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의 제자도



제1장. 공관 복음서 개론


신약성경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네 권의 책을 우리는 복음서라 부른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있는데, 통일성이 기초이고 다양성이 가해져 있다. 신약의 다른 책들도 중요하지만, 특히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기록하여 담은 복음서는 더욱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중요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서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물론 그 내용과 구조는 바울서신과 비교할 때 매우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런데 복음서는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각 복음서에 나오는 사건들과 말씀들의 차이를 잘 구분하여 분별함으로서 담겨진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이 성경적 태도이며, 이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네 권의 복음서의 독특한 목소리를 바르게 들을 수 있고, 이 네 권의 복음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들을 수 있다.



1.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인데, εὐ 즉 ‘좋은’(well, good)이란 접두사와 ἀγγελία 즉 ‘소식’(message, doctrine)을 뜻하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그 의미는 ‘좋은 소식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전쟁에서의 승전보를 전달해주는 자에게 주는 상급을 가리킬 때에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점차 흐르면서 기쁜 소식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전용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1세기, 즉 사도들을 포함한 성경의 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이르렀을 때 유앙겔리온은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와 결부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 전도자들은 인간적 지도자인 황제의 탄생이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죄를 해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바로 참 복음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로마제국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숭배 받는 황제보다 더 권세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이었다.



2. 복음서들은 언제 기록되었을까?


복음서들은 모두 바울서신이 전부 쓰여진 후 기록되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와 또한 그 서신서들을 쓸 때에는 아직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이 오늘날의 복음서들처럼 문헌적 형태로 정착되지 못하고 단편적 기록이나 구전으로 내려오고 전해내려 오고 있었을 것이다 (고전15:3,4; 11:23,26).


이런 까닭에, 바울의 서신들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드물게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 사도가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 신학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교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고전15:3-4).


일반적으로 복음서 중 가장 늦게 기록된 것은 요한복음이고,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마가복음으로 알려져 있다. 마가복음은 주후 65-69년으로, 누가복음은 주후 70년 이후로(80-85), 그리고 마태복음은 주후 70년 이전설과 주후 80-85년 이후설 두 가지 이론이 있다. 기록연대 산정은 문헌 및 자료적 증거로 추정한 것이기에 100% 완벽한 사실은 여전히 알 길이 없다.



3. 복음서가 예수님 사후 최소한 30-35년 후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주전 4년경에 탄생하시어 주후 29년경에 승천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이 쓰여진 주후 65년까지 어찌하여 복음서는 기록되지 아니하였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임박한 종말론, 사도들은 종말이 곧 올 줄로 믿었다(막9:1; 마10:23; 행1:11). 사도들을 포함하여 초대교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상이 분명히 드러난 곳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중지된 예언의 영이 말세지말에 다시 임할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함으로 그들은 세상의 마지막이 도래한 줄로 믿었던 것이다.


둘째로, 시급한 복음 전파,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니 그동안 승천 시 주신 주님의 지상 명령인 복음전파에 사도들은 온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마10:23; 마29:19-20; 행1:8).


셋째로, 증인들의 생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로는 아직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을 들어 알고 있는 증인들인 사도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이다(행1:21,22; 2:32; 3:15; 10:39). 따라서 주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들을 의지할 수 있었기에 기록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다가, 사도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게 되고 아직 약속하신 종말이 이르지 않게 되자, 비로소 초대교회는 주님의 사역과 교훈을 글로서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제2장 마가복음 서론


1. 저자


요한 마가. 12제자 중 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바울의 첫 번째 선교여행에 동행하였다(행13;13). 마가는 팔레스틴 지역과 예루살렘 지리에 익숙했으며(11:1),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요한 마가는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부와 지위를 가진 마리아의 아들이며(행12:12) 바나바의 조카였다(골4:10). 그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에서 바나바와 함께 바울을 동행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으나 전체 여행에서는 그들과 함께 끝까지 머물지 못하였다.


즉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그를 데리고 가는 일에 반대하여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로 가게 되었다(행15:38-40). 그러나 거의 12년이 지난 뒤에 마가는 다시 바울과 함께 있게 되었고(골4:10; 몬1:24), 바울이 처형받기 직전에 바울의 요청으로 그를 다시 만나러 갔다(딤후4;11). 마가는 한 번의 실수를 이기고 다시 새 생활을 시작한 청년의 삶을 보여준다.


마가는 생전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뵙지는 못했지만 본문에 기록된 자료의 대부분을 베드로를 통하여 들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의 강력한 권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복음서가 정경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2. 기록 연대


A.D. 65-70년 사이로 보고 있으며, 베드로와(A.D. 64년)와 바울(A.D. 67년)이 순교한 이후로 정해진다.

또 예루살렘 멸망(A.D. 70년)의 예언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그 기록연대는 A.D. 67-70년 사이로 좁혀진다.



