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섭리론


제Ⅰ장 서론


1. 문제제기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의 대상은 창조자이시고, 인간과 피조세계를 전능하신 지혜와 사랑과 공의로 돌보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역사하심을 신자가 시공간적 삶의 장에서 인지하고 체험함으로 고백과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적인 물음이고, 그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비전이다. 특히나 신자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위치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삶은 하나님에게 향하여져 있고, 하나님의 전() 창조와 돌봄이라는 경륜속에서 절대적 확신과 소망을 가짐으로서 역동성과 생동성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1029절에 보면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그 하나라도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말씀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의 펼쳐짐과 그것의 운영으로 가꾸어지고 지탱되어진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위 성서의 말씀에서 '참새'라 함은 가장 가치가 적은 것이라는 의미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의 말인데,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지혜와 손길로 만드셨고 관리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 자신과 그의 삶 그리고 그의 주위에 있는 모든 공생적 공존적 관계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의 펼쳐짐과 운영이 지배한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섭리" 라 할 수 있다. 섭리라는 용어가 성서 자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성경적인 교리를 나타내며,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근간이 되는 용어이다. 특히 섭리는 "신자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직접적인 신앙적 내용이기 때문에, 단순히 신학적 중요성을 띨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관련되는 신앙적 중요성도 막중하다. 사실 섭리라는 것은 신앙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한, 신자의 삶이란 의미 없는 인생이거나, 자력에 의한 생존경쟁의 차원에 머물게 된다. 섭리에 대한 연구가 요청되는 까닭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섭리라는 것이 신학의 한 부분이고, 또 사람의 입에 여전히 회자되지만, 신학의 본격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있으며, 본래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한 채 사용되는 공허한 개념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시대 이후, 인간의 자율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신의 통치를 받는다는 사상은 거부되어졌고 급기야 현대에 와서는 신 죽음의 신학으로 인해 섭리의 주관자이신 신 자체가 의문시되는 국면을 맞이하였다. 이렇듯 섭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난도질당한 상태에서 섭리론을 논하거나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자연스럽게 기피되어 왔다. 20세기 신학(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불트만의 성서신학)에서 주목되고 있는 종말론적 연구에 있어서도, 기존의 역사를 다룬 '섭리'의 개념이 창조적으로 적용되지 못하였다. 특히 오늘날, 영성(spirituality)이 신학적으로 부각되는 시기인데, 그 영성의 근간이 기도를 위해서도, 기도를 가능케 하는 섭리에 대한 이해가 요청되는데, 이는 신에 대한 이해가 직접적으로 섭리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은 또한 신자의 삶에 있어서, 섭리와 가장 관련된 분야인 기도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나 종교개혁자 John Calvin의 신학 전통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한국교회의 경우, "신적 통치"의 특징을 대변하는 섭리라는 용어를 이해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실히 요청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국 교회 신자들은 거의 숙명론에 가까운 섭리 이해 혹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있는 바, 이에 대한 바른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이해가 시급하다 생각하여 필자는 칼빈신학 중 섭리론을 살핌으로서 그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려 한다.



2. 전개방법


본 논문은 위에서 서술한 문제제기와 연구 목적을 해결하고 성취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구성될 것이다.

본 논문은 John Calvin의 「기독교 강요Ⅰ」제1부를 주 내용으로 하고 기타 '칼빈의 신학'에 대한 연구서를 보조 내용으로 하여 신앙이라는 범주에서 깊은 이해와 적용이 필요로 하는 '섭리론'을 다루려고 한다. 필자는 칼빈의 모든 사상의 시작인 하나님 인식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攝理)의 의미와 그것이 신자의 모든 삶의 양태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할 때에 간과할 수 없는 악의 문제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장에서는 신학과 신앙의 근본 축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와 더불어 또 다른 축인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의 협력자인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자연세계와 우리 인간 실존과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지시는 지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3장에서는 John Calvin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논한 것을 근거로 섭리론에 대한 정의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지는 하나님의 인간, 자연에 대한 통치 그리고 돌봄과 인간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악의 문제 그리고 어떻게 신자의 신앙과 삶 속에 유익되게 하나님의 섭리를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4장에서는 칼빈이 말한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서 예정의 문제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섭리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5장에서는 위에서 말한 John Calvin의 섭리론의 대한 종합적 요약을 근거로 21세기 사회의 대한 선각적 숙고를 통하여 신자의 삶 속에 위치할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를 찾아보고 섭리론 이해의 폭을 넓혀 보려한다.



2 장 하나님 인식의 문제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칼빈은 참 지식의 근본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언급하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의 계시의 장()으로서 자연계시와 성서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피조된 인간과 교만과 오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인간에 관한 칼빈의 이해가 나타난다.


1. 하나님 인식의 근거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전통적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항상 하나님을 전제로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기 이해는 언제나 하나님의 이해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둘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칼빈도 이러한 기독교 전통속에서 자신이 인간 이해를 서술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스스로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는 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온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1) 이 말은 인간의 자기 이해가 하나님 이해를 조건짓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이해 안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나님 이해는 결코 실제적인 것이 되지 못하며 동시에 참다운 인간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2)고 못박아 말한다.


이와 같이 인간 이해와 하나님의 이해의 분리할 수 없는 긴밀성 속에서 칼빈 신학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그의 신학의 방법론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려오는 독단적, 선험적 방법도 아니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인간학적 방법도 아닌, 그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긴밀한 연관된 두 실재, 두 존재, 두 인격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그래서 결코 변증법이나 추상, 요청, 연역과 같은 것들이 문제되지 않는다.3) 그는 모든 사변을 배격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는 것을 단순히 그에 대한 진술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과 행동을 요구한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칼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요는 그 첫 부분이 "하나님 인식"에서 출발한다. 강요 제 1권 제 1장부터 18장까지 그의 신 인식론이 전개되는데 하나님 인식은 존재론에서가 아니고 계시의 현실성, 그리고 성서 안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칼빈에게서 계시의 현실성은 자연과 역사를 통한 자연계시와 성서를 통해서 그 분 스스로를 드러내신 역사계시로 나눌 수 있다.


칼빈은 "참되고 완전한 지혜는 하나님 지식과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칼빈은 여기서 대조법을 사용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4) 하나님을 알려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5) 그러나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의 명제는 그 뒤에 계속되는 인간 이성에 의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변의 기초로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6)


칼빈은 그의 신 인식론을 전개하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근거로서 먼저 자연계시의 입장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자연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한다. 이것은 다시 인간 내부에 있는 종교적 감성7), 하나님의 형상8) 등이 있으며 또한 인간 외부에 있는 자연과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등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충분히 인식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칼빈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피조 세계 속에서 인간들을 향하여 자기를 알리신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칼빈은 인간의 타락과 부패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은 상실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9)


칼빈은 신 인식론에서 인간은 자연과 역사 그리고 인간 본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양심, 종교적 감성에 의하여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은총이 베풀어 졌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이 불가능성의 영역으로 머무르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 칼빈이 자연계시를 언급하는 것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며"이라는 전제하에서 자연을 통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인식이 가능하였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10) 이처럼 칼빈은 피조물 세계를 통한 하나님 인식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가능성 속의 불가능성으로 머물고 말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인식의 참된 가능성은 성서를 통해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11) 이른바 자연계시(the revelation the creation)를 통해서는 우리가 더 이상 밝힐 수 없는 그것을 성서만이 우리에게 밝혀 알려준다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의 신학을 전개할 때 제 1권에서 하나님 인식론을 언급한 뒤 제 2권에서 기독론을 다루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신학이 지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따라서 성서에서 이끌어낸 어떤 교리 자체를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칼빈은 그의 독자들에게 참된 경건에 이르기를 원했으며 이 경건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었다.12) 참된 하나님 인식에로 이끄는 유일한 안내자인 성서 속에서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증거자들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 분 스스로를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성서의 모든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 자체를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궁극적으로 모든 말씀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가 칼빈 신학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내용의 내용인 것이다.



2. 자연계시를 통한 인식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인식의 명제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피조 세계 속에서 인간들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알리신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자연 속에서 특히 인간의 본성과 자연현상 및 인류 역사 속에서 자기를 나타내시며 사람이 눈을 뜨는 한 하나님을 동시에 인식하지 않고는 안되게끔 하셨다.13)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주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삼라만상은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와 지혜의 걸작품이다14) 또한 인간의 신성에 대해서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15)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인류 역사상 종교가 없었던 시대, 민족, 국가란 없었다고 하는 것이 그 결정적인 증거이다.16)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셨다고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찾는 정확한 길이요, 가장 적절한 순서요, 그 만드신 것을 통해서 그를 보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접근하시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참여하도록 하신다고 한다17)는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칼빈의 신학에서 자연신학의 여지가 없음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알림을 통해서 창조주에게로 눈을 돌리도록 강요당하고 있다고 한다.18)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연계시에 의해서는 우리의 세계관 형성을 위한 재료를 얻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중요성을 띤다. 칼빈은 자연적 신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치를 부여한다. , "그러한 하나님 인식은 우리를 참된 예배에로 불러일으키며 미래의 생에 대한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19) 이처럼 자연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현실적이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세계 속에 그의 영광의 자취를 남겨 놓으셨고 오늘날도 자연 현상과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이루어 놓으신 일과 행동에 근거해서 얻는 하나님 지식은 비현실적이다.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창조의 완전성에 남아있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종교적 감성과 우리의 인식 능력에 의존해서 자연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파악한다면, 진정한 하나님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에게 그러한 의지가 없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능력도 결여되었다. (고전1:21)위에 언급한 것을 살펴볼 때 결국 칼빈은 후애에 자연신학의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었는데, 이것은 곧 자연과 역사가 일종의 제2의 성서 혹은 제2의 啓示原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칼빈이 말하는 자연계시는 인간의 내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과 인간의 외부에서 시작되는 두 가능성이 있다. 전자로서는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하나님 형상, 종교적 심성, 양심 등이 있고, 후자로는 자연과 역사가 있다.


1) 하나님 형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 이 하나님 형상이란 무엇일까? 칼빈은 형상(imagine)은 모양(Similitudine)이란 말과 같은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에게 자기와 닮은 특징을 새기어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했다고 이해된다20)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이 처음 가졌던 그 완전함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형상이 영적인 것이며, 영원한 생명에 관계된 것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아담은 인간의 영혼의 완전한 기능들을 모두다 포함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 전의 인간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의 인식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2) 종교적 심성과 양심

칼빈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선천적이고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졌으며21) 그러기에 인간의 구성 요소의 일부이고22) 본능의 문제이고23)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스스로 배우게 된다고 한다.24)


칼빈이 말하는 종교적 심성은 영혼의 특수 기관이나 기능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지각 작용(percption)과 이성의 이해력(intelligehtia numinous)과 하나님의 뜻에 관한 감각이다.25) 종교적 심성은 인간의 내부에서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 관한 지식을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다.


