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주변의 여인들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 다윗은 사울 왕과 동족으로부터 엄청난 고난을 당했다.  이런 중에도 다윗은 세 여인들을 부인으로 취했다. 

그리고 왕이 된 후 한 여인을 부인으로 맞았다.  물론 이들 이외 다른 부인들이 있었지만(대상3:1-9) 이들이 우리 관심의 대상이다.  

고난 당하는 다윗은 부활 전 참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에게서 고난을 당할 것인가를 잘 예언해 준다.  그러므로 이 여인들이 고난 당하는 다윗을 어떻게 대하였느냐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사울 왕이 하나님에게 결정적으로 불순종한 후 어느 날 선지자로서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이후 미래 언젠가 다윗은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사울 왕의 미움을 사 핍박 받는 원인이 되었다. 

다윗은 작지 않은 기간 동안 사울의 압박을 피해가며 살아야 했다.  가나안 땅에서 살아남기가 너무나 힘들어 다윗은 자신의 몸을 이방인의 왕인 모압 왕에게 한번 그리고 블레셋 왕에게 두 번씩이나 의탁하여야 했다.


다윗의 이런 삶은 개인적 이야기였지만 구약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과 동족(同族)으로부터 고난 당한 다윗은 세례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은 이후 십자가에 죽기까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동족에 의해 고난을 당한 예수님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다윗은 앞으로 올 메시아를 모형(模型: type) 하는 인물이었다.  다윗의 개인 삶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를 이루는 이유였다.  더구나 다윗 왕국은 구약의 모든 예언들과 약속들이 지상적인 요소들로 성취된 실현체로써 하나님 나라였고 구약에 기록된 구속사의 최절정이었다.


이런 고난의 과정에서 다윗 주변의 여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였느냐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는 것은 신약 성도들에게 아주 유익하다.  이로써 기독교 교회는 어떤 것이어야 하며 그리고 성도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신앙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구약 성경에서 얻을 수 있다.



사울 왕의 딸들인 메랍과 미갈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다윗은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울의 군대장관으로서 이스라엘 앞에서 지혜롭게 출입함으로 백성으로부터 큰 사랑과 신임을 얻었다.  이런 다윗을 볼수록 사울은 불안했다(삼상18:8).  이 불안을 없애는 방법은 둘이었다.


하나는 다윗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를 자신의 옆에 항상 두어 감시하고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울은 자신의 장녀인 메랍를 다윗에게 시집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다윗이 더 유명해 질 것을 걱정했을까 사울은 장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냈다(삼상18:18-19절). 

메랍은 다윗의 부인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었지만 그것으로 끝났다.  나중 이스라엘 왕의 첫 부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자신도 모르게 놓친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아버지 사울 왕에 의해 그녀의 운명이 완전히 갈리었다.


이 때문에 메랍은 앞으로 올 메시아와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를 갖지만 구체적으로 진전됨이 없이 그를 떠나 더 이상 알지도 못하고 사는 구원 받지 못한 인류를 상징하는 인물일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고 그 형상이 아들 그리스도라면 모든 인류는 창조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리스도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 이후 수많은 인류는 문화나 전통, 종교와 관습 그리고 속한 가문의 영향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한 체 자신의 삶을 산다. 

신약 시대에도 마찬 가지이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여 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만인에게 알려져 있지만 수많은 인류는 예수님을 멀리한 체 살아가고 있다메랍이 아버지 사울 왕 때문에 다윗을 멀리하며 살아야 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출생 때문에 자신의 역사와 문화에 얽매여 그리스도를 멀리하며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나중 사울 왕은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정말 사랑함을 알았다.  이를 이용하여 사울은 다윗을 또 다시 제거하려 했다.  이로 보아 장녀 메랍은 다윗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를 안 아버지 사울 왕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장녀를 불필요하게 희생시킬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을 것이다.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질 정도였고 다윗도 이를 잘 알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러나 간접적으로 사울은 왕의 사위가 되는 조건을 다윗에게 제시했다.  그 조건은 블레셋 인들의 양피 일백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를 좋게 여긴 다윗은 기약한 날이 차지도 않아 블레셋 인들의 양피 일백을 얻어 사울 왕에게 주었다.


