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이 입증하는 성경의 진정성


사해문서
 
쿰란 근처에 있는 11개의 동굴에서는 수많은 문서가 나왔는데,
이것들은 모두 BC 2세기 중엽부터 AD 68년까지 쿰란에서 번성했던 유대교 종파인 에세네파문서들 가운데 일부였다.
 
이 문서들은 BC 3세기 중엽부터 AD 68년까지 만들어졌지만, BC 1세기와 AD 1세기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다.
 
<참고 - 국정교과서 및 백과사전>
우리가 거의 의심치 않고 믿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 중 삼국시대에 관한 최초의 문서가 언제 쓰여진 것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BC.1세기(100~0)->예수태어난날..(기준)->AD.1세기(0~100) ... 21세기(2001~2100)

우리나라 : 철기의 보급 °시기-기원전 4세기경, 기원전 1세기경부터 널리 보급됨   
                                °유물-이전의 목기나 석기도사용됨/철제농기구(삽,괭이,낫)
                                         무기(창,칼,화살촉등) 공구(끌,톱,자귀등) 토기... 
고구려 : BC 37년 건국, 백제 : BC 18년 건국, 신라 : BC 57년 사로국에서 시작
삼국시대 역사자료 : 삼국사기 - 고려 인종 23(1145)년에 김부식 등 편찬  (12세기)
삼국유사 - 고려 충렬왕 때 일연(1206∼1289)이 쓴 책 (13세기)
삼국사절요 - 조선 성종 때 1476년 12월에 완성 (15세기)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필사본이 성서의 일부이다.
쿰란의 제1동굴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문서들로는 〈이사야〉 두루마리, 〈공동체 규율 Rule of the Community〉(에세네파의 가르침과 규율에 대한 교범)·
〈어둠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의 전쟁 The War of the Sons of Light Against the Sons of Darkness〉(전쟁 두루마리), 감사시편 두루마리, 〈하바꾹〉 주석, 보존 상태가 좋은 7개의 두루마리 등이 있다.
 
제2동굴에서 발굴된 것은 두루마리들의 단편들이었다.
제3동굴에서는 구리 두루마리가 나왔는데, 이것은 성전 보물과 그 보물이 숨겨져 있는 장소를 적은 목록으로서 그 진위는 의심스럽다.
제4동굴은 에세네파 문헌의 주요보관소였는데, 여기서 발굴된 약 400권의 필사본은 대체로 보존 상태가 나빴고, 대부분 에세네파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약 100권의 필사본은 성서를 옮겨 쓴 것인데, 〈에스더〉서만 빼고 히브리어 구약성서 전체를 필사한 것이다.
제5~10동굴에서 발굴된 사본들은 제2·3동굴과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제11동굴에서는 정경과 외경의 시편들과 알려지지 않은 시편들이 실린 커다란 두루마리를 비롯하여 보존 상태가 좋은 몇몇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는 고대 히브리어로 쓴 〈레위기〉 사본도 있다.
1967년 베두인족에게 사들인 성전 두루마리는 10년쯤 전에 제11동굴에서 옮겨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이 두루마리의 66개의 난에는 이상적인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다.

 
쿰란에서 남쪽으로 18㎞ 떨어진 2번째 유적인 와디 알무라바에서는 바르 코크바(132~135년 유대 민족이 로마에 대항하여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앞장선 인물)의 군대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남긴 문헌들이 발표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바르 코크바가 쓴 2통의 편지, 히브리어·아람어·
그리스어로 쓴 율법서, 1, 2세기에 쓴 성서의 단편들, 놀랄 만큼 잘 보존되어 있는 12소예언서 두루마리 등을 발굴했는데,
이 두루마리는 사실상 전통적인 성서의 원문과 똑같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다윗의 실존
다윗은 현재까지 진행된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실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인물로 타임지는 전했다.

지난 93년 헤브루 대학의 연구원인 아브라함 바이런이 『텔 단이라는 곳에서 「다윗의 집」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문을 발견했다』고 발표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프랑스 학자 앙드레 르메르가 『지난 86년 디본지역에서 발견된 현무암에 「다윗의 집」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힘에 따라 「다윗이 실존인물이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게 됐다.


