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왕조를 탄생시킨 다윗과 솔로몬


이스보셋을 지지하는 북쪽지파들의 위협에 맞서다.


 BC 1000년경 사울이 죽자 군주정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시도가 이것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스라엘백성은 왕이 있다고 해서 사사시대보다 더 부유했던 것도, 블레셋 등의 대적들로부터 더 안전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스라엘백성은 여러 족속이 난립한 팔레스타인지역에서 쉽게 멸망되거나 아니면 이방문화에 간단히 흡수 돼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꾼 것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이었으니 그들이 발휘한 지도력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단 두 세대 만에 두 명의 왕에 의해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사라졌고 시내광야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영향력을 확장시킨 왕국이 건설 된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재위기간에 이스라엘은 근동지역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아직 연약하기는 하지만 상당 부분 다윗의 능력과 솔로몬의 자질로 인해 처음으로 지파들 간에 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B.C.1000년부터 B.C.922년까지 이룬 물질적인 업적은 참으로 놀랍다. 예루살렘에 세운 거대한 왕궁은 그 땅의 경제적인 발전을 입증하고 있다. 또 당시 시인과 역사가들의 활동이 장려되었는데, 시편은 다윗의 시가 여러 편 실려 있으며, 사무엘하 9-20장과 열왕기하 1, 2장은 이스라엘 문화가 처음으로 번성했던 당시 왕궁 역사가의 묘사기술을 잘 보여 준다.


기브온에 있는 대저수지. 사울 사후에 아브넬과 요압의 군대가 전투를 했던 곳이다. (삼하2:12-17.)

[다윗의통치] B.C. 1000~960년

'사울 다윗 솔로몬 왕국의 분열' - BC. 1020~980 1000 960 BC. 922

다윗이 이스라엘왕으로 추대되어 40년 동안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삼하 5: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다윗은BC. 1000년 사울이 죽고 난 후 자신의 통치 BC. 1000~960년에 반대하는 중대한 대적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유다지역의 각 지파장로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을 왕으로 선포했지만, 북쪽지파들은 길보아산의 참사를 피한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지지했다.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에 힘 입어이스보셋은 요단강 건너 편 마하나임에 수도를 세웠다 (삼하 2:1-11) 아브넬의 휘하에는 그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군대가 있었으므로 다윗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다.


~지파들 간의 내전

이처럼 둘로 나뉜 이스라엘의 분열은 지파들 간에 정치적인 혼란을 불러왔으나, 이로 인한 내전은 이년을 넘지 못했다. 이 기간 중에 일어난 전투는 기브온물가에서 아브넬의 군대와 요압이 싸운 전투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요압은 자신의 동생 아사헬 을잃었다. (삼하2:12-32)


나중에 이스보셋이 사울의 첩과 통간했다는 누명을 아브넬에게 씌우자 아브넬은 다윗에게 화해를 청했다. 그러나 라이벌의식을 가진 요압은 헤브론에서 평화조약이 마무리되기 전에 피의 보복으로 아브넬을 죽였다.


며칠 후 이스보셋은 가까운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스보셋과 아브넬이 수 일 차이로 죽자 북쪽지파장로들은 다윗을 자신들의 왕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다윗은 30세에 헤브론에서 모든 지파의 장로들에 의해 다윗이 이스라엘왕으로 추대되어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삼하 5:1-5.)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이제 다윗은 왕으로서 이스라엘 전역을 장악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말썽 많은 지파들의 지지를 얻어 그 기반을 굳게 다지기 위해서는 지파 별 편견이나 차별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동시에 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 내야했다. 


그러나 다윗은 단 한 번의 정치적인 계책을 통해 여부스 족속의 근거지였던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어떤 지파도 예루살렘을 장악하지 못했다. 예루살렘은 어떤 지파와도 연합하지 않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곳이었다. 아마도 다윗의 군대는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성벽 밑에서 찾아냈던 것 같다. 예루살렘성에서 기혼샘으로 연결된 수로를 통해 성안으로 기어 들어갔던 것이다. (삼하 5:6-11)

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수직으로 뚫린 구간을 타고 오르는 것은 놀랄만한 묘기와도 같다고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114~119쪽의‘다윗과 솔로몬의 도시 예루살렘’참조.

다윗은 재빨리 예루살렘에 자신의 관사를 세우고 두로왕 히람의 도움을 받아 왕궁을 건축했다.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연합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 안에 있음을 인식하고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그 거룩한 궤를 모실 장막을 세웠다. (삼하 6장)


이 한 번의 사건으로 다윗은 모든 지파들을 하나로 연합할 수 있었고 동시에 종교적인 충성심까지 얻게 되었다. 

이후 다윗과 그의 자손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왕권을 이어갔다.


다윗과 맺은 여호와의 언약은 다윗과 그의 자손들을 이스라엘의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선택을 확증해준다. (삼하 7장)

다윗성 예루살렘은 ‘여호와의시온’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다윗이 치른 전쟁

~팔레스타인을넘어시리아까지세력을확장하다 (지도 52 참조)


다윗은 왕위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주변 나라들과 수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더 많은 땅을 분배해 주었을 뿐 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영향력을 팔레스타인을 넘어 시리아까지 확장해 나갔다.


