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이란의 역사


이란은 열사의 사막이 아니다. 걸프의 거대한 모래국가와 달리 이란은 기본적으로 사막이 아닌 ‘고원’으로 이뤄져 있다.
북쪽의 고원지대는 상당히 추워서 1년의 절반 동안 눈에 덮여 있는 곳들도 있다고 한다.
이란의 부자들은 이 고원지대에 스키를 타러 다닌다고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 나오는 ‘추운 마을’들을 연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란, 아리안


이 이란고원에 인류가 둥지를 튼 것은 아주 오랜 일이다. 페르샤라는 이름을 대체 언제부터 들어왔던가. 이란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갈래인 아리안들이다. 이들이 고원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2500년 쯤으로 추정된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아리안들은 기원전 3000년-4000년 무렵에 이동해서 일부는 유럽에 들어가 게르만, 슬라브, 라틴의 원조가 되었고 일부는 남쪽의 고원에 정착해 이란인이 됐다고 한다.

더 밑으로,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인도아대륙에 진출해 원주민이던 드라비다인들을 제치고 현재의 인도인들의 조상이 됐다. (여담이지만 인도 남쪽에는 아직도 드라비다인들이 남아서 스리랑카에 사는 혈족들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아리안은 이합집산을 거치는데 스키타이족(우리와도 연관이 있지요), 메디아족, 이란족(페르샤인들) 등이 모두 이 갈래다. 이란-이라크전은 1980년에 일어났지만 실은 이미 인류의 초창기에서부터 오늘날 이라크에 살던 사람들과 이란의 아리안들은 대립을 했었다.

초창기 이란의 아리안족들, 즉 이란족들은 당시 그 땅을 정복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는 용병 노릇을 했다. 아리안들은 아주 용감했었는지, 곧 원주민들을 제치고 고원을 장악해 ‘이란’(아리안들의 땅)을 만들어버린다. 기원전 7세기 쯤, 이란인들의 일파인 메디아인들이 앗시리아에서 독립해 남부 이란과 소아시아에 걸쳐 메디아 왕국(B.C. 708 - B.C.550)을 세운다. 메디아는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조였지만 영토가 넓었던 대신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연합체에 그쳤다고 한다.

이란 파사르가다에에 있는 키루스의 무덤
  

아리안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것은 기원전 621년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 때다. 아스티아게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을 차지했다. 

메디아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즉 오늘날의 이라크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빌론에 맞섰으나 싸움은 패배로 끝났다. 바빌론의 나보니두스 왕은 이란 남부 아케메네스 Achaemenes 왕조 (B.C. 550-B.C. 330) 와 동맹을 맺어 메디아를 정벌해버렸다.

아케메네스는 우습게도,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인 키루스 Cyrus 가 열어제낀 왕조다. 메디아는 외손자에게 뒤집어진 꼴이다. 아스티아게스는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바빌론과 손잡았다가 훗날 바빌론에 망했고, 키루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메디아를 무너뜨리더니 급기야는 바빌론에 칼을 돌렸다. 키루스는 주변 부족국가들을 통합해 동으로는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힌두쿠시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B.C.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벌한다. 한때의 동맹이던 나보니두스는 폐위됐다. 


키루스는 아주 관대한 정책을 펼쳐 피정복민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줬다. 오히려 피압박 민족들에게 ‘해방자’로 추앙됐다고 하는데, 바로 성경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들(‘바빌론 유수’)을 해방시켜준 것이 바로 이 왕이다. 구약 에스라서와 이사야서에는 ‘고레스 왕’으로 표기돼 있다. 키루스는 이란인들에게는 아주 위대한 왕, 너그럽고 지략 뛰어난 왕으로 각인돼 있다고 한다. 

키루스 대왕은 이집트마저 정복하길 원했지만 당대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준 것은 아들 캄뷰세스 2세. (어릴 적 읽었던 헤로도투스의 ‘역사’에서 익히 봤던 이름) 캄뷰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스스로 이집트 27왕조의 파라오가 된다. 그러나 왕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정작 이란에서는 쿠데타 기도와 혼란이 벌어졌고, 캄뷰세스 2세는 에티오피아 원정이 실패한 뒤 자살했다. 


드디어 이 인물이 등장한다. 다리우스 1세. 


캄뷰세스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다리우스 1세는 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헬레네스(그리스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란(페르샤) 제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 하니, 수에즈 운하의 원형이 그 옛날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제국을 페르샤라고 불렀는데, 파르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란 얘기다. 이란어를 파르시라고 한다. 그러니 ‘이란 제국’이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페르샤가 일반화된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메디아를 필두로 줄줄이 이어진 왕국들을 모두 ‘페르샤’라 하고, 메디아 왕조, 아케메나스 왕조 식으로 ‘왕조’를 붙여 구분하니 뿌리는 다 똑같다. 



다리우스 대왕의 부조


페르샤에 정복된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아테네가 여기 껴들어서 전쟁이 난다. 다리우스 1세가 쳐들어온다! 3차에 걸친 전쟁이 벌어진다. 

다리우스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고, 2차 원정에서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로 퇴각한다. 그런데 헤로도투스는 마라톤 전투를 대서특필했지만 허풍이 심했던 모양이다. 페르샤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당시 병력규모로 미뤄 과장돼 있을 소지가 높다고 지적한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숨졌다. 뒤를 이은 인물은 전임자 만큼이나 명성을 떨쳤던 크세르크세스(<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둘째 스와르다의 남편이었던 인물, 결국 스와르다를 목 잘라버리는 것으로 나온다. '스와르다'는 가상인물이지만 크세르크세스가 말 안 듣는 후궁의 목을 잘랐다는 기록은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원정대도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궤멸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원정을 실패한다. 전쟁의 패배, 결말은 ‘국력 쇠퇴’다. 피정복민들이 크세르크세스 사후 줄지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배층은 분열됐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와 달리 중앙집권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역마제도.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돼 있었다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시스템이기도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 가졌다. 그들 중 이란을 지배했던 것은 셀레우쿠스 Seleucus 장군이었다. 셀레우쿠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를 셀레우쿠스 seleucid 왕조(B.C. 312-B.C. 247)라고 부른다. 

그러나 셀레우쿠스 왕조는 지배구조를 만들기도 전에 반란에 시달렸다. 현재의 타지키스탄 지역인 Fars 지방(Farsi, 즉 페르샤어의 어원이 됐던)에서는 半유목민인 파르티아족(이란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이 셀레우쿠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파르티아 왕조(B.C.247-A.D. 224) 를 세웠다. 반란 지도자 아르사케스 Arsaces의 이름을 따서 아르사케스 Arsacid 왕조라고도 한다. 


파르티아 왕조는 미트라다테스 Mithradates 2세(B.C.123-87) 때 세력을 확장해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 로마제국과 상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직물(페르샤 카펫)이 동서양을 오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지만 대중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파르티아는 주변국들에 비하면 신분 이동의 통로가 열려 있는 비교적 개방된 사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인 파르타브 Parthav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 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파흘라비(팔레비) 왕조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파르티아가 500년 가까이 존속됐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사산 Sassan 왕조(224-652. 교과서에는 ‘사산조 페르시아’ 라고 나왔던)가 조직적으로 전대의 유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역사 복원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점. 


사산은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아르다쉬르는 스스로를 사산의 후계자라고 칭했기 때문에 그의 왕조에 ‘사산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르다쉬르는 집권 뒤 파르티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방 귀족들을 통제, 전국을 12개 주로 나눈 중앙집권체제를 만든다. 조로아스터 신관의 아들이었던 그는 조로아스터를 국교로 지정했고 정교 일치의 강력한 집권체제를 추구했다. 아들 샤푸르 Shapur 1세는 그러나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해 승려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우를 범한다. 

폭군 아자르 나르시의 시대를 지나 사산조의 10대 왕인 샤푸르 2세 Shapur II 가 즉위한다. ‘샤푸르 대왕’이라고 불리는 이 왕은 어머니 뱃속에서 즉위, 상당기간 섭정을 거쳤다. 70년 재위하면서 주변국들을 복속시키고 승려들의 특권을 없애 왕권을 강화했다. 샤푸르 2세에서부터 바흐란 5세, 카바드 1세 등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사산조의 전성기였다. 페르샤는 정치사회적,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해, 뒷날 아랍인들에게 멸망하기까지 ‘르네상스’를 맞는다. 


샤푸르 대왕

  

사산조 하면, 로마와의 싸움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와 갈등했던 이유는 아르메니아 지배권 문제였다고 하는데, 아르메니아는 지금도 이슬람권에 둘러쌓인 기독교국가로 남아 있다. 옛 소련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법 자본주의적인 변신을 했는가 하면, 유대인에 버금가는 ‘로비 능력’으로 미국 내에서도 말빨 센 이민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로버트 카플란은 밉살스런 저작 <타타르로 가는 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란 공포증’에 대해 說을 풀었는데, 양국의 역사가 오랜 만큼 적대심도 깊은가 보다. (아르메니아는 근대 들어와 터키(오스만 투르크)에서도 숱하게 학살됐으니 悲願의 민족이긴 하다.) 하지만 사산조는 파르티아에 대면 신분 이동이 제한돼 있었지만 그래도 기독교도가 특별히 박해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사산과 로마의 싸움은 역시나 ‘양대 제국의 패권 싸움’으로 봐야 할 듯.


사산조의 수도는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크테시폰인데, 당시에 이미 200만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였단다. 몇해 전에 크테시폰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들르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크테시폰은 바그다드의 건립자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압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에 의해 파괴됐고 크테시폰의 건축물들은 바그다드의 건축자재로 이용됐다고 하니. 바그다드 시내에는 알 만수르의 거대한 
頭像이 세워져 있는데 머리만 올려놓은 것이라 아주 강한 인상을 준다. 2002년 3월 미군이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바그다드 시내에 있던 만수르의 두상을 생각했었다. 부수고 짓고 또 부수는 것이 인류의 ‘문명’인가. 


이제 고대 세계를 지나, 중세 이란으로 넘아가보자. 


아랍족은 이란의 아리안들에게 ‘눌려 살던’ 민족이었다(종족 구분이라기보다는 사실 언어에 따른 구분에 가깝지만). 그런 아랍족이 ‘大페르샤’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였다.