또한 이 두가지 증거품은 모두 다윗의 통치 기간으로부터 1세기후인 기원전 9세기경의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스라엘을 정복한 이웃 나라가 정복사실을 만방에 알리고 있는 내용을 각각 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참고> 다윗 재위기간 B.C 1000~961년에 중국은 서주 왕조, 우리나라는 청동기 문화 시작

 

 

1. 우르는 실존했던 지명이다

 

 

 1.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1794~1863년)
미국의 목사이며 언어학자인 로빈슨은 성서의 문자적 정확성을 입증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지역에 위치한,미확인된 성서 속의 여러 지명들을 지리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텔 브엘세바'.
네게브 광야를 헤맨 끝에 로빈슨 일행은 `비르 에 세바'라 불리는 조그만 베두인 천막촌에 도착했다. 이곳의 아랍어 지명을 토대로 그는 이곳이 다름아닌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도시인 성서 속의 `브엘세바'임을 밝혔다. 1969년 이후 발굴을 통해 솔로몬시대 요새로 건설된 텔 브엘세바의 모습이 밝혀졌다.

3. 로빈슨의 아치(1850년대)
1838년 예루살렘의 성전 터의 축대 부분을 관찰하던 로빈슨은 지진으로 인해 튀어나왔다는 돌출부를 성전 부속건물로 통하는 통로를 받치기 위한 아치의 일부라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밝혔다.

4.로빈슨의 아치(현재).



이렇게 묻혀 있는 팔레스타인 성서 지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당대 최고의 비교언어학적인 방법론으로 무장한 에드워드 로빈슨이란

미국인 목사에 의해 1838년 최초로 시도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성지를 순례했는데,

   카이로를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 등정한 후 요단강 건너편으로 향한 다음 여리고성으로 들어 갔습니다.

로빈슨은 수주일동안 네게브 광야를 헤맨 끝에 조그만 샘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르 에-세바라 불리는 베두인 마을에서

그곳이 바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도시였던 브엘사를 발견하였습니다.


로빈슨은 고대의 지명은 비록 그 지방 주민과 언어가
 바뀌더라도  그 발음은 계속 보존된다고 믿어

현지의 아람어지명을 참고로 성경의 도시들을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로빈슨은 하루 종일 길 없는 외딴 곳에 위치한 유적지들을 당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탐사하였습니다.


1838년 로빈슨은 예루살렘 북쪽의 유적지들을 탐사하여
아나타를 예레미아의 고향인 아나돗으로, 제바를 게바로,
묵크마스를 믹마스로, 엘-지브를 기브온으로, 그리고 베이틴을 야곱이 제단을 쌓았던 벧엘로 정확하게 일치시켰습니다
.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라는 지역이 있었다."
이런 말이 성경에는 기원전 1400년 전, 즉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 11장 31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하여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갈대아인의 땅 우르라는 곳에 살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성경의 이 말씀을 한낱 전설과 같이 우습게 알고 수천년을 지나 왔습니다.

근대까지만해도 아무도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지금의 이라크 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짐으로써

정말 갈대아 우르지방이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위에 지도가 나와 있는데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고, 티그리스 강이 그 위로 흐르고 있는 그 사이에 비옥한 땅이 주욱 유지되고,

지중해 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비옥한 초생달 같은 모양이 유지가 되지요.

메소(사이) 포타미아(강)는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날 평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끝 부분, 바로 이 곳이 우르지역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고고학자들이 1800년대 중반부터 많은 고생을 하며 연구를 하였습니다.

왼쪽 그림은 갈대아 우르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실제모습입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아주 정밀한 수로를 만들어서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점토판에 완벽한 지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1929년 3월 17일자 뉴욕 타임스 에는 "우르의 발견, 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이라는 머릿기사가 실렸는데,

이는 대공황의 늪에서 실의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에게 성서적 복음주의의 희망을 주었습니다.
새로운 '아브라함'이란 제목이 갖는 의미는 아브라함이

유목민일 뿐만이 아니라 당대 최고로 발달된 도시문명의 법과문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박물관에서 고고학 연구를 '울리'라는 고고학자입니다.


그는 대영박물관과 펜실베니아 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았습니다.

위 사진의 B.C.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라트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것으로

꼭대기에 있는 난나(nanna) 신전의 받침대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우르 제3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도시의 수호신 난나를
모신 신전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도시인 우르에서 믿음이 있던 아브라함을 광야로 불러낸 것입니다.