3. 기록목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사역 및 가르침을 소개한다. A.D. 64년 로마의 대화재로 영원한 도성이라고 떠들어대던 로마시가는 시커멓게 그을린 숯덩어리의 폐허로 남게 되었다. 로마의 14개 행정구역은 4개 행정구역만이 무사했으며 3개 구역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이 네로 황제라는 풍문이 퍼져 나가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모든 잘못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버렸다.

이러한 박해상황에 처해있던 기독교 지도자 중에 예루살렘 출신의 요한 마가가 있었다. 마가는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믿음의 시련을 위해 정신무장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을 주고 예수께 대한 믿음의 토대를 견고히 하기 위해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4. 신학적 주제


1)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이미 우리가 요청하기 전에 그 아들을 대신 보내주신 하나님의 선도적 노력

2) 예수께서 도래시킨 새 시대의 존재와 그 축복

3) 새 시대의 미완성으로 인한 현시대의 새 시대에 속한 자에 대한 핍박과 갈등

4) 예수를 하나님의 대리자이자 아들로서 고백하는 것과 성도의 행동 모범으로서 인정하는 사실의 중요성

5) 새 시대에 속한 자, 즉 4항을 증언하는 자에 대한 현 시대의 핍박으로부터 성도를 영원히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의지



5. 특징


마가복음은 최초의 기록된 복음서이다.

다른 복음서들은 마가복음을 인용하고 있으며, 마가는 다른 어떤 복음서들보다 기적 기사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 또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그의 행동을 강조한다. 이는 아마도 본서가 이론적 정확성보다는 박해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강한 확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며, 또 로마인이나 로마 문화 자체가 이론이나 원리보다는 구체적 행동이나 그 결과를 중시하는 기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간결하고 박진감 있는 직설적인 문체

2) 목격자인 베드로에 의한 사실적인 묘사, 베드로의 복음이란 별명을 갖고 있음.

3) 그리스도의 기적을 강조하며, 교훈을 강조하는 마태복음과 대조가 됨.

4) 구약의 인용이 적고(마128회, 눅90-100회, 막63회), 유대인의 습관, 지명, 족보 등을 대부분 생략한, 이방인 특히 로마인을 위한 복음.

5) 예수를 섬기는 자로 묘사한 종의 복음.


6.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본서에서 주님은 죄인들의 육체적, 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겸손한 종으로 묘사되었다. 다시 말해 이 복음서는 종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 등에 관한 언급은 생략된 채 곧바로 공생애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본서에 그리스도는 감정이 풍부하시며 심지어는 인간적인 약점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인성을 지니고 있는 분으로 묘사되었다(4:38; 6:31; 15:34). 그리고 그리스도는 수난받는 종으로 묘사되었으나, 결코 신성이 약화되어 표현되지는 않았다.

1) 종이신 예수님의 탄생과 준비(1:1-13)

2) 종이신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역(1:14-13:37)

3) 종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14;1-16:20)



제3장 마가복음의 제자도


1. 부르심과 응답(1:16-20)


마가복음에 있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첫 번째 주제의 설교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이다(막1:15). 이를 마태복음의 병행구절(마4;17)과 비교할 때, 우리는 “복음을 믿으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생략된 것을 발견하게 되며, 마가가 [복음]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가복음에는 ‘복음’이라는 단어가, 복음을 위한 구체적인 희생이, 제자도의 특징과 결부되면서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8:35절에서 복음을 위해 목숨을 희생할 것이 요구되고 있고, 10장 29절에서는 집,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전토 등의 희생 및 포기가 요청되고 있다.


1)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상황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부르셨다.

시몬과 안드레(1;16), 야고보와 요한(1:19), 레위(2:24)

달란트 비유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3) .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그 일이 크든지 작든지 맡겨주신 일에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사업이 성공적일 때 그들을 부르셨다.

마가복음 1:20절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은 “품꾼들”을 고용할 수 있을 만큼 사업이 번성하였다고 보여진다. 첫 번째 제자들은 하는 일들이 잘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행복과 안위를 포기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자들을 부르신다.


(3) 주님의 일과 세속적 일과는 양립할 수 없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당했던 주요 요인 중 하나가 그들이 하나님과 이방신을 동등하게 간주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을 많은 신 중의 하나의 신으로 상대화시키고 마는 것이다. 제자들은 어업을 하면서 또 동시에 주님을 따를 수 없었기에 기꺼이 자기 일을 포기하였다.


(4) 제자들이 버린 것은 무엇인가?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의 재산과 가족을 버렸다. 가족을 버렸다는 것은 주님께서도 구약의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부모공경의 계명을 인정하셨기 때문에(막10:19), 결국 마태복음 10장 37절과 누가복음 14장 26절을 참작할 때 우리는 우선 순위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10:3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결국 재산과 가족의 포기는 과거와의 단절을 말한다.


(5) 제자들은 세속적 일들, 재산, 가족 관계를 정리하는 데는 신속하고 민첩하여야 한다.

