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의 관계성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이 둘의 분명한 이해는 우리는 믿는 성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안에는 신학의 부재시대, 다시 말해서 성서신학적 연구가 빈약하고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노력이 없이 성경을 단지 하나의 종교적 수단으로 삼는 기독교회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이라고 하는 책속에 갇히신 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속에서 인간과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시는 인격의 주체이십니다. 따라서 성경이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이라고 하는 이 두가지의 긴 역사성과 역사적인 차이점을 분명히 이해를 해야만 성경을 바르게 알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은 이 둘의 큰 차이점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적기 때문에, 성경을 단지 하나의 책으로 간주하고 창세기나 요한 계시록을 같은 시각과 해석력을 가지고 읽습니다. 실상은 해석할 아무런 도구나 사전 지식이 없이 성경을 봄으로써 성경을 함부로 이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1. 율법과 은혜
신약을 복음이라고 한다면, 구약을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서는 모세오경을 의미하나, 구약에는 전체적으로 율법아래 있는 예언이며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법제화된 율법은 실제로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약 2400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이후 430년이나 지나서야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갈 3:17-18) 그런데 율법이든 신약의 복음이든 성경전체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려고 쓰여진 책들입니다. 때문에 율법과 복음이라는 말을 대조시키기 보다는 율법과 은혜라는 말로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은혜, 율법과 복음은 사실상 대조라기보다는 상호 관계적이고 보완적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율법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불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질서와 백성을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율법이 분명하게 주어지기 전에 사람들은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담은 주전 4114년경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주전 2166년에 태어났으며 아담후 1948년 이후입니다. 출애굽은 주전 1446년에 이루어졌고, 시내산에 머무는 동안 (1446.2-1445.3)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된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이후 이스라엘백성도 역시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 자체가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으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전체를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범주가 존재합니다. (1) 도덕적인 율법의 계명 (출 20:1-26, 십계명), (2) 재판 (민법) (출 21-24장), (3) 의식 (출 24-31장 & 레위기의 대부분).

2. 율법의 바른 이해
율법이 당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을 보호하고 질서를 다스리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한 시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요1:17) 복음이 분명히 나타나기 전까지만 율법이 유효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을 때의 모습은 심판의 장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아래 계속 머물러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감사하지도 않는 것을 보시면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조건이 붙은 순종과 축복을 제시하셨을 때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완전한 순종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으며 자신들의 중한 죄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수 있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러 있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고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도 은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은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안에 이미 복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이 은혜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더해진 것일 뿐이다. (갈 3:19)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게 될 것이다. 이 조건이 붙은 율법에는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다. 삶의 축복을 전제로 한 유대교인들은 바로 이 율법의 축복을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율법과 은혜에 대한 오해의 문제가 있다.

(1) 율법주의 (legalism)

구원받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위를 하고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바울이 쓴 책이 로마서입니다.

(2) 반율법주의 (Antinominism)

은혜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살아갈 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쓴 책이 야고보서 & 고린도 전후서입니다.

(3) 갈라디아주의 (Galatianism)

우리가 행위로써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서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것 역시 결과적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정하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이스라엘의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롬5;13) 율법이 있기 전에는 양심만으로 인간의 죄를 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은 생각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도 죄가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정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이 온 것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정죄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며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로운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나, 인간의 죄를 밝혀줄 뿐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유지시켜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율법은 시대적으로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은혜로 구원받을 때까지 몽학선생(초등교사)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율법은 인간의 축복과 저주를 약속하지만 축복을 받으려면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 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저주,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이 저지른 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사망과 저주의 문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시기 전까지는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이 저주를 끊어내는 십자가의 은혜가 율법의 저주를 중단시키고 생명과 영생을 주시는 온전한 은혜가 시작된 것입니다.

갈 3:24-25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부유한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노예)이란, 옛날에 서당에서 한자를 배울 시절에 학생들이 서당에 안가고 땡땡이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을 유지들이 합심하여 타 동내에서 하인을 하나 사서, 학생들을 집에서 서당으로 데려오는 일을 하게하고 학생들 공부하는 동안 장작을 팬다던가 서당 선생님 뒤 바라지를 하게 하기 위한 하인으로 글은 가르치지 않고, 양반 자재들을 집에서 서당까지 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일만 하는 가짜 선생이며, 학생들이 그 하인(가짜 선생)의 말들 잘 듣게 하기 위하여 붙여준 이름이 몽학선생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몽학선생 번역은 아주 잘 된 것이다. 최근 개역판은 “초등교사”라고 하여 그 의미가 다시 불분명해졌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안에서 완성됩니다. 율법의 완성은 죄없으신 인간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율법안에 있던 하나님의 의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완전히 타나났고 이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은혜안에 있게 되면 그를 힘입어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롬 13;10)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롬 8:3-4) 굳게 세우는 것이다. (롬 3:31) 율법에서 해방되고 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갈 6:2, 약 1:25) 율법안에 희미하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의, 그 은혜와 사랑의 빛은 복음안에서 분명해졌으며, 온전히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율법안에만 있다면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복음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양심과 율법안에서는 충분히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죄의 세력의 힘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어느정도 알게 해 주는 힘이 있었지만 그 죄와 악의 세력을 제거하는데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율법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로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해 보고자 하는 헛된 욕망과 자기 만족적 신앙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와 죽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자주 율법적 삶과 행위적인 신앙에 빠지는 것은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그 역할을 오해한 때문이며, 율법적인 삶이 인간으로 하여금 쉽게 종교적인 생활을 정의해 주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의도를 분명히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의 한 도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하나의 종교적 삶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 유대교를 믿은 이들이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거나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바울의 말대로라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기독교 이야기 > 기독교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궤에 대한 오해  (0) 2017.11.07
떡과 잔   (0) 2017.11.06
이스라엘의 결혼제도   (0) 2017.11.06
성막의 7개기구와 의미  (0) 2017.11.02
성경은 어떤 유익을 주나요?   (0) 2017.10.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