보통 이란을 아랍국으로들 알고 있지만 아랍과 이란은 뿌리도 언어도 다르다. 비슷한 점이라면 같은 이슬람을 믿는다는 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 정도다. 이란은 이란이고 아랍은 아랍이다. 실제 아랍국들은 이란을 경외시 혹은 백안시한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은 물론이고 사우디 같은 아랍국들도 모두 아랍 형제인 이라크를 지원했었다.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반도를 장악한 뒤 이슬람군대가 가장 먼저 전쟁을 건 대상도 바로 이란(페르샤)이었다.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로 취임한 아부 바크르 Abu Bakr는 서쪽으로는 비잔틴, 동쪽으로는 사산조를 향해 정벌의 칼날을 돌린다. 650년 아랍군은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사산군을 대파하면서 이란 전역을 장악했다. 정통 칼리프朝(650-661)가 멸망한 뒤 이란에는 우마이야드 Umayyad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821)가 대를 이어받았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왼쪽)와 아부 바크르(오른쪽)
 

사산조의 후예인 다부예흐 Dabooyeh가 망국의 유민들을 모아서 작은 나라를 세우긴 했지만 페르샤의 후계자로 보기엔 미약하다(다만 이들은 이슬람 개종 후에도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 950년 간이나 지속됐다고 한다). 압바스 왕조 말기, 이란 땅에서는 반란이 줄을 잇는다. Saffarids, Samanids, Ghaznavids, Buyids 등 자잘한 왕조들이 명멸했던 시기(821-1055)를 Iranian Intermezzo라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교 포교 과정에서 무슬림들이 보여준 관용은 잘 알려져 있다. 이란에서는 주로 도시거주민을 중심으로 개종이 급속히 진행됐다. 이란인의 개종이 빨랐던 것은, 지역적 역사적 종교적 속성 상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교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유사했다기보다는 이슬람이 조로아스터의 여러 요인들을 흡수해 만들어졌다고 해야겠다).

몽골인들이 한족의 문화를 배운 것처럼, 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샤의 제도와 문화를 물려받았다. 특히 ‘제국’의 운영체제를 많이 배웠다. 버나드 루이스같은 서방 이슬람학자는 ‘이란은 처음부터 제국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고대 페르샤 시절부터 이란은 ‘제국’을 이끌어왔고, 전제군주에 익숙해 있다는 말이다. 루이스가 이런 얘기를 한 것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을 헐뜯기 위해서였지만. 


아무튼 이란의 군주인 샤 Shah 는 (루이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황제와 비견되는 절대 군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얼마전에 심심풀이로 읽다 만 페르도시 Ferdowsi(935- ?)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 영역본은 Shah 와 King을 구분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황제’와 ‘군왕’ 쯤 될 터인데, 이란의 샤를 ‘왕중의 왕’이라 하는 것을 보면 당대 페르샤인들의 자부심이 중화사상 못지않았음을 볼 수 있다.
 

중세의 이스파한


아랍 지배 뒤에도 이란인들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교육,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들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샤의 서사시는 유명하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말들은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을 비롯해 ‘-스탄’으로 끝나는 대부분 나라들에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압바스 왕조는 9세기 무렵부터 투르크 전사들을 용병으로 불러모았다. 왕조가 쇠하자 칼리프는 상징적인 종교지도자로 전락하고, 투르크 전사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셀주크 투르크(1037-1220)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 즉 이란의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란을 장악했다.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밑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이르는 땅이 아랍족에 이어 다시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게 됐다.

당시 셀주크에 저항했던 이들이, 테란 근교 알무트에 근거지를 뒀던 ‘이스마일 암살단’이다. 이들은 알무트 일대를 장악하고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는데, 이들이 해시시를 흡입했다는 데에서 영어 단어 ‘암살 assassin’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훗날 이들의 존재는 시아파 무슬림, 즉 이란인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악용되기도 하니 씁쓸할 뿐이다. 


셀주크 투르크는 1219년 몽골족에게 무너진다. 칸의 후예들은 페르샤 전역을 황폐화했다. 후세 입장에서 보자면 대규모 학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문화유산의 파괴다. 칭기즈의 손자 훌라구 칸은 이란 땅에 일한국을 세웠는데, 가잔 Ghazan 칸 치세(1295-1304) 에 다시 역내 부흥이 이뤄진다. 그러나 1335년 아부 사이드 Abu Said 왕이 숨진 뒤 한국은 결국 사분오열한다. 

이란 북동부에서 칭기즈의 후예들 중 강성했던 티무르가 제국 건설에 나선다. 티무르는 1381년 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페르샤 천년 고도 시라즈와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됐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티무르 사후 급속히 쇠퇴했고, 1501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티무르 치하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 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에는 원래 성직자 혹은 사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옮기기 힘들다)가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쉬아파들인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마일은 곧 이란 전역을 통일하고, 1501년 타브리즈 Tabriz 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 Safavid(1501-1736)를 수립한다. 

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권력에 굴종하는 공포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 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 티무르

이스마일은 쉬아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순니파들을 강제 개종시켰다. 쉬아 이슬람이 국교가 된 것은 이민족의 천년 지배를 끝낸 것보다도 현대 이란의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됐다. 사파비 왕조는 초기 신정체제를 구축했다. 이스마일이 모든 권력을 갖고, 성직자와 관료, 군이 3대 권력집단으로 샤를 에워싸는 체제였다.

어쨌건 쉬아는 이단(이것도 역시나 이슬람에는 없는 개념인데, 일단 ‘소수파’라는 의미로 해석하자)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영어로는 오토만 제국, 오늘날의 터키)가 이단을 처벌한다며 1524년 이란을 침공해 타브리즈를 함락시킨다. 아마도 투르크는 유럽의 십자군 전쟁에서 이단 전쟁의 논리를 배운 듯 -_- 이란군이 반격에 나서긴 했지만 사파비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오스만은 1533년 이라크를 점령해버리고, 아제르바이잔과 코카서스 지배권을 놓고 사파비 왕조를 두고두고 위협한다.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는 샤 압바스 Shah Abbas(1587-1629) 때였다. 


이란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압바스는 이스마일의 증손자다. 선대 왕인 이스마일 2세는 자기 아버지한테 10년간 유배됐다가 탈출해서 정권을 장악했는데, 왕이 된 뒤에 형인 무하마드 호다반데 Mohammad Khodabande만 남기고 친족은 물론 아비의 신하들까지 모두 도륙해버린다. 공포정치에 질린 근위대가 호다반데를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됐고, 압바스의 형 헤이다르마저 반란군을 이끌다 전사한다. 

압바스는 10살 어린 나이에 반란군 지도자로 추대된다. 작은아버지에 맞서 왕위를 차지하기까지 압바스의 드라마는 ‘용의 눈물’ 같은 영웅신화 겸 전쟁이야기다. ‘타고난 군사전략가’인 압바스는 일단 ‘적의 적’인 오스만과 강화를 맺어 국경분쟁을 일단락 지은뒤 동쪽 우즈벡을 격퇴시킨다. 

그리고는- 오스만과의 전쟁이다. 이라크, 그루지야, 코카서스를 탈환해 버린다. 정치적으로는 개혁가였다. 사제들과 귀족들의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관료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했다- 마치 왕건의 행로처럼, 그는 왕조의 창시자처럼 개혁을 강행한다. 그 덕에 정교 분리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종교에 독립적인 위계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란은 다시 동서양 교역중심지로 발달하기 시작한다. 전국 도시를 잇는 도로망과 숙박시설을 만들어 안전을 보장하고 비단 무역을 독점, 국가재정을 확충한다. 압바스는 바레인과 호르무즈 해협 섬들을 점령하고 인도양의 포르투갈 세력을 격퇴한다. 


‘전성기’를 얘기하려면 문화가 빠질 수는 없다. 압바스는 심지어 ‘계몽군주’였다고 한다. 예술을 장려해 건축과 회화 등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를 부흥시켰다. 이스파한을 새 수도로 정하고 사원과 궁전, 학교, 다리 등을 지어 세상의 절반(Nesf-e Jahan)이라 불릴 정도였다. 

이란인들은 이스파한을 ‘이란의 심장’이라 하고, 수도인 테헤란은 ‘이란의 영혼’ 즉 머리라고 한다. 2003년에 지진으로 폐허가 된 밤 Bam을 가리켜서 외신들이 페르샤의 보석이니 에메랄드이니 했는데 사실 이란에서 밤은 대표적인 유적지는 아니다. 이란에서 가장 유명한 곳들(그러니까 관광지들)이라고 한다면 테헤란, 이스파한, 쉬라즈, 파브리즈라고. 


샤 압바스의 프레스코화 


압바스 2세(1642-1666) 통치기 뒤로 사파비 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어떤 이는 압바스 2세를 영조에 비유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굶겨죽인 것처럼, 압바스 2세는 아들이 역모를 꾀했다고 의심해서 처형해버린다. 손자 사피 1세가 뒤를 잇지만, 아비의 죽음으로 비뚤어진 이 왕은 공포정치로 살육전을 일삼는다(이건 정조와 다르다).

나라가 부실해진 틈을 타서 아프간이 쳐들어온다. 1722년 아프간의 부족장 마흐무드 Mahmud가 이스파한을 함락하고 마흐무드 1세로 즉위한다. 폐위된 술탄 후세인 왕의 아들이 신흥군벌 나데르의 힘을 빌어 왕위를 되찾긴 했지만, 이번에는 나데르가 반역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어버린다. 사파비 왕조의 종말이다. 나데르는 초반 피치를 올리다 1747년 암살됐다. 이후 아프샤르, 잔드, 카자르 등 여러 왕조가 부침하는 혼란기가 이어진다. 


근대 이란은 카자르 Qajars 왕조 (1795-1925)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아그하 모하마드 칸 Agha Mohammad Khan은 케르만 지방에서 잔드 Zand 왕조를 끝내고 카자르 왕조를 연 뒤 테헤란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성격이 극악무도해서 시종에게 살해되고 말았다고. 아들도 애비 못지 않았는지, 사치에 탐닉해 국고를 탕진하고 아제르바이잔을 러시아에게 빼앗기는 바보짓을 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란 문화권인데 옛 소련 시절을 거치면서 나라가 완전히 비틀어졌고, 독립한 뒤에는 아수라장 꼴이 났다.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와 영국이 이란을 침략하기 시작. 문제의 저 아들내미는 러시아와 두 번 싸워서 지고 끝내 코카서스를 빼앗겼고, 또 그 아들놈은 1857년 파리조약으로 헤라트와 아프간땅을 영국에 내줬다. 이른바 '그레이트게임'이라 부르는 혈전이었다. 