이런 놀라운 업적에는 이스라엘백성 뿐 아니라 헷족속, 블레셋족속, 암몬족속등에서뽑은용병들을중심으로전문적인군대를 조직한 덕분이기도 했다.

특히 ‘30용사’는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며 늘 최선봉에선 정예부대였다. (삼하 23:8-39)


다윗이 치른 전쟁들 중에서 특별히 요단강 건너 편과 시리아와의 분쟁은 학자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다윗과 블레셋사람들

 다윗은 초기에는 소렉상부, 르바임골짜기*까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블레셋군대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두 번에 걸쳐 블레셋을 무찌른 다윗은 마침내 쉐펠라까지 장악했다. (삼하 5:17-25; 23:9-19; 대상 14:8-17)

하지만 가드왕 아기스와의 관계 때문인지 블레셋남부 해안지역의 도시들은 합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승리는 블레셋의 확장을 막기에 충분했고,

이후 블레셋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다윗과 요단 동편 나라들

 다윗은 이스라엘의 주도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요단 동편 중요지점에서 장기적인 전쟁을 치렀다. 

성경은 모압과 에돔과의 전쟁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삼하 8:2,12-14; 왕상 11:14-17)

모압족속 정복은 아르논 북쪽 기름진 평원지대의 지배를 견고히했다.


후에 군대장관 요압의 명령에 따라 아비새는 에돔족속과 싸워 크게 승리했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전투가 바로염해 남부에 있는 소금골짜기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열왕기상11장 14-17절에 의하면, 에돔의 어린 왕자 하닷은 이집트로 도망쳤으며,

다윗은 에돔에 수비대를 두고 모압으로부터조공을 받았다. (삼하 8:2, 14.)


~다윗과 아람왕국들

아람왕국과의 충돌은 다윗의 재임기간 내내 이어졌다. (삼하 8:3-12; 10:6-19; 왕상 11:23-25; 대상 18, 19장.)

BC 1100년까지 레바논과 시리아지역에서 출몰한 아람왕국들에는 소바, 다메섹, 하맛, 벧르홉등이 있다. 

이중 다윗과 주로 대적한 이는 소바왕 하닷에셀이었다. 당시 하닷에셀은 다메섹을 장악한 뒤 하맛왕도 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팔레스타인북부와 요단강 건너편을 자신의 영역으로 여긴 것 같다.


암몬과의 전쟁은 하닷에셀과의 충돌을 더욱 촉발시켰다. 암몬의 새 왕 하눈은 다윗이 자신의 아버지 나하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랍바로 보낸 사절들을 모욕했다.

이에 다윗은 요압을 랍바로 보내 응징했다. (삼하 10장)


이를 미리 예상한 하눈이 하닷에셀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하닷에셀은 벧르홉과 소바, 돕, 마아가와 같은 여러 아람왕국에서 차출한 대군을 조직해 메드바↖에서요압과 맞섰다. (대상 19:7) 


하닷에셀은 퇴각하여 북쪽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아람사람들을 모아 규모가 더 큰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다윗이 이끄는 군대가 갈릴리바다 동쪽에 있는 헬람에서 하닷에셀과 싸워 크게 이기자, 하닷에셀과 연합한 왕들이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기를 요청했다. (삼하 10:19)


이스라엘백성은 결국 랍바를 함락시킴으로써 암몬족속을 정복했다.

하지만 그 오랜 전쟁기간 동안 후방에 남아있던 다윗은 밧세바와 그녀의 남편 우리아에게 큰 죄를 저질렀다. (삼하 11, 12장)


다윗은 하닷에셀의 영토를 침입해 아람군대를 파괴하고, 베다Betah, 디브핫 Tibhath?, 베로대, 그리고 레바논 베카Beqa의 군에서 많은 놋을 취하는 한편,

다메섹에 수비대를 두고 아람 연합군에서 빠진 하맛왕도 이와 조약을 체결했다. (삼하 8:3-10.)


『다윗이 치른 전쟁

다윗성 예루살렘은 ‘여호와의시온’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다윗과 그 자손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권을 이어갔다.

*르바임골짜기(Valley of Rephaim)

예루살렘 서남쪽, 베들레헴 근처로 유다와 베냐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수 15:8) 

땅이 비옥해 농작물의 수확이 풍성했다. (사 17:5) 


블레셋 사람은 다윗의 위세를 누르기 위해 벧세메스에서 산지로 통하는 길을 따라 올라가 이 골짜기까지 공격해 왔다. (삼하 5:18, 22, 23) 

다윗은 이를 격퇴하여 그들의 땅을 봉쇄했다. 르바임골짜기는 지금의 엘 부케아elBuqei’a다.