18절과 20절에서 그들은 “곧”(유두스, εὐθúς) 주님을 좇았다. ‘곧’이란 단어는 마가가 40여회 이상이나 사용하는 애용어였다. 즉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부름을 받은 즉시 주님의 말씀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며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누가복음 9장 57-62절의 말씀에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62절), 즉 민첩성은 달리 말하면 [우선권]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먼저(프로톤, πρῶτον)"라는 말은 시간적으로도, 또 의지적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2. 선택과 사명(3:13-19)


1) 선택의 목적

3:14에 의하면 예수님은 첫째로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하여, 둘째로 보내사 전도하도록, 셋째로 귀신을 내어좇는 권세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마가복음의 이 구절은 다른 복음의 병행구절과 비교해보면 마가복음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좇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6;13)


다른 두 복음서와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점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세 가지 목적 중 첫 번째 항목은 마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사실이다. 마태복음은 열두 제자를 택했다는 언급은 아예 없고, 누가복음은 택함을 말하고 있으나, 그 목적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열두 제자를 부르신 목적을 구태여 밝히고 있는 것은 마가복음 뿐이다. 결국 마가복음의 독자들, 즉 마가가 속하였을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있어 제자로서의 이런 특징이 결여되어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마가복음에 있어서 제자들의 선택기사는 마가 공동체의 사회적 배경 하에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지리적으로 로마에 위치했던 마가 공동체는 로마 정부와 또한 유대인들로부터 박해와 핍박에 직면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참고. 막10:30; 여기서 “핍박을 겸하여 받고”는 오직 마가복음에서만 발견된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염두에 둘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중 첫 번째가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마가교회에 있어 대단히 의미있는 대목이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친히 부르신 장면에서, 그들을 부르셨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서, 그 공동체 교인들에게 제자도의 한 특징, 즉 어떤 상황과 형편, 처지, 그리고 조건 가운데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도 제자들은 항상 주님과 함께 할 것을, 늘 동행할 것을 새로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 창5:21-24.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에녹의 기록은 자녀 생산과 하나님과의 동행뿐이다.


창4장 - 가인의 후손들 - 각기 세상에 남긴 업적 소개(가축치는 자의 조상,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모든 조상, 동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의 조상)

창세기와는 다르게 히브리서에서는 가인의 후손은 언급되지 않고, 에녹에 대해서는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저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11:5)


한 마디로 하나님은 어떤 인물이 남긴 업적보다는 그 인물의 신앙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중, 보내어 귀신을 내어 쫓기 전에 먼저 주님과 동행 할 것이 첫 번째 목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이런 교훈을 입증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삼백년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생애는 결코 평범하지 않고, 특기할 만큼 비범한 삶이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2-24을 통해서 보면, 많은 권능과 업적 보다는 말씀을 지키면서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귀한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 사명을 감당할 권세와 능력

마가복음 3장 14절과 15절의 문장 구조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주된 목적은 복음전파이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는 복음전파를 위해 보조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또한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세 및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 자신이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신 것도 보면, 모세를 혈기 방장한 사십대에 불러 일을 맡기시지 않고(출2;11-15, 행7:23-29), 기력이 쇠한 팔십 대에 불러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으셨다(행7;30-38).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에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1-12).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과 직분을 주시되 그것을 감당할 능력도 함께 주시는 것이다.


3) 세 종류의 제자도

(1) 시몬에게는 베드로(반석)란 이름을 더하셨다(16절).

베드로는 본래 본명이 시몬으로, 예수님께서 부르신 최초의 네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막1:16-18; 10:28). 마태복음에 의하면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그 유명한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후 시몬은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6-18)는 말씀과 함께 천국 열쇠를 받는 복을 받게 된다. 비록 약간의 실수와 허물은 있었지만 신앙과 행동에 있어서 반석처럼 믿음직스러웠기에 이 별명을 더하셨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또한 우리를 믿으실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2)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이 더하여졌다(17절).

이들 형제는 베드로와 함께 야이로의 딸 치유사건(5:37), 변화산 사건(9:2), 종말론 설교(13:3),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14;33) 등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이런 특별교육에도 불구하고 이들 형제는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여전히 깨닫지 못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마가복음 9장 38-41절에 의하면, 이들 중 하나인 요한은 제자들의 무리에 들지 않았으면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를 금지시킨 것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다가 주님께 책망을 듣게 된다. 또한 이들 형제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다른 제자들 몰래 주님께 나아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라고 간청하였던 매우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인물들임을 우리는 기억한다. 물론 ‘보아너게’라는 별명 자체가 부정적이므로 이 별명이 이들 형제의 분별없는 행동 및 간청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이 붙게 된 직접적인 경위는 아마도 누가복음 9장 51-56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사마리아 한 촌을 지나쳐 가게 되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그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에 격분한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도록 명하여 그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릴 것을 주님께 제안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과격하고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들 형제 중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따르면 헤롯에 의해 순교 당했다. 그러나 요한은 사도들 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하면서 신약의 5권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사랑의 서신’이라고 하는 요한 일서를 쓰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사도요한에 대한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요한이 연로하여 거동조차 힘들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선생님 이제 소천하실 날이 가까웠는데 마지막으로 저희에게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세 번이나 물었고, 이에 세 번식이나 ”서로 사랑하거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요한은 과거의 우뢰같은 성격에서 사랑의 인격으로 바뀌고야 말았던 것이다.


