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기초 인간론 논쟁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철학적 인간학, 신학적 인간학, 자연적 인간학, 교육적 인간학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신학적 인간학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그럼 구약 성경에서 바라본 인간은 어떤 것인가? 창세기에는 인간의 창조에 대해 두 번의 기사가 나온다. 첫 번째 기사는 인간은 피조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들 중 최후의 존재로 그리고 창조의 절정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졌고 세상과 그 생물들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부여 받는다. 두 번째 기사는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듯 하나님은 사람을 빚어 만들었으며 생기를 불어 넣을 때 생명을 얻어 생령이 된다. 그리고 남자는 사람을 의미하는 아담이란 이름이 지어졌고 여자는 생명을 의미하는 하와라는 이름을 받았다. 신학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창조주로 인간은 피조물로 창조되어 지속적인 생명과 존재를 얻기 위해 하나님에게 의지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특별한 관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서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곧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정의될 수 있다. 수 세기에 걸쳐 이 단어들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해 왔다. 가장 중요한 해석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적 형상, , 육적-영적 존재, 주권, 남성과 여성,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인격, 그리고 자녀 됨 등으로 이해하는 것 등이다.


또한 구약 성경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집합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의존이 항상 존재한다. 히브리적 사유체계에서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 평가된다. 반면에 큰 공동체는 또한 개인을 통해서 반영된다. 그 개념은 '공동인격'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아간의 범죄의 경우 한 사람의 죄책은 공동체 전체에 전가된다. 반대로 다윗과 솔로몬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전체의 대표로 행동한다.


또한 구약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죄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며 하나님이 인간이 갖고서 누리기를 바랐던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다.


그럼 신약에서 바라본 인간은 어떠한가?


신약은 구약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신학적 인간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창조자로부터 궁극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판단의 기초 위에서 자유롭게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결정의 결과와 책임을 지는 존재라고 말한다.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며 또한 하나님에게 깊이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리, 사마리아인,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등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용인과 사랑을 통하여 예수님은 인간이 무엇을 가졌든 관계없이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는다고 말한다. 바울 서신에 나오는 인간에 관한 가장 놀랍고도 발전된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기독교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관한 진술과 죄의 위력 아래 있는 인간에 관한 진술에서 발견된다. 바울은 인간 본질의 모델과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사망과 종 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생명과 자유 안으로 옮겨가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인간론 논쟁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둘러싼 쟁점들은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간의 논쟁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펠라기우스는 4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태어나 380년 즈음에 법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거기서 그는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다. 펠라기우스는 기독교적 삶을 중요하게 여겼고 하나님의 법에 따라 엄격하게 살아가기를 원했다. 펠라기우스는 그것을 자기가 법률가로서의 직업을 포기하고 완전을 얻기 위해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전파하기 시작했고 곧 켈레스티우스라는 유력한 법률가의 회심을 얻어냈다. 410년에 알라릭 족이 로마를 정복하자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로마를 떠났다. 그들은 북 아프리카의 힙포에서 감독 어거스틴을 만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어거스틴은 도나투스 논쟁을 다루기 위해 그 도시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은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 후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갔고 거기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그러나 켈레스티우스는 카르타고로 갔다. 그는 그 곳에 있는 교회에서 안수를 받으려 했지만, , 아담의 타락, 그리고 세례에 관한 그의 견해 때문에 이단으로 선고 되었다.


그럼 펠라기우스는 어떤 주장을 펼쳤는가?


펠라기우스는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믿었다. 그러므로 개인은 자신이 선택한 모든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다. 모든 죄는 개인의 선택의 결과, 즉 하나님을 멸시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의 결과다. 우리 안에는 죄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강하고 단호한 자유 의지가 있다. 그 자유의지는 창조주가 인간 본성에 보편적으로 심어 놓은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주님이 명령하신 것을 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바라시는 것을 명령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인간을 아무런 자유도 갖고 있지 않은 꼭두각시로 바꾸어 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인간은 죄 없이 지낼 수 있고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도 있다. 그는 누구든 실제 삶 속에서 평생토록 죄 없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죄로부터 돌아설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인간은 죄 때문에 회심을 못하게 되지는 않는다. 펠라기우스에게는 선과 악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으려면 개인들이 선을 택할 능력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 사람들은 완전을 위해 일하거나 악을 위해 일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느 선택이든 실제적인 가능성이 될 수 있다. 펠라기우스는 또한 그와 같은 자유는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라고 믿었다. '내가 말하는 은총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자유 의지를 갖고서 창조된 바로 그 상태를 의미한다.' 아담의 죄는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오직 아담과만 관련이 있었다. 비록 아담의 죄가 영혼과 육체의 죽음을 가져오고 인간에게 불순종의 습관을 제시하면서 창조 질서 안으로 죄를 끌어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다음 세대로 전가되는 것은 오직 '습관' 또는 '전례'에 의해서일 뿐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기 어려운 것은 오직 죄를 짓는 오랜 습관 때문이다. 그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를 오염시키기 시작한다. 해를 거듭하면서 그 습관은 우리를 중독에 빠뜨리면서 또한 마치 본성 자체의 힘처럼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구속함으로써 서서히 우리를 부패시킨다. 하나님은 율법이라는 형식과 선을 행하는 사람에 대한 상급이라는 약속의 형식으로 인간을 인도하심으로써 인간이 죄에 저항하도록 도우신다. 율법에 순종하는 자유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오며 그 은총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보다 쉽게 완수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인간이 바라기만 한다면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킬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럼 어거스틴은 어떻게 주장했는가?


어거스틴은 반() 펠라기우스적인 저서들을 통해 그런 주장을 거부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는 '선천적으로' 자유롭다고 믿은 반면 어거스틴은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의 자유는 인간의 선택하는 능력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어거스틴은 참 자유는 오직 성취하려는 의지의 능력 안에만 있을 뿐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움과 은총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마치 자녀가 부모로부터 해방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것은 하나님처럼 우리도 자유를 갖고 선과 악을 선택해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인간을 부모와 자녀관계로 보지만 그것은 더 적절하게 갓난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로 본다. 갓난아기가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처럼 인간은 모든 선과 악에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어거스틴은 아담이 완전하게 거룩하게 그리고 만약 그가 생명나무 열매만 먹었다면 죽지 않을 수 있게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그 첫 사람은 '죄 짓지 않을 능력, 죽지 않을 능력, 선을 버리지 않을 능력' 그리고 그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서 견디어 낼 능력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죄 짓지 않을 능력'으로 묘사한 아담의 지위는 그가 죄를 범했을 때 영원히 침해된다. 아담의 자유는 상실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죄에 빠짐으로써 죄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그를 불순종에 이르게 한 교만 때문에 죄를 범했다. 이것이 원죄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책이 그 이후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 영원히 유전된다고 믿었다. 그 타락은 아담이 자유를 오용 한데서 유래했고 그의 범죄는 전 인류를 타락시켰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죄책은 육체적인 생식행위에 의해 유전된다. 어거스틴은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이 모든 죄인들 속에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여행을 하거나 집에 머무는 것과 같이 누구나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죄로부터의 자유, 의를 위한 자유, 그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상실했다.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할 자유는 죄의 힘에 대한 속박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죄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필연적으로 죄를 범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제나 자유 의지를 즐긴다 할지라도 그 의지가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권이 있기는 하나 사람들은 언제나 악한 것을 택한다. 인간은 죄 지을 자유를 갖고 있으나 죄 짓지 않을 자유는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인간은 어거스틴이 욕정 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아를 향하게 하는 자아 중심적 욕구라고 부른 것들에 의해 오염된다. 어거스틴에게 인간은 죄의 덩어리, 파멸의 집단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에 의해서만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의지의 참된 자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새로운 삶 에로 이끄셔서 죄가 변형시키고 손상시킨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주실 때만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의 사회로 412년에 카르타고에서 열렸던 북 아프리카 교회의 한 공의회는 켈레스티우스의 견해를 용인할 수 없는 것으로 선언했다. 펠라기우스의 견해는 그가 수녀 디메트리이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화를 초래했다. 이 편지에 대한 격한 반응은 제롬과 오로시우스라는 두 영향력 있는 서방 신학자들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펠라기우스가 인간 의지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에 반대했다. 결국 214명의 서방 감독들은418년에 열린 카르타고 총회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했고 그 판결은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에베소 공의회에 의해 다시 확인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견해는 529년에 열린 오렌지 종교회의가 그 논쟁들을 종식시킬 때까지 반()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수정된 형태로 존속하면서 다음 세기 내내 교회 안에서 계속 논쟁을 유발했다.