그의 음흉한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한 약속임으로 사울 왕은 할 수 없이 미갈을 다윗에게 주었다.  이렇게 미갈은 공식적으로 다윗의 첫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인연은 진심 어린 사랑이 아버지 사울 왕의 정략에 의해 이용 당한 결과였다.  다윗도 미갈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당시 미갈이 아버지 사울 왕의 다윗에게 대한 미움이나 음흉한 마음을 전혀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윗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잘 생겼고 범사에 지혜롭게 행했다.  그리고 이 때만해도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본격적인 핍박을 받지 않았다.  아버지 사울의 사랑을 받는 신하로 알고 미갈은 부끄럼 없이 다윗을 사랑했고 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핍박이 시작될 때도 미갈은 아버지의 손에 죽지 않도록 다윗을 도와 도망가도록 했다.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야 비로소 미갈은 다윗이 아버지 사울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이후 미갈은 아버지 사울 왕에 의해 강제로 다른 이에게 또 다시 시집을 가야 했다.  미갈은 이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미갈에게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믿음이었다.  지금 고난을 당하는 다윗이 앞으로 언젠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란 믿음이 미갈에게 없었다.  그러나 그의 친오빠인 요나단은 목숨을 걸고 다윗을 보호했다.  이 점에서 미갈은 같은 형제인 요나단과 완전히 달랐다.  결국 미갈은 영광스런 자리를 스스로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나중 미갈은 이스라엘의 왕된 다윗의 왕후가 되는 기회를 다시 얻었다.  유감스럽지만 그 때도 미갈에게는 다윗을 보는 영적 안목이 전혀 없었다 어느 날 다윗은 언약괘를 시온 성에 모시고자 했다.  이를 너무나 기뻐한 다윗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언약괘 앞에서 춤을 추었다.  이를 본 미갈은 남편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않았다고 책 잡으며 흉을 보았다.  이로 인해 그녀는 다윗의 부인이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행을 맞았다.


미갈은 다윗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그의 공식적인 첫 부인이 되었지만 남편 다윗을 전혀 알지도 그리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남편 다윗의 마음이나 생각, 그의 믿음과 그의 삶이 가진 구속사적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한 지혜롭지 못한 여인이었다. 아마 왕의 딸이라는 사실이 주는 자부심과 아버지 사울 왕의 불신앙이 그녀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갈이란 인물은 죽음과 부활로 만왕의 왕이 되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 신자들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히 예수님을 알고 믿은 후 성경적 신앙고백을 한 신자들이 아니다.  겉으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 것 같은데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교회와 교인들이다.  오늘날 이런 교회와 신자들은 우리 주변에 많다.  구속의 은총을 받아 구원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구속의 은총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른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무시 당하는 예수님을 구속주보다는 그냥 위대한 인물로만 알고 따른다.


예수님은 인내하며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지만 이들은 미갈처럼 기독교적이거나 기독교인인 것처럼 보일 뿐 영안(靈眼)이 어두웠다.  결국 스스로의 말과 행동으로 오히려 예수님과 기독교 그리고 교회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무리이다.  이런 교회와 신자들은 믿음이 아닌 이성으로 성경과 기독교를 상식적으로 또는 인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인본주의자들이다.


미갈이 다윗을 구해준 사건이 이를 잘 뒷받침한다.  미갈은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함을 알고 남편인 다윗이 도망가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선한 행동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적 정과 사랑에서 나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윗에 대한 미움을 안 후부터 미갈은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갔다.  미갈은 다윗을 끝까지 따르려 하기보다 일단 아버지의 미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그의 사랑과 보호 아래 계속 남고자 했다.


미갈에게는 혈육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믿음이나 신앙 자세가 결여되었다.  다윗의 삶을 통해 예언된 앞으로 올 메시아를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갈이 다윗의 고난에 기쁘게 참여하려는 노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던 이유였다. 믿음을 위한 고난보다는 세상에서 편하게 살기를 미갈이 더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미갈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자유주의나 현대 신학을 신봉하는 교회와 신자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 나라를 더 사랑하는 기복주의적 기독인들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이들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과 이스르엘 출신 아히노암


마온 사람으로 갈멜 지방에서 크게 목축업을 하는 나발이란 부자가 있었다.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중 어느 날 다윗은 나발의 집에서 양 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때는 마치 추수기와 같아 사람들의 인심은 보통 넉넉했다. 