 

주택단지들을 파 들어가 보다가 고고학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사 책에 보면 인류 문명의 최초의 문명으로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메르문명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 굉장한 주거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상수도와 하수도를 만들었습니다.

PVC나 스텐파이프는 아니고요,


도자기를 구워 상하수도 시설을 한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그저 원숭이 비슷한 존재들이 아니고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차도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이 이제 몇 년 되었습니까?

그런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르 지역에 살던 수메르 인들이 섬기던 신들중에 가장 대표적인 신이 '이난나' 여신인데, 이것이 이난나 여신의 상입니다.

머리에 있는 이것은 뿔이 아니라 '달'(초생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여신이 흥분도 하고 땀도 흘리고 하면, 비도 많이 오고 농사도 잘 된다고 생각하여, 봄철에 이난나를 숭배하는 기간동안 모든 여성이 남성들과의 자유로운 성교를 즐길 수 있게 하였으며, 신전은 공공연한 난교의 장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이난나 여신이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스다롯 여신으로 불렸고,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들어가면서 이쉬타르 여신이 되었으며, 그리이스로 가서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되었으며, 결국 로마로 가서 비너스되었습니다.


그 신이 다 그 신이고, 그 원조가 이난나 여신입니다.

의학적으로 성병을 베네리얼 디지즈(Venereal disease, VD)라 부르는데요, 이 베네리얼이란 말은 비너스의 형용사로서 비너스 여신으로부터 유래된 말입니다.


비너스 여신이 관련된 병이라는 것이지요.

비너스 신전의 모든 성직자들은 여자들인데, 이 여사제들의 성은 완전개방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입니다. 


쐐기라는 것은 곤충 중의 풀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고정시킬 때 박는 쐐기(Wedge)를 말합니다. 

한자로는 설형문자라고 부릅니다. 

 

보시는바와 같이 이런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요,

그 어순( 語順)이 서양이나 중동 사람 말이 아닌, 한국어와 제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문장이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이고요, --'가', --'을' 등의 토시를 붙여서 말을 구성하며,

'밭'을 '받'이라고 하고, '길'을 '길'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집에서는 '아바'라 하고, 남에게 말할때는

'아비'라 하며, 높은 분을 높여 부를 때는 이름뒤에 '님'자를 붙입니다.


'하늘'을 '아눌'이라고 하고 하늘을 높인 말 즉 '하늘님'을 '아눌님', 혹은 '아누님'이라고 하지요.

그러한 말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귀하게 숭상하던 꽃이 'Rose of Sharon' 즉, '샤론의 장미'입니다.

예수님의 별명도 '샤론의 장미'이지요. 찬송가 89장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 꽃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 인데요, 그것은 바로 무궁화 꽃의 학명과 동일합니다.


그 옛날 고토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바벨탑 사건 이후에 동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유래의 언어와 자취와 그들이 사랑한 꽃을 가져와 극동에 위치한 우리나라까지 대장정을 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메르인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 놀라운 사실중의 하나는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라는 청년이 평생을 바쳐 연구하여 밝힌 '길가메시 에픽' 관한 기록입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의 기록에 노아의 홍수 사건 기록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이전에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메르라는 말의 어원은 '세메르'에서 왔는데, '셈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아들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 '셈의 나라'라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만 순종을 하여, 하란까지만 가서 살다가 늙어서, 거기서 죽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가지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고 하셨지요.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해서(우르를 떠날때는 60세 가량) 그 하란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75세 때에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간 것이지요.


그래서 갈대아 우르도 중요하지만 이 하란이라는 지역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근래에 와서 이 하란 지역의 고고학적 발견이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란 지역은 지금의 시리아땅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결과 과거에 매우 발달된 문명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수메르보다 몇 백년 앞선 문명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그 문명을 세웠던 나라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에블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에블라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발굴된 점토판에 새겨진 기록을 분석한 결과 에블라 문명을 세운 왕의 이름이 '에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믿던 신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그 이름은 '야'였습니다.

아마도 '야훼'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소돔과 고모라

 

성경 속에서만 있는 줄 알았던 소돔의 멸망이야기 성서 고고학에 의해 진실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중동지역에 있는 사해(Dead Sea)는 물이 증발해 소금기만
남아 있는 곳으로 소돔지역으로 의심되었던 곳입니다.
1920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사해 북동쪽 고대 유적지인
툴레이랏 엘-기술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수천년 전에 건설된 신전과 형형색색의 벽화가 발굴되었습니다. 
 