헤라트는 아프간 서쪽, 즉 현재의 이란에 가까운 쪽인데 ‘페르샤 양탄자’의 본고장이다. 뒤에 영국은 아프간을 장악하려다 엄청 데이고 학을 뗐는데, 그 짓을 소련이 80년대 반복하고 지금 미국이 또 하고 있으니. 아무튼 아제르-이란-아프간 지역의 오늘날 국경선 윤곽이 저 바부팅이 왕 시절에 만들어진 셈이다. 

낫세르 앗딘 샤 Naser ad Din Shah (1848-1896) 시절에 미르자 타키 칸 아미르 Mirza Taqi Khan Amir (위 사진) 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느 제국이나 그렇지만 이슬람권은 관료제가 발달해 얘기 속에 ‘재상’이 자주 등장한다. 

현명한 재상은 쓰러져가는 국가를 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시도하였으나 관료들의 저항과 국왕의 견제로 결국 내쳐진 뒤 죽임을 당한다... 망조 든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토리다. 보통 아미르 카비르 Amir Kabir 라 불리는 이 재상은 이란에서 크게 존경받는 인물인데, 지금도 많은 이란인들이 그의 개혁이 중단됐던 것을 아쉬워한다고.
 

1871년 또 다른 재상이 다시 개혁을 추진했다가 역시 실패. 이란의 근대화는 결국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졌고, 자발적인 근대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영국의 경제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민중의 반외세 운동도 거세졌다. 1890년에는 영국이 담배독점권을 가져가자 이슬람 지도자가 금연령을 포고, 결국 독점권을 되찾은 일도 있었다. 


왕실은 썩어서 국가재산을 서구에 팔아치웠다. 상인과 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왕권 제한 움직임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1906년 8월 무자파르 알딘 샤 Muzaffar al Din Shah는 제헌을 약속했고 12월에 근대적 헌법이 제정됐다. 되는 일이 없으려니, 이 왕이 닷새만에 죽었다. 뒤를 이은 모하마드 알리 샤 Mohammad Ali Shah는 입을 씻고 헌법을 파기한다. 그리고는 러시아 장교가 지휘하는 군대(코사크 병단)를 시켜 의회를 폭파해버린다. 

봉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제헌 혁명’이라 부르는 이 봉기를 이끈 제헌파들은 1909년 7월에 테헤란에 입성해 샤를 몰아내고 헌정을 세운다. 

1907년부터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을 양분해 수탈을 하고 있었다. 1차 대전 중 이란은 영국, 러시아, 터키군의 전쟁터가 되어 짓밟혔다. 러시아가 1917 볼셰비키 혁명을 거치면서 내정에 정신 팔린 사이, 영국은 1919년 사실상 이란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조약을 강요해 식민화한다. 이란인의 反英 감정은 극도로 고조됐다. 이를 기반으로 떠오른 인물이 코사크 부대 사령관인레자 칸 Reza Khan 이었다. 


레자 칸은 1926년 ‘레자 샤 파흘라비’로 등극, 팔레비(파흘라비) 왕조(1926-1979)를 열어젖힌다. 레자 샤는 과감하고 체계적인 서구화에 들어간다. 부족 중심의 형태로 운영되던 군대를 혁신, 상비군으로 만들어 왕정의 권력을 강화했고, 관료제를 뜯어고쳤다. 전국을 포괄하는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근대적인 대학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세속국가’를 지향했던 레자 샤의 원대한 야심을 알려준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유학자들이 서당에 앉아 아이들을 가르친 것처럼 이슬람권에서는 이슬람학자들이 교육을 맡았었다. (이슬람권에는 오래전, 10세기부터 대학이 발달했는데 아프간에서 테러리스트 온상이 되고 있다고 (미국이) 지탄했던 ‘마드라사’가 이런 교육기관들을 가리킨다. 이집트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성원(聖院)에 있는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대학 중 하나로 꼽힌다.)


레자 샤(옆 사진)는 이슬람 학자들에게서 교육권을 빼앗아 종교적, 전근대적 사고방식 대신 세속적, 서구적, 합리적, 근대적 국민의식을 고양시키려 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의 개혁으로 근대적 교육을 받은 관리들이 생겨나고 경제가 회복되고 중산층이 형성됐다.

교육 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이슬람학자들에게서 근대적 사법기구로 넘어오게 됐다. 역시 이슬람의 독특한 측면인데,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종교-문화-사상-사회-정치체계의 통일체다. 

꾸란의 말씀은 경전인 동시에 법전에 해당되고,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성직자’ 개념이 없는 대신 이슬람 학자 겸 율법학자들이 무슬림을 지도한다. 권위있는 율법학자들(다른 종교권에서는 ‘성직자’로 부르는)이 법률적 판단을 해서 발표하는 것을 파트와 fatwa 라고 하는데, 무슬림들에게는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구 법체계의 ‘판례’에 해당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레자 샤는 근대적 사법체계를 도입해서 성직자들의 자의적인 판결 관행을 중지시키고, 1936년에는 여성들의 차도르를 없앴다. 


하지만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반대세력과 언론을 강도 높게 탄압했다. 봉건적 특권을 박탈당한 이슬람 세력은 결국 왕조의 적이 되고만다. 왕가와 성직자(편의상 이렇게 부른다면)의 대립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다. 근본적으로 레자 샤의 근대화 정책은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혁파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토대 없는 윗줄만의 개혁으로 그쳤고, 더욱이 개혁에 드는 비용도 농민 세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레자 샤는 소련과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의 경제관계를 강화했다. 열받은 소련과 영국은 1941년 이란을 침공해 레자 샤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위기감을 느낀 그는 결국 아들 무하마드 파흘라비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레자 샤는 영국군에 체포돼서 영국과 모리셔스 등지를 전전하다 1944년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파흘라비 왕조는 친미 부패왕조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긴 하지만, 적어도 레자 샤는 카자르 왕조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개혁을 추진, 이란인에 의한 근대화를 추진하고 제국주의에 맞서려 했던 정치가로 평가해야 한다...고 오늘날의 사가(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_- 

잘 모르긴 하지만, 그의 개혁이 성공했었다면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처럼 ‘이란의 아버지’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역사에서 ‘만약’을 가정해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가능성들을 점검해보고 점쳐보고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또 재미삼아 ‘만약에~’ 해보는 것만 해도 아주 좋다. 왜 그걸 나쁘다 하는지 모르겠다) 

레자 샤의 개혁이 케말 파샤의 개혁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케말은 공화정을 택했는데 왜 레자 샤는 왕정을 택했을까? 더 재미난 것은, 터키와 이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터키는 서방에서 ‘서구화해서 성공한 케이스’라고 떠들어대고 있고 (실제로는 터키를 미워하면서) 이란은 서방에서 ‘악마의 나라’로 몰아붙이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아들 파흘라비(보통 ‘팔레비 국왕’으로 불리는) 즉위 뒤인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침공한다. 이란은 연합국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영국과 소련의 경제적 침탈도 심해졌다. 소련군은 2차대전 종전후에도 가장 늦게까지 이란에 주둔했으며 이를 배경으로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 Tudeh party이 세력을 불렸다. 


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모사데그 Mohammad Mossadegh (옆 그림)가 이끄는 국민전선이 약진을 보이자 1951년 국왕은 등 떼밀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모사데그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유전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란 유전을 꿰차고 있던 영국은 이란의 돈줄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모사데그가 투데당과 협력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까지 나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한다. 모사데그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뒤 3년간 복역하고 고향에 가택연금됐으며 1967년 사망했다. 


모사데그를 쫓아낸 샤는 친미, 친영 노선을 노골화하고 비밀경찰(SAVAK)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BP, 더치 셸 같은 서방 석유회사들이 이란의 유전을 장악했다. 1955년에는 바그다드조약이 성립된다. 바그다드조약기구(중동조약기구 METO)는 터키·이라크·이란·파키스탄·영국으로 구성된 상호방위동맹으로, ‘가맹국의 안전을 위한 협력’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중동진출을 막기 위해 결성된 것이었다.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한 미국이 이 기구를 좌지우지했다. 1958년 이라크가 바트당 혁명 뒤 탈퇴하면서 이 기구는 해체되고 소련에 맞선 군사조약기구인 중앙조약기구(CENTO)가 만들어진다. 


METO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한데 이어 국왕은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주둔을 허용한다. 1963년 파흘라비는 6개항의 개혁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했다. 주내용은 토지개혁, 근로자에 회사 이윤 분배, 삼림과 목초지 국유화, 국영사업장 매각, 노동자 농민에 유리하게 선거법 개정, 문맹퇴치 지원 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특히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던 토지개혁은 아버지 레자 샤 시절 무산됐던 것으로, 파흘라비 국왕이 솔선해서 왕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지소유자와 겹치는 이슬람 성직자층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한다. 이들은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반(反)백색혁명 운동을 벌였다. 호메이니는 가택연금 됐다가 이듬해 터키(뒤에는 이라크)로 망명했다.
 

성직자들의 반대 속에서도 토지개혁은 진행됐고, 경제도 나아졌다. 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파흘라비는 1967년 10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대관식을 치르고 1971년에는 페르샤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내정이 안정되자 그는 중동의 경찰 역을 자임하고 군비 강화에 나섰다. 내용은 실상 미제 무기 수입이었다. 국민들은 이런 친미노선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에 노엄 촘스키가 쓴 글을 보면, 이란이 당시 중동에서 지금의 이스라엘과 같은 역할, 즉 ‘미국의 경비견 노릇’(이건 내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어느 총리의 표현이다)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사데그 국민전선의 한 분파인 이란자유운동,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세력, 페다인과 무자헤딘 등 무장단체들이 모두 반 파흘라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왕정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갔다.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년 후반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전반적으로 파흘라비'백색테러' 통치는 너무나도 잔혹했고,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아갔고, 재정을 엄청나게 탕진했고, 이란을 빈사상태로 몰아갔다.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그간 묵인해왔던 왕정의 인권탄압에 우려를 표하고 개선을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78년 왕정은 호메이니를 음해하는 기사를 친정부 신문에 게재, 국민을 자극하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데모를 유혈진압한다. 이스파한의 바자르가 항의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8월 아바단에서 시위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렉스 시네마에 불이 나서 400여명이 숨지는데, 훗날 조사에서는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비밀경찰의 소행으로 믿었다. 9월 성난 군중이 테헤란 시내 잘레흐 광장에 운집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라크는 이란의 압력에 따라 호메이니(옆 사진)를 추방했으며 호메이니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해간다. 그의 프랑스 망명은 오히려 이란 반정부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게 하는 계기가 됐다. 12월 
파흘라비 국왕은 온건파인 국민전선 지도자 바크티아르 Bakhtiar와 협상, 바크티아르에게 총리직을 맡기고 출국하기로 결정한다. 이듬해 1월 파흘라비는 이란을 떠났다.