칼빈은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고 믿고 있는데26) 즉 인간의 본능, 본성 그 자체가 안에서 하나님을 (dibintatis sensus 혹은 deitatis)감지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보편적 지식을 말살할 수 없다고는 것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마음은 어떤 양심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하여 알 수 있는 선천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타당한 개념을 나면서부터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27) 칼빈에 있어서 종교적 심성이라는 말은 종교의 씨(seed of religions)는 대체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두려움(a numinous awareness of god)을 언급하며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양심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양심은 선악을 구분하는 선천적 능력이며 창조자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신적인 것이다. 양심은 인간에게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거나 의지가 그것을 역행한다. 양심은 인간의 마음과 이성과 영혼에 자연적으로 쓰여지고28) 새겨지고 심어졌다. 양심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종의 매개물이다.29) 양심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핑계할 수 없도록 어둠 속에 파묻힌 인간의 모든 은밀한 것을 관찰하는 파수꾼이다.30)


칼빈은 양심을 영적인 것과 현세적인 것으로 구별하여 영적 양심에서 인간은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예배가 가능하고 현세적 양심은 전자에게 근거를 갖고 있으나 전자와는 동일시 될 수 없는 정치적인 것으로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와 시민의 책임에 대한 의무라고 한다.31) 그러나 양심은 하나님께 관계되어 있다.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선천적 능력이며 창조주의 의지의 표현이어서 신적인 것이다. 인간의 양심에 의하여 산다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다. 양심은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이요 동시에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 앞에 유죄의 선고를 받는 재판정이다.


3) 자연과 역사

하나님은 전 세계에 대한 그의 섭리 중에서 또한 자신을 계시하셔서 우리의 눈이 닿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셨다.32) 비록 인간이 타락하여 이 계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연 속에서 자기의 계시를 멈추지 않는다. 만물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인간에게 전하여 주는 한 권의 책이요 전시장이요33) 거울이다.34) 더욱이 자연은 인간에게 단순히 신에 관하여 말할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의 현현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자연 현상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보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하셨다. 할지라도 자연 속에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세계 속에서 그의 영광과 자취를 남겨 놓으셨을 뿐 아니라 오늘날도 자연현상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자기가 주가 되신다는 것을 증거하신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그 분 자신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단지 그이 사역(work)을 통하여서만 볼 수 있다.


칼빈이 이해한 자연계시에서의 창조주 하나님의 개념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다. 칼빈이 자연과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창조주로서, 섭리자로서, 보존자로서의 이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 이해이다. 그러기에 모든 사건들과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사역의 존재(being the works of God)이다. 그러한 것들은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그 자신의 계시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the soverignty of God)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칼빈에게 있어서 역사는 사건들과 행위들의 혼란이 아니라 인가이 원하든 원치않든간에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면 역사의 과정은 순조로웠을 것이나 인간이 이에 불복종함으로서 혼돈이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역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의 섭리 가운데서 인간의 역사를 지배하신다.35)



3. 성서적 계시를 통한 인식


칼빈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참된 하나님 인식은 성서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36) 칼빈은 성서의 성격을 인간에서 왜곡된 창조자 하나님 인식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하나님을 창조자로서 뿐만 아니라 구속자로서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다.37)


칼빈은 여기서 성서에의 복종을 말하는데, 복종한다는 것은 대상의 권위를 받드는 것이며 그 대상은 곧 성서의 말씀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말씀의 빛을 통하여 어둠 속에 거하는 자에게로 들어와 시력이 약한 자에게 하나님을 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일종의 안경38)과 같은 것이다.


1) 성령의 내적 증거

칼빈이 성서의 권위를 내세운 것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교회의 판단 아래 성서의 해석을 종속시키고 성서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와 전통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칼빈이 이해한 성서의 권위는 성서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성령의 내적 증거로 말미암아 그 권위를 갖는다고 한다. 또 성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제 만일 우리가 양심의 참된 관점을 의논컨대 저희가 심적 동요를 하지 않기 위하여 또 영속적의심의 주제를 의논컨대 저희가 적은 일에 주저하지 않기 위하여 이 확신을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이나 추측보다 높은 차원에서 구해야 할 것인데, 이것은 곧 성령의 내적 증거에서 얻는 것이다."고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령의 내적 증거란 원리는 결코 주관적인 원리가 아니라 성서 본문에 자증력과 그 명료성을 전제하고서 그 저자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던 성령이 그 문자에 기계적으로 구속받는 것이 아니고 현재에 다시 독자에게 인격적으로 임하여 가르친다는 것이다.39) 성서의 권위는 성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권위가 있으며 또한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확증된다. 그러기에 성서의 해석을 인간의 이성의 논증에 맡기는 것은 옳지 않으며 오직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그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에 관한 가장 적합한 증언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듯이 그 분의 말씀도 역시 그 말씀을 우리에게 계시하도록 역사한 그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하여 확인되기 전에는 우리에게 올바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 억지로 증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한다.40)


2) 하나님 인식의 안내와 교사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 지식에로 인도하는 유일한 안내자이다.41) 즉 성서는 우리가 창조주로서 그리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원천인 것이다. 물론 창조된 세계가 하나님을 충분하게 증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타락과 무지로 말미암아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으므로 인간을 오류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42)

성서는 하나님의 자연 계시를 인간의 양심이나 종교적 감성 그리고 자연과 역사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하여서는 결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명시해 주는 것이다.43)


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존재 양식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양식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양식으로 우리에게 부여해 준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성서를 통하여서 얻게 될 때 우주 역사의 주님으로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구원자요 심판자로서 인식하게 되는 바 성서의 궁극점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려는 참 종교의 기초이다.44)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도하실 때 거기에 참 종교가 있는 것이다. 즉 참 종교는 성서에의 복종에 있고, 이 복종은 신앙에 의존하고 있으며 , 이 신앙은 성령의 선물인 것이다.



2. 창조주 하나님 인식의 유익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이 창조주 하나님은 전능으로 우리를 지배하시며, 섭리로 우리를 다스리고, 그의 선하심으로 우리를 기르신다. 그리고 다양한 축복으로 우리를 채워주신다.45)


칼빈은 이 창조주 하나님을 먼저 안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화목의 은혜를 신앙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세계의 구조와 성서의 일반적인 교리에서 단순히 창조주로서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구속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먼저 창조주로서 계시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그 분은 희랍의 영원본질이나 궁극적인 원인과 같은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고46) 구체적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47) 섭리로 세계를 통치하시며48),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시므로 모든 일체의 다른 신과 구별되는 자존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 때, 잡다한 신 개념론들에서 해당되고 숙명론과 회의주의에서부터 해방 받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일체의 선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데서 이 선을 찾아서는 아니 됨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바 우주를 무한한 전능으로 유지하시며, 지혜로 다스리시고, 선으로 보존하시며, 특히 인류를 선의 심판으로 지배하시고, 자비로 용서하시며, 보호하심으로 지키시기 때문이다.49)


모세가 하나님의 신적 영광을 찬양한 출애굽기 34650)에서 칼빈은 그가 두 번 반복하는 하나님의 장엄한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을 선포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성의 고백은 하나님이 그 자신에 대해서 어떤 분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해서 어떤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지식에 대한 공허하고 환상적인 사색이 아니라 생생하고 실제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칼빈은 여기에서 하늘과 땅을 찬란하게 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의 속성인 인자하심과 선하심, 자비로우심과 영원한 자리, 공의와 심판 등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은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졌다고 한다.51)


칼빈은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은 자비, 심판, 공의, 이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비(misericordia)로 우리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52) 심판(judicum)이란 공평인데, 이 공평이 매일처럼 사악한 자들에게 시행되며, 따라서 저들에게 매우 엄격한 형식으로 심지어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까지 한다는 것이다.53) 그리고 의(justitia)로서는 신자들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신자에게 가장 인자한 사랑을 베푼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상의 3가지 속성 안에 하나님의 진리와 권세, 거룩하심과 선하심, 그 어느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3 장 인간 인식


칼빈은 인간의 이성을 중요한 탐구주제로 설정하고 본질과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의 인간론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의 인간론을 전개해 나간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올바른 사유와 이성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부패하고 타락된 존재일 뿐이다.



1. 창조에서의 인간의 위치


1) 창조된 인간

인간이 세계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성서의 창조에 관한 기사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칼빈도 역시 그것을 확인하면서, " 이 세계의 전 질서는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설계되고 제정되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 질서를 통해 인간을 위해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54)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 세계와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아래로는 세계, 위로는 하나님을 두고 존재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선하게 창조하셨다. , 모든 다른 창조의 목적은 곧 인간의 창조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문제는 인간의 위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다음같이 말한다. "세계가 창조된 이후 인간은 무대에 서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있다. 그는 위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들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창조주께 경건하게 예배드린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 수 있다. "칼빈은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을 인식하여 '경외'55)하는데 전 창조의 목적을 두었다."56)라는 니젤의 설명은 적절한 것이다. 이러한 창조의 목적은 칼빈이 말하는 인간이해에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분명히 창조물 중 최고의 작품이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우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을 통해 창조주의 본질과 존재를 증명하려거나 하는 의도는 칼빈에게 전혀 없다. 다만 이렇게 창조하신 장조의 목적을 통해 피조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인식하여야 함을 알리려는 의도밖에는 없다. 인간은 결코 자존할 수 없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다.