 

 

 사해 해변

 사해 소금기둥



1965년에는 미국의 고고학자들이 사해 동편에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밥 에드라'라고 불리는 고대도시를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은 서기 전 2000년경에 수천명이 거주하던 대도시임이 밝혀졌습니다.


고대 사해 변 싯딤 골짜기에는 5개의 도시가 있었는데, 소돔과 고모라는 그 중에 있었습니다.
창세기 14장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다섯 왕이 싯딤 골짜기의 다섯 왕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해 아드마, 스보임, 소알과 같은 지명이 등장합니다.

1973년 이 지역 탐사에서 서기 전 3000년경에 설립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다섯 도시들이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밥 에드라, 누메이라, 사피, 페이파, 카나지르로 이름 붙혀졌습니다.

다섯 도시의 특징은 모두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변에 건설되었다는 점입니다.



3. 니므롯

 

고대 근동에 최고의 영웅이던 니므롯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창세기 10장에 상세히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함의 아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사냥꾼'이란 히브리어 뜻으로 볼 때 '전쟁을 즐기는 사냥꾼', '사람을 죽이는 사냥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니므롯'이라는 이름의 뜻은 '님(높은 사람)' +

'마랏(반역한다, 대항한다)'으로서 높은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반역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그(니므롯)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도시라)을 건축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아갔다'는 말은 쳐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앗수르는 셈의 자손들로 큰 민족이었으나, 니므롯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그 결과 동방으로 이주해서, 아사달에 도착해서 홍익인간의 기치를 내건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동방으로 이주할 때 앗수르족속만 온 것은 아니고, 야벳족속의 일부와 함족속의 일부도 함께 이주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 티그리스강 주변의 비옥한 땅에 고대도시 니므롯도 있었고, 바빌로니아의 다른 고대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위 오른쪽 그림이 티그리스 강입니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고 있지요.
강 가에 자리잡은 이 도시가 바로 니므롯 성입니다.
 

 

 


 

위 왼쪽은 그 니므롯 지역의 발굴현장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와서 발굴하고 있는 광경입니다.

이렇게 니므롯 지역을 발굴한 결과 수많은 장식들로 뒤덮힌 찬란한 고대도시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위 왼쪽 그림은 고대에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니므롯의 도성을 복원한 복원도입니다.

비록 바벨탑은 무너졌지만, 니므롯은 대제국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니므롯이 죽은 후 가족들에 의해서 니므롯이 마르둑 신으로 화했다고 조작되었습니다.


고대 갈대아인들이 세운 모든 나라의 왕들은 이 니므롯의 화신인 마르둑 신에게 인정을 받아야 권위가 인정되었습니다.

위 오른쪽 그림은 앗시리아의 살만엣셀 왕의 모습인데요, 마르둑 신에게 인정을 받고 왕권을 받는 모습입니다.

결국 니므롯은 사후에도 계속 갈대아지역을 통치한 것입니다.
 


 

위 왼쪽 그림은 니므롯 지역의 신전 입구에서 발견된 거대한 인면수신의 조각입니다.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현재 이 조각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4. 헷족속

 

성경에 나오는 헷족속(힛타이트)에 관한 고고학적 발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의 막벨라에 있는 헷족속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던 굴을 샀습니다.


거기에 자기 아내를 묻고, 후에는 자기도 묻히고 아들 이삭과 후손들이 쓸 무덤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밭을 아브라함에게 팔았던 사람들이 바로 헷족속이라고 성경에 여러번 나옵니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이 힛타이트 족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100여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 수천년동안 사람들은 힛타이트 족속이라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때문에 성경이 허무맹랑한 책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힛타이트 족속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헷족속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됨에 따라서 힛타이트 문명권

규명되었는데, 위 그림를 보면 터키 지도가 있습니다.

붉은 을 칠해놓은 이곳이 힛타이트의 중심부 입니다.

힛타이트의 수도는 '핫투사'인데 터키의 현재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핫투사를 수도로 해서 터키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비옥한 초생달) 전체를 지배하고 심지어는

이집트까지도 점령하여 대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위 왼편 그림은 지금의 터키 땅에 있는 힛타이트의 수도 핫투사의 왕궁터입니다.