   
동방과 서방의 인간론 인간론 논쟁
 
순교자 저스틴
변증가들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저스틴은 '우리는 태어나는 것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과 관련해서는 선택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저스틴의 주장은 당대의 유력한 관념들과 상충하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은 우주는 세계의 구조 안에 주입된 보편 이성 또는 로고스의 지배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이것으로부터 만물은 보편적인 자연질서를 갖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생명을 얻는다는 관념이 나타났다. 그 질서가 '자연법'이다. 인간이 고결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런 힘 혹은 각 사람의 행동들을 미리 결정하는 운명에 복종해야 한다. 반면 대중적인 점성술은 만물이 천체에 의해 조종된다고 가르쳤다. 영지주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을 피하거나 선을 택할 능력이 없다고 가르쳤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게 되어 있다. 저스틴은 그런 체계들에 맞서서 인간의 책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켰다. 저스틴은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들을 예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이 그들의 자유를 통해 어떻게 행동할지를 미리 아실 뿐이라고 주장한다. 저스틴은 아담의 죄와 그 이후 사람들의 죄를 연결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담과 하와처럼 되어 죽음을 자초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 각자는 아담과 하와처럼 홀로 심판을 받고 정죄를 당한다. 타티안과 데오필루스의 좀더 충분하게 발전된 설명에 따르면 아담의 죄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입구이기는 하나 그것은 모든 인류가 선택하는 죄의 원형 또는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도 데오필루스와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는 창조 시에 완전함이 아니라 완전함에 까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을 뿐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멸과 불후라는 선물들 외에도 그들이 지성적으로 보다 나은 것들을 택하도록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주셨다. 이런 선택의 자유는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은 선과 악의 차이를 앎으로써 선을 높이 평가하고 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했고 그럼으로써 그가 부여 받았던 형상과 모양을 잃었다. 각 개인 역시 아담을 따라 의도적인 불순종을 통해 죄를 범한다.

터툴리안
터툴리안은 아담과 하와 이후에는 죄 있는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죄 있는 영혼을 전해 주었다고 믿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죄를 공유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범죄에 대한 참여와 사망 안에서의 교제와 죄에 대한 협력과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인해서 세상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런 죄는 '우리의 잘못된 기원'이다. 그렇게 해서 터툴리안은 '원죄'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다. 선이나 악을 택하는 능력인 인간의 자유 의지는 소멸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 결단이라고 불리는 선택 능력에 의해 형성된다. 이 능력은 우리의 본성에 속해 있고 변화가 가능하다. 그는 유아 세례 반대를 통해서 유전된 죄 많은 영혼 때문에 악을 선택하는 경향을 물려받는다고 믿지 않았다.

클레멘트와 오리겐
동방 교회의 신학자들은 첫 번째 부모들의 범죄가 후손들에게 전해진다는 원죄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문제와 관련해 터툴리안을 따르지 않는다. 클레멘트는 불순종을 에덴동산에서의 첫 번째 죄로 보지만 그것이 자손에게까지 전달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본의가 아닌 행위는 무지 때문이든 강제 때문이든 상관없이 심판 받지 않으며 자유 의지의 결과가 아닌 행위들은 전가되지 않는다. 클레멘트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죄가 있으며 모두 다 병들고 눈멀고 무지하다고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의 죄책에 연루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클레멘트는 영지주의자들에 맞서서 오직 자신이 지은 죄들만이 죄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죄에 대해 승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게 된다.


신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오리겐은 인간의 영혼은 선재하며 선재하는 그 영혼들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자유 의지를 부여 받았다. 각 영혼들은 하나님을 본받음으로써 진보하거나 하나님을 무시함으로써 몰락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혼을 제외하고 그 모든 영혼들은 하나님에게 불충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죄에 빠진다. 그 영혼들이 범죄할 때 그것들은 사람들처럼 육신을 입는다.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은 오리겐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교회는 모든 이성적 영혼은 자유 의지와 결단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그의 조상들의 죄의 길이나 하나님의 의로운 길 중 하나를 따를 수 있다.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영혼들은 하나님의 천사가 될 수 있지만 반면에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마귀의 천사들 중에 속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리겐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움을 받는다. '우리의 완전은 우리가 활동하지 않는 채로 남아 있는 것을 통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우리 자신의 활동에 의해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완전을 이루는 일에서 보다 큰 역할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4세기와 5세기의 인간론
기독교인들은 혼란한 사회적 상황들, 불안정한 제국 정치, 추가되는 세금들, 그리고 박해의 발발 등에 직면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일부의 기독교인들이 독거와 고립의 삶을 선택했다. 그 금욕주의자들 중 다수는 세상에서 물러섬으로써 자신들을 순결하게 지킨 것에 대한 궁극적인 보상과 내세의 삶을 기대했다. 금욕주의자들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자주 강조했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을 행하기를 바랐지만 그에게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도 허락하셨다. 이것은 선을 향한 그의 선택을 고결하고 상 받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은 아담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악을 행할 수 있다. 아담의 죄는 환경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보다는 죄를 짓게 만드는 과정을 출발시켰다. 인간은 여전히 자유로운 선택권을 갖고 있지만 그런 유형을 뒤집고 하나님을 따르기는 아주 어렵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삶은 위협적인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싸움이다. 오직 경건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기독교 공동체만이 죄를 지으려는 성향을 뒤집는 순종의 모범을 제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유효하다. 그러나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선택하는 자유다. 이집트의 안토니와 투어스의 마틴 같은 인물들로 대표되는 이런 금욕주의적 견해들은 영국의 수도사 펠라기우스의 작품들에서 완벽하게 표현되게 된다.

