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합주의 (Syncretism)

     1. 분명히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에서 나온 교리나 가르침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예컨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치거나, 기독교와 불교를 통합하려는 것 등이다.  

이 용어는 서로 다른 개념과 문화적 요소들이 혼합된 것으로 특징지워지는 역사의 한 시기, 혹은 한 문화의 형태를 가리키기 위하여 많이사용된다.


     2. 서로 대립되는 신조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있어서 서로 대립되는 신조들을 서로 조화시키거나 하나로 연합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를 말한다.  


이 용어는 '연합시키다'라는 뜻을 지닌 희랍어 동사 synkretismos에서 유래되었다.  

희랍 문필가인 플루타크(주후 46?-120?년)는 정치적인 의미로 이 용어를 초로 사용하였다.  

플루타크는 비록 서로 분쟁 중에 있기는 하지만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하나로 뭉쳤던 크레테 시민들의 연합전선에 이 용어를 적용시켰다.
후대에 와서 이 용어는 오늘날에 있어서와 같이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종교적 혼합주의자들은 서로 상이한 신학적 체제들을 몇몇 공통의 합치점을 통하여 하나로 연합시키고자 노력한다.  여기서 이러한 공통의 합치점은 바로 각 신조들의 최소 공통분모인 까닭에 혼합주의는 일반적으로 모든, 혹은 거의 모든 종교적 실체들이 소모되어 버린 혼합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혼합주의는 일반적으로 초자연적이고 교리적인 진리를 배제하고 오로지 순수히 자연적이고 주관적인 종교적 체험을 지향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1) 구약성경: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은 혼합주의적 경향에 의하여 끊임없는 위협을 받아왔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 왕국이 수립된 이후로 이러한 위협을 크게 받았었는데, 예를 들어 여로보암 1세 시대(주전 922-901년)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우상숭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로 유대인들은 그들이 정복한 가나안 민족들의 많은 종교의식들과 관습들을 차용하였는데, 우상을 숭배하려는 경향과 높은 산에 마련된 성소에서 여호와를 예배하려는 경향과 바알 제의와 아스다롯 제의와 여호와 제의를 하나로 연합시키려 했던 경향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의 혼합주의의 두드러진 예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많은 선지자들(특히 아모스)은 이러한 혼합주의적 경향에 강하게 항거하였다.


     (2) 로마:  혼합주의는 로마시대에 크게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주후 1-4세기에 특히 더 그러했다.  로마의 지중해 연안 지역 정복에 이은 정치적 통일은 많은 이방종교들과 제의들을 서로 가깝게 접촉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여러 이방종교들과 제의들 속에 내재해 있는 공통적인 형태를 찾아내고자 노력하였다.  즉 사람들은 혼합주의적 해석 원칙에 따라 로마제국에 속한 여러 지역의 신들을 각기 다른 문화 속에서 각기 다르게 표현된 동일한 최고의 실체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희랍의 제우스와 로마의 유피테르와 페르시아의 미트라스와 프리기아의 아티스는 모두 다 단지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본질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이시스.케레스.데메테르.오프스.레아.텔루스도 동일한 여신을 각가 다르게 지칭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비너스와 큐피드,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 아스타르테와 바알, 이시스와 세라피스도 각기 다른 나라들에서 각기 다르게 이름 붙여진 동일한 신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혼합주의적 경향은 결국 그리스도를 미드라와 동일시하고 마리아를 이시스와 동일시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모든 신들과 여신들은 모두 다 동일한 최고의 실체의 부분적인 명시로서 모두 다 동등한 존경과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이교적인 혼합주의는 종국에 이르고 말았다.  즉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옛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여호와의 단일성을 수호하였던 것과 같이 기독교의 단일성과 독특성을 강하게 수호하였던 것이다.


     (3) 17세기의 유럽:  특수한 학술적 의미에서 이 혼합주의라는 용어는 독일의 루터주의자이자 헬름쉬타트의 신학교수였던 게오르그 칼릭스투스(1586-1656년)의 신학적 입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칼릭스투스는 최소한의 근본적인 종교적 일치점에 입각하여 독일의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를 하나로 연합시킬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는 기독교에 있어서 교의에 대한 신앙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를 회유할 교리적 신조들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에 입각하여 교황을 기독교의 제1인자로 인정하였으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가톨릭 미사를 진정한 예배로 간주하였는데, 이것은 공식적인 루터교의 가르침에 대립되는 것이었다.


     칼릭스투스의 이러한 견해는 1640-86년에 루터교 내부에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아브라함 칼로브(1612-86년)의 지휘 아래 대다수의 루터주의자들은 칼릭스투스의 견해에 반대하였고, 결국 칼릭스투스의 가르침을 비루터주의적인 것으로 정죄하였다.  비록 이러한 칼릭스투스의 혼합주의는 독일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를 하나로 연합시키는데 실패하였으나 그의 혼합주의적인 주장은 양자간의 적대감을 완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이러한 그의 혼합주의적 견해는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일부 개신교인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헌신생활에 전념케 하였던 경건주의의 기틀을 닦아 놓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 혼합주의라는 용어는 보다 제한된 학술적인 의미에서 17세기의 파리대학의 일단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 일단의 신학자들은 그 당시 한창 문제시되었던 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호관계에 대한 서로 대립된 견해들을 하나로 조화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대부분의 논쟁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교리체계를 발전시켰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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