(A)인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또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믿음은 죄인을 칭의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인 동시에 죄인이 사용해야할 도구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은 죄인에게 믿음을 일으키시고 용서의 선언을 죄인에게 전달하시는 것이다. “롬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ejpeivper ei|" oJ qeo;" o}" dikaiwvsei peritomh;n ejk pivstew", kai; ajkrobustivan dia; th'" pivstew".)”
다른 한편 믿음은 인간의 수단이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eijdovte" o{ti ouj< dikaiou'tai a[nqrwpo" ejx e[rgwn novmou, eja;n< mh; dia; pivstew" jIhsou' cristou', kai; hJmei'" eij" cristo;n jIhsou'n ejpisteuvsamen, i{na dikaiwqw'men ejk pivstew" Cristou', kai; oujk ejx e[rgwn novmou: diovti ouj< dikaiwqhvsetai ejx e[rgwn novmou pa'sa savrx.)”
만일 믿음이 칭의를 받는 인간의 수단이라면 믿음은 영적인 획득 기관인 것이다. 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義를 획득하며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의식적 연합을 확립한다는 것이다. 벌코프에 의하면 1)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포착해서 획득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의 칭의의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칭의에 논리적으로 선행된다. 2) 믿음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우리의 칭의를 이해하게 하여 주관적 칭의를 획득하게 하는 기관이다. 이런 의미에서 칭의는 믿음보다 앞선다(774).
E. 칭의가 이루어지는 과정
1) 칭의하시는 하나님: 재판자의 성격은 “~의 정당함을 인정하다”(rechtfertigen)는 표현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의 히필형인 ?????인데 그 의미는 “의롭다 선언하다”이다(출 23:7; 신 25:1; 삼하 15:4). 칭의에 있어서 칭의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재판자의 행위이다. 이런 재판자의 행위는 하나님의 왕적인 권한에 속한다.
하나님께서 재판하는 행위의 다른 표현은 λογ?ζεσθαι ε?? δικαιοσ?νην이 있는데 창 15:6(LⅩⅩ)에서 처음 발견된다. λογ?ζεσθα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다. 그 의미는 “누구에게 무엇(그리스도의 義)을 돌리다, 무엇을 계산에 넣다, 전가(轉嫁)하다” 등이다. 이 경우 죄인이 실제로 이렇게 여김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는지 또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그것에는 상관없이 의롭다 선언한다는 것이다.
λογ?ζεσθαι와 같은 표현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움켜잡는 믿음이 인간을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의롭게 만들다 또는 의를 주입시키다”(iustitiam in fundere)의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범신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카톨릭의 칭의 개념이 더 매혹적일 것이다(즉 예수 그리스도의 義, 실제로 우리 죄인의 몸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실존이 실제로 하나님 눈앞에 의로워진다는 것).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의롭지 않는 죄인을 의롭다 선언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제점은 그들이 실제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기보다는 지금 실제로 의롭게 된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데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죄인을 λογιζεσθαι라고 할 때 여기에는 순전히 ‘신분으로 여기다, 무엇을 무엇으로 간주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즉 본질적으로 “의롭게 만들다”가 아니다. 만일 “의롭게 만들다”로 이해하는 경우 믿음은 우리 인간편의 행위로써 죄인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드는데 일조(一助)를 하게 된다. 또 어떤 이들은 믿음을 “새롭고 더 나은 생명의 원칙”으로서 이해하고 이 원칙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마지막으로 ?ν?πιον과 παρ?라는 전치사로도 판단 또는 심판의 성격을 말할 때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롬 3:20; 갈 3:11), 칭의 사건이 하나님 앞에서(?ν?πιον) 일어난다고 할 때 심판의 내용이 ?ν?πιον과 παρ?를 통해 표현된다. 바울은 롬 5:19에서 καθ?στασθαι에 대해 말할 때 그와 같은 의미로 말했다: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로 (앉혀진다)정해진다). 바울은 골 1:22에서 “하나님 앞에 앉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뜻이다.