(3)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자”라고 설명이 덧붙혀졌다(19절).

가룟 유다는 한 가지 점에서 다른 제자들과 구별된다. 그 출신 지명을 놓고 볼 때 그는 아마도 유다 지방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스카리옷(᾽Ισκαριωθ)은 [카리옷의 사람]이란 말인데, ‘카리옷’은 여호수아 15장 25절과 예레미야 48장24절에서 ‘그리욧’으로 표현되어 있는 지명으로, 유다지방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12마일 떨어진 동네이다. 결과적으로 가룟 유다는 갈릴리 출신이었던 열한 제자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남부 유다 지방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가룟 유다의 남다른 열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복음서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으실 때부터 주님을 알게 되었다가 갈릴리까지 좇아 올라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견지에서 가룟 유다는 사도로서 활동하던 초창기에는 헌신과 열심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물에 관심도 있었겠지만, 보통 회계란 어떤 그룹 내에서 신임이 두터운 이에게 맡기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가룟 유다는 애초에는 누구보다 열심이었으나 끝내 물질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 채 오히려 재물욕의 포로가 되어 스승을 몇 푼 안되는 돈과 바꿔버림으로서,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망가뜨리는 비극적 인물이 되고 말았다. 시작이 중요하다면 결과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앞서의 두 제자 즉 베드로와 요한이 마가교회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 인물이라면, 가룟 유다는 성도들이 회피해야할 실패한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고 하겠다.



3. 믿음과 편견(6;1-6)


본문에는 편견이 가져다주는 불행과 비극이 잘 나타나 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메시야로서의 공생애 사역 중반 쯤 해서 고향 마을인 나사렛을 방문한다(막1:9,24; 요1:46참고). 예수님께서는 구약 미가서의 예언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는 하였지만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돌아오신 것은 가족을 만나기 위한 고향 방문이 아니라 고향마을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함이었다.


고향 마을의 회당에 들어가시자, 여행 중 회당을 방문하는 랍비에게 성경해석을 허락하는 당대의 습관을 따라 예수님께서는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이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의 비뚤어진 편견 때문이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보다는, 여전히 그들 가운데 있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려 했기 때문이다.


나사렛 사람들의 그릇된 편견의 내용(3절)


먼저 그들은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는 ’우리와 똑같이 손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보통 인간이 아니냐?‘는 의미이다. 즉 예수님의 신적인 지혜와 권능을 보고 들은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목수)이 아니냐?”는 표현은 혈통을 중시 여겼던 유대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나타낸다. ’마리아의 아들‘ 즉 ’여자의 아들‘이란 말은 한마디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생아로 간주하였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그들이 불신앙적 안목으로 바라본 결과라고 생각된다.


또한 “야고보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는 표현은 주님의 형제자매들을 언급함으로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단지 인간적 관계로서만 이해하려 하였다는 증거인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나사렛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일로, 영적인 일을 육적인 일로, 천상적인 일을 지상적 사건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그들의 면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실상을 목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색안경을 쓰고 치우쳐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사렛 사람들은 이런 편견 때문에 3절 하반절에서처럼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었다. 편견이 불신앙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의 이러한 불신앙은 6절에서 확인된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렇게 볼 때 결국 편견은 불신앙인 것이다. 편견은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며 지상적으로만 바라봄으로 하여, 진실과 진리를 왜곡하는 악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답기 위해서는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어떤 형태의 편견도 가져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사건은 유대인으로서의 베드로의 편견을 교정하는 대목이다.


베드로는 어느 날 기도하던 중 비몽사몽간 하나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 내용인즉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땅에 있는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잡아먹으라고 베드로에게 명령하셨다. 베드로는 이렇게 답변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10:14-15). 여기서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신 음식은 유대인들의 음식법에 저촉되는 것으로 이를 먹을 경우 유대인은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이를 세 번씩이나 거절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경건한지를 과시하고 싶었을는지 모른다. 베드로는 자신의 고집과 편견을 꺽지 않고 끝내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10장 전체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이 버린 편견을, 베드로가 여전히 주장하자 이를 책망하고 교정하신 것이 고넬료 사건이다. 결국 고넬료 가정을 방문하여 자신을 초대한 고넬료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의 참 의미를 깨닫고는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나사렛 사람들의 편견으로 인해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은 4절에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셨다. 5절을 보면, 나사렛 사람들의 편견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시켰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물론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하여서 못하신 것은 아니다. 편견으로 인한 불신앙이 가득 찬 상태에서 예수님 스스로 더 이상 기적을 행하시지 않기로 결심하셨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나사렛 사람들은 그들의 편견으로 인해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시켰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떠나시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고, 더 많은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들의 편견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킴으로써, 우리에게 필요한, 또한 우리에게 마당히 있어야 할 은혜와 축복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 사건은 편견의 극복과 이로 말미암은 축복을 소개해주고 있다(요4:41-42).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편견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혈통적 차이와 지역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9절은 유대인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일러라(요4;9).

