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곧 스토리 텔링


그래함 존스톤

 

설교를 할 때 우리가 부딪는 가장 겁나는 것들 중 한 가지는

우리가 듣고 자란 설교 스타일을 본뜬다는 것.

이 스타일은 대다수의 현대 청중에겐 고루한 것이 돼 있다.

여기 시험거리가 있다.

당신의 설교중 하나를 아무한테나 3분만 들어보게 한 뒤 멈춰라.

그가 더 듣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충분히 질렸다고 하는가?

설교를 위한 '죽음의 키스'가 뭔지 아는가?

설교초기에 청중이 말하는 그것이 곧 그들의 마음 향방을 말해준다.

이미 겪어온 것들이다.

21세기 설교는 "죽었다"고 하는 말들을 듣곤 희한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텔레비전과 영화로 길러진 세대들 가운데 산다.

그들은 요사이 설교를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단지 지루한 설교일 뿐이다.

평시의 주일 메시지가 갖지 못한 것을 영화가 가졌다면 그게 뭔가? 스토리다.

삽화로서의 얘기가 아니라 스토리다.

긴장 개발

내가 틴에이저일 때 영화 ''조스''는

관객들을 시네마로 끌어 들이는 동시에 해변으로부터 발길이 뜸해졌다.

'조스'는 사람들의 맘을 한구석으로 오므러들게 만들었고 때때로 좌석에서 펄쩍 뛰게 만들었다.

그러나 음악이 시작되기 전 한 해설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미쳐 날뛰면서 한 해변 마을 '애미티'를 공포에 빠뜨리는 거대한 상어 한 마리를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산 채로 잡아 먹히는 광경을 보십니다. 하지만 염려 마세요.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세리프 브러디가 그 놈의 나쁜 상어를 폭발시켜 버릴 겁니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뒤로 젖히고 앉아서 영화를 즐기세요."

그런 해설을 곁들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열쇠 하나는 긴장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스토리가 진행돼가면서 풀려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긴장 부재는 곧 지루함을 뜻한다.

아리조나 주립대의 로버트 시알디니 교수(심리학)는

"미스터리가 강력한 이유는 비밀의 필요성을 낳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어떤 종류의 설교는 정보 내지 사실 전달에 주안점을 둔다.

그래서 서두의 몇 문장으로 전체 메시지를 요약한다.

그런 어프로치는 명확성을 더해준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은 이미 손끝을 드러냈기에

청중은 향후 올 것을 알고 있고 긴장은 사라진 상태다.

그 결과 청중의 관심도는 그만큼 느슨해진다.

사람들은 사실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직시하자.

큰 물음에 답하라

상어가 죽은 뒤 세상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다.

스토리를 몰고 가는 큰 물음에 영화가 답변하고 나면

스토리라인이 끝났음을 우리는 안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스토리의 '최대 질문'이다.

스토리의 다른 주요 구성요소는 스토리가 하나의 질문,

위기, 딜레머에 의해 시작하지 대답으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최대질문은 스토리를 결론으로 몰아간다.

이것이 설교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모든 성구는 서신이든 해설이든 스토리를 갖는다.

최근 한 젊은 목회자가 다윗의 밧세바 간음,

우리야 살인 사건과 회개에 관한 시 51편을 다루는 것을 도운 일이 있다.

이 본문의 최대질문은 뭔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의 잘못을 깨달음, 그 고백, 영적인 회복의 단계를 밟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과 문맥에서 떠오르는 물음은 '조스'의 줄거리에서 뜨는

"이 상어를 어떻게 막아야 하나?"란 질문과 본질적으로 같은 성질이다.

스토리 말하기

설교자들은 저널리스트의 기록 한 쪽을 빌릴 수 있다.

저널리스트는 일어난 일을 갖고 사실을 쓴다.

그러나 보도할 때는 스토리를 찾아 사실을 검증한다.

나이 22세의 한 젊은 여성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사건은 사실을 대표한다.