2) 타락한 인간

칼빈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곧잘 인간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 하였다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칼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못 된다. 인간을 단순히 타락이란 관점에서만 파악하려는 것은 인간을 죄악시하는 것이며, 창조를 너무 낮추어 평가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타락은 인간 본성 전체에 관한 문제이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한다. "인간의 모든 것은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이 한 부분도 죄가 없는 곳은 없고, 따라서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57)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전체 마음, 정신 ,그리고 우리 모든 행동들이 죄로 기울도록 그렇게 심하게 죄의 힘 아래 지배받는다. 왜냐하면 아담의 영적 생활이 그 창조주와 연합함으로 성립된 것같이, 그로부터의 이탈은 그의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면 전적 타락을 강변하면서도, 칼빈은 인간 본성은 원래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 또한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인간의 육체나 영혼은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것으로 전전 타락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나 영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칼빈 특유의 대조법을 통한 해결 방법을 볼 수 있는 바, 즉 우리의 본질이 악한 것이 아니고, 그 본질이 악마의 조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전적 타락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의 어느 부분은 남아 있다고 말한다.58) 칼빈에 의하면 "인간 본성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의 죄로 소멸되었다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실로 그것이 극히 추악하게 변형되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그 특징 중 어느 것은 아직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와 성결과 선을 취할 수 있는 자유는 잃어버렸다. 하지만 인간이 동물보다는 우월하다고 증거하는 우월한 은사는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적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 형상의 전적인 상실과 잔존의 이율 배반적인 진술은 동일선상에서 서술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적 은사와 초자연적 은사를 구별하여 사용한다.59) 즉 자연적 은사는 부패하였으나 아직도 인간에게 남아 있어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 마련해 놓았던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힘으로 우리가 선악을 가려내며 이해와 판단을 하는 이성을 자연적 은사이기 때문에 아주 완전히 말소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부패하였으므로 기형적인 잔해만 보일 뿐이다." 그래서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고 했다.60) 이 잔해는 '지식의 불꽃', '빛의 일부분,' '종교의 씨' 이라고 말하면서 자연적 은사의 나머지 것들이라는 소극적인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상 칼빈이 말하는 전적 타락의 요지이다. 우리는 이러한 칼빈의 생각에 접하면서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인간의 전적 타락은 동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동적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61) 예컨대 식물이 자체의 균에 의해서 뿌리부터 썩어 들어가 끝내는 시들어 죽게 된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려고 마음 먹을 때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할 때, 전적타락을 정적인 개념으로 파악하여 생기는 논쟁, 즉 인간의 타락 정도가 어느 정도이며, 남아 있는 능력으로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따위의 논쟁에서 피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부패는 '생래적 오염'62)(natural vitiation) 때문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곧 이어 "이 오염이 본질로부터 유래한 것은 아니다"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타락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질의 변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비집고 인간을 향해 돌입하는 동적인 세력, 곧 악마로 인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죄가 악마의 세력에 의한 것이라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는 없다라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강조점을 기억하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둘째, 타락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타락이 단순히 악마의 유혹에 의한 것이라면 그 세력은 엄연히 존재하는 큰 것이지만 반면에 인간의 책임성은 약해진다. 그러나 타락이 인간의 주체적인 의지적 행동에 의한 것이라면 이미 책임회피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3) 자유의지

인간의 의지는 자유한가 하는 문제는 수많은 논쟁을 야기하였다.63) 그런데 칼빈은 의지의 노예성을 주장한다. 즉 인간이 그리스도에게 지배받기 전에는 전적으로 사탄의 의지의 지배를 필연적으로 받게 된다. 여기에 관한 설명을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어 서술하는데, 인간의 의지를 말에 비교하여 기수가 하나님일 경우 바른 길을 하게 되고 악마일 경우 결국 절벽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64) 이와 같이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인간은 선행을 위한 자유 의지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확언한다.65) 따라서 인간이 죄를 범할 때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처럼 강제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나 경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선악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 의지는 죄짓는 일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66) 이것이 곧 의지의 노예성이다.


여기서 필연성(necessitas)과 강제성(coactio)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펠라기우스의 "만약 죄를 필연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이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67) 라는 말에 대해, 칼빈은 인간이 죄를 진 것은 의지를 반대해서 된 것도, 강제로 한 것도 아니라고 전제하고, 인간은 마음의 가장 커다란 열정을 갖고서 죄를 범했으며, 또 인간의 본질은 너무나 부패한 나머지 악을 향하여서만 움직인다고 반박하면서, 인간의 의지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고 강조한다.68) ,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게 선택할 여지가 전혀 없다69)


이러한 칼빈의 자유 의지에 관한 논리의 배후에는 자기 만족으로 인한 나태와 오만 불손한 자부심을 가지고 파멸하기 쉬운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있다.70) 그가 의도한 것은 "인간이 자기 힘 가운데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는, 인간이 외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결심한 것은 무엇이나 수행할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모든 경우에 그의 판단이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며 그의 의지가 자유를 실행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말한다.71) 이러한 칼빈의 주장은 단순히 인간의 윤리적 능력이나 불완전성을 인정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지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될 때 "죄를 지을 수 없는 의지"(non posse peccare)72)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2. 하나님 앞에 선 인간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참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된 인간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놀라운 선물로서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특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았다는 말은 아담이 올바른 이해력을 가지고 감정을 이성에 순응시키고 일체의 감각을 바른 질서에 적용시키며, 또한 자신의 우월성을 창조주가 주신 탁월한 은사로 돌리는 것이다."73)


칼빈은 '반사 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고 있다. , 모든 창조물은 거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무언중에 반사하나 인간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다는 것이다.74)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비칠 수 있는 하나에 거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거울인 인간이 악마를 향하여 섰을 때는 악마의 형상을 비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서 말할 때 관계성을 말해야 한다. 니젤은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에 대하여 가지는 정당한 태도라고 설명하는 바, 그것은 적절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정당한 태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는 아버지께 자녀로서 응답함으로서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은 비단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에 대해나 태도로까지 확대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에서 참으로 합당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75)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지적 능력을 가진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와 그 책임을 본다. 위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며, 아래로는 다른 피조물에 대한 정당한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거의 상실되어 버렸다. 인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부패정도가 너무 심하여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워졌고, 설사 남아 있다하더라도 추악한 기형으로 남아 있게 된다.76)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자유롭게 봉사하고 또 선을 자유롭게 선택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말았다. 77)


타락과 관련하여 우리가 완전해지기 전에는 하나님 형상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즉 천지 창조의 기록에 기록된 인간에 관한 기록은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그 근거를 찾게 된다.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침내 우리는 새롭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78)



4 장 섭리론


1. 정의


섭리란 단어는 섭리(攝理)란 중국어이며, 영어 providence를 가르킨다. providence는 라틴어 providentia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그 뜻은 "선지, foreknowledge"이다. 단어 자체의 뜻만으로 보면, 엄격히 말해, "하나님의 이 세상에의 능동적인 개입보다는 그분의 선지식(prior knowledge)과 예비(provision)를 가리킨다".79) 이 말이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될 때, 또 다른 의미가 첨가되는데, 즉 예견되고 예비된 것을 추진한다는 뜻이다.80) 그래서 통상적인 용법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선지를 모두 가리킨다. 섭리가 선지(fore-knowledge)인가 지도(over-see)인가, 어느 것의 비중이 더 큰 지는 여러 가지 입장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두 개념이 혼합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때로 혼동을 자아낸다. 영어 단어 providence의 용법도, 두 가지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81)


섭리란 용어가 신학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과정을 살핌으로써 그 이해를 돕기로 하자. 먼저 성경상의 용어를 살피자. 섭리란 단어는 히브리어에는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그리고 헬라어에는 προνοια, προνοεω가 대응어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용법에 의하면, 이 두 단어는 신학적인 섭리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는다.82) 성경상으로는 "돌보다, 어떤 것을 준비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리고 신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인간과 물질에 관련된 내용이다.


섭리라는 교리가 기독교에 도입된 주된 근거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내용이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은 창조하신 창조주일 뿐 아니라, 그 창조된 세계를 유지하시는 분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구약에 섭리라는 단어가 없다고 하나, 하나님의 통치 사상이 강력하게 나타나고, 사실 구약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출애굽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생각 속에서 그 목적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인간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인 영적 삶이 강조됨에 따라, 섭리의 영적 측면이 강조되고, 관심이 협소해지는 느낌이 있으나, 그런 영적 삶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이해되었다.83)


여하튼, 성경은 신의 통치를 강하게 증거하고 있고, 그것은 섭리라는 교리를 통해 기독교 신학에 자리를 잡는다. 섭리의 교리가 본격적으로 신학화된 것은 변증가들에 의해서이다. 당시 세계의 질서에 대한 개념은 비단 기독교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주장은 상이하지만, 섭리에 대한 생각이 타종교나 사상에도 있었고, 특히 당시 대중화된 스토아주의에서 섭리사상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에픽테투스(Epictetus)의 견해에 의해 특히 대변된 스토아주의의 섭리론에 의하면, "만물은 각기 맡은 기능이 있고, 따라서 영광스런 우주에 기여한다"는 것이 강조되었으며, 이 사상은 기독교 내에서도 섭리의 교리가 발전될 것을 촉구했다.84)


당시 이 사상은 스토아에 의해 크게 발전했을 뿐 아니라, 보편화하여서,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교리지침서에 사용될 정도였다. 그의 [()교리지침서](Oratio Catechetica)는 오리겐의 [제일원리](de Principiis) 이후 철학적 근거에서 조직신학적인 신학을 구축하려고 했던 최초의 노력이었다. 그의 [()교리지침서]에서,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했다.


"즉 존재하는 만물의 창조주시며, 존재하지 않던 바를 발견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이 존재하게 된 만물을 지탱하시며, 앞으로 있게 될 모든 것을 선지(foresees)하신다."85)


또한 어거스틴 같은 대 교부는 자신의 인생 여정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특수섭리(special providence)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인간사에 개입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이에 비해, 스토아학파의 견해에 따르면, 섭리는 "물질 및 인간 세계의 질서의 불변하는 선성(goodness)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인간은 항상 그 선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가능성을 선용하여, 우리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역경을 극복하는 것이다."86) 변증가들은 당시 스토아주의의 섭리론을 수용하여, 무신론이라는 오해를 변호하면서, 기독교에도 세계 질서를 수호하는 신이 있음을 입증했으나, 그런 반면에 스토아주의의 비역사적인 신괌과 다분히 우주론적인 색채를 아울러 지니게 되는 부담을 떠 안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지나치게 우주론(cosmology)과 신론을 결부시키는 바람에, 영적이고 개인적으로 역사하며 인간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이뤄나가는 기본적인 성서적 신관을 훼손시켰다."


섭리론에 내재된 이런 갈등은, 그후 섭리가 한편으로 구원과 연관되어 구속론의 색채를 강하게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신학적으로 이해되는 양상을 나타내, 양자의 관계가 늘 신학적으로 문제시되었다. 섭리는 선지(fore-see)인가, 지도(over-see)인가? 앞에서도 살핀 것같이 단어의 본래적 의미로는 선지를 뜻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지도의 의미가 중요하다. 전자가 강조될 때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접근을 하게 되고, 후자가 강조될 때 성서적 접근을 하게 된다. 철학적 접근에서는 신의 전지, 전능 문제 등이 중시되고, 인간의 자유문제가 거론되고,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라는 2중원인의 문제가 대두된다. 성서적 접근에서는 신의 통치,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구속, 신적인 돌봄 등이 중시된다. 여기에 초역사적, 역사적인 접근과, 자연신학적 신관, 성서적 신관의 갈등이 관련된다.87) 교의학적 용어를 빌면, 전자는 존재론적 접근이고, 후자는 창조론적 접근이다.