↖메드바(Medeba / 지명)

염해 동쪽으로 약 29km 떨어져있는 모압의 고대 도시.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이 탈취한 성읍이었으나 다시 이스라엘이 시혼의 손에서 빼앗아 르우벤의 소유가 되었다. (수13:16)

아하스 당시에는 모압사람들의 성소였다. 암몬사람들이요압에 의해 패배 했을 때 이곳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대상 19:1-15) 메드바의 가장 유명한 유물은 6 세기 비잔틴교회 바닥의 모자이크 지도로, 이 모자이크는 9세기 후반에 그곳에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면서 발견 된 것이다. 모자이크의 대부분은 파괴 되었지만, 예루살렘을 표시하는 부분은 그대로 남아있다. 팔레스타인의 남부 욥바에서 길하라셋에 이르는 지역과 이집트의 삼각주 지역 일부를 나타내는 팔레스타인 최고의 지도다.』


~다윗의 성취

용맹한 군사적 지도자 다윗은 이스라엘이 거대한 국가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우선 벧산, 예루살렘 등 팔레스타인의 강력한 도시들을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확장했다.

주 요대상로가 지나는 요단 동편뿐만 아니라 이스르엘 평원과 쉐펠라, 그리고 모든 갈릴리지역까지 다윗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암몬과 모압, 에돔, 그리고 일부 아람왕국들도 예루살렘에 공물을 바침으로써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블레셋의 영역을 남쪽해안으로 제한하고 페니키아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다윗은 죽을 때까지 (BC. 960년 경) 이스라엘왕국의 상당한 부분을 개척했으며 정치적인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한 편 다윗은 자신의 왕국을 행정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조직과 기구들을 만들었다.

다윗왕국에서 일했던 사람들과 그 직함들이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 된다. (삼하 8:16-18; 대상 18:15-17. 27:32-34)

다윗이 왕위에 오른 당시만 해도 내부적으로는 분열로 인한 혼란을 겪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수많은 외침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윗의 업적은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이룩한 것이었기에 더욱 빛이 났다.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시대의 영화를 위해 이스라엘에 안정된 기초를 닦아 놓았다.


솔로몬의 통치 시기(BC. 960~922년)는 다윗이 이룩한 군사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40년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린 황금기였다. 솔로몬은 가사에서부터 시리아중부에 이르는 광활한 왕국을 아버지 다윗에게서 물려받았다. 다윗은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왕국의 상당한 부분을 개척 했으며 정치적인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솔로몬의경제정책 (왕상5-10장; 대하1:14-17; 3-8, 9장)



사울 다윗 솔로몬 왕국의 분열 (BC. 1020 980 1000 960 BC 922)


솔로몬의 통치 (BC. 960~922년)

다윗의 쉴틈 없는 정복 전쟁 덕분에 솔로몬은 해변 길과 왕의 대로와 같은 주요대상로와 지역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솔로몬은 거의 모든 근동지방으로 나아가는 주요간선로를 이용해 무역을 함으로써 엄청난 재물을 쌓았다. 이렇게 구축한 부로 솔로몬은 대규모 건축사업을 추진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국력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이것에 대한 기록이 열왕기상3-11장과 역대하 1-9장이다. 하지만 고고학에서 밝혀낸 솔로몬시대의 물질문명은 이보다 더 찬란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제교역의 중심이 되다.

솔로몬은 국제 공해 公海와 수로를 통한 교역에 집중했다. 솔로몬이 거느린 700명의 아내와 300명의 첩을 통해 당시 국제적인 교류가 얼마나 광범위 했으며 활발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왕들은 관례적으로 다른 국가의 왕족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일종의 정치적인 동맹관계를 보증했던 것이다. 솔로몬은 암몬족속과 에돔족속, 모압족속, 헷족속, 그리고 페니키아여인까지 아내로 맞아들였다. (왕상11:1)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집트 21 왕조의 왕도 딸을 솔로몬에게 시집보내면서 게셀성을 혼인지참금으로 주었다. (왕상 9:16)


이러한 폭 넓은 동맹관계는 국제적인 경영가 솔로몬에게 더 많은 부를 안겨주었다.

열왕기상3-11장은 솔로몬의 폭 넓은 교역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스라엘에 가장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 곳은 다름 아닌 페니키아였다.


 다윗의 당부를 따라 솔로몬은 페니키아사람인 두로 왕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페니키사람들은 고대에 가장 유능한 선원이며 상인이었다. BC 1000년 경부터 페니키아사람들은 지금의 레바논해안에 있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나가 교역물품을 찾아다녔다. 페니키아사람들은 지중해유역과 스페인까지 식민지를 세워 교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페니키아의 주요항구도시 두로와 시돈, 비블로스, 아르왓은 세계의 물품이 드나드는 일종의 물류센터 역할을했다. (131쪽의‘페니키아의 문화’참조)

히람과는 상호이익을 위해 연합해서 교역사업을 펼쳐나갔는데, 솔로몬은 히람의 도움으로 항구시설을 늘리는 한편 아카바 만에 있는 에시온게벨에 함대를 주둔시켰다. 항해에 경험이 없는 이스라엘을 위해 히람은 함대를 유지하고 운용하는 데 필요한 장인과 선원들을 제공했다. (왕상 9:26-28; 10:11, 12, 22)

홍해를 떠난 선박들은 오빌로 항해해 수 많은 금과 함께 열대동물과 나무들, 그리고 은과 귀한 보석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비록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텔카실레 Tell Qasile*에서 나온 비문은 오빌의 금을 언급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오빌이 동아프리카해안지역에 있다고 보는 반면, 어떤 학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설적인 황금지역일 것이라고 보 기도 한다. 하지만 솔로몬의 선박에 싣고 돌아오는 상품들을 보면,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해안에 있는 여러 항구들을 거쳐서 돌아온 것으로 생각된다. 페니키아사람들은 솔로몬이 장악하고 있는 새로운 시장과 대상로를 사용한 반면, 솔로몬은 자신의 경제활동에 해상무역을 추가할 수 있었다.