그러나 79년 출범한 바크티아르 정부에 대해 호메이니는 ‘불법’임을 선언하고 타도령을 내린다. 2월1일 호메이니 귀국. 군부마저 호메이니 지지로 돌아서자 바크티아르마저 망명해버리고 2월12일 왕정은 완전히 종식됐다. 이것이 이란 이슬람혁명이다.

1979. 2. 5.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르자간 Mehdi Bazargan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슬람최고혁명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였고, 정규군과 별도로 이슬람혁명수비대가 만들어져 무력으로 뒷받침했다. 12월에는 이슬람공화국을 표방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됐다.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 인질사건(11. 4.)이 없었더라도 미국은 이란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왈러스틴과 헌팅턴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미국이 느낀 ‘체제 충격’이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사실에 좀 놀랐었다. 아무튼 인질사건으로 바자르간은 사임했다.

1980년 1월 바니 사드르 Bani Sadr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혁명세력을 누르지 못했다. 사드르는 1년만에 실각해하고, 무자헤딘(MKO) 지도자 마수드 라자비 Masoud Rajabi와 함께 81년 7월 파리로 망명했다. 사드르는 파리에서 호메이니 축출 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란의 권력투쟁은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성직자 계급의 승리 이후 이란은 교조주의로 치닫는 동시에, 정정불안과 암살이 횡행한다. 사드르 실각 뒤 취임한 알리 라자이 대통령과 자베드 바호나르 총리가 나란히 암살됐다. 혁명위원회는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조직을 해체하고 3000여명을 처형했다. 81년말 혁명은 초기의 불안단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이라크는 인구의 65%가 시아파이고,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다. 이슬람국가들 중에서 시아파 인구가 많은 나라는 이 둘 뿐이다. 후세인은 이란 혁명의 파고가 넘어올까 두려워 선제공격을 해버린다. 주변 아랍국가들의 명시적, 암묵적인 지지 속에 80년 7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표면적인 이유는 Shatt al-Arab 수로의 영유권 다툼이었다. 

개전 후부터 1982년 여름까지는 이라크가 공격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1982년말부터 이란이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반격에 나서면서 지리한 소모전에 돌입한다. 미국 무기로 무장하고서도 미국의 이라크 지원사격으로 고립지경에 빠진 이란은 국민들의 ‘혁명 수호 의지’로 패전을 면할 수 있었지만 인명피해는 이란 쪽이 훨씬 컸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으로 오히려 이란 내에서는 혁명 분위기가 공고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전쟁이 89년 9월 UN 중재끝에 종료되고 호메이니도 사망(1989년 6월)했다. 지금은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옆 사진)가 최고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핵 개발 의혹을 둘러싼 서방의 공세와 경제제재, 개혁파-보수파 정권이 교대로 집권하면서 벌어지는 내부의 정치적 갈등 등이 반복됐다. 

2013년 중도 온건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의 당선은 미국과의 오랜 앙숙관계를 해빙 무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로하니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통화', 핵 협상 잠정 합의, 그리고 2015년 7월의 핵 합의. 2016년 1월 16일,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마침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었다. 오랜 세월의 고립에서 풀려난 이란은 중동에,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왕조사 연표


고대 페르시아 왕조(B.C. 559-330)

사산 왕조(A.D. 226-651)

아랍의 지배(651-1258)

몽고의 지배(1256-1349)

티무르 왕조(1369-1500)

사파비 왕조(1501-1736)

아프샤르 왕조(1736-1749)

카자르 왕조(1796-1925) 
파흘라비 왕조(1925-1979)

이란 이슬람공화국(1979-) 



근대정치사 연표


1906년 입헌군주국 수립, 샤 통치 종식 

1919년 페르시아조약 -영국 보호령이 됨 

1921년 레자 칸의 쿠데타 

1925년 카자르 왕조 멸망, 파흘라비 왕조 건국

1935년 이란(Iran)으로 국호 변경 

1941년 모하마드 레자 파흘라비 즉위(9월)

1951년 모사데그 정권 수립

1953년 모사데그 실각

1962년 백색혁명 시작(1월) 

1963년 호메이니 망명(6월)

1977년 재미 유학생 반정부시위(11월)

1978년 반정부 시위 전국 확산(3월)

1979년 파흘라비 망명, 호메이니 귀국(2/1), 이슬람공화국 선포(4월), 미대사관 인질사건(11월) 

1980년 바니 사드르 대통령 당선(1/25), 이란-이라크전쟁 발발(9/21) 

1986년 미국 관리 비밀 방문(이란-콘트라 스캔들)

1988년 이라크와 휴전협정 체결(8/20) 

1989년 호메이니 사망(6/3)

1993년 라프산자니 제6대 대통령 취임(8/4) 

1997년 하타미 대통령 당선(5월) 

2001년 하타미 대통령 재선(6월)

2005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취임(8월)
2009년 아마디네자드 재선, 반정부 시위와 유혈사태(6월)

2013년 중도온건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 당선(8월 취임)

2015년 P5+1(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과 핵 협상 타결

2016년 1월 제재 해제



간추린 이란의 역사

 

1. 고대 이란


가. 선사시대
이란 고원에 농경과 도기제작이 시작된 것은 B.C.6000년경으로 추정되나 현재 이란인의 직접적인 조상인 인도 유럽어족중의 한 갈래가 이란고원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B.C. 2,500년경으로 짐작한다. 異說이 있기는 하나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아리안인(인도유럽족)이 B.C. 3,000-4,000년 서쪽과 남쪽을 향해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서쪽으로 이동한 부족은 유럽대륙에 정착하여 독일인, 슬라브인, 그리이스인, 라틴족 등의 원조가 되었고 남쪽으로 이동한 부족의 하나는 이란 고원에 정착하여 이란인의 기원이 되었다. 남진을 계속한 다른 부족은 인도 북부에 정착하여 先住民인 드라비다族과의 혼혈과정을 거쳐 현재의 인도족이 되었다고 한다.


이란 고원에 정착한 아리안족은 離合集散의 과정을 거쳐 scythian족 (북동부 정착), medes족(중부, 북서부 정착), persian족(남부, 남서부 정착)으로 大分되어 갔으며 이들 이주 아리안족은 초기에는 선주민들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당시 중동지역의 强者로 군림하던 수메리아나 바빌로니아의 거듭되는 침략을 막는 데 투입되었으나 이 과정을 통해 軍力을 장악하여 점차 支配主의 위치를 침탈하고 궁극적으로 이란고원의 지배부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 메디아 왕조 (B.C. 708 - B.C.550)
기원전 7세기경 이란인의 一派인 메디아(Medes)인들이 앗시리아로부터 독립하여 남부 이란과 소아시아에 걸치는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는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조로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지배하기는 하였으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지는 못하고 다수의 지방세력 (속주)이 혈연관계를 통해 중앙권력과 연계된 형태의 연방체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다.


기원전 621년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은 바빌론과 연합하여 앗시리아를 붕괴시키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을 차지하였으나 이에 만족치 않고 비옥한 초승달 지역(현재의 이라크)마저 장악하기 위해 바빌론과 대적하였다. 바빌론의 나보니두스 왕은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이며 지금의 이란 남부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아케메네스 家의 Cyrus와 동맹을 맺고 메디아 왕국을 정벌하였다. 다. Achaemenes 왕조 (B.C. 550-B.C. 330)


아스티아게스 왕을 축출한 그의 외손자 키루스(Cyrus)는 새로 아케메네스 왕조를 열었으나 같은 이란족이었으므로 국명과 지배세력만 바뀌었을 뿐 실제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Cyrus 대왕은 즉위후 강력한 정벌정책으로 주변의 군소국가를 통합하여 東으로는 소아시아, 아르메니아지역과 서쪽으로는 지금의 힌두쿠시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B.C. 539년에는 바빌로니아까지 정벌, 한 때 동맹을 맺었던 나보니두스 왕을 폐위시켰다. 그는 새로이 정복한 영토에 지극히 관대한 정책을 펼쳐 그들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준 까닭에 피압박 민족들로부터 해방자로 추앙받았다.


특히 당시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을 해방시켜 그의 이름은 구약 에스라서와 이사야서에 고레스왕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그가 해방시킨 바빌론의 유태인중 일부는 그를 따라서 이란으로 이주하여 현재 이란에는 약 28,000명의 유태인이 거주하고 있다.


키루스왕은 이란족을 처음으로 통합하고 당시 문명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관용정책으로 인해 현재 이란인은 그를 군사적인 성취를 이룩한 정복군주로서가 아니라 寬容과 叡智를 갖춘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존경하고 있다.


키루스 대왕은 이집트 정복을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遺志를 받들어 이집트를 정벌하고 자신은 이집트 제 27대왕조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국내에서는 왕위 찬탈의 혼란(캄비세스 2세가 즉위와 함께 살해한 동생을 사칭하는 자가 정권을 찬탈)이 일어나 국가가 혼동에 빠졌고 그는 자신이 진두지휘한 이디오피아 원정이 실패하자 자살하였다.


