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나는 영의 의미


 

성경에 나타나는 영(호흡, 생명)의 의미

영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는 “루아흐”, 신약에서는 “프뉴마”로 표기되고 있다.


구약에서 나타나는 영(루아흐)의 의미

1) 입의 호흡

입의 호흡을 가리키는 “루아흐”, 숨을 들이쉼(욥 9:18), 숨을 헐떡임(렘 2:24), 거칠게 숨을 쉼(욥 15:13),

생명의 호흡(렘 10:14)과 같은 표현들에서 숨 또는 호흡을 의미한다.(욥 19:17)


2) 공기

“루아흐”는 부드러운 바람(욥 4:15), 날마다 부는 서풍(창 3:8), 강풍(사 32:2), 광풍(시 55:8)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네 바람은 땅의 사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리킨다.(슥 6:5)

바람은 비유적으로 헛됨이나 무익함 또는 기만을 의미한다.(욥 6:26)

성경에는 헛된 노력뿐만 아니라 헛된 (바람과 같은) 지식, 언어 등이 나온다.


3) 사람의 “루아흐”

“루아흐”는 동물이나 사람의 몸에 생명을 준다.(창 7:22)

“루아흐”가 들어가면 생명이 주어지고 (겔 37:5~6), 제거되면 죽음을 의미한다.(시 104:29)

감정과 의지가 자리 잡는 곳이다. 감정적으로 우리는 불안, 불행, 절망, 원기의 결여, 초조, 분노,

나쁜 성질, 공포, 질투, 교만 등과 같은 개념들을 발견한다.


지적으로는 현명함,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통찰, 예술적인 감각, 계획 등에 대한 언급이 나오며,

부정적으로는 지각의 결핍, 오류, 종교적 도덕적 통찰의 결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의지적으로는 어떤 일에 대한 준비성, 의지의 태도, 용기, 관용, 자유, 하나님을 갈망함, 갱신 등과

부정적으로는 불성실과 불경건 등의 개념들이 관련되어 있다.


4) 하나님이 주신 “루아흐”

영들의 하나님이신 하나님(민 16:22)께서는 생명력을 주기도 하고(사 42:5),

멈추게도 하며(욥 10:12), 빼앗아 가기도 하신다(시 10:29).

인생들의 영과 혼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욥 12:10) 하나님께서는 불안을 야기시키기도 하고(왕하 19:7),

열정을 주시기도 하며(슥 12:10), 이성을 주기도 하고(욥 32:8), 예술적인 감각을 부여해 주기도 한다.(출 28:3)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계획 배후에 계시며(렘 51:1), 인간의 계획을 좌절시키기도 하신다.(사 19:3)

하나님께서는 의지의 도덕적 능력을 주시기도 하고, 완악하게도 하신다.(겔 11:19, 신 2:30)


5) 하나님의 “루아흐”

하나님의 “루아흐”는 그룹들(겔 1:12)과 삼손(삿 13:25)에게 능력을 주며, 에스겔을 일으켜 세운다(겔 2:2).

하나님의 “루아흐”는 황홀경에 빠지게 하며(민 11:25), 몸을 일으켜 세우며(왕상 18:12),

사람을 데리고 가며(겔 3:14), 예언적인 말씀을 주며(창 41:38), 환상을 보여 주며(겔 8:3),

지도력의 은사를 부여해 주고(삿 3:10), 인간에게 악한 신을 보내기도 한다(삿 9:23).


하나님의 “루아흐”는 생명을 창조하고(겔 37:9), 생명을 주며(겔 37:14),

생명을 허락하시고(시 104:30), 생명을 거두신다(욥 34:14).

우주와 우주 속에 있는 생명을 창조하신다(창 1:2, 시 33:5).

예술적인 솜씨, 계몽, 지혜 등과 같은 정신적인 능력들을 제공해 준다(출 31:3, 단 5:14).

예언의 은사를 주신다(미 3:8).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주신다(사 11:2).

성화와 같은 도덕적 특성들을 주신다(사 59:12).

심판하고(사 4:4),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다(사 32:15).


도움을 제공해 주고(시 143:10),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보여 주며(느 9:20),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주어진다.(사 63:11)


하나님의 영은 참된 능력을 나타낸다(사 31:3). 또한 이사야 32:15 이하에서 사막을 낙원으로 바꾸신다.