그러나 섭리는 성경적인 섭리론을 내세운다고 해서,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영역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섭리가 철학적, 신학적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섭리의 중요성이 신자의 구체적인 신앙생활에 관련된 만큼, 섭리의 논의에서 실천적, 경험적 측면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섭리는 수행 양상에 따라, 보존, 협력, 통치 등으로 구분된다. 원래 협력(concursus)은 인간의 활동의 여지를 설명하기 위해, 정통주의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분에 교훈적 지침을 제공하는데 사용 될 수도 있다.


섭리론은 여타의 신학적 주제와는 관계에 있어, 가령 신론, 구원론, 예정론 등과의 관계에 있어, 각 신학자의 강조점과 신학체계에 따라 그 위치가 결정되며, 그로 말미암아 섭리 자체에 대한 이해도 좌우된다.


하나님 못지 않게 악도 인간에게 중요하다. 구약에서도 악의 문제만큼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신학적 질문이 제기되었다. 섭리를 믿을수록 악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특히 집단적인 악을 경험한 현대, 또 어느때보다도 악과 고통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진 현대인에게 섭리와 악의 관계는 중요하다.


섭리와 관련된 성도의 신앙생활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기도이다. 이 섭리와 기도의 관계도, 섭리에 대한 접근방법에 따라 상이하게 이해된다. 하나님을 역사를 주관하시고 각 사람을 돌보시는 분으로 이해하는 역사적, 성서적 접근에 의하면, 기도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도는 바로 그 하나님의 돌보심(care)을 간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인 섭리 이해에 따라 섭리를 주로 선지로 보는 입장에서는 기도가 불가능하다. 철학과 신학을 접맥코자 애썼던 교부 오리겐은 기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내다보신바는 반드시 이뤄지기 때문에 기도가 소용없고, 또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바는 반드시 이뤄지기 때문에 역시 기도가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기도의 가능성에 대해서 결코 의심하거나 의문시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시할 뿐 아니라 성도의 본분으로 명령한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기도와 섭리와의 관계와도 같다.88) 섭리와 기도의 긴장을 증거하는 성서적 접근과, 기도의 이해에 있어서 일종의 신학적 숙명론에 빠지는 철학적 접근의 관계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2. 창조와 돌봄


칼빈은 창조와 섭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신앙인이 "하나님의 능력이 창조시 뿐 아니라 세계의 계속적인 상태에도 빛나고 있음을 알기에 " 불신자와 구분된다고 한다.89) 또한 섭리를 인식하지 않는 한,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90)


칼빈은 육적인 지각(carnal sense)으로 겨우 창조에서 하나님의 능력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나, 신자는 신앙으로 창조를 넘어서 피조물 하나 하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감지한다고 말한다.


육적 지각은 일단 창조계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직면하면 거기서 멈추고, 기껏해야 그런 작업을 하신 조물주의 지혜와 선함을 측량하고 명살 할뿐이다. …게다가, 그런 운동력이 기인하는 어떤 일반적인 보존하고 통치하는 능력활동을 명상한다. (중략)


그러나 신앙은 보다 심오하게 꿰뚫어봐야만 한다. , 그분을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을 발견한 뒤, 나아가 그분이 또한 통치자요 보존자라는 결론을 지어야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한 천체와 보편적인 움직임에 의한 그 몇몇 부분들을 운행하실 뿐 아니라, 그가 만드신 모든 것, 심지어 참새까지도 지탱하시고, 먹이시고, 돌보시는 것임을.91)


칼빈은 또한 철학적 사고로도 세계의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운행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으나, 성서에서만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섭리하는 역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여, 철학적 사고보다 성서의 계시에 의존한다. ,


참으로 그들(철학자들)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고 움직이고 산다는 바울의 진술(17:28)에 순복하지만, 아직 그가 추천하는 은혜의 진지한 느낌에서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돌봄을 전혀 맛보지 못했는데, 그분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은 오직 이 둘봄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92)

그래서 섭리론은 운명이나 우연을 거부한다.93) 하나님께서 세계를 다스리는 것도, 단순히 자연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고, 매사는 구분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겨울 다음에 봄이 오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봄 다음에 여름, 여름 다음에 가을, 이런식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그러나 이러한 연속 가운데서도 인간은 매우 크고도 상이한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어, 매해, 매달, 매이리 하나님의 새롭고 특별한 섭리(a new, a special providence of God)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 즉각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94)


, 그는 일단 창조되고 나면, 자연이 스스로 운행된다는 이신론적 자연관을 거부하는 것이다. 만물은 그분 아래 있다. "하나님은 순간적인 창조주가 아니라 영원한 통치자이시다". 하나님은 한가로이 세상을 관찰하는 분이 아니시라, 지켜보시며 능동적으로 활동에 개입하시는 분이시다.95) 이런 의미에서 그는 전능한데, 그는 전능한 일반적인 원리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활동을 지향하는 전능이다.96) 따라서 섭리는 "하나님의 눈 뿐 아니라 손에도 해당된다".97) 섭리는 행위 안에(in actu)있게 된다. 따라서 그의 섭리는 통치적 성격이 강하다.


칼빈은 통치를 중시하면서, 특히 개인에 대한 돌봄을 중시한다. 이를 위해 성경상의 증거로 뒷받침한다. 그래서 특수섭리(special providence)보다 특별한 돌봄(special care)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리고 섭리가 특히 인간에 관련되었음을 밝힌다. "세계가 특별히 인간을 위해서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통치에서도 이런 목적을 살펴보아야만 한다.98)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심판과 축복을 행하시며, 만사가 그의 뜻 안에서 이뤄진다. "인류의 역사는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서 운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적합하도록 통치하신다.99)


그러나 칼빈이 하나님께서 매사를 특별히 돌보신다고 해서 보편섭리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보편 섭리가 그의 특별한 관심을 벗어나지 못함을 강조하는 것이다.100) 그는 그의 하나님 '하나님의 감춰진 섭리'에서도 이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섭리의 지식은 우리가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돌봄의 날개 아래 모든 피조물을 각각 덮고 계시다는 믿음을 견지하고 그것을 묵상하지 않는 한 모호하고 혼동된 것이다.101)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이 그의 명령이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만물의 가장 높고 첫 번째 가는 원인"이라고 말할 때도, 그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제일 원인과는 상당한 차를 나타내는 것이다.



3. 섭리의 악()의 문제


악은 독자적인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지니는 의미를 탐구한다. "하나님은, 인간 혹은 사탄이 어떠한 음모를 꾸며도 열쇠를 쥐시고는 그들의 노력을 당신의 심판을 수행하게끔 만드신다."102)


악에 대한,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기독교 강요'의 국가론에도 반영된다. 하나님은 섭리에 있어서 신자를 각별히 돌본다고 해서 보편섭리를 도외시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밝혔다. 하나님은 세계사를 이끌어 가시면서 때로는 심판의 도구로서 악도 사용하신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생각을 상기하지. 그런 악을 고치는 것은 우리가 아니며, 오직 남아있는 길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니, 그의 장중 안에 왕의마음과 왕국의 흥망이 있다. (중략) 여기에 그의 선함과, 그의 능력과, 그의 섭리가 계시된다. 왜냐하면 그는 때때로 그의 종들 중에서 공개적인 복수자를 일으키시며 그들에게 악한 정부를 벌하고 자기 백성을 구하도록 명령하시며 힘을 주신다. 때로는 다른 목적, 다른 열심을 가진 사람의 분노를 이 목적을 위해 쓰신다. 따라서 모세를 통해 바로의 학정에서 부당하게 어려움을 겪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셨다. … 따라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의 불경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불경스런 고집을 때로는 앗시리아 족속, 때로는 바벨론 족속을 통해 치시고 때렸다.103)


하나님은 선을 통해 악을 징벌하시기도 하고, 악을 통해 악을 징벌하시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을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 악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후자의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인도되고, 그의 사역을 잘 깨닫지도 못한 채 수행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마음속으로는 오직 못된 행동만 꾀했을 뿐이었다.104)


그리고 하나님께서 설사 악을 통해 역사하셔도, 하나님의 뜻은 하나이기에 걱정될 것이 없고, 또한 그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께서 책망을 받을 것이 없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듯이, 악인이 스스로 욕망을 막아가면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05)



4. 섭리의 실제적인 적용


칼빈이 섭리론을 적응시키는 것을 살펴보자. 세가지 점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관련된다. 둘째, 하나님은 매개를 이용해서도 역사하시고, 없이도 역사하신다. 셋째, 전 인류를 보살피시되 특히 교회를 돌보신다.106)


칼빈은 그의 '하나님의 감춰진 섭리'에서, 인간의 과거와 미래가 섭리와 관련하여 지니는 의의를 상술한다. 인간은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게 된다. 미래를 직면해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역사를 섭리적 차원으로 이끄실 것을 기대하게 된다. 여기서 신자의 적극적인 삶의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미래에 관련해서는 매사가 아직 감춰지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경우의 사안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명령받지 않은 것처럼 자기의 임무에 충실해야만 한다. 혹은 (좀더 적절히 말한다면), 그는 모든 우연이 하나님의 분명하고 확실한 섭리와 조화될 것에 거리낌없이 준비되어야만 하는 것만큼,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준행하는 모든 일에 성공할 것을 기대해야만 한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의 손의 활동에 축복을 약속하신다. 모든 성도는 이 약속에 의해서,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자인, 한 마디로 말해서, 올바로 이해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손을 묶지 않고 오히려 일하도록 풀어주듯이, 그것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고, 그 열성을 강화하고 견고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섭리 사상은 성도를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혼자서 행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섭리의 뒷받침을 인지하고 더욱 담대하게 행할 수 있게 만든다.