왕위 찬탈사건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Darius I세는 인도북부에서 지금의 불가리아 남부에까지 영토를 확장, 이란 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를 통치한 군주가 되었다. 그는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하였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수에즈 운하와 거의 중복된다. 그보다 그는 아테네 전투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그의 영토확장에 따라 터어키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던 당시의 그리이스 식민도시도 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상이한 정치제도와 차별적인 조세제도로 자신들의 무역활동과 本國 그리이스와의 교통이 제한을 받게 되자 이들 식민도시는 Miletos시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며 아테네가 이를 지원하자 그는 3차에 걸쳐 그리이스를 침공하였다(B.C. 492-480). 기원전 492년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인해 실패하였고 2차 원정(기원전 490)때에는 아테네 북동쪽 마라톤 평원까지 진격하였으나 아테네군에게 대패, 퇴각하였으며 바로 그 전투가 마라톤의 기원이 된 마라톤 전투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라톤 전투는 헤르도투스가 유럽인의 시각에서 기술한 것으로 크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페르시아 역사에는 그다지 중요하게 기술되어 있지도 않고 헤르도투스가 주장하는 페르시아 병력 규모도 그리이스보다 휠씬 강성했던 이집트를 원정했을 때의 페르시아 병력보다 많은 점에 비추어 과장되었을 소지가 높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원정 준비중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가 3차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궤멸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그리이스 遠征은 실패하였고 그의 死後 정복민의 반란과 지배층 분열, 왕권 다툼의 혼란속에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Achaemenid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이전의 메디아 왕국과는 달리 상당한 정도의 중앙집권 체제와 튼튼한 경제 사회체제를 이룩하여 명실상부한 제국의 틀을 갖추었다. 다리우스 1세가 완성한 행정 조직은 중앙집권과 봉건제도가 혼재된 체제로서 즉 全國을 satrapsy(屬州)라고 불리는 20개의 행정구역으로 분할하고 지방행정책임자(太守, satrap)가 이를 상당한 재량권을 갖고 지배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치안과 動員을 담당하는 장군과 행정을 맞는 관리는 중앙정부와의 直報체계를 유지하였으며 帝國 全域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驛馬體制(postal system)으로 연결되어 아무리 奧地라 하더라도 15일 이내에 연결이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긴 도로는 리디아 속주(지금의 터어키 북서해안)의 수도 사르디스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Susa를 연결하는 것으로 거리가 2,600km에 달하였다. 이러한 도로망을 이용하여 왕은 자신의 감독자를 각지에 파견, satrap을 견제할 수가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안정된 지배로 인해 도로망이 건설되고 치안이 유지됨과 더불어 법규가 통일되고 화폐의 공신력이 보장됨으로써 동서를 잇는 교역이 활발히 발달하였으며 페르시아어가 중동지역은 물론 유럽까지 전파, 영어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예컨대 bazzar, shawl, sash, turquoise, orange, lemon, melon, peach, spinach, asparagus 등의 영어는 그 기원이 페르시아어이다. 무역외에는 농업과 주변 속국의 租貢이 국가의 주요 수입원이었으며 지금 시라즈市 인근에 남아 있는 Persepolis離宮에는 조공을 바치는 주변국가 사절단의 모습이 뚜렷한 浮彫로 남아 있다.


조세는 모든 정복지는 왕의 소유라는 개념 아래 피정복민만이 부담하였고 페르시아 本國民은 면제되었다. 상당한 법령체제를 갖고 있어 각 지방별 관습에 따른 지방법과 제국 전역에 적용되는 제국법을 운영하였다. Achaemenid 왕가는 자신의 가족을 주변국가의 지배자와 정략결혼 시키거나 그들의 자식을 수도 Susa에 인질로 잡아두는 방식으로 저항의지를 미리 차단하였으며 이들 인질을 페르시아식으로 교육시켜 귀국후에도 자연히 친 페르시아 성향을 갖게 하였다.


라.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과 Seleucid 왕조의 성립
아케메니드 왕조는 그리이스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그가 정벌중 바빌론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가 정복한 광대한 대지는 4명의 휘하 장군이 나누어 가졌다. 그중 이란지역을 통치하게 된 것은 Seleucus 장군으로서 그들 후손이 이란을 지배했던 시기(B.C. 312-B.C. 247)를 셀루키드(seleucid) 왕조라고 한다.


마. Parthia (Arsacid)왕조(B.C.247-A.D. 224)
셀루키드 왕조는 강력한 집권체제를 구축하기도 전에 대소규모의 피정복민 반란에 시달렸다. 이중 Fars 지방(현재의 타지키스탄 지역)의 半유목민인 파르티아족(이란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이 Arsaces의 지도하에 강성하기 시작하여 B.C. 247년에 Seleucid 왕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Parthia 왕조를 성립하였다. 파르티아 왕조는 Mithradates II세 치세(B.C.123-87) 때 흥성하여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여 아케메니드 왕조시의 영광을 재현하였으며 당시 서양을 통일한 로마제국과 수차례 對敵하였다.


< B.C. 1세기경의 파르티아 영토 >

역시 동서양을 잇는 교역이 흥성하였으며 이란의 카페트, 말, 단검 등이 동서양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지배층은 배화교를 숭배하였으나 일반 대중까지 침투하지는 못하였으며 주변 국가에 비해 신분이동이 가능했던 비교적 개방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역인 Parthav 지방의 언어인 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며 1979년 회교혁명으로 붕괴된 Pahlavi 왕조는 바로 이 이름을 딴 것이다.


파르티아는 아케메니드 왕조에 못지 않은 제국을 건설하였고 500년 가까이 이를 유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뒤를 이은 사산(Sassan)왕조가 대부분의 유적과 서적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에 정치조직, 사회, 경제체제, 문화 등의 자세한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바. Sassan조 페르시아 (224-652)
파르티아왕조는 神官의 아들 Ardashir에 의해 224년 전복되었으며 그가 Sassan이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영웅의 후계자라고 자처한 까닭에 사산왕조라 불리운다. 그는 파르티아 제국 말기의 혼란에 세력이 신장하였던 지방 귀족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고 全國을 12개주로 분할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였다. 신관의 아들이었던 만큼 이전의 파르티아왕조와는 달리 배화교를 국교로 지정하여 숭배를 강요하였고 배화교 승려를 지방관으로 파견하여 政.敎를 아우르는 강력한 집권체제를 도모하였다.


그의 아들 Shapur 1세는 이를 토대로 로마와 전쟁, Valeianus 황제와 그의 아들을 체포(260)하여 죽을 때까지 인질로 붙잡아 두기도 하는 등 로마제국과 전면 대치하였다. 배화교의 지나친 숭배로 인해 승려들은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여 준독립적인 지위를 향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 사무까지 관장하였으며 이는 곧 국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Shapur II세(309-379)는 異腹兄인 暴君 Azar Narsi가 悖倫을 보다 못한 廷臣들에 의해 살해되자 임신된 상태에서 즉위하였으며 70년간의 재위 기간을 통해 주변 국가를 복속하고 배화교 승려들의 특권을 회수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민생을 보살피는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Vahran V세, Kavad I세 등의 賢政을 통해 사산조 페르시아는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흥성하였으며 문화가 발전, 고대 이란의 르네상스시기로 통칭된다. 그러나 골육간의 왕권 투쟁, 극도의 사치, 사회기강과 윤리의 문란 등을 거쳐 국력이 쇠진, 아랍족에게 멸망하게 된다.


< 3세기경 사산朝 페르시아의 영토>
사산朝 페르시아는 신분 이동이 어려웠던 계급사회로 왕족과 귀족, 승려, 군인, 상인, 농민으로 구성되었다. 배화교가 국교로 채택되어 모든 국민의 일상생활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승려들의 권세가 강하여 종교적인 개혁운동이 수차 일어날 정도였다. 종교적인 관용성은 있어서 기독교는 특별히 박해 받지는 않았다.


대외관계는 아르메니아 지배권을 둘러싸고 로마와의 긴장관계가 지속되었다. 로마는 아르메니아인이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페르시아는 아르메니아가 자국과 오랜 동맹관계를 유지하여 왔으며 지배층이 이란系라는 근거로 지배권 주장, 대립하였으나 결국은 동서양 兩大 제국의 패권싸움이라는 양상이었다.


산업은 역시 상업, 특히 동서양의 교역이 흥성하였으며 현재 바그다드 인근에 위치하였던 수도 Ctesiphone는 당시 200만이 거주하였던 대도시였으나 Abbasid 2대 칼리프 Al Mansour에 의해 파괴되어 바그다드 건설 자재로 이용, 지금은 몇 채의 유적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2. 중세 이란


가. 아랍족의 지배
모하메드의 死後 1대 칼리프로 취임한 Abu Bakr는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정벌을 시작하여 650년 Abu Bakr가 이끄는 아랍군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Cteshiphon을 점령하고 651년 사산軍을 대파, 이란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란을 최초로 정복한 정통 칼리프朝(650-661)가 곧 멸망하고 뒤를 이어 우마야드(Umayyad)朝(661-750), 압바시드(750-821)朝가 계속하여 이란을 지배하였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자 Dabooyeh가 遺民을 규합하여 Alburz 산맥과 카스피해 사이 지역을 점령, 통치하였으나 사산조의 역사와 문화가 계승된 것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빈약하였다. 이 저항지역은 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는 하였으나 독자적인 지배권은 계속 유지하여 95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Abbasid 왕조 퇴조기에 이란 내에서는 반란이 계속되었는 데 이 저항지역 출신의 Buyids 형제가 이끄는 반란세력은 북서부 이란을 점령한 후 A.D. 945년에는 바그다드를 침공하여 calif를 폐위하기도 하였다. 압바시드 왕조말부터 조정에 참여하였던 이란인 대신, 장군이 묵인하에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거나 이란인의 반란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Saffarids, Samanids, Ghaznavids, Buyids 등 이란인에 의한 왕조가 명멸하였는 데 이 시기(821-1055)를 Iranian Intermezzo라 부른다.


아랍인은 통설과는 달리 점령지역민의 개종을 무력으로 강제하지는 않았으며 이슬람 개종자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자발적인 개종을 유도하였다. 이란에서는 주로 도시거주민을 중심으로 이슬람 개종이 상당히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란인의 改宗이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은 이란의 배화교가 유일신, 천사의 존재, 최후의 심판 등 이슬람교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랍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화페제도, 행정제도등 각종 국가 운영메카니즘을 답습하였으며 페르시아의 화려했던 왕족, 귀족문화를 본받았다. 이란인은 아랍지배왕조의 관료로 봉직하였으며 교육,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언어는 아랍어가 공식어로 채택되고 지배층에서는 광범위하게 통용되었으나 일반 민중은 계속하여 페르시아어를 사용하였다.


나. 셀주크 터어키의 지배(1037-1220)
Abbasid 왕조는 투르크계 戰士를 9세기경부터 고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왕조의 권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후로 왕은 상징적인 종교지도자로 남고 실제 통치는 이들 투르크족이 담당, 여러 투르크계 여러 부족이 왕조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중 Seljuk족 Tughril Beg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흥성하여 西進을 거듭한 끝에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시리아, 이라크, 인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여 이란은 아랍족에 이어 다시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테헤란 근교 Alumut 지역에 근거한 이스마일 암살단은 주변 지역을 150년간이나 통치하면서 암살단을 수시로 파견하여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물을 살해하는 저항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영어의 assassin은 이들이 암살 임무 수행전에 마약성분을 함유한 약초 hashish를 피운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다. 몽골의 지배(1220-1335)
셀주크 터어키는 당시 질풍노도와 같이 서쪽으로 진군하던 몽골군에게 1219년 맥없이 무너졌으며 몽골족은 이란 전역을 황폐화하고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다. 몽골군의 잔혹한 침략은 이란의 발전과 국민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광범위한 학살로 인해 격감된 인구는 20세기 중반에야 몽골침입 이전 수준을 회복할 정도였다. 이란인의 특징으로 권력에 대한 공포를 거론하는 경우가 많은 데 특히 몽골족의 침입 이후 이러한 순종적 특징이 더욱 굳어졌다고 한다.