아타나시우스와 동방 신학자들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 받았다. 그들은 그 형상으로 인해 불멸과 불후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죄를 범함으로 육체의 불멸성을 상실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이 육체의 불멸성을 상실한 것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거나 그가 더 이상 자유 선택권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동방 신학자들은 아담의 죄책이 그 이후의 인간에게 전달된다고 보지 않았다. 신생아들은 죄로부터 면제된다고 가르친다. 크리소스톰은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5:19)는 말씀은 그 이후 세대들이 형벌과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책임으로 죄인이 되지 않는 한 그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판정 받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부당하게 보인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에 참여하며 또한 그 결과로서 생기는 연약함과 함께 살아야 하기는 하지만 인간 전체가 아담의 죄책을 공유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게 남아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결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크리소스톰의 말처럼 '하나님은 선과 악을 우리의 능력 안에 두셨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한 결정을 인정하시고 마땅치 않아 하는 마음을 제지하지 않으시며 기꺼워하는 마음을 끌어 안으신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우리의 본성이 자유로운 선택을 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암브로즈와 서방 신학자들
암브로즈를 비롯한 서방신학자들은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모든 것을 그 영향권 안에 포함시키는 죄에 빠지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우리 모두는 첫 번째 아담 안에서 범죄했다. 또한 자연적인 상속에 의해 '죄책이라는 유산'이 한 사람에게서 모든 사람에게로 옮겨졌다. 아담은 우리들 각자 안에 있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통해 죄가 모든 사람에게로 전달됨으로써 그 안에서 인간의 본성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나는 느낀다. 아담 안에서 나는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했다. 또한 아담 안에서 죽었다.' 암브로즈는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라는 성경 구절을 자신의 견해의 기초로 삼는다. 그 타락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우주적인 대재앙이었다. 원죄는 생식이라는 성적 행위를 통해 유전된다. 세례는 자범죄들을 제거하며 세족식은 유전죄를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암브로즈는 또한 선택의 자유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자유 의지에 의해 우리는 선을 향한 마음을 먹거나 악을 향해 기울어진다.

   
오직 성경으로 변질된 교리· 종교적 허상 벗기자
김진영 기자 입력 : 2017.10.20 20:13


국내 신학자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공동학술대회 개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공동학술대회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공동학술대회 개회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인 1031일을 10여일 앞두고 국내 신학자 4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양대 신학회인 한국기독교학회와 한국복음주의신학회를 비롯해 한국개혁신학회와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공동학술대회'20~21일 일정으로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 있는 소망수양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근래 가장 큰 규모로 열리는 학술대회인 만큼 이틀 동안 세 번의 분과별 발표를 통해 총 78개의 논문이 소개된다. 각 논문은 '종교개혁과 오늘의 한국교회'라는 큰 주제 아래서 500년 전 종교개혁을 다방면에서 분석하고 이를 통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성찰한 것들이다. 여기에 두 번의 주제강연과 세 번의 예배, 대토론회 등의 순서가 마련됐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인 심상법 박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은 우리의 기독교를 돌아보는 시간"이라며 "'저항''변혁'이라는 우리의 정체성과 행동양식을 낳은 종교개혁의 두 키워드는 오늘의 침체된 한국교회를 돌아보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이번 학술대회에 대해선 "진보와 보수를 넘는 보다 진솔한 토론의 광장이 되고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우리를 깊이 돌아보는 지성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기독교학회 회장 노영상 박사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엄밀히 살피면, 그것은 대학의 신학교육과 시민교육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며 "신학과 목회, 신학교육과 사회적 실천 전반에서의 개혁을 검토하고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을 진단하는 이번 학회를 통해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한국개혁신학회 회장 김재성 박사는 "종교개혁의 핵심은 정치투쟁이나 도덕적으로 사회를 갱신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성경적으로 회복하려는 노력이었다""마침내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나 새롭게 제기한 성경의 가르침들은 신학적인 교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은혜의 신학이 펼쳐지면서 성도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근거로 삼고 있는 것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유산과 교훈들이며, 그것은 모두 다 성경에서 터득하고 배운 것들이다.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신학사상, 교리적 가르침, 중심적인 교훈들은 모두 다 성경에 근거한 토론과 탐구의 결과임을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회 회장인 이종윤 목사는 "이제 우리는 500년 전 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에 감사하고 그것을 복습할 뿐만 아니라, 2의 종교개혁의 횃불을 드는 심정으로 이 시대의 남은 그루터기가 되어 성경적 교회를 일으켜야 할 것"이라며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굳게 붙들고 이 시대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거듭나자"고 했다.
 
김재성
한국개혁신학회 회장인 김재성 박사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신학자 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이어 첫날 개회예배에서 '일한 것이 없어도'(4: 1~8)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주승중 목사(주안장로교회)"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주신 선물이다. 그것은 일을 하고 난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오직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며 "그리고 그 은혜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내어준 결과로 우리가 얻은 것이다. 그렇게 새 피조물이 된 것"이라고 했다.
주 목사는 "그런데 이처럼 새 피조물이 된 자들은 그 구원의 은혜를 인하여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이는 500년 전 종교개혁자들도 수없이 강조했던 것"이라며 "개신교회가 은혜와 믿음만 강조한 나머지 거룩한 삶에 무관심하다는 건 오해다. 행위는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지만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 500주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신학자들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신학자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첫날 개회예배 후 김재성 박사가 발표한 이 선언문에서 신학자들은 총 10개의 항목에서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들을 재확인하고 이를 계승할 것을 다짐했다. 특히 첫 번째 항목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릇된 신학과 전통에 맞서 오직 성경 말씀의 권위에 의존해 변질된 교리와 잡다한 종교적 허상들을 벗겨내어 기독교의 복음을 제시하려 했던 개혁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둘째 날인 21일은 분과별 논문발표와 김재성·박일영·이정숙 박사·송태근·이수영·정주채 박사가 패널로 참여한 '종교개혁 전통에서 본 한국교회의 개혁과 연합' 주제 대토론, 폐회예배 순서로 진행될 예정이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신학자 선언]
김진영 기자 입력 : 2017.10.20 20:14


한국개혁신학회 회장인 김재성 박사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신학자 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종교개혁 500주년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하는 한국의 신학자들과 참가자들은 마르틴 루터가 15171095개조 조항을 발표했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며, 종교개혁의 신앙적 유산을 재조명 하면서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의 회복과 사회적 갱신을 통해 교회와 사회를 개혁코자 하였던 것을 기억하며, 이에 우리도 근본으로 돌아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1.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릇된 신학과 전통에 맞서 오직 성경 말씀의 권위에 의존하여 변질된 교리와 잡다한 종교적 허상들을 벗겨내어 기독교의 복음을 제시하려 했던 개혁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것을 선언합니다.   
  
2.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셔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음을 고백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계승해 나갈 것을 천명합니다.
 
3.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해서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기독교 복음에 대한 확신을 세상과 교회를 향해 선포할 것을 다짐합니다.
 
4. 우리는 인간이 성취와 종교적 업적이 없을지라도,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고백하는 믿음을 통해, 죄의 용서와 성화 그리고 구원이 주어진다는 종교개혁자들의 복음 선포가 지금도 유일한 소망임을 확신합니다.   
  
5.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힘썼던 정신을 계승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에 근거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세상 속에서 섬기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6.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상호 존중하였으며 진리를 회복하여 교회를 바로 세워나가고자 연합과 일치의 노력을 경주하였음에 유의하면서, 오늘날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지상의 교회들이 일치와 연합을 위해 힘쓰는 것이 시대적 과제임을 확인합니다.
 
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악과 부패에 맞서 정의로운 평화를 위해 노력하며, 자신과 주변을 계속적으로 갱신하기 위해 날마다 선한 싸움에 힘쓸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주님의 샬롬을 성취하기 위해 국가 간의 폭력, 특히 오늘의 한반도에 드리워진 핵전쟁의 위기를 끝내야 하며, 불의한 사회 상황이 가져오는 폭력, 또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생태계의 파괴를 극복해 나갈 것을 선언합니다.
 
