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내세의 천국만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일상 동안에는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반면 죽음이 가까워 오면 그때부터 죽은 후에 일어날 만약의 일들을 위해서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합리적인 지성적 판단이긴 하지만, 구원의 속성은 이런 인간적 교묘한 술수나 충동이나 이성에 의해서 지배 받을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데 이성의 타당성을 이용하면 할수록 신앙은 생기지 않는다.

오직 구원의 길이 예수에게만 있듯이 신앙도 오직 하나님의 방법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목적론적, 이기적이다.

그리고 구원을 철저하게 내세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이 땅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이런 경향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것은 영과 육을 분리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통한 철학적 개념이다.


기독교는 죽고 나서 가는 천국만을 말하는 플라톤주의가 아니다.

성경의 구원은 현세와 내세 모두에서 이미 이루어졌고 또 장자 이뤄질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 땅에서 살면서 천국의 삶을 산 자가 있었다.

그는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살았던 에녹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이 땅에서 300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 살았다고 전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는 것은 그는 천국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에녹이 살았던 시대는 노아 홍수 이전이었기에 인간들이 타락할 대로 타락한 시대였다.

즉 말세지말에 끝에 달했던 시대였다.


가는 곳곳마다 불의와 사악, 음란이 판을 쳤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 에녹은 타락의 핵폭탄 속에서도 안전한 방공호 안에 있는 것처럼,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면 천국의 삶을 누리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품으로 갔다고 성경은 전한다.

 

에녹을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은 단지 죽어서 가는 낙원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찬송가). 이가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다.

 

펄시 콜레가 쓴 내가 본 천국, 내가 본 지옥 시리즈를 보고 천국에 대한 흠모와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의 하나님을 알게 하는 모티브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체이고 핵심이라고 말하고 그것만을 목적하고 산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미신의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게 하나님께서 주는 양심의 자극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극이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미 천국을 경험한 자였다. 신비한 경험을 한 자였다. (고후 12)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 말했듯이 천국과 낙원을 경험한 자였다.

하지만 정작 그가 그 천국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 경험담이 있은 지 십 사년이 지난 후에서이다.

 

만약 우리 같으면 그런 류의 꿈을 한번 꾸면 그 다음날 아침에 가족에게부터 시작해서 온 친척과 교회 식구들에게 다 떠들고 다닐 것이고,

좀 심하다 하면 간증하고 책까지 낼 것이다.

내가 경험한 신비한 환상이나 영적 경험이 전부인 것 같이 다닐 것이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꿈 같은 천국에 대한 동경이 있지만, 성경은 천국 가는 것만을 구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원의 결과일 뿐, 핵심이 될 순 없다.

그러므로 구원만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라기 보다 자신을 신앙하는 자다.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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