마침 다윗과 수하들이 그의 목장 주변에 머물러 자연스럽게 나발의 목축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이를 안 다윗은 인심이 넉넉할 것으로 본 나발에게 자기 수하를 보내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단호하게 도움을 거절한 나발은 이렇게 답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삼상25:10)  이로 보아 나발은 다윗이 누구인 줄 알았다. 

다윗이 그 당시 사울 왕에게 핍박을 받고 있음도 알았다.  그를 도와줄 경우 앞으로 사울 왕에게서 어떤 불이익과 어려움을 당할 지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  다윗이 비록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세움을 받아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란 믿음이었다.  불신앙이 그가 다윗을 박대하게 만들었다.


돌아온 수하에게서 안 좋은 소식을 들은 다윗은 분노하여 즉시 군사를 동원해 나발에게로 갔다(삼상25:13).  이 때 소년 중 하나도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에게 급하게 찾아가 나발이 다윗을 모욕했음을 알려주었다.  아비가일은 필요한 물자들을 챙기고 자신이 직접 다윗을 만나려고 재촉해 집을 나갔다.


급히 다윗을 만나기 위해선 정상적인 길을 갈 수 없었다.  아비가일은 산의 유벽한 곳을 택해 나귀를 타고 서둘러 내려 갔다(삼상25:20).  남편과 집안을 구하고자 하는 다급한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나중 알려졌지만 다윗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방지하려는 배려에서였다. 

이 때 그는 반대 편에서 마주 내려오는 다윗을 만났다.  얼른 나귀에서 내려 다윗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 남편의 죄를 자신에게 돌리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사정했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25:26)  이런 놀라운 말도 했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삼상25:28-31)


그의 언급은 내용상 넷으로 나누어진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될 것이다. 

이 덕분에 다윗의 생명은 어디서나 하나님에 의해 늘 그리고 틀림없이 보호를 받을 것이다. 

반면 그의 대적은 그의 손에 반드시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먼 훗날 후회할 일을 그 전에 저지르면 절대로 안 된다.


아비가일은 정말 놀랍고도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시골 궁벽한 곳에 살았지만 고난 당한 다윗이 누구이며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믿고 있었다.  아비가일은 이스라엘과 다윗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인간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이방 나라와 다른 하나님 나라를 가나안 땅에 세우도록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


그곳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법에 근거를 둔 통치가 실현될 곳으로 인간의 탐심에서 나오는 폭력은 절대로 금물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기까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인내로 통치하여야 했다.  하나님의 이런 통치 실현을 위해 다윗은 부름을 받았다.  이를 위해 불필요한 살인 행위는 금해야 했다.

한 마디로 벽촌의 촌부였지만 아비가일은 이스라엘의 존재와 다윗의 부름이 갖는 구속사적인 목적과 의미를 정확히 알았다. 소문으로 들려오는 사울과 다윗에 관한 여러 가지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구속사적인 의미를 깨닫고 그 당시 의인인 아비가일은 다윗이 왕 되기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다윗에 관해 소문이나 소식을 동일하게 들었다. 그 소식은 아비가일에게는 믿음을 키워주는 복된 것이었다면 그의 남편 나발에게는 주인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악한 종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믿음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 냈다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이렇게 답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삼상25:32-34)


집안에 닥칠 재앙을 미리 막은 아비가일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 나발의 집은 왕의 잔치 집 같았다.  술에 취해 있는 남편 나발에게 다소간 아무 말도 안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아비가일은 기다렸다.  그리고 아침 술에서 깨자 남편 나발에게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의 미련함과 그로 인해 닥칠지 모른 집안의 불행을 자세히 알려주어 앞으로 다윗에게 같은 잘못과 실수를 하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은 들은 나발은 그만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고 열흘 동안 그 상태로 있다가 죽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를 치매 죽었다고 기록한다(삼상25:38).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이다.  다윗을 박대했다고 하나님이 그를 죽이다니……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올 메시아를 모형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박대한 것은 그를 세우고 보낸 하나님과 그가 모형 하는 참 그리스도를 무시한 것이다.  이것은 불신잉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윗을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 했다.  이 점에서 나발은 잘못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자신의 영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 나발 사건을 잘 인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다윗은 앞으로 올 메시아를 모형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목회자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간음죄를 범한 목회자가 다윗의 간음 사건을 인용하며 자신의 허물을 벗고자 하는데 이도 하나님 앞에 아주 큰 잘못이다.  다윗과 오늘날 목회자 사이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특별히 보냄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를 무시하는 것은 그를 보낸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란 존재는 복과 화 그리고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이다.  다윗 시대 이런 갈림길은 위에서 언급한 두 인물에게서 잘 나타난다.  다윗을 박대한 나발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지만 그의 부인 아비가일은 나중 다윗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결국 왕후가 되었다.  이를 가른 것은 다윗이란 존재를 어떤 믿음의 눈으로 보느냐 여부에 있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신약 시대에도 이것은 동일하다.