8.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십자가의 신학'을 강조했던 것처럼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돌보시고 눌린 자들과 소외당한 자들을 치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목양해 나갈 것을 천명합니다. 모든 교회들이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는 목회 철학과 개교회 중심주의, 성장주의, 권위주의 등을 내려놓는 것이 오늘의 과제이며, 작금의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각종 증오와 갈등을 사랑으로 감쌀 책임이 기독교인들에게 있음을 확인합니다.
 
9. 기술자본주의 시대는 인간의 삶의 조건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으나, 역설적으로 삶의 환경은 황폐해졌습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질서 내에서의 새로운 기술 발전을 기대하면서, 그에 따른 생태계에 대한 책임적 윤리 의식을 잊지 말 것을 다짐합니다.
 
10. 신학은 겸허히 교회를 섬겨야 하며, 교회는 신학 앞에서 항상 자신을 조망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와 신학은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에게 배우며 서로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교회 없는 신학이나, 신학 없는 교회는 온전치 않은 것으로, 우리는 신학무용론의 반지성주의와 교회 없는 신학의 공허함을 모두 경계합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것을 다짐하면서, 진리에 대한 확고한 태도와 경건한 자세를 갖추고, 모든 일에 겸손하면서도 용기와 희망의 확신을 갖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 진리를 적용하고 발전시켜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사명에 헌신할 것을 선언합니다.
 
20171020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공동학술대회 참가자 일동
  
   
교회 부패의 원인이 이신칭의’? 안주하려는 인간의 본성 탓
입력 : 2017.09.29 09:05 
  

행함은 믿음을 만들지 못합니다... 믿음의 열매일 뿐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믿음을 평가절하하고 행위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몽주의, 실존주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언행을 보면 마치 선행이 지상목표인 것처럼 보여질 정도입니다. 물론 명분상으로는 자신들도 믿음을 중시한다고 말하며, 그들이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참된 믿음의 구현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저의를 들여다보면 믿음을 하찮게 여기는 속내가 감취어져 있습니다.
초점이 다르긴 합니다만, 이 점에서도 루터(Martin Luther)는 귀감이 됩니다. 종교개혁 초기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를 들고 나왔을 때, 믿음의 강조가 혹 그리스도의 공로를 퇴색시킬까 노심초사하여, 이신칭의를 말할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로 인하여'를 첨가시켰습니다. 오늘날 행위를 강조하는 이들의 어법에는 이런 루터의 조심성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이신칭의를 견지하려고 노심초사 하는 것은 이런 루터의 심정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의 근저에는 믿음이 온 인류의 선행보다 무겁고, 그 믿음이 천하보다 귀한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져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믿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해 믿는 자를 의롭다해 주십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3:25-26).'
 
만약 믿는 자를 의롭다 해 주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핏빛 공로는 그 빛이 바래지고,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드러나지 못합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 뿐'이라는 찬송가에서 '금보다 귀한 믿음이 참 보배되도다'라며 믿음을 칭송한 것도, 믿음이 기반한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어떤 것을 믿음과 나란히(side by side) 두거나 믿음 위에(over faith) 둔다면 이미 믿음을 멸시한 것이고, 믿음의 근간인 그리스도의 대속을 역린(逆鱗)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믿음에 집착하며 이신칭의 공격자들에게 맨몸으로 맞서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 참에 다시 한 번 이신칭의 공격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신칭의에 대한 그들의 공격에는 언제나 기독교 타락이 명분으로 내걸리는데, 이신칭의가 타락을 낳았다는 추정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며, 기독교 타락의 주범이 이신칭의라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기독교 2천년사에서,-박해받던 초대교회, 종교개혁 어간의 100여년, 그리고 청교도 시대 외에-언제 부패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까?
 
교회의 이상적인 모델이요, 말세 교회의 표상인 초대교회(아시아 7교회)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지상의 교회는 온전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의 문제는 오늘날 칭의유보자들이 물고 늘어지는, 믿음과 행위의 변증법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오히려 더 많은 행위, 열심, 인내가 있었음에도 책망을 받았으며, 그 핵심적인 요인이 첫사랑의 상실이었습니다(2:2-4).
 
두아디라교회 역시 행위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영적 행음 때문에 책망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행위(deeds),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있었습니다(2:19-20). 차지도 뜨겁지도 않아 토하여 내침을 받으리라고 했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신의 부요함으로 인한 나태함과 미지근한 신앙이 책망의 요인이었습니다(3:16-17).
 
중세 1천 년간 로마천주교의 타락 역시, 행위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력 구원의 교리적 부산물인 금욕주의, 면죄부, 보속(sacramental penance)을 위한 선행들이 넘쳐났습니다. 중세교회 문제의 핵심은 교회에로의 부와 권력의 집중과 그로 인한 배부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과 유럽 교회를 막론하고 기독교의 부패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20세기 중반부터 이제껏 세계가 이처럼 풍요와 평화를 구가한 적이 없는데, 이는 기독교의 속화와 무관치 않습니다. 물론 그와 함께 기독교의 자성도 넘쳐났고, 교회 개혁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뤄진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19-20세기 실존주의의 등장으로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었고, 여기서 파생된 무교회주의의 가세까지 합해져, 교회에 압박을 가했지만, 신학적 빈곤성으로 인해 사변적 놀음으로 끝났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이즈음 역시 신학자들이 앞다투어 교회 부패를 논하고 개혁의 담론들을 쏟아내지만, 추정컨대 이 역시 사변적 말잔치로 끝날 뿐, 교회는 여전히 지금의 모습 그대로 존속할 것입니다. 개혁을 외치는 신학자들이나 개혁의 대상인 교회들이나 풍요와 편안함 속에서 부르짖는 개혁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전적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이런 분위기에서는 스스로 변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말한 말세의 전형적인 특성이기도 합니다(살전 5:3).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고난이 오기 전에 먼저 스스로 회개해야 한다고들 말하나, 사실 이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안주를 꿈꾸는 죄인의 본성상, 외부의 충격 곧 고난의 주입없이 자의적인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사랑하여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신다면-정말 생각하기조차 두렵지만-고난을 주실 것이라는 전망을 가집니다.
 
실제로 교회사에서 성도의 신앙이 온전히 빛을 발한 것은 고난과 시련의 때뿐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신사참배로 여수 교도소에 구금돼 있다가 해방으로 풀려나, 한동안 편안함을 구가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부지불식간에 안일함에 빠져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나를 다시 여수교도소로 보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성도들이 속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떤 교리 때문이라기보다는, 부와 안일함에 안주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등 따시고 배부르면 한 눈 팔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의 소출을 풍성케 했을 때 그 땅에 주상을 많게 했습니다(10:1).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이에 때때로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이런 인간의 부패성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갖다 주는 인내와 연단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의 유혹을 끊고 오직 하나님만 소망하게 합니다(5:3-4).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 이유도, 세상의 부요함이 아닌 하늘의 만나로 그들의 양식을 삼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8:3).
 
다시 말하지만 교회의 부패는 풍요와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합니다. 만일 교회 부패의 원인이 이신칭의라면, 그것의 부작용을 예상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 경륜으로 삼으신 자체가(3:11-12) 하나님의 실수입니다. 이는 이신칭의가 구원이 경륜이 아니라 인간을 실족시키는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부작용을 먼저 알아차린 칭의유보자들의 권고를 받아 하나님이 다시 그 경륜을 철회하셔야 한다면, 칭의유보자들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자들이 됩니다.
 