스바여왕이 솔로몬을방문한 유명한 사건 역시 교역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스바는 아라비아반도에 위치한 작은 왕국 중 하나로 향신료와 향수, 보석, 금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이 작은 나라는 보다 넓은 시장으로 나가기 위해 솔로몬이 장악하고 있는 대상로가 필요했다. 솔로몬과의 협상을 통해 스바의 대상隊商들은 약대를 타고 다니며 지중해 연안지역과 그 너머의 부유한 지역들을 오갈 수가 있었다.


 솔로몬은 또한 무기와 말등을 거래하는 ‘중개인’역할도 했다. 열왕기상에 의하면 솔로몬은 명마로 유명한 터키의구에Kue, Que, (훗날 길리기아라로 불림)에서 말을 수입했고, 이집트로부터는 병거를 들여왔다. 솔로몬은 1,400대의 병거를 가지고 자신의 왕국을 방어하는 한편 남은 것은 아람과 헷 족속의 왕들에게 팔았다. (왕상10:26-29)


 ~성전건축과 광범위한 재건축을 시행하다

 이렇게 벌어들인 재물로 솔로몬은 자신의 왕국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고자 이스라엘의 새로운 위상에 어울리는 왕궁을 건설했다. 성경은 그의 광범위한 건축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고고학계에서도 이스라엘초기의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보이는 유물들을 발굴하고 있다.


『솔로몬의건축사업

솔로몬시대에건축한것으로보이는 하솔의포루성벽Casemate We

                                므깃도에있는솔로몬성문의잔해.‘격자형옹벽공법Headers-Strechers’양식의석공술이눈길 을끈다.


학자들은 BC. 900년 대, 즉 솔로몬 재위기간에 건축 활동이 두드러졌다고 밝히고 있다.

건축양식은 페니키아와 아람의 것과 같으며, 건축을 위해 국립건축가를 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텔카실레(Tell Qasile / 지명)

BC 12세기경 블레셋 족속에 의해 건설된 항구도시가 발견 된 곳으로, 야르콘 강 유역에 있다. 베냐민 마자르 교수에 의해 1948년에 발굴되었다.』


 건축양식은 페니키아와 아람의 것과 같으며, 건축을 위해 국립건축가를 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은 주요도로들을 지키는 한 편 행정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에 건축물을 세웠다. 열왕기상 9장15절을 보면 솔로몬은 하솔, 므깃도, 그리고 게셀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 세 도시는 모두 고대 가나안의 도시로서 해변 길에서 전략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왕이 되기 전에 이미 심각하게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솔로몬의 건축가들은 각 도시를 여섯 개의 방을 갖춘 포대가 설치된 성벽으로 둘러쌌다. 이는 솔로몬의 도시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두 개의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며 수직의 벽들이 필요한 방이나 ‘포대’를 만드는데, 이 공간은 창고나 생활공간으로 활용되곤 했다. 


이런 형태의 성벽은 솔로몬 재위기간과 같은 평화의 시기에는 충분히 안전을 보장해주었지만, BC. 900년 이후 이보다 더 강력한 공격기술이 등장함으로써 급격하게 황폐화 되었다.


 므깃도는 지금까지 ‘왕실의 도시’에 있는 공공건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궁전’으로 명명된 두 건물은 지역의 통치자가 살았거나 왕이 공무로 들를 때 관사로 사용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콜로네이드 열을 진 기둥과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구별된 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커다란 안뜰에 있었다. 도시 남동쪽 끝에는 도시 바깥의 샘물을 끌어들이는 지하통로가 있는데, 만일 적들에게 포위당했을 경우 안전하게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초기 유적 발굴팀이 발견한 ‘솔로몬의 마구간’은 아마도 BC.900년 이후에 오므리나 아합에 의해 건축된 저장창고일 것으로 생각된다.

열왕기상9장17, 18절은 솔로몬시대에 이밖에 지역들이 재건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의 건축 활동 (왕상5-10장; 대하1:14-17; 3-8, 9장)


바알랏Baalah과 하부 벧호론Lower Beth-horon은 해안 평원지역에서 유다의 중심지로 가는 길목을 지켰다. 

다드몰은 다메섹에서 북쪽으로 192km떨어진 주요 상업도시로 알려졌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 도시가 원래 히브리어로 ‘유다광야에 있는 다말Tamar’이라고 믿고 있다. 


역대하 8장3, 4절에는 솔로몬이 시리아지역에 있는 하맛과 다드몰을 건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열왕기상 9장18절에 따르면 이지역은 유다국경지역의 남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BC. 10세기에 건축된 작은 요새들과 농경정착지들 라맛마트레드Ramat Matred, 바알랏브엘 Baalath-beer이 발견 되었다. 이들은 대상로를 보호하고 솔로몬왕국의 남쪽한계선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다. 튼튼한 건물이 아랏과 브엘세바에도 세워졌다. 흥미로운 것은 BC. 10세기 경 아랏에 작은 신전이 세워졌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솔로몬의 건축사업이 성경에기록 된 것보다 더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있다.


