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기에 나이(햇수 나이)란 무엇인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떻게 나이가 드는가? 

한 해 두 해 더해가는 세월이 즐겁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라고 부를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생각해 보라.

 

나이 때문에 무엇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른의 개념이 무엇인지?

 

그리고 노년기 나이에 대해  정형화된 시각으로 나이를 구분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논쟁도 벌린다.

시 당신이 늙어가면서 ‘나는 늙었다’ 아니면 ‘나는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가?

 

꽃다운 10대의 순수함,

청년기에 격렬함, 중년기의 중후함,노년기에 원숙함이라는 표현이있지만 과연 언제쯤부터 노인이라고 할까?

 

60, 70대부터일까? 이와 관련해 햇수 나이로만 성인을 평가하는 것이 옳지않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나이에 따라 인간 발달과정이 형성되고 순간순간 꿈을 향한 열정과 도전 의식이 변한다.

‘플라톤’은 여든 한 살까지 저술활동을 했다.

 

‘모짜르트’는 8살에 교향곡을 썼다고 하고, 빌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MS) 회사를 창립할 때 나이가 19살이었다고 한다.

 

리바이던(Leviathan)을 쓴 ‘홉스’(T, Hobbes)는 63세에 중풍증세가 심해지면서

손으로 글을 쓸 수가 없어서 필경사를 고용해 글을 썼다.

 

뉴욕필하모니 음악감독을지낸 ‘로린 마젤’(Lorin Maazel)은

80세에 2012년 뮌헨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영원한 현역이다.

 

그밖에 80세 노인이 20대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은퇴 후 남은 시간, 늙어가면서 보낼 10만 여 시간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보내느냐

다.

남은 인생을 어디로 안내할까 하는 불안감이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내 나이 70, 80, 90살을 살지만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 아는 방법은 없으니 말이다.

생명의 길이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닌 신의 영역이다.

 

다만 내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생존할 시간이 많지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미지의 시간은 노년기의 정신상태, 인지능력, 사회적 관계 등에서, 그리고 장애에 따라 좌우된다.

 

성공적 노화조건들이 충족될 때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즐겁게, 후회 없이 살아 갈수 있다.

 

그런데 고령의 시기에는 기본적으로

(1)의학적 관점에서 고령을 병리학적 장애시기,노쇠의 시기로 본다.

(2)고령의 나이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복(福)이라거나 신의 사랑의 징표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쇠퇴한 것으로 인식한다.

 

말인즉 노년기에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그림 같은 미소로 세상을 볼 수 없는 외로움, 마음의 병(심통)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1.진짜 나이란 무엇인가?

 

혹시 “내 나이가 진짜일까?” 하고 의심해 보지는 않았는가? 

사실 우리는 매일 내 나이를 헤아려 보면서 육체의 변화를 느낀다.

어떤 이는 60살을 넘겼지만 40대 청년같은 모습을 유지한다.

 

그래서 요새 환갑잔치를 하는 가정이 없을 정도다.

음식점에서는 환갑잔치 예약을 받는일이 거의 없어졌다.

노인정에서 커피 끓이는 막내가 70살 쯤 된 젊은 노인들이다.

 

보통 75세가 돼야 경로당에서 노인 취급을 해 준다.

전에는 노인들이 어른 대접을 받으려했지만 요즘은 노티는 질색이고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 호칭조차 싫어하는 분위기다.

 

이쯤 되니 노인의 기준을 65세 혹은 70세로 올려놓는 것을 고려 해볼 때가 되었다.

 

그런데 나이는 개인의 생애과정 및 건강상태, 사회활동 여부에따라 나이를 나눠보기도한다.

습관적으로 달력나이(출생이후 햇수)를비롯해

육체적 나이, 건강나이, 정신적 나이, 사회적 나이 등 4가지가 그것이다.

 

(1)햇수 나이는 출생이후 살아온 햇수(달력)의 나이다. 

(2)육체적 건강 나이는 늙었어도 육체적으로 모두 건강한가의 척도이다.

(3)정신적 나이는 늙었지만 꿈과 열정,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한다.   

(4)사회적 나이는 늙었지만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잘 유지 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수 사회에서 생물학적 나이(육체적 나이)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를 먹어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가(건강수명)를 중시하는 것이 노년학계의 대세다.

 

2.나이에 대한 감정. 부정적 감정

 

화려한 정원에서 주목받는 꽃의 시절이 지나갔다.

80,90년 써먹은 몸이 자꾸만 아프다고 한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간다.(the time never stops) 우리는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늙어간다.

 

60대는 60km로, 70대는70km 속도로 빨리 지나가는 듯하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을두고 어떤 이는 빠르다하고 어떤 이는 느리다고 느낀다.

 

때로는 속도를 느낄 수 없이 느리게 오는 듯 했는데 ‘벌써 70대 네!’ 하며  늙음을 한탄 한다.