공격자들이 항상 이신칭의의 부작용(?)이라고 말하는 교회의 방종과 부패는,-이미 오래 전에 유대인들을 통해 보여주셨듯-자기 의()에 배부른 교만한 자들의 실족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표입니다(벧전 2:6-8).
 
마지막으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요즈음 하도 칭의유보자들이 행함이 중요하고 한국교회에 행함이 없다고 난리를 피우니, 사람들은 뭐든지 행하여 믿음이 있는 척 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선행을 학습할 필요는 있습니다. 꼭 행동주의(behaviorism) 교육학자들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선행을 알아도 잘 해보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예배, 기도, 선행 같은 좋은 습관을 몸에 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선행이 믿음을 앞설 수 없으며, 선행이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중생을 부인하는 행동주의(behaviorism) 교육학자들의 주장처럼, 행동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려하기보다는, 중생의 믿음에서 선한 행동을 이끌어내려는 성경적 원리를 따릅니다. 믿어 의로 거듭난 성도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은 그의 선행의 동인(動因)입니다(1:6).
 
우리 신체 구조를 보더라도-그가 뇌와 육체의 기능이 정상이라면-행위를 유발시키기 전에 먼저 뇌에서 명령을 하달합니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뇌의 명령 없이 행위가 이뤄지는 일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 명령자인 믿음 없이 행함이 일어날 수 없으며, 동시에 사령부인 믿음이 명령을 하는데 손발이 가만히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 원리대로라면 행함이 없음은, 행함을 명령하는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행함을 강조하기 이전에 행함의 원천이요, 행위의 명령자인 믿음을 먼저 강조합니다. 기독교 윤리를 '신앙의 윤리(The Ethics of Belief)'라 함도, 모든 것에 있어 먼저 믿음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거룩한 새 마음을 갖게 하고, 거룩한 열망이 생겨나게 하여(벧전 1:3) 행함을 낳습니다.
 
()로 거듭나게 하는 참된 믿음은 신앙을 단지 의식의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 앞에서 자신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이다(116:12-14)'.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19:8)'는 결단을 유발시킵니다. 삭개오의 그런 결단은 공격자들의 논리처럼 구원받기 위한 공로 축적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그를 영접해 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19:5).
 
재차 강조하지만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혹 그렇지 못한 경우가 생길 때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대한 근심이 생겨나고, 근심은 열심과 간절함과 분함을 일으킵니다(고후 7:11). 공격자들의 주장처럼, 어떤 사람에게 행함이 없음은, 구원에서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정말 참된 신앙인이라면, 행함이 크든 작든,-때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은 것이든-반드시 행함이 따릅니다. 혹은 진보의 속도가 너무 느려-사람들에게 쉽게 감지가 되던 안 되던-반드시 작은 진보라도 나타냅니다. 믿음만 있고 행위가 전무할 순 없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롯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고(18:3; 19:2),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두려움 없이 평안히 영접했고(11:31).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돌았고(11:30), 믿음으로 베드로는 바다위로 걸음을 내딛었습니다(14:29),

참으로 거듭나게 하는 참된 믿음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게 하지 못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완전한 성화에 이를 수 있을까?


김진영 기자 입력 : 2017.10.17 10:15
기독교학술원, ‘카이퍼와 케직 영성월례포럼 개최
기독교학술원


(왼쪽부터 순서대로) 정호광 교수, 김영한 박사, 최태연 교수 기독교학술원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지난 13일 아침 포도나무교회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와 케직 영성'이라는 주제로 제64회 월례포럼을 개최했다.
먼저 경건회에선 학술원 이사장인 이재훈 목사(온누라교회 담임)'연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고, 이어 발표회는 학술원장 김영한 박사의 개회사와 최태연 교수(백석대)의 발표, 정호광 교수(안양대)의 논평 및 토론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김영한 박사는 '케직 정신(더 높은 성결 추구의 삶)은 오늘날 한국교회 갱신에도 타당하다'라는 제목의 개회사에서 "케직운동은 1870년대 중상류층 신자들 가운데 크게 확산된 '더 높은 영성'(the higher spirituality)을 추구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케직사경회가 수용한 웨슬리적인 부드러운 알미니안주의와 정통개혁주의적인 부드러운 칼빈주의는 교리적 장벽을 넘어섰다"고 했다.
 
이어 "케직사경회는 전도대회가 아니라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케직사경회의 지향점은 고도의 영적 삶으로서 그리스도의 성결이었다. 케직운동은 '성화'란 회심 시 시작되어 일생동안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성령세례는 오순절 날 제자들처럼 간구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근원적인 축복으로서 거듭날 때 받는 은혜라는 입장"이라며 "또 성령을 받은 것과 충만케 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인간은 전적적으로 부패했기에 지상에서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웨슬리주의 및 미국 성결운동의 완전주의 가르침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던 것"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케직운동은 140년 전에 역사적으로 있었던 과거의 운동이 아니라 영국에서도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John Stott)를 중심으로 오늘날까지 전개되었으며 1980년에 한국에 도입되어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중심으로 예장 합동, 통합 등의 지도자들(한경직·임옥·림인식·옥한흠·김명혁 목사 등)1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였던 한국교회 영성운동이었다""칭의 신앙을 생활하는 것이 바로 성화 신앙이다. 한국교회의 신앙 생활은 이제 생활 신앙이 되어야 한다. 생활 신앙이란 칭의의 은혜에 감격해 매일의 삶 속에서 칭의의 은혜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더 높은 성결의 추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추구해야 할 과제"라고 했다.   
  
이후 '아브라함 카이퍼와 케직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최태연 교수는 "카이퍼와 케직 운동의 만남은 1875년에 이루어졌다. 이 만남은 첫 사경회가 열린 18757월 이전에 영국 브라이턴의 집회에서 이루어졌다""카이퍼는 네덜란드에서 참여한 40명과 더불어 그가 기대하던 이상의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했다. 그는 이 집회를 통해 '습관적이고 형식적이며 지적인 예배에서 신자들이 감격하면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로의 변화'를 경험했다"고 했다.
 
최 교수는 "카이퍼는 브라이턴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것은 모든 신자들의 연합(unity)이었다. 카이퍼는 모든 교파로부터 온 신자들이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세력까지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그에게 브라이턴의 체험은 영적 정체에 빠진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들의 영혼을 깨우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였다"고 했다.


  
기독교학술원


포럼의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기독교학술원
그러나 브라이턴의 지도자 피어슬 스미스의 성적 탈선과 총선에서의 참패로 카이퍼의 의지는 한 차례 꺾이고 만다. 최 교수는 "장기휴양에서 돌아온 카이퍼는 1878년 한 언론에 '완전주의'(perfectionism)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논설을 싣는다. 이 논설은 그가 브라이턴에서 경험한 영미 성결 운동의 신학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한때 영적 거룩함에 도달하는 분명한 길과 능력의 근원으로 여겼던 '더 거룩한 삶'의 추구가 이제 그에게는 '잘못된 전제를 감추고 위험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오류투성이의 신학으로 간주되었다"고 했다.