                          ▲텔아랏에서발굴된성전의모습. 성 소앞마당에놓여있는희생제단이 보인다. 

                    뒷쪽으로성소내부가보이 는데, 두 개의 제단과 발굴 당시 발 견된두개의신성한돌이놓여있다.


성경은 다윗과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건축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왕상5-9장; 대하2:1-4:8)

다윗과 솔로몬이 왕위에 있는 동안 여부스족속이 살던 도시는 왕궁이 있는 국가의 수도로 완성되었다. 

비록 솔로몬 최고의 업적은 언약궤를 모실 수 있는 성전을 건축한 것이지만, 성경말씀은 이 두 왕에 의해 세워진 다른 건축물들에도 관심을 갖고 기록하고있다.


~솔로몬의 사치가 불러온 갈등

솔로몬의위대한업적에도불구하고왕국연합에는분 열의조짐이보이기시작했다. 솔로 몬이추구한일부정책이지파들의 시기와질투를샀고지파들은반란 을도모하기에이르렀던것이다. 다윗시대에 실시된 인구조사를 근거로 솔로몬은 왕국의 행정구역을 12구역으로 나누어 세금을 거둬들였다. (왕상 4:7~9-9)


그러나 이때 솔로몬은 오랫동안 지켜온 지파들의 경계를 무시 했으며 자신이 속한 유다지파를 특별히 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건축사업을 위해 강제로 노역과 부역을 동원했다. 원래 이 일꾼들은 이스라엘사람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징집했는데,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이스라엘백성 중에서도 징집을했다. 당시노역을부리는최고책임자였던여 로보암은이억압적인정책에반기를들고이집트로도 망갔다왕상 11:26-40. 여기에 솔로몬의 사치스런 생활이 왕국의 수입을 뛰어 넘으면서 세수를 증가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지파들의 불평이 쌓여갔다. 또 솔로몬이 취한 이방종교에 대한 묵인은 여호와께 충실한 이스라엘백성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솔로몬은 모압 신 그모스Chemosh와 암몬 신 밀곰Milcom, 시돈의 여신 아스다롯Ashtoreth을 위해 예루살렘주변 언덕에 제단을 쌓고 자신의 처첩들과 함께 예배했다.(왕상 11:1-13.)


 한편 이스라엘의 오랜 대적들도 다시 왕국에 대항해 일어났다. 에돔왕 하닷은 이집트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예루살렘과 홍해의 항구도시 에시온게벨을 잇는 대상로를 위협했다. 다메섹왕 르손은 솔로몬의 지배하에 있는 아람의 작은 왕국들을 빼앗았다. (왕상 11:14-23)

솔로몬이 나이가 들어 통치력을 잃게 되고 곪아있던 내부문제까지 터져 나오자 한 때 예루살렘에 충성을 다하던 주변 왕국들이 독립을 꾀하기 시작했다. 선지자 아히야가 예언한 대로 (왕상 11:29-39) 솔로몬왕국은 위기와 몰락으로 치닫더니 BC. 922년 솔로몬이 죽자 연합왕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다윗과 솔로몬의 도시 예루살렘]

다윗이 예루살렘을 차지해 왕국의 수도로 삼고 나서 예루살렘은 성경에 나오는 많은 도시들 가운데 유례가 없는 위치를 얻게 되었다.

114~119쪽의 ‘다윗과 솔로몬의 도시 예루살렘’ 참조.



『솔로몬의 정치와 지파들의 시기


텔아랏에서 발굴된 성전의 모습. 성소 앞마당에 놓여 있는 희생제단이 보인다.

뒤쪽으로 성소 내부가 보이는데, 두 개의 제단과 발굴 당시 발견된 두 개의 신성한 돌이 놓여있다.』

고고학자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예루살렘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다.


베냐민 마자르Benjamin Mazar와 나만 아비가드NahmanAvigad, 이갈 실로Yigael Shiloh*, 캐슬린 케년Kathleen Kenyon, 마겐 브로시Magen Broshi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들이 발굴한 유적들을 통해 그동안 의문으로 남겨진 것들이 해결되었는가 하면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 되기도 했다. 예루살렘을 발굴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도시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는 많은 빈공간이 남아있다. 이 도시가 경험했던 여러 번의 멸망과 재건축, 채석과 자재의 재사용, 그리고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 부식된 것 등은 고고학자들이 찾고 있는 증거들을 파괴하거나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이 고대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산등성이에 세워졌다는 사실과 아직도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고고학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력 덕분으로 우리는 예루살렘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지형, 예루살렘은 산지를 따라 형성되었다~


예루살렘은 서쪽과 동쪽의 두 산지를 따라 형성되었다. 이 산등성이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확장되어 깊은 골짜기처럼 요새를 이룬다. 기드론Kidron 골짜기는 동쪽 산등성이를더 높은 스코푸스Scopus산↖, 올리브산-감람산, 805m-과 구분해준다. 힌놈골짜기는 서쪽 봉우리를 따라 내려와 두 봉우리를 감싸다 남쪽에서 기드론 골짜기와 만난다. 요세푸스가‘티로포이온Tyropoeon골짜기’ 또는 ‘치즈제조기골짜기’라고 부른 중앙골짜기Josephus, JW, 54: 1는 이 두 봉우리를 다시 나눈다. 예루살렘의 초기 이주민들은 동쪽 봉우리의 남쪽 끝에 정착했다.