2) 믿음: 칭의 사건 속에서 믿음 곧 의롭다고 판결을 받은 믿음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믿음 그 자체는 어떤 공적이나 주관적인 선행 그 자체의 성격을 띄지 않는다.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선언하신다는 말과 이 법정에서는 자기 자신의 義가 설자리가 없는 것으로 선언된다는 사실은 믿음 그 자체는 어떤 인간의 공로가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다(롬 4:5; 빌 3:9). 믿음이란 단지 하나님 자신이 역사 하여 일으키신 conditio sine qua non(필수조건)인데 성령께서 펴신 손이다. 따라서 믿음이 도구적 간접 목적격으로 사용된 것이다(한 걸음 더 나아가 τ?στει; ?π?, δι?, κατ? 롬 3:28; 빌 3:9 롬 3:22, 25; 히 11:7). 그런데 물론 믿음은 그 내용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바로 이 믿음의 내용에 달려있다: 이 믿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보증으로서 우리 대신에 이루어 놓으신 그 모든 것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가 선언된다면 거기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보증되어야 한다: 롬 3:38; 4:5에 보면 믿음은 반드시 그 내용을 지니는데 그리스도를 그 속에 내포한다.
‘믿음에서 말미암은 의’? ?κ π?στεω? δικαιοσ?νη(롬 9:30; 10:3) 그리고 ‘믿음의 의’δικαιοσ?νη τ?? π?στεω?(롬 4:11, 13)과 같은 표현도 의를 야기시키는 믿음을 하나의 공로로 나타내지 않는다. π?στι?는 이런 경우 믿음이 장악한 믿음의 내용에 대한 환유적 표현이다. 우리는 이미 히 11:1에서 믿음은 내용 없는 환상이나 의견이 아니라 바라던 것이 우리 속에 살아 있고 그 요소를 지니는 그런 자세임을 보았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사로잡음을 통해서이다.
3) 그리스도의 공로: 위에서 말한 내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끄집어 낼 수 있다: 하나님이 칭의 사건에서 언도를 내리실 때 그리스도는 유일하고 객관적이며 충분한 근거 곧 의롭다고 심판하시는 근거이시다. 그는 자기의 모든 사역을 통해 義를 조달하여 이를 통해 하나님이 밝은 빛 안에서 의롭다 말하게 하고 또 의롭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로서는 사실상 실행 불가능한 것을 곧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선언하시는 것이다(롬 3:25-26)
말하자면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다. 이 구속사역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dikaiouvmenoi dwrea;n th'/< aujtou'< cavriti, dia; th'" ajpolutrwvsew" th'" ejn cristw'/ jIhsou',)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o}n proevqeto oJ qeo;" iJlasthvrion dia; th'" pivstew" ejn tw'/< aujtou'< ai{mati, eij" e[ndeixin th'"< dikaiosuvnh"< aujtou', dia; th;n pavresin tw'n progegonovtwn aJmarthmavtwn)
여기 ‘구속’이라는 말은 “죄인을 다시 사서 그에게 속전의 지불을 통하여 자연을 주는 과정”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고귀한 피를 값으로 지불하여 우리를 사셨다는 말이다. 베드로서는 이 사실을 잘 말한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eijdovte" o{ti ouj fqartoi'", ajrgurivw/ h] crusivw/, ejlutrwvqhte ejk th'"< mataiva"< uJmw'n ajnastrofh'" patroparadovtou,)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ajlla; timivw/ ai{mati wJ" ajmnou' ajmwvmou kai; ajspivlou cristou':)”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이 공로를 통해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증오와 진노를 멈추게 하고 사랑하게 만든 것이다.
F. 잘못된 칭의론
기독교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다양한 이단들이 등장한 것을 본다. 우리는 신론 측면에서 이단을 보는가 하면, 인간론과 기독론 이단을 보기도 한다. 나아가 지금 우리가 다룰려고 하는 칭의론 이단도 다양하게 등장했다. 그러면 왜 이런 이단들이 생겨났을까? 한 마디로 그것은 자연인의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연인이란 무엇이며 그들이 지닌 사고방식이란 어떤 것일까? 자연인이란 정치적이고 법적인 차원에서는 건전한 사회시민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에서 자연인이란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아담의 몸에서 난 그대로 중생하지 않는 인간을 뜻한다. 이 자연인은 죄와 허물로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못한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며 싸우고 분쟁하며 나름대로의 문화를 이룩하다가 멸망을 당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자연인의 사고방식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먼저 철학사가 이런 사고방식의 종류를 가르치고 있음을 본다. 철학사는 인류 역사에 등장한 모든 사고방식을 크게 3가지로 요약한다: 범신론, 유물론, 이원론적 사고방식. 이 지구 어디를 가나 이런 사고방식을 지니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범지구적이다.