위 오른편 그림은 힛타이트인들의 신전의 모습입니다.

거대한 돌기둥에 돌사자 두 마리가 보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거대한 청동으로 된 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신전의 규모도 대단합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힛타이트인들이 짧은 시간동안에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하게 된 비결이 무엇인지를 고고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바로 이것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힛타이트의 전차입니다.

속도전에 능했고, 한 사람은 말을 몰고 한 사람은 활을 쏘고 하니까 일반 민족들이 그 속도에 도저히 방어를 할 수가 있어서 힛타이트인들이 중동지역을 장악하게 된 것이지요.


힛타이트의 전차가 바로 그들 나라의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힛타이트의 전차가 얼마나 감명이 깊었는가 하니, 이것은 이집트의 왕들이 세운 비석입니다.

이집트의 역사 자랑을 잔뜩 해 놓고는 힛타이트의 전차를 그려놓았습니다.

힛타이트 군이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이집트를 침략해 왔으나 그것을 막아냈다 하는 뜻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는 이집트가 패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의 기록만 이렇지 고고학적 조사결과 이집트가 힛타이트에 점령되어 조공도 바치고 하였음이 밝혀졌습니다.

 

힛타이트 족속은 전차뿐만이 아니고 금, 은, 동 특히 철을 다루는 솜씨가 매우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세계사 책에도 최초의 철기 문화는 힛타이트 족속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나옵니다.


철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대단히 앞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금속공예는 예술적 수준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아름다운 사슴을 정교하게 조각한 술잔입니다.

 

그런데 힛타이트 족속이 남긴 기록은 역시 수메르 인들이 만든 설형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술과 전투력은 앞서 있었지만 학문적인 면에서는 수메르인들의 것을 그대로 이어서 쓴 것입니다.


 

 






5. 에돔

 

성경에 나오는 에돔 족속에 관한 고고학적 발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6장 8, 11절, 기타 여러 곳에 보면 에돔족속이 있었고, 에돔 족속의 최초의 조상은 이삭의 아들인 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에돔이라고도 불리었고, 세일 산이라는 곳에 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어떻게 대를 이어 내려왔다는 것이 성경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에서라는 말이나 에돔이라는 말이나 모두 붉다는 말입니다.

에서가 털이 많고 붉게 생겼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세일산 자체가 아주 붉은 산입니다.

그래서 에서도 자기 색과 같은 땅을 좋아해서 거기서 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에돔족속이라는 것도 성경에만 기록되어있었지 다른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천년간 성경이 허위라고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중동의 고고학적 발견이 붐을 일으킴에 따라서 세일산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탐사하다가, 에돔족속이라는 집단이 그곳에서 수천 년간 거주했다는 사실이 발굴되었고요,  오른 쪽 그림은 집단 주거지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색깔이 붉지 않습니까? 

 

들어가는 입구는 이렇게 좁은 것처럼 보이지만 들어가면은 안쪽이 굉장히 넓습니다. 

그래서 이곳도 지금은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거기 들어가면 전반적으로 붉은 바위로 된 협곡인데요, 그 바위를 뚫고 집도 짓고, 신전도 짓고, 무덤도 만들고 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여기에서 거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BC 3세기경에 에돔족속들이 동서양 무역사업을 활발히 행하여 굉장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나바티안 상인집단을 형성해 가지고, 동서양에서 본 안목으로 자기들 거주지에 투자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페트라 폴리스라든가 여러 가지 화려한 집들을 짓고 아주 잘 살았습니다(오른 쪽 그림).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달력에서도 많이 나오는 페트라 입니다.

이것의 건축구조는 보시는 바와 같이 어디서 돌을 가져다가 다듬어 만든 것이 아니고, 바위산을 파 들어가 만든 조각품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바위 덩어리를 파서 그 속에서 생활한 것입니다.


조금만 실수해서 조각이 떨어지면 작품전체가 망가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나바티안 상인들이 거금을 투자해서 유명한 조각가들을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왼쪽 사진은 에돔족속의 왕이 살던 집이요, 무덤입니다.   

 

야곱자손과 에서자손 사이의 투쟁이 계속 내려왔는데요, 

그 중에서도 절정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 당시의 왕인 헤롯이 바로 에돔 족속입니다. 