『고대여부스족속 / 가나안족속도시 다윗이 증축했다고 여겨지는 지역

성전산-산봉우리고도 등고선간격=33ft.(110m) (삼하5:6-12; 24:18-25; 왕상5-7장; 9:15; 대상11:4-9; 대하3, 4장)

*이갈실로(Yigael Shiloh / 인명)

고고학자이자 히브리 대학의 교수로서 고대 다윗왕궁을 발견했으며, 케년광장에서 거대한 규모로 장식 된 석공벽돌군을 발견했다.


↖스코푸스산(Scopus / 지명) 올리브산감람산은 기드론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산동쪽으로는 여리고와 요단 골짜기가 비탈져 있다.

이 산은 메마른 구릉 위로 세 개의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다. 


첫째 봉우리는 ‘스코푸스 산’이라 불리는데, 해발 814m로 제일 높다. 둘째 봉우리는 ‘하람에쉬셰리프’Haram eshSherif이며 셋째 봉우리는 ‘예벨 바튼엘화와’Jebel Batn el-Hawa다. 겟세마네동산은 이 산기슭에 있다.』


적을 방어하기 쉽고 무엇보다 이지역의 주요 물 공급원인 기혼샘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가나안사람과 여부스족속은 봉우리의 남쪽 끝을 따라 4만m2에 이르는 예루살렘지역을 개발했다. 이 지형(지도 56 참조)은 B.C. 1000년 경 다윗이 이 땅을 정복했을 때의 모습이다. 

그래서 지금도 예루살렘 남동쪽 언덕은 ‘다윗성’으로 불린다. (삼하 5:9.)


다윗은 정복한 예루살렘을 모리아산 (대하 3:1)으로 알려진 동쪽 봉우리의 북쪽까지 확장시켰다. 동쪽능선은 남쪽으로 기울어진 경사면이므로, 이능선의 북쪽지역은 남쪽보다 75m정도 더 높다. 솔로몬이 이 높은 곳에 성전을 세웠기에 오늘날 ‘성전산’이라고 부른다.


서쪽은 동쪽보다 더 높고 폭이 넓지만 기혼샘과 같은 물이 없었다. 그래서 BC. 710년 경 히스기야가 이 봉우리의 남쪽지역을 둘러싸는 새로운 성벽을 세우고 나서야 이스라엘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횡단골짜기*’에 의해 서쪽봉우리는 두 부분으로 나뉘고 북쪽방어선에 대한 자연적인 경계가 형성되었다. 

남서쪽봉우리는 횡단골짜기보다 남쪽에 있으며 성전산보다 더 높다.

요세푸스는 남쪽봉우리를 ‘상부도시 Upper City’라고 불렀다. 로마시대에 헤롯대왕과 같이 이스라엘의 부유한사람들은 이 상부도시에 별장이나 왕궁을 짓고 호사를 누렸다. 예수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서쪽과 동쪽봉우리에서 북쪽 외곽에까지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베스다지역이 여기에 해당됨.


~다윗 이전에는 누가 살았을까?

이 지역에서 발굴된 도기류를 통해 기혼샘 부근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때를 BC. 3500년경의 금속병용시대 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중간기로 추정한다. 가장 빠른 건축물은 초기 청동기시대 B.C. 3100~2800년으로 추정되며, 중기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이집트문서 중에 저주문서 가운데 등장한다. 상당한 방어시설을 갖춘 성벽과 건물, 그리고 바닥 등이 이미 이 시대에 개발 된 것으로 추정된다. 창세기 14장 18절은멜기세덱에 대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살렘왕’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살렘’은 예루살렘일 가능성도 있다.


예루살렘은 후기 청동기시대 B.C. 1550~1200년의 이집트기록에 더 자주 등장한다.

예루살렘왕 압디헤파Abdihepa↖가 쓴 여섯통의 편지는 아마르나고문서에 보존되어있다.

압디헤파는이집트에 하비루를 비롯한 적들로부터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63쪽의‘종잡을 수 없는 무리 하비루’참조) 이곳에서 나온 고고학적 유물들은 매우 희귀한데 동쪽 봉우리에서 발견된 건축물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횡단골짜기(Transversal valley 가나안과 여부스족속의예루살렘/ 지명)

지금의 지파욥바 성문에서 성전산까지 이어지는 작은 골짜기. 현재는 시장이 들어서 있고, 옛날보다 지형이 높아져 골짜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압디헤파(Abdi-hepa / 인명)

텔엘아마르나서신에 나오는 BC. 14세기 후반의 예루살렘 왕으로 호리족속으로 추정된다. 이 서신에서 예루살렘 왕 압디헤파는 이집트의 바로아멘호텝 3세와 4세에게 여섯 통의 편지를 보내 도움을 구했다.