윤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사 30:1). 창조 행위를 하신다(시 51:10~11).

그의 종을 통해 역사 하신다(사 42:1 이하). 사람들을 완전하게 해준다(겔 36:26~27).

이미 역사하고 계신다(사 31:3).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이 일어난다(겔 11:19, 18:31, 36:26).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완성시킨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영의 인격적인 역사이다.


사람에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이 항상 주어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을 경험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탐구할 수는 없다.

선지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상세히 제시해 주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영이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는 없다.


신약에서 나타나는 영(프뉴마)의 의미


1.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1) 악령과 인간의 영

마가복음에는 “프뉴마”가 23회 언급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14회가 부정한 영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8:16에서 귀신들을 나타낼 때 “영들”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인간에 대해 적용될 때 마가복음 2:8 과 8:12에서 “프뉴마”는 지각과 감정의 주체가 되며,

마태복음 27:50은 생명력이 된다.

마가복음 14:38에서 약한 육신과 영이 대조를 이루는데,

이는 영이 인간에게 있어서 몸보다 더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다.

시편 51:12에 근거해 볼 때,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며,

우리의 인간적인 연약함에 대항하여 싸운다.


2)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성령

“프뉴마”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대체로 특별한 행위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예수님의 귀신 추방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성령에 대한 모독이다(막 3:28 이하).

마태복음 12:28은 귀신 추방에서의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동일시한다.

마가복음 1:12도 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성령의 일반적인 부여

마가복음 12:36 에서는 성령이 성서와 동일시되며, 마가복음 13:11에 의하면 성령은 지금 역사하고 계신다.

여기서 성령의 말씀은 환난 중에 임하는 하나님의 도움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마가복음 1:8에는 성령의 일반적인 부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성령을 부여해주는 것은 종말론적 기대와 일치된다.


4)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음

마가복음 1:9 이하에서 예수의 세례는 선지자로서의 부름 이상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메시야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의 새 시대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적으로 부여해 주신 사역을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5) 마태복음의 특수한 구절들

마태복음 5:3에서는 성령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들어나는 것보다는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께만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주어진다.

마태복음 28:19에서는 “프뉴마”와 이름이 연관을 맺고 있는 새로운 특성이 나타난다.

주님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과 연합하기도 쉽다.

이것은 성자 안에서나 성자와의 만남이 있는 성령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6) 결론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은 적게 나오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사역이 끝나기까지는 그의 제자들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강림을 경험했을 때, 그들은 성령은 오로지 예수의 오심과 예수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정한 핵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난다는 것이다.

성령에 대한 진술들은 그의 독특성, 그의 종말론적 지위, 그의 안에서의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강조한다.

(마 12:18, 28 막 1:10, 3:29~30, 마 1:20)

성령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의 여러 가지 현상들은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인식에 종속된다.


2.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1) 성령과 예수와의 관계

누가복음 4:1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시며, 성령에 종속되지 않고 성령에 의해 행동하신다.

4:18에 따르면 성령은 예수 위에 거하신다.(예수보다 위에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성령을 지니고 계셨다. 그 후에도 즉 세례 받을 때에 성령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이것은 성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실현이 새로운 신적인 행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성령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주신다.(눅24:49)

성령은 예수 안에서 최초로 그 자신을 나타냈으며, 예수를 통해 공동체에 임했다.(행 2:33, 10:14, 19)


2) 공동체 속에 거하는 성령

성령은 자연적인 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성령으로서 공동체의 모든 존재를 형성한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하다.” 라는 말(행 6:3, 11:24)은 지속적인 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반면에 반복적으로 “성령을 충만케 해주는 것“은 성령의 역동적인 측면을 나타내주는 것이다.(행 4:8, 13:9)


3)성령의 외적인 표현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이 사건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동일한 원리가 오순절에 일어난 여러 가지 현상(행 2:1 이하)과 사도행전 4:31 의 지진에도 적용된다.

방언은 또한 외적인 현현이다.

성령은 그의 역사를 물리적인 자연의 영역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물리적인 자연의 영을 하나님께 종속시킨다.