그러나 인종적 편견을 가졌던 수가 성의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인종적, 혈통적 편견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8-29절을 보면 그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전파하게 되었다.


본래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축복의 대상이었던 유대인 나사렛 사람들은 편견으로 인해 제외되고, 반면에 이방민족 수가 성 사람들은 편견을 해결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서로에게 편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마귀의 편이 되고, 이웃에 대한 편견을 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이다.



4. 사역과 보고(6:7-13,30)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전도를 위하여 파송하신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전도를 위하여 파송하신 것은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의 목적 중 하나였다(막3:13-15). 열두 제자들의 전도를 위한 파송은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지상사역 중 단 한 차례 발생하였는데, 여기에는 우선 크게 세 가지 교훈이 담겨져 있다.


첫째로, 파송은 일종의 실습과도 같은 것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교육 및 훈련의 일부였다.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후 이제까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왔으며(4:10-34, 35-41; 5:37), 이제는 주님 곁에서 보고 들은 바 교육과 훈련을 실제 현장에서 실천에 옮기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6:12-13). 듣고 배운 바 말씀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결국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야고보 사도는 이 점에 관해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제자는 머리만 크고 신체의 다른 부위는 삐쩍 마른 비정상적인 모습일 수밖에 없다.


둘째로, 제자들의 전도 파송은 제자들을 통한 예수님 자신의 사역의 연장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권세와 메시지를 갖고 나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예수님 자신의 능력과 권세와 메시지를 갖고 나간 것이다(6:7, 12-13). 제자들에게 주어진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가 예수님 자신의 권세임을 우리는 막1:21-28, 32-34, 39; 3:11; 5:1-20 등에 기록된 사건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인간의 질병을 고치시는 능력 역시 예수님 자신의 능력이었다(1:29-34, 40-45; 2:1-12; 3:1-6,10; 5:21-43; 6:5).

열두 제자들은 바로 이런 예수님 자신의 권세와 능력을 갖고 나가서, 예수님께서 행하신대로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제자들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 쓰임 받은 종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나눠주신 것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철저한 기대와 신뢰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고린도후서(5:18-6:3)에서 언급하고 있는 화목케 하는 직책은 본래는 주님 자신의 사역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사역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대사(大使)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을 철저하게 의지하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의 사역을 지금도 여전히 계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제 본문의 각 절의 주해를 통하여 제자파송의 또 다른 교훈들을 찾아보면


1) 7절과 12,13절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과 함께 능력을 주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말씀은 애당초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에 대한 성취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막3:14-15).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친히 하시며, 인간은 단지 도구로써 활용될 뿐이다. 따라서 나 스스로 어떤 일을 한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큰 교만은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맡은 모든 이들을 내버려두거나 방관하시지 않고, 반드시 그 일을 감당할만한 넉넉한 힘과 능력과 권세를 주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나가서 예수님과 같은 메시지를 전파하였고, 또한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쳤던 것이다.


2) 8-9절은 전도여행의 금지목록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교훈이 담겨져 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인간적 수단과 방법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위하여 지방 전도여행의 필수품인 지팡이와 신 그리고 한 벌 옷 외에는 양식, 주머니, 전대의 돈, 여행 중 갈아입을 옷 등을 휴대하지 못하도록 주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인간적 노력 차원의 금욕주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신뢰하는 신앙적 차원의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 방법과 수단은 인간적 안목에서 볼 때, 대단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분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일 역시 초자연적인 일이기에,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만 하면 실패가 없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이 명령은 모든 제자들에게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살도록 부부하고 있다. 사실 이 말씀은 마가교회의 유랑 전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모든 제자들에게 검소하고 간소한 삶을 살라는 당부일 수 있다. 여행 중의 많은 짐은 불편을 초래할 뿐이다. 이 땅에 재물, 인기, 명예, 권력 등의 뿌리를 깊이 내리면 내릴수록, 우리는 이 땅을 떠나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자꾸만 버리는 연습을 익힘으로써, 이 땅에서의 여정을 쉽고도 가볍게 경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참고, 골3:1-3).


