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광해군·인조 세 임금 보좌한 이원익 영의정만 6번…조선 500년 3대 명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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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李元翼, 1547~1634년)은 조선 관료 중 최고위 직책인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그것도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한 정권마다 두 번씩 영의정을 수행했다.

왕과 집권 세력이 바뀌는 상황에서도 이원익이 영의정을 여러 차례 지낸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행정력과 실무 능력이 탁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재물을 중시하지 않고 도덕성과 청렴함을 갖췄으며 비교적 합리적 사고를 했다는 점 또한 비결이다.
이원익은 어떤 상황에서도 떳떳하게 소신을 밝히고 왕을 보좌했던 재상 중의 재상이었다.
“조선 전기 황희와 맹사성이 있다면 중기에는 이원익이 있다”고 해도 지나친 얘기가 아닐 터다.

그가 주로 활동한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는 대내외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대외적으로는 왜란과 호란 등 국가적 위기가 발생했다.
이원익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율곡이 발탁한 이원익

▷관료로서 소임을 다해

이원익은 1547년 10월 24일 한양 유동(楡洞) 천달방(오늘날 동숭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全州)로 왕실 후손이다.
4대조 익녕군은 태종 11남이었으며, 증조 수천군, 조부 청기군 표(彪), 부친 함천군 억재(億載) 모두 왕실 종친이다.

모친은 동래 정씨로 감찰 치(緇)의 딸이었다.
조선시대는 왕실의 정치 관여를 막기 위해 종친에 대해서는 관직 진출을 불허했다.
다만 4대가 지나면 출사할 수 있었는데 이원익대에 이르러 관직 진출이 가능했다.

이원익은 1564년 생원 초시에 합격한 후, 1565년 정몽주 7세손인 정추의 딸과 혼인했다.
1569년(선조 2년) 10월 문과별시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원익이 관료의 길에 들어선 얼마 후인 1575년(선조 8년)에는 사림파 내부 분열로 동인과 서인이 대립했다.
당쟁의 시작이다. 동서분당 직전인 1574년 10월 이원익은 지방 관직인 황해도 도사에 임명돼 당쟁에서는 떨어져 있었다.
당시 황해도 도관찰사는 그 유명한 율곡 이이였다.
이이는 바로 이원익의 재주를 알아보고 정무를 맡겼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원익은 젊어서 과거에 올랐는데, 조용히 자신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했다.
성균관 직강으로 있다가 황해 도사가 됐는데, 감사 이이가 그의 재주와 국량이 비범함을 살피고서 감영의 사무를 맡겼다.
이이가 조정으로 돌아와 원익의 재기와 조행(操行)이 쓸 만하다고 말했다.”

이후 이원익은 사간원 정언이 됐고, 이어 지평·형조정랑 등 중앙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
이원익 직책이 오르는 동안에도 당쟁은 더욱 기승을 부렸지만 그는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관료로서 소임을 다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원익은 이조판서이자,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해 선조를 수행하며 피난길에 올랐다.
왜란 직후인 1598년 7월엔 좌의정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영의정에 올랐다.
선조대 후반 북인 주도 정국이 지속되면서 이원익은 사직을 청하고 시흥 금양리(현 광명 소하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에도 관서·관북지방 도체찰사를 맡으면서 틈만 나면 국가의 부름에 응했다.

▶대동법 실시 주역

▷광해군 경제개혁 1등 공신

광해군 즉위와 함께 북인은 정국 중심으로 떠올랐다.
북인 중에서도 정인홍·이이첨 등 대북(大北)이 권력 실세였다.
그런데 광해군은 예상을 깨고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광해군 역시 임진왜란 전후 관료로서 보여준 이원익의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원익은 광해군대뿐 아니라 조선 후기 최고의 세제 개혁으로 평가를 받는 대동법 실시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민생 안정에 최선을 다했다.

대동법을 담당하는 관서로 선혜청을 설치하고 그에 맞는 관원을 배치한 다음,
1결당 쌀 16두를 봄가을로 나눠 8두씩 징수하게 했다.
기존 공물 부담이 가호별 부과 방식이었던 데 비해 토지 결수를 부과 기준으로 한 대동법은
지주 부담을 증가시키는 반면 소농 부담은 줄어들게 했다.

“선혜청을 설치했다.
전에 영의정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사(各司)의 방납인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 십 배, 몇 백 배가 돼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됐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광해군일기, 1608년(광해 즉위년) 5월 7일)

위 기록은 조선시대 가장 혁명적인 세제 개혁 ‘대동법’ 시행의 중심에 이원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경제개혁은 높이 평가받았지만 광해군 초반 정국은 정치적으로 혼란의 시기였다.
임해군 처형과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유폐 등 대북 강경 노선에 반대한 이원익은 병을 핑계 삼아 거듭 영의정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다.
1609년 8월 23차례 사직서를 올린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뒤 1611년 9월 광해군은 이원익을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시켰다.
그의 경험과 노련한 국정운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의정으로서 광해군과 두 번째 동거는 짧았다.
여전히 대북 중심의 정국 속에서 이원익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결국 1612년 4월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이후 이원익은 광해군의 실정을 막아보려 노력했으나, 오히려 그에게 돌아온 건 유배였다.
1615년 6월 홍천에 유배된 후 2년간 유배지에서 보낸 이원익은 거처를 여주 여강에 있는 앙덕리로 옮겼다.
초가 두어 칸에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한 채 거처했고, 처자들은 하루걸러 끼니를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청빈한 삶은 이원익에게 늘 일관적인 모습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이 무너졌다.
대북 핵심 정인홍은 89세 고령임에도 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모든 정책 방향을 광해군 흔적 지우기에 나섰지만, 영의정만은 예외였다.
광해군 때 두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이 인조 시대에도 첫 영의정에 올랐다.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된 날, “왕이 승지를 보내 불러오자,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했다”는
‘인조실록’ 기록을 통해 이원익이 얼마나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정국 안정을 위해 영의정직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원익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판단한 시기에 다시 사직을 청했고,
1625년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6개월도 되지 않아 인조는 다시 그를 불렀다.
선조, 광해군대에 이어 인조 대에도 두 번째 영의정에 오른 것이다.

그가 마지막 영의정으로 재직했던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발생했다.
광해군대 중립외교 대신 친명배금(親明排金)을 앞세운 인조의 외교 정책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강화도로 피난을 가면서 인조는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았다.
고령을 이유로 사양하는 이원익에 대해 인조는
“누워서 장수들을 통솔해도 될 것”이라며 부탁했다.
이미 80세가 넘어도 국가는 여전히 그를 필요로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634년, 향년 88세였다.
마지막까지 그의 삶은 소박했다.

“금천(衿川)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는 기록은
최후까지 청백리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소재한 관감당(觀感堂)은 1630년(인조 8년) 이원익의 초가에 비가 새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인조가 내린 새집이다.
효종대 이곳에 이원익을 배향한 충현서원이 세워졌으며, 서원이 훼철된 후 옛 집터에 새로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이원익 영정을 모신 영우(影宇)를 비롯해 이원익 관련 유물과 고문서 등을 보관한 충현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원익과 같이 국익과 민생만을 위해 역량을 펼치는 참모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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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 / 일러스트 : 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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