징기스칸 死後 이란을 할당받은 그의 손자 Hologu Khan은 일(Il)汗國을 건설하였으며 Ghazan Khan(1295-1304) 治世에 조세 감면, 농업장려, 관개시설 재건, 교역로 안전 강화 등의 선정을 펼쳐 다시 무역이 흥성하였고 이란은 인도, 중동, 유럽, 중국의 문화 문물의 경유지로 번창하였으나 1335년 그의 조카였던 Abu Said 왕이 사망한 후 제국은 四分 五裂 의 과정을 거쳐 國勢가 쇠잔하여졌다.


당시 이란 북동부에는 징기스칸의 3남 Choghtei의 後孫이 여러 小國을 이루고 거주하고 있었는 데 이중 티무르가 강성하기 시작, 1381년 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잔혹한 침공으로 시라즈,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되었다. 그의 치세중 이란인은 중앙 행정관료로 다수 편입되었으며 이란양식의 건축이 진흥되었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그의 死後 급속히 약화되었으나 1501년 이란인이 통일할 때까지 명맥은 유지하였다. 티무르 시대에는 특히 이란의 문학이 발달하여 Rumi, Saadi, Jami, Hafez 등의 국민시인이 속출하였다. Hafez는 아랍 강점기의 Ferdowsi(935- ?)와 더불어 이란시의 거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라. Safavid 왕조(1501-1722)
티무르 治世時 이란 북서부 지방에 Sheikh Safi al-Din이라는 이슬람 성직자가 그를 숭배하는 추종자들과 집단을 이루고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았던 시아파 집단으로서 수니파의 혹심한 감시와 탄압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 전쟁을 개시하여 주변 국가를 복속시키고 이란 전역을 통일, 드디어 1501년에는 Tabriz를 수도로 한 통일왕조Safavid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의 침입 이후 약 1,000 년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나 자신들의 왕조를 다시 열게 되었다. 오랜 이민족 통치는 이란인에게 잠재적인 반외세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구조를 남겨 놓았다.


이스마일은 종교집단 지도자였던 만큼 Shia Islam을 국교로 지정하고 다수의 수니파 회교도를 강제로 개종시켰다. 시아파 이슬람의 국교화는 이민족의 천년 지배를 종식한 것보다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국민의식과 문화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란의 역사진행 방향을 변경시켜 놓았다. 초기 단계의 사파비드 왕조는 신정정치체제로서 Ismail은 性俗의 권한을 모두 행사하였으며 성직자, 관료, 군이 3대 권력집단으로서 국왕을 보조하였다.


시아파는 당시에는 異端이었던 만큼 수니파의 오토만 터어키는 異端처벌을 명분으로 1524년 이란을 침공하여 Tabriz를 함락시켰다. 겨울의 추위와 사파비드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퇴각하기는 하였으나 以後 사파비드왕의 半神聖性은 크게 훼손되고 권력기반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오토만은 1533년 재침하여 이라크 지방을 차지하였고 아제르바이잔과 코카서스지방의 지배권을 두고 사파비드 왕조를 끊임없이 위협하여 국가발전의 큰 장애가 되었다.

사파비드 왕조의 전성기는 Shah Abbas의 치세(1587-1629)시기로서 그는 이란 역사 전체를 통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Abbas는 이스마일의 증손자이며 그의 큰아버지 이스마일 2세는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10년간 유배되었다가 탈출한 끝에 정권을 탈취한 인물로서 정권 탈취후 둘째형인 Abbas의 아버지 Mohammad Khodabande을 제외하고는 至近 가족 및 父王의 신하를 무참히 도륙, 처참한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虐政을 견디다 못한 근왕병은 Khodabande를 옹립하여 모반하였으나 발각되었고 Abbas의 형 Heydar가 잠시 반란을 이끌다 전사하자 Abbas가 10세의 나이에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登極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군사전략가였다. 그는 일단 오토만과 강화를 맺고 서쪽 국경의 안전을 도모한 후 동쪽 국경을 위협하던 우즈벡을 격퇴시켰으며 이어 Ottoman과의 전쟁을 개시, 이라크, 조지아, 코카서스 일부 지방을 탈환함으로써 사파비드 왕조 開始以來 계속되어 온 외침의 위협을 해소하였다.


그는 또한 식견있는 정치인으로서 종교계나 귀족가문의 私兵을 혁파하고 관료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하였다. 성직자들의 정치 개입을 차단함으로써 그의 치세중 종교와 권력이 점진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으며 정치와는 독립적인 종교적 위계질서가 성립되었다.


그는 예술을 장려한 계몽군주로서 건축과 회화 등 전 분야의 예술과 문화를 열정적으로 장려하여 아랍족의 침입 이후 쇠퇴일로에 있던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를 부흥시켰다. 이스파한을 새 수도로 정하고 각종 사원과 궁전, 학교, 다리 등을 건설하여 세상의 절반(Nesf-e Jahan)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훌륭한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이스파한을 이란인은 이란의 심장이라고 아낀다. 반면 수도 테헤란은 두뇌(brain), 종교 중심지 콤은 흔히 이란의 영혼(soul)으로 비유된다. 이스파한으로의 遷都는 내륙지방으로 국가중심을 이전함으로써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인 고려와 종교집단의 사병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인 고려에서 시행된 것이다. 철학 및 과학도 발달하여 Mollasadr, Mirdamad, Moqaddas Ardebili 등 저명한 페르시아 철학자 등장한 것도 그의 치세 시기였다.


치세가 안정되면 항상 그러하였듯 이란은 다시 동서양 교역중심지로서 크게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전국 도시를 잇는 도로망과 숙박시설을 건설함으로써 교역로상의 안전을 보장하였고 비단교역을 독점, 국가 재정을 비축하였다. 그는 바레인과 호르무즈 해협내 도서를 점령하고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을 잇는 교역로를 통제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퇴각시켜 해상 교역로까지 확보하였다.


Shah Abbas II세 치세시(1642-1666) 일부 중흥기가 있기는 하였으나 사파비드 왕조는 그의 死後부터 쇠잔해지기 시작, 사파비드 왕조는 우리나라 조선왕조와 흡사하게 건국 초기에 흥성기를 이루고 긴 쇠퇴기를 겪는 과정을 지나게 된다. 末年의 Abbas 왕이 판단력을 상실하여 文弱했던 장남을 역모를 꾀했다고 의심한 끝에 처형하는 것도 조선의 英祖와 흡사하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후 정상적인 환경에서 양육되지 못한 그의 손자 Shah Safi I세(1629-1642)는 할아버지에 이어 즉위한 후 正祖와는 달리 親族 및 궁신을 도륙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Shah Abbas II세는 증조부 Abbas I세를 본받아 문화예술을 진흥하고 산업발전에 노력하여 일시 부흥기가 도래하기도 하였으나 군사적인 능력과 정치력은 증조부에 미치지 못하여 계속되는 지방의 반란을 다스리지 못하는 등 제국의 기초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즉위한 왕은 대부분 궁중생활의 방탕함과 유희에 탐닉하여 국고를 낭비하고 국가관리에 무관심하였다. 이러한 柔弱하고 무책임한 왕들의 국정 방임은 妻妾家의 국정 개입, 국유지의 관리 부실, 과도한 세금, 교역쇠퇴, 군대 부실로 이어져 국가는 붕괴단계에 돌입하게 된다.


이러던 중 1722년 아프간의 부족장 Mahmud가 침입하여 수도 이스파한을 함락하고 Mahmud I세로 즉위하였으나 그에 의해서 폐위된 Shah Sultan Hussein의 長子가 신흥 군벌 Nader의 힘을 빌어 왕위를 탈환하였다. Nader는 실권을 장악한 뒤 자신이 왕으로 즉위하니 사파비드 왕조는 220년만에 소멸하고 만다. Nader Shah는 코카서스, 아르메니아, 카스피해 연안,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고 1739년에는 인도까지 침공하였으나 감당할 수 없는 대외 원정과 과도한 조세로 국정이 피폐하여 1747년 암살되었고 그의 암살후 Afshar家, Zand家, Qajars家 등의 일시적인 여러 왕조가 浮沈하는 혼란기를 겪게 된다.



3. 근대 이란


가. Qajars왕조 (1795-1925)
Zand家의 Kareem Khan에 의해 부친이 살해당하고 자신은 동생과 함께 볼모로 잡혔던 Qajars가의 Agha Mohammad Khan은 Zand가를 Kerman에서 평정하고 이란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 Qajars 왕조를 열었다. 그는 사파비드 왕조 말기부터 발호하였던 지방부족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테헤란으로 遷都하였다. 그는 오랜 무정부 상태를 종식하고 국경의 안전을 확립하였으나 극악무도한 성격의 소유자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조지아에 원정하던 중 어이없게도 꾸지람을 두려워한 시종에게 살해되고 만다.


그의 아들 Fath-Ali Shah는 淫樂과 사치에 탐닉, 국고를 탕진하고 아제르바이잔 지방을 러시아에게 빼앗기는 등 제국주의의 침탈에 이란을 노출시킨 채 사망하였고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와 영국이 각각 이란 북부지역으로의 영토확장과 인도무역로 안전확보를 위해 이란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Fath-Ali Shah는 러시아와는 두 차례의 전쟁 끝에 코카서스 지방을 내주었으며 그의 아들 Mohammad Shah는 1857년 Paris 조약을 통해 Herat 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영국에 할양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국경선의 윤곽이 나타나게 되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후 노골적으로 이란의 무역과 국내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였으나 Qajars 왕조는 이미 재정이 부실하고 지배층이 분열, 타락하여 외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Naser ad Din Shah (1848-1896)가 등극하면서 임명한 Mirza Taqi Khan Amir 재상은 부패한 관료제도 혁신과 조세제도 정비, 이슬람 성직자와 외국세력 퇴치, 대학 수립, 예방접종 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시도하였으나 관료들의 저항과 권력집중을 우려한 왕에 의해 해임된 후 죽임을 당함으로서 이란은 중흥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통상 Amir Kabir라고 불리는 이 宰相은 국가경영에 대한 비젼과 능력을 갖추었던 인물로 이란 역사중 크게 존경받는 인물중의 하나이며 많은 이란인이 그의 중단된 개혁을 아쉬워 하고 있다.