셋째로, 긴요한 필수품 이외에 다른 것들의 휴대를 금지시킨 주님의 명령의 또 다른 의미는 그만큼 복음전파가 매우 긴급함을 가리키는 것이다(참고, 눅9:57-62). 이런 복음전파의 긴박함에 대한 주님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좀더 넓게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 인생의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순위에 있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3) 10절은 복음전도자들의 바른 자세, 즉 복음전도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접대에 늘 만족해야할 것을 분부하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여행 중 어느 마을에 들어가 어떤 사람의 영접을 받아 숙소를 정하면, 제공하는 접대에 만족해하며, 그보다 더 좋은 조건과 대접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곳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계신다. 인간적 안목으로 판단하여 보다 나은 조건과 대접에만 눈을 돌릴 때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신뢰는 하나님만 철저하게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보장해 주신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불확실할 때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도”이다.


4) 11절은 복음전도가 거절되었을 때 제자들이 취해야할 태도를 보여준다.

전도 및 목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지라도 항상 성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무력하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는 자들의 믿음과 관련된 것이다. 즉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과 의무이나(딤후4:1-2), 그 결과는 듣는 자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될지라도, 이 세상 신, 즉 마귀로 인해 그 영안이 가리운 자들은 그 말씀에 제대로 반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11절은 사실 유대인들의 여행 관습 중 하나를 소개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여행 중 불가피하게 이방 마을을 지나치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대지방과 이방지방의 경계에서 의복 및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이방의 먼지로 인한 결례상의 부정을 씻고자 하였다. 이런 관습에 따른다면, 11절의 말씀은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결국 이방인들과 같이 간주될 수밖에 없고, 장차 그에 상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참고, 행13;51).


바로 이 기사 앞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나사렛 방문 기사에서 우리는 이런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막6:1-6).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말씀의 지혜와 주님의 권능에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치 않았다. 그 결과 예수님은 고향 마을에서 그 이상의 기적과 축복을 베풀기를 거절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혹 자신들이 전한 복음이 거절된다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자신들이 곧 주님을 대신하여 사역한다는 긍지를 갖고 늘 용기있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5) 30절은 제자들의 사역에 대한 보고를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전도사역을 마친 후 돌아와 그 모든 내용을 주님께 보고하였다. 우리들 역시 마침내는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사역에 대한 보고서를 주님 앞에 제출하게 될 날을 맞게 될 것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이러므로 우리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2);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기록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우리 인생과 사역에 대한 보고 및 평가를 회화적으로 잘 묘사해주고 있다. 심판대 앞에 선 양과 염소는 자신이 한 행위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낱낱이 기억하고 계셨다. 그 때, 그 마지막 날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는 오늘 제자로서의 우리 삶과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5. 영적 소경과 육적 소경(막8:22-38)


마가복음은 제자도의 견지에서 크게 세 단원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단원은 1장 1절부터 8장 21절까지로 제자도의 예비단계로 볼 수 있다. 이 첫 단원에는, 첫 번째 제자들의 부르심(1:16-20), 세리 레위의 부르심(2;13-14), 열두 제자의 선택(3:13-19), 그리고 열두 제자의 파송(6:7-14) 등의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8장 22절부터 10장 52절까지는 둘째 단원으로, 마가복음의 제자도와 관련하여 제자도의 주요교훈이 담겨있는 핵심부분에 해당한다. 마지막 셋째 단원은 11장부터 마가복음의 마지막까지이다. 여기서는 참 제자도의 모델 혹은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소개되고 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란 무서운 고난을 당하여서도 결코 굴복하거나 위협당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참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마가복음의 제자도의 핵심 부분의 시작에 해당하는 부문이므로, 우선 둘째 단원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단원은 두 번의 소경치유 사건이 처음과 나중에 위치하며 한 쌍을 이루고 있고, 그 사이에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예언(8:31; 9:31; 10:33-34)이 소개되고 있다. 본문은 바로 첫 번째 소경 치유사건인데,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마가만의 특별자료이다. 두 번째 사건은 10장 46-52절에 기록된 소경 바디메오의 치유사건으로 이 단원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소경 치유사건은 같은 속성의 기적이기에 외견상 비슷해 보이지만,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다. 첫째로, 8장의 소경은 두 단계를 거쳐 고침 받은 반면, 10장의 바디메오는 단번에 고침을 받아 눈을 뜨게 되었다. 둘째로, 8장의 소경은 고침 받은 후 주님을 따르도록 허락되지 않은 반면에, 10장의 바디메오는 눈을 뜨게 되자마자 가진 전 재산이었던 겉옷을 버리고 곧 길에서 주님을 좇았다. 셋째로, 8장의 소경은 예수님께서 친히 침을 뱉고 안수하여 고쳐주신 반면에, 10장의 소경은 단지 말씀으로만 고침 받게 되었다.


이러한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8장의 소경치유 사건은 특별히 독특한데, 그 이유는 소경이 두 단계를 거쳐 고침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사가 베드로의 신앙고백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이 사실상 영적 견지에서 볼 때 반쯤 눈을 뜬 반쪽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풀어 말하자면, 이 부분에서 마가는 육적 소경과 영적 소경(베드로)을 한 문맥 속에서 위치시킴으로 서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약 100년 동안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었던 유대 나라의 독립, 즉 이방 나라인 로마를 쳐부수고 영광스럽게 자상의 왕국을 세워줄 것을 기대하였던 것이다(참고, 요6:15; 행1:6; 마20:21; 막10:37).