아비가일의 훌륭한 점은 또 있다.  나발의 죽음을 안 다윗은 그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고자 사람을 보내 알렸다.  이 때 그는 지체 없이 다윗을 따라갔다.  남편의 재산을 상속 받아 나머지 삶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고난이 언제 끝날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저 없이 다윗을 따랐다(삼상25:40-42).  그 후 마지막까지 다윗과 함께 고난을 당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기꺼이 동참한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비가일이란 인물은 불신 세계에 살면서도 복음에 귀가 열린 신자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 차이를 깊이 깨닫고 불신자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신자들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신앙 고백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그러므로 수복강령(壽福强寧) 같은 세상의 복()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더 기뻐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이들은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른다.  세상 속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아비가일의 뒤를 이어 유다 지파의 한 성읍인 이스르엘 출신 아히노암도 다윗의 부인이 되었다.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은 대부분 유다 지파에 속했다.  이들 중에 섞인 젊은 여인이었을 것이다.  아비가일이 기혼자로서 다윗의 부인이 되었다면 아히노암은 미혼자로서 부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거부(巨富)의 아내였다면 아히노암은 그저 무명(無名)의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아히노암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너무나 단순하고 지극히 제한적이다.


두 여인 모두 다윗에게 평생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고난을 당하는 특수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이런 때 부유한 출신인 아비가일보다는 보통 사람의 삶을 산 보다 젊고 강한 아히노암이 다윗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힘든 세월을 살 때일수록 그런 여인이 다윗에게 더 큰 힘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가 성경은 항상 아히노암을 아비가일보다 앞세워 기록했고 아히노암이 다윗에게 첫 아들 암논을 낳아 주는 영광을 얻었다.  아비가일은 먼저 부인이 되었지만 다윗에게 차남 다니엘(길르압으로도 불림)을 낳아 주었다.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은 모두 헌신적이며 진실한 신자들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전자는 어릴 때부터 보통 사람의 삶에 적응하며 살아 신자로서도 이미 연단 받은 성도처럼 살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부유한 출신이었다.  아마 죽은 남편 나발의 재산으로 다윗을 잘 도와주었을 것이다.  둘 다 진실한 성도임에 분명하지만 환경에 따라 헌신의 정도와 내용에서 둘 사이 차이가 날 수 있다.  이 두 여인 모두 다윗에게 필요했듯이 교회나 하나님 나라도 이 두 종류의 헌신적인 성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들이 낳은 아들들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아히노암의 아들 암논은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의 여동생이며 자신의 이복 동생인 다말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삼하13).  이로 인해 다윗과 그 가문은 자식들 간 피를 흘리는 불행과 비극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아비가일의 아들 다니엘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의 평생 아버지 다윗에게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암논은 다윗의 첫째 왕자로서 자신의 영광스런 신분에 걸맞은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다니엘은 지나치게 소극적일 정도로 조신하게 처신한 왕자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차라리 조용한 다니엘이 활동적으로 보이지만 자제력이 부족한 암논보다 더 훌륭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드러났다.


부모들의 훌륭한 신앙 삶으로 얻어진 복된 결과가 후손들에게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가르침이 숨어 있다.  달리 말한다면 부모의 신앙이 자식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윗을 고난 때부터 따랐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이들에게 평생 남아 영적 성장의 걸림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헷 사람 우리아의 부인 밧세바


밧세바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불의하게 자신의 부인으로 취한 여인이었다(삼하11-12).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아비가일과 아히노암은 다윗이 왕 되기 전 고난 중 변함없이 함께 한 여인들이다. 

이 점에서 이 여인들과 비교한다면 밧세바가 어떤 여인인지  짐작된다.