그런데 서부 케냐에서 에이즈 고아들을 돕는 사역을 하려고

공동체 건강학 학위 과정을 밟는 중이었다는 사실은 스토리를 만든다.

모든 성구는 개념과 내용을 포함한다.

이 개념과 내용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시의적절한 스토리이다.

불안정 조성

이것이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중요한 까닭은 사람들이 듣는 방법 때문이다.

설교자가 저지르는 흔한 실수 하나는 실제에서 벗어난 지적인 딜레머를 낳는 것이다.

중세의 고전적인 질문 하나는 핀의 머리에서 천사 몇명이 춤을 출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 전형적인 답변은 "알 게 뭐냐?"는 것.

때때로 우리는 이슈 하나를 갖고 메시지 프레임을 짠다.

다윗은 어떻게 불레셋 군대를 물리쳤나? 하나님의 불변성을 어떻게 이해하나?… 등등.

그런 이슈들은 기껏 대중의 하품만 자아낸다.

최대쟁점은 청중의 삶과 그 주변 세계에 연계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흥미의 초점을 잃는다.

단지 앎을 위한 지식은 약간의 호기심만 당긴다.

그러나 설교와 삶 속의 적용 사이에 분명한 관계가 엿뵈면

사람들은 몰려들어 적극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람들은 삶의 난제를 극명히 해결해 보려는 설교자의 의도를 고마워 한다.

난제를 무시하기보다 다뤄줄 때 더 안도감을 느끼며

하나님 말씀이 세상과 삶 속의 진짜 위기를 극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갭 조성

히스 형제는 <붙어 있게 태어나다>란 책에서 로웬스틴은

지식의 갭을 느낄 때 호기심이 생긴다는 조지 로웬스틴의 갭 이론을 논했다.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해주기 전, 그런 사실들이 필요함을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

갭 조성에 있어 설교자는 컴퓨터 프로그램과도 같다.

그는 청중의 마음에 메시지가 머물 폴더를 마련해 준다.

어떤 상황이나 갈등을 제시할 때 이 공간이 생겨 청중은 설교자가 말하려는 것을 듣기 원하게 된다.

그런 여유 없이 사실부터 내던지면 말보다 마차를 앞세우는 격이다.

과거엔 사실이 왜 중요한지,

그 정보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메시지 끝으로 다가가면서 해설해 나가곤 했다.

사람들은 성경과 설교를 집으로 가져갈 만한 가치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설교자가 갭을 조성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청중의 흥미를 잃기 쉽다.

어떤 설교자는 메시지에다 현실세계를 너무 많이 퍼넣지 말아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강단에서 쏟아지는 상투적이고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상용어구,

진짜 이슈를 외면한 드리블과 끝없는 말의 잔치에 식상한다.

성경은 실세계에 대한 실질적 답변을 제공하는가?

사람들이 이 질문을 던진다면 그리고 성경이 확실히 답해준다면 왜 우리는 과감히 여로를 헤쳐가지 못하나?

우리의 예배는 세상의 거친 현실로부터의 도피인가, 하나님 말씀으로 현실에 도전하는 터전인가?

메시지를 펼쳐나가라

주요 쟁점을 결정하고 긴장을 투입하고 불안정 요소를 조성한 뒤엔 메시지를 펼쳐나가라.

처음부터 결론을 귀띔하는 연역법으로부터 점차 밝혀 나가는 귀납법으로 옮겨가라는 뜻이다.

20세기 강단은 거개가 연역적이었다.

그런 방식이 21세기에 왜 이젠 더 먹혀들지 않을까? 50년전에 청중이 설교에 응한 이유는

성경을 다룬다는 것 자체로 충분하고 설교자는 목회자로서의 영적 권위로 나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엔 권위가 위기를 맞았다.

현대인들은 설교자나 성경이 말한다고 해서 곧 진리라고 믿어주지를 않는다.

연역적

모델의 강점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삶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식의 명확한 선언성.

문제는 일반인이 이것을 믿지 않으면 어쩌냐는 것.