그리하여 이런 민족주의적 기대를 따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로만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이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도록 분부하시고, 인자가 수난을 받을 것을 비로소 가르치셨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수난 예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었던 , 또 그렇게 믿고 있었던 유대인 베드로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이었으며,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항변을 하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게 된다. 베드로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참 신분과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도 반쪽 고백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소경의 육적인 어두움은 베드로의 영적인 어두움과 대비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소경의 육체적 어두움이 두 단계의 과정을 거쳐 치유되었던 것처럼, 베드로의 영적인 어두움, 곧 메시야의 진정한 사명에 대한 무지함 역시 두 단계의 과정을 거쳐 해결되어야 함을 본문은 대비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에 걸친 교육이 시행되는 동안,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교육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여전히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다8:32; 9:32; 10“35-45).

이것은 제자들이 여전히 고난 없는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8장 34-37절에서, 자신의 수난예언과 관련지어, 메시아요 제자들의 스승인 자신이 이런 고난을 받은 후 영광에 이르러야 하는 것처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같은 고난이 있을 것이며, 또 이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참다운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 번의 반복적인 교육이 끝난 후, 이제는 행동의 실천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둘째 단원의 마지막 기사로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 바로 소경 바디메오 사건이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두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고침받자마자 즉시 길에서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는 주님을 뒤따라가는 제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디메오는 예수님의 교육을 깨달아 실행에 옮기는 제자의 상징적 모습(모델)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첫째로, 영적 소경이 육적 소경보다 더욱 무섭고 더욱 불쌍하다.


본문에서 육적 소경은 치유를 통하여 논을 떴지만, 영적 소경인 베드로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오늘날도 육적 소경은 안구 이식 수술 등을 통하여 다시 시력을 회복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어두운 이들은 주님의 손이 닿기 전에는, 결코 그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 이런 진리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4장 4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중에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육적 소경은 금생에서만 소경일 분이다. 그러나 영적 소경은 내세에서도 영원무궁토록 소경으로 살아야만 하기에, 더욱 불쌍한 것이다.


둘째로, 왜 우리는 영적 소경으로 살아야 하는가?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처럼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이 가득할 때 우리는 영적인 어두움에 빠지는 영적 소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고난 없는 영광을 추구하고 있었다. 세속적 욕심은 우리의 영안을 어둡게 만든다.


게하시는 재물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은 두 달란트와 옷 몇 벌로 인해 영원히 문둥병자로 사는 저주를 받았다. 가룟 유다는 재물욕으로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가 되어 저주의 죽음을 맞게 되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재물욕에 눈이 어두워 성령을 속임으로 한날 부부가 모두 죽고 말았다. 삼손은 본능적 정욕에 이끌려 이방 여인들의 뒤를 쫓아 다니다가 마침내 들릴라에게 걸려 수모당한 끝에 죽음을 맞게 된다. 이들 모두는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욕망과 욕심으로 인해 영적 소경이 되었고, 그 결과 비참하게 하나뿐인 인생을 마감짓고 말았다.


셋째로, 어떻게 영적 소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항변하다가 도리어 주님께 책망을 듣게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신 후 34절부터 9잘 1절까지 제자도와 관련된 교훈을 제자들에게 베푸셨다.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가르치심으로써 그들의 어두운 영안을 열어주시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주님의 교육은 당장에는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으나, 결국 마가복음 전체를 볼 때, 제자들은 마침내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초대교회의 초기의 전승을 제시해주고 있는 16장 9절부터 20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던 것이다.



6, 무기력한 신앙생활의 극복(9:14-29)


마가복음의 제자도 주제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의 실패를 통하여 [무기력한 신앙생활의 극복]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오늘 본문 말씀의 사건들은 변화산 위와 아래에서 발생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오른 세 명의 특별 제자, 즉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변화산 위에서 실패하였고,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은 그 사이 변화산 아래에서 실패하였다.


첫 번째 수난예언과 그에 연결된 제자도의 조건 및 제자의 자격요건에 대한 설명 이후(8:27-38),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다. 그 때 그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바로 이전에 예수님께서 비로소 언급하신 수난예언을 까맣게 잊은 채,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지을 것을 제안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그 영광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 있기를 간구하였다. 마가복음 9장 6절에 의하면, 이 때 베드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고 했으니, 이 소원은 무의식 중에 토로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장 9절부터 13절에서 구약의 엘리야로서의 세례요한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연결시키면서, 다시금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하실 수난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셨던 것이다(9:9-13). 여기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되 자기에게 필요한 말씀만 듣고 나머지는 편리하게 잊어버린다든지, 아니면 자신에게 불리한, 또는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말씀은 의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항상 천국만을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성도를 경고하기 위해 지옥을 말씀하시고, 항상 축복을 약속하시지 않고,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저주를 말씀하시기도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명기 28장 1-14절은 순종으로 인한 축복을, 15-68절은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를 아울러 말씀하신다. 만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따라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선택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판하는 무서운 교만의 죄와 동시에 불순종의 죄를 짓게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선택하는 교만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무기력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구미에 맞든 안 맞든, 조건없이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산 아래 남은 아홉 제자들 역시 귀신 들린 소년 하나를 고치지 못하여 쩔쩔매고 있는 것이다. 14절에 의하면, 고치지 못하게 되니까 자신들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들은 서기관들과 더불어 불필요한 변론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무능함을 합리화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이런 자들은 사도 바울의 지적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인 것이다(딤후3:5).