그러나 나중 밧세바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외적 미모가 죄의 유혹을 일으켰고 그 결과 불행과 비극을 당했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정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은총의 위대성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밧세바는 헌신적인 신앙인으로 날마다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아비가일이나 아히노암이 밧세바보다 성경에 더 많이 기록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밧세바의 기록은 자랑스럽지 않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까지 기록된다.  사무엘하 11장부터 열왕기상 2장까지 밧세바의 삶은 성경에 계속 기록된다.  이와 비교한다면 그렇게 훌륭하고 지혜로운 여인인 아비가일은 사무엘상 25장 한 장에만 그리고 아히노암은 아비가일의 기록 중 겨우 한 줄(삼상25:43)만 언급되었다.


상급을 공평하게 줄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이들을 대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어떻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했는가를 기록한다.  주인공 이외 다른 인물들을 조연(助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연들도 하나님의 구속사에 공헌을 한다.  조연들은 이 공헌에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한다.


조연들은 맡은 사역이 있고 그에 따른 직분이 있다.  사역이나 직분에 따라 은사도 다 달리 주어진다.  이 때문에 은사의 크기를 서로 비교하며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으로 조연들을 평가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 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느 누가 더 자신의 역할에 충성했는가가 더 중요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평가하는 기준일 것이다.  어떤 충성을 하였느냐에 따라 상급이 결정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밧세바가 종국적으로 자신의 외적 미모 덕분에 다윗의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여인들과는 완전히 다르고 영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참 저차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세바는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을 낳는 영광을 얻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아 정말 하나님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밧세바 때문에 그의 남편이며 다윗에게 충성한 신하이며 용맹스런 장군이었던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물론 다윗이 꾸민 음모의 결과였다.  다윗은 참으로 비열하고 몰인정하며 가증스런 왕으로 하나님 앞에 드러났다.  그가 비록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였지만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가 모형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 같은 성군이라도 일단 죄를 범한다면 연이어 죄를 짓게 된다.  죄는 죄를 또 낳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했다.


인간적 관점에서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우리아는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스러운 종의 삶을 살았다(삼하11).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얻었을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성군 다윗이 속으로부터 부패한 인간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성군 다윗도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결국 밧세바와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이 사실은 그녀에게서 솔로몬이 출생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증명된다.  불의한 관계로부터 출발된 다윗과 밧세바의 인연은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불의하고 가증스러워 죄와 죄악 자체였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이런 불완전한 다윗과 영원한 왕국 언약을 이미 맺었다는 것이다(삼하7).


이 언약 체결 덕분에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영광과 명예와 존귀를 얻은 다윗(7:18-19)은 그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아의 부인인 밧세바와 불의한 성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불능했다.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하나님 나라 다윗 왕국을 계속 이어나갈 후손을 하나님은 주어야 했다(삼하7:12-16).


하나님은 그 후손을 밧세바를 통해 다윗에게 주었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을 잃은 다윗은 밧세바를 위로할 겸 동침했다.  이로 인해 솔로몬이 출생했다.  불의한 여인에게 솔로몬을 낳을 영광을 하나님이 준 셈이다.  나단의 책망과 다윗의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로 밧세바가 낳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불행한 사건들을 통해 다윗과 밧세바는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 각오와 결단를 내렸다.  하나님도 용서한 죄를 영원히 잊어야 했다.  이의 증거로 하나님은 이들에게서 솔로몬을 낳게 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라는 존재는 이미 용서한 죄를 하나님도 영원히 잊으며,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어떤 불의로도 막을 수 없고, 죄를 지을수록 속죄의 은총도 그에 비례하여 더 풍성해지며,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을 극복하며 자신의 일을 반드시 실현시키고 그리고 앞으로 올 메시아도 인간 가운데 죄인처럼 출생할 것을 자세히 증언해 준다.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로움을 스스로 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구속사를 그렇게 진행시킴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영원한 근원이기 때문이다(1:4).


그렇다면 밧세바는 구제불능의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밧세바는 다윗과의 관계에서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용서함을 받고 다윗의 부인으로 남았다.  그의 삶의 종점에서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 잘못과 실수를 했지만(왕상2:13-25) 밧세바는 다윗의 부인이며 솔로몬의 모친으로서 영광을 계속 누렸다.


