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가 강단에서 하지 말아야 할 12가지

 


글 / 최지호 예배예술선교사 


설교는 시대에 따라서, 문화와 그 배경에 따라서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그러나 설교는 항상 예배모임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면서, 교회 전체 분위기에 영향을 주고 있다.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 가운데에 설교는 언제나 수위를 차지하고 있고, 사실상 담임목사가 가장 공을 많이 들이는 사역 1순위다.

 

설교는 그 안에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로 진리와 인격을 가진다. 가장 참된 진리, 하나님의 뜻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진술이라고 할지라도, 만일 형제의 인격을 통한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전달된다면, 그것은 진리의 선포가 아니다.

 

설교의 정의 중에 역사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필립스 브룩스(1835-1893)은 설교를 ‘인격을 통한 진리 전달’이라고 정의했다. 인격을 통한 진리 전달은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교리적 형태로 진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한 복음에 관한 가장 참된 진술은 교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격적인 삶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교회들 뿐 아니라 수많은 매체를 통해 설교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여전히 목마름을 가진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이들이 갈급함 속에 찾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어쩌면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전달에 설교자들이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강단에서 금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 너무 쉽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 설교자가 강단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청중의 입장에서 다음의 내용을 제안해 본다.

 

첫 번째, 본문과 상관없는 설교 제목과 내용

 

한국교회에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던 제목 설교는 성경의 어떤 특정한 본문과 분석적인 관련이 없는 주제나 개념에서 출발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오늘날 기본적으로 강해설교라 붙여진 많은 설교 속에서도 여전히 본문과 상관없는 제목과 내용의 설교가 빈번해 보인다. 여전히 결론을 내려놓고 끼워 맞추기 식의 성경 연구 정도에 머무는 설교자들의 취약한 노력이 큰 몫을 하고 있는 샘이다.

 

두 번째, 백과사전식 상식 제공

 

설교는 하나님의 현존을 매개하는 것이다. 혹자는 설교자가 “하나님”이라 말했을 때 회중들이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가리운다면 스스로 설교를 그만 둬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수많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기보다 자신의 상식 수준을 뽐내기라도 하듯 관련 정보를 쏟아내는데 열중인 경우들을 보게 된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대부분의 반응은 ‘우리 목사님 대단하지 않아?’이다.

 

세 번째, 자기 또는 가족 자랑

 

강단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설교자들 역시 종종 보인다.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리가 되어야 함에도 온통 자기와 가족 자랑으로 가득한 경우다. 설교자에겐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유학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인지 모르지만,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쓰면서 어휘로 압도하는 시도 역시 종종 볼 수 있다. 자식이 명문대를 입학해 다니거나 대기업에 입사해 미래가 총망 된다는 것도 한두 번 이야기꺼리다.

 

네 번째, 교인과의 상담 공개

 

최근 어떤 교인과 상담을 한 내용이라며 떠버리는 듯 설교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상담 윤리를 무시하는 몰상식의 경우라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설교자 본인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내용을 듣는 교인들이라면, 이후 그 설교자를 상담자로 찾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일부 국가의 경우 최근 상담사 자격이 없는 목회자의 조언을 받아 피해를 보았다며 소송에 들어간 케이스가 있을 정도니 조심해야 한다.

 

다섯 번째, 예화 남용과 각색

 

많은 경우 목회자들의 설교에서 가장 큰 문제가 예화와 비유라고 알려져 있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화와 비유는 필수적일 수 있다. 하지만 빈약한 내용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거기에 예화의 주인공이 대부분의 특정 국가의 배경을 갖고 있으며 특정 정치적 입장을 가진 정치인이나 자본가들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거기에 각색한 내용까지 언급하게 되면 최악의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요즘 청중은 검색을 달고 산다.

 

여섯 번째, 눈을 떼지 못하는 설교 원고

 

이런 경우를 보게 된다면 교인들 중 대부분은 ‘얼마나 준비가 취약하면 원고에서 눈을 떼지 못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설교 원고를 마치고 거의 암기할 정도까지 준비하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다. 요즘 설교 원고가 준비된 이후 마인드맵으로 만든 한 장의 설교 원고를 준비하는 설교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설교제목(주제)를 용지 가운데 써넣고 설교 내용 전개는 나뭇가지처럼 방사형으로 전개해 나간다. 이때 키워드나 이미지를 적절히 활용하면 기억에 남는 설교 준비가 완성된다.

 

일곱 번째, 유머의 남용

 

교인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해야 교회가 부흥된다고 하면서 유머는 필수라고 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설교 중 유치한 유머 사용으로 한국강단의 타락을 걱정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들어다보면 사실 수많은 유머가 존재한다. 예수님의 유머라는 책에 보면 예수님의 유머감각이 풍부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유머를 섞어가며 재미있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다니며 설교를 듣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지나치지 않도록 유의한 적절한 유머는 공동체에 허브가 된다.

 

여덟 번째, 문제 교인 지적

 

요즘도 이런 간이 큰 설교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좀 있었던 것 같다. 문제없는 교회 없고 문제없는 교인 없는 법... 그러나 과거 문제를 지적함으로 자신의 영적권위를 내세우는 설교자들이 종종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현재의 목회자들을 향한 거센 비난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들은 성도들의 변화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러나 문제를 지적해서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기보다는 그들의 변화될 모습을 그려주는 설교를 하면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아홉 번째, 지루한 반복

 

설교에 있어서 시대를 반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오늘의 시대는 ‘스마트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빠르고 정확하며 간략한 메시지를 원하는 시대인 것이다. 일방적으로 듣던 수직적인 조직 구조의 시대가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스토리가 있고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일방적이고 지루한 반복이 아니라 설교자로서의 전문성과 진정성으로 공감을 이룰 수 있는 명확한 도전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열 번째, 교회 전체에 대한 비난

 

설교 때마다 한국교회를 언급하며 문제를 지적하는 모습은 우리시대의 선지자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설교의 절반이 교계와 교회지도자들을 책망하는 이야기로 말이다. 그러나 청중들은 설교자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문제와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더 관심을 갖지 않을까 싶다. 누구를 정죄하는 일에 익숙한 설교자보다 나 개인이 가야할 길을 말씀으로 제시해 주는 진정한 설교자를 기대하게 된다.

 

열한 번째, 신경질적인 반응

 

우리 시대 설교자를 돕는 청중을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적절한 반응은 어쩌면 설교자의 당연한 기대이다. 그러나 회중이 기대하고 설교자를 보지만 기대이하로 보여 질 때 더 큰 실망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싶다. 성도들이 반응이 역반응으로 나타날 때 설교자는 어찌해야 할까? 많은 경우 설교자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울음, 음향 상태 등 여러 환경 탓을 하며 같은 반응을 보여 설교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일도 종종 보인다.

 

열두 번째, 애매한 결론과 결단 없는 마무리

 

희미한 명제나 애매한 결론은 설교에 있어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요소의 수위에 속한다. 설교가 성경 풀이로 끝나서는 안 된다. 설교자가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런데 많은 경우 결론 부분에서 설교자가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된다. 깊은 인상을 남겨, 결단을 촉구하지 않는 설교는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없다. 한 목회자는 “이슈를 구체적으로 거론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다이내믹하게 되지 않는다. 설교의 목표는 돌풍을 일으켜 청중들이 깨닫지도 못한 의지가 표면화하도록 뒤집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불타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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