일찍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느니라”(고전4:20)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믿음과 소망만이 아니라, 그 사랑의 수고와 그 믿음의 역사와 그 소망의 인내와 같은 구체적인 실천을 주목하여 보신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마가복음 3장 13-1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중 하나가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었고, 마가복음 6장 12-13절에 의하면, 그에 따라 실제로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나가서 주께서 주신 그 권세와 능력으로 많은 귀신을 내어쫓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홉 제자들이 귀신 하나를 놓고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한때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던 제자들이 지금 여기서 대단한 실패를 겪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첫째로, 제자들은 매일 새롭게 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한다.


제자들은 지난날의 경력과 경험만을 의지한 채 귀신을 내어 쫓으려다 실패함으로써, 주위의 뭇 사람들로부터 창피와 봉변을 당하는 수치를 맛보고 있다. 아홉 명의 제자들이 집단적으로 애를 쓰면서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권세는 결코 영원토록 우리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기적의 양식인 만나가 하루에 당일 분만이 허락되되, 그것을 저축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하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로부터 만나를 받아먹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매일매일 새롭게 만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교훈을 주님의 제자 베드로의 삶의 한 부분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했던 비겁자인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약 50여일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동을 일으켰던 그 유대인 무리들을 향하여 참으로 권능있는 설교를 선포하였다(행2:1-41). 그 결과 그 무리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하면서 회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갈라디아 2장 11-14절에서 스승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무리들을 향하여 담대히 말씀을 선포하던 베드로가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비겁하고 무기력한 베드로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같이 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올라와 안디옥에 당도하자, 율법을 어긴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 그 자리를 피함으로 이방인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베드로의 사람을 두려워하는 실수가 이와같은 무서운 위기를 가져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둘째로, 제자들은 기도 없이 하나님의 일에 착수하였다.


날마다 새로이 능력과 은혜를 받으려면 무엇보다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없이 귀신을 내어쫓으려 하였다가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쫓아내시고 난 뒤, 제자들은 자기들은 왜 쫓아내지 못했느냐고 질문했을 때, 주님은 기도가 열쇠라고 답하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결국 제자들은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면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 없이도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았던 제자들이 은연중 인간적 교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대신 인간 자신을 믿고 의지하겠다는 것으로 결국 불신앙과도 같은 것이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사실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변화산에 오르셨으며(9;28),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셨다. 주님은 세례 받으실 때에도 기도하셨고(눅3:21), 또한 열두 사도를 선택하기 전에는 밤이 맞도록 철야를 기도하셨다(눅6:12). 예수님은 유혹 역시 기도로 물리치시고, 결국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기도를 통하여 승리하게 되셨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참고, 막14:32-42).


바로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의 출처 및 기원이 기도에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시기에, 겟세마네에서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그 잔을 피하려 하신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인성의 전형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신성적 차원에서만 보려 한다면, 사실 기도란 주님께 불필요하였을 것이다.


마가복음 3장 14-15절에서, 그리고 6장 7절과 12-13절에서 본 것처럼, 사명을 감당할 능력은 주님께서 주시고, 그 주님의 능력을 받는 통로가 바로 기도인 것이다. 신앙은 결코 독립이나 자립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사람이요, 결국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자일 것이다. 바울 사도는 “무기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6:18),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말하면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였던 것이다(살전5:17-18).



셋째로, 제자들은 지난 날의 경험과 경력을 의지하였다.


제자들은 과거에 승리했기에 지금도 당연히 승리하리라고 착각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신앙의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사실이다. 통계적으로, 이론적으로 옳다하여, 그것이 내 개인에게도 반드시 적용된다고 말할 수 없다. 신앙이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성도는 오직 포도나무와 가지로써 줄기에 붙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태도가 이와 유사하다고 하겠다(수7:2-5). 물론 아이성 전투의 패배의 근본 요인은 한 사람 아간의 죄악이었다. 그러나 견고한 성 여리고를 물리친 후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정탐꾼이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 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수7:3). 즉 견고한 성 여리고를 격파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승리를 추억하며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도 않고 덤벼들었다가 보기좋게 대패하고 말았다. 신앙이란 절대로 과거 지향적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현재 속에서 우리를 만나실 것을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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