1871년 Mirza Hosain Khan Moshir 재상은 Shah를 설득하여 유럽식 각료제를 도입하고 각종 건설사업에 영국회사를 유치하는 등 재차 개혁정책을 시도하였으나 역시 관료들과 이슬람 성직자들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하고 퇴진하고 말았다. 이후 이란의 서구화는 자체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영국의 압력에 의해 진행, 영국의 경제침탈이 본격화되었다. 그와 더불어 민중의 반 외세 움직임도 발전하여 1890년 영국회사가 담배독점권을 취득함에 따라 당시 지도적인 종교지도자 Mirza Hassan Shirazi가 흡연을 금지하는 fatwa를 포고하자 국민 대다수가 이를 준수하여 결국 영국회사가 독점권을 반납한 일도 있었다. Naser ad din Shah는 말년에 관료의 부패와 민중 탄압이 극에 달하는 가운데 한 청년에 의해 암살되었다.


왕실의 부패와 사치가 극에 달하고 비용충당을 위해 국익을 서양열강에 헐값에 매각하는 행위가 계속되자 상인, 학생,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왕권을 법적으로 제한하려는 제헌 움직임이 분출되었다. 1906년 8월 Muzaffar al Din Shah는 제헌을 약속하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12월에는 왕권을 제약하고 의회에 대한 내각의 책임제 등을 규정한 근대적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를 공표한 5일 후 사망하자 승계한 Mohammad Ali Shah는 헌법을 파기하고 러시아 장교가 지휘하는 군대(코사크 병단)을 시켜 의회를 폭파하고 다수 의원을 구속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헌정복귀를 주장하는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Constitution Revolution). 1909년 7월 제헌파는 수도 테헤란에 입성하여 Shah를 폐위하고 헌정을 복귀하였다. 그러나 內政의 혼돈속에 외세의 침탈은 더욱 가속화되어 1907년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을 兩分하여 자신의 세력권하에 두는 조약을 체결하는 등 본격적인 수탈을 개시하였으며 무기력해진 중앙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1차대전중 이란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영국, 러시아, 터어키군의 전쟁터가 되어 국토가 피폐해졌다. 러시아의 세력이 공산혁명의 와중에 약화되자 영국은 1919년 사실상 이란을 영국의 보호령화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란인의 反英감정은 극에 달하였으며 이를 배경으로 코사크부대 사령관인 Reza Khan이 반란을 주도, 全權을 장악하였다.


나. 팔레비 왕조(1926-1979)
1926년 Reza Shah Pahlavi로 등극한 Reza Khan은 이란의 근대화에 주력하여 과감하고 체계적인 서구화 작업을 주도하였다. 우선 명령지휘체계가 단일화되지 못하고 부족 중심의 형태로 운영되던 군대를 혁신하여 상비군화한 후 치안유지와 부족진압에 이용, 중앙집권을 회복하였으며 통치체제와 관료제를 혁신하였다. 전국적인 초중등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1935년에는 근대적인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근대적인 교육기관은 새로운 관리와 혁신세력의 배양처가 되었으며 경제가 회복됨에 따라 새로운 중산층이 권력의 기반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개혁정책은 이제까지 민중생활에 깊숙이 관여하여 왔던 성직자들의 세속적 권한을 타파하고 국가지배체제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아동들에 대한 코란 교육의 형태로 교육을 사실상 독점하여 왔던 성직자들이 근대적인 교육제도 도입으로 교육에서 배제되었으며 근대적 사법체계는 성직자들의 자의적인 판결 관행을 중지시켰다. 여성해방에도 주력하여 1936년 차도르의 착용을 금지시키고 서양복제를 장려하였다.


Reza Shah는 질서회복, 국가통일, 중앙권력 회복, 국가독립 강화, 경제개발, 교육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기득권 수호에 집착하는 기존세력을 분쇄하고 자신이 의도하는 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적으로는 탄압노선을 선택하였다. 의회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언론을 탄압하였으며 개혁의 수단인 관료도 그 세력이 커지자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근대화로 인해 봉건적인 특권을 박탈당한 이슬람 성직자는 팔레비왕가의 중요한 적대세력이 되었다.


팔레비 왕가와 성직자와의 대립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열쇠중의 하나이다. Reza Khan의 근대화 정책은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혁파하지 못함으로써 대지주 세력과 다수의 농민이 토지를 매개로 그들에게 구속되어 있는 봉건적인 사회구성방식 자체를 변화시키지 못한 채 외견상의 면모만을 一新하는 데 그쳤으며 개혁에 소요되는 비용을 대지주가 아닌 농민들로부터 과도한 조세의 형태로 조달할 수 밖에 없어 개혁정책은 외견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지지 기반이 취약하였다.


소련과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Reza Shah는 독일과의 경제관계를 강화하였으며 2차대전 직전 독일은 영국을 제치고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하였다. 2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이란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침공하여 자신들을 견제한 Reza Shah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권력유지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Reza Shah는 아들 Mohammad Palavi에게 양위하고 권좌에서 물러났으며 영국군에 체포되어 영국, 모리셔스 등을 轉傳하다 1944년 요하네스부르그에서 永眠하였다.


팔레비왕가가 1979년 회교혁명으로 폐지된 이후 이란에서는 Palavi 왕가에 대해 일방적인 매도와 비판만이 성행하고 있으나 적어도 Reza Phalavi는 Qajar 末期의 스러져가는 국권을 회복하고 제국주의의 지속되는 진출 시도를 막아내는 한편 근대국가로서의 면모와 기반을 다진 인물로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아들 팔레비의 즉위 이후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침공하였으며 이후 이란은 연합국의 병참기지화 되었고 강요된 친서방노선 속에 1943년에는 독일에 선전을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영국과 소련은 이란의 유전을 할양받는 등 경제적인 침탈도 심해졌다. 2차대전은 생필품 부족, 물가앙등, 부의 왜곡 등 경제적 어려움을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외국인 혐오증과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배양시켰다. 소련군은 2차대전 종전후에도 가장 늦게 까지 이란에 주둔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충동하였으며 이란 공산당 Tudeh party가 이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반외세 자주의식은 민족주의자 Mohammad Mossadeq가 이끄는 국민전선(National Front)이 약진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으며 그는 특히 유전의 국유화를 주장,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하였다. 1951년 유전국유화에 소극적이던 수상이 암살되고 유전 국유화를 주장하는 요구가 沸騰하자 팔레비는 어쩔수 없이 Mossadeq를 수상에 임명하였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유전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이란 유전에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영국은 자국 기술자를 철수시키고 開戰을 위협하는 한편 이란산 원유 구매 금지, 이란 자산 동결조치를 통해 이란의 자금원을 봉쇄하기 시작하였다.


이란 경제는 이내 외환부족, 석유수입 감소로 곤란을 겪기 시작하였으며 Mossadeq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그의 독재적 성향과 경제적 곤란과 함께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가 정치적 곤경을 타파하기 위해 공산계열인 Tudeh 당과 협조할 기미가 보이자 소련의 영향력이 강화될 것을 우려한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3년 영국과 함께 이란 군부를 사주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였다.


쿠데타 초기에는 실패할 듯 하였으나 수일 후 전세가 역전되어 잠시 외국에 피신하였던 팔레비도 귀국하였고 Mossadeq 수상은 왕정 전복 혐의로 체포된 후 3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잠시 복역후 고향에 가택연금 되었으며 1967년 사망하였다.


Mossadeq 축출후 팔레비는 노골적으로 親美 親英 노선을 견지하였으며 주요 정당을 해산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한편 비밀경찰(SAVAK)을 통해 반대파를 탄압함으로써 강력한 권력 장악에는 성공하였으나 국민대중과 遊離되는 대가를 지불하여야 했다.


팔레비의 친서방노선에 따라 영국, 네덜란드 등 서구 석유회사가 이란 석유개발 이권을 차례로 장악하기 시작하였으며 1955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종용에 따라 소련의 중동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이라크, 터어키와 함께 바그다드 조약을 체결하였고 1959년에는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의 주둔을 약속하는 등 미국의 중동전략을 이행하는 수단으로 종사하게 되었다.


1963년 팔레비는 국가개혁을 기치로 6개항의 개혁조치를 국민투표에 회부하여 所謂 백색혁명을 시작하였다. 주내용은 토지개혁, 근로자에 대한 회사 이윤 분배, 삼림과 목초지의 국유화, 정부소유 공장 매각, 노동자 농민에 유리하게 선거법 개정, 문맹퇴치 사업 종사자에 대한 병역 면제 등이며 아울러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였다. 팔레비는 주요 정당을 해산하고 忠僕으로 하여금 각각 여당과 관제야당을 구성하여 활동케 하였다. 팔레비가 특히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던 토지개혁은 대지주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할하여 주는 것으로 그는 솔선하여 왕실 소유의 토지를 분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슬람 성직자 상당수가 지주였고 그의 개혁정책은 수백년 이어 내려온 성직자의 지배적 지위와 특권을 폐지하는 것이었으므로 성직자 계급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다. 토지 개혁과 여성의 정치참여, 비회교도에 대한 지방공직 개방 등에 반대하는 이슬람 성직계급은 당시 존경받는 성직자였던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백색혁명에 대한 반대운동을 개시하였으며 호메이니옹은 가택연금되었다가 이듬해 터어키(후에 이라크에 정착)로 망명하였다. 1965년에는 당시 수상 Mansur가 호메이니 지지자에 의해 암살되는 등 팔레비 정권과 호메이니와의 대립은 더욱 치열하여졌다.


이슬람 성직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토지개혁은 꾸준히 진행되었고 물가도 안정, 생활 수준도 향상되기 시작하면서 왕정에 대한 반대도 수그러 들기 시작하였다. 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팔레비는 1967년 10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대관식을 거행하였고 197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 유적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하였다.


