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예배


‘예배’란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배보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이것을 국어사전은 “신자들이 교회에 가서 예배 의식에 참례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것은 신약 성경이 말하는 예배와는 도통 거리가 멀다.

 

‘보다’는 동사를 사용하는 한 신자들은 예배의 ‘관람자’란 신세를 면하기 어렵고,

목회자들은 이 관람자들에게 더 많은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하여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킬 방법들을 애써 찾게 되는데 비해,

바른 예배란 모든 사람들을 적극적 예배 행위자로 요청하기 때문이다.


‘보다’가 가진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다’, 혹은 ‘예배드리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예배’란 드리는 것도 아니다.

예배의 바른 개념보다는 이 역시 오해와 왜곡을 만들어내기 쉽다.

우리는 드릴 ‘예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 다른 무엇을 드리기 위하여 교회에 가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헌신’이란 용어로 마치 예배 시에 자신을 하나님께 통 채로 드리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누구도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잠시 후에 다시 가지고 돌아온다.


‘예배드리다’는 고상한 용어를 사용하지만 신자들은 관중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

‘예배’란 ‘하는’ 것이다.

한국어 ‘예배(禮拜)하다’가 뜻하는 것은 ‘예의(禮儀)나 예절(禮節)을 갖추어 절하는 것(拜)’으로

신자들의 어떤 행동 자체를 지시한다.

‘예배’에서 신자들은 누구나 자신이 직접 ‘예배 행위자’ 즉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신약 성경에서 “예배(하다)”로 번역되었거나

‘예배’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모든 용어의 공통된 특징이다.


신약의 용어들

신약성경에 ‘예배’로 번역된 단어나 예배와 관련된 단어는 두 종류가 있다.


1. 먼저 ‘절하다’, ‘경배하다’, ‘예배하다’로 번역된 ‘프로스퀴네인’과

이 단어와 연결되어 사용된 ‘무릎 꿇다’, ‘엎드리다’ 등이다.

사람이나, 사탄, 천사 등이 이 단어들의 목적어로 사용된 예가 있으나

모두 부정적 의미 즉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긍정적 의미로는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이 단어들의 목적어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 단어들이야말로 신자들이 하나님께 하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핵심 용어이다.

‘예배’의 근본적인 의미는 - 한자어가 뜻하는 대로 -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경험했을 때,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특별한 신앙적 감동이나 욕구를 표현하고 싶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이 같은 행동을 취했다.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이 ‘예배’의 근본 의미라는 사실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 취한 사람들의 태도에서 보다 분명하다.

한글 성경은 ‘프로스퀴네인’을 ‘절하다’, ‘경배하다’, ‘예배하다’로

구분하여 번역하였지만 이는 헬라어를 따른 것이 아니다.

현대 한국어가 한 단어를 같은 용어로 번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도 꿇어 엎드려 절, 경배, 예배했다고 구분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같은 태도를 보이지만 사람들의 심리상태나 신앙이 같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 모두를 순 긍정적, 신에게나 할 수 있는 절대적 의미의 ‘예배’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와 관련된 중요한 두 가지 요점을 배운다.

첫째, ‘예배’ 개념을 위해서는 절하는 행동이 아니라 이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내면적 요소가 더 중요하다.

예배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인 것이다.


둘째, 믿음 등의 내면적 요소가 갖추어져 있다면 ‘예배’란 하나님을 향하여 절하는 행동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더 많은 행동, 더 많은 정신적 활동이나 태도가 ‘예배 행위’에 포함될 수 있다.

이 두 번째 요점은 언어적 분석에 신구약 성경의 내용을 통합한 것이다.


요약하면 ‘예배’란 신자들이 믿는, 살아 계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삼위 일체 하나님께 완전한 굴복, 절대적 복종, 최대의 존숭, 완벽한 의존, 최상의 감사 등을

표현하는 내면적 태도 및 외부적 행동이다.

예배자 자신의 어떤 영적 유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높으심과 영광, 은혜를 높이고 기리는 것이 그 목적이다.


2. 보다 적극적 개념으로 “섬기다”로 번역된 “라트류에인”, 같은 어근에서 나온 명사이지만

“예배”로 번역된 “라트레이아”, “봉사”로 번역된 “레이투기아”(이 단어의 동사형은 “섬기다”로 번역됨)가

하나님을 “예배함”과 관련되어 있다.