4) 성령의 역사

누가복음 12:10에서 성령은 예수에 대한 증인들이 영감을 받아 한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는 예언의 영이다.(눅 4:23 이하)

누가복음에서의 치유는 성령과 연관되어 있지 않고 예수의 이름, 예수에 대한 믿음,

예수 자신, 기도, 사도들과의 신체적인 접촉, 예수의 능력 등과 연관되어 있다.

성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방언과 예언을 할 수 있게 한다.(행 2:4, 눅 1:41, 67)

성령은 또한 마음의 분별력을 준다(행 13:9). 성령은 설교에 능력을 부여해 준다.

예언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사도행전 8:39 에서의 성령은 예언과 더불어 다른 은사들을 부여해 주며,

신앙 공동체의 윤리적인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5) 교회 시대의 성령

누가복음 11:13에는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마 7:11)

성령은 절대적인 은사이다.

성령 강림은 종말시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룬 종말론적 사건이다.(민 11:29)

성령을 받는 것과 믿음을 갖는 것은 병행된다.

성령을 부어 주는 것(행 2:1 이하)은 어떤 의미에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는 것과 유사한 언약의 갱신이다.


성령은 이제 전 교회에 동시에 주어진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지자들이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계속되는 선교의 역사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주신다.

누가는 신앙, 구원 또는 순종을 구체적으로 성령의 산물이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다.

기도 역시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을 부여받는 것에 선행된다.

성령을 받게 되면 특별한 과업들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누가는 신앙 공동체의 존재를 성령의 역사로 돌리지 않음으로써,

신앙 공동체에게 그 공동체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과업을 상기시켜 준다.


6) 성령을 받음

사도행전 2:38, 9:17~18, 19:2 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10:44 이하에서는 성령 강림이 세례에 선행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필수적인 수단이 아니다.

아볼로와 에베소 교인들의 경우에 있어서의 핵심은 세례와 성령을 연관시키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세례 요한을 거쳐 교회에 이르는 구원의 경로를 보여 주려는데 있다.


세례는 회개의 자명한 표현이다. 따라서 세례는 성령의 부여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기도와 믿음은 성령을 받기 위한 참된 준비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자유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세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성령은 세례 받기 전(행 10;44)이나,

세례와 상관없이도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2:1 이하)


3. 바울의 개념

1) 문제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새로운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성령을 제시하기 위해 헬레니즘적인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는 구원이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구약의 사상에 따라 헬레니즘의 사상을 시정한다.


성령은 새로운 생명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새로운 피조물은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피조물과 새로운 생명은 십자가와 부활의 결정적 사건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2) 신앙의 능력으로서의 “프뉴마”

고린도전서 2:6 이하에서 성령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이해를 중재해 주는 능력이시다.

십자가는 옛 세계와 새 세계를 구분지어 준다.

성령께서 우리를 옛 시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시면,

주님과의 연합은 영적인 신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에 대한 지식에 의해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몸은 십자가 형벌과 부활이라는 구원 사건에 참여하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성령을 지닌 사람들은 새로운 실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산다.

성령께서는 새 생명을 주신다.


기적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위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믿음의 성령이다.(고후 4:13)

가장 중요한 은사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다.(고전 12:3)

어떤 인간적인 공적으로도 성령을 받지 못한다.(갈 3:14)


우리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고전 6:11)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과 같다.

성령은 믿음을 갖게 해 주는 동시에 신앙생활의 표준이 되는 규범이기도 하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5:25에서 성령은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신자들은 성령에 의해 그들의 삶이 지배되도록 해야만 한다.


3) 육체에 대한 부인

성령과 육신의 대조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대조와 같다.(갈 3:2, 5)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빌 3:3)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의 계시는 인간적인 지혜를 부정할 것을 요구한다.(고전 2:6 이하)

성령 안에서 마음의 할례는 인간적인 기준을 제거한다.(롬 2:29, 고후 3:6)


율법이 죄를 드러내고 심지어 죄를 범하게 하는 반면에 성령은 봉사하는 새로운 삶을 준다.(롬 7:5~6)

갈라디아서 4:25 이하에서 두 가지 출생(육체, 성령에 의한 출생)은 인간의 가능성에 의해 사는 것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사는 것을 말한다.