칼빈의 섭리론의 적용에서는 5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교회적이다. 둘째, 신자의 책임을 강조한다. 신자는 섭리를 믿을 때 무책임하고 맹목적이기보다 신중함이 요청된다.107)


특히 신자의 책임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문화생활을 영위하며, 공동체로서 사회와 국가를 운용한다."108) 그런데 "하나님은 불가사의하고 파악 불가능한 그런 방법으로 … 인간의 자유의지가 저촉되지 않도록 하시면서 그들의 모든 충동을 지배하신다."109) 하나님은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는 변증법이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책임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위험하다는 소외를 들은 길을 들어서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도적을 피해야 한다. (병이 들어서) 살려면 의사를 부르고 약을 먹어야 한다. 건강을 잃지 않으려면 음식을 삼가야 하고, 쓰러져가는 집에는 살아서는 안 된다.110)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의 주어진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셋째, 인간의 죄는 용서될 수 없다. "그가 계명을 어기는 것은 순종이 아닌 고집과 범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111) 넷째, 목회적이다. 그는 섭리가 신자에게 위로를 주는 것을 강조한다.112) 신자는 섭리를 묵상토록 권고를 받으며, 섭리사상 때문에 기쁠때나 슬플때나 위로중에 신앙을 지킬 수 있고, 담대하게 삶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순경이나 역경 중에 도울 것을 믿기에 기도하게 되고, 그로써 희망이 생기고, 위험 중에도 용기와 확신을 갖게 된다. 다섯째, 하나님의 "후회"라는 개념을 적응(accomodation) 원리로 설명한다.113)



5 장 예정론과 섭리론의 관계


칼빈은 섭리론에서 예지적인 것보다는 신의 주권을 강조하고, 예정론에서도 예지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연결짓는다. 그 뜻은 인간의 공적과 무관하고, 또 인간의 공적의 예지와 상관없이 이뤄지고 실행된다. 그래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빌어,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될 만한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선택될 만한 자를 만드신다"114)고한다. 그리고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칼빈의 섭리론은 성부가 신자에게 대해 보이는 관심이 중요했다면, 예정론은 그리스도의 역할이 강조된다. 칼빈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신자로 하여금 예정을 깨닫게 되는 결정적인 초점이요 접촉점이다.


칼빈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하나님의 주권인데, 이것이 섭리와 예정 모두에 결부된다. 특히 섭리에서는 세계의 모든 사건이 자연법칙에 의한 것이나, 우연의 차원이 아니라, 섭리와 연관됨을 제시했다. 그리고 신자는 이 세상이 신의 행동의 장임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며, 그의 행동을 축복받게 되고, 그의 도덕적인 행위는 동시에 예정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칼빈의 섭리론과 예정론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신자의 적극적인 측면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섭리사상은 숙명론이나 우연을 거부하고 오히려 인간에게 적극적인 삶을 조장해 주는 것이다.



1. 예정론의 성질


칼빈은 성서의 말씀에 복종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예정론을 전개시켰다. 칼빈은 이 교리를 사변적으로 생각해서 안되며115) 다만 성서의 증언에 충실해야 한다고 경고한다.116) 이러한 입장엣 칼빈의 해명을 들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첫째, 예정론은 복음적 은혜론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예정론만이 구원의 확실성에 산 효과적인 형식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은 참으로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의 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칼빈은 구원의 확신이 다만 선택의 확실성으로만 현실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만 날마다 자기 부정 속에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 크리스챤의 일상생활에 무한한 위로와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희망의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예정론을 성령론 속에서 다루고 있다. 성령의 일, 신앙, 의인, 성화, 크리스챤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다음에 예정론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정론은 신앙과 삶, 희망 그리고 크리스챤인 내가 다 성령의 행동과 확증 속에 있다는 기쁜 신앙고백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행위에서 인간의 구원의 유일한 희망, 신앙의 확실성의 유일한 근거, 그리고 크리스챤의 십자가지는 자기 부정의 윤리적인 삶의 창조적인 힘의 원천을 찾으려고 했던 그의 신앙고백이다.


1) 은혜로운 선택

칼빈에 의하면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이다. 하나님 고유의 사역인 선택은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된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실현될 인간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를 선택하신 최종적인 목적은 선택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그들을 영광에 이르게 한 다음 자비를 보고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다.


선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기는 하지만 주로 성부와 성자의 사역으로 이해하였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니라"(6:3739).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호 안에 두시고 안전한 성()에 우리를 보호하신다"117)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부와 마찬가지로 성자 역시 선택을 주도하는 주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스스로 중재자로 나타내셨지만 그도 역시 구원받을 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118)고 주장하였다. 이는 바로 요한복음 13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은 누구인지 앎이라"고 한데서 볼 수 있듯이 '나의 택한 자'라는 표현을 써서 성자 자신이 스스로 선택의 주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칼빈이 선택자들을 성자 안에서 선택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선택의 주체라고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택은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이다. 칼빈은 "우리는 신의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원한 섭리에 의하여 각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신다"119)고 하였고,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단번에 나서 영원하시고 만고불변하신 계획에 의해 창세 전부터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선택하였다"120)고 주장함으로써 유기(遺棄)와 선택 모두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마찬가지로 칼빈은 선택의 유일한 근거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라고 하였다. 창세기 23장을 언급하면서 "야곱과 에서는 똑같은 부모에게서 출생한 형제이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두 사람의 차이점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받아 들이셨으나 에서는 거절하였다"121)고 말한다. 에서와 야곱의 외형상의 차이는 없지만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유기된 에서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된 야곱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바울은 에베소서 1 5절에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라고 선포한다. 칼빈도 이것을 접어두고 다른데서 그 이유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의도 외에 다른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은 악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이유와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122)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서'(?ν α?τω) '그의 사랑 안에서'(α?τω ?ν ??απη)만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화(聖化)된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과 설교 그리고 복음 전파가 선택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칼빈은 선택과 신앙과의 관계를 이해할 때 우리가 피해야 할 잘못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同役者)로 여겨서 인간의 동의에 의해서만 선택이 유효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된다면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계획보다 앞장세우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123) 성경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그러한 능력마저도 갖고 있지 않다"124)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경은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하신다(2:89).


선택과 신앙의 관계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두 번째 오해는 선택이 신앙에 의존되어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125)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앙을 가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선택받은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며 소용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분명히 반대한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의 선택은 증명될 수 있는데,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곧 선택의 증거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믿음이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한다면, 믿음은 이러한 선택교리와 충분히 조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126)


이처럼 칼빈의 예정교리는, 선택된 자의 입장에서는 은혜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예정교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에 그러한 것이지 인간에게서 어떠한 것도 전제하지 않음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구원은 곧 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기계적인 숙명론도 아니요, 개인 운명을 알아내는 암호 낭독도 아니요, 다만 선택과 저주가 빛과 어둠을 갈라놓는 선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내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지시하고 강조하는 지침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예정된 인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순전히 은혜로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그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이 은혜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바울의 말을 여기에서 인용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127)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때 그가 장차 어찌될 것인가를 생각하셨다고 하면 선택은 은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128)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선택을 은혜라고 볼 때, 예정은 무조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와 허물로 둘러싸인 자들이기에, 스스로는 구원의 경지에 들어갈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구원을 베푸시어 자기의 독생자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게 하셨고, 성령을 보내셔서 이 구원을 인간들 사이에 실현하셨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하나님이 그의 자녀로 삼아준 사람들은 그가 저희를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하신 것이다. 이는 저희를 사랑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의거하지 않고는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택함을 받았다면 우리의 영원의 확증은 우리에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또 성자와 분리하여 추상적으로 생각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정을 생각할 때 반드시 의거하여야 할 거울은 그리스도다."129)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택의 근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성립된 두 가지 언약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언약과 둘째 언약은 서로 다른 것이다. 전자는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으로서, 아담에게 실시되었으나 아담이 이 언약의 이상을 달성하지 못하고 타락하였다. 후자는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언약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죄과를 인류가 담당한 것처럼, 우리의 죄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해 주시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된다. 칼빈은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한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는 것이니 저가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보셨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돌아온 까닭이다. 이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은 단순히 신앙으로만 되는 것이다."130)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은혜라고 하는 말은 그 고유한 의미에 있어서, 무가치한 자 즉 죄인에게 베풀어주는 하나님의 자유롭고 과분한 사랑의 호의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 받을 자의 골로가 있고 없음을 관계치 않고 베풀어주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을 말할 때에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를 조금이라도 가미시킨다면, 은혜는 은혜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변질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확실하며, 인간의 권위에 의하여 흐려지기에는 너무나도 명백하다."131)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원하시는 자에게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자유로우시다.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른 민족보다도 우수하다고 하는 까닭에 대하여 이것이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원인을 발견할 수 없는 특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고 구태여 묻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은 왜 자기들이 소와 말이 아니며 오히려 사람인가를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개로 만드실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들은 짐승들이 그들의 지위에 대하여 그것이 정당치 못한 차별이라고 하여 하나님께 반항하는 일을 인정할 것인가? 분명히 그들이 아무런 공로도 없이 인간의 특권을 얻은 사실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판단 척도에 따라서 자신의 은혜를 다양하게 분배하신 것뿐인 것이다."132)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 자신 안에 있다고 공상하는 선택의 모든 근거를 뒤엎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하여 베풀어주시는 모든 은혜는 이 유일한 원천 즉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자를 택하시고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벌써 그들에게 주시기로 원하신 은혜를 개인적으로 마련해 두신 보고에서 흘러나오게 하신다."

고 했다.133)


만약 하나님의 예정이 이렇게 되어 있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라는 단서가 붙었다면, 우리는 이것을 은총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예정이라는 말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노력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곧 은혜인 것이다.


2) 공의로서의 유기(遺棄)

절대적 예정의 교리는 어떤 사람이 영생하기로 예정된 것이 사실인 것처럼 다른 어떤 사람은 멸망하기로 예정된 것이 사실이라는 것도 포함한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유기라고 한다.


선택이란 말은 상대적으로 내어버림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말하면 선택된 자라고 할 때에는 선택되지 못한 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주권적 영원한 선택을 알기 전에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에서 온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134)고 함으로써, 영원한 선택을 안다면 영원한 유기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됨을 언급했다.


