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이적들



예수님은 천지 만물에 대한 다윗의 주권을 보이사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주고자 이적을 많이 행하셨다.

이적이란 단순히 크고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로 진행되어 통상적 자연 질서를 잠시 중단하시고 인간 구원을 위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각 때에 필요한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표적이 되는 것만이 참 이적이다.


이처럼 신앙수립의 전제 조건으로 주어진 이적의 진의를 모르게 되면 단지 기복적 입장에서 이적을 위한 이적만을 요구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심지어 사단의 간계에 의한 사악한 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각 대상에 대한 당신의 주권을 확증시켜 주셨던 예수의 각 이적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적으로서의 예수님의 이적


김성수 목사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각종 이적과 기사는 성경 계시의 구속사적 성격상 표적적(表蹟的) 기사들입니다. 여기서 각종 이적과 기사들이 표적적이라 함은 각양의 이적들이 이적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적들이 한 가지로 지향하고 있는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계시적 목적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하신 첫 번째 이적인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요2:1-10)을 가리켜 단도직입적으로 표적이라고 못박아 기록합니다(11절). 이는 사도 요한의 관점에서 본(本) 이적사건이 표적(表蹟)인 이유를 이적 속에 담긴 궁극적 목적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적의 기원)과 '제자들의 믿음의 고양'(메시아의 정체성 시사)에다 성경 독자들의 관심을 돌리려 의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마태복음에서 두 소경을 눈뜨게 해 주신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마9:27-31). 본 사건은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사건에 뒤이어 기록된 내용입니다. 즉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을 떠나가실 때, 곧 이어 두 소경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뒤쫓습니다. 마태는 이들 두 소경의 등장을 소개하면서 저들이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라고 외치고 있음에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다분히 구속사적 배경을 가진 표현으로서 장차 참 다윗 왕으로 오셔서 외세(外勢)에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계시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삼하7:11-17, 사11:1-10, 렘23:5-6, 33:14-16, 겔37:25, 눅1:31-33). 사실상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호칭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더욱 두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다는 것은 그들이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예수님을 이미 메시아로 인식해 신앙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사건 때 여리고 성(城)의 기생 라합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창조자주와 구원주로서의 권능을 소문으로만 듣고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적한 신앙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나아가 이들 두 소경은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구약 선지서에 기록된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게 될 것"(사35:5-6)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틀림없이 성취될 것을 믿어 왔습니다. 이들이 이제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됐을 때, 예수님이야 말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당사자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마태는 예수님을 향한 두 소경의 치유를 소망하는 신앙 고백적 절규를 통해 명실상부하게 구약 언약의 성취자로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두 소경을 나아오게 하신 후 당신께서 저들의 눈을 고치실 수 있을지의 여부를 먼저 확인하십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의 치유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확답합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저들의 믿음의 진위 여부를 먼저 확인하시고자 한 예수님의 의도가 담긴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지 자신들의 시력장애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와진 방편으로서의 믿음인가, 아니면 보다 궁극적인 목적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신앙 고백하는 본질적인 믿음인가의 여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행하신 각종 치유사역에는 주된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치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대한 확고부동한 신앙심을 발휘시켜 메시아로서 믿게 하실 뿐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추구하는 것을 생명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친 백성을 삼으시기 위한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런 사실의 확인을 위해 치유사건에 앞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는 믿음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동일한 원리가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즉 이 시대에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자신의 일신상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의 제일 된 근본 목적과 본분으로 삼고 있는지의 여부를 통해 믿음의 진위여부가 가늠됩니다(마6:33, 전12:13). 이런 의미에서 참 된 성경적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깊이 접촉되는 데서부터 비로소 출발됩니다. 이후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관에 대해 보다 깊이 알아 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지식에서 자라가게 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보다 전폭적이고 적극적인 신뢰의 믿음을 쌓아가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 신앙의 성격과 방향성이 일신상의 행복과 현세적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나타나게 될 때, 이를 탐심으로 정의하는 한편 우상 숭배적 신앙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골3:5). 우상 숭배적 신앙은 그것의 겉모습과 행동이 제아무리 기독교적 경건과 거룩과 열심으로 치장됐다 할지라도, 그 내용적 의미와 성격이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며 현세 지향적인 것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불법적이며 불복종적으로 판정된다는 것이 성경의 준엄한 선언입니다(마7:21-23, 롬10:2-3). 이는 단지 정죄 당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과 진노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됩니다(골3:6, 요5:28-29, 계20:11-15). 그렇습니다. 신앙은 결코 일신상의 삶의 질을 높이는 종교적 수단이 아닙니다. 종교적 문화활동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킴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의 제일 된 목적적 삶을 지향하는 창조적 본의(창1:26, 전12:13, 고전10:31)에로의 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소경의 믿음을 확인하신 후 저들의 믿음에 근거해서 소경 된 것을 고쳐 주십니다. 이제 이들은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 근거해 귀로만 들어 믿어왔던 메시아를 눈으로 직접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과 감사로 흥분돼 있는 저들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시면서 이 사실을 소문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당부를 앞서 문둥병자를 고쳐 주셨을 때(마8:4)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셨을 때(막5:43, 눅8:56)도 동일하게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위에서도 살펴 본대로 치유사역 속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구속사적 의미로서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증거보다는 인간의 연약성으로 인해 이적 자체만을 중시 여겨 의존하는 신비주의적 신앙풍조가 형성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이들을 추앙하는 유대인들의 시기심을 조장하여 당신의 복음사역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예상됐기 때문입니다. 당시로서는 아직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말입니다(요2:4).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이며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1-2).아니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훨씬 구원의 날이 가까웠습니다(롬13:11). 재림의 날이 임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이미 십자가상에서 온전히 성취돼 그 대속적 공효가 세계 만방에 전파되며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시기입니다(마28:18-20, 막16:15-16, 행1:8).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부단히 증거해야 할 때입니다(딤후4:2).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를 남김없이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눅19:10). 우리를 먼저 구원하셔서 제자를 삼아 주시고 여전히 오늘도 세상에 존재케 하심으로 일면 전도자의 책임을 온전히 담당케 하실 뿐 아니라,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세세 무궁토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두 소경 또한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통해 자신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과 위엄을 억제할 수 없어서 나아가 온 지역에 전파합니다(마9:31). 복음의 성격이 이렇습니다. 천상적 생명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며 출산하는 본능적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요1:40-46, 행11:19-21). 