최 교수는 "완전성화론자에 대한 이런 비판은 동시에 브라이턴 이후 성결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자신에 대한 준열한 자아비판이기도 했다""그러나 카이퍼는 우리에게 개혁주의와 성결 운동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만한 하나의 단서를 남겨 두었다. 특별히 인간의 완전성화론과의 싸움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싸우는 사람'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의식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카이퍼는 불완전성화를 믿는 개혁주의자가 완전성화론자를 비판할 때조차 '불완전'(imperfect)하다는 사실을 낮은 톤으로 인정했던 것"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카이퍼가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속해 있다고 해서 케직사경회를 반드시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그가 만났던 피어슬 스미스 같은 초기 지도자들이 완전성화론에 치우쳤고 실천에서 자기모순을 보여준 데 있었다""케직의 영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카이퍼의 영성과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첫째는 헌신(consecration)의 측면이고 둘째는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의 측면"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케직 운동에 대한 카이퍼의 단절은 이론적으로 검토되었기보다는 급박한 현실 상황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일방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케직 운동의 영향이 카이퍼의 영성에 남아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그리고 오늘의 시점에서 양자의 관계를 비교해 볼 때, 카이퍼와 케직 운동 사이에는 서로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헌신과 성화의 문제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암시 분석과 변증법적 대화 분석... 꿈을 분석한다는 것
입력 : 2017.10.26 17:33
[김충렬 박사의 치유상담’] 칼 융의 분석심리학과 상담치료(45)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45장 꿈 분석의 일반기법


꿈 분석에서는 기법의 성격에 따라 방법적인 기준이 달라진다.

꿈 분석에서 방법적 기준은 치료에서 분석자가 환자에게 대응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의 정신체계를 갖고 있지만, 인간 정신체계가 환자에게 작용할 때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을 중요시한 결과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분석심리학은 이전의 틀에 박힌 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1. 꿈 분석에 대한 기초이해
 
꿈 분석은 기본적으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의식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의 문제는 무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분석을 한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하여 의식의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하여 치료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의식을 알기 위해서 꿈을 분석하는 것은 물론이다.
 
 
1) 꿈 분석의 방법론적 차이 
분석기법은 환자의 심리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환자의 심리가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그 심리가 누구나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의 이율배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정신은 신체에 의존하고 신체는 정신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체와 정신은 어느 정도 연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심리학에서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그 심리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리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는 분석은 치료의 목적에 따라 크게 기술적인 분석치료와 대화적인 분석치료로 나눌 수 있다. 기술적인 분석치료란 어떤 한 가지 증상을 목적으로 사용하는 분석법이다. 단순한 증상의 소실, 고통의 일시적 경감, 직업이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목적하는 요법들이다. 여기에는 최면술, 동물자기설(animal magnetism), 전기자극법, 약물치료, 암시요법(suggestiv therapy) 등이 해당한다.
 
반면에 대화적인 분석치료(dialog psychotherapy)는 인격의 심층을 살피며, 인격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통찰요법(insight therapy), 집중적 정신분석(intensive psychotherapy), 분석적 정신분석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분석에 대해서 융은 그 범위에 따라 기술적인 분석치료를 작은 분석(kleine Psychotherapie)이라 부르며, 대화분석치료는 큰 분석(gross Psychotherapie)이라 부른다. 기술분석치료는 질병의 부분을 다루는 것이라면, 대화분석치료는 전체성과 관련된 인간의 본질을 다루기 때문이다.
 
2) 꿈 분석의 학문적 차이 
기술분석을 '과학적 분석'이라 한다면, 대화를 통한 분석치료는 '철학-심리적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치료는 그 성격적인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이기에 명백하게 구분하여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석치료는 본질상 정신의 전체성과 관계하고, 그리고 분석법은 분석자의 인격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자의 증상의 요건에 따라 합당한 요법을 사용하여 효과를 거두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는 점에서 분석심리학이 치료에서 열린 치료관을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신을 분석하고 또 거기에 분석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면, 가치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분석에서 열린 치료관이란 누구든지 자기의 분석방법을 확신하고, 진지하고도 인내성을 가지고 참여해야 함을 전제로 한다. 환자에게 분석에 대한 모든 노력을 다하면 분석적인 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분석치료 역사상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은 역시 암시기법과 대화기법이 주류를 이루었다. 따라서 우리는 암시기법과 융이 새롭게 고안해 낸 대화기법 중의 변증법적 대화치료를 중요시해야 한다.


  
2. 암시 분석의 기법
 
암시의 방법은 의학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용되어온 측면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심리적인 존재이기에 암시의 방법이 그만큼 들어맞았다는 데에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암시의 방법은 치료법이 획기적으로 발전된 오늘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암시의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1) 암시요법의 발단 
치료 초기에는 주로 암시분석기법이 사용되었다. 암시치료(Suggestive Psychotherapie)는 암시적인 방법을 활용하여 치료의 효과를 기대하는 기법이다. 암시기법은 초기에는 최면술, 최면정화법 등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다양한 분야에까지 확대 및 발전되고 있다. 실제로 암시의 방법은 일종의 최면적인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 편이다.
 
최면은 겉모습만 보면 수면상태와 비슷하고 의식이 있는 통상적 상태와는 다른 의식 수준에서 피술자가 기능하도록 하는 특별한 심리적 상태이다. 이 상태의 특징은 감수성과 민감성이 증가되어, 일반적으로 내부의 경험적인 지각이 외부의 현실만큼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최면에서 피술자는 오직 시술자의 지시에만 주의를 나타내는데, 이때 피술자는 시술자가 그에게 지적한 것 이외에는 환경의 모든 양상을 무시하며 판단력이 없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시술자의 암시에 따라 보고 느끼고 냄새 맡으며, 비록 그 암시가 그에게 가해진 자극에 명백하게 모순된다고 해도 그 암시에 따른다. 심지어 최면에서는 피술자의 기억이나 자아의식이 암시에 의해 바뀔 수도 있으며, 암시의 효과가 피술자가 깨어난 후의 활동(최면 후)에까지 연장되기도 한다.
 
융과 프로이트 역시 초기에는 최면술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최면술의 한계를 깨닫고는 이 방법을 거부하고 다른 방향으로 분석법을 개발한 것이다. 융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최면에서는 분석효과가 얼마나 지속되는지 알 길도 없고, 나는 또한 확실치 않은 일에 참여하는 것에 저항을 느끼고 있었다. 환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내가 나서서 결정하는 것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환자가 그의 본성대로 어디로 발전해 나갈 것인가를 환자 자신으로부터 아는 일이었다."
 
2) 암시요법의 원리 
암시요법은 환자를 치료하는데 폭넓게 사용되어 온 측면이 있다. 암시요법은 다른 사람의 개성에 관해 알고 있거나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적용하는 모든 방법을 포함한다는 점에서다. 물론 이것이 얼마나 전문적인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융은 암시요법의 기본적인 원리는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시각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암시요법은 원래 기술을 중시하는 모든 방법에서 두루 사용되어 왔는데, 여기서는 하나하나의 대상이 모두 같은 종류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앞에서 우리는 암시요법은 그 효과적인 측면에서 일종의 최면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전술했다. 이런 최면은 마술이나 요술, 의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는데, 최면은 이들의 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최면이 물리적인 힘이나 생리적 과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암시에 대해 심리적으로 매개된 반응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암시요법이 중심이 된 최면의 역사는 18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 환자를 치료하는데 최면을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의사 프란츠 메스머(Franz Anton Mesmer)였다. 그는 최면이 시술자를 통해 피술자에게로 동물자기(動物磁氣)라는 불가사의한 힘의 형태로 흐른다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에 불신을 당했지만, 최면 또는 그의 이름을 딴 메스머리즘(mesmerism)은 계속 개업하는 의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의사 제임스 브레이드(James Braid)가 최면의 현상을 연구하고 최면과 최면상태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많은 의사들이 최면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한 채 이용했다.
 