이 단어들은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규정된 예법을 따라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와 그 때 가지는 마음가짐을 지시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시기까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구약 예배의 핵심에 속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힘입어 하나님을 모시고, 찬양하며,

특히 신자로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전체 삶을 지시한다.

이 삶은 성령님의 주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

마치 제물을 바치듯이 우리의 몸 전체를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 예배”로 표현하기도 했다.


신자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그런 의미에서 ‘예배’ 자체라는 생각은 ‘주인을 섬기다’ 혹은 ‘종노릇하다‘를 뜻하는

“두률에인”과 ’성도를 섬김‘으로 더 자주 사용된 “디아코네인”에 더 잘 나타나 있다.

전자는 수동적 섬김을, 후자는 자발적이고 능동적 섬김을 뜻한다.


요약하면 이 적극적 의미의 ‘예배’도 초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 모인다.

예배란 하나님을 위한, 혹은 하나님께 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앞에 언급한 ‘예배의 소극적 개념’(하나님에게 굴복함 등)을 보완하는 적극적 개념이다.

두 개념군의 보완적 관계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 4:10, 신 6:13의 해석적 인용)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우리 시대에 ‘예배’란 용어는 신자들의 개인적인 전체 삶에 사용되기보다는

신자들이 - 마치 구약시대처럼 -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함께 모여서

특수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집단적 행위를 지시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신자들의 어떤 집단적 행위를 예배라고 부른 적이 없다.

‘예배’와 관련된 용어들을 추적하면, 현대의 예배와는 다른 무엇에 부딪치고,

우리가 ‘예배’라고 부르는 활동들을 추적하면, ‘예배’라고 부른 흔적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의 ‘예배’ 개념과 지금 우리가 예배라고 부르는 활동들이 결합된 것일까?

정확한 답은 신약성경의 범위 안에서는 명확하게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예배’란 단어와 교회가 해 오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교회사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이것은 추측만은 아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시절에 기독교적 특징을 나타내는 명확한 예배의식이 고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배의 기초

신약적 예배의 기초는 우선 구약적 기초를 그대로 넘겨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자기 백성에게 구원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구약적 문맥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답하시는 분이심”을 확실한 예배의 기초로,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것을 예배자의 자격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약시대에 좀 더 확실하게 덧붙여지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예배자들은 사람들을 죄와 심판, 저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것을 믿음, 즉 예수님을 믿음이 예배자의 새로운 자격이 된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19-20절은 신약적 의미의 집단적 예배에 확실한 기초를 제공하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 그곳에 하나님도, 또 승천하신 주님도 함께 계신다.


따라서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나 별 다름 없이 우리는 주님께 예배할 수 있다.

다만 육체로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감사와 존숭과 의존, 섬김, 봉사 등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모임에 자신이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상당히 많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순 구약적 의미의 인용구로만 읽지 않고(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심”)

사람이 되실 예수님의 미래 사역과 관련된 신약적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면(즉 “예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심”)

이 구절이야말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예배의 기초로 알려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다시 오실 주님이 이 세상에 이미 성령으로 임재하고 계심을 경험한

초대 교회의 삶을 통하여 이것이 단순히 약속만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요약하면, 예수님의 살아 계심, 그리고 세상과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심이

신자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 집단적 예배의 기초이다.

물론 개인 신자의 삶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지만 신자들이 예배를 위해 모인 모임과

그 모임에서의 예배적 행위들은 더 명백한 삼위 하나님의 임재 장소요 때인 것이다.


예배의 방법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예수님은 예배의 방법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요한복음 4장 20-24인데 각 절에 “프로스퀴네인”이 한 번 이상 사용되었고

모두 “예배하다”로 번역되어 있어서 이 부분처럼 중요한 예배학적 자료는 거의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애매모호하지만 핵심이 되는 표현. “영과 진리로”는 문맥에서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영으로” 혹은 "영 안에서“는 예배의 장소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잘못이 지적되고 예수님에 대하여 ”선지자이시다“는 인식이 생기자

(자신이 하나님께 당장이라도 예배하러 가려는 듯) 예배의 장소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예수님은 - 새 시대가 시작되었으므로 - 사마리아도 예루살렘도 예배의 장소로 적당치 않음을 지적하셨다.