세월의 흐름이 달라서가 아니라 서로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년(older age)의 삶에 대해 추상적 부정적 개념이 작용한다.

흔히 ‘나는 늙지 않았다’고 외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 현실에서 나이 때문에 부정적인 인상을 받는다.

 

‘장자’(莊子)에서 보면 노화의 긍정과 부정을 볼 수 있다.

육체적 노쇠와 죽음에 이른것은 부정성이요, 도(道)를 체득하고 만물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확대 할 수 있는 시기로 보는 것이 노년기의 긍정성이다.

 

그러나 늙어가면서 삶의 선택 여지가 줄어드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노인을 증오하는 세상이다.

더 이상 노인을 위한 찬가는 없는 듯하다.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미누어’(Minois, 1989)가 쓴《노년의 역사》에서 신(神)은 노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노인을 행해 여러 가지 의문의 시선을 보낸다.

 

노년은 신체의 둔감성, 타성적 활동, 자유의 제한, 희망의 부재, 기억의 상실, 질병과 관련돼 해석한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밥맛도 없어지고  조금만 움직여도 피로해지고 기억도 가물가물해 진다.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듯이  눈에 띄게 얼굴에는 검버섯과 잔주름이 늘어나게 된다.

신적 감성적 미숙아요 영적인 성장이 멈춘 상태다.

 

3.나이를 정의하기 어렵다.

 

흔히 말하는 ‘할아버지’ 라는 네 글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손자를 봤다고해서 할아버지인가? 아니면 환갑이 지났다고 해서 노인인가?

그러나  이제는 60회갑이 곧 늙음의 문이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다.

 

요새는 노인 같은 젊은이, 젊은이 같은 노인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20살의 청년보다 60살의 노인이 더 청춘일수 있다. 

80살이지만 사지 육신이 강건하니 폭발하는 화산처럼 어디든지 뛰어들 마음이다.

 

50-60대도 동안(童顔)의 얼굴이 인기다.

날씬 하지만 피부가 탱탱해서 볼륨감이 넘치는 중년의 여자들도 많다.

물론 단순히 주름이 없다고 해서 젊어 보이는 것도 아니다.

 

나이에 비해 표정이 맑고 활기가 있는 사람이 더 젊어보인다.

그래서 나이라는 의미는 점차 정의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나이에 맞게 행동한다는 규범이 점차 없어지고 있다.

 

늙음과 젊음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도 사라지고 있다. 

수명연장으로 노인이라고 결정 짖는영역이 애매해 진 것이 오늘의 분위기다.

 

다만 늙으면 정신적 노화, 사회적 나이가 문제다. 

정신이 냉소주의와 비관주의,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한 당신은 20살이라도 늙은이다.

30살이 되었어도 능력이 없으면 어딜가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남다른 의지와 낙관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80살이라도 청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시인의 메시지다.

 

즉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시(詩) ‘청춘’에서 “

청춘이란 단어는 기간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밋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한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정열을 말한다.”

 

사실이 그렇다. 환갑이 되었다고 여덟팔자 걸으며 어른행사 할것도 아니다.

60, 70대라는 물리적 나이는 산책이나 즐기며 쉬라는 나이가 아니다.  

나이 70살이 되면서 묘(墓) 자리 보러 다니는 것도 못난 사람이 아닐 까? 싶다.

 

여기서 우리는 내 나이를 다시 본다.

내 운명이 어떻게살았고 어떻게 늙어왔는지?

그것은 자신이 만든 것이니 이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 퇴직을 했지만 일하는 매력은 없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늙었지만 할 일 없이 뒤 방에 들어 앉아있거나 백수로 지내는 것을 원치않을 것이다.

80살이 되었지만 젊은이들처럼 일하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늙어서도 뛰지않고 날고싶은 심정이 노인들의 열정이다.

 

“나는 늙은 노인이 되고 싶지 않아!” 하며 적극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이 때 조심 할 것은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각종 위험을 잘 피하면서 

삶의 선택과 현재의 주어진 여건과의 균형을 이뤄가는 삶이 필요하다.



4.나이를 차별하는 인사로 ‘연세가 많으시네요?’

 

사실 외모보다 나이차별이 심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래전부터 유행하고있는 ‘나이는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나이에서 오는 차별을 해소하려는 용어로 이해된다.

나이만으로 늙었다고 치부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다.

 

100세시대가 되면서 시니어계층도 분명히 신세대임을 반영한다.

늙어가지만 사회일원으로 젊은이 못지않게 일하고 싶어 한다.

각종 취업박람회와 지역 축제에 참가하며 일자리를 구하거나 사회적 참여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나이차별주의(ageism)가 사회적으로 광범위 하다.

나이라는 폭력성이 작용하고 있다.

심지어 의사들조차 사회생활을 떠난 상태의 노인들에게 나이차별적이다.