 

 

 

  

6. 므깃도

 

므깃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주전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 발굴되었다.

 

므깃도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Solomon's Stables)이다.  

솔로몬은 그 당시 군사력의 상징인 기병대를 육성하여 '병거성(City of Chariosts)'과 '마병의 성(City of Horsemen)'들을 건설하였다.

므깃도는 이러한 병거, 마병성의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솔로몬 시대의 성문은 그 이전의 구조와 다른 자형(字形)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맞는 성문을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곳에서 발굴된 마병장에는 말들의 고삐를 매어 놓았던 구멍이 뚫린 돌들이 말구유와 함께 늘어서 있는 큰 장소를

발굴하였다.


약 450마리 정도의 말과 150대의 병거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이며, 중앙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던 큰 물통도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것을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발굴된 지층은 솔로몬 왕 때의 주거 층이 아니라, 이보다 약 100년 후 아합왕 때의 것이다.(BC 869-850)  

므깃도는 시삭에게 파괴되었다가 아합때 복구되었었다.


그러나 아합왕 때의 마병장은 그 이전 솔로몬 때의 것 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므깃도에서 발굴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당시의 발전된 공업 기술을 볼 수 있는 우수한 수로 장치 발견이다.

큰 통로가 바닥까지 내려 있고 그 통로의 끝에서 바위 구멍을 뚫고 도시 밖의 샘으로부터 도시 내부로 끌어 들이도록 되어 있다.

밖의 샘 입구는 포위하고 있는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흙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어 있다.


 

7. 이스라엘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에서부터 비롯됐다(창32:28).


그런데 엘,즉 하나님과 싸웠다는 뜻의 이스라엘의 기원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민족이 약탈당해서 더 이상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졌다는 고대 이집트의 한 절망적인 비문에서부터 출발한다.

페트리의 이스라엘 석비

1896년 겨울 이집트 최대의 유적지
테베에서 한 파라오의 장례신전을 발굴하던 영국 출신의 이집트학자 페트리(W.F.Petrie)는 높이 3.2m,폭 1.6m에 달하는 검은 화강암 석비 하나를 발견했다.


당시까지 이집트 지역의 발굴에서 파라오의 업적을 새긴 전승비와 기념비가 자주 출토되기 때문에 이 발견은 그리 대수로운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28줄에 달하는 비문의 내용을 해독하던 그는 27번째 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군다나 이 단어의 끝에는 민족을 의미하는 한정사가 붙어있어서 특정한 민족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성서 외의 자료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성이 최초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메르네프타 당시까지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출애굽기 1장 11절에 근거하여 람세스라는 도시를 건설했던 람세스 2세를 출애굽의 파라오로 여겼다.

하지만 1896년에 발견된 이스라엘 석비에서 메르네프타가 이스라엘 민족을 무찔렀다는 언급 때문에 그가 바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1:8)이라고 여겼다.


더욱이 왕들의 계곡에 있는 메르네프타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서 이상하게도 그의 미이라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하다 홍해에 빠져 죽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출14:28).


하지만 1898년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아멘호텝 2세의 무덤에서 무려 16기에 달하는 왕족의 미이라가 발견됐고 이 중에서 메르네프타의 것도 있었기 때문에 이 가설은 더 이상 신빙성이 없어졌다.


 

8. 출애굽

 

WYATT(http://www.wyattmuseum.com/index.htm)라는 성서 고고학 협회에서 출애굽 당시 홍해에 수장된 이집트 전차부대의 유물을 발견하였습니다.
1978년에 홍해에서 얕은 지점을 찾아 탐사하던 중 산호초로
뒤덮힌 곳에서 전차 바퀴를 비롯한 전차부대의 유물을발견하였습니다.

 

 

 

 


 

홍해에서 발견된 것은 8개의 살을 가진 바퀴인데, 이집트 전차의 역사와 대조한 결과 출애굽 당시와 일치하는 이집트 18번째 왕조의 바퀴임이 밝혀졌습니다.

출애굽기 14/6~7 그가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그와 함께 데리고 가니, 그가 선별한 육백 대의 병거들과 이집트의 모든 병거들을 거느렸으며 병거마다

대장들이 맡았더라.