새 시대의 예배는 순 영적 예배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또 어디서나 예배는 가능하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찾아오시고 사람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으로“ 혹은 ”성령 안에서“ 예배하여야 한다.

“진리로” 혹은 “진리 안에서”는 ‘어떻게’와 연결되어 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중요시되었던 이유는 그곳에 성전이 서 있었고

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도 당연히 이 피의 예배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새로운 시대를 말씀하셨다.

“영으로 예배할 때가 오고 있다.

지금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사역이 시작되고 있었던 바로 그 시점을

예배의 형태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지금”으로 지시하셨다.

그 시점은 자신을 그리스도로 알리시는 바로 그 시각이었다.

예수님은 자신과 관련된 예배, 즉 자신을 믿는 자들이 드리는 예배를 “진리로”,

혹은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지시하신 것이다.


예배란 이제 특별한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들이 두 세 사람이라도 모이는 곳, 그곳이 예배의 장소요 그 시간이 예배의 시간이다.

예배를 특정한 장소에만 묶어 두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 예를 들어 교회 건물을 성전

혹은 지성전이라고 부르는 것 등은 예배의 정신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지 않는 모든 목적은 진리의 예배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예배의 양면성

신구약 중간시대에 성전 예배 이외의 다른 예배가 하나 발전하였다.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나 세워졌던 회당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이 예배는 율법 낭독과 교육, 설교, 감사와 찬송과 기도의 모임이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가 그들의 예배에 회당 예배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는 그 형식을 새로운 방향, 즉 기독교적 내용이 그 형식을 채우도록 바꾸어 사용했다.

 

예를 들면, 율법과 선서들을 읽으며 이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와 모든 일들을 그 완성으로 가르쳤다.

나중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된 복음서와 서신들 등 신약성경을 읽고 설명했으며

구원에 근거하고 성령에 감동된 기독교인들의 삶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메시야가 오실 것만을 기도하던 내용에 오신 그리스도와

그 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는 기도를 덧붙였다.

새로운 신자들이 믿음을 고백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삶을 의미하는

기독론적 신앙고백과 세례와 같은 순서가 첨가되었고,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성찬 예식이 기독교 예배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회당 예배는 양면적 성격, 즉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로 향하는 요소들(낭독, 설교, 축복 등)과

신자들이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요소들(찬송, 기도 등)이 그 특징이었다.

교회의 예배도 이 양면적 성격을 이어왔다.

따라서 예배란 신자들의 모임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며 말씀하시고 축복하시는 시간이며

동시에 신자들이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시간인 것이다.


나가는 말

그야말로 예배를 보는 시대로 변해가고 있다.

보는 예배가 TV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간혹 예배 생중계를 통해서 점점 확산되고

신자들은 모이기보다는 편리한 현대 대중 매체를 통해서

더 큰 감동과 더 질 높은 설교에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시골 교회 전도사의 설교를 듣느니 차라리 유명 목사의 설교집을 보거나,

화면을 통해 언제나 흘러나오는 더 나은 예배 현장에 접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수요는 하나님과 신자의 인격적 예배 현장보다는 좋은 시설을 마련하여

유명 교회의 예배 사진들과 유명 목사님의 설교를 중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지도자들의 공급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배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는 근본정신에서 이탈하여 우리의 것,

즉 신자들에게 나타날 예배 후의 감동과 은혜에 치중한 결과일 것이다.

교인들의 느낌과 경험에 치중하는 한, 예배는 하는 예배가 아니라 보는 예배로 더 빨리 변해 갈 것이다.


집단적 예배 현장은 현대적 이기들과 인위적인 순서들로 더 많이 채워질 것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더 진한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해

교회를 무대화하고 예배를 각본해 가는 예술가로 변할 것이다.


그런 시대에는 인조된 화면이, 잘 구성된 드라마가, 이를 나르는 전파와 각종 정보매체가

성령의 사역을 대신한다고 오해하지 않을까?

예배의 바른 정신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위한 믿음과 섬김의 예배를 실천하기 위한

관심과 노력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예수님은 함께 무릎을 꿇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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