 

노인들을 건강이 좋지 않은 환자처럼 취급을 하면서

신체적 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병이 들어 찾아왔어도 치료조차 관심을 두지않는 식의

“연세가 많으시네요?”하며 부정적인 늙은이로 보고 있다.

 

우리말로는 한물간 늙은이로 비유하는 꼰대, 영감태기, 할멈등의 용어로 노인들을 폄하하고 있다.

단순한 노인취급은 개인의 존엄성을 낮게 평가하거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의존적인 노인으로 보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영화《은교》(정지우 감독, 2012)에서 “젊음은 너희가 노력해서 얻은상이 아니듯 늙음도내가 잘못해서 받은 벌이 아니다.”했다.

서구사회에서는 남의 나이에 관심을 크게 두지않는다.

 

채용면접에서도 나이를 묻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나이가 개인정보로 취급되어  동료들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나이로 인한 선입관을 줄여가려는 배려이다.

 

분명히 연령차별주의는 인간관계 및 사회활동에 제한을 가져 오는 배경이 된다.

사회적으로 연장자들을 다른 집단의 사람들처럼 취급하게 된다.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노인들을 멸시하거나 냉대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그야말로 노인이되면서 ‘연령에 갇힌 사회’(age-locked society)에 살아가는 형국이 된다.

이같은 연령차별주의는 노화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고정관렴에 기인한다.

 

5.나이에 따른 현실적 대응 방향

 

인간의 생명이 우주적 운명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늙는 것은 자연섭리요, 정한 길이 아닌가? 나이 들어가면서 나이 이상 늙어 보이거나,

아니면 젊고 건강하게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인과(因果)일 것이다.

 

그러니 늙음을 긍정적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이 잘 늙어가는 태도이다. 

흔히 사람들은 60세를 지나면서 70세 혹은 80, 90세 로 밀려간다는 감정에 휩싸인다.

 

사실 인생이 살아가는 길에는 올라가는 길이 있고 내려가는 길이 있다. 

올라가는 시간이 있고 내려가는 길이 있다. 브레이크를 잡아도 세월은 간다. 

비탈길을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간다는 기분만이 든다.

 

물론 노인들이 20대의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머릿발’도 자연히 떨어지게 마련이다. 늙어서는 ‘간 큰 짓’도 하기 어렵다.

하이 킥 하기란 이미 늙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또 노인들에게 압박감으로 다가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그 나이라면 버릴 때도 되었다.

나이라면 힘들 때도 되었다. 그 나이라면 그만 둘 때도 되었다.

 

그 나이라면 죽을 때도 되었다.” 라는 말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나이 값을 해야 한다든지 뒷방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거세다. 

게다가 사람들은 흔히 ‘노인은 어린애와 같다.


노년기는 ‘제2의 유년기’로 불리기도 한다. 늙었어도 철이 안 들었다고 핀잔받기 일쑤다.

실 80세를 넘으면 다시 애기로 변해 가는 모습이 노화 과정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전히 지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은퇴 이후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자율성의 손실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리고 나를 위해 내 몸을 관리 할 수 있느냐의 문제, 죽을 때 까지 내 정신세계를 잘 지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어디에도 오류가 있게 마련이지만 노인들은 뭐가 되고자하는 인생이 아니라 뭐를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노년기의 부정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건강수명 요구보다는 긍정의길을 확대하는 것이 노년기의 가치를 높이는 실제적 방법이다.

덧셈이 아니라  뺄셈의 지혜로 살아갈 때 긍정의 심리가 생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나이의 의미가 긍정 혹은 부정적으로 생각 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폐기되어가는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정신적으로 활력을 잃지 않으면

늙어서도 유연하고 민감한상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른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 이론이 있다.

 

또 박완서의 소설《노란집》에서는 “노년기에 아무것도 일어날 수없다면 그건 삶에대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최고령 연방법원 판사인 ‘웨슬리 브라운’(1907년생)은

103세 나이에도  “나는 목숨을 다할 때까지 또 정신이 온전할 때까지 하라고 임명한 공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는 산소튜브를 꽂고 휠체어에 탄 채 재판을 한다.

 

결론적으로 살만한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닌 상실감에서  천국의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가진 것 많고 성공한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한 배안에 있다.

 

노인들이지만 감성도 감정도 경이로움도 날아간 것이 아니다. 팔자타령이나 할 시간은 없다.

러니 늙었지만 경험을 가지고 있고 정신작용이 활발하다는 사실에서  매우 낙관적인 비전가질 수 있다.

 

다만 낮아지는 생활이다.

늙으면 소박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노년기에는 젊은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희망과 평안을 주는 이웃들과 잘 지내는 일이다.

 

결국 당신은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늙었지만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균형을 이뤄가며 살아가는 것이 성공적 노화일 것이다.


<우 정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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