 

 

 

 


 


시내 산 (Mt. Sinai)

시내 산이라 불리는 바위산 구역은 길이가 3.3Km, 폭 1.7Km로

전체 면적에 달합니다.
이 지역은 해발 2,000m 이상의 산봉우리만 25개에 달하는

고산지대입니다.
해발 2,285m의 시내 산은 화산 폭발 결과 흘러 나온 용암이

굳어진 화강암으로 형성된 봉우리입니다.


 

9. 여리고성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장군의 인도로 팔레스틴 지역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있는 성중에 최초로 공격한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다른 성은 열심히 전쟁을 해서 빼앗았는데, 여리고 성은 기적으로 빼앗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여호수아 6장 15-17절을 보시면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생도 안하고 성에 들어가 완전히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안 믿는 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고고학자들과 대영 박물관 탐사팀 등등이 19세기부터 열심히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견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사실이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자 가스텡과 여러 학자들은 여리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으로 정복되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냈습니다.

발굴된 성내에는 많은 식량들이 남아있었습니다.

또한 대영박물관의 탐사팀에 의해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시대에 강도 6.0의 강력한 지진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고고학자들이 실제로 여리고성의 유적을 파고

  위 사진은 고고학자들이 실제로 여리고성의 유적을 파고 들어가서, 성경에 기록되었던 여호수아 시대의 실질적인 성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위 왼쪽 사진은 여리고성을 발굴한 모습입니다.

위 오른쪽 그림은 여리고성 폐허에서 발굴된 식량단지들입니다.

고대의 전쟁은 오랫동안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바닥나게 됩니다.

그때 되야 항복을 하고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리고성은 식량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정복된 것입니다.

또한 대영 박물관의 탐사 팀에 의해서 여리고성은 여호수아 시대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여리고 성의 성경적 함락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히스기야 터널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지인 기혼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5백25m에 달하는 지하 터널은 앗시리아의
포위에 대비한 최대 방위사업이었다.터널의 기울기가

0.06%로 양쪽의 고도 차이가 32㎝밖에 되지
않는 정밀한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2. 기혼샘
에덴에서부터 흐르는 네 강 중의 하나가 기혼인데 아마도

예루살렘의 우주적 중심성과 관계 있는 것 같다

`솟구쳐 나온다'라는 뜻을 가진 기혼샘에는 오늘날에도

차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중세에 건설된
계단 밑으로 흐르는 샘물은 이곳에서부터 히스기야 터널을

거쳐 실로암 못으로 흐른다.

3. 실로암 비문
여섯줄로 모두 2백글자 중에서 1백77자만 보존된 이 비문은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중간에서
만나 지하터널의 역사적 개통을 자축하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돼 있다.
"3규빗(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
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5백25m)을 흘러나왔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소장)


 


10. 다니엘

 

 

왼쪽 사진은 다니엘의 무덤이며, 지금 이란(페르시아)의 수사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바빌론에 끌려 간 다니엘은 '다니엘서'를 기록하는데, 그의 예언대로 바빌론의 멸망

다음에는 메디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등의 나라가 나타났습니다.

다니엘서의 예언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다니엘서'가 그 사건들이

다 이루어진 후에 기록된 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후대에 기록하고 이름만 '다니엘서'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대해서 성경의 신빙성이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서에는 헬라어(그리이스어) 단어가 세 개 들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니엘서가 바빌론 시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고 알렉산더가 지배하던 '헬라' 즉, 그리이스 시대에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보면 그리이스와 바벨로니아는 느부갓네살 시대 이전부터 이미 광범위한 무역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말(言)도 서로 오고 갔다는 것이

밝혀져 있고, 세 개의 단어가 무엇인가 조사해 보았더니, 그 단어들은 모두 그리이스의 악기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최소한 한 개의 악기는 다니엘 시대 이전부터 바벨로니아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악기였습니다.
예전부터 써 오던 악기이므로 그리이스 말 그대로
바벨로니아에서 쓰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니엘서에 수메르 단어가 8개나 들어 있습니다

'수메르'라는 나라가 언제 부터입니까?

아브라함보다 이전 아닙니까? 

 

다니엘서가 기원전 500년경이라면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전이므로 1500년도 더 된 단어가 8개나 남아 있다는 말이지요. 