가나안, 여부스의 예루살렘 풍경. 중앙에 ‘계단식석조구조물’이 있다. BC. 12~13세기로추정되는계단식 석조구조물을 가까이에서 촬영했다. 측면을 따라서 다윗왕조 후기시대로 추정되는 여러 가옥들의 유적이 남아있다.』

올리브산에서 발굴된 무덤에는 도자기와 키프로스에서 수입된 물품들이 나왔다.

B.C. 1200년 경으로 추정되는 후기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호수아시대 예루살렘의 거주민과 왕 아도니세덱은 아모리족속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 10:1-5. 사사기 1장)

8절에 따르면 유다가 한때 예루살렘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다윗이 정복할 때까지 이방사람들 손에 있었다. 

성경의 여러구절들이 예루살렘을 여부스의도시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도 헷족속과 연관된 여부스족속을 말하는 것 같다. (수 15:8; 삿 19:10; 대상 11:4, 5.)

동쪽봉우리 경사면에서 발견된 ‘계단식석조구조물’은 매우 흥미롭다. 높이18m, 폭13m 규모의 이 구조물은 주변의 언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B.C. 12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구조물이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는 아직도 논란 중에 있다. 도시에 세운 성의 기초로사용 되었다는 주 장도 있고, 봉우리에 세운 건축물의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이를 지지하는 거대한 부벽扶壁이라는주장도 있다. 

아니면 사무엘하 5장7절에 나오는 ‘시온산성’을 일컫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시온산성’은 동쪽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요새를 가리키는 것 일지도 모른다. 이 구조물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든 계단식 석조구조물은 다윗시대 이전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다


 B.C. 993년에 완성된 다윗의 예루살렘정복은 이 도시의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삼하 5:6-9; 대상 11:4-7) 다윗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고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국가의 수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성지가 된 것이다. 다윗이 정복한 여부스족속의 도시는 기혼샘 위에 있는 남동쪽언덕을 중심으로 그 규모가 4만m2정도였다. (삼하 5장)


이 지역의 수로체계는 거의 완벽하게 연구되었는데, 도시 동쪽의 성벽 안쪽에서부터 수로의입구와 지하터널이 수직으로 13m정도 연결되어있다. 이 구간은 현재‘워렌의 수로’Warren’s Shaft*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곧바로 수평터널로 이어져 물을 공급해주는 기혼샘까지 연결된다. 예루살렘사람들은 성벽 밖으로 나갈 필요 없이 수로입구에서 물통을 내려 물을 길었던 것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이 수직으로 연결된 수로를 기어 올라와 여부스족속을 기습했다는 가설이 있기는 하나 (삼하 5장 참조) 최근의 연구들은 수로를 기어오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성경은 다윗시대에 이루어진 예루살렘의 건축 사업에 대해 “다윗은 성을 다시 쌓았는데 밀로Millo에서부터 성벽을 쌓았고”(대상 11:8 참조. 삼하 5:9)라며 간략하게만 소개하고 있다.


 ‘밀로’는 히브리어로 ‘채우다, 채워진’이라는 뜻인데, 학자마다 그 의미를 달리 해석하고 있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일부학자들은 ‘밀로’가 다른 구조물을 지탱하기위해 예루살렘의 동쪽 경사면을 따라 세워진 부벽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워렌의 수로(Warren's Shaft /명칭)

1865년 영국은 전문적인 성지탐사의 정확하고도 체계적인 조사를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탐사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1857년 성지 발굴을 목적으로 영국공병대의 장교인 찰스 워렌 대위를 파견했다. 그는 기혼샘에서 부터 실로암 못으로 이어지는 525m의 지하 수로를 조사하다가 기혼샘 부근에서 수직으로 뚫린 통로를 발견했다. 적군이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여 성 바깥의 기혼 샘을 이용할 수 없을 경우 성 안에서 물을 길을 수 있도록 터널을 뚫은 지점이었는데 이것을 바로 ‘워렌의수로’라고 한다. 이수로는 B.C.1000년 경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요압이 몰래 침투해 올라갔던 지하‘수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윗이 정복한 여부스 족속의 도시는 기혼샘 위에 있는 남동쪽 언덕을 중심으로 그 규모가 4만m2 정도였다


*그발(Gebal, 지명)

지금의 야바일이며, 고대의 항구도시다. 레바논의 베이루트시에서 북쪽으로 약30km 지점의 지중해 해안에 위치했다. 헬라어로 비블로스라고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왜‘밀로’가 정기적으로 보수되어야 했는지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왕상 9:15; 대하 32:5 참조)

한편 밀로가 다윗성 북쪽의 동쪽봉우리에 있는 좁은 협곡을 메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마도 초기 여부스시대에 만들어진 ‘계단식 석조구조물’은 밀로의 일부였을 것이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공간에는 공공건물이 세워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어떤 주장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건 동쪽경사면에는 건축물을 지지하고 사용 가능한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부벽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다윗은 두로왕 히람의 도움으로 백향나무로 집을 지었다. (삼하5:1) 이 집은 궁전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솔로몬이 지은 화려한 궁전에 비하지는 못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다윗이 예루살렘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제단을 북쪽의 높은 고지에 두기 위해여 부스족속인 아라우나에게서 그의 타작마당을 사서 그곳에 여호와의 제단을 쌓았다.(삼하 24:18-25) 그리고 솔로몬은 다윗이 산 이 땅에 성전을 건축했다.(대하 3:1)