구원 받고 난 이후 성도들도 마지막까지 성결된 삶을 하나님 앞에 살지 못한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잘못과 실수를 범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잘못과 실수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는 아니란 사실이다(요일5:17).  사망에 이르는 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구세주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는 이런 죄를 짓지 못한다(요일5:18).  그러므로 이런 잘못 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에게 속죄를 구한다면 하나님의 은총 안에 계속 머물 수 있다(요일1:8-9).  설사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위해 우리들을 고쳐 사용하시거나 또는 우리들의 잘못이 자신의 구속사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도록 별도로 일하신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자신의 구속사를 전적으로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은총 덕분에 성도는 하나님 앞에 계속 설 수 있다.  이렇게 밧세바는 아비가일이나 아히노암과는 다른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 론


왕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중 다윗은 자신의 아들들 사이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불행한 사건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해야 했다.  이것들은 그가 저지른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으로 인해 선언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였다(삼하12:10-12).  이들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었다.


그 반역이 너무나 대단하고 급하여 다윗은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나 시골로 피신하여야 했다.  만인의 존경을 받았던 다윗이 그것도 아들의 반역으로 하루 아침에 보잘것없는 존재로 추락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여 주변 신하들 중 그를 떠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평소 그에게 반감(反感)을 가졌지만 감추고 살았던 자들이 이 때를 이용하여 반란에 동참하거나 심지어 그를 저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들 가운데 충성스런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은 압살롬의 반역 중에서도 다윗에게 변함 없음을 믿고 다윗을 끝까지 따랐다. 


마침내 다윗이 모든 것들이 평정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이 때 자신의 고난 중 끝까지 자신을 선대한 신하들과 그렇지 못한 신하들을 나누어 다윗은 상급을 주었다.  물론 그를 따르지 않은 신하들은 불명예를 당해야 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일들이 일어난다. 


예수님은 대속 죽음과 부활로 만인의 구세주와 왕이 되었다.  이 사실은 복음으로 만인에게 알려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로 따랐다.  이런 긍정적인 현상은 기독교의 부흥기에 흔히 보여진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와 예수님이 세상의 핍박과 멸시와 천대를 받을 때도 왕왕 있다.


이 때 기독교 교회 안에 함께 신앙 삶을 살았던 신자들 중 진실한 자와 거짓된 자, 둘로 나뉘며 드러난다.  믿음이 약하거나 거짓이었던 신자들은 예수님과 교회를 버리고 떠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진실한 믿음을 유지한 성도는 인내로 버티며 교회에 남는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낸다.  그 기준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 자세이다.  구약 시대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냈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된 여인들은 바로 교회에 적을 둔 신자들의 다양성을 잘 설명해 준다.  양적 교회 성장론자들은 신앙의 질에 관심을 두지 않고 위에 언급된 모든 여인들을 신자들로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근거를 두고 어떤 믿음을 보이느냐에 따라 진실한 신자와 거짓 신자는 나눈다.


예수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기름을 잘 준비한 다섯 처녀와 그렇지 못한 다섯 처녀로 나누어 가르쳤다(25).  그리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신자들의 종류가 다양함이 잘 설명된다(13).  그러나 구약 성경에선 다윗이란 인물을 통해 그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설명된다.  신약 성경에서 비유를 통해 설명된 가르침이 구약 성경에선 역사적 사례들로 그림처럼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구약 성경이 재미있고 교훈을 주는 이야기처럼 해석되어선 안 되는 이유이다.  인간의 관점이 아닌 구속사적인 관점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약 성경의 인물들과 그들의 삶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예컨대 모압 여인 룻은 부모 효도에 대한 교훈을 위해 해석하고 설교하지만 그의 효는 근본적으로 성경적인 신앙에 근거를 둔 결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본 글의 내용으로 살핀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는 아마 미갈 같은 신자들로 가득한 것 같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 같은데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고 그리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예수님을 섬기는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수님과 그의 삶을 재해석하여 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 이외 다른 개혁 방법은 없다.  즉 복음을 성경대로 가르치는 것 이외 다른 개혁 방법은 없다.  그렇게 가르치면 미갈 같은 신자들은 저절로 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아비가일이나 아히노암 같은 신자들이 서서히 모여들면서 교회는 영적 생기를 되찾는다.  물론 이들이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사는 밧세바 같은 신자들로 자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은 없다.


이런 개혁은 언제나 한국 교회에 가능할까?  분명한 것은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점점 짙어지는 어두움이 오히려 우리의 소망의 근거인가?  잠시 기도 이외 다른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마라나타!!!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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