최면요법은 다시 미국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대체로 암시요법으로 많이 사용되는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 최근의 동향이다. 이 암시요법에 준하는 것들에는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tian Science)의 암시적 방법, 1870년 미국에서 창설된 기독교의 한 종파인데, 정통교단에서는 이단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기독교로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이 종파는 신앙의 힘으로 병을 고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정신치유(Mental Healing), 사상교정(Thought cure), 종교와 의료 기술자의 암시방법,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와 학설, 정치운동, 전쟁 등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융은 이러한 방법들이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분석적 효과를 인정하는 편이다. 그것은 전쟁의 발발이 많은 강박신경증을 치유해주었고, 기적이 행해졌던 장소는 태곳적부터 신경증적인 상태를 사라지게 하였고, 그리고 크고 작은 민중 운동도 개인에게는 치유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치료의 효과까지도 인정하는 태도는 단순히 융의 열린 분석의 치료관에 의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그 기법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분석기술인가 아닌가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단순히 정신적 효과를 중시한다는 점에서일 뿐이며, 환자의 인격과 개성을 얼마나 고려하는 치료법인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것은 모두 암시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심리 및 정신에 치료의 효과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단순치료법으로 인정을 받는 편이다.
 
3) 암시요법의 유형 
암시적 요법은 대상의 구별에 따라 또 다른 구별이 가능해진다.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개인암시분석과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암시분석, 그리고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암시분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의 특성에 따라 암시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개인암시는 분석자가 한 개인을 대상으로 하여 암시를 거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분석자가 한 개인을 대상으로 개입하여 암시를 활용하면서 정신을 치료해 내는 것이다. 자기암시분석은 분석자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자신이 암시의 방법을 활용하여 치료적인 효과를 올리는 방법이다.
 
인간은 심리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으로 자신을 암시하여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부정적인 측면으로 자신을 암시하여 나쁜 결과를 얻는 경우가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암시분석은 분석자가 여러 명을 한꺼번에 암시를 사용하여 치료해 내는 방법이다. 집단암시는 여러 명이 같은 생각으로 모인 경우에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더 강한 암시의 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암시요법은 암시의 특성이 동일하다고 해도 대상의 따라 방법적인 것이 조금씩 다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융은 이러한 방법들의 일반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암시요법은 개인의 인격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일반적인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다. 이런 암시의 방법들은 각기 다른 인간의 개성과 특성이 중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런 암시의 방법은 때로 환자의 개성을 중시하지 않는 점에서 해로운 영향을 초래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잠재성 정신병에서 증상의 발현, 악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암시요법은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분석법으로 인정받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이에 따라 암시요법에서는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분석법이 연구 및 개발되어야 함이 강조된다. 인간은 대체로 원시적 성질을 갖고 있으며, 집단적 인간이나 군중심리가 지닌 무감각한 잔인성, 히스테리성 감상(感傷)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체성과 개인성을 감안하는 분석의 기술이 요구되는 것이다. 융은 그 분석의 대안으로 변증법적 대화분석기법을 제시하여 발전시켰다.


  
3. 변증법적 대화분석의 기법
 
변증법은 사물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으로 인해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다시 이 모순을 지양함으로써 다음 단계로 발전해 가는 논리적 사고법이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대체로 정()-()-()의 원리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세계 안팎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대립되거나 모순되어 있고, 이 모순에 의하여 변화 발전한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발전할 수 없는데, 이는 대립물의 상호침투의 법칙, ()과 질()의 상호전화의 법칙, 그리고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의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변증법이 융이 계발한 치료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정신을 치료하는 데서는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알아야 한다.
 
1) 상호 대화를 지향하는 방법 
변증법적인 분석기술이란 환자가 분석자의 전제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고 환자가 자신의 소견을 완전히 표현하는 기회를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는 환자의 표현을 통해 환자의 정신체계는 분석자의 정신체계와 연결되고, 분석자의 정신체계 속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는 점에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변증법적인 분석기술이란 분석가와 환자가 상호대화를 중심으로 하여 치료하는 새로운 치료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방법은 융이 분석치료란 변증법적 과정, 즉 분석가와 환자가 서로 대화나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에 착안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은 원래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화술의 하나였는데, 예로부터 새로운 합성(合性)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일컫는 명칭이 되었다. 이는 인간이란 하나의 정신체계로 구성되었다고 할 때. 그 정신체계가 다른 인간에게 작용하는 과정에서 다른 정신체계와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을 상정한다. 그러면 이런 변증적인 방법이 분석자와 환자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에서 그 중요성을 살리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변증법적 대화분석은 자기실현으로 향한 분석자와 환자간의 순수한 대화의 방법을 지향한다. 자기실현이란 분석심리학에서 보는 인간의 본질인 '자기'의 실현이란 의미로, '자기'란 개인의 고유한 개성을 의미한다. 다만 개인의 개성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암시분석에서처럼 분석목표나 분석방향을 미리 설정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치료과정에서 분석자는 모든 전제, 지식, 권위, 작용하고자 하는 의지 등을 포기해야 한다.
 
변증법적 대화치료는 분석의 주체가 분석자가 아니라, 환자와 나란히 하는 입장평행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분석자가 환자에게 암시를 통한 지배의 위치나 권위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자와 환자가 서로의 소견(Befund)을 비교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석자의 생각이나 어떠한 전제로 환자를 제약하지 않는 방법임을 의미한다. 다만 이 치료에서는 분석자와 환자가 서로 자료를 충분히 제시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변증법적 대화치료는 상호간의 순수한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2) 공체험자로서 분석자세 
변증법적 대화의 치료에서 분석자 또는 분석가는 순수한 대화를 통해 오직 환자의 의식과 무의식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특별히 분석가는 환자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소리에 집중하여 그 의미를 이해하고 거기서 나오는 처방에 따라야 한다. 이와 같이 변증법적 대화분석에서 분석가는 환자의 발달 과정의 공체험자(Mitlebender)이다. 분석가는 더 이상 분석하는 주체가 아니고 환자와 함께하는 체험자이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대화치료에서 분석가는 환자라는 미지의 인간을 대하여 환자 자신도 모르는 그의 인격의 측면을 함께 탐색해 나가야 한다. 이 과정은 분석가가 환자에 관계된 인격의 총체, 즉 의식과 무의식을 환자와 함께하는 공체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분석가는 환자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환자의 성격유형과 무의식의 표현, 즉 꿈이나 그 밖의 무의식의 표현 내용을 살펴나가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변증법적 대화분석에서는 분석가의 '변증법적 자세'가 중요하다. 변증법적 자세란 분석하는 분석가의 특정한 방식에 치우치지 않는 자세이다. 이것은 분석가인 분석자가 환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방식인 것이다. 분석가는 환자와 대화를 통하여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치료를 할 수 있다. 이것은 환자의 개성이 다양하다는 것이며, 그만큼 환자의 개인적인 인격과 개성이 중시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 때문에 분석자는 환자의 인격과 개성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갖지 말아야 한다. 융은 환자의 개성이 분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이렇게 말한다. "어떤 경우에나 개인적인 분석자 불가피하며, 이것이 학문적으로 책임질 만한 유일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분석치료란 분석자의 인격을 통한 '환자에 개성에 따라'분석하는 것이다.
 