솔로몬은 다윗이 사들인 땅을 예루살렘성벽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예루살렘을 위한 위대한 포부를 실천해 나갔다. (왕상 11:27) 모리아산으로 알려진 북쪽의 성벽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을 요새화하고 성전과 궁전을 세우기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솔로몬은 페니키아에서 보내온 장인과 히람이 보낸 자재들, 그리고 징집한 노동력을 이용해 건축사업에 집중했다.


징집된 일꾼들은 성전건축을 위해 칠년, 왕궁건축을 위해 13년을 일해야 했다. 열왕기상 7장 1-8절은 레바논나무로 지은 집기둥이 있는 큰방, 재판정, 그리고 바로의 딸을 위한 집등왕궁의 여러 건물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이 서로 다른 곳에 떨어져서 세워졌는지, 아니면 시리아북부와 터키남부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큰 왕궁 비트 힐라니 Bit Hilani 양식 안에 속한 여러 부분을 나타내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어떤 경우든지 솔로몬의 왕궁은 그의 명성에 걸맞은 부와 규모를 자랑했다.


 ~이스라엘의 영광-'솔로몬성전'


솔로몬성전 올리브산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성전산에 걸린 일몰~


 여호와의 성전은 직사각형의 구조로 동서를 축으로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동쪽에 있는 야긴과 보아스로 불리는 두 청동기둥이 세워진 현관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간다. 이 현관은성전의 주요 공간인 ‘성소’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제사에 사용되는 금촛대 메노라 Menorah와 향단, 진설병을 놓는 금상이 놓여있다. 성전 서쪽 끝에는 ‘지성소’로 알려진 언약궤가 있는 정사각형의 방이 있다. 올리브나무에 금박을 입힌 두‘그룹Cherubim’이 묵묵히 거룩한 언약궤를 내려다보고 있다. 건축학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눈 신전의 구조는 하솔과 라기스에서 발견된 초기 가나안신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다 후에 지어진 ‘왕립신전’은 시리아의 텔타 이나트Tell Tayinat*에서 발견되었는데 B.C. 9세기로 추정된다. 텔타이나트의 신전은 솔로몬의 성전과 구조뿐 아니라 왕국과 근접한 곳에 있다는 것까지 비슷하다.


솔로몬성전의 외벽은 정교한 흰대리석을 현지에서 깎아서 만들었다. 내벽은 백향나무로 덮었고, 올리브나무와 황양목으로 바닥과 문, 문틀, 그 외 다른 가구들을 만들었다. 화려하게꾸민 조각과 귀한 보석, 그리고 금으로 입힌 장식들은 내벽과 각종 기물들을 장식했다.


복층의 창고들이 출입구를 제외한 성전의 모든 면을 둘러쌌다. 거대한 청동대야와 제단은 현관이 있는 동쪽 뜰에 있었다.

성전의 규모는 당시 측량의 단위인 ‘규빗’의 크기를 얼마로 보는지에 따라, 그리고 여러 본문에서 나오는 측량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왕상 6장; 대하 3장; 겔 40-42장)


규빗의 길이는 역사적으로 변동이 있지만 대략 44.4cm에서 53.3cm 정도로 본다.

만일 열왕기상 6장에 나오는 성전에 대한 측량 값을 내부의 면적과 현관을 포함한 모든 공간으로 생각한다면, 그 전체 길이는 35m70 규빗이고, 폭은 10m20 규빗이 된다. 하지만 에스겔이 성전 주변의 저장 창고까지 포함해 제시한 수치에 따르면 길이54m, 폭26m로도 볼수 있다. 어쨌거나 모든 사실을 종합해서 봤을 때 솔로몬성전은 매우 위대한 건축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성전에 대한 기억은 비록 그 실체가 파괴된 후에도 여전히 신실한 유대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스3:12~13; 학 2:1·3.)


솔로몬의 업적 가운데 가장 기념할 만한 것은 성전 건축이다.

다윗성 북쪽 높은 곳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성전은 350년 후 느부갓네살이 파괴하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영광을 나타냈다. 페니키아의 영향력은 칠년 동안의 성전 건축기간에도 주도권을 장악했다.


두로왕 히람은 솔로몬을 도와 목재와 숙련된 장인들을 제공했다.

페니키아의 도시 그발Gebal, 비블로스*에서온 사람들은 솔로몬의 일꾼과 합류했다.

이스라엘은 금속에 관한한 경험이 없었으므로, 페니키아로부터 금속장인과 함께 두로 사람 히람도 데려왔다.


그는 청동기둥과 장식을 만들고, 커다란 대야 또는 ‘녹인바다’와 청동제단,

그리고 성전에서사용 되는 다른 기물과 도구들을 만들었다. (왕상 6장)


(받은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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