아울러 칼빈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한 것이 그의 의지나 행위와는 무관하듯이(25:13, 1:2, 9:11)에서 선택되지 못하고 유기된 것도 같은 이치라는 것을 바울의 글을 인용하여 "야곱과 에서의 사건에서 두 사람이 아직 선악을 나타내기 전에 벌써 한사람은 선택을 받고 또 다른 사람은 버림을 당했다".135)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근거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시에 유기의 근거로써 칼빈은 바울의 로마서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하케 하시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을 베푸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기뻐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버리시는 것도 동일하게 그의 뜻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논술하였다.136) 예를 들면, 정원사가 화단에서 화초를 돌볼 때 어떤 것을 잘 가꾸어 주지만 다른 것은 뽑아버리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로마서 9 20-21절을 인용하였는데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겠느냐?" 하면서 선택과 유기에 관한 결정의 이유는 하나님 자신 안에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였다.137)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신의 주권적 의지의 표현이며 인류의 역사의 목적으로써 이해했다. 역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 앞에 드러내 준다, 그분의 섭리와 마찬가지로 그분이 선지(先知)로도 역시 그분의 영원한 계획에 기초하고 있다. 선택 섭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이며, 유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된 자와 선택받은 자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며 오직 우리가 확신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귐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과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138)


인간을 선택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며(1:7), 그분의 영광을 드높게 하려는 것이다. 칼빈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다"(16:4)고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서 그의 이름을 선전하시고자 바로를 높이 드셨다"(9:16)고 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가 포함되어 있는데, 인간은 그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지만 사람의 제한된 지혜로는 그 이유를 다른 사람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타락시키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를 타락시키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다.139)


칼빈은 이어서 악인이 멸망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곧 인간의 복과 화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인간의 생사가 그분에게 달려 있음을 나타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유기교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합적인 요소에 관해서는 "유기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전하여 졌는데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믿지 않은 이유는 그들 마음의 악함과 완고함에 기인된다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그들을 저주하시므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하시는, 의롭기는 하지만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이미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으신 그의 예정에도 기인된다고 말할 수 있다.140)고 하였다.


칼빈은 선택과 유기를 다같이 언급하였지만 유기와 선택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선택과 유기의 궁극적인 이유라고 할 때, 양자가 모두 동일한 의미이거나 단순히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택과 유기에 대한 비동일성(非同一性)은 칼빈이 사용한 용어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선택과 유기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으로 묘사된 반면에, 선택은 '은혜로우신'이라는 말로 묘사되고 유기는 '의로우신'이라는 수식어로 함께 자주 나타나고 있다.



선택과 유기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유기에 있어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만 선택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그리스도는 선택의 근거는 되지만 유기에 있어서는 연관시키지 않고 있다. 인간의 원죄와 범죄도 역시 유기의 이유는 되지만, 인간의 의지나 행위는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선택과 유기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또다른 측면은 유기보다 선택교리에 더욱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는 반대로 선택과 유기의 동일한 면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 양자의 궁극적인 이유가 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의지나 행위가 동일하게 그 기초가 아님은 마찬가지이며, 각기 다른 방법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서 계획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각기 상이한 측면과 동일한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과 유기는 정반대 방향을 향하여 나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칼빈은 양자가 모두 '하나님의 뜻'에 기인하고 있으나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를 더욱 강조하는 것으로 보았다.


3)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와 인간의 무자유

이제는 칼빈의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잠깐 고찰해 보겠다. 칼빈이 하나님의 은혜 수여의 결정적인 방도를 예정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칼빈이 이미 예정을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방도로 여겼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이 없이는 은혜가 은혜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바울의 말(11:5,6)을 통하여 천명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가 자기 안에 작정해 둔 자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은혜는 은혜되지 못한다."141)


그렇다면 은혜가 은혜되는데 있어서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유이다. 자유가 없을 때, 은혜는 은혜가 되지 못한다. 자유가 없이 주어지는 은혜는 일종의 보상 혹은 거래나 강요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은혜를 준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조건에 대하여 보상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가 없기를 바란다. 즉 은혜를 거래 혹은 보상으로 받으려고 한다. 이런 인간적인 바램으로부터 발아한 것이 바로 '공로에 의한 구원' 사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칼빈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 자체가 이미 인간의 무자유와 피동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은혜의 수여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자유하다는 것이다. 아무런 자의에 따라서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아니 아무도 스스로는 은혜받을 수 있는 정황에 놓여 있지 않다. , 그 어떤 공로일지라도 은혜수여 곧 구원에는 하등의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무자유를 폭로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확언해 주는 것이 바로 예정이다. 예정없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와 동시에 인간의 무자유가 확립될 수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되지 못한다. 예정 신앙 없이는 공로에 의한 구원사상의 싹이 자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의 자아 주장을 없게 하는 효과적인 독약"142)이 바로 예정 교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은총론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며 어떠한 장소에 등장하다 해도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143)이기도 하다.


칼빈은 자신의 예정론에서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하니님을 선택하고 구별하는 하나님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민족을 그리고 개인들을,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하나님이다.144) 하나님은 선택할 뿐만 아니라 유기하는 분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스마엘, 에서 그리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기시킨 하나님이다.145) 칼빈은 이와같이 선택과 유기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 어떤 법칙에도 구속받지 않기 때문에 은혜의 평등한 분배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강조한다.146)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는 그의 은혜가 어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주어지지 않는 때가 있고, 조건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때가 있다는 극단적 대조를 통하여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실을 칼빈은 성서를 통하여 여러 차례 확증한다. 그는 예정론을 주장하는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찍이 하나님은 그의 영원 불변한 계획에 의하여 그가 오래 전에 구원에 이르도록 결정한 자들과 다른 한편 멸망에 맡길 자들을 정하셨다. 선택된 자에 관한 이 계획은 자유롭게 주어지는 그의 은총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며, 인간의 가치와는 전연 관계없다고 우리는 단언한다."147)

칼빈은 또한 예정론을 반대하던 피기우스(Albert Pighius) 등의 반대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변호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어떤 자는 선택하시고, 다른 어떤 자들은 무시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도전한다. 그러나 사실 자체가 명백한 것이라면 그들이 하나님께 도전하여 무슨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경험에 의하여 확인되는 것밖에는 가르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원하시는 자에게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자유로우시다고 하는 것이다."148)


칼빈은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와 인간의 무자유를 결정적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 어떤 공로에 의하지 않고 모태 안에서 벌써 천사의 머리, 하나님의 독생자, 아버지의 형상과 영광 그리고 이 세상의 의()와 구원이 되었다. …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선택의 가장 맑은 거울을 교회의 참된 머리이신 그 분 안에서 발견하다. … 그리스도는 의로운 생애를 보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후에 다른 사람들도 그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값없이 이 명예로운 은혜들을 받으신 것이다."149)


이제 칼빈은 '각 사람의 선택'을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을 등장시킨다. 여기서의 그리스도는 선택의 주체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다른 무엇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150)는 것이다. 인간은 선택될 만한 자격이 추호라도 없다. 더 명백히 말하면, 아무도 스스로는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정황에 놓여 있지 않다. 이처럼 "하늘 아버지는 인간에게서는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눈을 자신의 아들에게로 돌린 것이다."151)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를 주려고 했으나 인간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되지 못함으로 자기의 독생자인 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아서 은혜를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 안에는 그와 같이 탁월한 은혜를 받아들일 수가 없기"152)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와 인간의 무자유를 동시에 강조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2. 섭리론과의 관계에서의 예정론


1) 예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한 것을 대속이라고 하고, 이 은총을 개인의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칼빈의 신학을 간략히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으로서의 예정교리이다.


그러니 예정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말함인데, 개개인과 인류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이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에 작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각 개인은 똑같은 운명 아래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다른 어떤 사람은 심판으로 하나님께서는 미리 작정해 두셨다는 것이 바로 예정교리인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멸망에 내어준 자들에게는 정의롭고 비난치 못할 불가능한 판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문이 닫혀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153) 물론 칼빈이 이 예정교리를 자신있게 증거한 것은 자신의 창작물이 아니라, 그의 주장은 성경에다 철저한 근거를 두었다. 칼빈이 인용한 성경구절들을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3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로마서 1 12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마태복음 24 22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 그리고 로마서 9 1924절에 나와 있는 "토기장이와 그릇에 관한 기사" 등이다. 또한 칼빈은 예정교리를 수립함에 있어서 구약을 많이 사용하셨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여러 백성 중에서 특별히 한 백성을 택하시고 또 그 백성 중에서도 그가 기뻐하는 사람들을 예를 들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선택하고 에서는 거부하였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포기하는가에 대해서 칼빈은 "그 이유를 그의 뜻 밖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154)고 한다. 그의 예정론은 부름을 포함한다. 부름은 선택의 의존이다. 그러므로 부름은 다만 은혜의 일이다. 칼빈은 부름을 일반적인 부름과 특수한 부름으로 나누는데, 일반적인 부름은 그것에 의하여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말씀의 설교를 통해서 자신에게로 부르고, 특수한 부름은 신자에게만 해당된다.


그렇다면 예정을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무시하고 다만 인간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해서 단순히 선택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강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유스럽게 응답하도록 택하셨으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듣게 하고 확신하는 태도로 복음을 증거하도록 택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도 아니며, 또한 우리가 미래에 거룩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지 때문에 선택한 것도 아니다. 칼빈은 과거나 미래의 어떤 요소가 예정의 조건이 되려고 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선택은 공적의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 목적에서 온다."155) 칼빈에게 있어서 예정은 창조 이전에 된 공적의 예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의 선택이고 공적의 예지와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156)


칼빈은 예지에 관하여 성경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45). 예지가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9:15)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서는 그들을 축복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것을 그의 자비에서만 취하신다는 하나님의 명백한 선언이다.157)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 자신 안에서만 세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유한 사랑의 샘에서 나온다."158)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는 어거스틴의 말은 여전히 타당하다.159) 칼빈의 예정론은 선택되지 않으면, 즉 거부를 포함한다. "거부도 행위의 근거 위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난다."160)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은 아담의 타락을 포함한다. 아담의 타락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온다.161)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 이전에 첫 사람의 타락을 예지하였고, 아담 안에서 그의 자손들의 파멸을 예지했는데 그것은 그의 영원한 결단에 의해서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자신의 결단에 따라서 일어나게 하셨다.162)


2) 견인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한번 참으로 믿은 사람도 자신의 잘못을 통해서 멸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은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은혜로부터 탈선되지 않도록 보전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서 선택된 자의 인내가 보증된다는 것이다.163)


"참으로 선택된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는 사람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고 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원은 비록 세계의 전 구조가 흔들린다고 해도 확실성 자체는 흔들릴 수가 없다는 그러한 확실하고 확고한 기초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결단에 의해서 서고 넘어진다. 이와 같이 영원한 지혜가 결단하는 대로만 변화되기도 하고 또 없어지기도 한다. 선택된 자는 물론 타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가 항상 그들을 구해 주시기 위해서 그의 팔을 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못하고 미끄러져 넘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같은 좋은 보호자 아래서 확실히 마침내 잃어버려 질 수 없다."164)


칼빈은 아래와 같은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견인에 대하여 변호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6:37).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6:45).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165)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나는 그들도 택함을 받은 자들과 같은 부르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신앙과 복음의 말씀에서 얻도록 이미 명하신 선택의 확실한 기초가 그들에게 있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즉 신앙을 가지고 주를 받아들이는 자는 모두 아버지에게 속한 자이며, 또한 그가 그 보호자요, 목자가 되기 때문에 그들 중의 한 사람도 멸망하는 일이 없다고 주님은 선언하시는 것이다."166)


지금까지 우리는 칼빈의 예정론을 말하면서 구원을 받는 사람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해 준 사람인 것을 설명했으며, 또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멸망치 않게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전도를 해야 되고 개인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히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 보기로 하자.