이 적

장 소

특 징

성 구

문둥병자

갈릴리 지방

병자를 향한 주님의 연민이 강조됨

마 8:2,3; 막 1:40-42; 눅 5:2,13

백부장 하인

가버나움

이방인의 믿음이 두드러짐

마 8:5-13; 눅 7:1-10

베드로 장모의 열병

가버나움

베드로의 장모가 치유된 직후 예수님 일행을 섬김

마 8:14,15; 막 1:30, 31; 눅 4:38,39

중풍병자 치유

가버나움

친구들의 믿음과 우정, 열정이 강조되고 주님의 죄 사하시는 능력이 강조된

마 9:2-7; 막 2:3-12; 눅 5:18-25

혈루병 앓는 여자

가버나움

예수를 향한 여인의 간절한 심정 강조됨

마 9:20-22; 막 5:25-29; 눅 8:43-48

두 소경

가버나움

자신의 믿음대로 치유받음

마 9:27-31

한 편 손 마른 자

갈릴리 회당

안식일 논쟁을 야기시킴

마 12:10-13; 막 3:1-5; 눅 6:6-10

바디매오와 다른 한 소경

여리고

끈질긴 요청으로 치유받음

마 20:29-34; 막10:46-52; 눅 18:35-43

귀먹고 벙어리 된 자

갈릴리 호수 근방

치유과정에서 예수님의 친밀한 동작이 두드러짐

마 15:29-31; 막 7:31-37

벳새다의 소경

벳새다

두 번 안수하여 고치심

막 8:22-26

고창병 든 자

-

바리새인의 집에서 안식일에 치유하심

눅 14:1-6

열 문둥병자 치유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치유된 자 중 한명만 예수님께 돌아와 사례함

눅 17:11-19

귀잘린 말고

겟세마네 동산

원수까지도 고쳐주심

눅 22:50,51

왕의 신하의 아들

가나

보지 않고도 말씀으로만 고쳐주심

요 4:46-54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

예루살렘

오래된 질병도 단숨에 고치심

요 5:1-9

나면서 소경된 자

예루살렘

나면서 된 병자도 고치심

요 9:1-41

정신적

질환

취유

축사

(逐邪)

두 귀신들린 자

거라사(가다라)

돼지떼 몰사 사건이 뒤따라 일어남

마 8:28-34; 막 5:1-15; 눅 8:27-35

귀신들린 벙어리

가버나움

바리새인들의 비방을 받음

마 9:32-34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

갈리리 지방

바리새인들의 비방을받음

마 12:22; 눅 11:14

가나안 여자의 딸

두로

이방인도 치유해 주심

마 15:21-27; 막 7:24-30

간질하는 소년

변화산 근방

아비의 믿음을 보고 치유해 주심

마 17:14-18; 막 9:17-29; 눅 9:38-43

회당의 귀신들린 자

가버나움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봄

막 23:26; 눅 4:33-35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여인

-

18년된 귀신을 단숨에 쫓으심

눅 13:11-13

자연

현상에

대한

이적

풍랑을 잔잔케 하심

갈릴리 호수

자연에 대한 제어 능력

마 8:23-27; 막 4:37-41; 눅 8:22-25

오천 명을 먹이심

갈릴리 호숫가

이적의 능력과 사랑의 조화

마 14:15-21; 막 6:35-44; 눅 9:12-17; 요 6:5-13

물 위를 걸으심

갈릴리 호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심

마 14:25; 막 6:48-51; 요 6:19-21

사천 명을 먹이심

갈릴리 호수

이적의 능력과 사랑의 조화

마 14:25; 막 6:48-51

물고기 입속에서 돈을 꺼냄

가버나움

제자들에게 전지 전능성을 입증하심

마 17:24-27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심

예루살렘

심판의 능력이 암시됨

마 21:18-22; 막 11:12-26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심

갈릴리 호수

주 안에서만 삶의 풍요가 있음이 보여짐

눅 5:1-1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가나

예수님의 처음 이적으로 인생에게 기쁨 주시기를 원하심이 강조됨

요 2:1-11

부활 후 많은 물고기 잡게 하심

갈릴리 호수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한 이적임

요 21:1-11

사망

극복

야이로의 딸

가버나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심

마 9:18-25; 막 5:22-42; 눅 8:41-56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나인

살리시는 능력이 두드러짐

눅 7:11-15

나사로

베다니

죄인에 대한 사랑이 두드러짐

요 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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