느부갓네살 통치 시대 이후에는 수메르 언어가 전혀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다니엘서에 수메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느부갓네살 시대, 혹은 그 이전에 다니엘서가 쓰여졌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의 저작시기가 느부갓네살의 통치 시기로부터 먼 훗날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 수메르 단어로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조차 바빌론 포로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서에 히브리어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도 로로 잡혀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기록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내용에 있어서 허무맹랑한 사실이 너무 많다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요,

한 예를 들면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외국의 포로중의 일부를 잘 먹이고 갈대아 학문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너무나 악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포로를 잘 먹이고 가르쳤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바벨로니아의 정책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고대 바벨로니아 지역을 발굴하다가 특별한 건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건물의 비석에 그 건물의 용도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비석에는 포로로 잡혀 온 왕족과 귀족에게 갈대아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건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잘 먹이고 가르쳤다는 성경의 기록이 실제로 증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금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용광로 불 속에 집어넣었다 기록이 다니엘서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불 속에 던져 넣으려던 바벨로니아 군인들은 방화복을 입고 했었는데도 오히려 불에 타 죽을 정도로 불길이 강했으나,

세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용광로가 발굴되었는데, 그 용광로의 용도에 대해 쓰여진 비석에 보면 바벨로니아의 신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화형

시키는데 사용되는 용광로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타는 용광로 속의 세 명의 히브리인의 이야기는 적어도 사실에 근거하였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또 많은 비난을 받았던 부분은, 다니엘이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아서 사자 굴 떨어졌는데, 사자들이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가만히 있다가,

다니엘을 고발했던 사람을 잡아넣었더니, 뼈까지 뜯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계깊은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고대 바빌론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웅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웅덩이는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떠밀어 넣는데 사용된 웅덩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잡아먹힌 사람들 이름까지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없었습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이 사건은 적어도 사실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갑자기 느부갓네살왕이 미쳐서 이슬을 묻혀가면서 풀을 먹고 

돌아다니다가 다시 제정신을 차려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정신을 차려 돌아온 뒤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던 것 같습니다. 


바벨로니아의 고고학적 발견 가운데 느부갓네살 왕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명각 발견되었는데, 

그 명각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왕이 미친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실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느부갓네살왕의 명각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느브갓네살 왕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위는 의심을 받아 왔습니다.
왕의 비행은 좀처럼 기록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느브갓네살의 정신이상(精神異常)을 암시하는 바빌론 당시의 점토문서

근년인 1975년 그레이슨(A. K. Grayson)교수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이 문서(NO. BM 34113)는 불행하게도 많이 훼손되어 단편(斷片)에 불과하지만

내용은 왕의 비정상적인 질병을 알리는 흥미진진(興味津津)한 것이었습니다.

*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 느브갓네살은 생각했다.
3. 그의 생애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5. 그리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에윌-마르둑(Evil-Merodach,
느브갓네살의 장자로 그 뒤를 이어 왕이 됨,

    왕하 25:27-30)에게 나쁜 권면(bad counsel)을 했다.
6. 그런데 그는 전혀 다른 명령을 내렸다.
7. 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주의하지 않았다.
11. 그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보이지 않았다.
12. 가족과 친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14. 그의 주의는 에사길(Easagil; 바빌론 주신의 신전)과
바빌론의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기울여지지 않았다.
16. 그는 신 중의 신에게 빌었고, 그는 탄원하면서 손을 들었다.
17. 그는 위(대한) 신, 마르둑을 향하여 슬피 울었다.
18. 그의 기도는 계속되고, 향하여,


이러한 본문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왕은 조정의 대신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 에윌-마르둑에게 주의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느브갓네 살은 인생의 가치를 상실하고, 엉뚱한 지시를 내리고, 대신들의 조언을 거절하며, 자녀들에게는 사랑을 보이지 않고, 가족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국가의 수반으로서 국가 종교와 그 주신의 신전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왕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진 대신들이 아들인 에윌-마르둑에게 상황을 알리면서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직무를 수행하라는 권고를 하게 됐다고 보인다.

이것이 그 당시에는 바람직한 권고였으나 나중에 느브갓네 살이 복권(復權)했기 때문에 그저 "나쁜 권면"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세계를 호령하던 느브갓네살 왕이 하루 아침에 광인이 되어
7년간이나 떠돌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아무리 부와 권세를 거뭐 쥐어도 당장 내일 일도 알 수 없고, 정신병 하나 제대로 치유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7년간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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