그러면 성령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성경은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용어는 17세기 이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요개혁자들도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사고방식이 있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세 가지 사고방식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고 또 이런 사고방식이 어떻게 생겨났음도 보여준다. 성경은 인간이 처음 범죄하고 타락할 때 이런 사고방식의 오류에 빠졌음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가 평소에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는 선악과 배우에 계시는(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인식하고 인정하며 고백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인간으로 보존하시기 위해 이런 계명을 세우셨음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 것이다.
또 이들은 이 과일 속에 어떤 신적인 기운이 들어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들은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 미혹한 것이다. 그 내용이 창세기 3장에 나온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뱀의 말은 들은 하와가 과실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제 그녀의 눈은 과일에 집중했고 하나님은 안중에 없었다. 즉 감각 세계 저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로써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재물이 그들의 우상이 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 없다. 그 만큼 유물론적으로 타락했다는 말이다.
그 다음 그녀는 자연인 과실 속에 신적인 능력이 들어 있어서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 신적인 능력을 자기 속에 넣으려한다. 성도들이 목사를 볼 때 그 몸속에 신적인 능력이 들어 있어서 그로부터 초자연적인 능력을 기대하거나 그를 해치면 벌을 그 속에 있는 신적인 능력이 자기를 해친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것이다. 우리가 무당을 볼 때 어떻게 보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자. 그 만큼 한국교회가 샤머니즘화 내지 범신론화 된 것이다.
그 다음 하와는 이런 과실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어서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하와가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유물론적인, 범신론적인 또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왜 그렇게 문제가 될까? 이 세가지 사고방식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또아리를 튼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은 바울의 용어에 의하면 육이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사고방식이다. 인류의 모든 불행은 사실상 바로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기인한다. 자연인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매우 놀라운 것은 이 세가지 사고방식이 복음을 왜곡시킨다는 사실이다. 잘못된 칭의론은 모두 이 세 가지 사고방식에 근거하는 것이다.
1. 범신론직인 칭의론
a. 로마 카톨릭
이신칭의론은 개신교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운동의 자극을 받은 로마 카톨릭교회도 이런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문제는 칭의 방법이 다른 것이다. 개신교회의 칭의론이 관계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경우 범신론적인 방법에 의한 것이다.
“의롭게 되는 그 행위에서 죄가 제거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개인은 그와 연결되며 믿음의 주입된 은사들과 소망 그리고 자비를 받는다” 우리는 여기서 주입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칭의란 죄의 제거일 뿐만 아니라 은혜와 은사들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임을 통하여 또한 인간 내부의 성화와 회복이다” 이로 볼 때 로마 카톨릭은 칭의를 성화와 혼동하고 있다.
즉 아담이 타락할 때도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은 순수한 자연본성에 원의 또는 부가적인 은혜가 내 속으로 들어 옮과 동시에 칭의가 되고 성화가 된다는 말이다. 이 은혜의 주입은 세례때 일어난다고 한다.
b. 앙드레 오신안더
종교개혁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오시안더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진 신학자이다. 그는 원의는 아담이 이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의”이며 이것은 “은사로서 그리고 주관적으로 내재된 그 무엇으로서 모든 선한 행위의 전제조건이 되는 의”라고 정의한다. 이 원의가 타락한 인간 속에 다시 회복되려면 ‘본질적인 의’가 인간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시안더 경우에도 범신론적인 주입의 원리가 사용됨을 본다. 이 본질적인 의가 필요한 것은 아담이 타락할 때 죄가 존재론적으로 인간 속으로 들어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했다. 말하자면 죄란 인간 속에 들어 있는 물질과 같은 그 무엇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 죄를 제거하는 과정이 칭의사건이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오시안더의 경우 칭의란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통로를 통해 신적인 본질 곧 그리스도의 신성이 우리 속으로 흘러 들어가 죄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교
이런 경향은 통일교 원리에도 뚜렷이 보인다. 통일교의 경우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것은 뱀과 성관계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 성관계를 통해 루시퍼의 내적인 요소가 하와의 몸속으로 들어 왔다고 본다. 이것이 원죄인데 이 원죄는 피를 통해 후손으로 전달된다고 본다. 말하자면 통일교의 경우에도 죄는 존재론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이들은 죄를 하나님과 관계하여 설명하지 않고 우리 몸속으로 들어와 있는 더러운 그 어떤 물질적인 요소로 본 것이다.