갈라디아서 5:17에 따르면 신자들은 단순히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육체는 그들 자신의 뜻을 말한다. 신자들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이제 성령에 의해 살고 행한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그들이 성령을 위해 씨를 뿌리는지,

아니면 육체를 위해 씨를 뿌리는지에 의해 결정된다.(갈 6:8)

육체는 자기 자신의 것이지만 성령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가능성이다.

성령 안에서 행한다는 것(롬 8:4~5)은 하나님의 규범적인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 속에는 믿음의 결단이 포함된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의 결단조차도 하나님의 행위이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근거하여 율법을 이룬다.(롬 8:4)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를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성령 안에서 행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4)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성령

성령의 고유한 사역은 기도이다.(롬 8:15, 27 갈 4:6)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립된 아들 됨에 대해 증거 해 주며, 아들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아들이 된다는 것은 섬긴다는 것을 의미하며,

육체의 욕구들을 거절하고 율법의 요구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롬 7:5~6)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14)

그리스도, 은혜, 십자가에 의해 산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사랑을 위한 자유를 의미한다.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이시다.(갈 5:22)

그러나 이러한 열매는 예배(고전 12~14장) 및 사랑 (고전 13장)과 같은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된다.

성령께서 우리를 성화시킬 때(롬 15:16, 고전 6:11),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케 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순종하면서 성령에 따라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우리를 자아로부터 해방시켜, 다른 사람들을 향하게 하며, 개성을 회복시켜 주고,

개성에 따라 하나님 앞에 서고 이웃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영적인 은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경우에만 가치가 있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것은 역동적인 힘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지속적으로 거할 수 있는 근거이다.


5) 성령과 그리스도

로마서 8:1 이하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 거하는 성령” 과 “너희 일에 거하는 그리스도” 라는 표현을 교대로 사용한다.

이 구절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임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주님은 성령에 의해 현존하신다.(고후 3:17~18)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통해 신자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그 셋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전 12:4 이하)


6) 인간론적인 “프뉴마”

성령은 전 인격에 영향을 주며, 따라서 심리학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프뉴마”에 대한 일반적인 인간적 개념들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7:34, 고린도후서 7:1에서 심리학적 기능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프뉴마”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빌립보서 1:27에서 “프쉬케(혼)”와 병행을 이루며, 고전 2:13 에서는 전 인격을 가리키고,

인사를 끝마칠 때는 “너희”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갈 6:18, 빌 4:23)

하지만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프뉴마”는 우리들과 이질적인 하나님께서 주신 “프뉴마”이다.(고전 14:14, 롬 1:9)

고전 5:3 이하에서 “프뉴마”는 믿음을 갖게 된 새로운 자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인간의 “프뉴마”는 성령에 의해 완전케 된 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롬 8:15)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뿐만 아니라, 더 이상 자아를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해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가장 은밀한 존재를 가리킨다.


7) 영적인 사람

바울에게 있어서 “프뉴마티코이”(영에 속한 사람)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아는 사람들이다.(고전 2:13~15)

“프쉬코이”(혼에 속한 사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이 세상의 영에게 지배를 받는다.


고전 15:44~46 에서는 영적인 몸과 육신적인 몸이 구분되어 있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일들(고전 2:13, 9:11 롬 15:27)을 안다.

영적인 일들은 세상적인 일들, 즉 자연적인 생명에 속한 것들과는 대조적인 것들이다.

고전 14:1 에서는 영적인 은사들이 영에 속한 일들이라고 불리 운다.

율법 역시 영적인 것이다.

율법은 인간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에서 나온 하나님의 법이다.


4. 요한복음

1) “사르크스”(육)와 대립되는 영역으로서의 “프뉴마”

요한복음 3:6, 6:63에서 “프뉴마”와 “사르크스”는 각각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을 나타낸다.

“프뉴마”는 “데오스”(하나님)와 같고, “사르크스”는 마귀나 세상과 같다.

요한복음 4:24에서 하나님은 “프뉴마”이다.


“프뉴마”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영성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에서,

즉 참된 실재의 세계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들어오셨다.(요일 5:20)

따라서 참된 예배는 성육하신 성자에게 드리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예수 안에 계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요 8:32, 17:3)

그러므로 “영 안에서”라는 구절은 바울이 언급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은 구절이다.