결론부터 말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개인의 영혼이 구원을 얻도록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알마니안주의자들은, "만일 예정론이 참되다면 복음의 보편적 제공이란 말은 공연한 말로써 택함을 받지 못한 자에게 전도하는 일은 매우 무지한 짓이다."167) 라고 반기를 든다. 그 원인은 인간의 유한하고 취약한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오묘한 행사를 다 깨닫기란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말해줄 따름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대,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는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배척하는 사람과 또 다른 편에서는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설명하실 때, 복음을 받는 인간의 마음을 네 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는 길가와 같은 마음, 둘째는 돌밭이고, 셋째는 가시 떨기와 같은 마음, 넷째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다.(13:48)

그러나 마음은 네 가지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첫째에서 셋째까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을 말하고, 넷째만 열매를 맺는 밭이라고 말이다. 이런 두 가지 마음의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단순히 인간의 자동적인 움직임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마음의 현상은 알마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자동적인 반발로 보고 있는데 반해, 칼빈은 "복음을 받지 아니하고 배척하는 것은 선택되지 아니했기 때문이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선택된 사람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168)


여기에 대한 성경의 뒷받침은 다음과 같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바로의 마음이 강팍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구절(9:1718),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복음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10:26)라고 하신 부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을 믿으면서 왜 전도해야 되고 개인의 영혼이 구원 얻도록 기도해야 하느냐 묻는다면, 그것은 누가 택함받은 사람인지 누가 버림받은 사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전도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전하도록 이 전도와 기도를 예정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은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0:15)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전도자가 전도하기 위해서 가는 것도 예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정을 확실히 믿으면 그는 전도를 안 할 수도 없고, 전도하다가 박해를 받고 열심히 전도했으나 사람들이 믿지 아니할 때에도 낙심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즉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배척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을 굳게 믿는 사람은 강력한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결론


칼빈은 "참되고 완전한 지혜는 하나님 지식과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칼빈은 대조법을 사용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먼저 하나님을 인식하는 근거로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자연과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인간 내부에 있는 종교적 감정,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며, 인간 외부에 있는 자연과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등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충분히 인식하도록 허락되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셨다고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찾는 정확한 길이요 가장 적절한 순서요, 그 만드신 것을 통해서 그를 보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접근하시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참여하도록 하신다고 한다.


둘째로는 성서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인간에서 있어서의 참된 하나님의 인식은 성서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전능으로 우리를 지배하시며, 섭리로 우리를 다스리고 그의 선하심으로 우리를 기르신다. 그리고 다양한 축복으로 우리를 채워주신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서 안에서 하나님의 인식을 말하면서 성령의 내적 증거를 말하는데, 이는 성서 본문에 자증력과 그 명료성을 전제하고서 그 저자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던 성령이 그 문자에 기계적으로 구속받는 것이 아니고 현재에 다시 독자에게 인격적으로 임하여 가르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서의 성격을 인간에서 왜곡된 창조주 하나님 인식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뿐만 아니라 구속자로서,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이러한 신과 인간 이해를 근거로 하여 칼빈은 그의 섭리론을 전개한다. 섭리의 기독교신학적 의미는 예견되고 예비된 것을 추진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선지를 가르킨다. 하나님과 세계와 관계에 있어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일뿐 아니라 그 창조된 세계를 유지하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칼빈은 창조와 섭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창조시 뿐만 아니라 세계의 계속적인 상태에도 빛나고 있음으로 신자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며 보존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천체와 보편적 움직임에 의한 그 몇몇 부분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모든 것, 심지어 참새까지도 지탱하시고, 먹이시고 돌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섭리론은 운명이나 우연을 거부한다. 철저히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은 그 분 아래에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 하나님은 순간적인 창조주가 아니라 영원한 통치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통치를 말하면서, 특히 신자들에 대한 돌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 속에 심판과 축복을 행하시며, 만사가 그의 뜻 안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적합하도록 통치하신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께서 매사를 돌보신다고 해서 보편섭리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그는 다만 보편 섭리가 그의 특별한 관심을 일어나지 못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감춰진 섭리'에서도 이점을 강조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섭리의 지식은 우리가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돌봄의 날개 아래 모든 피조물을 각각 덮고 계신다는 믿음을 견고하고 그것을 묵상하지 않는 한 모호하고 혼동된 것이다.


섭리안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악의 문제이다. 칼빈은 하나님은 세계사를 이끌어 가시면서 때로는 심판의 도구로 악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선하심과 자비 그리고 공의로의심으로 선을 통해 악을 지배하시기도 하고, 악을 통해 악을 징벌하시기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설사 악을 통해 역사하셔도 하나님의 뜻은 하나일 뿐이다. 인간은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게 된다. 미래를 직면해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역사를 섭리적 차원으로 이끄실 것을 기대하게 된다.


여기서 신자의 적극적인 삶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미래와 관련해서 매사가 아직 감춰지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경우의 사안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명령받지 않는 것처럼 자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혹은 그는 모든 우연이 하나님의 분명하고 확실한 섭리와 조화될 것에 거리낌없이 준비되어야만 하는 것만큼,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준행하는 모든 일에 성공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의 손의 활동에 축복을 약속하신다. 따라서 그의 섭리 사상은 성도를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혼자서 행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섭리의 뒷받침을 인지하고 더욱 담대하게 행할 수 있게 된다.


예정도 하나님의 선지와 통치의 맥락에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선택도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이다. 칼빈은 "우리는 신의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원한 섭리에 의하여 각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신다"고 하였고,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단 버에 나서 영원하시고 만고불멸하신 계획에 의해 창세전부터 구원반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선택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유기와 선택 모두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마찬가지로 칼빈은 선택의 유일한 근거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라고 하였다.


개인적으로 나 자신의 삶의 여정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이라는 질문을 하도 많이 하고 살아온 고난과 만족함이 없었던 것 같이 감히 하나님의 역사와 그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하여 J. Calvin의 섭리론을 다루어 보려하였던 것 것이다. 이제는 조금이지만 약간은 알게 같다. 나의 삶의 모든 과정을 말입니다.


이상 칼빈의 섭리론을 연구하면서 가장 크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은 온전히 인간과 그의 주변 세계를 창조하셨고 선하게 돌보시고 유지, 지탱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움직임은 의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우연이나 숙명이 아니라 펼쳐진 뜻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감춰진 모습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장에서 주변에 말로 형언할 수 없게 많다. 그러한 것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개인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자연계의 모든 사물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어떤 자극과 반자극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무척 궁금하였다.


그런데, 칼빈의 하나님의 섭리는 비밀성으로 나타난다는 큰 범주 안에서 이것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놀라움이고 충격이다. 일상적인 생활의 매몰되어 살 때는, 하나님의 섭리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 개인적으로나 나의 목회적 현장에서 접하였던 이들에게 약간은 불행이었다 여겨진다. 

 

감이 필자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의 펼쳐짐, 그리고 그것의 실현과정으로 자연현상과 인간의 수 천년의 역사, 그리고 그 주변의 모든 부산물들이 목적적으로 실존적 모습으로 현재를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돌봄의 손길이 늘 '지금' 이곳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 앞에 놓여진 실제적인 인지의 대상이다. 우리 인간의 극히 단점이 가장 작고 너무나 크면 보지 못함으로 느끼고만 있지 그것들을 구체적 모습으로는 알고 발견하고 그들의 삶의 유익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몸과 머리로는 이러한 것들을 어렴풋이 느끼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신앙의 성숙이 더디고 힘겨워하고 낙심하는 모습들이 자주 눈에 보인다. 또한 우리 인간은 현재에 살고 과거를 돌아보면서 살기 때문에 과거를 통하여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뿐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 1절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라는 하였다. 한 세기가 끝나는 무렵인 이때에 무엇인가 기대속에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신앙인들의 모습 속에서 그들의 믿음이 없다고 우리 목회자들은 책망할 수 없다.


여기서 목회자로서 우리에게 과제가 있다는 것 알아야 할 것이다. 과제라함은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모습을 여태껏 말하여 왔고 통치하고 돌보시는 그리고 인간의 굴레속에서 해방이라는 은혜의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그들의 중심에 늘 '실존하다'는 것을 가슴에 색인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신자들이 더욱 희망과 비젼 그리고 소망 중에 살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1세기에서의 복음 전파의 선상에서 하나님의 이해를 더욱 굳건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근원 - 사랑, , 정의, 평화-임을 신자 스스로 알고 자신의 삶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그를 향하여 묻고 답을 얻는 그러한 삶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 안에서 하나님의 빚으시는 창조와 돌봄의 손길을 확고하게 느끼고 신자들의 삶과 인간 사회 속에 하나님의 나라 즉 구원의 다발적 실현이 나타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목회현장에서 실질적인 이해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차문헌

Calvin, J.,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ited by John T. Mc-

Neill,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ins-

ter Press, 1960) 양난홍역,『기독교강요:초판』(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사, 1988)

Niesel, W., The Theology of Calvin (Philadelphia: The Westerminster Press,1973), 이종성역, 『칼빈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3)

Parker. T.H., John Calvin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5

김지찬역,『칼빈의 생애와 업적』 (서울: 생명말씀사, 1975)

전경연, 『칼빈의 생애와 그 신학사상』 (서울: 신교출판사, 1959)

조향록 편, 『칼빈신학의 현대적 이해』(서울: 한신대학출판부, 1978)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기독교대백과사전』(서울: 기독교문사, 1984)

2차문헌

Allen. Diogenes., Philosophy for Understanding Theology (Atlanta:John Knox Press, 1985)

Barth., 『복음주의신학입문』이형기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트사, 1987)

Boettner. Lorainer., 홍의표 편역, 『칼빈의 예정론』(서울: 보문출판사, 1982)

Calvin. J., 『기독교강요선』(서울: 생명말씀사, 1990)

Geach, Peter., Providence and Evil (Cambridge:Cambridge Universty, 1977)

Georgia. Harkness., The Providence of God (New York:Abingdon Press, 1960)

Hazelton. Roger., God's Way With Man : Variations on the Theme of Providence (New York: Abingdon Press, 1956)

Harkness, G., The Providence of God (New York: Abingdon Press:1960)

Langford, M.J., Providence (London:SCM Press, 1981)

McNeill, J.T.,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oxfordc:oxford U.P., 1954), 정성구·양낙홍 공역, 『칼빈주의의 역사와 성격』(서울: 크리스찬다이제트사, 1990)

McKim. D.K., 『칼빈신학의 이해』 이종태역, (서울: 생명말씀사, 1991)

Richard. J.,『칼빈의 영성』 한국칼빈주의연구원역,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86)

Warfield, B., Calvin and Calvinism (London: Oxford University, 1931)

기독교문화사, 『칼빈의 예정론』(서울: 기독교문화협의회, 1979)

김성환, 『평신도를 위한 칼빈주의 해설』(서울: 정음출판사, 1982)

김영환,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4)

김하진, 『주제별 칼빈주의』(서울: 한국문서선교회, 1988)

이종성, 『칼빈』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8)

, 『신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84)

전경연, 『칼빈의 생애와 사상』 (서울, 복음주의 신학총서재, 1982)

정성구, 『칼빈주의 사상과 삶』(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1) J.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ited by John T. McNeill,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1:1.