목회자가 하나님에 관한 진술로써 메시지를 시작하면

청중 다수는 맘속으로 '노'라고 답하면서 즉각 흥미를 잃을 가능성이 많다.

처음부터 판단을 내려 버리면 청중은 설교자를 건방지거나 그 메시지를 시간낭비로 여긴다.

반면 최종적 판단을 늦추면 문제해소를 향한 긴장을 놓지 않게 된다.

귀납법은

청중으로 하여금 속단을 삼가고 설교자의 말을 통과시키게 하는 간접적 형태다.

귀납법은 반응도가 낮은 구도자들이나 회의주의 신자들에게 가장 효과적이다.

귀납법은 청중에게 생각하고 믿어야 할 것을 말해주지 않고

설교자와 함께 주제를 탐구하도록 "함께 풀어봅시다"라고 초청한다.

귀납법은 하나님의 말씀의 견실성이나 민감한 현대청중의 감성을 타협거리로 삼지 않는다.

설교자는 청중을 불러 함께 주쟁점을 풀어가고 메시지를 전개해 나가도록,

그래서 청중자신이 결정하도록 초청할 필요가 있다.

스토리는 사람들에게 사실진술을 통한 정보제공이 아닌 공동여행을 통한 정보발견으로 이끈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알찬 줄거리

메시지의 중간 몸통 또는 얼개를 보통 플롯이라 부른다.

스토리텔러는 다이내믹한 긴장을 위해 내용물과 진행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내용은 정보와 생생한 묘사의 활용이다.

내용상 충분한 정보가 없으면 청중은 스토리를 믿지 않거나 흥미를 잃는다.

설교에서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좋은 알맹이를 요구한다.

스토리와 본문 묘사 사이의 관계를 보여줘야 설교자가 꾸민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의식 있는 청중은 내용과 질서를 요구한다.

메시지의 몸통은 성구 묘사로 진전시킨다.

진행

진행은 흐름과 움직임이다. 묘사에 치우치면 진행이 막혀 흥미를 잃는다.

사람들은 내용물을 요구하지만 페이스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연못과 시냇물을 차이는 움직임이다.

연못은 정지해있고 시내는 흐른다.

좋은 설교는 시냇물을 낳고, 둔한 메시지는 연못이 된다.

설교자가 책상에서 수집한 정보가 많고 한껏 호기심을 자극해도

정작 던져주는 게 없으면 스토리가 납작해지고 만다.

그래서 청중에게 일으킨 긴장이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려면

페이스를 가지치기 내지 모니터링해야 한다.

좋은 끝맺음

모든 스토리는 시작과 중간, 끝이 있다.

모든 설교가 이것을 갖췄다곤 하지만 비행기의 착륙은

산뜻한 정상 착륙과 비상 착륙 또는 추락이 있다.

무엇이 좋은 끝맺음인가? 메시지는 주요 쟁점을 적절히 다뤄야 한다.

좋은 끝맺음을 위해선 법정 판례를 참조하라.

판사가 판건을 마무리할 때면 변호사의 추가 증거를 채택하지 않는다.

증거는 심리 때만 필요할 뿐이다. 결론은 모든 실타래를 한데 꿰어 하나의 진술로 간추려야 한다.

청중은 설교자가 어떤 목적지에 당도할 건지 예측하다가

정작 결말이 핵심 질문과 일치하지 않을 때 혼동과 당혹을 겪게 된다.

''조스'' 얘기로 되돌아가 보자.

'조스' 스토리는 위협의 출현으로 시작돼 애미티 사람들이 위협을 다루기까진 끝나지 않는다.

서두에서 사람들이 이 상어를 죽이거나 죽이려고 시도할 것이란 도전이 명백했다.

스토리가 어떻게 끝날 것이란 점이 명백해지기 전에

스토리를 시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작과 끝은 연결고리를 이룬다.

끝이 분명해야 사람들은 비로소 스트레스와 긴장에 대한 해소감 내지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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