예배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으면 그러한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2) “사르크스”와는 반대로 생명을 주는 능력으로서의 “프뉴마”

요한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지식이다.(요 17:3)

“프뉴마”는 새 생명을 지배하는 영역인 하나님의 세계이다.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세상에 오셔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것을 깨달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은 성령과 같다.(요 3:8) 그러나 여기서의 요지는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바람에 비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63에 따르면 “사르크스”는 무익하나 “프뉴마”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생명을 준다.

여기서 “사르크스”는 예수의 “사르크스”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사르크스”는 “프뉴마”가 “사르크스”안에 있는

그 생명의 실현을 인정할 때에야 그 가치가 인정된다.


즉 예수에게 있어서 “사르크스”는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우리는 외적인 요소를 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예. 성례전)

외적인 요소 안에서만 생명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만 영광과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 20:22에서 성령을 부여해 주실 때,

그 성령은 생명을 의미하는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이르게 하는 선포의 능력을 가리킨다.


3) 보혜사

진리의 영(요 14:17, 15:26, 16:13)인 보혜사는 실재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세계는 예수 안에서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요 17:13 이하)

보혜사는 제자들 안에 있다(요 14:17). 제자들은 그와 예수를 안다(요 14:17, 16:3).

제자들은 모두 성부에 의해 보냄을 받았고, 가르치며 증거 한다.


그 말씀이 신자들에게 역사적 예수가 성자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능력 있는 말씀을 증거 함으로써(요 16:8 이하), 예수의 참 모습을 드러내 준다.(요 14:26)

“프뉴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능력이다.


5. 신약의 나머지 부분

1) 바울서신

A. 에베소서

에베소서에서 “프뉴마”는 성장(3:16), 기도(6:18), 계시(1:17)의 능력이다.

성령은 성경 안에서 역사하신다(6:17). 성령은 그리스도의 한 몸과 관련되어 있다(4:4).

악한 “프뉴마”는 상실된 자들 안에서 역사하며, 악한 영적 세력들은 공중의 권세자이다.(2:2, 6:12)


B. 디모데전서

디모데전서 3:16, 디모데후서 4:22 에서는 신조들이 나온다.

디모데전서 4:1 에서는 예언의 영이 언급되고 있다.

성령의 역사는 날마다 여러 가지 특성들로 나타난다.(딤후 1:7)

디도서 3:5 에 따르면 성령은 칭의와 소망을 의미하는 새로운 탄생을 가능케 해 준다.

디모데전서 4:1 은 미혹하는 영에 대해 언급한다.


C. 히브리서

히브리서 12:23 에 나오는 영들은 죽은 사람들이며, 1:14에서 영들은 천사들이다.

3:7, 9:8, 10:15 에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이 언급되어 있다.

4:12 에서는 “프뉴마”와 “프쉬케”가 구분된다.


성령은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은사를 나누어 주며, 다가올 시대를 미리 맛보게 한다.(6:4~5)

10:29에 따르면 성령은 종말론적인 은혜의 징표이다.

9:14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성령의 영역에서 왔으며, 성령을 소유한 자로서 그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2) 일반서신

A. 야고보서

야고보서 2:26에서의 용법은 인간적(몸, 혼, 영)이다.

마찬가지로 4:5에서의 영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셨으며, 장차 우리에게서 요구하실 영을 가리킨다.


B.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 1:11~12에서의 영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서 역사한 예언의 영이다.

1:2 에서의 영은 성화시키는 능력이다.

4:14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해 비난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영광의 영이 주어진다.


C. 베드로후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1:21 에서의 영은 정경에 영감을 주는 예언의 영이다.

유다서 19~20절에 따르면 세상적인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없으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바라며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


D. 요한일서

요한일서에서 “프뉴마”는 시대의 대전환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프뉴마”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 안에 거하시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한다.(3:24)

성령은 선물이다(4:13). 성령은 선포의 능력으로서 증거 한다.(5:6 이하)


E. 요한계시록

요한게시록 16:13~14, 18:2 에서는 부정한 악마적인 세력들이 영적인 것들로 표현되어 있다.

예언의 영이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19:10)

“프뉴마”는 환상을 주고 놀라운 영역으로 인도한다.(17:3, 21:10)

성령은 말씀을 하신다(14:13). 성령이 사용하는 대변자(2:17, 14:13)는 영적인 존재이다.

주님은 성령이 말씀하시는 대로 말씀하신다.(2:1, 7,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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