통일교의 구원은 이 죄를 어떻게 제거하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 있다. 구두절미하고 통일교는 문선명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탕감설을 통해 죄문제가 해결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은 구원했지만 육체는 구원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침내 재림 예수인 문선명이 등장하고 그와 피가름을 통해 인간의 몸속에 있는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오시안더의 구원의 구조와 일치한다. 문선명의 피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해당하고 성관계의 기구는 인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범신론적인 한국의 모든 이단들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2. 이원론적인 칭의론
a. 알브레히트 리츨
리츨에 의하면 칭의와 화해는 교회와 관계한다. 칭의와 화해가 개별 인간과도 관계하나 단지 이 개인이 교회의 일원인 한해서이다. 즉 교회에 소속만 되면 죄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죄를 매우 경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인 것이다. 리츨에 의하면, 죄는 맹목과 무지로부터 나온 그 무엇이며 율법이 오직 속죄제물을 통해서만 죄사함을 보증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리츨은 속죄제물은 불필요하고 단지 후회만 하면 죄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165).
G. 칭의론 총정리
구원의 경륜에 의하면 이 義의 장본인은 하나님이시다(빌 3:9; 롬 10:3). iustitia coelestis(하늘의 義)는 일종의 義 곧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고난(그의 순종, obedientia)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또 하나님이 재판하실때 참고 규정으로 사용하는 그런 義이다. 따라서 복음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든 선행은 하나님의 義이다: 복음에는 하나님 앞에 옳은 것 곧 하나님의 계명 또는 권한(fas, ius divinum)이 나타나 있다(롬 1:17; 3:21; 10:3). Δικαιοσ?νη θεο?는 Winer의 문법에 따르면(§30), 하나님의 義(Gottesgerechtigkeit)로 번역될 수 있다(막 11:22). 즉 하나님이 원하시고 또 하나님께 어울리는 그런 義이다(R?merart에 따르면 하나님의 지혜와 대립되는 인간의 지혜). 하나님은 자기의 지혜에 따라 인간을 다루신다.
이 義는 은혜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이 義가 은혜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에게 선사된 의이기 때문이다.
4) 칭의의 요소 중에 중요한 것은 Sola fide이다. 즉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긴다는 것이다. 루터는 롬 3:28에서 나오는 이 “오직”이라는 말을 끼워 넣어 번역했다. 그러나 그는 본문을 무리하게 번역하지는 않았다. 문맥에 의하면 타당한 것이다. 그리스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갈 2:16은 Sola fide를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이 구절에 보면 다른 모든 것은 배제되고 오직 그리스도 안의 믿음만이 의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개혁파 공회가 번역한 성경은 어느 하나도 Sola fide로 번역하지 않았지만 개혁파 교회의 고백서들은 이 sola fide를 받아들였다(2. Helv. Conf. 15; Conf. Belg. 22; Gall, 20; Angl. 11; Heidelb. Conf. 60 그리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 Ⅲ, 11, 19). 이런 고백서들은 하나님의 영이 일으킨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인간 편에서 선행의 공적(bonum meritorium)을 배제시킨다. 우리 속에서 나온 그 어떤 것도 칭의 사건 때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빌 3:9). 우리는 단지 그릇에 불과하다. 즉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총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취하시는 그릇인데 밖에서 온 요소 곧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내용 곧 그리스도 때문에 취하시는 그릇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될 것은 믿음을 인간의 행위로서 계산해 넣는 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다(빌 1:29; 엡 2:8).
만일 믿음을 인간의 공로의 어떤 요소로 간주하는 경우 (롬 4:4; 11:6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의 칭의 계산에 개입하는 것이 된다.
멜란히톤이 그의 저서 “loci commune”(1521)에서 예리하게 주목한 대로 인간이 구원을 위해서 행한 어떤 공로행위도 있을 수 없다(opus non meritorium).