(이하는 Inst로 표기하며,:1:1.는 Ⅰ권 1 1절을 뜻한다.)

2) Inst. , : 1:1.

3) 전경연, 『칼빈의 생애와 그 신학사상』 (서울: 신교출판사, 1967), p.102.

4) Inst. , : 1:1.

5) Inst. , : 1:2.

6) W. Niesel, 『칼빈의 신학』 이종성역,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80), p.23.

7) Inst. , : 3:1.

8) Inst. , :15:1.

9) Inst. , :15:1-2.

10) Inst. , : 2:1.

11) Inst. , :13:2.

12) W. Niesel, 『칼빈의 신학』p.28.

13) Inst. , : 5:1.

14) Inst. , : 5:3.

15) Inst. , : 5:6.

16) Inst. , : 3:1.

17) Inst. , : 5:9.

18) Inst. , : 5:1.

19) Inst. , : 5:10.

20) Inst. , :15:3.

21) Inst. , :15:4.

22) Inst. , : 4:4.

23) Inst. , : 3:1.

24) Inst. , : 3:1,: 4:2.

25) Inst. , : 3:3.

26) Inst. , : 3:1.

27) B. Warfield, Calvin and Calvinism, (London: Pxford Uniwersity, 1931), pp. 33-35.

28) Inst. , : 8:1.

29) Inst. , :19:15.

30) Inst. , :19:15.

31) Inst. , :19:5.

32) Inst. , : 5:1.

33) Inst. , : 5:5.

34) Inst. , : 5:11.

35) 전경연, 『칼빈의 생애와 그 신학사상』p.106-107.

36) Inst. , : 6-8.

37) Inst. , : 9-10.

38) 이 비유는 Inst. , :4:1.과 다른 곳에서도 나오는 말로서 창조역사에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에 관련된 성서의 역할에 대한 칼빈의 결정적 이해이 .

39) 전경연, 『칼빈의 생애와 그 신학사상』p. 86.

40) Inst. ,: 9:3.

41) Inst. ,: 6:1.

42) Inst. ,: 6:3.

43) Inst. ,: 6:4.

44) Inst. ,: 6:10.

45) Inst. , : 2:1

46) Inst. , : 5:8.

47) Inst. , : 2:1.

48) Inst. , : 5:8.

49) Inst. , :10:1.

50)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로다, 여호와로다! 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인자를 천대 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소서"

51) Inst. , :10:1.

52) Inst. , :10:2.

53) Inst. , :10:2.

54) Inst. , :14:2.

55) 경외(pitas)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revernce)과 사랑(Love)의 결합체로서 설명하면서, 칼빈은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전제조건이라고 하였다.

56) W.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Translated by H. Knight, (London: Lutter worth Press,1956), p.61.

57) Inst. , : 1:9.

58) Inst. , : 2:7.

59) 초자연적 은사는 신앙, 하나님 사랑, 성결등을 말하며, 이것들을 영원한 구원 의 소망을 갖게 하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상실하였다고 칼빈은 본다. 반면 이성은 자연적 은사임에 타락 후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어 그 힘 으로 선악을 가려낸다는 것이다.

60) Inst. , : 2:12.

61) 전경연, 『칼빈의 생애와 그 신학사상』p. 176.

62) 생래적 오염의 표현은 인간이 원래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타락의 요소를 누 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63) 대표적인 것이 17세기때 칼빈주의와 알마니안 주의 사이의 논쟁이다. 자유의 지를 인정하는 쪽(펠라기우스, 에라스므스등)은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을 강조 하는 반면 당시 칼빈주의는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인 대속, 전적 타락, 항할 수 없는 은총, 무조건적인 견인을 주장한 반면 알마니안 주의는 이에 대해 반대했으므로 공적 사상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64) Inst. , : 4:1.

65) Inst. , :11:4.

66) Inst. , : 2:4.

67) Inst. , : 5:1.

68) Inst. , : 3:5.

69) Inst. , : 3:10.

70) Inst. , : 2:1

71) Inst. , : 4:4:8.

72) 칼빈은 어거스틴의 '타락한 은총'을 인용하여 창조시 가졌던 의지와 타락후의 의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전자는 '죄짓지 않는 능력(posse non peccare)을 가 졌고, 후자는 '죄짓지 않을 수 없는 무능력(non poss non peccare)을 가졌다 고 설명한다.

참고. Inst. , : 3:13.

73) Inst. , :15:3.

74) Inst. , :15:4.

75) Inst. , : 2:12.

76) Inst. , :15:4.

77) Inst. , :15:8.

78) Inst. , :15:4.

79) G.S. Wakefield, A Distionary of Christion spirituality, (London: SCM

Press, 1983), p.320.

80) 이종성, 『신론』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8, p.311.

81) M.J. Langford, Providence, (London:SCM Press, 1981), pp.3-4.

82) προνοια는 행 24:2, 13:14, προνοεω는 고후 8:21, 12:17, 딤전 5:8 등에 쓰인다.

83) Harkness. Georgia, The Providence of God (New York: Abingdon Press,

1960), p.22.

84) Allen. Diogenes, Philosophy for Understanding Theology (Atlanta:John Knox Press, 1985), p.68.

85) Ibid., p.129.

86) Allen. Diogenes, op. cit., p.68.

87) Peter Geach 같은 학자는 신의 속성 중 ompipotence almighty로 바꾸어야 문제가 줄어든다고 주장한다. 그의 Providence and Evil (Cambridge: Cambr

idge U.P., 1977), pp.4ff 참조.

88) Hazelton. Roger, God's Way With Man : Variations on the Theme of Pr-

ovidence (New York: Abingdon Press, 1956), p.181.

89) Inst. , p.197.

90) Ibid.

91) Inst. , p.197.

92) Inst. , p.198.

93) Ibid.

94) Inst. , p.199. 여기서 '특별'(special)의 의미는 '보편'(universal) '특수'(sp-

ecial) 섭리의 구분에서의 특수섭리의 의미보다는, 각별하다는 의미에서사용 된다. Partee 역시 칼빈이 특수섭리를 발전시키기보다, 하나님의 섭리의 각 별성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의 추상적인 옹호 에는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그것의 범위나 적용에 관한 이론적 구축에도 관 심이 없었다. 칼빈은 보편섭리를 가르쳤으나, 그의 해설은 하나님의 자기 백 성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돌봄에 초점이 모아졌다 … 게다가, 칼빈은 특수 섭리의 견해를 발전시키고자 보편섭리의 신학교리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히려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각별성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 각별성은 그의 영원한 선택 교리에서 분명히 보여지나, 그의 섭리의 해설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95) Inst. , p.200.

96) Ibid. 칼빈은 전능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전능을 기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두가지 유익을 기술하고 있다. 첫째는, 천지를 쥐 고 계신 분께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며, 둘째, 그 능력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능을 "선을 행함"과 연결지 어 설명하기 때문에, "전능"이란 개념이 불러 일으키는 철학적 문제에 관심 하지 않는다. Inst. , p.201참조.

97) Inst. , p.202.

98) M.J. Langford, op. cit., p.4.

99) Inst. , p.204.

100)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84) p.374.

101) Inst. , pp.206-207.

102) Inst. , p.222.

103) Inst. , p.227.

104) Inst. , p.230.

105) Inst. , pp. 1516-1517.

106) Inst. , p.210.

107) Inst. , p.215.

108)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 p.375.

109) lbid., p.376.에서 재인용.

110) Inst. , p.215.

111) Inst. , p.217.

112) Inst. , p.218.

113) Inst. , p.227.

114) Inst. , p.943.

115) Inst. , :21:1.

116) Inst. , :21:2.

117) Inst. , :22:7.

118) Inst. , :22:7.

119) Inst. , :21:5.

120) Inst. , :21:7.

121) Inst. , :22:5.

122) Inst. , :23:2.

123) Inst. , :24:3.

124) lbid.

125) lbid.

126) Inst. , :22:10.

127) Inst. , :21:7.

128) lbid.

129) Inst. , :24:5.

130) Inst. , :15:25.

131) Inst. , :22:1.

132) lbid.

133) Inst. , :22:1.

134) Inst. , :21:1.

135) Inst. , :23:4.

136) Inst. , :23:5.

137) Inst. , :23:4.

138) Inst. , :1:3.

139) Inst. , :23:8.

140) Inst. , :24:14.

141) Inst. , :21:1.

142) W. Niesel, 이종성역, 『칼빈신학』 p.168.

143) lbid.

144) Inst. , :21:5.

145) Inst. , :21:6.

146) Inst. , :22:10.

147) Inst. , :21:7.

148) lbid.

149) Inst. , :22:1.

150) lbid.

151) lbid.

152) lbid.

153) Inst. , :21:7.

154) Inst. , :22:11.

155) Inst. , :22:1-6.

156) Inst. , :22:2.

157) Inst. , :22:2.

158) Inst. , :22:1.

159) Inst. , :22:8.

160) Inst. , :22:11.

161) Inst. , :23:7.

162) lbid.

163) Inst. , :24:6-11.

164) Inst. , :24:6.

165) lbid.

166) Inst. , :24:7.

167) Lorain Boettner, 홍의표 편역, 『칼빈의 예정론』(서울: 보문출판사, 1982) p.78.

168) 김성환, 『평신도를 위한 칼빈주의 해설』(서울: 정음출판사, 1982), p.16.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