내정의 안정을 확보한 팔레비는 중동 및 걸프지역의 경찰역을 자임하고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군비 강화에 힘썼으며 美製 군비 구입에 막대한 비용을 소비하였다. 또한 이란이 미국에게 對蘇 감청소 설치를 허가하는 등 양국간의 군사협조 관계는 날로 심화되었으며 미국의 후원 아래 이란은 OPEC 및 중동지역의 지도적인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친미노선을 국민대중은 비굴한 외세 의존으로 이해하였으며 팔레비 왕조의 비민주성, 빈부 격차,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와 함께 국민의 저항의지를 자극하였다. 이러한 반왕주의는 모사데크가 지휘했던 National Front의 분파인 Iran Freedom Movement, 호메이니 지도하의 이슬람 세력, 무장게릴라 단체(Fadayan, Mojahedin) 들의 지도 아래 점차 조직화되어 갔다.


다. 이슬람 공화국(1979- )
1976년 후반부터 이란 경제는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막대한 규모의 예산이 체계적인 개발계획도 없이 팔레비의 과시욕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불요불급한 과시성 건설사업과 군비 강화에 투입되었으며 정부관리의 무능과 부패속에 물가는 앙등하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1978년 당시 이란내에는 45,000명의 미국인(대부분 사업자, 군인, 군속 및 가족)을 비롯 60,000명 가량의 외국인이 거주하였고 의상, 음악, 영화, TV 등을 통해 서구문물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이러한 서구문물의 홍수는 이란의 경건한 이슬람 문화와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자극하였고 지나친 친미노선은 국가의 자존심을 손상하고 있다는 불쾌감을 유발시켰으며 이는 팔레비에 대한 국민적인 反感의 형태로 구체화되어 갔다. 1977년 인권과 도덕을 중시하는 Jimmy Carter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은 그간 默認하여 왔던 팔레비의 인권탄압에 우려를 표명하고 개선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1월 Shah 정부는 호메이니가 영국의 간첩이며 동성연애자라는 음해기사를 親政府紙에 게재하여 국민을 자극시켰으며 Qom시 신학생 데모를 유혈진압하였다. 이에 이스파한市의 바자르가 항의표시로 撤市 하고 시위에 나서자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19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이전의 반정부 운동이 주로 언론, 지식인등에 의해 온건한 방법으로 시도되고 체제전복보다는 法治主義 달성을 목적으로 한 반면 1978년부터의 반정부운동은 주로 이슬람 종교집단에 의해 주도되고 바자르 상인과 도시 노동자가 주요 세력으로 동원되는 한편 왕정 타도의 기치 아래 폭력도 불사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1978년 8월 Abadan시의 시위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Rex Cinema에 화재가 발생, 400여명이 燒死하는 慘劇이 발생하였다. 혁명후 조사에 따르면 狂信徒에 의한 放火로 밝혀졌다는 것이 定說이나 당시에는 누구나 SAVAK의 소행으로 믿었으며 국민감정이 겉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1978년 9월에는 성난 군중들이 테헤란시 jaleh 광장에 운집하자 무차별 발포, 수도에서도 총성이 울리고 유혈극이 시작되었다.


1978년 10월 이라크는 Shah의 압력에 따라 호메이니를 국외로 추방하였으며 그는 프랑스 파리 근교 Neauphle le Chateau에 거주하게 된다. 그의 프랑스 망명은 국제적 언론과의 접촉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이란 반정부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개선된 통신수단을 통해 이란내의 반정부 시위를 보다 효과적으로 지도하게 되었다. 결국 1978년 12월 Shah는 온건계 반대파인 National Front 지도자 Bakhtiar에게 사태 수습을 요청하였으며 그는 팔레비의 출국을 조건으로 수상에 취임하였다. 팔레비는 1979. 1. 16. 이란을 떠남으로서 사실상 민중봉기는 성공을 거두었고 회교 지도자에 의한 신 정부 출범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Bakhtiar는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호메이니는 동 정부가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타도를 지시하였으며 2. 1.에는 열렬한 군중의 환호속에 귀국하였다. 군부마저 호메이니 지지로 돌아서자 Bakhtiar는 2. 12. 망명하여 왕정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팔레비 왕조는 2대 54년만에 단명하고 회교정부에 의해 그 공적이 부인되고 있으나 몇가지 통계가 2 父子의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나타내준다. 1925년부터 1976년간 이란의 GNP는 700배(개인소득은 200배) 성장하였으며 국내자본은 3,400배, 교역량은 1,000배 증가하였고 평균 경제성장율은 20%에 달하였다. 팔레비왕의 집권시기만 국한하여 보면 1962년부터 76년까지 GNP는 13배(40억불에서 53.5억불), 개인소득은 1962년 195불에서 78년 2,400불로 크게 신장하였다. 중세 農奴와 다를 바 없었던 대다수의 농민들이 토지 분배를 통해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종교와 因習의 굴레에서 신음하던 여성이 해방되었다.


1979년의 회교혁명은 이란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봉기하여 지배자를 교체한 사례이며 이란은 이후 왕정이 아닌 회교공화국을 國體로 채택, 이란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의 慣性은 무시할 수 없는 지 공화정임에도 불구하고 최고 지도자가 聖俗의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를 수립하고 말아 3,000년 이란 역사를 통틀어 한차례의 중단도 없이 유지되었던 절대왕정은 명칭만 바뀌었을 뿐 본질상으로는 계속되고 있다.


1979. 2. 5. 호메이니는 Mehdi Bazargan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국가통제는 물론 정부내 관료기구조차 실효적으로 동원할 수 없었으며 호메이니 귀국 후 측근들에 의해 조직된 이슬람 혁명위원회가 사실상 정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호메이니 스스로 칙령을 반포하고 정부 각 기구에 자신의 대표자를 파견하거나 새로운 국가기구를 임의로 설치하는 등 중앙정부와는 별도로 권한을 행사하여 정식 국가기구에 의한 행정은 용이치 않았다.


혁명재판소 각종 혁명위원회 등 혁명기구는 실질적 행정외에도 구정권 인사 및 적대세력을 임의로 구속 처형하였으며 정규군과는 별도의 이슬람혁명수비대(IRGC)가 신설되어 이들의 無所不爲한 행동을 무력으로 뒷받침하였다.


1979년 12월 이슬람 공화정을 표방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팔레비일가가 미국에 도착한 직후인 1979. 11. 4. 분노한 일단의 대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직원들을 인질로 억류하였다. 동 사건 이틀후 바자르간은 사임하고 혁명위원회가 수상직 대행함으로써 혁명기구가 명실상부한 국가기관으로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1980년 1월 신헌법에 의거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어 Bani Sadr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혁명기구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국가기구로 편입시켜 정상의 국가기구에 의한 통치를 회복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성직자 중심의 이란 공화당(IRP) 출신인 수상 Rajai와 대립하여 별다른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Sadr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舊정권 인사에 대한 탄압 및 고문, 재산몰수, 처형이 자의적으로 자행되었으며 호메이니는 대통령의 거듭되는 개입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관하였다. 대통령과 Rajai 수상과의 대립이 격화되자 혁명세력의 지지를 받는 수상은 헤지볼라 등을 동원, 대통령 지지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호메이니의 지지까지 상실한 Sadr는 국회의 탄핵을 받고 失脚하였다. 그는 모자헤딘(MKO) 지도자 Masoud Rajabi와 함께 이란을 탈출, 1981년 7월 파리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국민저항이사회(National Resistance Council)를 결성, 호메이니 축출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드르의 실각은 성직자, 자유주의 성향의 중산층, 급진주의자간의 연합으로 구성된 혁명지도세력 내부에서의 권력투쟁이 성직자의 승리로 마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후 이란은 더욱 교조적인 이슬람 사회화하였으며 사회 전반에 엄격한 이슬람 율법 준수가 강요되었다.


사드르의 실각 이후 성직자 중심의 혁명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세력간의 대립이 격화하여 그해 7월 대통령으로 선출된 Ali Rajai와 수상 Javed Bahonar가 8. 30. 암살되는 등 정부요인에 대한 테러가 빈발하였다. 정부의 극심한 저항세력 단속으로 인해 81년 1년동안 3,000명이 처형, 모자헤딘을 제외한 대부분 저항세력이 해체되었으며 1982년말부터 공포정치는 종료단계에 들어갔다. 81년 12월 호메이니는 혁명기구의 무단 가택침입, 즉결처형, 재산 몰수 등의 불법행동을 금지하였으며 각종 혁명기구의 정부기구화가 진행되었고 중앙정부가 지배권을 행사하는 등 혁명은 초기의 불안단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혁명의 공고화 과정은 1980년 9월 시작된 이라크와의 전쟁을 통해 더욱 굳어지게 된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회교혁명의 여파가 자국에까지 밀려들 것을 우려하였으며 이라크내의 시아파 교도의 무시할 수 없는 규모 및 역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혁명국가 초기의 혁명수출의지에 비추어 볼 때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란이 혁명 직후의 불안정을 채 회복하기 전에 즉 혁명이 공고화되기 전에 선제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주변 아랍국가들의 명시적, 암묵적인 지지 속에 1980년 7월 이란에 대해 전면전을 감행하게 된다. 전쟁의 표면적인 이유는 이란-이라크 양국이 접경하고 있는 Shatt al-Arab 수로의 영유권 다툼이었지만 이라크의 진정한 의도는 잠재적인 위협국가가 취약한 상태일 때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전쟁은 개전후부터 1982년 여름까지는 이라크가 공격의 戰場에서나 국제무대에서나 주도권을 잡고 이란을 압박하였으나 1982년말부터 이란이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혁명의 열기로 무장된 전국민의 지지 속에 반격에 나서면서부터 지리한 소모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란은 국제적인 고립과 특히 미국의 부품 공급이 두절된 상태에서 미제 중심의 무기체계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고 전비 조달을 위해 균형적인 경제 운영을 포기해야 하는 등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혁명 직후 개시된 외적의 침입은 국민의 단결을 유도하여 오히려 혁명을 조기에 공고히 할 수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쟁이 89년 9월 수년간에 걸친 UN 중재끝에 종료되고 모든 부문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호메이니도 사망한 후(1989년 6월) 비로서 이란은 정상적인 국가 운영에 나설 수 있었으며 대외정책, 경제운영, 사회문화 발전 방향 등의 통상적인 국정과제를 두고 집권층내에 견해 차이가 점차 분명하여졌다. 보수파와 개혁파로 통칭되는 두 세력은 1997년 하타미 대통령의 취임과 더불어 대립의 도를 더해가고 있으며 개혁파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무력과 재력, 사법권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파를 압박하고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