만일 그렇다면 로마서 11:35의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라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만일 믿음이 어떤 공로가 된다면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란 벌려진 영혼의 입 또는 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입이나 손을 벌리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믿음은 필수조건(conditio sine qua non)이지 칭의의 목적이나 근거로 보아서는 안된다. 소시안 주의자들과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믿음을 칭의의 목적과 근거로 잘못 이해했다. 대부분의 근세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이런 오류를 범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칭의 사건에서 죄인, 곧 율법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로 알게 된 죄인을 받아들이신다. 하나님은 이 죄인을 불경건한 자로 간주하신다(롬 4:5).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이 죄인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너는 의롭다.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는 판결을 받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 마음 속에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죄 가운데 그리고 큰 비참한 가운데 있으나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는 증거를 받는 것이다(갈 4:5-7).
칭의 사건은 하늘에서 그리고 동시에 땅에서 일어난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서시고 하나님은 그의 변호를 들으시고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사실 이 칭의는 이미 원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일어났다(롬 4:25). 그런데 한 특별한 순간에 하늘에서 이 칭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사건은 욥 33:23-24이 암시하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이 칭의에 대한 증거를 느끼며 하늘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지금 확신하고 느끼는 것이다(롬 5:1).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원수 되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를 누린다. 물론 이 사건은 지극히 드문 경우에 다음과 같이, 즉 해당하는 사람이 하늘과 직접적인 교통하는 중에 일어난다. 대부분의 경우 성령께서 우리 속에 역사 하시되 우리가 성경 속에서 구원 문제를 탐구하는 도중에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 일어나는 죄용서에 대한 확신을 일으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증거 곧 하나님의 공의는 충분히 이루어져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화해했음에 대한 증거를 일으키신다. 성령은 우리에게 길 곧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암시한다(롬 5:1이하; 히 4:14-16; 6:18-20). 이 칭의 사건 때 인간 편에서는 변한 것은 없다. 인간은 전에 있던 그대로이나 하나님께 의롭게 보이게 되었다. 인간은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받으심이 되었는데 이전에 인간이 아담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것과 같은 원리로 의롭게 되었다(롬 5:6,8,10; 민 23:21). 민 23:21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서 아무런 불의도 보시지 않으시고 아무런 사악함도 보시지 않는다. 사망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 κατ?κριμα 대신에 여기서는 δικα?ωσι? φω??가 등장한다. 즉 생명에로 인도하는 칭의 선언이 등장하는 것이다(롬 5:15이하).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형상의 상태 속에 있는 것이 다시 얻어진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죄인에 대한 칭의 선언은 사실상 하나님이 처음 피조물에게 선언하신 언도(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와 같은 언도를 우리 위에 내리시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 형상 안”에 창조된 인간이 다시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믿는 자는 이 형상의 상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지금 보실 때 그리스도와 관계하심 가운데서 보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전에 인간을 보실 때 아담과 관계하여 보시는 것과 같다(롬 5:15-21).
의롭다고 선언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처럼 만들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προ?ρισι?(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이다(롬 8:29).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 속에 어떻게 각인 되는 가로부터 우리는 구원의 서정 가운데 셋째 부분인 “영화론”에 대해 배운다(롬 8:30). 칭의 사건 때 인간 위에 하나의 선언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이 죄인을 처리하시되 죄와 사망의 영역으로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 불의한 자가 의롭다 선언되고 불경건한 자가 하늘나라 시민으로 선언된 것이다. 이 사건까지 모든 것은 인간 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협상과 선언일 뿐이다. 인간은 이런 선언과 협상의 의미를 마음속에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 개별인 속에 일어나는 어떤 역사는 보지 못한다.
그 다음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이런 언도는 어떤 무엇을 불러일으키는가? 또는 믿음은 최후심판 때까지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나의 손 곧 생명의 재산, 그리스도의 공로를 움켜잡은 체 머무르는가?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만들고 전인격을 거룩하게 만들어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만들지 않는가?(골 1:22) 요컨대 은혜를 쥐고 있는 믿음은 우리를 성화 시키는가? 이제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아우구스타나 고백서 18:27을 기억한다. 이 고백서는 이 문제에 대해 바르게 말했다: Tantum fide apprehenditur remissio peccatorum ac gratia (믿음은 항상 죄용서와 은혜를 손에 잡는다). Et quia per fidem accipitur Spiritus sanctus iam corda renorantur et induunt novos affectus, ut parere opera bona passint.
칭의론은 바울만 말하지 않는다.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 이신칭의론을(갈 2:14-21)고백하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인다.
(갈 2:14-21)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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