3) 변증법적 대화분석의 치료목표 
변증법적 대화분석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환자에게 원형적 체험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환자로 하여금 내적으로는 의식과 무의식의 대극관계, 외적으로는 주객의 대립관계를 초월하여 원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체험케 하는데 있다.

그 체험은 신성력(神性力, Numinosum)의 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체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치유로 연결된다는 점에서다.
 
융은 "나의 분석작업의 주된 관심은 노이로제의 분석에 있지 않고 신성력(Numinosum)의 접근에 있다. 누미노줌에로의 접근이 원래적인 분석치료이고 누미노줌의 체험에 도달하는 한 질병으로부터 해방된다. 누미노줌적인 성격은 질병 자체를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분석심리학에서 분석가 양성을 위한 교육분석은 한편으로는 환자 자신의 신경증적 문제의 해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원형적 작용의 체험을 요구하고 있다.

교육분석의 후반에 적극적 명상(aktive Imagination)을 권유하는 것은 이런 체험을 위한 것이다.
 
융의 수제자인 폰 프란츠는 교육분석의 의미와 관련하여 "내 경험에 의하면 교육분석이 개인적인 문제의 해결에만 머문다면 분석자는 후에 환자에게 결코 실제적으로 효과적인 도움을 주는 자가 될 수 없다. 원형적 체험이 없는 분석치료는 좋은 충고, 지적 해석, 정상인이 되도록 하는 선의의 추천 등 오직 하찮은 것들만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융은 기술분석인 암시치료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이는 분석치료는 '환자에 따라'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많은 분석기법을 습득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4.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꿈 분석의 일반기법에 대하여 기술했다. 꿈 분석에서는 기법의 성격에 따라 방법적인 기준이 달라진다고 했다. 꿈 분석에서 방법적인 기준은 치료의 방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분석자가 환자에게 대응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의 정신체계를 갖고 있지만, 인간 정신체계가 환자에게 작용할 때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을 중요시한 결과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분석심리학은 이전의 틀에 박힌 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분석기법에 대해서 몇 가지로 구분하여 기술했다.
   
큰 산이 평지가되는 간증: 10년전 성령교회, 성령기도원 건축 할 때 솔론몬 성전입당식과 같이 주님께서 큰 은혜로 꿈에 그림 한 장을 보여주셨다.즉 슥46-7절 말씀대로 큰 산이 평지로 무너지는 것 즉 큰 산같은 문제를 가지고 왔어 부르짖는 기도, 감람산 기도,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는 기도 하면 큰 산 같는 문제가 막혀도 무너지게해 주신다는 것을 은총을 주셨다“.


성령기도원장 , 김엘리사목사. 2017. 10. 4)


  
(말씀선포의 능력간증 : 몇 년전에 말씀(설교)을 선포하는데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갑자기 넘어지고 축귀현상이 자주일어나 설교하다가 내려와 안수하는일 자주 일어났다. 이 대해 주님의 성령께서 꿈에 그림한장을 보여 주셨다. 즉 교회 안 강단에서 설교하는데 강단 옆에서 강력한 탱크가 나가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에스겔이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그들에게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가 되었던 것 같이 십자가의도(성령의 능력)의 능력이 나가간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고후4;7-11,고전1:18, 37;1-14)


(성령능력기도원장 김종표목사,2017.10.6)
 
 
(말씀이 생명수이다,간증) 몇 년전에 노회 회원 들이 소직의 봉고차량에 엠프 설치하여 대구 팔공산일대 도로를 순회하면서 사찰과 주변암자들에 방송으로 노방전도 복음을 몇년간 전하였다. 그런데 주님의 성령께서 꿈에 칭찬하는 그림한장을 보여주셨다. 즉 우리가 타고다니는 차량이 분명히 7-8명 타는 승합차인데물을 뿌리는 화물차량으로 보여주셨다. 즉 도로 주변에 죽어가는 나무들에 생명수 물을 뿌리는 것으로 비유해 보여주셨다. 그 물을 먹는 나무들이 푸른 새싹이 피어나면서 살아나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곳은 1천의 불교사찰(철학),무당촌 미신을 믿는 지역으로 사단에 미혹되어 죽어가는(지옥) 자들에게 생명수 복음 말씀을 전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 칭찬해 주셨다.(로마10:16-17, 요한7:37-38, 37)


( 2017.10.6. 성령생수교회 김종표 목사)   
   
  
(간증: 현대 교회 (신앙)3가지 현상 간증) 2017.10.10.자 주님의 성령께서 꿈에 현대교회 신앙인의 형태를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그대로 보여주셨다. 첫째는 빌라텔비아 교회와 같이 물고기들이 모여 생명수를 먹고 춤추는 것과 에베소서교회와 같이 주님과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천국에 갈려고 절벽에 힘들게 올라가는것과 라오디케아 교회와 같이 세상풍조(번영신학, 바벨탑신학 과 신앙)에 미혹되어 눈이 어두어져 자아실현과 자기우상(대형 교회 목사)으로 자기의 얼굴 사전을 들고 많은 사람들 앞에 홍보(현대 부흥강사)하는 것과 사데 교회와 같이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영적으로 죽었다는 그림을 보여주셨다.(요한계시록3:17-22.


(성령교회 김엘리사 목사 )   
   
  
(바벨탑신학,번영신앙에대한 간증):2017.10.15.에 주님께서 현대교회들이 사단에 미혹되어 세상풍조에따라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이 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으로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이 교회안에서 우상을 섬기는 (담무스 위한기도)성도들이 한국 대형교회 많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요일서2:15-17)즉 계시록 61-2절에 백말타고 오는 이 생의 영광과 번영신학을 가르치는 설교하는 목사들에게 몰린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즉 말세가 되면 자기 귀를 즐겁게 해 주는 목사 설교 즉 이 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을 최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대형교회 교인)들처럼 번영신학과 바벨탑신앙의 성도들이 많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준다. 즉 에베소서 교인들과 같이 주님의 첫사랑(천국)기쁨, 거듭남의 기쁨, 성령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의와 희락과 평강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14:17). 그 반면에 빌라델비아교회 교인들처럼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많으면서 훨체를 타고 다니면서 작은 교회에 출석하면서 작은 능력으로 주님을 배반 하지 않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 마시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것을 보여주셨다(1:16=17.2-3.18;1-20)(2017.10.15.성령교회 김종표목사 )
 
 
(간증: 확신하는 믿음이 기적을 가져온다: 로마서 강해 공부를 하면서 구원론의 책을 쓰는데 주님께서 구원의 핵심 말씀을 주셨다. 즉 로마서1:16-17절 말씀과 막9:23절 말씀을 주셨다. 즉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예수께서 할수있거든 무슨 말이냐 믿는자 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기적이란 말씀으로 바꾸어 꿈에 글자로 보여주셨다.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에 주인공이 되었다. 루터종교개혁의 주제 말씀 롬1:16-17,믿음의 조상된 아브라함도 롬4:18-24,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곱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였다(11:24-26). 즉 번영신앙, 바벨탑신앙의 목회를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셨다. 이런자들은 어두운 곳에 밖에 쫓겨나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 성경은 가르쳐준다.(마태24:45-51),즉 주님의 첫사랑(천국)기쁨, 거듭남의 기쁨, 성령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의와 희락과 평강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14:17. 4;18-24. 11:24-26)


(2017.10.15. 성령교회 김종표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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